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문화와 예술 ♧

왕실의 書畵 & 조선왕조 御筆

화엄행 2011. 9. 13. 15:28

http://www.sac.or.kr/lab2002/chosun/exhibition.html

 

 
 
   
 
 

  전시구성은 어필을 통해 조선시대 글씨의 흐름을 계통적으로 살필 목적으로 27대 519년에 걸친 조선시대(1392 - 1910)를 다음과 같이 총 4개시기로 나누었다.
  ① 고려말에 수용된 송설체가 세종년간 이후 확산되어 토착화되는 전기(태조-성종년간, 15세기)
② 王羲之體 등 魏晋古法으로 회귀하려는 현상과 함께 조선서예의 전형을 이룬 중기
    (중종 - 숙종 전반기, 16-17세기)
③ 명말청초 이래의 서예를 수용하면서 다양한 서풍이 전개된 후기
    (숙종후반기-영?정조년간, 18세기)
④ 청대 후반기 서예와의 밀접한 교류 속에서 금석학과 전예 서풍의 진전을 이룬 말기
    (순조-고종년간, 19세기-20세기 초)로 구분된다.
   
 
  조선전기에는 고려 말에 도입된 원나라의 조맹부(趙孟?, 1254-1322) 서체가 화려하고 장엄한 개창기 조선왕실의 문화적 색채로 재해석되면서 묵적은 물론 활자, 문서, 사경 등에까지 유행하였다.
그 이유는 문종과 안평대군, 성종 등 왕실인사들이 송설체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조맹부의 필적을 글씨 학습의 기준으로 삼아 인쇄 보급할 것을 교서관?예조?홍문관에 명하여 조선화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조는 주자소에 전교하여 ‘교서관에 소장한『集古帖』중에서 조맹부의「證道歌」「眞艸千字」「東西銘」, 왕희지의「東方朔傳」「蘭亭記」, 설암의 「頭陀帖」과 영응대군 이염의 집에 있는 조맹부의 「赤壁賦」등의 서본을 인쇄하여 성균관에 보내 학생들로 하여금 해범(楷範)으로 삼게 하라’고 하였다.
특히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은 송설체의 진수를 터득, 20대에 이미 조맹부를 능가하는 평판을 얻을 만큼 청경수려(淸勁秀麗)한 서풍을 보여 당대 최고의 명필이 되었다.
   
 
  조선중기에는 선조의 취향과 후원아래 사자관으로 대성한 석봉(石峰)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가 국서체(國書體)의 자리를 차지한 때이다.
석봉체는 엄정 단아한 짜임과 필획이 특징이다. 이것은 연미지태(姸媚之態)의 속성을 가진 조선전기의 송설체를 탈피하고 글씨의 전형으로 왕희지의 위진고법(魏晉古法)을 추구한 결과인데 성리학이 조선화되는 과정에서 조선중기 왕실인사와 퇴계나 율곡 등 도학자들의 미의식이 글씨에서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선조의 어필은 해서에서 석봉체와 같이 전형적인 필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초서에서는 활달자재한 필력을 휘두르면서 뛰어난 예술적 천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조의 어필은 인목왕후를 비롯 의창군 광, 정명공주 등에서부터 원종?인조와 효종?현종에 이어져 조선중기 서풍의 근간이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3인 3색이라고 할만큼 다양한 어필이 전개되었는데 숙종과 영?정조가 대표적이다.
숙종어필의 특장은 고려말 조선초 이래 토착화 되어온 송설체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점인데 유려하면서도 통쾌한 필력이 두드러진다.
소위 ‘동국진체’나 ‘진경시대’의 절정기에 활동한 영조는 글씨의 전형보다 개성을 추구하였는데 역대 어필 중 개인의 기질이나 성정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글씨를 구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조는 양란이후 변질된 서풍을 문제삼아 서체반정(書體反正)을 주창, 국초의 안평대군과 한호의 순박한 서체로 돌이키고자 하였다.
『홍재전서』에서 “글은 성정(性情)에서 나오는 것이고 글씨는 심획(心劃)이다. 그러므로 글씨의 기운과 모양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고 한 점에서 서체반정의 참 지향처와 그의 개혁적인 성향을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은 북학파(北學派)에 영향을 주어 청조의 금석학이 조선에서 꽃피고 결실을 보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말기는 청조 금석학의 영향으로 조선 서단에 전예서풍이 진전을 보이면서 일대변혁이 일어난 때이다.
추사 김정희가 그 장본인인데 그는 글씨의 근본을 종래의 왕희지 중심의 위진고법에서 서한예서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 금석기가 두드러지는 강경(剛勁)하고 졸박(拙樸)한 추사체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추사체는 왕실에 영향을 미쳐 순조에게서부터 그 기미가 엿보이는데 특히 추사의 학예에 공명을 하던 익종과 추사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은 헌종은 추사체를 처음부터 그대로 따라 쓰고 있다.
특히 흥선대원군은 추사의 으뜸 제자 중 한사람으로 추사체를 가장 충실하게 계승하여 일가를 이루어 고종의 어필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대원군의 난초그림은 추사가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어필’은 왕과 왕비의 글씨를 말한다. 왕조시대에는 모든 면에서 왕의 권위가 절대 신성시되었기 때문에 어필 또한 왕과 같이 존엄과 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시대(1392-1910, 27대 519년) 군왕은 초월적 존재로서 신성불가침의 지위와 권한을 소유하였으며, 행정, 입법, 사법 등 세속적인 모든 권력을 장악한 절대 권력자였다.
이러한 권위와 가치는 군왕의 글씨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데 역대 왕들은 국정을 처리하거나 일상생활에서 심신연마나 여기로, 또는 본격적인 예술작품으로 간찰, 시문, 현판, 그림 등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어필은 글씨의 기준이자 법으로서 글씨를 배우는 사람은 어필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어필의 역사가 곧 조선시대 서예사의 대강(大綱)이라고 말할 정도로 어필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군왕은 신하와 백성들의 모든 사고방식과 행위의 준칙이 된 만큼 글씨와 시문에서도 여타 사람들의 표준이 되었고 신하나 백성들에게 전해져 교과서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전기의 문종과 안평대군 그리고 성종 등 왕실인사가 송설체(松雪體)의 명수였고, 선조의 계도와 후원아래 사자관(寫字官)으로 대성한 한석봉의 글씨가 국서체(國書體)로 자리잡은 조선중기에는 선조의 어필이 당시는 물론 원종과 인조, 효종과 현종 등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양란(兩亂)이후 변질된 서체를 바른 데로 돌리고자 서체반정(書體反正, 反正:바른 데로 돌린다)을 주도한 조선후기 정조의 글씨관은 추사 김정희와 같은 인물에게도 영향을 주어 청조 금석학(金石學)이 조선에서 꽃피고 결실을 맺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어필은 희귀하였고 숭모의 대상이자 신성시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물론이지만 당시에도 친견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하사품의 경우에도 판본(板本)이나 임모본(臨模本)이 예사였다.
궁중에서는 역대 선왕의 업적을 현창하고 글씨의 본보기〔법첩(法帖)〕로 삼을 목적으로 선왕의 글씨를『열성어필첩(列聖御筆帖)』으로 간행하여 규장각의 봉모당(奉謨堂)에 어진(御眞) 어보(御寶) 등과 함께 어필 봉안을 위한 특별한 의식을 거쳐 보관한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희귀한 어필과 특별히 대군과 군, 공주와 옹주 등 왕실인사의 글씨를 한자리에 모아 500년 조선문화와 예술의 맥이 어필을 통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물에 대한 사랑과 정감의 사연을 담은 시문이나 편지글을 통해 군왕의 인간적인 모습도 함께 살피고자 하였다. 그리고 ‘글씨는 그 사람이다’라는 말처럼 글씨 속에 한 인간의 성정이나 기질뿐만 아니라 미의식과 학문의 수준까지 그대로 드러나는데 어필을 통해 군왕의 이러한 측면도 주의 깊게 살펴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다른 분야에 비해 왕실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도 부족한 현실인데다 어필을 통해 역대 군왕들의 기질이나 미의식을 분석하여 제왕의 인간적인 면모는 물론 500년 조선문화의 독자적인 미의식이나 인문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군왕이라고 하면 일반 대중에게는 인간적 이해나 접근을 위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이거나 지나치게 정치적으로만 부각되어 역사연구나 방송, 기존교육에서 치적만 나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폭군의 이미지로만 그려져서 군왕의 인간적인 면모 그 자체는 사실상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문화와 사상세계를 연구하는 데 있어 군왕이 끼친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예술적 면모를 밝혀내는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되며 이번 전시는 필묵이 필사도구이자 서예가 예술의 중심이었던 조선왕조의 유교정치 이데올로기 사회에서 서예와 시문을 통해 특별히 역대 군왕의 예술적 천품과 성과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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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실의 書畵

목차
1. 개 관
2. 서예자료
  1) 열성어필
  2) 국왕개인어필
  3) 왕비·종친
3. 의 미
1. 개 관
조선 왕조의 국왕은 그 시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서예가라고 할 수 있다. 태조와 태종은 韓修(1333~1384), 韓尙敬(1360~1423) 부자나 權鑄(?~1394) 등과 함께 顔眞卿體에 뛰어난 名筆이었다. 이들의 서체는 肥厚壯重한 안진경체에서 肥厚性을 제거한 謹嚴端重한 특징을 지녔는데, 당대의 書壇이 고려 忠肅王과 忠宣王이 세운 萬卷堂에서 益齋 李齊賢(1287~1367) 등에게 전해진 姸媚華麗하다는 趙孟頫(1254~1322)의 松雪體를 따른 것과는 다르다.
이와 달리 세종 때에는 송설체가 중심이 되었다. 세종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장차 조선왕조를 이끌어갈 문무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데, 집현전 학자들은 자연히 고려의 만권당에 연결되어 송설체를 계승하게 된다. 특히 세종의 제3왕자인 安平大君은 송설체의 진수를 터득해 20대에 이미 趙松雪을 능가한다는 평판을 얻었으며, 29세 때 쓴 〈夢遊桃源圖記〉는 淸勁秀麗하다. 아울러 姜希顔(1418~1465), 成三問(1418~1456), 朴彭年(1417~1456), 李塏(1417~1456) 등 집현전 학사들이 송설체를 썼다. 文宗도 세자 때부터 이를 잘 썼는데, 『列聖御筆』에 그 서체가 남아 있다. 세종도 송설체를 구사했을 것으로 보이나 그 필적이 남아 있지 않다.
세조는 태조와 태종의 글씨체를 따르고 있다. 이에 반해 成宗은 세종의 치국 이념을 계승하고 안평대군의 글씨체를 숭상하여 송설체가 조선왕조의 국서체로 자리 잡는다. 더욱이 성종은 송설체의 근간이 되는 王羲之(321~379) 서체의 습득과 보급에도 관심을 보여 〈王羲之十七帖〉과 〈東西堂集古帖〉 등 왕희지 서첩을 새겨 간행하였다. 그 결과 왕희지 글씨의 북송 때 僞作인 〈黃庭經〉, 〈樂毅論〉, 〈曹娥碑〉, 〈東方朔畫像贊〉 등의 단정한 글씨체를 송설체에 가미시켜 流麗端正한 글씨를 이루니, 이것이 바로 조선식 송설체이다. 성종의 필체는 中宗, 仁宗, 明宗으로 이어져 간다.
한편 양반 사대부들은 성종의 필체를 따라 송설체를 즐겨 썼다. 특히 己卯士禍(1519)에 참화를 입은 사대부들은 단정한 왕희지체를 쓰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서체는 自庵 金絿(1488~1534)의 仁壽體이다. 바로 中宗, 仁宗, 明宗의 서체는 이런 인수체와 같은 경향의 서체이다. 退溪 李滉(1501~1507)은 인수체의 전통을 이어 퇴계체라는 새로운 서체를 창출한다. 그의 서체는 송설체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姸媚之態를 떨쳐버리고 북송의 王著가 쓴 왕희지 법첩의 단정한 필법을 가미한 流麗端正하면서도 굳세고 기품이 있다. 이와 같은 서체는 양반 사대부들이 따라 쓰기에 알맞은 것으로, 이후 많은 사대부들이 따라 쓰게 된다. 이후 石峯 韓濩(1543~1605)는 퇴계의 서체에다 우리 고유 미감을 더해 謹嚴端正하고 剛硬質樸한 石峯體를 이룩하였다.
宣祖는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 秋史 金正喜(1786~1856)가 우리나라에서 난초 그림을 제대로 그린 사람으로 世宗과 宣祖를 꼽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데, 이뿐만 아니라 산수화나 말 그림 등 각종 畫目에 뛰어났다. 선조를 이은 元宗과 義昌君(1589~1645) 및 貞明公主(1603~1685) 등도 글씨에 능하였다. 이들은 모두 선조의 필법을 계승하여 한석봉체를 쓰고 있는데, 선조의 繼妃인 仁穆大妃(1584~1632)도 같은 필법을 구사하였다. 仁祖의 글씨도 한석봉체를 따르고 있다.
栗谷 李珥(1536~1584)의 글씨는 淸勁秀麗한 안평식 송설체로, 극도의 세련미를 보이는 달필이었다. 그래서 율곡의 제자들은 이런 조선식 송설체를 계승하였는데, 李廷龜(1564~1645)와 선조의 부마인 東陽尉 申翊聖(1588~1668), 李明漢(1595~1645)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孝宗은 尤庵 宋時烈(1607~1689)에게 배워 조선식 송설체를 능란하게 구사하였다. 효종의 서체는 顯宗, 肅宗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송설풍의 어필체는 한석봉체와 양송체의 영향으로 더욱 단정근엄한 특징을 드러낸다. 이를 일러 蜀體라는 조선 고유의 이름을 명명하였다.
선조의 손자인 朗善君 李俁(1637~1693)는 왕희지 필법에 해박하였는데, 현종 3년(1662)에 처음으로 『열성어필첩』을 간행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역대 金石文 탁본 155종을 모아 『大東金石帖』을, 역대 명필을 모아 『大東名筆帖』을 편찬하였다. 이런 이우의 서법은 寫字官인 貞谷 李壽長(1661~1733)에게 계승되어 숙종부터 영조 초년까지 王旨의 書寫에 그 힘을 발휘한다. 이후 晉體라 불리는 東國眞體의 출현도 이런 흐름과 큰 관계가 있다. 동국진체는 玉洞 李漵(1662~1723), 白下 尹淳(1680~1741), 員嶠 李匡師(1705~1777)로 이어지는 書脈을 말하는데, 이들은 왕희지체에다 宋의 米芾(1051~1107)과 明의 文徵明(1470~1559)의 필의를 첨가하여 독특한 우리 고유의 서예를 완성하였다.
숙종은 현종의 송설체를 이어 받아 더욱 유려하고 귀품 있는 글씨를 구사하여 후대의 어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숙종은 조맹부에 대해 유달리 관심이 많았는데, 행서와 초서로 陸龜蒙의 칠언절구를 쓴 조맹부의 필적을 보고 “서화의 묘를 어찌 값으로 물을 수 있겠는가, 그 재주의 높음 왕희지요 또 이공린이라네. 예전에 본 진첩 새로 쓴 듯 생생하니, 그 누가 수백 년 지났다고 말하리요(墨妙何須問直錢, 才高逸少又龍眠. 昔看眞帖如新寫, 誰謂經過數百年.)”라고 제시하였다.
숙종의 어필은 획이 유연하고 고른 편인데, 특히 획이 꺾이는 부분이 婉曲하게 돌아가며 삐침이나 파임도 길고 부드러운 편이다. 이러한 숙종의 서풍은 아들 景宗과 英祖로 이어졌는데, 특히 영조는 숙종의 어필을 잘 따랐다.
英祖는 젊어서부터 서화에 재주가 있었다. 예컨대 延礽君(뒤의 영조) 시절에 分院 도자기의 밑그림을 그렸는데, 당시 司饔院 주부를 지낸 金時敏(1681~1747)의 글에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글씨는 기본적으로 촉체에 바탕을 두고, 더 나아가 한석봉체에도 통달해 있기에 끝내 이들을 통합한 자신의 서체를 이루었다. 正祖는 근엄장중하고 圓滿雄建한 특징을 보이는 兩宋體를 썼는데, 이는 한석봉체에 안진경의 肥厚壯重味가 첨가된 서체였다. 이후 정조의 글씨는 안진경체를 모본으로 삼는 경향을 띠었다.
이런 정조의 서예는 북학파에도 나타나는데, 결국 정조 고모부인 月城尉 金漢藎(1720~1758)의 증손인 추사 김정희에 이르러 추사체로 완성되었다. 추사는 안진경체와 隸書體의 바탕에다 淸의 碑學 理論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었다. 그래서 추사체는 拙樸淸高하고 雄渾壯重한 특징을 보인다.
純祖는 추사체의 영향을 받아 글씨를 썼는데, 특히 추사의 學藝에 공명했던 翼宗과 추사에게 배운 憲宗은 추사체를 처음부터 그대로 따라 썼다. 흥선대원군 李昰應(1820~1898)은 추사의 제자로 추사체뿐만 아니라 난초 그림까지 가장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御筆帖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역대 국왕의 어필을 함께 모은 것으로 列聖御筆이나 御製御筆, 다음으로 宣祖·孝宗·肅宗·景宗·英祖·高宗·大院君·純元王后 등의 국왕 및 왕비·종친의 개별 御筆帖 등이 있다. 이외에도 약간의 서간문이 있다.
2. 서예자료
현존하는 규장각 소장 왕실의 서예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宗親府와 편자미상의 어필첩은 1) 宗親府 : 列聖御筆[1], 列聖御筆[2], 列聖御筆[3], 列聖御筆[4], 2) 編者未詳 : 御製御筆[1], 御製御筆[2], 御製御筆[3], 御前親幕題名帖, 列聖御筆[5]-1, 列聖御筆[5]-2, 列聖御筆[6] 등이 있고, 둘째 국왕 및 왕비·종친의 개별 어필첩은 1) 宣祖 : 宣廟御筆[1], 宣廟御筆[2], 宣廟御筆[3], 宣廟御筆[4], 『仁穆王后御筆』(⇒宣祖御筆), 2) 孝宗 : 寧考御筆, 孝宗大王御筆, 3) 肅宗 : 唐詩, 肅宗大王御筆, 肅宗御筆, 御製御筆[2], 4) 景宗 : 肅宗大王御筆, 列聖御筆刊進及景宗大王御筆屛風謄錄, 5) 英祖 : 敦寧府揭板, 御製御筆北苑帖, 英祖御筆, 宗簿寺揭版, 6) 高宗 : 御製懸板帖, 7) 大院君 : 大院君筆帖, 8) 純元王后 : 純元王后御筆, 純元王后御筆封書, 9) 翼宗 : 翼宗簡帖 등이 있다.
1) 열성어필
오늘날 현존하는 열성어필의 수는 적지 않다. 그 대부분은 규장각에 전하며, 奉謨堂과 赤裳山史庫가 그 바탕을 이룬 장서각 등에 전한다. 이밖에도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전하지만 대략 규장각과 장서각 소장본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여기서 장서각 소장 열성어제어필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표 1).
[표 1] 장서각 소장 열성어제어필
表題 刊行年代 祖代 서지사항 소장번호 비고
열성어필 1723년(경종 3) 문종-숙종 42.5×28.932절 석각 장서각 3-498 적상산사고장
열성어필 1723년(경종 3) 문종-숙종 41.9×29.232절 석각 장서각 3-755 내사기
열성어필 1725년(영조 1) 태조-경종 42.3×29.552절 석각 정문연도서관大 C10c 170 내사기
열성어필첩 1723년(경종 3) 태조-경종 30.8×22.351장 영인본 정문연도서관C10c 170 열성어필(1725) 영인본
열성어필 1723년(경종 3) 선조-숙종 49×34.7100장 목각 장서각 3-499 ·
表題 刊行年代 祖代 서지사항 소장번호 비고
열성어필 1723년(경종 3) 선조-숙종 100장 목각 장서각 3-754 ·
열성어필어제 1785년(정조 90 숙종-정조 · 장서각 3-497 ·
조선시대 최초로 1662년(현종 3)에 간행된 열성어필은 『列聖御筆』[1]이다. 그 말미에는 당시 간행 主幹者의 하나였던 朗善君 李俁가 自筆 刊記에서 열성어필첩의 간행목적이 열성의 어필이 세대가 멀어지고 난을 겪으면서 다수가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첩은 1663년 봄 史庫 奉藏用으로 특별히 粧帖한 것으로서, 한말에 규장각 도서로 편입된 태백산 또는 오대산사고에 봉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간행된 석각본 열성어필에는 적상산·태백산·오대산 사고에 봉장되었다는 藏書記나 왕명으로 아무개에게 賜與한다는 內賜記가 적힌 예가 있어 각각의 전래과정을 엿볼 수가 있다.
한편 열성어필의 刊本은 대략 석각본과 목각본으로 대별할 수 있다. 석각의 경우는 어필을 石版에 음각한 뒤 祖代順으로 頁數를 매기어 이를 壯紙에 墨榻하여 첩으로 장황하는데, 이를 이른바 旋風葉이라 한다. 각 시기마다 석각본 열성어필첩을 성첩하게 되는데 어필의 선택에 따라 혈수가 달라질 경우, 이전의 석판에 세긴 혈수를 메꾸고 다른 부분에 새로운 혈수를 새기었으므로 성첩의 전후를 알 수가 있다. 목각의 겨우는 일반 목각본의 경우처럼 어필을 목판에 양각으로 鋟梓한 후 楮紙에 묵탁하여 이를 성책하는데, 이는 이른바 線裝의 형태로 되어 있어 기록에서는 冊이나 卷으로 나타나 있다. 혈수는 양각된 자획의 우측상단에 음각하여 표시하였음이 부분적으로 보인다. 이밖에 열성어필로서 진적을 장첩한 경우와 기존의 어필을 새긴 비문 등을 탁본하여 장첩한 예도 있다.
그런데 열성어필첩은 印刊되기까지의 전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혀줄 『列聖御筆刊進及景宗大王御筆屛風謄錄』이 있어 도움이 된다. 『列聖御筆刊進及景宗大王御筆屛風謄錄』은 1725년(영조 1) 종친부에서 『열성어필』을 간행할 때의 관련 기록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1725년 4월 13일부터 11월 13일까지 관청에서 주고받은 甘結·牒呈, 국왕의 傳敎·備忘記, 물품의 조달 과정과 내역, 工役에 참여한 사람들의 숫자와 기간, 지급 내역 등이 기록되어 있다. 열성어필과 숙종·경종어필병풍 印刊 과정을 도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표 2).
[표 2] 열성어필 印刊 과정
4월 13일 종친부가 영조에게 어필인간 시작을 보고하다.
14일 종친부로 移安한 板本 조사를 위해 해당 관청에 물품조달을 요청하다.
18일 승정원에서 인출할 어필 件數를 정한 교서관 단자를 종친부에 통보하다. 승정원과 도화서에서 御寶·御筆을 모사할 사자관과 화원을 定送하다.
22일 선조어필 목판활자에 쓸 판석과 못을 요청하다. 印出匠·木匠·木手를 정송하다. 승정원에 있는 선조어필 목판 2樻를 출급하다.
23~30일 어필 모사와 인출에 필요한 각종 묵·아교·刻刀 등 잡물조달 요청하다.
5월 1일 상의원에서 彫刻匠을 정송하다.
16일 영조가 경종어필 御覽하다.
17일 태조·경종어필을 인출하여 頒賜받고자 하는 전국의 監營 조사하다. 감영에 物力을 요구하다.
18일 종친부에서 태조어필을 출급하다.
19일 어필석판 중 改刊·첨부할 어필 먼저 작업 착수하다. 석판 중 훼손된 것 改刻하다. 磨造匠 2명을 정송하다.
20일 태조·선조·효종어필 개각하다.
20~26일 어필인출에 필요한 각종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26일 李箕鎭이 바친 경종 手札을 인출하다. 경종 어필 2度을 석판에 모사하다.
6월 2일 경종이 金載海에게 내린 유서를 添刊하기로 결정하다.
6일 영조가 선조·원종·효종의 어필 인출을 명하다. 臨昌君家의 어필은 石刻하고 경종어필병풍은 木板으로 할 것을 명하다. 경종어필8자병풍 인출을 위한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7~14일 열성어필 석판 중 缺傷된 부분을 먼저 새기다. 선조·원종·효종어필을 석각하다. 경종어필 2度·諭書를 석각하다. 각수가 사용할 물력을 조달하다.
18일 모각할 어필중 손상된 본을 먼저 각숙할 것을 명하다. 목수 조달을 요청하다. 종어찰 모사를 시작하다. 열성어필 목판의 役을 마치고 粧䌙을 시작하다. 열성어필 석판본 마무리할 刻手·磨墨軍 등 송달을 요청하다. 경종어필병풍서 장황을 시작하다.
28일 茶母 정송을 요청하다. 각종 물력을 요청하다.
7월 5일 경종어필병풍서 인출 진상건을 마련하다.
14일 열성어필 목판본은 인출하였으나, 석판본은 늦어지고 있으니 물자를 더 투입해 신속히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하다.
18일 경종조 반사본에 ‘命除謝恩’을 添書한 예에 따라 을사년 열성어필에도 넣을 것을 결정하다.
19~25일 열성어필 인출시 冊匠하에 사용할 잡물, 숙종어필찬문 인출할 재료, 어필 석판본 作帖, 병풍제작·진상건 표장할 직물을 요청하다.
8월 2일 첨간할 어필과 신간한 어필을 인출하는데 들어갈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선조·원종·효종어필 13장, 영조 御諱 改張 3장, 金昌集 이름 지워진 곳 개장 1장, 인출과 粧帖에 필요한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12일 인출한 어필의 작첩을 신속히 해 줄 것을 요청하다.
8.12~9.19일 열성어필첩의 작첩과 搗砧작업을 진행하다. 병풍을 정황하다.
18일 영조가 1721년에 간행한 숙종어필 ‘春眠不覺曉’를 다시 간인할 것을 명하다.
21일 영조가 열성어필에 경종어필 ‘懲忿窒欲改過遷善己卯暮春’의 첨간을 명하다.
23~28일 경종어필을 목판첨간하는 작업을 실행하다. 경종어필8자병풍틀을 제작하다.
25일 열성어필 석판본 도침을 완료하다.
10월 3일 열성어필첩 및 경종어필병풍 제작을 완료하다. 진상일자를 10월 7일로 확정하다.
3~6일 진상 준비를 위한 각종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7일 各殿에 進上儀를 거행하다.
17일 숙종어필 인출 작업을 계속하다. 병풍장병에 필요한 물자 조달을 요청하다.
21~22일 열성어필, 경종어필병풍, 숙종어필병풍 참여자 負役日字에 따른 급료지급을 명하다.
26일 숙종어필병풍의 도침일자를 27일로 확정했음을 통고하다.
29일 영조에게 숙종어필병풍 진상일자를 11월 3일자로 정했음을 보고하다.
30일 진상 준비를 위한 각종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병조에서 진상할 날 차비군을 제공하지 못하므로 坊民을 調用할 것을 요청하다. 영조가 진상일자 변경을 명하다.
11월 3일 진상일자를 11월 6일로 결정하였음을 보고하다.
7일 어필주관당상이 영조에게 어필인간, 사후처리, 奉安處의 결과 보고를 하다.
13일 14일 造紙署 遮日岩에서 御諱를 세초할 것을 결정하다. 모든 작업이 완료되어 撤局하다.
열성어필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규장각에는 宗親府에서 편찬한 어필첩으로 『列聖御筆』[1], 『列聖御筆』[2], 『列聖御筆』[3], 『列聖御筆』[4] 등이 있다. 『列聖御筆』[1](奎 10310, 10311)은 1帖(21折 42面)으로,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이다. 권말의 발문에 ‘皇明崇禎紀元後癸卯仲春’이란 기록으로 보아 1663년(현종 4)에 만들어진 것이다. 발문에는 기존의 열성어필이 간행된 지 오래되었고 또 여러 전란을 거치면서 없어진 것이 많으므로 이제 九朝의 유묵을 수집하여 다시 책을 엮는다고 하였다. 위의 두 본은 동일한 판본이지만 편차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즉 〈奎 10311〉본에는 문종·세조·성종·명종·선조·원종[인조의 父]·인조·효종 등 아홉 왕의 친필이 수록된 반면에 〈奎 10310〉본에는 명종 어필 1면이 누락되어 있다. 또 여덟 왕의 어필들도 순서가 약간 다르다. 이러한 차이는 묶는 과정에서 발생한 착오인 듯하다.
『列聖御筆』[2](奎 9833)은 1冊[拓], 2冊[木]으로,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이다. 제1책은 어필의 탁본을 모아놓은 것으로 〈奎 10322〉, 〈奎 10324〉, 〈奎 10326〉본과 동일한 판본이며 1725년(영조 1)에 제작되었다. 제2책은 어필을 목판에 새겨서 찍은 것으로 〈奎 9828〉, 〈奎 9829〉, 〈奎 9832〉본과 동일한 판본이며, 숙종어필까지 수록된 것으로 보아 경종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列聖御筆』[3](奎 10323, 10327)은 1帖(32折 64面)으로,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이다. 내용은 문종·세조·성종·인종·명종·선조·원종[인조의 父]·인조·효종·현종·숙종 등 11왕의 어필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에 숙종어필 부분에 “賜戶曹判書金昌集”이란 글씨가 삭제되어 있는데, 이는 김창집이 1722년(경종 2) 壬寅獄事 때 죽었기 때문이다. 이때 삭제된 김창집의 이름은 1725년(영조 1)에 열성어필을 새로 간행할 때 복구하였다.
『列聖御筆刊進及景宗大王御筆屛風謄錄』(奎 12997)은 1冊(56張)으로, 종친부에서 1725년(영조 1)에 列聖御筆을 새로 간행할 때의 기록들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표지에는 ‘乙巳三月十三日’이라고 쓰여 있는데, 처음 기록한 날짜인 1725년 3월 13일부터 11월 21일까지의 기록들이 실려 있다. 열성어필 재간행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1725년 3월 13일의 경연 논의를 비롯하여 列聖御筆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각 관청들간에 주고받은 甘結·牒呈 등의 공문서, 국왕의 傳敎와 備忘記 등 다양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列聖御筆』[4](奎 10322, 10324, 10326)은 1冊(52折 102面)으로, 조선시대 太祖∼景宗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이다. 『列聖御筆刊進及景宗大王御筆屛風謄錄』(奎 12997)에는 1725년 3월 13일의 경연에서 숙종의 贊文이 붙은 태조어필과 선왕 경종의 어필을 이미 간행된 열성어필에 추가하여 간행할 것과 1723년(경종 3)에 간행된 열성어필에는 金昌集의 이름이 삭제되어 있는데 김창집이 이미 복관되었으니 삭제된 이름을 복구할 것 등이 제기되어 영조의 윤허를 받아 그 해(1725) 10월 열성어필이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책의 체제나 구성은 〈奎 10323〉과 동일하다. 내용은 太祖·文宗·世祖·成宗·仁宗·明宗·宣祖·元宗(仁祖의 父)·仁祖·孝宗·顯宗·肅宗·景宗 등 13왕의 친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태조어필과 경종어필, 효종어필의 일부, 그리고 숙종어필 중 〈太祖大王御筆贊幷小序〉 외 2편 등이 1725년 간행시 새로 추가된 것이다.
2) 규장각에는 編者未詳의 어필첩으로 『御製御筆』[1], 『御前親幕題名帖』, 『列聖御筆』[5]-1, 『列聖御筆』[5]-2, 『列聖御筆』[6] 등이 있다. 『御製御筆』[1](奎 11926)은 23枚로, 『度支定例』의 서문만을 판각하여 간행한 필첩이다. 우측 상단에 ‘御製御筆’이란 제목이 있고, 판심제는 ‘度支定例’이다. 매면 4행 8자씩 쓰여져 있고, 版次가 찍혀 있다. 『度支定例』는 1749년(영조 25) 영조의 명령을 받고 朴文秀 등이 간행한 책이다. 필첩의 내용은 이제 정성스러운 뜻이 매우 깊은데 만약 이것이 없으면 맹랑하여 근거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제 정서하여 내리니 훗날 다시 보는 사람이 有違之律에 근거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나라를 위한 깊은 계책이니 嗣君이 될 사람은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列聖御筆』[5]-1(奎 9828, 9829, 9832)은 1冊(100張)으로, 편자 미상으로 景宗年間 以後에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으로, 어필을 목판에 새겨서 찍은 것이다. 본서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奎 9828, 9829, 9832〉본과 (2)〈奎 9826, 9827, 9830, 9831〉본이 肅宗御筆까지는 동일한 판본이고 (2)에만 끝에 경종어필 2장이 추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이 경종대에 만들어졌고, 영조대 이후 (1)에 경종어필을 추가하여 (2)를 다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의 내용은 宣祖, 仁祖, 孝宗, 顯宗, 肅宗 등 다섯 왕의 어필이 수록되어 있다. 宣祖御筆 중에는 난 그림이 하나 포함되어 있다.
『列聖御筆』[5]-2(9826, 9827, 9830, 9831)은 1冊(102張)으로, 英祖年間 以後에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으로, 어필을 목판에 새겨서 찍은 것이다. 본서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奎 9828, 9829, 9832〉본과 (2)〈奎 9826, 9827, 9830, 9831〉본이 肅宗御筆까지는 동일한 판본이고 (2)에만 끝에 경종어필 2장이 추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이 경종대에 만들어졌고 영조대 이후 (1)에 경종어필을 추가하여 (2)를 다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의 내용은 宣祖, 仁祖, 孝宗, 顯宗, 肅宗, 景宗 등 여섯 왕의 어필이 수록되어 있다. 宣祖御筆 중에는 난 그림이 하나 포함되어 있다.
『列聖御筆』[6](奎 9824, 9825)에는 1冊(78張)으로, 顯宗年間 以後에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으로, 어필을 목판에 새겨서 찍은 것이다. 본서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宣祖御筆에서 顯宗御筆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顯宗 이후로 추정된다. 본서의 내용은 宣祖, 仁祖, 孝宗, 顯宗, 등 네 왕의 어필이 수록되어 있다. 각 왕의 어필 첫 장에는 ‘宣廟御筆’, ‘仁廟御筆’ 등의 도장을 찍어서 어느 왕의 글씨인지를 표시해 놓았다.
『御前親幕題名帖』(古大 9920-2)에는 1帖(17折)으로, 1831년(순조 31) 이후에 別軍職과 관련된 正祖(1776~1800)의 〈題御前親幕題名帖〉, 〈新除傳令式〉, 〈例用傳令式〉, 정조의 어필인 ‘御前親幕’과 ‘御前親裨直廬’, 1776년(영조 52)부터 1831년(순조 31)까지의 〈題名〉을 합철하여 간행한 題名帖이다. 정조의 〈題御前親幕題名帖〉부터 정조의 어필인 ‘御前親裨直廬’까지는 목판본이고, 마지막의 〈題名〉은 필사본이다. 〈題御前親幕題名帖〉은 정조가 1787(정조 11)에 지은 것으로 별군직의 유래와 임무에 대하여 적었다. 〈新除傳令式〉과 〈例用傳令式〉은 전령을 내릴 때의 공문 양식으로 “職銜姓名別軍職差下爾其來現察任者 年月日”을 적고 마지막에 御花押을 찍는다. ‘御前親幕’과 ‘御前親裨直廬’는 정조의 어필로 1면에 1자씩 큰 글씨로 쓰여 있다. 〈題名〉에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부터 1831년까지 별군직에 임명된 무신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2) 국왕개인어필
역대 왕들의 개별 어필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규장각에는 太祖부터 明宗까지의 개별 어필로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열성어필』에 그 유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1) 宣祖의 어필 : 선조의 글씨는 이전의 문종·성종·인종·명종이 따랐던 송설체와는 달리 단정한 짜임과 근엄한 획이 있다. 이런 특징은 선조를 이은 元宗·義昌君(1589~1645)·貞明公主 및 석봉 한호의 글씨에도 잘 나타나 있다. 선조의 글씨는 이후 원종·인조·효종으로 계승되었다.
규장각에는 선조의 어필첩으로 『宣廟御筆』[1], 『宣廟御筆』[2], 『宣廟御筆』[3], 『宣廟御筆』[4], 『仁穆王后御筆』(⇒宣祖御筆) 등이 있다. 이들은 의창군이 1630년(인조 8)에 宣祖가 중국 문인들의 漢詩를 써서 자신에게 내린 것과 선조의 〈墨竹圖〉, 〈墨蘭圖〉 2점을 모아 목판으로 간행한 御筆帖이다.
『宣廟御筆』[1](古大 2410-11)은 1冊(54張)으로, 수록된 시문이 일부가 결락되거나 중복된 부분이 있고, 심지어 편차가 잘못된 곳도 있다. 동일 판본으로 찍은 『宣廟御筆』[4](奎 10126, 10171)은 1帖(6折 12面), 『宣廟御筆』[2](經古 754.1-Se64s)은 1冊(23張), 『宣廟御筆』[3](經古 754.1- Se64s)은 1冊(23張) 등도 주목된다. 그 중에서 『宣廟御筆』[1]은 수록된 시문이 가장 많은 20여 편의 글이 있다. 어필첩에는 原詩의 작자와 제목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앞부분에 韓愈의 〈符讀書城南〉(五言古詩) 중의 일부, 작자 미상의 4言詩 2수, 승려 靈徹의 〈答韋丹〉(七言絶句), 작자 미상의 칠언절구 2수, 李群玉의 〈雨夜呈長官〉(五言古詩) 중의 일부, 의창군이 쓴 발문이 있다. 이어서 ‘孝悌忠信正直’, ‘改過遷善 懲忿窒慾’이 큰 글씨로 쓰여 있고, 작자 미상의 오언시 2구, 張祜의 〈四歸樂二首〉(五言絶句), 작자 미상의 칠언 절구 3수, 劉長卿의 〈過鄭山人所居〉(七言絶句), 작자 미상의 칠언절구 2수, 李白의 〈望廬山瀑布〉(七言絶句), 작자 미상의 오언시 2구, 칠언시 일부, 오언시 2수, 칠언절구 1수 등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孝悌忠信正直’부터 劉長卿의 〈過鄭山人所居〉까지에는 1부터 16까지의 板次가, 李白의 〈望廬山瀑布〉 뒤에 실린 오언시 2구부터 마지막 한시까지에는 19에서 25까지의 판차가 차례대로 찍혀져 있다. 대부분의 글씨는 해서인데, 끝에 실린 칠언절구 1수는 초서로 쓰여 있다. 마지막에 대나무와 난초를 그린 그림을 판각한 〈墨竹圖〉, 〈墨蘭圖〉 2종이 있다.
『仁穆王后御筆』(⇒宣祖御筆)은 그동안 宣祖의 繼妃인 仁穆大妃의 필적을 엮은 필첩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宣祖의 御筆帖이다. 선조가 1603년(선조 36) 11월에 한글로 쓴 병문안 편지, 王勃의 〈滕王閣序〉 일부, 陶潛의 〈四時〉, 작자 미상의 칠언율시 등 4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2) 孝宗 : 효종의 글씨는 선조의 글씨를 따라 조선식 송설체를 썼다. 그 뒤에 顯宗에 이르면 효종의 어필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다시 가미하였다.
규장각에는 효종의 어필로 『寧考御筆』, 『孝宗大王御筆』 등이 있다. 『寧考御筆』(古貴 4251-2)은 1帖(9折)으로, 閔維重(1630∼1687)이 효종의 어필과 거기에 붙인 송시열의 발문 등을 모아 엮은 필첩이다. 寧考는 효종을 가리키는데, 효종의 능호가 영릉이기 때문이다. 권수에 효종의 어필 37자가 실려 있고, 뒤에 송시열의 〈孝廟御筆帖跋〉, 〈廉問條目〉이 수록되어 있다. 효종의 어필은 “副司直 閔維重 慶尙道 聞慶 昆陽 尙州 熊川 開寧 金海 星州 鎭海 高寧 河東 陜川 昌原 晉州 固城” 등 37자로 이루어져 있다. 송시열의 〈孝廟御筆帖跋〉은 『宋子大全』 권146에 수록되어 있다. 1659년 효종을 뵙고 나눈 이야기와 민유중 등을 천거하여 염문의 임무를 맡도록 하고 〈廉問條目〉을 올렸다. 1655년에 민유중이 효종이 내린 御筆封書를 帖子로 만들고자 하면서 발문을 청하기에 저간의 사정을 적는다고 하였다. 부록된 〈廉問條目〉은 지방에 가서 염문할 사항을 적은 글로, “偸竊國穀, 濫率衙眷” 등 18조목이 실려 있다.
『孝宗大王御筆』(奎 10265)은 1帖(9折 16面)로, 孝宗의 편지를 엮은 御筆帖이다. 편지 4통에 紅線傳과 御物下賜物目記가 수록되어 있다. 편지 중의 3통은 각각 1641년(인조 19년), 1642년(인조 20)에 쓴 편지이다. 물목기는 白唐扇, 白檀扇, 越隣香, 小帽子, 砂糖, 眞梳를 하사한 것이며 하사받은 신하는 밝혀져 있지 않다. 紅線傳은 唐의 紅線金合의 故事를 적은 것으로 암암리에 남의 욕심을 타이르는 내용인데,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기 위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편지는 鳳琳大君 때 쓴 것이기 때문에 ‘淏’를 썼다. 효종은 글씨에 능하였으며 편지 글씨는 松雪體이다. 특히 “連日來見而未卽出接 心甚未安云云”의 편지는 逸品의 草書이다.
(3) 肅宗 : 숙종의 글씨는 획이 유연하고 가지런하다. 이는 획이 꺾이는 부분이 婉曲하게 돌아가면서 삐침이나 파임도 길고 부드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숙종의 글씨는 경종과 영조에게 이어졌다.
규장각에는 숙종의 어필첩으로 『唐詩』, 『肅宗大王御筆』, 『肅宗御筆』, 『御製御筆』[2] 등이 있다. 『肅宗大王御筆』(奎 10090, 10091)은 1帖(8折 16面, 零本)으로, 肅宗이 여러 사람에게 준 親筆 詩文을 陰刻하여 찍은 16幅 1帖의 木版本이다. 권수에 ‘四十九’, 권말에 ‘六十四’라는 版次가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1폭부터 48폭까지 3첩이 빠진 落帙로 추정된다. 간년은 미상이지만 각각의 시문 우측 상단에 ‘肅宗大王御筆’, ‘肅宗大王御製’라 刻字되어 있어 숙종 사후 판목에 새겨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49면에는 1699년(숙종 25) 種德齋에서 써서 淑明公主에게 준 五言律詩 1수가 실려 있다. 50면부터 52면에는 延礽君에게 준 칠언절구 등 시문 3편이 실려 있다. 51면에는 연잉군의 질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고 있다. 53면과 54면은 1715년(숙종 41)에 延齡君에게 준 칠언절구 2수가 실려 있다. 55면과 56면에는 영의정 金壽恒(1629∼1689)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왜구를 막는 방책과 병조판서 임명을 상의하는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57면과 58면에는 領府使 南九萬(1629∼1711)에게 준 칠언율시 1수, 59면과 60면에는 칠언절구 2수가 있다. 61면에는 臨昌君에게 준 칠언절구 1수가 실려 있다. 62면에는 ‘孝廟御筆’, 63면과 64면에는 큰 글씨로 ‘飛’와 ‘龍’이 각각 쓰여 있다.
『肅宗御筆』(奎 11963)은 16幅으로, 숙종이 七言絶句 漢陽八景詩 8수와 중국의 五言詩 8수를 쓴 御筆詩 16폭을 목판에 새겨 찍은 목판본 御筆帖이다. 간년은 미상이다. 그러나 각각의 御筆詩 제1수 우측 상단에 ‘肅宗大王御筆’이라 刻字하고 있어 숙종 사후 판목에 새겨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두꺼운 上品壯紙에 찍었는데 刻劃이 매우 힘차고 굳세면서도 楷正하다. 漢陽八景詩는 서울의 팔경을 읊은 칠언절구로 楷書로 쓰여 있으며, 중국 六朝와 唐宋 문인의 五言詩는 草書로 쓰여 있다. 중국 문인들의 오언시 8수는 작자와 시 제목 없이 原詩만 적혀 있는데, 현재 규장각에는 御筆詩 목판 8장이 소장되어 있다. 漢陽八景詩는 서울의 여러 관청과 동서남북의 좋은 경치 8곳을 읊은 작품인데, 작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鄭道傳의 〈進新都八景詩〉에 나오는 각수의 시작품을 취하여 지은 七言絶句이다. 각각의 시제목은 〈畿甸山河〉, 〈都城宮苑〉, 〈列署星拱〉, 〈諸坊碁布〉, 〈東門敎場〉, 〈西江漕泊〉, 〈南渡行人〉, 〈北郊牧馬〉 등이다. 서울 도성과 여러 관청, 산천과 한강의 풍경 등을 회화적으로 묘사하고, 이를 바라본 흥취를 읊었다. 중국 五言詩 중에서 名篇을 선발하여 쓴 御筆詩 8폭에는 六朝와 唐宋의 시인 7명이 지은 작품 8수가 실려 있다. 선발된 시는 宋나라 邵雍의 〈淸夜吟〉, 唐나라 賈島의 〈尋隱者不遇〉, 六朝 晉나라 吳隱之의 〈酌貪泉賦詩〉, 당나라 王維의 〈鳥鳴磵〉, 당나라 宋之問의 〈途中寒食〉, 당나라 儲光羲의 〈江南曲〉과 〈長安道〉, 당나라 失名氏의 〈伊州歌〉 등이다. 〈古 26260〉에는 숙종의 御筆詩 8폭 중 賈島의 〈尋隱者不遇〉, 王維의 〈鳥鳴磵〉, 儲光羲의 〈江南曲〉과 〈長安道〉, 失名氏의 〈伊州歌〉 등 6폭이 남아 있다. 그러나 王維의 〈鳥鳴磵〉 시가 2폭 들어 있어 실제로는 8폭 중 5폭만이 남아 있다.
이처럼 숙종은 중국 5언시를 즐겨 썼던 듯하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숙종의 〈오언절구〉를 보면, 제1수는 邵雍의 〈淸夜吟〉이고, 제2수는 儲光羲의 〈長安道〉 둘째 수이고, 제3수는 宋之問의 〈途中寒食〉 첫째 수로 부제는 ‘題黃梅臨江驛寄崔融’이고, 제4수는 沈全期의 〈雜詩〉의 앞 부분이다. 原詩에 ‘黃花’는 ‘黃龍’으로, ‘偏照’는 ‘長在’로 되어 있다.
『御製御筆』[2](古 3428-357)은 1帖(7折)으로, 숙종이 延齡君(1699~1719)에게 준 七言絶句 4수를 모아 엮은 御筆帖이다. 연령군은 숙종의 여섯째 아들로 5세에 어머니 명빈 박씨를 여의었는데, 孝友가 극진하여 숙종의 사랑을 받았다. 숙종은 연령군이 죽자 祭文과 墓誌文을 직접 지었고, 영조도 즉위한 후에 연령군의 묘에 자주 治祭하였다.
경기도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肅廟御筆』에는 숙종이 1708년에 延礽君(뒤의 정조)에게 써준 오언절구 2수가 수록되어 있다. 숙종은 사저에 나가 있던 연잉군에게 별궁을 마련해 주고 이름을 彰義宮이라 하였는데, 이에 ‘養性軒‘이란 헌명을 짓고 오언절구 2수를 내리어 이를 나무판에 새겨 처마 안쪽에 걸게 하였다. “연잉군에게 집을 사주었는데 바로 寅平都尉(鄭齊賢)의 옛집이다. 특별히 헌명을 지어 養性이라 하고, 마침내 절구 2수를 나무판에 새겨 처마에 달게 하였다. ‘두 채 처마에 새로 편액을 내리니, 명명한 뜻이 어찌 없으리요. 존양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맹자 진심장을 깊이 음미하라(兩軒新賜額, 命意豈徒然. 欲知存養義, 深玩盡心篇.) 높은 누각 어찌 그리 드넓은가, 예전에 임금 가마도 찾은 적 있다네. 광명전과 아주 가까우니, 때로 올라와 내 마음 달래주거라(高閣何寬敞, 鑾輿昔己臨. 密邇光明殿, 時登慰我心.)’”
『唐詩』(奎 26260)는 6枚로, 肅宗이 중국의 六朝와 唐宋 시대 문인들의 五言詩를 뽑아 草書로 쓴 목판본 御筆帖이다. 숙종이 글씨를 쓴 시기와 이를 목판에 새긴 시기는 미상이나 동일본인 『肅宗大王御筆』(奎 11963) 御筆詩 제1수 宋나라 邵雍의 〈淸夜吟〉 우측 상단에 ‘肅宗大王御筆’이라 刻字되어 있어 숙종 사후에 판목에 새겨 제작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肅宗大王御筆』에는 위의 시 이외에 六朝 晋 吳隱之의 〈酌貪泉賦詩〉, 唐 宋之問의 〈途中寒食〉 등 총 8수가 실려 있다. 현재 규장각에는 숙종대왕어필시 목판 8장이 모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唐 賈島의 〈尋隱者不遇〉, 唐 王維의 〈鳥鳴磵〉(2매), 唐 儲光羲의 〈江南曲〉과 〈長安道〉, 唐 실명씨의 〈伊州歌〉 등 5수 6매이다.
(4) 景宗 : 경종의 글씨는 숙종의 글씨를 따랐다.
규장각에는 경종의 어필로 『景宗手筆』이 있다. 『景宗手筆』(奎軸 11961)은 10幅으로, 경종이 東宮으로 있던 9세 때의 글씨를 엮어 만든 필첩이다. 모두 10폭인데, 그중 8폭은 “敬以直內 義以方外”를 壯紙에 한 글자씩 큰 글자로 썼는데, 글씨는 해서이다. 나머지 2폭은 당시의 藝文館奉敎 兼春秋館記事官 世子侍講院說書인 閔鎭遠이 쓴 〈春宮手筆後跋〉이다.
(5) 英祖 : 영조의 글씨는 해서는 대부분은 蜀體이고 일부 晉體와 蜀體를 합친 것도 있지만, 晉體 풍이 강한 예는 小楷뿐이다. 또 行書에서는 글자의 짜임과 운필이 좀더 부드럽고 자유스럽다.
규장각에는 영조의 어필로 『敦寧府揭板』, 『御製御筆北苑帖』, 『英祖御筆』, 『宗簿寺揭版』 등이 있다. 그 중에서 『英祖御筆』(古 2410-38)은 1冊(13張)으로, 정조가 1776년 7월에 영조의 어필을 찍어 李最中에게 하사한 어필첩이다. 영조의 어필은 4언과 5언 등의 시구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行草 큰 글자로 쓰여 있다. 내용은 “瑞雪驗豊, 明農登熟. 仍此有祝, 近入親書.”, “朝來心有喜, 尺雪驗豊徵” 등이 큰 글자로 쓰여져 있다. 이어서 “七十六三柳枝”. “江海上一, 洗白紟巾” 등이 초서로 쓰여 있다. 『宗簿寺揭版』(奎 10314)은 1帖(2折 4面)으로, 英祖가 延仍君 때인 1714년(숙종 40)에 20세로 宗簿寺正으로 있었다가 王位에 올라 46년만인 1759년(영조 35)에 왕으로서 璿源寶閣에 다시 들러 世譜를 봉심하게 되자 깊은 감회에 젖어 쓴 글씨이다. 큰 글씨로 “昔年宗正本寺 今日袞衣拜閣”이라 쓰고 계속하여 해서 작은 글씨로 “皇朝崇禎紀元後三己卯 追憶昔年欲爲奉審 聖后世譜 四十六年後 復拜寶閣 是亦料外 涕潛自然”이라고 썼는데 이것을 목판으로 양각하였다. 『御製御筆北苑帖』(奎 9916, 9817)은 1冊(9張)으로, 英祖가 1770년(영조 46)에 창덕궁의 大報壇에 대하여 읊은 詩句를 써서 신하들에게 보여주고, 그에 대한 감상을 쓰게 하고서 詩句에 함께 엮어서 만든 책이다. 영조의 시구는 “北苑尺檀日月明, 西崗小閣風泉銘”인데, 큰 글씨로 한 면에 두 글짜씩 썼다. 여기서 ‘北苑尺檀’은 창덕궁 北苑의 大報壇을 말하며, ‘日月明’은 명나라를 상징한다. ‘西崗小閣’은 大報壇의 敬奉閣을 말하며, ‘風泉’은 『시경』의 편명으로 15國風 중에서 檜風의 〈匪風〉과 曹風의 〈下泉〉을 말하는데, 모두 나라가 쇠미함을 노래한 시이다. 시구 다음에는 徐命膺(1716~1787)의 발문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영조가 자신과 洪啓禧(1703~1771)에게 시구를 보여 주었다고 하였다. 集慶堂에서 영조의 글씨를 보고 느낀 감흥과 영조가 팔순으로 아직도 周道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말하고, 여러 사람들이 이 글을 두고두고 보도록 만들자고 하여 이 책을 짓게 된 과정을 서술하였다. 徐命膺의 문집인 『保晩齋集』에도 이 글이 실려 있는데, ‘臣命膺與臣啓禧’ 중에서 ‘臣啓禧’가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洪啓禧가 정조 즉위 후 삭탈관직된 것과 관계된 듯하다. 글의 말미에 써 있는 ‘崇禎三庚寅 閏五月下澣 資憲大夫行龍驤衛副司直 臣徐命膺 拜手稽首 謹書’도 『保晩齋集』에는 삭제되어 있다. 〈奎 9816〉본은 8장과 9장이 뒤바뀌어 있다. 『敦寧府揭版』(奎 10313)은 1帖(2折 3面)으로, 영조가 1759년(영조 35)에 역대 왕의 御眞을 봉안한 璿源殿에 酌獻禮를 올리고 왕실의 족보를 간직한 譜閣을 살핀 뒤에, 이에 대한 내용을 친필로 쓰고 이를 목판에 새겨 敦寧府에 걸어 놓았던 것을 탁본한 탁본첩이다. 이 첩은 모두 삼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번 접어 제본한 것이다. 표지에 ‘御製御筆敦寧府揭板摹本’이라고 되어 있고, 첩 끝에 ‘皇朝崇禎紀元後三己卯(1759)季夏上旬 書揭南楣’라 되어 있다. 첩의 내용은 “진전에 작헌례를 올리고, 보각을 살피니, 오십 년 동안의 작은 정성을 이제 조금이나마 펴게 된다(酌獻眞殿 奉審譜閣 五十年微忱 今日少伸矣)”의 18자이다.
(6) 高宗 : 고종의 글씨는 추사체의 영향이 보인다.
규장각에는 고종의 어필로 『御製懸板帖』이 있다. 『御筆懸板帖』(奎 10293)은 1帖(20折 29面)으로, 高宗이 1885年(高宗 22)에 궁궐 안에 있는 여러 건물의 현판의 글씨를 쓴 것을 모아 놓은 책이다. 한 面에 한 글자씩 大字로 썼는데, 한 面마다 테두리에는 비단을 둘러 장식하였다. 본서에 쓰인 건물은 漱芳齋, 華岳亭, 攬淸軒, 延春軒, 坤寧閣, 長安堂, 觀文閣, 香遠亭, 藕芳齋, 寶蘇堂 등이다.
(7) 大院君 : 대원군의 글씨는 추사의 제자로 추사체에 가장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
규장각에는 대원군의 글씨로 『大院君筆帖』이 있다. 『大院君筆帖』(古貴 3438-13)은 2帖으로, 흥선대원군 李昰應이 쓴 일기와 편지를 모아서 간행한 필첩이다. 필첩에는 1872년과 1873년 무렵에 자신의 생활과 당시의 정세 등에 대하여 적은 일기와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3) 왕비·종친
이외에도 규장각에는 왕실의 서간문이 몇 편이 있다. 예컨대, 대원군 이하응의 편지 『純元王后御筆』, 『純元王后御筆封書』, 『翼宗簡帖』 등이다. 『純元王后御筆』은 純祖妃 순원왕후(1789~1857)가 김흥근·김좌근 등 친정일가에게 보낸 한글 편지 25편을 모아 놓은 書簡帖으로, 宮體筆寫本이다. 내용은 주로 일상적인 문안, 헌종의 승하를 애도하고 철종을 잘 인도하려는 마음 등이 실려 있다. 『純元王后御筆封書』은 純祖妃 순원왕후(1789~1857)가 김흥근 일가 등에 보낸 한글 편지 33통을 모아 놓은 서간첩으로, 宮體筆寫本이다. 내용은 병문안, 먼 길을 갔다온 데에 대한 위로, 김흥근이 유배에서 풀려난 것에 대한 축하 편지 등이 실려 있다. 『翼宗簡帖』은 翼宗이 누이 明溫公主 등에게 보낸 시문과 그 번역문을 모아 엮은 2첩의 필사본이다. 乾卷에는 明溫·福溫·德溫公主 등에게 보낸 시문이 대부분이고, 坤卷에는 〈織錦圖〉와 〈龜文圖〉 등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 앞에 한시 원문과 한글음을 적고 뒤에 번역문을 실었다.
3. 의 미
御筆은 왕과 왕비의 글씨를 말하는데, 왕조시대에는 모든 면에서 왕의 권위가 절대 신성시되었기 때문에 어필 또한 왕과 같이 존엄과 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어필은 글씨의 기준이자 법으로서 글씨를 배우는 사람은 어필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전기의 문종·안평대군·성종 등이 松雪體의 大家였고, 선조의 계도와 후원으로 대성한 韓石峯의 글씨가 國書體로 자리잡은 조선중기에는 선조의 어필이 당시는 물론이고 원종·인조·효종·현종 등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조선후기 정조의 글씨관은 추사 김정희와 같은 인물에게도 영향을 주어 청나라 金石學이 조선에서 수용·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규장각 소장의 왕실 서예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국왕들의 개별 御筆帖으로 宣祖·孝宗·肅宗·景宗·英祖·高宗·大院君·純元王后 등이 있고, 다음으로 역대 국왕의 어필을 함께 모은 것으로 列聖御筆이나 御製御筆 등이 있다. 이외에도 약간의 서간문이 있다. 어필첩을 통해 역대 국왕의 필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太祖·太宗의 글씨는 顔眞卿體에 뛰어난 名筆이지만, 이와 달리 世宗 때에는 송설체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세종 제3왕자인 安平大君은 송설체의 진수를 터득해 20대에 이미 趙松雪을 능가한다는 평판을 얻었다. 세종도 송설체를 구사했을 것으로 보이나 그 필적이 남아 있지 않다. 世祖는 태조나 태종의 글씨체를, 이에 반해 成宗은 송설체를 따른다. 宣祖의 글씨는 이전의 문종·성종·인종·명종이 따랐던 송설체와는 달리 단정한 짜임과 근엄한 획이 있다. 孝宗의 글씨는 선조의 글씨를 따라 조선식 송설체를 썼다. 그 뒤에 顯宗에 이르면 효종의 어필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다시 가미하였다. 肅宗의 글씨는 획이 유연하고 가지런하다. 이는 획이 꺾이는 부분이 婉曲하게 돌아가면서 삐침이나 파임도 길고 부드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숙종의 글씨는 경종과 영조에게 이어졌다. 英祖의 글씨는 해서는 대부분은 蜀體이고 일부 晉體와 蜀體를 합친 것도 있지만, 晉體 풍이 강한 예는 小楷뿐이다. 또 行書에서는 글자의 짜임과 운필이 좀더 부드럽고 자유스럽다. 高宗과 大院君의 글씨는 추사체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종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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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규장각, 역대 국왕의 어필과 한글 자료들

조선시대 규장각 설립의 원래 목적은 역대왕들의 글과 글씨를 모아서 보관하고 이를 책자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규장각에서도 조선시대 역대 왕들과 왕실인사 등의 글씨를 소장하고 있는데, 직접 쓴 글씨도 있고, 목판 등으로 간행된 경우도 있다. 현재 규장각에는 선조가 그린 난초그림과 숙종, 영조이 글씨가 전시되어 있는데, 교육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상당한 명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조의 글씨는 여러 드라마나 초상화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던 불같은 성격을 잘 보여주는 힘있는 글씨체이다.

또한 규장각에서는 한글로 작성된 상당수의 고문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국왕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뜻을 일반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초기의 <용비어천가> 같은 문서와 후대 궁궐 여자들을 위해 작성했던 왕실 인사들의 한글 문서들이 있다. 조선후기에는 국왕이 한글로 편지를 쓸 정도로 한글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는 자료들이다.


선묘어필. 선조가 그린 난초그림이다. 상당히 잘 그려진 그림으로 보인다.

조선의 14대 국왕 선조의 친필과 그림을 모아 편찬한 어필첩, 선조가 중국 문인들의 한시를 쓴 친필과 묵죽도, 묵란도 그림 2점을 모아 1630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본첩에는 한시와 경구 등 20여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한시는 대부분이 당시이며, 경구로는 '효제충신정직','개과천선징분질욕' 등이 대자로 쓰여 있다. 대부분의 글씨는 해서로 썼으나 끝에 실린 칠언절구 1수는 초서로 썼다. 대나무와 난초를 그린 그림을 판각한 묵죽도와 묵란도도 실려 있다. <출처:규장각>


숙종대왕어필. 여자를 좋아했던(?) 숙종의 성격을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매우 단정한 글씨체이다.

숙종이 공주, 왕자, 신하들에게 내린 친필 시문을 음각하여 간행한 어필첩, 19대 국왕인 숙종은 자가 명보, 능호가 명릉으로 시문과 서법에 능하였다. 간행시기는 미상이다. 본첩에는 숙종이 숙명공주, 연잉군, 연령군, 김수항, 남구만, 임창군, 낭원군 등에게 내린 시문이 실려 있다. <출처:규장각>


영조어필. 영조의 초상화에 나타난 그의 얼굴에서 느끼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힘있는 글씨체이다. 

영조가 쓴 시구를 1776년 7월에 찍어 이최중에게 하사한 어필첩, 영조는 21대 국왕으로 이름이 금, 자가 광숙, 호가 양성헌이며, 조선의 사회 여러 분야를 중흥시켰다. 앞부분에 정조가 1776년 7월 30일 봉조하 이최중에게 영조의 어필을 하사한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영조의 어필은 4언과 5언의 시구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대자의 행서로 쓰여져 있다. 수록한 면은 상서로운 눈이 내려 풍년을 알리니 내년 농사가 잘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글 가운데 "서설' 두 글자이다. <출처:규장각>


동궁보목, 장헌세자(사도세자)가 8세때 쓴 글씨라고 하는데, 고정관념이 있어서 그런지 웬지 슬퍼보이는 느낌이다. 

정헌세자가 8세 때인 1742년 12월 11일 장악원 첨정 이익준의 아들 갑득에게 써준 글씨를 모아 엮은 필첩. 이익준은 1746년에 이를 첩자로 만들었는데, 표제는 "동궁보묵"이라 되어 있다. 장헌세자는 사도세자라고도 불리는데, 2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62년 뒤주에 갇혀 불행하게 죽었고, 후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본 첩에는 "군신유의 군의신충 군신지분의" 등 13자가 대자의 해서로 쓰여져 있고, 뒤에 이익준의 발문이 실려 있다. <출처:규장각>


사임당필적

신사임당이 초서로 쓴 칠언절구의 당시 6수를 1796년에 윤종의가 목판에 새겨 간행한 필첩, 신사임당은 본관이 평산으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데, 서화와 시문 등에 능하였다. 신사임당의 필적 6장, 윤종의의 발문 2장이 실려 있다. 대숙륜 2수, 사공서, 유장경, 이백, 황보염의 시가 각각 1수씩 실려 있다. 윤종의는 발문에서 사임당의 필적은 병산최씨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는데, 너무 영락하여 다시 판각한다고 하였다. <출처:규장각>


열성어필, 1725년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 목판으로 간행한 필첩. 172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태조, 문종, 세조, 성종, 인종, 명종, 선조, 원종,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등 13왕의 친필이 수록되어 있다.
전시면은 태조의 어필로서, 태조가 1401년에 쓴 허여문기이다. 태조가 김해 관기 출신의 첩 칠점선에게서 난 딸 며치를 위해 집터를 구입하여 가옥을 지어 주도록 명한 내용으로, 지어줄 집의 구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문서 끝에 태조의 수결이 있다. 국왕이 지은 문서이지만 이두식 표현이 많이 등장하며 글의 형식도 일반 민간문서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원문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규장각 소장 서예자료
규장각에는 역대 국왕의 어필과 명필로 알려진 문인들의 필첩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중국과 조선의 문인들이 지은 시문을 옮겨 쓴 것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자신이 지은 시문을 직접 쓴 경우도 적지 않게 실려 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도 실려 있어 선인들의 도타운 정을 짐작하게도 한다. 그리고 필첩은 유묵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목판 등으로 간행된 경우도 있다. 특히 친필 글씨는 유일본을 그 가치가 매우 큰데 그들의 묵향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 또한 오래 보존하고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행한 목판본 글씨도 선인들의 필체를 직접 접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필첩 중에서 역대 국왕의 글씨로는 선조, 효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등의 것이 남아 있다. 그리고 왕세자나 왕비 등 왕실 관련 인물이 쓴 필적도 남아 있다. 사도세자가 8세때에 쓴 글씨, 인목왕후와 순원왕후가 쓴 한글 편지와 시문, 흥선대원군이 쓴 편지와 일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위의 필적들은 국왕과 왕비 등이 직접 쓴 것으로 그들의 필적과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역대 명필들의 필첩으로 사육신, 김인후, 한호, 신사임당, 윤순, 이광사, 신위, 이영익 등의 것이 주목된다. 이들은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들로 이들의 필적을 통하여 우리나라 서예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신위의 필첩에는 시와 함꼐 매화 난초 그림이 실려 있어 옛 문인의 아취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출처:규장각>


인목왕후 필적

인목왕후의 필적을 모아 엮은 필첩. 인목왕후는 김제남의 딸로 선조의 계비가 되어 1602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본 첩에는 1603년에 쓴 한글 편지, 당나라 왕발의 <등왕각서> 일부, 육조 도잠의 <사시>, 저자 미상의 칠언율시 등 4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한글편지는 1603년 11월19일에 쓴 병문안 편지이다. <출처:규장각>


익종간첩.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그의 누이에게 쓴 편지이다. 누이를 위해서 한시를 일일이 한글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의 누이에 대한 정을 느낄 수 있다. 효명세자는 그의 아버지인 순조를 위해 창덕궁 후원에 사대부 가옥형태의 건물인 연경당을 짓고, 연경당 앞의 소박한 공부방인 의두합에서 사색을 즐기던 다정다감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가 누이인 명온공주 등에게 보낸 시문과 이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19세기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2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직금도>는 누이에게 보이기 위하여 그림으로 된 시를 한글로 적어 보낸 것이다. 이밖에 누이가 익종에게 보낸 편지와 시, 이에 대한 익종의 답과 시를 나중에 비낀 것이 있다. 누이에게 보낸 편지와 한시는 한글로만 되어 있어서 여성의 전형적인 문자 생활을 잘 보여준다. 누이에게 한시를 보내면서 한글과 음과 뜻을 풀이한 것도 있다. <출처:규장각>

규장각 소장 한글자료
규장각에 소장된 고문헌 중 상당수는 한글로 작성되어 있다. 세종이 한글, 즉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글자 그대로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통치자의 뜻을 만백성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도로 한그로 번역된 책이 편찬되었다. <용비어천가>나 <윤음언해>와 같이 왕조의 정통성이나 국왕의 말씀을 담은 책이 한글로 제작된 것이 이러한 목적에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글은 한문을 교육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한문이나 한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한글번역본이 필요했다. 이와 함께 학습이 용이한 한글은 창제 초기부터 여성의 문자생활을 위한 용도가 중요하였다. 이러한 관례로 인해 조선초기부터 여성의 교화를 위해 한글로 번역한 서적이 편찬되었으며 소해왕후의 <내훈>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글이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된 후에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글로 된 문학작품이 널리 읽혔고, 조선후기에는 여성을 주된 독자로 한 한글소설이 유행하였다. 19세기 후반 갑오개혁으로 한글은 국문으로 불리며 국가의 공식적 문자로 승인되었고, 국가에서는 한글을 본격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교재를 발행하였다. <출처:규장각>


용비어천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용비어천가. 이 책자는 후대인 17세기 새로 만들어 태백산 사고에 보관하던 것이라고 한다.

조선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지은 악장이다. 1447년에 처음 간행된 원간본의 후쇄본과 1612년에 다시 인쇄하여 사고에 내린 중간본 등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고 주석은 한문으로만 되어 있다. 한글 창제 초기의 일반적이 표기방식이다. 전시된 책은 1612년에 증간하여 태백산 사고에 내사한 것이다. <출처:규장각>


내훈.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엮은 여성들을 위한 지침서이다.

성종의 어머니로 흔히 인수대비라 불리는 소혜왕후 한씨가 중국 역대의 교화서에서 부녀자의 훈육에 필요한 부분을 뽑아 언해한 책이다. 1475년 간행한 것을 1611년 훈련도감자로 3건 3책으로 증간하였다. 한글로 토를 달아 원문을 제시하고 이어 언해문을 실었다. 이후 여성을 위한 책은 모두 순한글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처:규장각>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 경. 한글 보급에 많은 공헌을 한 세조가 간행한 한글이 들어간 불경이다.

인도의 승려 불타다라가 693년 백마사에서 간행했다고 알려졌으나 7세기말에 중국에서 만든 위경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석존과 문수보살 등 12보살 사이의 문답을 통해 대원각의 신묘한 이치와 그 관행을 설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각경>이라 줄여 불린다.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목판본 <원각경>언해본과 달리 본문의 언해가 없고 한글 구결만 수록되어 있다. 1465년에 원각사를 준공한 후 이책을 간행하기 위해 주조한 을유자로 찍었으며 구결을 위한 한글한자도 함께 만들었다. 한 면에 한문 대.중.소자, 한글 중.소자 등 다섯 종류의 활자가 사용되었다.


불성대보부모은중경. 정조의 명으로 화산
용주사에서 발간한 불경으로 부모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당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인사들이 이 불경을 보고 들으면서 상당히 긴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부모 은혜에 대한 소중함과 보답의 도리를 담은 불전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을 언해한 책이다.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 효를 강조하는 시대상과 맞물려 왕실은 물론 사찰과 민간에 의해 간행.유포되었고 시기, 지역별로 언해본으로 많이 간행되 당시 언어생활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 각 장에 도판이 있고 아래 좌우에 한문과 언해가 나란히 실려 있다. 전시된 책은 1796년에 수원 화산의 용주사에서 간행된 것이다.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곁에 능사로서 용주사를 창건하였는데, 이 책의 간행도 정조의 부친에 대한 효심의 발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규장각>


선원계보기략

조선 왕실의 족보의 하나로서 여러 국왕의 이름과 계보, 비빈의 책봉, 왕세자.왕세손의 탄생을 주로 기록한 책이다. 1681년에 처음으로 <선원계보기략>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여 일정한 체제를 유지한 채로 새 국왕이 즉위하거나 존호를 받는 등의 사유가 있을 때마다 증보.개간했는데, 1900년에 이르기까지 220년간 총 104회에 걸쳐 간행되었다.전시된 책은 1783년에 보간된 판본으로 <정조어제서>와 <범례>, <선원선계>, <열성계서지도>, <선원세계>, <열성팔고조도>와 역대 국왕의 자손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안동권씨 성화보(복제). 정조사후 권문세가들에 의한 세도정치 기간동안 권문세가들이 자신들의 족보를 규장각에 보관하게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족보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안동권씨족보이다. 규장각에는 여러 권문세가들의 족보를 보관하고 있는데, 당시 그들의 욕심과 자만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476년에 간행된 안동권씨의 족보이다. 우찬성 권제가 만든 가첩을 그 아들 권람과 생질 서거정 등이 증보하여 완성한 것을 경상감사 윤호가 안동부에서 간행하였다. 현존하는 최초의 간행본 족보이며 전시된 책은 1476년 당시의 판각본이다. 이 족보는 약 9,000명이 실려 있는데 안동권씨의 부계 자손 뿐 아니라 딸을 통해 이어지는 여러 성씨의 외손까지도 무제한 수록하고 있고, 간행당시까지 조선왕조가 배출한 문과급제자의 절반 이상을 수록하고 있어서, 조선전기 양반층의 족보 형태와 혈연 관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규장각>

규장각 소장 족보자료
어제와 어필을 주로 보관하는 왕실도서관에서 유래한 규장각은 <선원록>,<선원계보기략>,<선원속보> 등 4,400여 책에 달하는 왕실 족보도 소장하고 있다. 왕실족보는 국왕의 친인척에 관한 계보와 인적사항을 조사.기록한 것으로서 종부시라는 관청에서 편찬하였고, 국가의 족보로 인식되어 사고에 보관하여 소중하게 관리하였다. 규장각에는 100여종의 사대부 족보도 소장되어 있는데, 조선후기 경화사족을 배출한 명문 성관이 중앙정계를 장악해 가던 18~19세기 당대에 편찬한 판본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간행본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의 초간 당시 판본도 소장되어 있는데, 외손을 제한 없이 수록하는 조선전기 족보의 편집 방식과 혈연 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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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세조

 

성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 세손시절

 

정조 <국화도>

 

정조

 

익종 (효명세자)

 

http://www.instiz.net/bbs/list.php?id=pt&no=177397

다들 명필이었네요.

영조나 정조같은 경우엔 글씨에서 성격이 좀 보이는 것 같다긔 ㅋㅋㅋㅋ 딱 저렇게 쓸 것 같았긔 ㅋㅋㅋ

인조는 너무 찌질한 이미지인데 글씨를 의외로 잘 써서 놀랐긩 ㅋㅋㅋ

선조는 유려한 글씨체인데 멋을 많이 부렸고

숙종은 잘 쓰는데 은근 무심한 듯(?) 쓴 게 왠지 샤프한 엄친아 스타일 (근데 지도 지 잘난 걸 아는 그런 st) ㅋㅋㅋ일 것 같긩ㅋ

성종 이 분은 예술을 하셔야 할 듯 ㅋㅋㅋㅋ 글씨를 쓰랬는데 추상화를 그리셨네 ㅋㅋㅋ 좀 멋을 아시는 듯 ㅋㅋㅋ

효종도 꼼꼼한 성격이었을 것 같고

경종은 딱히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닌데 이 분도 글씨가 우왕 ㄷㄷㄷ

그나저나 마지막 세조 ㅎㄷㄷㄷㄷㄷ

이 분은 키보드로 치시고 활자로 찍으신 것 같은데...ㄷㄷㄷㄷㄷㄷ

성격 좀 예민하고 완벽주의자였을 것 같긔. 말년에 고생한 것도 스트레스 때문이 큰 듯... 아님 말공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