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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불법의 요체 (03) - 제2장 교상(敎相)과 수행론(修行論)의 변천

화엄행 2011. 10. 9. 05:50

원통불법의 요체 (03)

제1장 수증의 제문제

제1절 9.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제1절 10. 결어(結語)

 

제2장 교상과 수행론의 변천

제1절 1. 근본불교

제1절 2. 근본불교의 경론

제2절 1. 제법의 분류

제2절 2. 이종세간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9.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기독교 신학(神學)도 역시 중세기에는 이른바 번쇄철학(煩鎖哲學)이라, 번쇄하게 흘러 갔습니다. 사실 깨달음이란 것은 이렇게 복잡할 것도 아닌 것이고, 문자나 또는 우리의 지혜 이른바, 분별시비하는 알음알이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인데 한 체계를 세울려고 하면 아주 무미건조하고 난해하게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도 역시 수법행(隨法行)이라 하여 하나의 고정적인 법에 따라서 하는 방식도 있고 또는 수신행(隨信行)이라 하여 믿음 따라서 하는 수행 방법도 있습니다. 믿음 따라서 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참 간단 명료합니다. 그러나 따지기 좋아하고 또는 이론적인 체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믿음 따라서 하는 것이 별로 신()이 안 갑니다.

   

우리 인간성 자체가 심리학(心理學)적으로 지() 정() 의() 3요소가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너무 지적(知的)으로 치우치면 정적(情的)인 면이 소외를 받는 것이고 또 정적인 면에 치우치면 지적인 면이 그만치 미흡을 느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서 정혜균등(定慧均等)으로 공부를 해나가도록 합시다.


저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달마 때부터서 6조 혜능까지의 순선시대(純禪時代)에 역점을 두고서 자료도 추렸습니다. 순선시대에 의빙(依憑)하여 공부하는 것이, 현대적인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 있어서, 보다 올바른 판단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삼매의 이름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달마 스님으로부터 6조 혜능 스님까지의 순선시대에 일관되게 말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달마 스님의 이입사행(二入四行)외에 다른 법문은 지금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가사, 관심론(觀心論)같은 것도 그 전에는 달마 관심론이라고 배웠습니다만 근래에 돈황(敦煌 Tunhuang)문서가 발굴된 뒤부터는 신수(神秀) 대사의 저작이라는 고증(考證)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증 자체가 다시 또 번복될는지 모르니까 아주 확정적인 것은 아니겠지요. 하여튼 무슨 사건이든 몇 십년만 지나도 바꿔지기도 하는데 하물며, 벌써 천년 세월이 경과할 때는 여러 가지로 오류도 많이 생기고 와전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달마스님의 법문을 말할 때는 중요한 것으로 누구나가 이입사행을 꼭 들고 있습니다.

   

또는 4조 도신(道信 580-651) 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 있습니다. 아주 고구정녕(苦口정녕)하니, “어떻게 참선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도 세밀히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여기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 있고 또는 5조 홍인(弘忍 602-675)스님의 수심요론(修心要論)에도 마찬가지로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조 스님도 돈오돈수만 말씀했다고 간단하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는 그렇지 않습니다. 6조 스님 단경의 부촉품(付囑品)에, 부촉품은 어떤 경전이나 후인들한테 부탁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포괄된 대의를 싣는 것인데, 여기에도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있습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는 간단하게 말하면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똑같은 뜻입니다. 일상삼매는 혜()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6조 스님의 단경 법문을 보겠습니다.



一相三昧와 一行三昧

師復曰 汝等 若欲成就種智 須達一相三昧一行三昧 若於一切處而不住相 於彼相中 不生憎愛 亦無取捨 不念利益成壤等事 安閑恬靜 虛融澹泊 此名一相三昧 若於一切處 行住坐臥 純一直心 不動道場 眞成淨土 此名一行三昧 若人具二三昧 如地有種 含藏長養 成熟其實 一相一行 亦復如是 我今說法 猶如時雨 普潤大地 汝等佛性 譬諸種子 遇玆첩洽 悉得發生 承吾旨者 決獲菩提 依吾行者 定證妙果 聽吾偈曰 心地含諸種 普雨悉皆萌 頓悟花情已 菩提果自性

-壇經 第十付囑流通-


   

육조단경의 제 10 부촉품인 부촉유통분에, 6조께서 다시 또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종지(種智)를 성취할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달()할지니라” 종지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말합니다. 부처님 지혜는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가 있는데, 근본지는 견성할 때에 일체존재의 진여불성 자리를 깨닫는 것이고, 후득지란 근본지를 성취한 뒤에 종종 차별의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다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종지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체종지입니다. “그대들이 만약 모든 종종의 반야 지혜를 얻을려고 하면 마땅히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달()할지니라” 고 6조 스님께서 가장 마지막에, 결론장에다가 부촉하신 뜻을 이 한 구절로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일체처에 처하더라도 상에 머물지 않고, 현상적인 여러 가지 상황, 상중(相中)에 있다 하더라도,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신심명(信心銘)에도 있는 법문 아닙니까마는 원체 법이란 평등하고 조금도 어려운 것이 없는 것인데, 괜히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때문에 번뇌가 생기고 오염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취하고 버리지 말 것이며, 이익이 있다든가 이익이 없다든가 또는 성취가 된다든가 허물어진다든가 하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그저 편안하고 고요하고 안온한 것과, 허융담박(虛融澹泊)이라, 조금도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아주 깨끗하게 밝아지는 경계가 일상삼매라” 고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것에 대해서 상()을 물론 내지 않아야 하겠지마는 현실적인 생활에서 상을 또 안 낼 수가 없겠지요. 설사 우리가 상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좋다 궂다든가 취사(取捨)라든가 또는 성취한다든가 실패한다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을 두지 말고서 항시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제법이 공한 자리, 반야 지혜를 여의지 않고서 담박하고 안온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른바 일상삼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일상삼매는 한 말로 말씀드리면 천지 우주가 오직 조금도 차이 없는 하나의 진리 자리가 이른바 일상삼매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차만별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일상삼매가 못됩니다. 모든 존재를 진여불성 하나의 자리로, 만법을 귀일(歸一)을 시켜버려야 이른바 일상삼매가 됩니다.


“또한 만약 일체처에, 다니나 머무르나 또는 앉으나 누우나 간에 순일직심(純一直心)이 부동도량(不動道場)이면 진실로 정토(淨土)를 이루니라,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말한다.”

순일직심은 일상삼매를 확신하는 순수한 하나의 곧은 마음이요, 도량이라 할 때는 근본적인 본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일한 직심이 근본적인 체를, 도량을 여의지 않으면 진실로 정토를 이루니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일상삼매를 닦아서, 행주좌와에서 본체를 안 여읠 때는 현실 그대로 정토를 성취한다는 말이요 이것이 바로 일행삼매라는 말입니다.


“만약 사람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갖추는 것은 마치 땅에다 종자를 뿌리면 대지가 종자를 머금어서 오랫동안 잘 기르고 익혀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일상삼매나 일행삼매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불종자(佛種子)를 마음밭에다 심어 놓고 오랫동안 가꾸고 거두어서 상도 안 내고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인 일상삼매의 자리를 안 여읜다면, 종자가 땅에 떨어져서 잘 관리하면 열매를 맺듯이 우리 마음도 역시 우리 마음 자리에다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두고서 오랫동안 닦아나갈 때는 일체종지를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설법하는 것은 마치 때에 알맞게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대들의 불성도 비유하면 종자가 비를 만나 충분히 습기나 윤택을 받고 모두 다 싹이 나오듯이 내가 말한 일상삼매 일행삼매의 뜻을 받드는 자는 결정코 진여보리(眞如菩提)를 성취하고, 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자는 진실로 부처님의 묘한 과보를 성취한다” 그리고,

“나의 게송을 들으라, 심지함제종(心地含諸種)하니, 마음밭에 모든 종자를 머금어서, 보우실개맹(普雨悉皆萌)이라. 두루 비에 적셔 빠짐없이 싹을 낸다. 돈오화정이(頓悟花情已)하니, 문득 이런 뜻을 깨달아서 들뜬 범부의 망정이 이미 다하면, 보리과자성(菩提果自成)이라, 보리 열매가 저절로 성취가 된다” 하였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간략하나마 문헌적으로 돈오점수와 관계된 것에 관해서 인용을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것이 정곡을 찌른 합당한 결어(結語)가 못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들께서 재량하시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10. 결어 (結語)

   

위에서 引用한 經論에서 밝힌 바, 法에는 本來 頓漸이 없고 根機의 利鈍으로 頓漸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修證에도 深淺이 있는 것이니 頓悟漸修라 하여 誤謬일 수 없고, 無染汚修行을 力說하는 意味에서의 頓修이니 頓悟頓修가 그릇됨이 아니며, 다만 先悟後修의 隨機說法일 뿐이다.


   

위에서 인용한 경론에서 밝힌 바, 법에는 본래 돈점(頓漸)이 없습니다. 다만 근기가 날카롭고 둔함으로 돈점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닦고 증하는 수증(修證)에도 깊고 옅은 심천(深淺)이 있는 것이니 돈오점수라 하여 그릇됨이 될 수가 없고, 점차나 차서나 고하를 논하지 않는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을 역설하는 의미에서의 돈수이니 돈오돈수가 그릇됨이 아니며, 다만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수기설법 (隨機說法)일 뿐입니다.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것은 불조(佛祖)의 통설(通說)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무슨 큰일을 할 때는 이론적인 체계가 먼저 앞서야 하겠지요. 그래야 여러 가지 거기에 따르는 합리적인 행동을 취할 수가 있듯이 공부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이해를 해야 올바른 수행(修行)을 할 수가 있습니다.


“경()은 필요가 없다,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敎外別傅)이라” 하여 문자와 분별을 여의고 실참실구(實參實究)로 정진을 할 때도 먼저 공부 방법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가 확립 되어야 바른 신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닦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는 것인데, “나한테는 어떤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것도 역시 자기 나름대로 확신이 서야 용기 있는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항시 의심하는 가운데서는 용기가 안 나옵니다.

의심은 다만 제일의제(第一義諦), 본래적인,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의심해서 참구(參究)하는 것이지 그 외의 상대적인 의심은 우리 공부에 아무런 도움이 못됩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는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여 모두를 다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화엄경에도 보십시요. 일진법계(一眞法界) 현상을 그렇게 소상히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부처님 말씀이 다 필요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고 또는 역대조사 스님들이 모두가 다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논장(論藏)을 지어 고구정녕으로 체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휴지같이 버릴 것이 아니라 차용해 가지고 스스로 자기 공부하는 길을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서 선오후수(先悟後修)란, 먼저 견성오도를 다 해가지고 닦는다는 의미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혜지(乾慧智)로 깨닫는 해오(解悟)를 먼저 해놓고서 닦아야 흐트러짐이 없이 바로 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삼세제불의 정설입니다.

석존께서 유성출가(踰城出家)하여 설산에서 닦을 때는 선오후수가 못되었겠지요. 그때는, 6사외도(六師外道)를 방문해서 별별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더러는 발가바(Bhargava) 외도한테 가서 고행(苦行)법도 배운 것이고 또는 아라다 카라마(Arada Kalama)한테 가서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 올라가는 선정도 배운 것이고 또는 우다카 라마푸타(Udraka-Ramaputta) 한테 가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삼계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선법도 배웠으나 모두가 다 참다운 깨달음에 이르는 법이 아니었기에, 그들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석가모니 전에 정말로 명안종사(明眼宗師)가 있어서 “그대는 어떻게 공부해야 한다”고 했을 때는 6년 고행이 다 걸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석존께서는 선수후오(先修後悟)라, 먼저 닦고 나중에 깨닫는 공부 방식인 것이고, 석존 뒤에는 석존께서 모든 방법을 다 분명히 밝혀 놓으신지라 그 말씀 따라서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됩니다.

선오후수는 각 경론의 정설이기 때문에 돈오돈수나 돈오점수 모두가 다 선오후수라는 자리에서, 즉 말하자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법문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6조 스님의 돈오돈수에 대한 말씀도 깨달은 뒤에 닦을 필요가 없다는 돈수가 아니라 깨달아서 자타(自他) 시비(是非)의 차별이나 높고 낮고 깊고 옅음 등의 분별심은 끊어졌으나 아직 번뇌의 습기는 남아 있기 때문에, 분별시비에 집착하지 않는 무념수행(無念修行) 곧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돈오돈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곧, 단경에서 “그대들이 만약 일체종지를 성취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달()해야 하느니라” 는 말씀이나 남악회양 선사와의 거량에서 “닦음과 증득함이 없지 않으나 염오하지 않는 것 즉, 차별과 시비를 두지 않고 상에 걸리지 않는 것” 이란 대답에 6조 스님께서는 “이 염오하지 않는 수행은 모든 부처가 보호하고 긍정하는 바요. 그대도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 고 한 말씀에서 그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돈오점수라는 개념도 중국의 징관(澄觀 ?-839) 스님이 비로소 사용했다고 하나 종밀(宗密 780-841) 스님도 말씀하였고,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경론의 뜻이 대체로 돈오점수의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고,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설도 이미 6조 스님의 돈오돈수설을 수용한 불교 일반의 수증론(修證論)이라 생각됩니다.

나아가 돈오돈수가 성불(成佛)일 것인가? 하는 문제도, 대소경론에서 말씀한 묘각성불(妙覺成佛)이란 삼명육통(三明六通)과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갖춘 불가사의한 무량공덕을 원만히 성취하였다고 하는데, 단박에 물론 깨달았다고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겠습니까? 부처님 이후 얼마만의 선지식들이 이러한 원만성불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인가? 이러한 점도 생각해 볼 일입니다.

   

또한 깨달음이 해오(解悟)가 되었거나 증오(證悟)가 되었거나 지극히 수승한 근기가 아닌 보통 근기로는 깨달음이 바로 구경각(究竟覺)인 묘각 성불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음에도 심천이 있으며, 깨달은 뒤에도 습기를 착실히 닦아야 한다는 돈오점수설이 그릇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돈오돈수설이나 돈오점수설이나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취지는 동일하고, 중생 교화의 배경이나 시절 인연에 따라서 말씀하신 수기설법(隨機說法)으로 어떠한 것도 그르다고 비판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닦음도 올바른 닦음이 되고 성불에 이르는 첩경(捷徑)이 되는 것입니다.  

 

 제2장 교상(敎相)과 수행론(修行論)의 변천

제1절 근본불교(根本佛敎)의 교상변천(敎相變遷)  

1. 근본불교(根本佛敎原始佛敎)



               上座部十二派 ┐(佛滅後 一百年頃)

   原始佛敎 │                        │ 部派佛敎

                  └ 大衆部八   派 ┘

               ┌ 說一切有部 ┐(佛滅後 四百年頃)

   上座部  ├ 經   量   部 印度內發展

               └ 分別上座部 南方諸國發展

   大衆部…大乘佛敎發展的 解消


   

대체로 우리 출가사문들은 근본불교도 다 공부를 하였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이번 기회에 근본불교의 체계를 한번 재확인하기 위해서 아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근본불교는 바로 원시불교를 가리켜서 말합니다. 원시불교는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구분하는데 상좌부에는 12파가 있고 대중부에는 8파가 있어서 20부파가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불멸(佛滅) 후, 부처님께서 열반 들으신 후 약 100년경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부파로 나눠졌다고 해서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은 인천(人天)의 도사(導師)가 되셨지마는 열반에 드신 후에는 중생 근기가 하열(下劣)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의견을 세워서 이와 같이 부파가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옛날도 그랬는데 하물며 현대는 더욱 더 복잡다단한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때묻지 않은 반야 지혜로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인적으로도 공부가 더디고 또는 종단적으로도 여러 문제가 발생되는 것은 그런 도리를 잘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도리에서 볼 때에는 모두가 헛된 일이 대부분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자기한테나 남한테나 문중한테나 종단에게나 국가적으로나 아무런 필요가 없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참다운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분명히 잘 몰라서 그러는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 출가사문들은 그런 것을 명심해서 현상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참다운 지혜를 꼭 갖추어야 합니다.

   

사실, 저는 감탄한 것이 그리이스 종교나 철학이나 더듬어 볼 때에 그 모두가 약간의 표현은 다르다 하더라도 거의 다 같은 요지입니다. 플라톤(platon 427-347 B.C.)의 태양과 동굴의 비유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태양은 참다운 철인들의 바른 지혜로 비유되고 동굴은 바른 지혜를 모르고서 감각적인 것에만 구속된 생각, 미망(迷妄)에 허덕임을 의미합니다. 태양 광선같은 바른 지혜가 범부의 눈에는 안 보입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위시해서 삽삼조사가 고구정녕으로 분명히 밝히셨고 또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이스 철인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582?-5OO? B.C.)나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495?-435? B.C.)나 또는 헤라클레토스(Herakleitos 390?-3IO? B.C.)나 모두가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다 같은 도리로, 요지는 세속적인 것을 초월해서 참다운 본체인 근본적인 진리로 돌아가 도덕적 행위를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범부인 한에는 지금 동굴에 있습니다. 아닌 것을 옳다하며 감각적인 것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내 몸뚱이가 대체로 무엇이며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것이 실지로 있지가 않습니다.

   

근대 철학, 이른바 실존철학의 비조(鼻祖)라고 볼 수 있는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 1813-1855)도 감각적인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이 하도 마음에 내켜서 가끔 인용합니다만, 우리 중생들은 지금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무엇인가?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상적인 모든 것이 사실로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범부가 볼 때는 명명백백하게 있지만, 성자의 바른 반야로 볼 때는 또 역시 명명백백하게 비어 있는 것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하지 않고서 속물을 미처 못떠날 때는 결국은 지금 동굴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소모를 하는 아집(我執)이 있고 법집(法執)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400년경에 상좌부는 다시 설일체유부(說-切有部)와 경량부(經量部)로 구분되었습니다.


설일체유부는 내가 비었다는 아공(我空)은 말씀하지만, 오온(五蘊)이나 모든 법은 그대로 있다[法有]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른바 유()적인데 치우쳐 있고 논장(論藏)을 주로 합니다.

경량부는 부처님 경전을 주로 하고 유()적인 주장을 조금 덜하고 공()쪽에다 역점을 두는 차이가 있는데 모두 인도 내에서 발전되었습니다.

분별상좌부(分別上座部)는 지금의 스리랑카나 또는 태국 등 남방제국으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중부(大衆部)가 나올 때는 계율상 문제 해석의 차이 때문에 대중부가 나왔습니다. 어느 때나 보수와 혁신이 있듯이 그 당시 불교계에도 보수와 혁신이 있어서 보수파는 상좌부고 혁신파는 대중부 입니다. 대중부는 계율론에서도 역시 보다 더 관용적이고 융통성 있는 해석을 했었습니다. 따라서 이 대중부는 나중에 대승불교로 발달을 했습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나아갑시다. 

 

제2장 교상(敎相)과 수행론(修行論)의 변천

제1절 근본불교(根本佛敎)의 교상변천(敎相變遷) 

2. 근본불교(根本佛敎)의 경론(經論)



經傳四阿含經, 南傳으로는 五尼柯耶

      1. 長阿含經…22

      2. 中阿含經…60

      3. 雜阿含經…50

      4. 增一阿含經…51

論部六足論, 發智身論, 大毘婆娑論, 俱舍論


위의 六足論이나 發智身論四阿含經敎說을 다 各各  自己 나름대로의 佛敎觀을 어떤 部分的에서 또는 綜合的見地에서 組織하고 體系化한 것이다.


   

그리고 근본불교 경론은 어떠한 것인가? 근본불교 경전은 부처님의 육성이라 할 수 있는 아함경으로서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의 4아함경 입니다. 아함경은 참선을 하시더라도, 해제 때라도, 꼭 한번씩 정성껏 보시기 바랍니다. 역시 부처님의 육성 같은 것을 사무치게 절감할 수가 있습니다.

아함경에는 “그대들이 조그마한 그릇된 행동에도 세심하게 주의해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 즉 다시 말하면 철저한 계행을 지키면서,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면 그때는 초선(初禪)에 들어가고 2선, 3선, 4선에 들어가고 그리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서, 아()를 멸진하고 아라한도를 성취한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라한도를 말하면 소승(小乘)이라고 너무나 쉽게 부정해 버립니다만 사실은 대승 소승 관계가 그렇게 절연(截然)히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설일체유부나 경량부나 한 종파가 되었을 때는 부처님의 대승사상을 제한도 하고 그릇된 해석도 많이 했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경 자체는 그렇게 큰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함경 가운데도 표현적으로 말씀을 다 안 했다 하더라도 대승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 있습니다. 우리 불교 사상 가운데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ㆍ사제(四諦)ㆍ팔정도(八正道)의 원리가 안 들어 있는 것이 있습니까?

   

논부(論部)에 있어서는 육족론(六足論)이라, 육족론은 여섯 종류의 논장입니다. 사리불(Sariputra)이 저술하고 또는 목건련(Maudgalyayana), 대가전연(Mahakatyayana), 제바설마(Devaksema), 바수밀다(Vasumitra)존자 등이 저술한 가장 기본적인 어록이지요.

사리불 존자나 또는 목건련이나 위대한 성자 아니겠습니까? 또한 부처님을 평생 모신 분인데, 소승이라고 함부로 과소평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발지신론(發智身論)은 육족론의 중요한 점을 따서 정리한 논장이고,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은 그 뒤에 결집할 때 발지론을 해석한 논장입니다. 육족론이나 발지신론은 4아함경의 교설을 다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불교관을 어떤 부분적인 면에서 또는 종합적인 견지에서 조직하고 체계화 한 것입니다.

구사론(俱舍論)은 나중에 세친(世親)대사가 상좌부 계통의 모든 논서의 내용을 취사 절충하여 정리한 총론적인 논서입니다. 이런 것이 논부에 해당합니다. 

 

 제2장 교상(敎相)과 수행론(修行論)의 변천  

제2절 근본불교(根本佛敎)의 교리요강(敎理要綱)


佛敎原始部派小乘大乘막론하고 一貫된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人生宇宙構造를 밝히는 理論哲學敎相門人間幸福解脫實踐哲學觀心門이다.


   

근본불교의 교리 요강도 우리가 알아두면 대승불교 체계를 세울 때나 자기 공부를 점검할 때도 필요한 대문이 많이 있습니다.

불교는 원시ㆍ부파ㆍ소승ㆍ대승을 막론하고 일관된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인생과 우주의 구조를 밝히는 이론 철학인 교상문(敎相門)과 또는 인간의 행복과 해탈을 위한 실천 철학인 관심문(觀心門)입니다. 불교는 크게 나누면 결국은 이론과 실천인 교상문과 관심문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무슨 종()이라 하면 그 종파는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자기들 종지에 따라 비판해서 한 체계를 세우는 것이 교상문입니다. 그리고 정작 해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체계를 세운다 하더라도 해탈하는 법문이 없으면 안되겠지요. 그래서 해탈하는 법문이 이른바 실천 철학인 관심문인 것입니다.



1. 제법(諸法)의 분류(分類)


人生宇宙의 모든 것을 一切諸法이라 하며 이를 因緣生滅에 따른 有爲法因緣生滅을 여읜 無爲法으로 大別한다. 그리고 有爲諸法具體的으로 分類하여 五蘊 十二處() 十八界라 하고, 보다 具體的分類五位七十五法이라 한다.


인생과 우주의 모든 것을 일체제법(一切諸法)이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는 제법의 분류법이 있습니다.

먼저 제법(諸法)을 인연생멸(因緣生滅)에 따른 유위법(有爲法)과 인연생멸을 여읜 무위법 (無爲法)으로 대별합니다.

다 아는 문제지만 일차 한 체계를 언급하니까 이런 법문을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유위의 제법을 구체적으로 분류하여 5온 12처(12입)ㆍ18계라 하고 보다 구체적인 분류를 5위 75법이라 합니다.

   

여러분이 5온ㆍ12처ㆍ18계는 다 아는 것이니까 생략을 하고 보다 구체적인 5위 75법만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나중에 더 발전되어서 유식(唯識)에서는 5위 100법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100법이라 하더라도 내나야 5위 75법을 보다 구체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법은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나뉘는데, 유위법은 상대 유한적인 법이고 무위법은 상대 유한적인 상을 여읜 무위 적멸의 법이라는 말입니다. 유위법은 72가지가 있고 무위법은 3가지가 있습니다.

   

유위법 즉 상대 유한적인 법에는 색법(色法)ㆍ심왕법(心王法)ㆍ심소유법(心所有法)ㆍ심부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 있습니다. 심왕법은 이것은 우리 마음의 주체요, 심소유법은 마음의 주체에 따라서, 주체의 용()으로 이루어지는 법으로 심왕이 소유하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심부상응행법은 심법도 색법도 아닌 법이 심부상응행법 입니다.

색법은 열하나인데 5근()인 안ㆍ이ㆍ비ㆍ설ㆍ신과 5경()인 색ㆍ성ㆍ향ㆍ미ㆍ촉 그리고 무표색입니다. 무표색(無表色)은 인간의 안목에는 볼 수 없는 미묘한 능력을 갖는, 표현되지 않는 색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오계(五戒)를 받으면 5계를 받았다는 보이는 흔적은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몸이나 마음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훈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계체(戒體)라고 하는데 이런 것이 무표색에 해당합니다. 우리 인간의 안목에는 안 보이지만 하나의 능력 있는 에너지로 존재하는 그런 것이 무표색이라는 말입니다.

   

심왕법은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인 6식()이고, 심소유법 가운데 대지법(大地法)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감수〔〕하고 상상〔〕하고 사고〔〕하고 촉감〔)하고 욕〔〕심을 내고, 지혜 분별〔〕하고 또는 생각〔〕하고 뭘 하겠다는 의욕〔作意〕을 내고 보다 더 분명한 해석 〔勝解〕을 하고 마음을 한군데 모으는 삼마지(三摩地)인 것입니다.

   

다음 대선지법(大善地法)은 우리가 착한 일 할 때, 착한 마음은 항시 대선지법이 근본이 됩니다. 이것은 믿음〔〕과 부지런함〔〕과 자()ㆍ타()에 부끄러워하는 것〔·〕, 또는 무슨 일에 대해 허망한 것이거니 하고 집착 않는 것〔〕 탐심을 안 내고〔無貪〕, 진심을 안 내고〔無瞋〕 남을 해롭히지 않고〔不害〕, 몸도 마음도 가벼워서 모든 것을 능히 해낼 수 있는 감당하는 능력인 경안(經安)이 있곤 그리고 불방일(不放逸)이라, 흐트러져서 긴장을 풀고 아무렇게나. 무질서한 행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공부 정진으로 경안을 얻은 사람들은 별로 피로를 못 느낍니다. 설사 무리해서 피로해도 조금 쉬면 바로 풀려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참선하는 공덕이니까 꼭 참선을 해서 한사코 경안은 얻어야 합니다.

   

다음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이라, 모든 번뇌는 이 대번뇌지법에 근거해서 이루어집니다. 진리를 모르는 무명(無明), 방종하는 방일(放逸), 게으름 부리는 해태(懈怠), 진리에 대해서 믿음이 없으며 남을 못믿는 불신(不信), 꾸벅꾸벅 조는 혼침(혼沈), 분별시비하는 도거 (掉擧)입니다.

그리고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입니다. 우리는 대불선지법에 대해서 특히 주목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쁜 행동을 할 때는 대불선지법이 근거가 됩니다. 이른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남한테 욕을 하고도 마음에 가책도 안 받고 파계무참(破戒無慙)한 일을 한 뒤에도 “이런 것은 다 허망하지 않는가, 원래가 상이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체에서는 허망하다 하더라도 한번 업을 지어놓으면 그것이 업 종자가 됩니다. 따라서 그놈을 뗄려면 우리 스스로 굉장한 수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도 금생에 나와서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도 그거 아닙니까? 자기 스스로 반성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남한테 대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무참(無慙) 무괴(無愧)를 명심해서 불선지법(不善地法), 불선지 행동은 안 해야 합니다.

   

다음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이라, 대번뇌지법에 대해서 정도가 조금 더 미약한 것이지요. 분노〔忿〕하고 숨기고〔〕 인색하고〔〕 질투〔〕하고 괴로워〔〕하고 해〔〕치려 하고 한〔〕을 품고 아첨〔〕하고 속이고〔〕 교만〔〕을 부리고, 이런 것이 모두가 번뇌니까 한번 일으키면 업으로 남고 견성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 부정지법(不定地法)이라. 별로 좋지 않은 일을 하고[惡作〕 졸리고〔睡眠〕 거치른 분별〔〕, 미세한 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참선할 때는 심사(尋伺)를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나야 참선 할 때 가장 골치 아픈 것이 분별시비 아니겠습니까, 분별시비를 떠나버려야 삼매에 듭니다. 심사가 없어야 삼매에 듭니다. 그리고 공부하다 보면 거치른 분별〔〕은 좀 떠났다 하더라도 미세한 분별〔〕은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선정 가운데서 2선정에 들어가야 심사(尋伺)가 끊어집니다. 그때는 말도 별로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분별하고 “좋다 궂다 네가 있고 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말이 나오는 것이지 모든 분별이 없어져 버리면 말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탐심〔〕 진심〔〕 아만심〔〕 의심〔〕이 부정지법 입니다.

의심 가운데 상대유한적인 것을 의심하는 의심은 우리한테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맨처음에 문제 제기한 바와 같이 “습마물 임마래 (什麽物 恁麽來)라, 나〔〕란 대체로 무엇인가? 우주란 또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의심해야 참다운 의심인 동시에 이른바 화두인 것입니다. 똥 마른 막대기〔乾屎橛〕가 화두가 되는 것도 본질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 심부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 있습니다. 심부상응행법은 얻는〔〕 것 또는 얻지 못하는〔非得〕 것, 명근(命根)이라, 우리가 한번 인연 따라서 인간 존재가 되면 명근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수명 같은 것입니다. 동분(同分)이라, 같은 동류요, 무상정(無想定), 무상과(無想果)라, 무상정에 들면 무상과가 나옵니다.

색계 4선천(四禪天) 가운데 무상천인데, 모든 생각을 조금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도 구분을 잘 못하면 무상천에서 아무 생각도 안 하니까 이것이 해탈이라고 합니다마는 해탈이 못되는 것입니다. 다만 분별시비하는 번뇌만 좀 끊어져서 겉으로 생각이 안 나는 것이지 미세한 망상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잠재의식의 저변에 번뇌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무상정은 삼계(三界) 안에 있어, 번뇌를 다 끊은 것이 아닌 아직은 범부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취할 바가 아니나 인도 당시의 외도들은 무상천, 무상정 정도를 열반이라고 그르게 생각하였습니다. 열반이란 말은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다른 외도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반은 삼계를 해탈하는 열반이 못되는 것입니다.

무상정은 무상천에 들어가는 하나의 선정입니다. 무상정에 들어가면 응당 필연적으로 무상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다음 멸진정(滅盡定)입니다. 우리 공부하는 분들은 멸진정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멸진정을 성취해야 이른바 누진통(漏盡通)이 되고, 누진통을 해야 비로소 참다운 도인입니다. 문자 그대로 번뇌를 다 멸해버리는 것이 멸진정 입니다. 이른바 아상ㆍ법상을 다 끊어 없애버리는 것이 멸진정이기 때문에 성자와 범부의 분수령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멸진정을 발득(發得) 해야 이른바 선정해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통은 지혜해탈만 하고서 지혜로는 모르는 것 없이 다 알지마는 멸진정에서 선정해탈을 미처 못하면 삼명육통(三明六通) 등 초인적인 힘을 못내는 것입니다.

마땅히 멸진정은 우리가 어느 때라도 꼭 들어가야 합니다. 게으르면 금생에 못 들어가고 말런지 모르겠지마는 꼭 들어가야 참다운 성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쉬운 것이 아니란 것을 깊이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설산동자가 설산에서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이란 두 귀절 때문에 자기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전을 볼 때에 깊은 생각에 잠겨야 합니다. 생멸이 멸이하면 참다운 해탈경계, 해탈을 즐거움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멸이(滅已)라는 것은 번뇌가 다 멸한 자리 아닙니까? 번뇌가 멸한 자리를 증명할 때는 그냥 그렇게 쉽게 그렁저렁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뚱이, 나라는 관념, 이것을 어느 때라도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멸멸이 적멸위락의 참 뜻입니다. 그래서 싯달타 전의 설산동자(雪山童子)는 호리도 주저없이 몸을 버린 공덕으로 12겁을 초월해서 성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불할 것인가? 우리가 성불을 않고 배겨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꼭 성불되어야 합니다. 이 몸뚱이를 불교에서는 원가(怨家)라, 원수라고 합니다. 몸뚱이 집착 때문에 성불을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생멸멸이라는 그 귀중한 언구 가운데 자기를 몽땅 바쳤다는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설산동자가 나찰신한테 자기 몸뚱이를 잠시의 주저와 회한이 없이 던짐으로 해서, 12겁을 초월해서 성불했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수행정진에 비장한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살타왕자가 새끼 범들을 낳고서 굶주린 어미 범한테 자기 몸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범에게 가까이 가서 몸을 드러누워도 그 자비로운 위신력 때문에 범이 차마 먹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내 몸뚱이를 죽여서 바쳐야겠구나” 생각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땅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러나 제석천이 그냥 받들었습니다. 정말 위대한 인물들은 무량 천신과 호법신이 지키기 때문에 물에 빠뜨려도 빠지지 않고 불에 태워도 타지 않습니다. 인연이 되어야 가는 것이지 인연이 안되면 갈려고 해도 못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대꼬챙이로 자기 목을 찔러서 피를 내어 흘리며 가까이 가니 그때는 뭐라 해도 짐승이니까 피 냄새를 맡고는 피를 핥아 먹고 몸을 다 먹어서 뼈만 남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11겁을 앞당겨 성불했습니다.

   

금생에 우리가 할 길은 성불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지가 않습니다. 오직 외길, 한 길 뿐입니다.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앞으로도 못가고 뒤로도 못갑니다. 오직 초월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범부를 초월하여 성자의 길 밖에는 없습니다. 못 간다고 할 때에는 속체 가운데서, 속물 가운데서 헤매다 윤회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 다음 만물이 생()하고 머물다〔〕 달라져서〔〕 멸()해지는 것과 명()칭과 구()ㆍ문()이 심부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입니다.

   

다음 무위법(無爲法)에는 셋이 있는데 첫째 허공무위(虛空無爲)라,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이른바 허공 세계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공간과 허공은 같겠지 하지만 그러나 같지가 않습니다. 공간 가운데는 산소, 수소 등 일체 현상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허공은 금 가운데도 허공이 있고 다이아몬드나 어느 것 가운데도 허공이 다 있습니다. 이른바 모든 존재의 근본 장()이요 근본 생명이 허공인 것입니다. 따라서 공간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허공무위라 합니다.

또 택멸무위(擇滅無爲)라, 멸은 해탈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써 해탈의 자리를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성불하는 것은 모두가 다 택멸무위 때문입니다. 나쁜 것 가려내고서 참다운 진리를 선택하여 무위법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라, 이것은 법이자연(法爾自然)적으로 우주가 성겁(成劫)이 되고 주겁(住劫)이 되고 괴겁(塊劫)이 되어서 공겁(空劫)이 되어가듯이 저절로 무위법인 참다운 진리의 도리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비택멸무위 입니다. 

 

 제2장 교상(敎相)과 수행론(修行論)의 변천 

제2절 근본불교(根本佛敎)의 교리요강(敎理要綱)

  2. 이종세간(二種世間)



現象界一切諸法七十五法因果關係하여 成立되는 것인데 成立世界世間이라고 하며, 이 世間器世間(宇宙)과 有情世間(動物世界)으로 區分한다.

器世間有情住居하는 世界로서 欲界色界無色界三界區分되며 이 世界四劫過程하여 無限循環을 거듭 한다.

有情世間地獄餓鬼畜生阿修羅人間天上六道가 있는 바, 生有本有死有中有四過程을 거치면서 無始無終生死 輪廻를 거듭 한다.

그런데, 六道衆生生死輪廻하는 原動力有情各自妄心(無明)에서 일어나는 煩惱로 말미암아 身 口 意 三業業力으로 生死苦海輪廻하게 되는 것이다. 이 過程이 바로 三世兩重因果說十二緣起法(十二因緣法)이다.


   

현상계의 일체 제법은 75법의 인과 관계에 의하여 성립됩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법은 모두가 다 인과율(因果律)의 범주에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립된 세계를 세간(世間)이라고 하며 이 세간은 기세간(器世間), 즉 모든 천체와 환경 등인 우주와 또는 유정세간(有情世間) 즉 동물의 세계로 구분됩니다.

기세간은 유정(有情)이 주거(住居)하는 세계로서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삼계로 구분되며 이 세계는 성()ㆍ주()ㆍ괴()ㆍ공()의 4겁의 과정에 의하여 무한한 순환을 계속합니다.

유정세간은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천상의 육도(六道)가 있는 바, 생유(生有)ㆍ본유(本有)ㆍ사유(死有)ㆍ중유(中有)의 4과정을 거치면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생사윤회를 계속하는 것 입니다.

   

이 4유()를 우리는 깊이 느껴야 합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분 가운데도 “죽어지면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고 다음은 무()로 돌아가지 않는가” 이렇게 단순하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느 상당히 유명한 거사님인데 제가 영가천도(靈駕薦度)를 한다니까 “영가란 것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천도할 것입니까?” 하고 반문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윤회 사상은 불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리이스 철학을 깊이는 연구 안 했습니다만 피타고라스나 헤라클레토스나 또는 엠페도클레스나 모두가 다 윤회를 주장했습니다. 사실은, 동양 철인이나 그리이스 철인이나 근본 사상은 대부분 같습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굉장히 환희심을 내기도 하고 경탄하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분들은 동일한 진리의 본체를 깨달았으니 대체로 견해가 같지 않을 수 없겠지요.

   

생유(生有)는 우리가 막 날 때요. 본유(本有)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며, 본유에서 있다가 죽는 순간이 사유(死有)고, 중유(中有)는 중음(中陰)이나 같은 뜻으로 죽은 뒤에 다음 생까지의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어지면 보통은 다 중유에 상당한 기간 머뭅니다. 보통 수준이 이른바 49일입니다.

천지 우주는 심심미묘해서 수리(數理)적 관계가 중요한 기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라던가 셋이라던가 7이라던가 그런 수가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사, 음계(音階)를 보더라도 한 옥타브(octave)는 일곱 음계를 넘어서 같은 화음(和音)이 되지 않습니까? 음파도 역시 그와 같이 정확한 수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번 죽어지면 보통 수준은 49일이지만은 업장이 무거울 때에는 49일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젊어서 사망한다거나 또는 원한이나 애착이 있다거나 그런 영혼들은 몇 십 년도 헤맵니다. 평소에 부처님 공부를 많이 했다면 헤맬 필요가 없겠지만 자기 갈 곳을 모를 때는 유명계(幽冥界) 곧 어두운 세계에서 아주 오랫동안 헤매는데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사람 주위에 와서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사람 가운데 아프기는 분명히 아픈데 병원에 가서도 무슨 병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영가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불경에도 여러 군데에 나와 있습니다만, 우리는 중유라 하는, 중음 세계란 것을 무시를 못합니다. 중음 세계를 무시하면 결국은 윤회를 무시하는 것이 되겠지요.

   

그런데, 육도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고 하면 유정 각자의 망심(妄心) 즉 무명(無明)인 것입니다. 유정 각자의 망심에서, 무명에서 일어나는 번뇌로 말미암아 신ㆍ구ㆍ의 삼업의 업력으로 생사고해에 윤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는 다 충분히 알지 않습니까? 이 과정이 바로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양중의 인과설 곧 12연기법ㆍ12인연법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