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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三昧經論}과 원효사상(Ⅰ) - 中觀·唯識의 화쟁적 종합을 중심으로 -

화엄행 2009. 3. 27. 22:08

{金剛三昧經論}과 원효사상(Ⅰ) - 中觀·唯識의 화쟁적 종합을 중심으로 - / 朴 太 源 / 울산대 철학과 교수

2008/09/18 오 전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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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朴 太 源/울산대
{金剛三昧經}·{金剛三昧經論}과 원효사상(Ⅰ)  

- 中觀·唯識의 화쟁적 종합을 중심으로 -                

朴 太 源/울산대 철학과 교수



Ⅰ. {금강삼매경}을 둘러싼 문제들



{금강삼매경}은 한국불교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경전이다. 贊寧(919-1001)의 {宋高僧傳}에 의하면, 이 경전이 세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7세기 중엽 신라 대중불교의 奇人 大安 화상의 편집에 의한 것이었고, 그 최초의 강설자는 역시 대안 화상과 깊은 교분이 있었던 신라불교의 간판 스타 元曉(617-686)였다.{{ {宋高僧傳} 卷4 義解編 元曉傳({大正新修大藏經} 卷50), p.730上-中.

}} 7세기 중반까지 동북아 불교권에서 거론되던 불교사상의 거의 모든 유형들을 망라하면서 고급 수준의 불교사상을 전개하는 이 경전이 학계의 특별한 주목을 받아온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금강삼매경}이 중국 초기선종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다. 달마의 二入四行說과 {금강삼매경}의 二入說의 상관 관계를 주목하면{{{金剛三昧經}·{金剛三昧經論}과 원효사상(Ⅰ) }}서 출발한 이 논의는 초기선종과 {금강삼매경}이 맺고 있는 일정한 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고 진행되어 왔다.{{) <宇井伯壽, {禪宗史硏究}(岩波書店, 1935), pp.23-24.> <水野弘元, [菩提達摩の二入四行說と金剛三昧經]({駒澤大學硏究紀要}13, pp.56-57.)> <鈴木大拙, {禪思想史硏究}(岩波書店, 1951), p.843.> <柳田聖山, {初期禪宗史書の硏究}(禪文化硏究所, 1967), p.27. 및 [金剛三昧經の硏究]({백련불교논집}3, 1993, pp.461-487.)> <田中·沖本 譯, {大乘佛典}11권 中國·日本篇(中央公論社, 1989, p.465.)> <金柄煥,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연구 - 觀行을 중심으로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97), pp.5-21.> 등.

}} {금강삼매경}이 주목받아온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불교의 거인 원효가 이 경에 대한 최초의 주석가이며, 그가 저술한 {금강삼매경론}은 원효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효 사상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금강삼매경}이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李箕永, [元曉思想의 獨創的 特性]·[元曉의 如來藏思想]({元曉思想硏究}1, 한국불교연구원, 1994)> <高翊晉, [元曉思想의 실천원리 -금강삼매경론의 一味觀行을 중심으로-]({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 韓國佛敎思想史}, 원광대출판국, 1975,> <佐藤繁樹, {元曉의 和諍論理}(민족사, 1996)> <金柄煥, {元曉의 金剛三昧經論 硏究 - 觀行을 중심으로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97)> <鄭舜日, [元曉의 一味觀行 硏究  - 金剛三昧經論을 중심으로 -]({如山柳炳德博士華甲紀念 韓國哲學宗敎思想史}, 원광대학교종교문제연구소, 1990.)> 등.

}}사상적 관심과는 별도로 문헌 비판적 논의도 {금강삼매경}에 대한 관심의 한 초점이 되어 왔다. 중국 초기선종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한 돈황문서의 발굴이래, 菩提達摩 二入四行說이 {금강삼매경}에 의거하고 있다고 추정한 학자들은 {금강삼매경}을 인도에서 전래된 경전으로 간주했었다. 그러나 水野弘元이 {금강삼매경}에 玄 (602-664)譯 이후에나 등장하는 용어들({반야심경}<648년 譯>의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明呪 是無等等呪의 四呪·{유식삼십송}<649년 譯>의 末那)이 나타난다는 점 등을 논거로 하여, 이 경전이 인도에서 撰述되고 중국에서 漢譯된 것(眞經說)이 아니라 중국에서 찬술된 僞經이라고 주장하자 사정은 급변하였다. 인도 찬술의 경전들에게만 眞經의 권위와 종교적 가치를 부여하던 사람들에게는 水野弘元의 僞經說로 인해 {금강삼매경}의 가치가 퇴색하는 것으로도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 문헌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태도는 부당한 종교적 선입견에 불과하다. 어차피 역사적 실존으로서의 붇다의 육성을 원형에 가깝게 전하는 문헌들은 대장경 중에서 극히 제한된 부분에 국한되는 것이며, 대다수 경전들은 붇다의 가르침이나 체험과의 동질성을 확신하는 후대인들의 작품이다. 그러나 계시종교가 아닌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는, 붇다에 의해 확인되고 제시된 깨달음의 경지와 길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의 체험이나 가르침, 주장도 모두 '깨달음의 성전(佛經)'에 등재됨을 허용한다. 자신의 사상이 붇다의 그것과 동일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붇다의 이름을 빌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대다수 후기 경전들은, 이런 이유로 인해 꾸준히 대장경에 편입되면서 불경의 권위와 가치를 인정받았다. 대장경이라는 불교 문헌 체계는, 계시종교의 성전처럼 그 어떤 변화도 용납할 수 없는 '닫혀 있는 완결형'이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체험의 개방성으로 인해 모든 사람의 참여를 허용하는 '열려 있는 진행형'인 것이다. 역사를 통해 대장경의 양적 증대가 꾸준히 진행되고, 불교계는 그러한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후일 대장경에 편입되는 경전들에 대해서, 인도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眞經이라 하여 그 권위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중국인이나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僞經이라 하여 종교적 가치를 무시하려는 태도는 대장경의 성격을 간과한 편견일 뿐이다.

전통적으로 인도 찬술의 경전들에 대해서만 종교적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던 사람들에게는 水野弘元이 제기한 {금강삼매경}의 中國撰述說이 {금강삼매경} 권위와 가치의 퇴색으로 여겨졌을 법하다. 그러나 불교 대장경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들에게는 중국찬술설이 오히려 {금강삼매경}의 가치와 역사적 진실을 새롭게 발굴하는 획기적 계기로 작용한다. 水野弘元의 주장 이후 Walter Liebenthal, 柳田聖山 등이 연이어 나름대로의 중국찬술설을 개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찬술설들은 {금강삼매경}이 신라에서 최초로 등장했음을 전하는 {송고승전}이나 {삼국유사}의 명백한 설화를 애써 외면하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木村宣彰은 {금강삼매경} 찬술문제를 신라불교 내에서 접근할 것을 제안하는 동시에, {금강삼매경}은 攝論宗이나 禪사상 등 당시 중국의 다양한 불교사상을 佛說의 권위 아래 회통시키고자 大安이나 元曉 주변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일 것이라 추정하였다. 그가 제시한 이 신라찬술설은 {금강삼매경}의 연구에 새로운 물꼬를 튼 셈이다. 이어 Robert. E. Buswell은 {금강삼매경}의 찬술자로서 신라의 法朗을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법랑의 활동시기로 볼 때 그가 {금강삼매경}을 찬술했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金煐泰는 {금강삼매경}의 신라찬술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끝에 신라 대중불교의 주체였던 大安·惠空·蛇福 등을 그 찬술자로 지목한다. 이어 南東信 역시 김영태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대안을 비롯하여 대중교화에 뜻을 둔 일군의 승려들이 자신들의 이상형인 梵行長者를 주요 등장 인물로 하는 {금강삼매경}을 편찬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  <水野弘元, [菩提達摩の二入四行說と金剛三昧經]({駒澤大學硏究紀要}13)>     <柳田聖山, {初期禪宗史書の硏究}(禪文化硏究所, 1967)> <木村宣彰, [金剛三昧經の眞僞問題]({佛敎史學硏究}18-2)> <金煐泰, [신라에서 이룩된 금강삼매경]({불교학보}25,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1988, pp.11-37.)> <南東信, [新羅 中代佛敎의 성립에 관한 연구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분석을 중심으로-]({韓國文化}21,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98, pp.113-142.)>. {금강삼매경}에 대한 문헌비판 성과 및 그 연구사적 검토는 <金柄煥, [元曉의 金剛三昧經論 硏究 - 觀行을 중심으로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97), pp.5-21.> 및 <南東信, [新羅 中代佛敎의 성립에 관한 연구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분석을 중심으로-]({韓國文化}21,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98, pp.115-124.)에서 시도되고 있다. }}

水野弘元의 僞經說 제기 이후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보면, {금강삼매경}이라는 문헌은 종교적 태도나 사상적 수준 및 문제 의식을 공유하는 일군의 신라 불교인들, 특히 大安이나 元曉로 대변되는 대중불교 운동가들이 그 찬술의 주역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금강삼매경}의 찬술자를 확정시키는 객관적 자료들이 새롭게 발굴되지 않는 한, 大安과 元曉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불교인들이 경전 찬술의 주역일 것이라는 추정이 설득력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본다면 {금강삼매경}과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그 성립 배경이나 사상 내용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금강삼매경}이 신라불교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그 찬술의 동기나 배경이 궁금해진다. 단지 불교사상의 통상적 표현을 위해서라면 굳이 佛說의 권위를 빌리는 경전을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설득력을 위해 경전의 권위까지 필요로 하는 그 어떤 강렬한 문제 의식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금강삼매경}의 찬술자(들)가 표현하고 싶었던 문제 의식이나 관심사는 무엇이었을까? 경전의 권위를 빌어서까지 설득력을 확보하고자 했던 주장이나 관점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本考는 그 해답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금강삼매경}의 찬술 동기나 배경에 대한 학계의 기존 이론을 확인, 검토한 후,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사상 지향을 분석하여 두 문헌의 찬술 동기 및 배경을 추정하고 그 사상사적 의미를 도출해 봄으로써 해답의 실마리를 모색해 본다.





Ⅱ. {금강삼매경}의 찬술 동기 및 배경에 관한 논의들

僞經으로서의 {금강삼매경} 찬술의 사상사적 의미와 관련하여, 종래 학계에서는 주로 {금강삼매경}과 중국 초기 선종과의 관련성을 주목하였다. 東山法門이 천태교단의 {摩訶止觀}에 대항하는 입장에서 동산법문의 사상적 원류를 佛說의 권위에서 이끌어내기 위하여 僞經을 찬술한 것이 {금강삼매경}이었다는 柳田聖山의 견해는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 柳田聖山, {初期禪宗史書の硏究}(禪文化硏究所, 1967), p.27. 및 {無の探究}(角川書店,1969), p.102.

}} 그러나 木村宣彰이 이러한 중국 선종 중심 연구의 편향성을 지적하는 동시에, 신라불교의 通佛敎性을 주목하여 {금강삼매경}은 攝論宗이나 禪사상 등 당시 중국의 다양한 불교사상을 佛說의 권위 아래 회통시키고자 大安이나 元曉 주변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일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고{{) 木村宣彰, 앞의 논문, pp. 106-117.

}}, 이어 Robert. E. Buswell은 {금강삼매경} 찬술자의 자격 조건으로서 1){능가경}과 {기신론} 등의 여래장사상에 정통할 것, 2){금강삼매경} [입실제품]의 '二入論'이나 '守一入如來禪' 사상을 고려할 때 중국 초기선종의 교설 및 東山法門系에 정통할 것, 3){송고승전}의 설화를 고려하여 신라인일 것 등을 거론하면서, 그 적격자로서 法朗을 지목한다.{{) Robert. E. Buswell, 앞의 책, p.174.

}} 동시에 그는 道信(580-651) 문하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법랑이 경주의 화엄종 교학파에 대한 도전적 의미로서 동산법문을 전파하고자 {금강삼매경}을 찬술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앞의 책, pp.170-177.

}} 한편 金煐泰는 '經說의 내용과 용어 및 전체의 짜임새 등으로 볼 때 {금강삼매경}은 通佛敎思想인 신라불교의 교학이 佛說의 진수를 재결집하여 신라에서 성립시킨 경전'이라면서 그 찬술 가능한 인물들로서 신라 대중불교의 주체였던 大安·惠空·蛇福 등을 지목한다.{{) 金煐泰, 앞의 논문.

}}이러한 신라찬술설을 의식했는지 柳田聖山은 자신의 종래 입장을 수정한다. 그에 의하면 {금강삼매경}의 성립시기에는 達摩·慧可를 祖로 하는 楞伽宗이 이미 名相의 學으로 전락해 있었기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달마를 初祖로 하는 東山法門 계열에서 玄  唯識이라고 하는 강렬한 性相分判의 움직임에 대해 {금강삼매경}으로써 반격을 가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원효가 玄 ·慈恩의 新譯佛敎를 사모하여 入唐을 시도하다가 도중에 깨닫고서 발길을 돌렸다는 것은, 당시 중국불교의 주류인 玄 ·慈恩系의 움직임에 대하여 엄격하게 비판하는 뜻을 확실히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 海東佛敎는 玄 ·慈恩의 唯識 法相宗에 대항하여 十地論系의 如來藏에 경도되어 있었는데, 원효는 {금강삼매경}에 의해 그것들을 집대성한 것이라 주장한다. 아울러 "원효는 {金剛三昧經論}三卷의 작자이고 그 중에서 텍스트를 추출해서 八章의 {금강삼매경}으로 한 것은 大安聖者이다"고 말한다.{{) 柳田聖山, [金剛三昧經の硏究]({백련불교논집}3, 1993), pp.461-487.

}} 대안은 원효가 지은 {금강삼매경론} 가운데서 경전 부분만을 발췌하여 편집하였다는 뜻이 되므로, 결국 원효가 {금강삼매경}의 찬술자라는 주장이다. {금강삼매경}은 당시 중국불교의 주류였던 玄 ·慈恩의 唯識 法相宗에 대항하여 해동불교의 十地論系의 如來藏思想 경향을 집대성하여 원효에 의해 찬술되었다는 것이다.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성립 배경으로서 玄 ·慈恩의 新唯識에 대한 신라불교의 대항 의식을 거론하는 柳田聖山의 주장에 착안한 듯, 南東信은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의 성립을 7세기 중엽 동아시아 불교계의 현안이었던 新·舊譯佛敎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구도 속에서 설명해 보려고 시도한다. 그리하여 {금강삼매경} 성립은, 신라불교의 측면에서는 대중교화에 뜻을 둔 大安을 비롯한 일군의 승려들이 자신들의 이상형인 梵行長者를 주요 등장인물로 하는 {금강삼매경}을 편찬한 것이고, 동아시아불교의 차원에서는 般若空觀思想을 주장하는 일파가 玄 의 新唯識 중심의 新譯佛敎에 대응하기 위하여 자파의 학설을 중심으로 舊譯佛敎의 주요사상을 망라하고 여기에 佛說의 권위를 부여하여 편찬한 것이라 추정한다. 또한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은 각기 사상적 지향점이 다른데, {금강삼매경}의 사상적 기조는 반야공관사상인데 비하여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空有和諍의 관점에서 경에 접근하며 나아가 {기신론}의 一心二門 체계를 빌어와서 新唯識과 경을 화쟁시키고 있다고 한다. 즉 {금강삼매경}이 中觀의 空에, 현장의 新唯識이 唯識의 有에 해당하는데, 원효는 {기신론}의 一心思想에 의거하여 {금강삼매경론}을 통해 이 양자를 화해시키고자 한 것이었다고 한다. {금강삼매경}은 반야공관을 중심으로 舊譯佛敎의 입장을 종합함으로써 현장의 新譯佛敎에 대하여 대립적 자세를 선명히 한 반면,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을 통하여 양자의 대립 갈등을 一心思想으로 지양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전성을 구가하는 신라 中代佛敎의 성립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南東信, [新羅 中代佛敎의 성립에 관한 연구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분석을 중심으로-]({韓國文化}21,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98), pp.113-142.

}} 결국 南東信은 {금강삼매경}의 찬술자로서 신라 대중불교의 주역들을 지목하는 金煐泰의 견해와, 현장·자은의 법상 신유식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신라불교 경향을 설정하는 柳田聖山의 주장을 종합하는 한편, 전통적으로 원효사상의 특징으로 지목되던 和諍性, 특히 空有和諍의 문제를 이끌어 들여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사상적 지향을 구별하면서 두 문헌 성립의 사상사적 의미를 도출하고 있는 셈이다.

{금강삼매경}이 초기선종의 맥락에서 성립된 중국찬술의 僞經일 것이라는 추정은, 그 견해의 대표자격인 柳田聖山 자신이 원효를 지목하는 신라찬술설로 입장을 수정할 정도로 설득력이 퇴색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금강삼매경}의 찬술 동기 및 배경을 신라불교의 맥락에서 탐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신라불교와 얽혀 있는 중국불교의 사정을 동시에 고려하여 시야를 7세기 중엽 동아시아불교로 확대하여 접근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신라불교의 정황이 그 中核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신라불교의 通佛敎性을 주목하여 {금강삼매경}은 攝論宗이나 禪사상 등 당시 중국의 다양한 불교사상을 佛說의 권위 아래 회통시키고자 大安이나 元曉 주변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일 것이라는 木村宣彰의 견해는 무난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 견해는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찬술 동기나 배경의 보다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정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通佛敎思想인 신라불교의 교학이 佛說의 진수를 재결집하여 신라에서 성립시킨 경전이 {금강삼매경}이라면서, 그 찬술 가능한 인물들로서 신라 대중불교의 주체였던 大安·惠空·蛇福 등을 지목하는 金煐泰의 견해는, 신라불교의 通佛敎性과 함께 신라불교 특유의 일련의 대중불교 운동과 그 주역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일보 진전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道信 문하에서 수학한 법랑이 경주의 화엄종 교학파에 대한 도전적 의미로서 동산법문을 전파하고자 {금강삼매경}을 찬술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Robert. E. Buswell의 견해는 더욱 구체적 정황을 설정하기는 하지만, 법랑의 활동 시기를 오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설득력을 잃고 있다. 또한 중국 초기 선종과의 관련성을 의식하여 {금강삼매경}을 화엄 교학파에 대한 선종 진영의 대항적 작품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러한 추정이 과연 경이 등장하는 7세기 중엽의 신라불교계 정황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금강삼매경}은 당시 중국불교의 주류였던 玄 ·慈恩의 唯識 法相宗에 대항하여 해동불교의 十地論系의 如來藏思想 경향을 집대성하여 원효에 의해 찬술되었다는 柳田聖山의 수정된 견해는, {금강삼매경}의 성립사정을 한반도와 중국이 얽혀 있는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맥락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그 立論의 論據들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원효의 入唐 포기가 당시 중국불교의 주류인 玄 ·慈恩系의 움직임에 대한 엄격한 비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당시의 海東佛敎가 玄 ·慈恩의 唯識 法相宗에 대항하여 十地論系의 如來藏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하는 이해는 설득력이 없다. 원효 입당 포기에 대한 의미 부여는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원효의 사상은 법상 신유식을 비판적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여래장사상에 경도되어 있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그간 우리 학계의 원효 연구에서도 이미 충분히 논구되고 있다. 원효 사상의 유식학적 기반과 관련해서는 論者의 {대승기신론사상연구(1)} 중 제3장 [원효의 관점] 부분을 참고할 수 있다(朴太源, {대승기신론사상연구(1)}, 민족사, 1994). }}

金煐泰의 대중불교 그룹의 지목과 柳田聖山의 '玄  新唯識에 대한 사상적 대항 의식' 설정을 종합하는 동시에 원효의 空有和諍을 연결시켜,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 성립의 사상사적 의미를 新譯과 舊譯불교의 사상 갈등 구조 속에서 해석해 보려는 南東信의 견해는,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사상 지향을 다른 것으로 판정하고 있다는 점이 우선 주목된다. 원효 {금강삼매경론}의 탁월한 내용에 압도되어 원효 주석을 통해 {금강삼매경} 사상을 이해하려는 기존의 관행에서 탈피하여, 두 문헌의 사상 지향을 각기 독립적으로 접근하여 파악해 보려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 돋보이는 시도의 결과물은 매우 의심스럽다.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성립을 아예 7세기 중엽 동아시아 불교계의 현안이었던 新·舊譯佛敎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구도 속에서 설명해 보려는 南東信의 시도는 新唯識과 그에 대항하는 특정 사상 진영으로써 대립 구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新譯과 舊譯佛敎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 성립의 사상사적 의미를 동아시아 사상계의 구도 속에서 읽어내려는 시도는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거시적 조망이다. 그러나 이 조망의 논거들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南東信의 입론의 핵심은 세 단계로 구성된다. ⅰ){금강삼매경}이 반야공관사상을 주장하는 舊譯佛敎의 종합이라는 판단, ⅱ)이 판단에 근거하여 新譯佛敎를 대변하는 法相 新唯識과의 갈등 구조 설정({금강삼매경}으로 종합된 舊譯佛敎 진영의 空과 이에 대립하는 新譯 法相唯識의 有의 대립), ⅲ){금강삼매경론}에 의한 원효의 空·有 和諍이 그것이다. 그런데 입론의 전제인 ⅰ)의 타당성부터가 의문이다. ⅰ)의 논거로서 남동신은 {금강삼매경}이 新譯{반야심경}의 구절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과, 경 전반에 걸쳐 空사상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금강삼매경}이 취하고 있는 新譯 용어의 다른 하나는 {유식삼십송}의 '末那'이다. 따라서 新譯{반야심경}의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明呪 是無等等呪'라는 용어를 채택한 사실이 곧 {금강삼매경}의 반야공관 노선을 지지하지는 못한다. 또 {금강삼매경}에는 空사상이 기조를 이루므로 반야공관사상이 그 사상 지향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다. 불교사상 가운데 空사상을 기조로 하지 않는 것은 없다. 문제는 그 空의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중관과 유식은 모두 空의 진실(眞如)을 목표로 하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그 空의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 차이를 보여준다. 중관은 緣起 - 無自性 - 空의 논리에 입각한 '철저한 절대부정'의 방법을 택하는데 비해, 유식은 전도·왜곡된 遍計的 인식을 전도되지 않은 如實한 인식으로 바꾸는 '인식적 전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금강삼매경}의 空사상의 맥락이 중관적인가 아니면 유식적인가 하는 점을 문제삼아야 한다. {금강삼매경}에서는 중관적 방식의 전형을 수용하고 있는 경우도 나타나지만, 전반적으로는 唵摩羅識으로 대변되는 인식의 문제가 주조를 이룬다. 다만 주목되는 것은 유식의 심식설적 언어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實體化의 오해'를 겨냥하여 적극적으로 그 空性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금강삼매경}이 시도하는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의 한 방식인 것이다.{{) 이에 대한 詳論은 後述한다.

}} 이러한 空사상의 특수한 맥락을 간과한 채, 남동신은 空 개념이 등장하는 언구들을 모두 반야공관사상이라 하면서 중관과 유식의 空·有 대립 구조와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금강삼매경}에 풍부하게 등장하는 명백한 唯識的 구절들을 외면하고 있다. {금강삼매경}이 舊譯佛敎의 반야공관이나 중관사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금강삼매경}을 중심으로 舊譯佛敎와 新譯佛敎의 대립 갈등을 설정하는 논거 ⅱ)도 설득력을 잃게 된다. 그런데 舊譯·新譯의 갈등과 대립은 역사적 사실이며 동아시아불교계의 사상적 현안이었음도 명백하다. 그러나 玄 의 譯經을 기점으로 시작된 舊譯·新譯佛敎 갈등이 불교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어떻게 평가하며, 또 그 新·舊譯 갈등을 한반도 불교계에 과연 어느 정도 적용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舊譯과 新譯은 비록 일부 교리상의 異見으로 인한 대립 갈등(九識·八識, 一乘思想·三乘思想, 佛性論에서의 一性說·五性說, 新譯으로 인해 부각된 중관, 유식의 空·有 대립 문제 등)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불교라는 동일 사상체계 안에 놓여 있다. 따라서 舊譯과 新譯의 갈등을 전면적 상호배타 관계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新譯으로 인해 생겨난 일부 교리상의 異見들을 둘러싼 현실적 논쟁과 대립은 있었지만,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서서 대치하는 적대적 두 진영의 다툼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신라불교계 역시 新譯으로 인해 생겨난 교리적 쟁점들이 거의 시차 없이 소개되고 또 거론되기는 하였지만, 마치 신라불교계 전체가 舊譯佛敎와 新譯佛敎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갈등, 대립한 것처럼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신라불교계에서 신, 구역의 문제가 과연 전면적 갈등 대립 구조로 자리잡았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신라불교계의 사상사적 흐름을 논구함에 있어서 新, 舊譯의 갈등을 고려하여 거시적 구도로 접근하는 것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도식적 적용은 자칫 부당한 의도적 과장이 될 소지가 많다. {금강삼매경론}에 나타나는 원효의 空·有 和諍을 거론하는 ⅲ)의 논거는 충분히 타당하다. 신라불교계를 新, 舊譯 양대 진영의 갈등 구도로 보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대승불교의 두 축인 중관· 유식의 대립적 개성이 신라불교계의 중요한 사상 과제였다고는 볼 수 있다. 신라불교계의 사상 수준으로 볼 때 그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며, 특히 新譯 이후 부각된 중관·유식의 空·有 논쟁이 원효를 비롯한 신라불교인들의 지속적 관심사였음은 실증적으로 확인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을 통해, {대승기신론소}에서 선언적 언급 이상으로는 전개시킬 수 없었던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 의지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금강삼매경론}에 나타나는 원효의 空·有 화쟁이 高翊晉이나 南東信의 견해처럼 기신론의 一心二門 구조에 입각하여 전개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원효가 一心을 空·有 화쟁의 토대로 삼는 것은 분명하지만, 二門의 구조에 입각하고 있다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기신론의 二門은 기본적으로 유식적 맥락에 놓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 상세한 논의는 論者의 {大乘起信論思想硏究(1)}, pp.68-112 참조.

}} 그리고 원효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금강삼매경} 자체가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을 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南東信의 견해와는 달리,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은 사상 지향을 달리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상적 의도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이하의 논의에서 입증될 것이다.





Ⅲ.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사상적 지향



{금강삼매경}의 경우 그 형성과 보급의 진원지는 현존하는 자료에 의거하는 한 아무래도 신라불교계로 보인다. 그런데 {금강삼매경}의 신라찬술설을 전제로 할 경우, 그 추정 가능한 찬술자로서는 단연 대안과 원효 그룹이 주목된다. 따라서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금강삼매경}의 성립 동기 및 배경과 무관할 수가 없다. 두 문헌은 불교 사상의 수준과 성격 및 종교적 태도 등에서 호흡을 같이 하는 대안과 원효 계열이 자신들의 문제 의식이나 관심사를 표현하고 실현하려는 노력의 산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안이 八品으로 경의 편집을 마친 후 원효를 講釋者로 지명하고 있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금강삼매경}과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이 비록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이 두 문헌의 사상 지향이 동일한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따라서 원효의 {금강삼매경} 주석과 {금강삼매경} 자체의 사상을 당연히 동일할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참고해야 비로소 {금강삼매경}의 내용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질 정도로 원효의 주석은 탁월하다. 그러나 가급적 두 문헌을 독립적으로 접근한 후 양자를 비교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로 두 문헌을 검토해 보면, 양자의 사상 지향은 같지 않다는 南東信의 견해와는 달리, 두 문헌이 그 사상 지향에 있어서도 예상대로 동일 궤도에 놓여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에 나타나는 동일한 사상 지향을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는 中觀과 唯識思想의 화쟁적 종합을 지향하는 것이고, 둘째는 大乘禪思想의 천명이며, 셋째는 眞俗不二의 대중불교 지향이다. 그리고 이 세 지향의 근본 원리는 '本覺·始覺을 중심으로 하는 覺사상'이다. 本考에서는 세 공통점 가운데 우선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 지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중관·유식의 空·有 대립 문제와 신라불교 및 원효

대승불교사상의 양대 축인 중관과 유식은 空의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 매우 대조적인 개성을 보여준다. 양자 모두 공의 실제인 眞如를 목표로 하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중관은 緣起 - 無自性 - 空의 도리에 입각하여 世俗에 卽하여 세속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세속 內에서 세속의 空性을 성취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비하여, 유식은 세속을 顚倒된 遍計的 인식의 결과(遍計所執性)라고 보아, 그러한 세속이 본질적으로는 독자적 실체가 없는 空不可得한 寂滅이라는 점을 여실히 깨달아 왜곡되지 않은 본래의 진실성(眞如, 圓成實性)을 성취하는 방식을 택한다. 다시 말해, 양자 모두 空의 진실을 추구하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 중관은 緣起 - 無自性 - 空의 논리에 입각한 철저한 절대부정의 방법을 택하고, 유식은 전도·왜곡된 遍計的 인식을 전도되지 않은 如實한 인식으로 바꾸는 '인식적 전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유식에서는 인식이 전도되어 가는 과정과 내용을 밝히는 心識說이 발달하게 된다. 그런데 유식의 三性說(遍計所執性·依他起性·圓成實性)은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을 '有的'으로 긍정하는 데 비해, 중관은 시종일관 無的 부정의 입장을 취한다. 유식의 입장에서 볼 때 의타기성(緣起로 생겨난 현상)은 편계소집성(실체적 오해로 두루 헤아려 집착하게 된 허상)의 의지처인 동시에 원성실성(의타기성에 대한 遍計所執的 왜곡을 극복하여 의타기성을 空의 진실로서 파악하게 된 진여의 상태)의 의지처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식은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을 有的으로 긍정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 유적 긍정, 특히 圓成實性에 대한 유적 긍정을 인식의 측면에서, 다시 말해 心識說의 맥락에서 표현하는 언어가 바로 舊譯인 眞諦唯識에서의 '第九識(阿摩羅識·眞識·無垢識)'이다. 중국불교에 있어서 舊譯과 新譯, 특히 眞諦 唯識과 현장 法相唯識의 중요한 차이점도 여기에 있다. 彌勒의 {瑜伽師地論} [攝決擇分]의 眞諦譯인 {決定藏論}에서는 '阿羅耶識(8識)을 對治하여 阿摩羅識(9識)을 증득한다'고 되어 있는 것이, 玄 譯 {瑜伽師地論}에서는 '阿賴耶識을 對治하여 轉依를 얻는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決定藏論}, 新修大藏經30, p.1020b; {瑜伽師地論}, 新修大藏經30, p.     581c.

}} 眞諦唯識이 설정하는 九識(阿摩羅識·眞識·無垢識)은 유식사상의 有的 긍정 경향이 강한 형태로 심식설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無的 부정과 有的 긍정으로 대립되는 중관과 유식의 이러한 대조적 개성은 이른바 중관·유식의 空·有 논쟁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淸辨(490-570)과 護法(531-561)의 견해를 중심으로 한 空·有 논쟁에 대해서는 山口益의 {佛敎における無と有との對論}(東京, 山喜房佛書林, 1975), 安井廣濟의 {中觀思想の硏究}(京都, 法藏館, 1970) 중 [中觀思想と瑜伽唯識思想との對決]에서 상세히 논하고 있다.    }} 중관의 입장에서는 유식의 有的 긍정이 자칫 空의 진실, 眞如의 경지를 實體化할 수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게 되는 반면, 유식의 입장에서는 중관의 無的 부정이 자칫 실현해야 할 긍정적 가치마저 설자리를 잃게 하는 虛無主義的 惡取空으로 전락할 소지가 많다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원효 당시의 신라불교는 중관과 유식의 이와 같은 대조적 개성이 충분히 음미될 수 있는 여건이었다. 원효의 저술 목록을 보면 중관과 유식의 중요 논서들에 대한 저술이 망라되어 있는데, 이는  원효 당시의 신라불교계가 관련 문헌이나 연구 수준 등에 있어서 중관과 유식사상의 전모와 개성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여건에 놓여 있었음을 알려준다. 특히 원효가 宗要와 料簡(이 저술들은 현존하지 않음)을 저술하였다고 하는 {掌珍論}은 淸辨이 護法의 견해를 논파하고 있는 논서이기 때문에, 원효가 청변과 호법을 에워싼 중관·유식의 대립적 논의들을 충분히 소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경덕왕(742-764) 때 활동하였고 海東의 瑜伽祖라 일컬어지는 太賢은 {成唯識論學記}의 첫머리에서 淸辨 등의 중관과 護法 등의 유식을 二宗으로 거론하면서, 이 둘 사이에 실제로 諍論이 있었다는 說(圓測 등)·諍論이 없었다는 說(順憬 등)·언어로는 다툼이 있지만 그 뜻은 동일하다는 說(元曉 등)의 세 입장을 소개하고 있는데,{{) 太賢, {成唯識論學記}, 韓國佛敎全書3, pp.483b-484a. }} 신라불교계에서 중관과 유식의 대조적 개성이 명백하게 인지되어 논의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원효는 대승불교사상의 양대 축인 중관과 유식사상의 대립적 개성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이 대립적 개성의 갈등 관계를 해소시키려는 강한 문제 의식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원효의 이러한 문제 의식은 {大乘起信論別記} 大意文에 선명히 나타나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세우지 않은 바가 없으며 깨뜨리지 않은 바가 없다. 中觀論·十二門論 等과 같은 것은 모든 집착을 두루 깨뜨리고 또한 깨뜨린 것을 또 깨뜨리되 깨뜨리는 주체와 깨뜨려지는 대상을 다시 허락하지는 않으니, 이것을 '보내기는 하되 두루(허락)하지는 않는 論'이라고 말한다. 瑜伽論·攝大乘論 등은 深淺을 두루 세워 법문을 판별하되 자신이 세워놓은 법을 녹여 보내지는 않으니, 이것을 '허락하기는 하되 빼앗지는 않는 論'이라고 말한다. 지금 이 대승기신론은 지혜롭고 어질며 깊기도 하고 넓기도 하여, 세우지 않음이 없으되 스스로 보내 버리고 깨뜨리지 않음이 없으되 다시 허락한다. '다시 허락한다'는 것은 '저 보내 버리는 것이 보냄이 다하여 두루 세움'을 드러내며, '스스로 보내 버린다'는 것은 '이 허락하는 것이 허락함을 다하여 빼앗음'을 밝히니, 이것을 모든 論의 祖宗이요 여러 다툼의 評主라고 일컫는다."{{) {대승기신론별기}, 한국불교전서1-678a.

}}

{별기} 대의문에서 원효는 중관·유식이 보여주는 無的 부정과 有的 긍정이라는 대립적 개성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동시에 그 화쟁적 종합을 기신론사상에서 구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원효는 이후 {別記}나 {疏} 그 어디에서도 기신론 사상이 중관의 無的 부정과 유식의 有的 긍정을 지양, 종합하고 있는 것이라는 관점을 입증해 주는 구체적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 이러한 논의를 진행하지도 않는다. 그의 기신론 주석에 중관과 유식 이론이 어느 정도 양적 형평을 이루며 활용된다면 또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기신론 주석에서 유식사상의 활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기신론 사상의 내용이나 체제상 원효의 유식적 해설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래서인지 원효는 {별기} 이후에 저술된 {소}의 標宗體文에서는 이 내용을 삭제해 버리고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上記의 {별기} 대의문 구절이 과연 원효의 起信論觀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게 된다. 論者는 {별기} 대의문 구절이 원효의 기신론관을 대변하기 어렵다고 보며, 기신론 사상 자체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에도 중관과 유식을 等價的으로 竝立시키며 기신론사상을 그 지양, 종합이라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기신론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식사상의 맥락을 기조로 하면서 나름대로의 개성을 선명히 확보해 간 논서라고 보기 때문이다.{{ ) 이 문제에 대해서는 論者의 {大乘起信論思想硏究Ⅰ}(민족사, 1994), pp.66 -112, 178-209 등에 詳論되어 있다.

}}그런데 上記 {별기} 대의문 구절과 관련하여 南東信은, '애초의 {별기}에는 대의문이 없었을 것이고 {소} 이후 언젠가 당시 불교계의 쟁점으로 떠오른 중관·유식의 대립을 {기신론}을 통해 극복하고자 {소}의 대의문을 참조하여 새로운 대의문을 썼을 것'이며, 따라서 '{별기} 대의문은 원효의 起信論觀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논거로는 1){별기}의 "佛道之爲道也 --- 强爲道"에서는 문장의 주술관계가 잘 조응하고 있는데 비해, 이 구절에 해당하는 {소}의 "大乘之爲體也 --- 强號之謂大乘"에서는 주어와 술어가 동어반복을 하고 있으므로 {별기}의 표현이 더 세련되었고, 문장 구성도 {별기}의 것이 더 발전되었으며, {별기}의 문장이 老莊문체를 쓰고 있어 문장미가 더 세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 2) 논의 宗體를 설하는 부분에서는 立破無碍를 중관·유식과 관련시켜 설하는 {별기}의 부분이 기신론관을 훨씬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 3) {소} 이후에 찬술된 {금강삼매경론}의 대의문에 나오는 "無破而無不破 無立而無不立 可謂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이라는 구절은 {별기} 대의문의 "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과 "無所不立 無所不破 --- 無不立而自遣 無不破而還許"를 합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별기}의 대의문이 {소}의 그것보다 후대에 쓰여졌음을 의미한다는 것 등을 제기하고 있다.{{) 남동신, {원효의 대중교화와 사상체계}(서울대 박사논문, 1995), pp.118-124.

}} 그러나 {별기}가 {소}에 앞서 쓰여진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문제가 되는 {별기}의 대의문만은 {소} 이후의 것으로 이해하려는 남동신의 추정은 그 논거가 설득력이 없다. 단지 주어·술어의 반복 한 대목을 가지고 저술의 전후를 판단할 수는 없으며, 문장 구성상의 발전 여하는 얼마든지 견해를 달리할 수 있는 주관적 판단이고, 老莊문체의 사용 여부 역시 저술의 선후를 확정짓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또 立破無碍를 중관·유식과 관련시켜 설하는 {별기}의 부분이 {소}의 그것보다 기신론관을 훨씬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지만, 주장이 선명하다는 것이 원효의 기신론관을 대변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비록 선명하고 강하게 주장된 것일지라도, 후일 생각이 바뀌어 그 내용이 불완전하거나 결핍되거나 잘못된 것이라 판단될 경우에는 얼마든지 덜 선명하고 덜 강한 언어로 수정 내지 철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 이후에 쓰여진 {금강삼매경론}의 대의문 구절 일부가 {별기} 대의문 구절을 합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곧 {별기}의 대의문이 {소}의 그것보다 후대에 쓰여졌음을 의미한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별기} 대의문에서 천명했다가 {소}에서 삭제해 버린 구절이라 할지라도, 다시 {금강삼매경}사상과는 얼마든지 관련시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원효는 중관·유식의 대립적 개성을 선명히 의식하는 동시에 그 화쟁적 종합이라는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처음 {기신론별기}를 지을 때에는 기신론사상에 의해 그 문제 의식을 해결하려고 해당 대의문 구절과 같은 언급을 하였지만, 기신론 연구가 심화되자 {별기} 대의문의 언급이 기신론 사상체계와 내용상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어 {소}를 지을 때는 해당 부분을 삭제하고 그 내용을 재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관·유식을 '無所不立 無所不破'의 논리로 화쟁적으로 종합하려는 의지와 관점은 그 후에도 일관되게 지니고 있다가, {금강삼매경}을 주석할 때에 비로소 이 관점을 적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되어 {기신론소}에서는 삭제시켰던 {별기} 대의문 내용을 {금강삼매경론} 대의문 서술에 반영시켰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별기} 대의문의 구절이 {소}보다 후에 저술된 {금강삼매경론}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 {별기} 대의문과 {소}의 그것과의 저술 선후를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렇게 볼 때 {별기}는 {소}보다 먼저 쓰여진 것이지만 {별기} 대의문만은 {소} 이후에 쓰여졌을 것이라는 남동신의 추정은 수긍하기 어렵다.

論者는 현재로서는 이렇게 추정한다. <원효는 중관과 유식의 대립적인 개성을 숙지하고 있었다. 모든 불교사상을 一味로 회통시키려는 원효는, 중관·유식의 空·有 대립을 화쟁적으로 종합하려는 의지를 품는다. 처음에 그는 이 空·有 대립의 화쟁적 종합이라는 사상적 과제를 기신론사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비록 그가 기신론을 一味的 불교 회통의 토대로 삼기는 하였지만, 기신론 사상의 내용과 체계로 볼 때 중관과 유식을 等價的으로 竝立시키며 기신론사상을 그 지양, 종합이라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기신론은, 비록 중관적 논의를 흡수하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유식사상의 맥락에서 나름대로의 독자적 개성을 추가로 확보해 나간 논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를 지을 때는 문제의 대의문 구절을 삭제하고 그 내용을 재구성하였다. 그러나 그가 {별기} 대의문에서 천명한 중관·유식의 지양, 종합 의지와 그 논리가 의미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기신론 사상에 대한 평가에 적용하는 것이 부적절했을 뿐이었다. 空·有 대립의 화쟁에 대한 사상적 의지와 관점은 지속되었으며, 원효는 그 과제를 해결하기에 더욱 적절한 문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기} 대의문에서 천명하였던, 그러나 기신론 사상의 특성상 부적절한 천명이라 생각되어 기신론 주석에서는 더 이상 발전, 적용시킬 수 없었던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 논리를 충분히 전개할 수 있는 문헌을 꾸준히 탐색하고 있었다. {금강삼매경}이 바로 그 문헌이었을 것이다.>원효 당시의 신라불교계는 이처럼 대승불교의 두 축인 중관과 유식이 보여주는 대립적 개성의 갈등을 소화해 내야 하는 사상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더욱이 삼국의 爭鬪와 統一이라는 시대 환경은 당대의 지성들로 하여금 통합과 화쟁의 사상적 해법을 더욱 치열하게 모색케 하고 있었다. 원효는 그 해법을 불교에서 모색하여 확보하였는데, 그의 불교사상이 보여주는 會通과 和諍의 태도는 통합과 화해라는 시대적 과제와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중관·유식의 대립적 개성을 화쟁적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원효의 태도는 見登(?-?)에게도 계승되고 있는데, 견등은 원효가 {별기} 대의문에서 천명한 중관·유식의 회통, 종합 관점을 취하는 동시에 그 구체적 논의 내용은 法藏(643-712)이 {華嚴五敎章}에서 전개하고 있는 空·有의 和會 논리를 활용하여 기신론에서 설하는 眞如의 如實空과 如實不空에 淸辨과 護法의 空과 有를 각각 대비시켜 '各互相破以成眞如二義'의 中觀·唯識 和會論을 수립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論者의 {大乘起信論思想硏究Ⅰ} pp.167-170을 참고.

}} 중관·유식의 사상적 갈등 해결은 당시 중국과 한반도를 위시한 동북아시아 불교계의 핵심적 사상 과제였으며, 신라불교계에서는 원효가 그 문제 의식과 해결 의지 및 노력을 대변하고 있고 견등 역시 원효의 영향 아래 이 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관·유식의 空·有 대립과 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효의 노력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간과해 왔던 것이 있다. 바로 {금강삼매경}의 등장과 이에 대한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저술이다.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을 유심히 보면, 양자의 공통점으로 부각되는 것이 바로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이다. 이 점은 {금강삼매경}의 성립이나 원효 사상 이해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 {금강삼매경}·{금강삼매경론}에 나타난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

 1) {금강삼매경}의 경우{금강삼매경}에는 그것이 등장하는 7세기 중엽까지의 동북아시아에서 논의되던 거의 모든 형태의 사상 유형이 등장한다. 반야·중관의 空사상, 섭론학의 유식사상(특히 9식설), {화엄경}·{법화경}·{유마경}·{열반경}·{능가경}·{범망경}·{영락경}·{기신론}, 선사상, 말법·참회·정토사상 등을 망라하면서 사상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사상 유형을 망라한다고 해서 사상적 초점이나 지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붇다 이후 성립된 인도나 중국의 모든 僞經들이 각기 나름대로의 문제 의식을 반영한 것과 마찬가지로, {금강삼매경} 역시 어떤 문제 의식의 산물임에 분명하다. 그 역사적·사상적·종교적 문제 의식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 {금강삼매경} 연구의 주요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금강삼매경}을 보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 경향'이다. 대승불교의 모든 사상 유형은 결국 중관과 유식을 근간으로 전개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리고 중관과 유식은 그 대립적 개성이 선명하기 때문에 양자의 종합은 사실상 용이하지 않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중관과 유식은 모두 空의 진실(眞如)을 목표로 하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그 空의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 차이를 보여준다. 중관은 緣起 -無自性 - 空의 논리에 입각한 '철저한 절대부정'의 방법을 택하는데 비해, 유식은 전도·왜곡된 遍計的 인식을 전도되지 않은 如實한 인식으로 바꾸는 '인식적 전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하여 유식에서는 인식이 전도되어 가는 과정과 내용을 밝히는 心識說이 발달하게 되며, 三性說(遍計所執性·依他起性·圓成實性)에서는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을 '有的'으로 긍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의타기성은 편계소집성의 의지처인 동시에 원성실성의 의지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有的 긍정을 인식의 측면, 즉 心識說의 맥락에서 표현하는 언어가 바로 舊譯인 眞諦唯識에서의 '第九識(阿摩羅識·眞識·無垢識)'이다. 眞諦唯識이 설정하는 九識(阿摩羅識·眞識·無垢識)은 유식사상의 有的 긍정 경향이 강한 형태로 심식설에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중관은 시종일관 無的 부정의 입장을 취한다. 유식의 有的 긍정이 자칫 空의 진실, 眞如의 경지를 實體化할 수 있다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유식 진영에서는 중관의 無的 부정이 자칫 실현해야 할 긍정적 가치인 진여의 경지마저 虛無主義的으로 증발시킬 위험성이 있다고 역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중관·유식의 空·有 논쟁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중관과 유식의 대립적 개성을 화쟁적으로 종합하는 길은 없을까? 진리 실현을 위한 두 개성의 가치를 모두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크게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양자의 공통 목표인 空의 진실(眞如)에 접근해 가는 상이한 방식 자체를 하나로 결합하는 길이 그 하나요, 진여의 경지를 지칭하는 언어이면서 유식의 有的 긍정과 중관의 無的 부정을 지양, 종합할 수 있는 화쟁적 용어를 마련하는 동시에, 실체화의 소지가 많은 유식의 언어들에 중관의 無的 부정을 결합시켜 버리는 길이 다른 하나다. 前者인 상이한 접근 방식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은 나름대로의 체계성을 지닌 두 문법을 하나로 합치려는 것과 같아서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에 비해 중관과 유식의 공통 목표인 공의 진실(眞如) 및 유식의 識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는 양자의 태도를 종합하는 일이 가능하다. 유식의 긍정적·有的 표현을 채택하는 동시에, 중관에서 우려하는 실체화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중관적 부정으로써 心識 등의 空性을 강조하거나, 진여의 유식적 표현인 阿摩羅識을 대체하는 제3의 언어로써 중관적 부정과 유식적 긍정을 화쟁적으로 종합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중관과 유식의 대립적 개성을 화쟁적으로 종합하기 위해 두 가지 방식을 시도할 수 있다. 1)중관의 절대 부정 방식과 유식의 인식 전환의 방식을 개성대로 모두 긍정하여 수용하며, 2)실체화의 오류를 초래할 수 있는 유식적 언어들에 중관적 부정을 결합하여 실체적 오해를 방지하는 동시에, 진여의 경지를 지칭하는 언어이면서 유식의 有的 긍정과 중관의 無的 부정을 지양, 종합할 수 있는 화쟁적 용어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런데 {금강삼매경}에서는 바로 이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중관과 유식의 대립적 개성을 화쟁적으로 종합하려는 시도가 목격된다.

  (1) 중관과 유식의 접근 방식을 모두 인정하여 수용하는 경우

"선남자여, 이 마음의 性相은 또한 아마륵 열매와도 같아서, 본래 스스로 생긴 것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긴 것도 아니며, 공동으로 생긴 것도 아니고, 因으로 생긴 것도 아니며, 因 없이 생긴 것도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緣으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緣이 일어나도 생기는 것이 아니고, 緣이 물러나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숨거나 드러남에 실체적 모습(相)이 없고, 뿌리의 이치는 寂滅하여 있는 곳이 없어서 머무르는 곳을 보지 못하니, 決定性이기 때문이다. 이 決定性은 또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단절되는 것도 아니고 불변하는 것도 아니며,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나오는 것도 아니며, 生하는 것도 아니고 滅하는 것도 아니니, (有·無·亦有亦無·非有非無의) 四句 判斷을 여의어 언어의 속성에 포착되지 않는다. 생겨남이 없는 心性도 이와 같은 것이니, 어떻게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 인정함이 있음과 인정함이 없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금강삼매경}, 한국불교전서1, p.625a-b.

}}

[無生行品]의 이 구절은, 원효도 지적하고 있듯이, 전형적인 중관의 부정 논리를 四不과 八不로써 전개하여 心性의 '생겨남이 없음(不生)'의 도리를 설하고 있다. 동시에 {금강삼매경}은 유식의 有的 긍정의 방식 및 心識說的 접근도 다음과 같이 수용하고 있다.



이 때에 無住菩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무슨 이익을 굴려서 중생의 모든 情識을 轉變시켜 唵摩羅에 들게 하나이까?' ……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唵摩羅識에 들어가는 곳이 있고 그 곳에서 얻는 바가 있다면, 이것이 법을 얻는 것일 것입니다.' …… '선남자여, 唵摩羅라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본래 벗어났다는 相도 없고 지금 들어간 것도 아니다. 예전에는 미혹했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깨달았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같은 책, p. 630c, 635a, 635c.

}} -[本覺利品]-

大力菩薩이 말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마땅히 계율을 지니지 않을 것이며, 사문에 대해서도 공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계율을 설하는 자가 좋지 않은 교만이 있기 때문이고, 바다의 물결이 일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와 같은 마음 자리에서는 八識의 바다가 잔잔하고 九識의 흐름이 깨끗하니, 바람이 움직이게 할 수 없어서 물결이 일어나지 않는다. 계율의 본성은 허공과 같으니, 계율을 지닌다고 하는 자는 미혹하여 전도된 것이다. 저와 같은 사람은 七識과 六識이 생기지 않아 모든 번뇌 망상이 그쳐 고요하며, 三佛을 떠나지 않아서 보리심을 일으키고, 세 가지 無相 가운데로 마음을 따라 그윽하게 들어가 三寶를 깊이 공경하고 威儀를 잃지 않으니, 사문에 대해서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보살이여, 저와 같은 仁者는 세간의 움직이는 법이나 움직이지 않는 법에 머물지 않고 三空聚에 들어가 三有心을 없앤다.'{{) 같은 책, p.648b.

}} -[入實際品]-{금강삼매경}은 유식 가운데서도 특히 舊唯識인 眞諦唯識의 九識說을 수용하고 있다. 水野弘元이 이미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금강삼매경}에는 玄 (602-664)譯 이후에나 등장하는 용어들도 등장하고 있다. {반야심경}(648년 譯)의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明呪 是無等等呪'의 四呪와 {유식삼십송}(649년 譯)의 '末那'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금강삼매경}의 撰者는 舊譯과 新譯 唯識을 모두 접하고 있었던 셈인데, 실제 經에서는 결과적으로 현장의 新唯識이 아니라 舊譯인 眞諦唯識의 九識說을 취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論者로서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추정하고 싶다. 하나는 {금강삼매경} 사상과 眞諦 舊唯識의 九識說 및 {대승기신론}사상과의 밀접한 親緣性이다. {금강삼매경}사상의 唯識的 측면은 특히 眞諦 唯識의 九識說을 그 기본 맥락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원효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듯이, {금강삼매경}의 키워드는 本覺·始覺이며, 이 문제는 또한 眞諦譯 {대승기신론}의 주요 테마인 동시에, 舊唯識 특히 {섭대승론}과 眞諦의 阿摩羅識사상(九識說)과 {대승기신론}사상은 동일 계열의 유사한 사상체계{{) 이 문제는 論者의 {大乘起信論思想硏究(1)}, pp.178-190에 詳論되어 있다.

}}라는 점을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금강삼매경} 사상의 종합적 평가와 관련되는 이 문제는 차후 별도의 論究로 미룬다. 무엇보다도 {금강삼매경} 및 {금강삼매경론}에 나타나는 覺사상의 전모를 밝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금강삼매경}이 九識說을 택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九識說을 취해야 중관의 無的 부정에 대립하는 유식의 有的 긍정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이라는 사상적 의도를 구현하는 데 용이하다는 점이다. 유식의 有的 긍정이 인식의 측면, 즉 心識說의 맥락에서 강하게 표현된 것이 眞諦唯識에서의 '第九識(阿摩羅識·眞識·無垢識)'說이라고 본다면, '阿賴耶識(八識)의 轉依'를 설하는 新唯識보다는 '청정한 阿摩羅識(九識)에 들어감'을 설하는 舊唯識의 언어가, 중관의 無的 부정에 대응하는 유식의 有的 긍정을 잘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유식의 언어들에 중관적 부정을 결합하여 실체적 오해를 방지하는 동시에, 진여의 경지를 지칭하면서 유식의 有的 긍정과 중관의 無的 부정을 지양, 종합할 수 있는 화쟁적 용어를 제시하는 경우;

있다고 할 수 있는 모든 識들도 또한 이와 같으니, 어째서 그러한가? 눈과 눈의 맞닿음(觸)은 모두 공적하고 眼識 또한 공적하니,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相이 없으며 안으로는 눈으로 생겨나는 세 가지 느낌(三受)이 없어서 三受가 적멸하다. 귀와 코와 혀와 몸과 心과 意와 意識 및 末那識과 阿梨耶識도 이와 같아서 모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니, 寂滅心이며 無生心이다.{{) 위의 책, p627b-c.

}} -[無生行品]-

그러므로 眞如法은 항상 自在하고 如如하지만, 일체의 모든 萬法은 如如하지 못하니 識으로 지어낸 것이네. 識을 여의면 존재는 곧 空하니, 따라서 空한 경지에 따라 말합니다.{{) 같은 책, p.666b.

}} -[如來藏品]-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항상 一覺으로써 모든 識을 轉變시켜 唵摩羅에 들게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일체 중생은 본래 깨달음(本覺)이니, 항상 一覺으로써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래의 깨달음(本覺)을 얻게 하고 모든 情識은 空寂하여 無生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決定의 本性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모든 여덟 가지 識은 다 경계를 緣하여 일어난 것인데, 어찌하여 움직이지 않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모든 경계가 본래 空하니, 모든 識도 본래 空하다. 空하여 緣의 실체성(自性)이 없는 것이니 어떻게 緣하여 일어나겠는가?'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모든 경계가 空하고 모든 몸이 空하며 모든 識이 空하니, 覺 또한 응당 空이겠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모든 覺은 決定性을 훼손하지도 않고 파괴하지도 않으니, 空도 아니고 空 아닌 것도 아니어서 空함도 없고 空하지 않음도 없다.'{{) 같은 책, pp.630c-631c.

}} -[本覺利品]-

중관과 마찬가지로 空인 眞如의 경지를 목표로 하면서도 인식의 왜곡 과정과 그 교정(轉依)을 心識說로 전개하는 유식의 언어는, 자칫 중관이 엄격하게 경계하는 '實體化'의 후유증을 수반한다. 이 점을 의식하여 {금강삼매경}에서는 유식적 心識의 언어들이 실체가 아닌 空性임을 특히 강조한다. 心과 意와 意識 및 末那識과 阿梨耶識이 실체가 아닌 寂滅心이고 無生心이며, 모든 八識이 緣生이어서 실체가 없는(無自性) 空性임을 명백히 한다. 문제는 唵摩羅識이다. 진여의 경지에 대한 인식적 표현인 淸淨無垢識으로서의 第九 唵摩羅識을 설정하는 舊唯識의 경우, 진여 경지의 긍정적 내용을 부각시키는 데는 적절하지만, 동시에 진여의 경지를 '실체적인 그 어떤 신비의식' 쯤으로 오해할 소지가 많다. 眞諦譯에서 '阿羅耶識(8識)을 對治하여 阿摩羅識(9識)을 증득한다'고 되어 있는 것을, 玄 譯에서는 '阿賴耶識을 對治하여 轉依를 얻는다'라고 바꾸어 버린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진여의 경지를 '阿摩羅識'이라는 명사적 용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긍정적 서술이기 때문에 실체화의 오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반면, '阿賴耶識을 극복한 상태'라는 부정적 서술을 채택하면 같은 목표와 실현 방식를 설정하면서도 실체화의 소지를 극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금강삼매경}에서는 어떻게 阿摩羅識의 실체화를 극복하고자 하는가? 覺사상이 그것이다. 覺(本覺)이라는 말로 阿摩羅識의 경지를 대체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깨달음'이나 '본래의 깨달음'이라는 말은 그 일상 언어의 맥락상 다분히 중성적이다. 부정적 가치나 상태를 극복해 버린 긍정적 경지를 지시하면서도, '영원불변의 정신이나 영혼'이라는 관념과 결합하여 실체적 신비 의식을 연상케 하기 쉬운 '第九識' '阿摩羅識'과 같은 용어의 함정을 피하는 중성적 언어일 수 있다. 그리고 覺이라는 말은 실체화의 위험성을 줄이면서도, 실현되어야 할 긍정적 가치나 내용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중관적 절대 부정의 '허무주의의 함정'을 피하는 기능도 지닌다. 그런 점에서 '有·無 超越的'이요 '有·無 中道的'이다. 이렇게 보면 覺은 유식의 有的 肯定과 중관의 無的 否定을 지양, 종합하는 언어일 수 있다. 그리하여 진여에 대한 중관적 접근과 유식적 접근의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양자를 和諍的으로 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모든 경계가 空하고 모든 몸이 空하며 모든 識이 空하니, 覺 또한 응당 空이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모든 覺은 決定性을 훼손하지도 않고 파괴하지도 않으니, 空도 아니고 空 아닌 것도 아니어서 空함도 없고 空하지 않음도 없다'고 하는 응답하는 대목은, 覺이 지니는 이러한 화쟁적 종합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원효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覺사상(始覺·本覺)은 {금강삼매경}사상의 초점이요 핵심이며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그리고 이 {금강삼매경}의 覺사상은 중관과 유식의 개성을 화쟁적으로 종합하는 면모를 지닌다. {금강삼매경}은 {대승기신론}의 覺사상을 계승하여 중관·唯識의 화쟁적 종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覺(不覺·始覺·本覺) 사상이 心生滅門 내에서 등장한다. 그런데 心生滅門이 명백히 唯識的 체계와 맥락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기신론에서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을 위해 覺 개념을 활용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해 {금강삼매경}의 사상적 체계와 맥락은 기신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覺 개념의 활용에 자유로울 수 있다. {금강삼매경}과 {대승기신론}에서 등장하는 覺사상 및 이에 대한 원효의 관점들을 비교, 분석하는 것은 또 하나의 과제이므로, 이는 차후로 미룬다. }}

  2) 원효 {금강삼매경론}의 경우원효는 {금강삼매경}에 나타나는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 의지와 방식'을 정확하게 읽고 있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고 있다. 중관·유식의 화쟁과 종합에 대한 그의 의지는 大意文에서부터 천명된다.  

이와 같이 깨뜨림이 없으면서도 깨뜨리지 않음이 없고, 세움이 없으면서도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이치가 없는 지극한 이치요 그렇지 않으면서도 크게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이 經의 大意이다. …… 깨뜨리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金剛三昧라 이름하고, 세우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攝大乘經이라 이름하며, 모든 뜻의 종지가 이 둘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또한 無量義宗이라 하는데, 그 하나를 들어 머리 제목으로 삼았기에 金剛三昧經이라 하였다.{{) 위의 책, p.604b-c.

}} - 大意文 -

일찍이 {대승기신론} [別記]에서 중관과 유식의 사상적 개성을 각각 '깨뜨림(부정. 破)'과 '세움(긍정. 立)'으로 규정한 후 양자의 화쟁적 종합 의지를 '無所不立 無所不破'로 천명했던 원효. 그러나 {대승기신론}의 사상 계보나 체계의 성격상 {대승기신론} 주석에서는 더 이상 구체적 논거를 충분히 제시하며 전개시킬 수 없어 {疏}를 지을 때는 해당 구절을 삭제하고 더 적절한 기회를 기다리며 유보시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효의 中觀·唯識 화쟁과 종합 의지 및 그 논리는, 이제 {금강삼매경}의 주석에서 다시 힘을 얻어 등장한다. '깨뜨리지 않음이 없음(無所不破)'과 '세우지 않음이 없음(無所不立)'의 논리가 {금강삼매경}의 宗旨요 大意로서 힘차게 천명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효는 '金剛三昧'라는 말로는 '깨뜨리지 않음이 없음(無所不破)'을, '攝大乘經'으로는 '세우지 않음이 없음(無所不立)'을 대변시키고 있으므로, '금강삼매'는 중관적 개성을, '섭대승경'은 유식적 개성을 각각 대변하는 셈이 된다. {섭대승론}이 유식의 소의 문헌임을 고려할 때 '섭대승경'이라는 말로 유식적 개성을 대변시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금강삼매'라는 말로 중관적 개성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사상 기조를 중관적 空사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깨뜨리지 않음이 없음(無所不破)'을 金剛三昧로써 대변시키고 있는 이 경우는 특히 '金剛'의 기능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곧 이어 경 제목을 풀이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원효는 '金剛'의 중관적 부정 기능과 아울러 '三昧'의 유식적 배경을 함께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金剛이란 비유로 일컫는 말이니, 단단함을 體性으로 삼고 꿰뚫고 깨뜨림을 공능으로 삼는다. 금강삼매도 또한 그러하여 實際를 체성으로 삼고 깨뜨리고 뚫는 것을 공능으로 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實際를 체성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치를 증득하고 근원을 궁구하기 때문이니, 아래의 글에서 '법을 증득하는 진실한 定'이라 말한 것과 같다. '깨뜨리고 뚫는 것을 공능으로 삼는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의혹을 깨뜨리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선정을 뚫는 것이다.……({대품경}·{대지도론}·{부증불감경}을 經證으로 제시)…… 옛 논사가 말하기를, '저 三昧라는 명칭은 正思라고 한다'고 했는데, 지금 이 말을 기술하는 것은 글 뜻에 합당하기 때문이니, 定에 있을 때 반연하는 경계에 대하여 자세히 바른 생각으로 살피기 때문에 正思라 한다. 이것은 {유가론}에서 '三摩地란 것은 반연하는 것들을 자세히 올바로 觀하여 살피는 心一境性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같은 책, pp.605b-606b.

}}

원효는 중관과 유식이 모두 목표로 삼는 眞如의 경지를 一心 혹은 '一心의 根源'으로 표현하곤 한다. 그리고 중관과 유식을 종합하여 이 진여인 一心의 근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이것은 二諦를 녹여 一法界를 드러낸 것이니, 一法界라는 것은 이른바 一心이다. 그러나 처음의 空門 안에서 버린 俗諦는 所執相이고 두 번째 空 가운데서 녹인 俗諦는 依他相이니, 俗諦에 두 가지 相이 있기 때문에 버리는 것과 녹이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또 처음의 문 안에서 俗諦를 버려 나타낸 眞諦와 두 번째 空 가운데서 俗諦를 녹여 나타낸 眞諦는, 오직 하나이고 둘이 없으니, 眞諦는 오직 한 가지로서 圓成實性이다. 그러므로 버리고 녹여 나타낸 진제는 오직 하나이다. 세 번째 空은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며,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은 것이다.{{) 같은 책, pp.639c-640a.

}} -[入實際品]-

중관의 二諦說과 유식의 三性說을 결합시켜 一心에 이르게 한 원효는, 다음과 같이 그 一心의 경지를 유식의 四智(大圓鏡智·平等性智·妙觀察智·成所作智)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비록 어느 한 사상 유형을 배타적으로 편애하지 않고 화쟁적으로 회통시키는 태도로 일관하기는 하지만, 원효 사상에서는 유식적 기반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원효 一心사상의 불교철학적 토대는 다분히 유식적 맥락에 기울어져 있다.

머무름이 없는 마음은 二諦를 쌍으로 없앴기 때문에 俗에서 나오는 것과 眞으로 들어가는 것의 다름이 없다. 이미 나오고 들어감이 없어서 空과 有에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처소는 있는 곳이 없다'고 하였다. 있는 곳이 없는 처소는 오직 一心이니, 一心의 體는 본래 寂靜하다. 따라서 '決定性地'라 하였다. 一心이 드러날 때는 여덟 가지 識이 모두 轉依하므로 이 때 네 가지 지혜가 원만해진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一心이 어둠을 떠나 밝음을 이루어 밝고 청정하여 비추지 않는 영상이 없다. --- 이것은 大圓鏡智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이 一心은 二邊을 멀리 떠나 自他를 통달하여 평등하여 둘이 없다. --- 이것은 平等性智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一心은 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法門을 관찰하지 않음이 없다. --- 이것은 妙觀察智의 뜻을 밝힌 것이다. --- 이와 같은 一心은 짓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짓지 않는 것이 없다. --- 이것은 成所作智의 뜻을 밝힌 것이다. 네 가지 지혜가 이미 원만해지니, 이것이 始覺이 원만해짐이다. --- 이 때에 이미 一心의 근원에 돌아가 여덟 가지 識의 모든 물결이 다시는 일어나 움직이지 않으니, 따라서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면 모든 識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같은 책, p.633a-b.

}} -[本覺利品]-

앞서 확인하였듯이, {금강삼매경}에서는 覺(本覺)이라는 말로 阿摩羅識의 경지를 대체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阿摩羅識의 실체화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覺은 유식의 有的 肯定과 중관의 無的 否定을 지양, 종합하는 언어가 될 수 있기에, 진여에 대한 중관적 접근과 유식적 접근을 和諍的으로 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금강삼매경}은 覺을 매개로 中觀·唯識의 화쟁적 종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삼매경}사상의 핵심이며 가장 뚜렷한 개성이 바로 覺사상(始覺·本覺)임을 꿰뚫고 있는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覺사상이 지니는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이라는 성격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며 활용한다. 다음의 구절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부처님이 대답하신 뜻은 다음과 같다. '모든 覺은 道理를 허물어뜨리지 않기 때문에 空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自性을 간직하지 않기 때문에 空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覺 가운데는 空함도 空하지 않음도 없다. 그런데 모든 識은 그렇지 않아 망령되게 모든 법을 취하여 참된 이치를 위반하니, 空이라 할 수 있고 버릴 수가 있다. 이처럼 동일하지 않으니, 어찌 서로 비슷할 수 있겠는가? '決定性'이란 것은, 眞如性은 파괴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그 性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훼손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有의 相을 취하여 空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고,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性이 없다고 헤아려 참됨(眞)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니, 決定性을 훼손하거나 무너뜨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같은 책, p.631c.

}} -[本覺利品]-

또한 원효는 眞如인 唵摩羅識의 경지를 一心·本覺·一心本覺·本覺如來藏心·本覺一心之原 등의 언어로 지칭하면서, 진여의 경지에 관하여 중관과 유식의 언어를 화쟁적으로 종합시킨 서술을 펼친다.

모든 중생이 동일한 本覺이기 때문에 一覺이라 한 것이다. ……本覺은 바로 唵摩羅識이다. '본각을 얻는다'는 것은 '들어간다'는 뜻을 해석한 것이니, 본각에 들어갈 때에 모든 여덟 가지 識이 본래 적멸임을 깨닫는다. 깨달음이 완전해졌기 때문에 모든 識이 생겨나지 않으니, 그러므로 '모든 識이 적멸하여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일체 중생이 본래 깨달음(本覺)이다' 등의 말은 바로 本覺의 뜻이고, '모든 情識이 적멸하여 생겨남이 없다'는 것은 始覺의 뜻이니, 이것은 始覺이 곧 本覺과 같음을 드러낸다.{{) 같은 책, p.631a.

}}

앞의 等覺位 중에서는 아직 생멸이 있어서 마음의 근원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八識에 있으나, 이제 妙覺에 이르러서는 영원히 생멸을 떠나 本覺인 一心의 근원(本覺一心之源)에 완전히 돌아왔기 때문에 第九識에 들어가 밝고 맑아진다.{{) 같은 책, p.657a.

}} -[眞性空品](467)-

이처럼 마음을 관찰하여 이미 出入이 없으면 이것이 곧 本覺如來藏心이니, 이것은 始覺이 곧 本覺과 같은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이 생겨남이 없는 마음은 이미 本覺如來藏으로서 본래 자성이 고요하여 다시는 起動하지 않으니, 어떻게 들어감과 나감·일어남과 사라짐이 있을 수 있는가?{{) 같은 책, p.615a.

}} -[無相法品]-…… 이와 같이 생겨남을 얻지 못함을 관찰할 때 그 觀하는 마음도 생겨남이 없으니, 이 때에 곧 본래 空寂함에 들어가게 된다. 들어간 空寂함은 곧 一心이니 …… '마음의 空함(心空)'과 '空한 마음(空心)'은 말로는 좌우가 있으나 단지 一心本覺의 뜻일 뿐이다.{{) 같은 책, p.612c}} -[無相法品]-

본래 무명을 따라 모든 識이 일어나다가 이제 始覺을 따라 마음의 근원에 다시 돌아가니, 마음의 근원에 돌아갈 때 모든 識이 일어나지 않으며, 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始覺이 원만하여짐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 '性에는 覺이 없다'고 한 것은, 空性 중에는 단지 識이 없을 뿐 아니라 始覺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覺이 없는 도리를 깨달아 알면 始覺의 지혜가 된다. …… 始覺이 원만할 때 여덟 가지 識이 일어나지 않으니, 覺이 없음을 깨달음에 따라 모든 識이 없어지기 때문이며, 궁극을 깨달음에 따라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같은 책, p.632c.

}}

처음 가운데 '七五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두 가지 末識이 空함을 합하여 밝힌 것이니, 항상 작용하는 識 중에서 第七識이 末이 되고, 항상 작용하지는 않는 것 중에 五識이 末이 되는 것이다. '八六이 적멸하다'고 한 것은 두 가지 本識이 공적함을 합하여 밝힌 것이니, 항상 작용하는 식 중에서 第八識이 本이 되고, 항상 작용하지는 않는 것 중에서 第六識이 本이 되는 것이다. 다음은 性을 여의었음을 나타낸 것이니, '九相이 空無하다'고 한 것은 第九識의 相 또한 自性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一心은 이와 같이 相을 여의고 性을 여의어서 곧 무량한 공덕의 더미이니, 이와 같은 것을 '불가사의한 더미'라 하였다.{{) 같은 책, p.670b-c.

}} -[總持品]-(561)

아울러 원효는 이 本覺의 경지 또한 實體化시키는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금강삼매경}이 추구하는 眞如의 경지를 '一味'라는 말로 표현하며 本覺의 空性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이 六品은 오직 一味이다. 왜냐하면 相과 生은 自性이 없고, 本覺은 본체가 없으며, 實際는 한계를 여읜 것이고, 眞性 또한 空한 것이니, 무엇에 말미암아 여래장의 自性이 있겠는가? 이것은 아래의 [여래장품] 중에서 '이 識은 항상 寂滅하며, 寂滅이란 것 또한 寂滅하다'고 말하고, [총지품]에서 '七識과 五識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八識과 六識이 적멸하며, 九相이 空하여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얻을 것이 없는 一味가 바로 이 經의 宗要이다. 그러나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따라서 모든 門이 열리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는 뜻을 짓는 宗이 된다. 비록 一味이지만, 여섯 가지 門을 열기 때문에 六分으로 글을 나누어 풀이하였다."{{) 같은 책, p.609a-b.

}} - 正說分 -

결국 원효가 추구해 왔던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은 {금강삼매경론}에 이르러 {금강삼매경}의 覺사상을 토대로 '一味'라는 말로 총결되고 있는 셈이다. '얻을 것 없는 一味'의 통로를 열 때, '얻을 것이 없기에 얻지 못하는 것이 없게'되고, 그리하여 중관·유식을 비롯한 모든 사상을 받아들여 한량없는 뜻을 전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Ⅳ. 맺는 말



{금강삼매경}이라는 문헌은 동일한 문제 의식을 공유하는 일군의 신라 불교인들, 특히 大安이나 元曉로 대변되는 대중불교 운동가들이 그 찬술의 주역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본다면 {금강삼매경}과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그 성립 배경이나 사상 내용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本考는 경전의 권위를 빌어서까지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싶었던 撰者들의 문제 의식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원효와 {금강삼매경}과의 특별한 인연을 고려할 때, {금강삼매경}의 찬술 동기나 배경 및 그 사상사적 의미는 원효 사상의 이해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에 나타나는 동일한 사상 지향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는 中觀과 唯識思想의 화쟁적 종합을 지향하는 것이고, 둘째는 大乘禪思想의 천명이며, 셋째는 眞俗不二의 대중불교 지향이다. 그리고 이 세 지향의 근본 원리는 '本覺·始覺을 중심으로 하는 覺사상'이다. 이 중 本考에서는 먼저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 지향'을 논구해 보았다. 중관과 유식의 대립적 개성을 화쟁적으로 종합하기 위해 두 가지 방식을 시도할 수 있다. 1)중관의 절대 부정 방식과 유식의 인식 전환의 방식을 개성대로 모두 긍정하여 수용하며, 2)실체화의 오류를 초래할 수 있는 유식적 언어들에 중관적 부정을 결합하여 실체적 오해를 방지하는 동시에, 진여의 경지를 지칭하는 언어이면서 유식의 有的 긍정과 중관의 無的 부정을 지양, 종합할 수 있는 화쟁적 용어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런데 {금강삼매경}에서는 바로 이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중관과 유식의 대립적 개성을 화쟁적으로 종합하려는 시도가 목격되며,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역시 이러한 시도에 적극 부응하고 있다. 舊唯識을 적극 수용하고 있는 {금강삼매경}에서는 覺(本覺)이라는 말로 阿摩羅識의 경지를 대체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阿摩羅識의 실체화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覺은 유식의 有的 肯定과 중관의 無的 否定을 지양, 종합하는 언어가 될 수 있기에, 진여에 대한 중관적 접근과 유식적 접근을 和諍的으로 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금강삼매경}은 覺을 매개로 中觀·唯識의 화쟁적 종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삼매경}사상의 핵심이며 가장 뚜렷한 개성이 바로 覺사상(始覺·本覺)임을 꿰뚫고 있는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覺사상이 지니는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이라는 성격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며 활용한다. 원효는 眞如인 唵摩羅識의 경지를 本覺 이외에도 一心·一心本覺·本覺如來藏心·本覺一心之原 등의 언어로 지칭하면서, 진여의 경지에 관하여 중관과 유식을 화쟁적으로 종합시킨 서술을 전개하고, 이 화쟁의 경지를 '얻을 것 없는 一味'라는 말로 총괄시킨다. '無所不立 無所不破'의 화쟁 논리를 마침내 {금강삼매경}의 주석을 통해 완결시키고 있다{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이 공유하는 문제 의식의 하나는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이다. 대승불교의 두 축인 중관과 유식의 대립적 개성을 갈등 없이 소화해 내는 일은, 원효의 시대인 7세기 중반의 신라불교계가 대면한 중요한 사상적 과제였다. {금강삼매경}·{금강삼매경론}에는 이 시대적 과제가 반영되어 있다. 원효와 종교적, 사상적 호흡을 같이 하는 一群의 불교인들은 동시대 신라불교계의 과제에 대한 자신들의 해법을 佛說의 권위를 빌린 {금강삼매경}의 찬술을 통해 설득력 있게 천명하고자 하였던 것인데, '중관·유식의 화쟁적 종합'이라는 사상 과제에 대해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은 호흡을 맞추며 나름대로의 해법을 구성하여 펼치고 있는 것이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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