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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불법의 요체 (02) -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화엄행 2011. 10. 9. 05:33

 

원통불법의 요체 (02)

제1장 수증의 제문제

제1절 5. 돈점(頓漸)

제1절 6. 견성(見性)

제1절 7. 견도(見道)

제1절 8. 오(悟)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5. 돈점(頓漸)



頓 漸

師謂衆曰 法本一宗 人有南北 法卽一種 見有遲疾 何名頓漸 法無頓漸 人有利鈍 故名頓漸

- 壇經-


그러면 단경(壇經)에는 점수(漸修)라는 말이 없는 것인가? 단경에도 있습니다. 다만 돈오점수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의미로 봐서는 분명히 있습니다.

단경에서 6조 대사가 대중을 위해서 말씀하시기를 “법()은 본래 하나의 종지(宗旨)이지만, 다만 사람의 근기 따라서 남북이 있을 뿐이다” 고 하였습니다. 법은 본래 종지가 하나고 평등 무차별의 진여불성자리 하나지만 다만 사람의 근기와 선근 따라서 잘나고 못나고 어리석고 총명하고의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법은 본래 하나의 성품이지만, 보는 견해에 따라서 더딤과 빠름이 있다. 그러니 무엇이 돈()이고 무엇이 점()인가?” 무엇이 문득 아는 것이고 또는 점차 아는 것인가? “원래 법에 있어서는 돈법과 점법이 없으나, 사람의 근기에는 날카로움과 둔함이 있다. 고로, 돈과 점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볼 때는 6조 혜능 스님도 분명히 돈점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 말씀이나 6조 혜능 스님 말씀이나 말 표현에 지나치게 걸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대의(大義)를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돈점에 대해서 능엄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頓漸

理卽頓悟 事非頓除 乘悟倂消 因次第而盡

 -楞嚴經-


능엄경(楞嚴經)은 선수(禪髓)라고도 합니다. 이른바 선법(禪法)의 골수란 뜻이지요. 공부하는 분들이 점차로 닦는다든가 장애를 없앤다든가 하는 것은 능엄경을 참고로 하면 별로 헤매지 않습니다. 그러나 능엄경 같은 선에 관한, 여러 가지 점차 수증에 관한 중요한 말씀을 무시해 버리면 공부할 때에 방황도 많이 하고 또는 그릇 해석도 할 수가 있습니다.

   

능엄경에 있기를 “리즉돈오(理卽頓悟)라” 우주의 본체적인 원리는 문득 깨닫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불교를 교리적으로 공부할 때는 리()와 사()를 구분하여 생각해야 하겠지요. 리사가 무애(無碍)라, 원래 둘이 아니겠지만 중생차원에서 볼 때는 본질적인 리()와 또는 현상적인 문제는 사()인데 “사비돈제(事非頓除)라” 현상적인 상대 유한적인 그런 문제는 문득 제거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승오병소(乘悟倂消)라” 깨달음에 편승해서, 마치 바다를 건널 때 배를 타고 가야 건널 수가 있듯이 깨달음에 편승해서 닦아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차제이진(因次第而盡)이라” 차제에 따라서 다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조사어록이나 또는 선지식들 말씀을 들을 때는 그 말씀을 경직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조사 스님들 말씀들은 으레 노파심절에서 우리 중생들이 그때그때 어떤 문제에 막혀 있는가? 무슨 문제에 고민하는가에 따라서 간절히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점수(漸修)에 치우쳐서 자꾸만 계급을 따지고 고하, 심천을 가리는 사람들한테는 돈오돈수로써 마땅히 분별을 쳐부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본래가 부처인데 닦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분들한테는 점차로 닦아 나가는 점수를 역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느끼고서 법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6. 견성(見性)


   

다음에는 견성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견성을 단경(壇經)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見 性

若悟自性 亦不立菩提涅槃 亦不立解脫知見 無一法可得 方能建立萬法 若 解此意 亦名佛身 亦名菩提涅槃 亦名解脫知見 見性之立亦得 不立亦得 無滯無碍 應用隨作 應語隨答 普見化身 不離自性 卽得自在 神通遊戱三昧 是名見性

 -壇經-


“만일 자성(自性)을 깨달으면, 보리(菩提) 열반(涅槃)이란 것도 세울 수가 없고” 모두가 하나의 평등 무차별의 진여불성 세계인데 보리고 열반이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도 할 필요도 없고 어느 법이라고 특별히 내세울 필요도 없고 진실로 일체 만법을 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해석할 때에는, 바로 그것이 부처의 몸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한 법()도 세울 수가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자리, 보리고 열반이고 해탈지견이고 또는 무슨 법이고 만법이고 이것이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거니 어느 것도 세울 것이 없는 이것을 우리가 이대로 해석할 때는 이것이 바로 부처의 몸이고, 부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보리고 열반이고 해탈지견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견성한 자리에는 어느 것도 가히 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조금도 막힘이 없고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하는 짓 모두가 다 걸림이 없이 여법히 행동하고 또한 누가 물으면 조금도 걸림 없이 척척 진리에 맞게 대답하고 또한 두루 화신을 나투어 상대적인 몸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자성을 떠나지 않고, 즉득자재 신통유희 삼매(卽得自在 神通遊戱 三昧)라” 모두가 다 조금도 조작(造作)이 없는 이른바 임운등등 등등임운(任運騰騰 騰騰任運)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 조작(造作)이란 말과 임운(任運)이라는 상대적인 말을 기억해 두면 편리합니다. 우리 중생이 애쓰고 하는 것을 조작이라 하고, 깨달은 분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걸림이 없는 자리를 임운이라 합니다.

깨달은 분상에서는 그야말로 참, 임운등등 등등임운이라, 당당하지마는 조금도 막힘이 없고 누구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달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석가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증오(證悟)를 했다 하더라도 불성(佛性)만 깨달았을 뿐인 것이지 때묻어 있는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습기까지는 다 못녹였다는 그런 점은 또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시명견성(是名見性)이라, 이것이 바로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세울 것도 없고 고하, 시비도 없는 임운등등 등등임운으로 신통유희 삼매라, 이것이 참다운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견성에도 견성한 그 자리, 근기 따라서 천차만별입니다. 그러기에 또 문제가 복잡합니다. 생각을 깊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세존(世尊)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견성하실 때에 모든 것을 다 깨달은 구경각(究竟覺)을 그대로 성취를 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심심미묘(甚深微妙)해서 부처님 깨달음까지도 시비를 거는 분이 있습니다. “수하성도(樹下成道)하신 부처님 깨달음도 아직 완전무결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산에 있는 총림방중(叢林房中)에 다시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는 진귀조사(眞歸祖師)한테 법을 물어서 비로소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학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골치가 아픈 문제 입니다.

또 이런 학설이 지금까지도 우리 한국승가(韓國僧伽)에서는 상당히 권위 있게 흘러오고 있습니다. 지금 전거(典據)로는 사굴산(奢堀山) 개조(開祖)인 범일(梵日 810-889) 대사가 이런 말씀을 했다고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1293 高麗天 著)에 나와 있습니다. 중국이나 또는 인도에는 없는 그런 학설이 한국 승가에서는 상당히 권위 있게 전수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조 말엽에 백파(白坡 1767-1852) 스님 같은 분은 이 학설을 굉장히 권위 있는 학설로 인용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 학설을 우리는 하나의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중국에나 인도에서도 전거가 없는 것을 한국에서 비로소 발설했다는 것이 나쁜 쪽으로 비판이 안되고 상징적으로 좋게 해석이 되겠지요.


아무튼, 깨달음도 여러 차이가 있습니다. 갑이란 사람 깨달음 또는 을이란 사람 깨달음이 물론, 평등 무차별의 불성 자리는 똑같으나 얼마만치 습기를 많이 녹이고 깨달았던가의 차이입니다.

깨닫는 문제의 심천(深淺)은 역시, 가장 권위 있는 전거로는 화엄경의 십지(十地)론으로, 보살 초지부터서 2지 3, 4지 10지에 올라가서 구경각 불지(佛地)에서 성불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깨닫는 것이 근기 따라서 보살 초지만 깨닫는 분도 있고 또는 2지를 깨닫는 분도 있고 또 하나 3, 4지까지 깨닫는 분도 있고,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견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다 말았습니다만 이제는 견도(見道)라, 이것도 역시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견성, 견도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도 조사어록에는 조금 달리 나와있다 하더라도, 뜻을 깊이깊이 본질적으로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문자란 것이, 착()해버리면 큰 병이 되지만 착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술술 다 풀려가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임운자득(任運自得)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7.견도(見道)



見 道

根本佛敎에는 四善根의 最上位인 世第一法의 無間에 無漏의 慧를 得하여 聖諦를 現觀함을 말함.

-解深密經, 智度論, 唯識論, 俱舍論等-


   

견도(見道)에 대해서는 해심밀경 또는 지도론, 유식론, 구사론 등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지도론은 용수(龍樹 Nagarjuna B.C. 2-3世紀) 보살 소조(所造)인 대지도론으로 대론(大論)이라고 하지요. 유식론, 구사론은 세친(世親 Vasubandhu 4-5世紀頃)보살이 지으셨는데 이런 데서 견도에 대한 말씀이 여러 군데 나와 있습니다.

   

근본불교에서는 사선근(四善根)의 최상위를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고 합니다. 4선근에 대해서는 점차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만, 4선근은 우리 범부가 견도할 때까지 가는 과정을 구분해서 사가행(四加行) 또는 4선근이라 합니다. 이것도 역시 공부인들은 꼭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문제입니다. 4선근의 최상위는 세속적인 차원에서는 제일 높다는 법이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고 합니다.

   

세제일법의 무간(無間)에, 세제일법과 견도자리 곧, 깨달은 자리하고 사이가 없는 그런 순간 찰나의 자리에 무루(無漏)의 혜()를 득하여, 때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성체(聖諦)를 현관(現觀)함을 말합니다. 성체는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성체는 바로 여래, 도(), 또는 열반, 다 같은 뜻이 됩니다. 현관이란 그냥 이치로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진여 불성 곧 생명의 실상을 현전에서 보고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이치로 느껴서, 물리(物理)를 알아서 “아 그렇구나” 하고 의심없이 아는 것은 해오(解悟)라고 하는 것이고, 성체를 현전에서 분명히 깨닫는 것은 현관(現觀)이라 합니다.

곧 4선근의 가장 윗자리인 세제일법에서 그 찰나에 때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성체를 현전에 깨닫는 것이 견도라고 근본불교에서는 말하는 것입니다.



見道…大乘에서는 見道를 菩薩初地로 하고 此地를 得함을 菩薩이 正性離生에 入한다고 한다. 能히 無漏智를 得하여 法界에 達하고 如來家에 生하며 一切萬法이 一味平等한 心性임을 得함. 密敎에서는 三妄執을 여의고 無漏의 淨菩提心이 生하여 出世의 功德을 成就함을 말한다.

-大乘義章


대승(大乘)에서는 견도(見道)를 화엄경의 십지(十地)에서 나온 보살 초지(初地)로 하고, 이 초지를 얻음을 보살이 정성리생(正性離生)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정성(正性)은 곧 우주의 본성으로 정성이나 성성(聖性)이나 같이 쓰입니다. 리생(離生)이란 이생(異生)인 범부를 떠난다는 말입니다. 우리 범부를 가리켜서 이생(異生)이라 합니다. 범부는 바로 못보기 때문에 달리 본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분이 볼 때는 여법(如法)히 달리 보지 않기 때문에 여설(如說)이라, 진리 그대로 말하고 모두가 하나의 진리, 평등무차별인데 우리 중생은 그렇게 못보기 때문에 이생이라 합니다.

따라서, 견성하는 것이 바로 정성(正性) 곧 성인 성품을 얻음과 동시에 우리 범부의 이생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범부성(凡夫性)이 남아 있으면 참다운 견성이 못되겠지요.

   

이 자리는 능히 무루지(無漏智)를, 번뇌에 때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법계(法界)에 달()하고, 법계라 하면 한계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천지 우주가 조금도 무차별인 세계입니다. 이런 법계에 달하고 여래가(如來家)에 생하며, 삼세제불의 경계에 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래(如來)라고 할 때에 우리 환경과 이른바 기세간(器世間)과 여래와 구분하여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불법(佛法)에서는 환경도 바로 생명자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환경도 바로 부처님 자체입니다. 불법은 모두를 다 부처님 생명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일체가 부처님 생명 아님이 없는 불법(佛法)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래가에 생한다고 할 때는 환경 따로 있고 세계 따로 있고 부처님 따로 있는데, 부처님들 세계에 가서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인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다 부처뿐이기에 그 부처의 경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여래가에 생하여 일체 만법이 일미평등한, 오직 한 맛의 평등한 심성(心性)임을 득()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견도(見道)입니다.

   

밀교(密敎)에서는 견도를 어떻게 말했는가 하면 “삼망집(三妄執)을 여의고 무루의 정보리심(淨菩提心)이 생하여 출세(出世)의 공덕을 성취함” 이라고 했습니다. 내나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에 따르는 집착을 여의고 때묻지 않은 청정한 보리심을 생하여 출세의 공덕 즉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三界)를 떠난 공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훑어본다 하더라도 견성하고 견도하고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경에 있는 견성자리와 해심밀경, 지도론 또는 유식론, 구사론에 나와있는 견도라는 자리에서 얻는 성공덕이 차이가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선() 따로 있고 교() 따로 있다고 봐서는 안됩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불법입니다. 다만, 본체를 보다 더 역설하기 위해서, 행주좌와에 본체를 안 여의기 위해서 선()이 있는 것이고 우리 중생들이 아직은 미혹되어 있기 때문에 상()도 해설하고 점차(漸次)도 말하는 데서 일반적인 경()의 의의가 있다 하더라도 견도를 말하지 않고 견성을 말하지 않으면은 불법이 안됩니다.

   

또는 화엄경을 설하고 또는 법화경을 설하고 또는 지도론을 설하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견성을 잘 몰랐겠습니까? 견성과 견도는, 우리가 문자(文字)에 집착하지 않는 한에서는, 조사법이 더 높고 불법은 아래라는 허튼 분별을 않는 경우에서는 똑같습니다.  

  

아, 제 말씀이 너무나 딱딱해서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육서(六瑞)라, 여섯 가지로 상서로운 조짐을 보인 것입니다. 지동서(地動瑞)라, 천지가 육종(六種)으로 진동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부처님 경전 가운데 나온 이런 신비로운 말씀을 많이 하니까 더러는 별로 안 좋게 듣는 분도 계십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 불성(佛性) 가운데는 분명히 무량공덕(無量功德)이 갖춰 있는 것인데, 제 스스로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나 제가 지금까지 얻은 것은 별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한탄하는 의미와 또는 한사코 꼭 부처님의 무량공덕과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다 얻어야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불법의 위신력을 말할 뿐입니다.

아무튼 지동서라, 천지 우주가 6종으로 진동한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그냥 상징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사실로 저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화서(雨華瑞)라, 천상의 모든 천인들이 무량대법을 찬탄하는 의미에서 꽃비를 내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삼계(三界)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욕계가 있듯이 색계도 분명히 존재하고 무색계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더러는 불교를 믿는 분 또는 출가사문들 가운데서도 “색계나 무색계나 그런 것은 다 방편으로 내놓은 것이요, 모두가 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분명히 마음속에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상적인 차원에서도 몽환포영(夢幻泡影)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본체(本體)는 공()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꿈 같이 그림자 같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몸더러 꿈이요 허깨비같이 허망한 것이라고 할 때는 상당히 거부반응을 느낍니다. 그러나 산이나 내나 금이나 다이아몬드나 그런 것이 꿈이요 허깨비라고 말할 때는 자기 존재처럼 거부 반응을 별로 느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대상도 자기 주관도 모두가 다 본래에서 볼 때는 다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상적인 가상(假相)이 없지는 않습니다. 연()에 따르면 상()이 나오는 것이고, 가상이 나타나 있다 하더라도 상() 그대로 공중무상(空中無相)이라 상이 실상이 아니라 가상인 것입니다.


아무튼, 부처님께서 대법을 설하실 때는 분명히 천중들이 만다라화(曼陀羅華 mandarava)ㆍ마하만다라화(摩詞曼陀羅華)ㆍ만수사화(曼殊沙華manjusaka)ㆍ마하만수사화(摩詞曼殊沙華)라, 이것이 사종천화(四種天華)라 하여 법화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 찬란한 하늘 꽃을 뿌린다는 말입니다.

또 심희서(心喜瑞)라, 대중이 그런 상서를 보고 모두 환희 용약한다는 것 입니다. 부처님 지혜는 그냥 부처님만 알거나 또는 천안통(天眼通)을 통한 사람만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까지도 보고 알게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주위 환경을 변하게 하는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회상(會上)에 모인 중생들이 천지가 6종으로 진동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장엄스런 것을 훤히 볼 때에 환희심이 안 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심희서(心喜瑞)입니다.

   

다음 방광서(放光瑞)라, 삼천대천 세계 곧 우주 전체가 비추는 광명을 낸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실 때의 여섯 가지 상서 가운데 몇가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럴 때에는 일반 대중들이 싫증을 내겠습니까, 또는 지루했겠습니까.

이렇게 딱딱한 원리의 말만 하면 참 따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강사(講師)도 아니고 강원 문전도 안 가본 사람인데 이렇게 부처님 경론을 말할 때는 굉장히 주제넘기도 하지요. 제가 한문, 원문을 풀이하는데 더러 오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를 볼 때에 그 뜻이 그 뜻이니까 그런대로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8. 오()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깨달음도 그냥 한 깨달음으로 일률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심천(深淺)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2지(二地)에 깨닫는 분, 3지에 깨닫는 분 등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법문을 한다 하더라도, 물론 원리 문제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겠습니다만, 약간의 그 뉘앙스(nuance)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오()문제, 깨닫는 문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 解悟...四善根位에서 如實知解를 頓悟함(似悟)..............凡夫位

     |

悟  |        ┌見 道...見性..................................菩薩初歡喜地 ┐ 聖

    └ 證悟  | 修 道...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地를 次第修證함 │

               └無學道...妙學..................................................┘ 位


頓悟漸修 ┌ 解悟後 證悟를 爲한 漸修

             └ 證悟(見道) 後 成佛을 爲한 漸修


   

저는 근본불교(根本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다른 것으로 안 봅니다. 가사, 아함경(阿含經)도 그 당시 구사종(俱舍宗)이나 경량종(經量宗)이라 하는 종파로 굳어 버릴 때는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아함경 자체에서는 설사 말씀을 다 안했다 하더라도 분명히 대승적인 근본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더러는 소승법(小乘法)의 범주에 속하는 구사론도 말씀하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오()는 심천으로 보아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로 말합니다. 해오(解悟)는 4선근위(四善根位)에서 깨닫는 깨달음인데 4선근은 주로 근본불교에 나와 있으나 대승불교에서도 언급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일반 선종(禪宗) 계통에서는 별로 언급을 않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은 선()과 교()가 원래 둘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선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과 마음이 둘일 수가 없듯이, 선과 교도 둘이 아니라고 보는 견지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근기 따라서 그때그때 수기응량(隨器應量)이라, 깊고 옅은 차이는 있지 않겠습니까.

   

해오(解悟)는 사선근위(四善根位)에서 여실지해(如實知解)를 돈오(頓悟)함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지해(知解)는 반야 지혜(智慧)가 아니고 그냥 범부지견(凡夫知見)이라는 말인 셈입니다. 범부의 지견으로 해서 돈오함이라, 돈오라는 말을 여기에서도 씁니다. 돈오의 말도 깊고 옅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사오(似悟)입니다. 즉 참다운 깨달음은 못되는 상사각(相似覺)이라, 각에 닮은 각인 것이지 본래 본각(本覺)자리를 여실히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범부위(凡夫位)입니다. 성자지위가 못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못되겠지만 물리를 알아서 불변수연(不變隨緣)이라, 원래 변치않는 본체의 자리, 인연 따라서 변하는 수연자리 또는 성상(性相)이라, 성품자리 현상자리 또는 체용(體用)이라, 본체자리 활용자리, 이런 것에 대해서 막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현대말로 하면 상대(相對)나 절대(絶對)나 그런 것에 관해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리사무애(理事無碍)도 알고 사사무애(事事無碍)도 알고 법의 해석은 별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오도 역시, 그냥 경()만 봐서는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 사람 선근에 달려 있겠습니다만 같은 경을 본다 하더라도 참선을 한 사람이면 해오를 빨리 얻습니다. 경을 많이 봤다 하더라도 마음이 어느 정도 선정(禪定)에 들어 있지 못한분들은 해오를 못합니다. 해오를 했을 때는 어느 경전을 보든지 문자만 좀 알면 “아 그렇구나” 하고 짐작이 되어 교상(敎相)면에서는 걸림이 없는 자리입니다. 이런 단계가 이른바 해오입니다.

   

그리고 증오(證悟)는 체험적으로 진여불성 자리를 현관(現觀)해서 깨닫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견도할 때, 선종(禪宗)식으로 말하면 갓 견성할 때에, 초견성이라고도 합니다. 초견성이란 말도 선가(禪家)에서도 내려왔습니다. 그 자리가 견도의 자리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견성과 견도가 절대로 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견성은 조사 것이니까 더 높고 견도는 불경 말씀이니까 낮다는 그런 견해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견도했다고 구경지(究竟地)까지 다 이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수도(修道)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도는 바로 견성이고, 보살 십지(十地)로 말하면 보살 초환희지(初歡喜地)입니다. 보살 초환희지에 대해서도 나중에 보다 자세히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환희심도 여러 가지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오욕락(五欲樂)에 대해서 너무나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만, 출가사문은 이 환희심에 대해서 깊게 음미를 해야 합니다. 오욕락은 참다운 환희심은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바세계 중생을 바로 보면 일체개고(一切皆苦)라, 삼계개고(三界皆苦)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바로 고해 아닙니까, 바로 못 보는데서, 중생 경계에서 안락을 느끼는 것이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몸뚱이를 훑어보거나 환경을 보나 또는 사람을 사귀어 보나 그런 자리에서 정말로 환희로움, 불멸(不滅)한, 멸치 않는 기쁨을 못 느낍니다. 아무리 친한 분도 배신도 있고, 그렇게 좋아해서 만난 분도 서로 원수가 되어서 헤어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도 몸 밖에나 안에나 좋은 것이 어디가 있습니까? 삼십육물(三十六物)이라, 침, 오줌, 똥, 눈꼽 등 더러운 것이 뭉쳐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을 보더라도 욕계의 범주 내에서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초환희지도 다른 말로 하면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 범부 이생(異生)을 떠나서, 결국은 욕계를 떠남으로 해서 참답게 느끼는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초환희지까지 갈 때에도, 초환희지가 미처 못되어도 이른바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법을 알아들음으로 해서 기쁨을 느끼고 또는 참선을 함으로 해서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경안(輕安)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닦으면 응당 필연적으로 경안이라, 꼭 틀림없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계행도 바르고 자기 몸도 깨끗하고 여법(如法)한 법을 가지고 공부할 때는 틀림없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열락(禪悅樂)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더 증장되어서 정작, 욕계 번뇌를 떠나고 자기의 본 성품을 깨달아 오직 일미평등한 진여의 자리를 얻을 때는 환희심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환희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도인들이나 환희지를 얻을 때는 환희심이 사무쳐 가누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摩詞迦葉 Mahakasyapa)도 환희지를 성취할 때는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초지에서 2지에 올라가고 3지, 4지, 5지, 6지, 7지, 8지, 9지, 10지를 거쳐서 결국은 불지(佛地)로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기 따라서, 우리 세존같이 환희지를 성취하시자 마자 그냥 불지로 마구 구경성취를 하신 분도 계신 것이고 또는 2지 3지를 뛰어넘는 분도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비약적으로 뛰어넘는 것은 돈초(頓超)라고 하고 또는 2지 3지를 뛰어넘는 것은 간초(間超)라고 합니다. 보통 근기는 2지 3지 그와 같이 순서 있게 올라 가겠지요. 그러나 게으름 부리면은 초지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더 못 가고 말아 버립니다.

   

이런 데서, 자비심이 많은 도인과 지혜가 더 수승한 도인의 차별이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지증(智增)보살이라, 지혜가 더 수승한 보살들은 “본래 중생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공부, 선정을 닦는 데만 주력을 다하고 또 자비심이 많은 분들은 선인후기(先人後己)라, 남을 먼저 앞세우고 자기가 뒤에 갑니다. “본래가 둘이 아닌 것인데 중생들이 법을 몰라서 고생하는 것이니까 꼭 중생들을 안락세계(安樂世界)로, 안양세계(安養世界)로 인도 해야겠구나” 하고 초환희지만 성취해도 더 안 가버립니다. 이분들은 비증(悲增)보살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출가사문들은 마땅히 금생에 꼭 환희지를 성취하여야겠지요. 그리고는 자기 자비심을 점검하여서 환희지에 머물러도 도인이고 2, 3지에 올라가도 도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견성하고 구경성취한 묘각(妙覺) 자리는 다시 더 배울 것이 없으니까 무학도(無學道)라 합니다. 이렇게, 같은 깨달음도 해오와 증오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제가 그 암증선(暗證禪), 암중모색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견성오도(見性悟道)라든가 견성에 대해서 확실한 것을 잘 모르는 분들은 잘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선정에 들어서 초환희지까지, 견성까지 미처 못간다 하더라도 굉장히 기쁜 것을 많이 느낍니다. 자기 몸도 그냥 텅 비어 버려서 자기 몸이 어디에 있는가 느낄 수도 없고, 몸이 공중에 들떠 아무런 부담도 무게도 안 느끼고, 더러는 훤히 밝은 광명이 빛나고, 부처님이 훤히 나타나 보이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계가 다 견성이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해오만 되어도 “아 그렇구나, 모든 것은 본래가 둘이 아니구나” 하여 몸도 마음도 가뿐하고 기분이 참 쾌적해서 비할 수 없는 느낌을 갖는 분들은 “내가 지금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깨달았다는 만심(慢心) 때문에 더 이상 공부를 안 해버리는 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증상만(增上慢)입니다.

   

이런 것을 점검할 때는 “과연 저 사람한테 욕심이 다 떠났는가, 저 사람한테 진심(瞋心)이 조금도 안 보이는가, 칼을 가지고 저 사람의 목을 애매하니 찌른다 하더라도 조금도 동요가 없을 것인가” 이렇게 점검해 볼 때는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오로 다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오를 하고 다 됐다고 할 때는 대망어(大妄語)죄에 해당합니다. 승려 자격을 박탈 당하는 것입니다. 비증(非證)을 증()으로 하고 못 깨달음(未悟)를 깨달았다() 할 때는 4바라이죄(四波羅夷罪)라, 바로 승려 자격을 빼앗기는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자기나 남이나 암중모색하는 것을 깊이깊이 경계해야 합니다.

   

따라서, 해오한 다음에는 증오를 위한 점수(漸修)가 분명히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보살 초지(初地)에서 견도하고, 견성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각이 아니기 때문에 성불을 위해서 또 점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해오한 뒤에는 필연적으로 증오를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하고, 또한 증오한 뒤에도, 증오 자체가 세존같이 정각(正覺) 자리를 다 원만하게 성취했다고 생각할 때는 모르거니와, 마땅히 성불(成佛)을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오한 다음에 점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특수한 사람에 한하는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나, 증오한 다음에 닦는 법은 앞서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점차, 고하 또는 계급, 차별을 논하지 않고서 닦는 무념수(無念修),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어야 합니다. 염오부득(染汚不得)이라, 오염하면 참다운 선()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하는 분들은 꼭 무염오수행을 해야 합니다.



今頓見者 已是多生漸熏而發現也 檀經云 法無頓漸 頓漸在機者 誠哉此理

 -都序- 


다음은 도서(都序)에 있는 말씀인데, “이제 문득 깨달은 자는 이미 다생겁래에 점차로 닦아옴이 있어서 금생에 발현(發現)하는 것이라,” 지금 돈오를 했다 하더라도 금방 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점차 닦아온 공덕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선근이 깊으면 영운(靈雲800년대 위산?山弟子) 대사같이 복숭아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또는 동산(洞山 807-869)스님같이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고 깨닫기도 하겠지만, 모두가 다 과거에 닦아 나온 과보인 것입니다.

“단경에서 말하기를 법은 본래 돈과 점이 없으나 돈점은 그 근기에 있다는 이 이치가 진실로 귀중하고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돈오점수에 대해서 바로 해석을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