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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三昧經の硏究 - 中國佛敎에 있어서 頓悟思想의 텍스트- 崔裕鎭 譯

화엄행 2009. 3. 27. 22:10

金剛三昧經の硏究 - 中國佛敎에 있어서 頓悟思想의 텍스트- 崔裕鎭 譯

2008/09/18 오 전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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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三昧經の硏究
(금강삼매경の연구)   번역·512/논평·541/답변·547
柳田聖山    日本 花園大學 國際禪學硏究所 所長    慶南大學校 敎授
金剛三昧經의 硏究   -中國佛敎에 있어서 頓悟思想의 텍스트-   崔裕鎭 譯

 

 

      -목     차-          | (1/3) | (2/3) | (3/3) |
        問題の所在(문제의 소재) ◀ 첫 페이지 (1/3)
       중간>金剛三昧經의 성립에~   중간>東海上의 龍宮(용궁)에~   중간>원효 ~ 현존의 20부
       다음 페이지 (2/3)중간>敦煌 寫本의~   중간>(입실제품)의 텍스트~
       중간>원효의 코멘트~   중간>唵摩羅(암마라)~   중간>굴린다[轉]는 것은~ ◁ 두번째 (2/3)
       다음-다음 페이지 ▷ 중간부분> 十地論의 텍스트가~   ◁ 세번째 (3/3)
       金剛三昧境の硏究에 대한 논평   1.   2.   3.   4.   5.      논평에 대한 답변


     문제의 소재

駒澤大學(구택대학)의 水野弘元(수야홍원)이 [菩提達摩(보리달마)의 二入四行說(이입사행설)과 金剛三昧經(금강삼매경)]을 발표하고, 거의 40년이 가깝지만 그 제안을 계승한 것은 다음에 말하는 캘리포니아대학의 로버트 E. 버스웰 이외에 일본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중국 ·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The Formation of Chan Ideology in China and Korea-The Vajrasamadhi-Sutra, A Buddhist Apocryphon, Princeton Library of Asian Translations, 1988).
이것은 저자의 본격적인 初期(초기) 禪佛敎(선불교) 연구 성과의 하나이고 이른바 새로운 동양학에 속하는 캘리포니아대학에서의 학위 논문을 근거로 한 것인데, 金剛三昧經(금강삼매경) 텍스트 전체의 英譯(영역)과 중국 · 한국에 걸친 새로운 대승 불교의 움직임 중에서 그 경전의 성립사적 의미를 고찰하려 하고 있다.
이것에 계속된 제2의 성과라 하는 [僞經硏究(위경연구)]가 종합하고 있는 것과 같이 中國佛敎思想(중국불교사상)의 텍스트로서 이른바 中國選述經典群(중국선술경전군)을 중시하고 그 형성 지역을 확인하려고 하는 저자의 확실한 연구 방법에 나는 전부터 공감하고 있다.
본디 水野(수야) 논문의 동기는 菩提達摩(보리달마)의 二入四行說(이입사행설)의 구조가 이미 정규의 대장경에 수록된 [金剛三昧經]에 의한 것이라 보는 종래의 안이한 통설을 역전시켜 역사적으로는 [金剛三昧經]을 唐初(당초)의 텍스트로 하고
菩提達摩의 二入四行說이 六朝(육조) 말기의 北魏(북위) 불교의 고유한 창안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는 그대 문헌 연구로서의 문제 제기였다. 금세기 초에 발견된 敦煌 寫本(돈황사본)의 새로운 연구 성과가 水野(수야) 논문의 모범이 되고 있다.
金剛三昧經의 연구는 이제까지 신라 元曉(원효; 617∼686)의 주석에 의해 그  텍스트를 오래된 것으로 보아서 道安(도안)의 [北량異錄(북량이록)](T55-18c)에 수록된 같은 이름이 失存經(실존경),
또는 이름이 비슷한 [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금강삼매본성청정불증불감경)] (T55-121a) 등과 혼동하여 텍스트 연구에 들어가지 않고 안이하게 眞經(진경)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明末(명말)의 湛然圓澄(담연원징; 1561∼1626), 淸朝代(청조대)의 誅震(주진)의 주석은 모두 眞經으로 인정한 것인데 北宋末(북송말)의 覺範惠洪(각범혜홍)이 禪佛敎의 텍스트로서 [圓覺經]에 대비한 이래의 것이다.
차라리 荷澤 神會(하택신회)와 淨衆 無相(정중무상), 保唐 無住(보당무주), 圭峰 宗密(규봉종밀) 등 盛唐 時代(성당 시대)의 禪佛敎(선불교)가 한결같이 [金剛三昧經]을 근거로 하고 있는 역사적 집대성이다. 티베트 불교는 후에 다른 기회에 고찰하겠다.
起信論(기신론)의 本覺思想(본각사상)과 眞諦三藏(진제삼장)에 귀속되는 九識說(구식설)이 도안(道安)시대에 譯出(역출)된 佛典에 있는 등, 대략 통용될 수 없는 定說(정설)이 아주 고지식하게 계승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水野(수야)의 논문이 나오고 나서부터는 말하는 것이 전적으로 반론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제안이 아주 안이하게 계승되어서 僞經(위경)으로서의 [金剛三昧經] 등이 대단한 가치는 없다고 하는 판단 정지에 기울어 일본에서는 본문 연구가 볼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중국 불교의 연구는 僞經(위경)의 문제가 불가피하다. 상하 일천 년 동안 漢譯佛典(한역불전)을 토양으로 한 中國選述佛典(중국선술불전)을 만들어 왔으며 도교 경전의 형성과 얽혀서 그런 상황은 중국 불교 각파의 움직임과 큰 관계 속에서 계속된다.
현재 산스크리트 원전이 알려져 있지 않은 漢譯(한역)만의 經論(경론) 중에서 南北二本(남북이본)의 [涅槃經(열반경)]을 필두로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 · 仁王般若經(인왕반약경) · 梵網經(범망경) · 本業經(본업경) · 圓覺經(원각경) · 首楞嚴經(수능엄경) 등 隋 · 唐(수·당) 불교의 형성에 작용한 것은 그 수가 극히 많다.
法華三經(법화삼경)의 하나로 알려진 無量義經(무량의경), 淨土三部經(정토삼부경)의 하나로 알려진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 등도 중국 찬술로 볼 만하다.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의 주석으로 알려진 釋摩訶衍論(석마하연론)은 우리나라(일본) 弘法大師 空海(홍법대사 공해)가 주목한 것이다.
禪佛敎에 관계가 깊은 佛說法句經(불설법구경)과 法王經(법왕경)은 근대의 敦煌 寫本(돈왕 사본)의 발견에서 그 정체가 확실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티베트 역이 있어서 초기 티베트 불교의 형성에 깊이 관계하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金剛三昧經]도 역시 일찍이 티베트 어로 번역되어 이른바 낭마파의 의거처가 되었다.
8세기 말에 티베트 왕에 초빙되어 인도의 승려와 對論(대론)한 중국측의 대표였던 北宗系(북종계)의 禪僧(선승) 摩訶衍(마가연)은 頓悟 禪門의 텍스트로서 [金剛三昧經]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上山大峻(상산대준), [敦煌佛敎の硏究(돈황불교の연구)], 法藏館(법장관), 1990].
隋 · 唐(수·당)의 중국 불교는 중국 본토의 文明史(문명사)의 요소임에 그치지 않고 티베트, 한국, 일본 등 주변 민족의 역사적 자각의 움직임에 크게 작용한다.
[金剛三昧經]의 성립에 깊은 관계를 갖는 원효와 신라 불교의 문헌사적 확인을 필요로 한다. 적어도 水野(수야)의 논문을 승인하려면 이런 폭넓은 움직임 중에서의 [金剛三昧經]의 본문 연구가 필요하다. 그 텍스트는 菩提達摩(보리달마)의 가장 확실한 초기의 코멘트의 하나이다.
水野의 논문에 의하면 이 텍스트의 성립 시기는 玄장(현장: 600∼664)의 [般若心經(반야심경)] 이후 원효의 寂年(적년) 이전이라고 하는 상당히 한정된 숫자로 결말짓고 있다.
[金剛三昧經]은 玄장(현장) 이전의 舊譯(구역) 용어를 주체로 하고 古譯(고역)을 가장 하면서도 第七識(제7식)의 이름을 末那識(말나식)이라 하고 [般若心經]에 특유한 是大神呪(시대신주)라는 명칭을 쓰는 등 玄장의 불교에 짙은 영향을 받고 있다.
玄장의 新譯(신역)에 의한 격동의 시대를 산 분별있는 佛敎者(불교자)의 기록인 것이다.
말하자면 西明寺 道宣(서명사 도선: 596-667)이 績高僧傳(적고승전)을 탈고하고 그 補正(보정)이 부득이했던 7세기 중엽 약 20년의 움직임에 겹친다.
나는 일찍이 [初期禪宗史書の硏究(초기선종사서の연구)] [法藏館(법장관), 1967]를 썼을 때에, 道宣(도선)의 [績高僧傳(적고승전)]의 初稿(초고) 이후 당시의 불교 각파의 움직임이 補正(보정)의 경지를 넘을 정도로 커다란 진폭을 포함하고 있던 것에 주목하였던 적이 있다.
敦煌 寫本(돈황사본)에 의해 명확해진 初期 禪宗史書의 重層的(중층적) 성립은 道宣(도선)이 자신의 死後(사후)에 남겼던 당시의 과제를 이어 받은 사람의 것이다. 그러한 격동의 上限을 굳이 한정한다면 실은 玄장의 新譯(신역) 그것에 있고 [金剛三昧經]의 성립과 원효가 그것에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얼마쯤 가볍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績高僧傳(적고승전)에 의하면 菩提達摩는 慧可에게 四卷 楞伽經(능가경)을 주면서 '내가 중국을 보니 오직 이 경이 있을 뿐이다. 仁者(인자)는 이것에 의해 수행해서 自得 度世(자득 도세)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T50-552b).
'오직 이 경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은 우리 宗旨의 근거가 될 만한 것이고 自得度世(자득도세)의 텍스트이므로 그것에 의해 수행하기에 족한 것이라는 뜻이다. 達摩가 가져 왔다고 말하는 것도 당시의 중국에 그 경 이외에 어떤 것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楞伽宗史(능가종사)의 根據處(근거처)인 다음과 같은 (無臂林;무비림의) 四世懸記(사세현기)의 문제와도 뒤얽힌다.


可가 법을 說해 마칠 때마다 無臂林(무비림)은 말한다. 이 경은 四世 후에 변하여 名相(명상)을 이룰 것이다. 어찌 슬퍼할 것인가 (T50-552b).

慧可(혜가)의 四世(사세)라면 마침 績高僧傳(적고승전)의 初稿(초고)가 편자에게 補正을 강요하는 시대이다. [金剛三昧經]의 성립 시기에 해당한다. 達摩 · 慧可를 祖로 하는 楞伽宗(능가종)은 이미 名相(명상)의 학에 떨어져 있었다.
아니 四卷 楞伽(사권 능가)를 名相化(명상화)하는 當代 일반의 경향에 대하여 그것을 편향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楞伽宗의 새로운 전통을 부르짖고 達摩 · 慧可를 祖로 하는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北魏末(북위말) 망명 정권의 하나인 東魏(동위)의 主都 입城(주도입성)을 무대로 해서 菩提流支(유지), 佛陀扇多(선다), 毘目智仙(비목지선) 등 새로운 如來藏佛敎(여래장불교)의 움직임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曇林(담림)을 達摩(달마)의 측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다음에 말하는 [略辨大乘入道四行(약변대승입도사행), 弟子曇林序(제자담림서)]의 一行은 千金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禪의 初祖 菩提達摩를 曇林(담림)이 三藏法師(삼장법사)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복잡한 과제를 안고 있는 楞伽宗(능가종)의 四世懸記(사세현기)가 無臂林(무비림)이라고 불리운 曇林(담림)에게 假托(기탁)된 것도 중요한 視點(시점)의 하나이다. 종래에 그것을 바로 慧可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初期禪宗史書の硏究(초기선종사서の연구)]나 그밖에 그것에 관한 일련의 해석은 고치는 것이 좋다.
지금은 [金剛三昧經]을 같은 시기의 과제에 대한 하나의 답안으로, 특히 楞伽宗(능가종)을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명확하게 한 선이 구분되는, 또는 그것에 선행하는 별개의 새로운 성과로 보고 싶다.
감히 말한다면 後績(후적)되는 최초의 燈史(등사)를 낳는 禪佛敎의 텍스트로서 당시 불교의 유유한 自負(자부)이다. 대체로 [金剛三昧經]은 譯出(역출) 경전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 譯者(역자)가 명확하지 않고 飜譯地(번역지)도 불명하다고 말하기보다는,
道安錄(도안록)에 그 이름을 들고 있는, [北량遺錄(북량유록)]의 체재를 가장한 北魏末(북위말) 東魏(동위)의 업城(업성)을 무대로 새로이 가져오게 된 如來藏系(여래장계)의 佛典(불전)의 하나이다.
문제를 이러한 생성된 현장으로 되돌려서 봄은 어떨까?

이 경전의 최초의 주석인 원효의 [金剛三昧經論]이 사실은 모든 과제를 포함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宋高僧傳(송고승전)] 第四(義解;의혜) [新羅國黃龍寺元曉傳(신라국황용사원효전)]에 의하면 [金剛三昧經論]에는 廣略(광약) 二種의 텍스트가 있었다. 현존하는 것은 略本(약본)뿐이다.
본래 [金剛三昧經]은 東海上의 龍宮(용궁)에 있었는데, 신라 왕비의 종기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鈴海龍王(영해용왕)이 신라에 보낸 것이다. 신라 왕비는 용왕의 셋째 딸이었다.
용왕은 말하기를, 대왕 스스로 大安聖者(대안성자)에게 명해서 텍스트를 전체 八章으로 순서를 맞추어 차례대로 잇게 하고, 특히 원효에게 명령을 내려서 疏(소)를 짓게 해서 그것을 대궐에서 講釋(강석)하도록 하면 왕비의 종기 병은 곧 낫게 될 것인데, 단 원효 이외의 講釋은 안 된다고 하였다.


원효는 角乘(각승)과 牛車(우차)를 준비하도록 명해서 兩角(양각)의 사이에 책상을 놓고 붓과 벼루를 준비해서 疏 五卷을 지었다. 그것 전부를 박덕한 무리가 훔쳐가서 3일을 연장해서 새로 疏 三卷을 지었다. 二本 모두 신라에 유포되었지만 略本(약본)만이 중국에 전해져서 후에 飜譯三藏(번역삼장)이 [金剛三昧經論]이라고 하였다 (T50-730a).

참으로 불가사의한 이야기이다. 大安聖者(대안성자)의 정체도 명확하지 않다. 항상 시장에 있으면서 손으로 銅鉢(동발)을 치며 '大安 大安'이라고 노래불렀다는 것은 어딘가 [臨濟錄(임제록)]의 普化(보화)와 유사하다. 원효도 역시 神異한 사람이다.
그 발언은 狂悖(광패)하고 示跡(시적)은 乖疎(괴소)하였으므로 진정 寶誌(보지)와 盃渡(배도)의 類(류)였다. 원효가 寶誌라면 신라의 대왕은 梁武帝(양무제)이다.
게다가 앞의 角乘(각승) 牛車(우차)도 玄장 불교의 후계자의 이미지로 三車法師(삼차법사)라고 불린 慈恩大師 基의 所業과 흡사하고 豪放하고 뜻이 큰 바가 있었다. 慈恩大師(자은대사) 基(기)와 경쟁하는 海東佛敎(해동불교)의 祖로 하려는 의도가 역력히 엿보인다.


[宋高僧傳]에 의하면 원효는 玄장 · 慈恩의 신불교를 사모하여 義湘(의상)과 함께 入唐(입당)을 뜻하였다. 그렇지만 원효는 渡唐(도당)의 도중에 '三界唯心 萬法唯識(삼계유심 만법유식)'의 이치를 깨닫고 入唐을 그만두고 東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生하는 까닭에 種種의 法이 生이다. 心外에 法이 없으니 어찌 다시 따로 구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無師獨悟(무사독오)이다. 當代의 중국불교의 주류인 玄장 · 慈恩계의 움직임에 대하여 엄격하게 비판하는 뜻을 확실히 포함하고 있다.
미리 결론을 말한다면 海東佛敎(해동불교)는 玄장(현장) · 慈恩(자은)의 唯識 法相宗에 대항하여 十地論系(십지론계)의 如來藏(여래장)에 경도되어 있었다. '三界唯心 云云'은 起信論(기신론) 또는 十卷 [楞伽經(능가경)]에 의한 것이다.
원효는 [金剛三昧經]에 의해 그것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金剛三昧經論]과 [金剛三昧經]은 뗄 수가 없다. [金剛三昧經]을 보관하고 있던 海東龍宮(해동용궁)은 어디인가?
원효는 入唐을 중지하고 海東에 되돌아왔지만 의상은 당초의 뜻을 관철하여 長安 終南(장안 종남)의 智儼(지엄)에게 참배하였다. 同學인 康藏國師(강장국사) 法藏(법장)과 함께 華嚴學(화엄학)을 집대성했던 것이고 왕복할 때 모두 登州(등주) 해안에서 善妙(선묘)의 공양을 받고 龍王(용왕)의 불가사의한 변화의 친절을 받았다.
의상도 역시 神異한 사람이니 康藏國師(강장국사)가 멀리 의상에게 보낸 편지는 그런 해동 불교에 대한 경의에 의한 것이다.
黃海(황해)에 임한 중국측의 登州(등주)와 고구려 일대의 지방은 해동 불교의 거점이다. 후에 그곳에 근거를 둔 발해국에 대해서 확실한 자료는 거의 없지만 원효 · 의상의 해동 불교가 스스로의 거점으로 한 용궁 전승은 딴 기회에 주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찍이 洛陽伽藍記(낙양가람기)에 전하여 온다.
北魏末(북위말)의 불교는 원효와 의상의 入唐(입당) 이전에 이미 해동에 들어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적어도 法藏(법장)의 [大乘起信論義記(대승기신론의기)]에 원효 [海東疏(해동소)]의 영향이 있다는 것은 周知(주지)의 評判(평판)이다.
원효는 無師獨悟(무사독오)에 그치지 않고 [績高僧傳(적고승전)] 이후의 중국불교에 은연중의 압력을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원효 불교의 출발이 [金剛三昧經論] 三卷이다.
[大乘起信論]의 注釋(주석)인 [釋摩訶衍論]은 龍樹菩薩(용수보살)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大本 [金剛三昧契經(계경)]과 大本 [楞伽契經], 그밖의 것이 인용되고 있다. [釋摩訶衍論(석마하연론)]도 역시 원효를 시작으로 하는 해동 불교의 성과의 하나이다.
大本이라고 하는 것은 道敎經典(도교경전)의 많은 수가 정체 불명이고 마구 卷數도 많은 地上 未飜(미번)의 神書(신서)로서 어딘가에 보관시켜 놓았다고 하는 거드름피우는 이미지에 흡사하다.
廣略(광략) 二本의 [金剛三昧經疏(경소)]가 만들어진 것은 명백히 玄장 唯識에 대한 도전이다. 그것을 三卷本 [金剛三昧經論(경론)]이라 한 것은 중국의 飜經三藏(번경삼장)이라 하는데, 玄장 시대의 飜經三藏이라면 당연히 玄장이다. 이것도 역시 玄장 비판의 하나가 아닌가?
감히 추리를 해 보자면 원효는 [金剛三昧經論] 三卷의 작자이고 그 중에서 텍스트를 추출해서 八章의 [金剛三昧經]으로 한 것은 大安聖者 그 사람이다.
중국에 유행된 것은 당시는 [金剛三昧經] 뿐이다. [開元錄(개원록)]과 [貞元錄(정원록)] 이후 그런 勅選(칙선)의 권위로 정규의 번역으로 삼았다. 大安聖者의 힘이다. [金剛三昧經論]은 [義天錄(의천록)]까지는 入藏(입장)되지 않았다.
요컨대 [金剛三昧經]은 玄장 이후의 중국 불교에 가장 인연이 많은 텍스트이다. 이미 해동 불교는 주변 지구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發信(발신) 거점이 되고 있다.
이러한 7세기 이후의 시대가 떠맡은 가지각색의 과제를 공유하고 華嚴(화엄) · 眞言(진언) · 戒律(계율) · 淨土(정토) · 禪佛敎(선불교) 등 각파의 새로운 재편이 시작된다. 祖師(조사)들은 해동 불교를 간과할 수가 없었다.
원효의 작업은 다방면이다. 그 저작은 百卷을 넘는다. 바로 百部(백부)의 論師(논사)이다.
현존하는 것은 겨우 20부이지만 텍스트는 隋(수) · 唐(당)의 각파에 미쳤다. [金剛三昧經論]은 그것들의 대본이다. 金彊模 씨의 [新羅 元曉의 文學觀](金知見·蔡印幻 編, [新羅佛敎硏究], 山喜房, 1973)에 의하면 현존의 20부는 다음과 같다.


   [法華宗要] (大正新修大藏經 第三十四卷)
   [大慧度經宗要] (大日本續藏經 第一編 三十八套)
   [涅槃經宗要] (大正新修大藏經 第三十四卷)
   [無量壽經宗要] (大日本續藏經 第一編 三十二套)
   [彌勒上生經宗要] (大日本續藏經 第一編 三十五套)
   [瓔珞本業經疏] (大日本續藏經 第一編 六十一套)
   [華嚴經疏] 下(大日本續藏經 第一編 六十一套)
   {阿彌陀經疏] (大正新修大藏經 第三十七卷)
   [菩薩戒本私記] 上(大日本續藏經 第一編 九十五套)
   [起信論疏] 二(大正新修大藏經 第四十四卷)
   [起信論別記] 二(大正新修大藏經 第四十四卷)
   [中邊分別論疏] (大日本續藏經 第一編 七十五套)
   [判比量論] (神田喜一郞 所藏 古寫本)
   [遊心安樂道] (韓普光, [新羅淨土思想の硏究], 東方出版, 1991)
   [大乘六情懺悔] (大正新修大藏經 第四十悟卷)
   [發心修行章] (禪學叢書之二, [禪源諸詮集都序] 附錄)
   [二障義] (橫超慧日, [二障義], 平樂寺書店, 1979)
   [十門和諍論] (海印寺藏經閣)


이 텍스트들은 지금은 모두 [韓國佛敎全書(한국불교전서)] 第一冊(東國大學校, 1979)에 일괄 수록되어 있다. 崔凡述 씨의 [元曉大師 般若心經復元疏(반야심경복원소)] (前揭 [新羅佛敎硏究])와 같이 다른 저작에 인용된 것을 모으면 더욱 많은 逸存書(일존서)의 복원도 가능하다.
지금은 원효의 저작이 玄장 문하의 활동의 전 영역과 겹친다는 것을 확인하면 족할 것이다. 逸存書(일존서)를 포함해서 100부가 넘는 전체 著作(저작)에 대해서는 韓普光 씨의 [新羅淨土思想(신라정토사상)の硏究]에 상세하다. 원효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는 玄장 이후의 중국 불교가 그 텍스트가 된다.


문제를 水野의 논문으로 되돌린다. [金剛三昧經]의 성립을 玄장 이후 원효 이전으로 한다면 그 텍스트는 菩提達摩二入四行說(보리달마이입사행설)의 최초의 코멘트일 것이다. 그렇지만 원효는 二入四行說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앞의 폭넓은 저술에서도 특별히 禪 관계의 것을 볼 수 없다.
차라리 이런 視點(시점)에서부터 菩提達摩二入四行說이라고 말하고 [菩提達摩二入四行說]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後者(후자)는 敦煌本(돈황본)을 근거로 한 것인데 지금은 우선 이 점에 주의하고 싶다.
菩提達摩에게 二入四行說이 있었다는 것과 敦煌(돈황) 寫本(사본) [菩提達摩二入四行說]을 그 텍스트로 한다는 것과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敦煌 寫本에 의해 알려진 [菩提達摩二入四行說]을 [金剛三昧經] 이전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지금은 우선 문제이다.
菩提達摩二入四行說은 [績高僧傳(적고승전)] 第十六, 齊업下南天竺僧菩提達摩(제업하남천축승보제달마)에 나오는 것이 아마도 최초의 텍스트이다 (T50-551b). [金剛三昧經]은 그 시기가 같고 마침 같은 텍스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지만 양자가 취급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양자가 의거한 二入四行說이 어떠한 텍스트였는가? 그것을 곧 敦煌本(돈황본)이라고 하는 것은 경솔한 생각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에 나는 道宣(도선)의 [高僧傳(고승전)] 중에 있는 [達摩傳(달마전)]에 관하여 一言하고 싶은 것이다. · · · 보통 학자들은 道宣의 傳記(전기)를 [達摩傳]의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하고 그 기사에 無上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理入四行說과 같은 것도 曇琳(담림)의 所傳(소전)은 道宣(도선)에서부터 나온 것이라 하고, 曇琳에 있고 道宣에 없는 것은 琳(임)의 증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이 설에는 처음부터 반대하고 아무래도 道宣 쪽이 曇林의 글을 압축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鈴木大拙(영목대졸)의 [禪思想史硏究] 第二(岩波書店, 昭和 二十六年)의 第一篇 第一緖言의 二道宣(이도선)의 達摩의 檢討(검토)에서 말하는 바이다. 더욱더 기초가 되는 것은 [校刊少室逸書解說附錄, 達摩の禪法と思想及其他(교간소실일서해설부록, 달마の선법と사상급기타)] (安宅佛敎文庫, 昭和 十一年)에 있는데 昭和(소화) 十年에 북경도서관에서 발견한 敦煌 寫本 [二入四行論及略序等(이입사행론급략서등)]의 해설 의견이다.

종래에 학자는 道宣(도선)의 [高僧傳]에 無上의 권위를 두고 그것에서부터 모든 것을 논하였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宋代(송대)의 재료는 후세의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이었다.
· · · 敦煌 出土(출토)의 문헌 -특히 禪宗에 관한 것이 알려졌으므로 道宣의 [達摩傳] 및 [二入四行說]이라는 것은 [傳燈錄(전등록)] 所載(소재)의 [弟子曇琳序(재자담림서)]에서 취재했던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언제나 道宣을 위주로 하는 것을 중지하고 敦煌(돈황) 출토의 재료에도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좋다 (前揭 [禪思想史硏究] 第二, p.40).


敦煌 寫本의 초기 선종 문헌 특히 [二入四行論及略序等(급략서등)]을 ··· 다음>>>계속(2/3)

제 3집_14 (1/3) 금강삼매경 연구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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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三昧經の硏究
(금강삼매경の연구)   번역·512/논평·541/답변·547
柳田聖山    日本 花園大學 國際禪學硏究所 所長    慶南大學校 敎授
金剛三昧經의 硏究   -中國佛敎에 있어서 頓悟思想의 텍스트-   崔裕鎭 譯

 

 

      -목     차-          | (1/3) | (2/3) | (3/3) |
        問題の所在(문제의 소재) ◁ 첫 페이지 (1/3)
       중간>金剛三昧經의 성립에~   중간>東海上의 龍宮(용궁)에~   중간>원효 ~ 현존의 20부
       현재 페이지 (2/3) ▶ 중간>敦煌 寫本의~   중간>(입실제품)의 텍스트~
       중간>원효의 코멘트~   중간>唵摩羅(암마라)~   중간>굴린다[轉]는 것은~ ◀ 두번째 (2/3)
       다음-다음 페이지 ▷ 중간부분> 十地論의 텍스트가~   ◁ 세번째 (3/3)
       金剛三昧境の硏究에 대한 논평   1.   2.   3.   4.   5.      논평에 대한 답변


  앞 내용: 이후계속

敦煌 寫本의 초기 선종 문헌, 특히 [二入四行論及略序等(급략서등)]을 道宣(도선) 이전이라고 하는 새로운 의견이다. 敦煌本 [二入四行論]을 발견한 후 이미 60년이 경과한 지금 다시 道宣의 [績高僧傳]을 축으로 敦煌本의 성립 경과를 다시 조사해 보고 싶다.
敦煌本(돈황본)에 無上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道宣에 무상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많은 위험성을 내포한다. 적어도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 (T85-1284c)에 전하는 [略辨大乘入道四行(약변대승입도사행), 弟子曇林序(제자담림서)]는 績高僧傳(적고승전)을 이어받고 있다.
[傳燈錄(전등록)] 第三十(T51-458b)에 수록된 것은 [楞伽師資記]의 텍스트에 의한다.
결국 [績高僧傳]에 주장된 이른바 楞伽宗(능가종)의 전통을 근거로 한다. 達摩가 慧可에게 四卷 楞伽(능가)를 주었다는 것은 玄장 이후의 일파의 주장이고 '玄장'이 스스로 인도에 가서 護法系(호법계)의 唯識(유식)을 전하였다고 하는 法相宗(법상종)의 전통을 의식하고 있다.
'玄장'보다 훨씬 오래된 시대에 南天竺(남천축)에서부터 친히 중국에 와서 四卷 楞伽를 전한 求那跋陀羅(구나발타라)를 初祖(초조)로 하고
같은 南天竺으로부터 北魏(북위)에 와서 正法을 慧可에게 전한 菩提達摩가 소수의 제자에게 가르친 말을 慧可의 友人(우인)인 曇林(담림)이 기록한 [略辨大乘入道四行, 弟子曇林序(제자담림서)]에 의해 그 宗(종)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이 나라를 보니 오직 이 경 뿐이다(前出).

왜 四卷 楞伽(능가)가 아니면 안 되는가? '玄장'의 新譯(신역) 佛敎는 특히 [成唯識論(성유식론)]의 護法(호법)의 설을 올바른 뜻[正義(정의)]으로 하는 것에 근거를 두고 처음으로 명확하게 된 당시의 말이다. 그렇게 '玄장'이 護法(호법)의 설을 正義로 하는 것에 대하여, 또 다른 입장에서부터 다른 것을 正義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金剛三昧經]과 [金剛三昧經論]에 근거한 일파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金剛三昧經論]은 신라 원효의 저술이지만 근거를 둔 것은 佛說이다.
佛說의 권위는 論師(논사)의 그것보다 높다. [菩提達摩二入四行論]은 [金剛三昧經]에 근거한 것이다.
우선 그런 二入四行說의 근거인 [金剛三昧經] [入實際品(입실제품)]의 텍스트를 보자.


부처가 말하기를 二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는 理入이고 하나는 行入이다. 理入이라고 하는 것은, 깊이 믿어 衆生의 眞性(진성)이 다르지 않고 一(일)도 아니고 共(공)도 아니고 다만 客塵(객진)에 가려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니 覺觀(각관)에 凝住(응주)해서 佛性을 諦觀하라.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며, 나도 없고 남도 없어 凡聖(범성)이 不仁인 金剛心地(금강심지)에 견고하게 머물러서 움직이지 말고 寂靜無爲(적정무위)하게 해서 분별함이 없음을 이것을 理入이라 부른다
(T9-369c).

行入은 당분간 제쳐놓는다. 다음에 [績高僧傳]의 [菩提達摩章]에 인용한 理入說(이입설)의 텍스트를 본다.

그런즉 入道는 여러 길이지만 요컨대는 오직 두 종류뿐이다.
理와 行을 말한다. 가르침에 의지해서 宗(종)을 깨닫고, 含生(함생)과 함께 眞性은 하나인데 客塵(객진)에 장애되는 까닭에서일 뿐이라는 것을 믿는다.
거짓[僞(위)]을 버리고 진실[眞(진)]에 돌아가고 壁觀(벽관)에 凝住(응주)하라.
自他가 없고 凡聖이 같아 하나이다. 견고하게 머물러서 움직이지 않고 他敎(타교)에 따르지 않고 道(도)와 은밀히 부합해서 寂然無爲(적연무위)함을 理入이라고 이름짓게 된다 
(T50-551c).

두 텍스트를 비교해 보면 언어의 사용이 꽤 틀리지만 공통적인 곳도 많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 근거했다고 판단된다. 대체로 理入과 行入이라고 하는 다른 곳에는 예가 없는 구성이 문제인 것 같다. 원래 [金剛三昧經]은 入字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入實際品(입실제품)]의 노리는 바이다.
入(입)이라고 하는 것은 無入의 入이고 그것이 보살의 本利이고 깊이 無際(무제)에 들어가서 濟度(제도)해야 할 중생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중국의 胡適(호적)을 위시하여 우리 일본의 鈴木大拙(영목대졸), 宇井伯壽(우정백수), 關口眞大(관구진대) 등의 이 50년 정도 동안의 初期禪宗史(초기선종사)에 대한 발언은 반드시 二入四行說을 언급하였지만, 그 내용에 깊이 파고든 것은 없다.
敦煌本이 道宣(도선)에 앞선다는 선입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敦煌本 [二入四行說]을 菩提達摩의 眞說이라고 하는 데에서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하는 安心感(안심감)이 있었다.
작자 문제로 시종하여 작품의 동기에 언급한 것은 없다. 초기 선종의 사상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한 [金剛三昧經]의 음미는 불가결한 일의 하나이다.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하더라도 상호관계는 확실하다. 원효의 [金剛三昧經論]에서 다음과 같이 코멘트한다.


敎(교)에 의하여 理를 닦아 理入行入하는 까닭에 入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러나 實際(실제)는 無際(무제)를 際(제)로 하는 까닭에 二入은 다른 것이 아니고 無入의 入이다 (T34-982b).

'敎에 의해 理를 닦는다'는 원효의 코멘트에 주목하고 싶다.
敎라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金剛三昧經]의 것이다. 理는 다음에 말하는 敎理(교리)이다. '理에 順해서 信解(신해)하고 아직 證行(증행)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理入이라고 이름 붙인다', '敎에 의해서 理를 닦는다'는 것은 논의가 쳇바퀴 돌 듯 진전 없음을 피할 수 없지만 지금은 닦는다[修]고 하는 行이 중요하다.
覺觀(각관)에 凝住(응주)하고 佛性을 諦觀하는 것, 金剛心地에 住하고 堅住不移(견주불이)한 장소에 처하고, 他敎에 따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데 [楞伽經]의 宗에 따르는 것이다.
覺觀에서 壁觀(벽관)에로 텍스트의 차이는 크다. [金剛三昧經]과 四卷 楞伽, 동일한 如來藏系(여래장계)에 이미 두 파의 움직임이 있었다.
法沖(법충)이 전하는 바와 같이 南天竺一乘宗에 의해 [楞伽經]을 행하는 사람들이 壁觀(벽관)을 虛宗(허종)이라고 하는 것이고 虛宗은 바로 般若이다 ([初期禪宗史書の硏究] p.440), [金剛三昧經]은 아직 거기까지 행하지 않는다.
玄장系의 唯識(유식)과 南天竺一乘宗(남천축일승종)과의 중간에 있는 논리가 지금은 특히 중요한 것이다. 원효는 理入을 行入의 전 단계 요컨대 信解(地前:지전)의 位로 한다.
원래 [入實際品]은 階位(계위)를 설하는 것이 목적이고 理行二入도 역시 그 일부이다. 敎學으로서는 당연한 이해이고 이른바 達摩의 二入四行論과는 전적으로 다른 발상이면서 이미 한계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理入이라는 것은(者) 理에 順해서 信解(신해)하지만 아직 證行을 得하지는 못했으므로 理入이라 한다. 位는 (十)地前에 있다. (그렇지만) 行入이라는 것은(者) 理를 證하고 行을 修해서 無生行에 들어가는 까닭에 行入이라 한다. 位는 地上에 있다 (T34-985a).

하는 김에 行入의 텍스트 및 원효의 코멘트를 모두 살펴본다.

經에 말하기를 行入이라는 것은(者) 마음이 傾倚(경의)하지 않고 그림자에 流易(유역)이 없고 所有(모든) 處에서 念을 고요히 해서 구하는 곳이 없고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고 흡사 大地와 같이 心我를 버리고 떠나서(損離: 손이) 중생을 救度(구도)함에 無生無相(무생무상)이고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論에 말한다. 地上의 證入의 행을 밝히고 있다. 心이 傾倚(경의)하지 않는다는 것은(者) 如理(여리)의 智心(지심)이 攀緣(반연)하지 않는 까닭에서이고 攀緣(반연)의 心이 生起하지 않는 까닭에서이다.
그림자에 流易이 없다는 것은(者) 如理의 境(경)이 三際(삼제)를 떠나 있는 까닭이다. 流變(유변)한 境像(경상)이 復現(복현)되지 않는 까닭이다. 있는 모든 一切 世間의 福樂(복락) 내지 菩提, 大涅槃의 果까지도 이에서는 일체 모든 것이 願求하는 것이 없다. 平等에 통달하고 此彼(차피)가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경계의 바람에 움직여지는 것이 없다. (이것은) 自利의 行入을 밝힌 것이다. 損離(손이) 이하는 他를 들어가게 하는 行이고 二空을 證함을 갖고 人法의 相을 떠나는 까닭에 능히 보편적으로(두루) 일체를 救度(구도)하고 離心(이심)까지도 生함이 없고 또한 境의 相도 없다.
그런데도 그 寂滅(적멸)의 生을 취하지도 않고 항상 일체 중생을 버리지도 않는다. 그것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와 같이 되는 二行을 行入이라 한다(T34-985b).


理入(이입)을 行入(행입)의 근거로 하고 行入을 理入의 上位에 놓은 것은 실천을 근거로 한 것에서 부터인데 行入이 方便(방편)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는 것에 특히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階位論(계위론)으로서의 코멘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깊이 믿어 중생의 眞性을  - - - - - - - - - - - - - 十信入位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覺觀에 凝住하여 - - -  十住入位
   佛性을 諦觀하라  - - - - - - - - - - - -  十行入位
   자기도 없고 타인도 없어  - - - - - - -
  十廻向位

이렇게 해서 비로소 行入에 들어간다. 원효의 階位論(계위론)은 [金剛三昧經] 그것에 근거하므로 해석은 어디까지나 비교에 그친다. 원효의 코멘트와 [金剛三昧經]의 텍스트를 신경질적으로 나눌 필요는 없다.

理入을 이미 얻어 自他平等空(자타평등공)인 까닭에 心은 金剛과 같고 견고하게 住해서 물러나지 않는다. {梵網經(범망경)} 중에서는 十金剛이라 하고, {仁王經(인왕경)} 중에서는 十회心이라 한다. 모두 十廻向의 異名(이명)이다 (T34-985a).

요컨대 원효는 理에서 行으로 昇進(승진)한다. 行入에 와서 理行 一體가 된다. 道宣과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의 理入四行이 理入을 중시하고 覺觀을 壁觀으로 하는 것과 커다란 차이를 가진다.
원효가 行入에 중점을 둔 것은 양자의 다른 포인트이다. [略辨大乘入道四行(약변대승입도사행), 弟子曇林序(제자담람서)]가 먼저 있고 道宣(도선)과 원효가 그 일부를 정정했다고 하는 종래의 대전제를 인정함이 좋을까, 어떨까? 되풀이해서 말한다.
敦煌(돈황)의 텍스트에 無上(무상)의 권위를 두는 것은 道宣에 무상의 권위를 두는 것보다도 위험하다. 菩提達摩 二入四行說에 의해 [金剛三昧經]이 창작되었다고 하는 것보다도 [金剛三昧經]을 근거로 해서 [績高僧傳(적고승전)]의 텍스트가 생기고 [楞伽師資記]의 [略辨大乘入道四行, 弟子曇林序]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역사적 추이에 주목하고 싶다. 적어도 텍스트로서의 순위는 [金剛三昧經]을 最古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略辨大乘入道四行(약변대승입도사행), 弟子曇林序(제자담람서)] 중에서 理入의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본다.


理入이라는 것은 敎에 의지해서 宗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깊이 믿어라. 含生(함생) 凡聖(범성)이 동일한 眞性(진성)임을. 다만 客塵(객진)에 妄覆(망복)되어서 능히 顯了하지 못할 뿐이다. 若也(만약에) 妄을 버리고 眞에 돌아간다면 壁觀(벽관)에 凝住(응주)하고 自他가 없다.
견고하게 住해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조금도 文敎(문교)에 따르지 않고 이에 곧 진리에 冥符(명부)하고 분별이 없고 寂然(적연)으로서 이름이 없다. 그것을 理入이라 한다
(T85-1285a).

[金剛三昧經]과 績高僧傳(적고승전) ·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의 텍스트를 비교하면 최후의 것이 가장 잘 정돈이 되어 있다. [楞伽師資記]는 확실히 [績高僧傳]을 이어받고 있다. [略辨大乘入道四行(약변대승입도사행), 弟子曇林序(제자담림서)]가 道宣(도선)을 이어받고 있는 증거는 우선 弟子曇林序의 5字이다.
菩提達摩의 제자에 慧可와 僧育(승육)이 있었다는 것을 弟子曇林序는 증명한다. 無臂林(무비림)인 曇林(담림)이 직접 慧可(혜가)의 友人(우인)이었다는 것을 道宣은 힘써 강조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曇林(담림)은 北魏末(북위말)의 업城(업성)을 무대로 佛陀扇多(불타선다)와 菩提流支(보리유지), 毘目智仙(비목지선) 등 如來藏系(여래장계) 텍스트를 전한 譯經三藏(역경삼장)의 일을 도왔던 筆授證義(필수증의)의 전문가이다.
[승만경]의 注를 썼다는 것을 吉藏(길장)의 [勝만經寶窟(승만경보굴)]이 전한다. 菩提達摩와 慧可의 불교에는 그런 曇林(담림)의 共力(공력)이 필요했었는가? 아니다. 후에 楞伽宗을 주장한 사람들이 曇林의 권위를 필요로 했다.
弟子曇林序의 다섯 字는 楞伽宗의 텍스트에 필요한 金看板(금간판: 세상에 자랑스럽게 선전하는 상품)이다.
道宣이 [略辨大乘入道四行, 弟子曇林序]를 알고 있었는가? 다시 말하면 [績高僧傳]의 菩提達摩傳이 曇林傳에 의한 것인가, 아닌가? 실제로는 미묘한 것이 있어서 속단은 할 수 없더라도 앞서 인용한 楞伽宗(능가종)의 四世懸記(사세현기)는 명백히 慧可의 四世의 시대,
이른바 東山法門의 움직임과 함께 그 근거처를 四卷 楞伽로 하는 일부의 제자의 作意에 지나지 않고 曇林(담림)을 達摩(달마)의 제자로 할 필요는 없다. 이른바 당초의 二入四行說은 佛說의 권위가 필요했을 뿐이고 弟子 曇林은 개입하지 않았다.
그것을 弟子 曇林의 筆授(필수)로 변경시키는 새로운 권위가 필요한 것은 楞伽宗(능가종) 운동이 진행되면서 급히 東土(동토)의 祖師(조사)의 계보가 선 그어진 후의 일이다. [楞伽人法志(능가인법지)]와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가 차례로 생겨난 이유이다.
사실을 말하면 曇林(담림)은 北魏末(북위말)의 譯經者(역경자)이지만 四卷 楞伽와 관계가 있는가? 반드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金剛三昧經]과 [績高僧傳]의 사이에 있는 커다란 차이이다.
당시 達摩宗의 제자들은 [金剛三昧經]의 권위에 의거하면서 그 텍스트에 만족하지 않고 감히 수정을 가한 것이다. [金剛三昧經]의 문맥에 없는 理와 行의 이해를 위시하여 覺觀(각관)을 壁觀(벽관)으로 변경시킨 것,
[金剛三昧經]에는 반드시 명확하지 않은 行入의 요소를 四行(四法)으로 해서 方法化(방법화)한 것, 거기서부터 또 如是安心(여시안심), 如是發行(여시발행), 如是順物(여시순물), 如是方便(여시방편)이라고 하는 새로운 視點(시점)이 첨가되었다.


일찍이 [初期禪宗史書の硏究]에서 얼마쯤 전문적으로 문제삼았던 것처럼 '玄장' 불교에 對極的(대극적)인 전통파로서 [績高僧傳]은 法沖傳(법충전)을 증보하고 거기에 慧可의 宗系를 내걸었다.
이른바 四世懸記(사세현기)는 法沖系(법충계)의 楞伽宗(능가종)과 서로 얽힌다. 法沖은 玄장의 신불교에 대해서 四卷 楞伽를 내세운 것이지만 達摩 · 慧可 계통의 楞伽宗과 명백히 구별짓고 있다.
南天竺一乘宗(남천축일승종)의 깃발은 達摩 · 慧可 계통의 것이다.
道宣이 達摩 · 慧可 계통을 찬양하여 大乘壁觀功業最高(대승벽관공업최고)라 하고 達摩를 동시대의 僧주(승주)에 비교하여 '摩(마)는 虛宗(허종)을 旨(지)로 한다'고 한 것은 모두 南天竺一乘宗이라고 불리는 般若主義의 움직임을 토대로 한 것이므로 吉藏(길장)을 祖(조)로 하는 三論宗(삼론종)에 기운다.
사실 三論宗에서부터 나온 法如(법여)와 동일한 東山 法門을 崇山(숭산) 少林寺에 세운 최초의 祖師라 말해도 좋지만 四卷 楞伽를 내세우는 法沖(법충)과, 동일한 東山 法門의 玄?과는 전적으로 노선을 달리 한다.
요컨대 道宣이 [績高僧傳]의 補正을 서두르는 貞觀(정관) 말년 시대의 禪佛敎는 어지러운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菩提達摩章의 텍스트는 그러한 움직임의 中核(중핵)인데, 현존 最古의 집대성으로 보고 싶다.
楞伽宗과는 직결되지 않는 達摩 · 慧可系의 일부 제자들이 [金剛三昧經]의 권위를 빌려서 成文化(성문화)한 텍스트가 아닐까?
[績高僧傳] 이후의 것은 지금은 잠시 제쳐놓고 [績高僧傳]의 텍스트 문제를 보다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그 견본이 되었을 [金剛三昧經]의 교학 체계에 대해서 조금 음미해 보자.
원래 [入實際品(입실제품)]의 동기는 그 앞에 위치한 [本覺利品(본각이품)]을 이어받아 本覺의 利로 중생을 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서, 本覺의 利가 문제인 것은 당연할 것이다.
[本覺利品]은 無住菩薩(무주보살)을 상대로 한 설법인데, 그 이름과 같이 無住의 理가 테마이다. 無住의 理라고 하는 것은 本利(본리)에 契合(계합)하는 것이다. 本利라는 것은 本覺의 利이다.
원래 [金剛三昧經]의 無住說은 常住涅槃(상주열반)의 속박을 없애버리는 것이 동기이고 [大般涅槃經]이 주장하는 四德(사덕)의 하나인 '常'에 머무는 집착을 문제삼고 있다. 常住涅槃은 열반의 속박이다. 속박은 움직임에 대비되고 움직임은 고요함[寂]에 대비된다. 열반의 고요함[寂]에 머무는 것이 열반의 속박이고 속박은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열반의 움직임을 떠나서, 이와 같은 地에 머물러 마음에 머무르는 바가 없고 出入이 없어 庵摩羅識에 들어간다 (T9-368c).

庵(암:高麗版에서는 庵)摩羅識이라는 명칭은 [金剛三昧經]에 특유한 것인데, 다음에 따로 고찰해 보고 싶지만 원효는 다음과 같이 코멘트한다.

唵摩羅(암마라)라는 것은 第九識이다. 眞諦三藏의 九識義는 이 文에 의해서 세운 것이다. 저 章에 설한 것과 같다 (T34-978a).

저 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은 잘 알 수 없지만 [金剛三昧經]의 성립을 7세기 후반으로 한다면 眞諦의 九識義, 그것이 대단히 문제가 될 것이다. 지금은 ㅁ두를 後考(후고)에 미루고 庵摩羅識에 들어가는 것이 理入 行入의 목적이고 入이라는 것은 不入이므로 요컨대 轉識得智(전식득지)의 장소는,
원효에서는 理入에서 行入으로 옮겨가는 곳이고, 行入은 결코 四行 등이 아니고 완전한 자각이고 거기가 庵摩羅識에 들어간 것이라고 확인해 두는 데에 그친다. 기본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諸佛如來는 항상 一覺으로써 諸識을 굴려[轉(전)] 唵摩羅(암마라)에 들어가게 한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일체 중생은 本覺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一覺으로써 諸衆生을 깨닫게 하고 저 중생들을 모두 本覺함을 얻게 해서 모든 情識(정식)이 空寂(공적)하고 無生인 것을 깨닫게 한다.
왜 그런가 하면 本性(본성)을 決定(결정)하면 본래부터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T34-978a)

굴린다[轉]는 것은 명백하게 轉識(전식)의 뜻이다. 諸識(제식)을 굴리는[轉] 힘이고 唵摩羅識에 들어가는 것이다. 唵摩羅識, 그것의 작용이 一覺이라고 말할 수 없는가? 왜냐하면 一切 衆生은 본래 本覺하고 있기 때문이다.
一切衆生本覺의 一句는 후에 神會(신회) 등이 곧잘 사용하고 있다.
一切衆生本來涅槃(일체중생본래열반) · 無漏智性(무루지성) · 本自具足(본자구족)과 완전히 같은 의미이다(胡適校(호적교), [神會和尙遺集(신회화상유집)], pp.132·232 등).
그 本覺이 항상 一覺으로써 諸情識(제정식)이 (본래) 空寂(공적)하고 無生(무생)임을 깨닫는 것이다. 완전한 동어반복, 동의어의 되풀이로 끝마치는 혐의가 있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깨달음의 소식을 여래는 반복해서 설명한다.
頓覺(돈각)이라 해도 좋고 頓悟(돈오)라 해도 좋다. 지금은 그것을 一覺(일각)이라 하는 것이다. 원효는 또 다음과 같이 코멘트한다.

원효는 또 다음과 같이 코멘트한다.

이 답은 바로 本利(본리)의 義를 널리 한 것인데 거기에 二句가 있다.
먼저 제기하고 다음에 그것을 해석한다.
'諸佛如來(제불여래)는 항상 一覺으로써'라는 것은 能化(능화)의 本을 보인 것이다. '(一覺으로써) 諸識(제식)을 굴려서 唵摩羅(암마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所化(소화)의 굴림[處(처)]을 보인 것이다.
해석에 二句가 있다. 바로 해석[正釋(정석)]함과 굴려서 해석[轉釋(전석)]하는 것이다.
正釋하는 중에서 '一切衆生本覺'이라고 하는 것은 앞의 能化의 本을 해석한 것이고 '一覺'이라고 말하는 것은 諸佛이 이 (곳)를 體로 해서 이에 (처음으로) 능히 普化(보화)하는 까닭에서이다.
'항상으로써[常以(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本覺으로 他(衆生)를 깨닫게 하는 까닭에서이고, 그러므로 '항상 一覺으로 諸衆生을 깨닫게 한다'고 말한다.
'저 중생을 모두 本覺함을 얻게 한다'는 것은 所化(의 중생)가 轉入(전입)한 것을 해석한 말이고, 本覺이라는 것은 바로 唵摩羅識이고, '本覺함을 얻는다'는 것은 入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本覺에 들어갈 때는 모든 8식이 본래 적멸함을 깨닫고 覺이 究竟(구경)이므로 諸識(제식)이 생겨나지 않으므로 그렇다. '諸識은 寂滅하고 無生'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一句는 바로 (앞에 말한) '諸識을 굴린다'는 句를 해석한 것이다.
이 텍스트는 자세히 本始(본시)二覺(의 뜻)을 나타낸다. '一切衆生本覺 云云'이라고 있는 것은 (바로) 本覺의 뜻이고, '諸情識(제정식)이 寂滅(적멸)하고 無生임을 깨닫는다'는 것은 始覺(시각)의 뜻이고, '始覺이 곧 本覺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이하는 第二 轉釋(전석)인데 앞에 말한 始覺의 覺이 寂滅함을 해석한 것이다. (결국) 諸八識은 緣(연)에 따라 動轉(동전)하지만 그 定性(정성)을 구하면 모두 (파악해서) 얻을 수 없으므로 '本性을 결정하면 본래부터 움직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본래 움직임이 없으므로 본래 寂滅(적멸)하다
(T34-978a).

길게 인용하였지만 '本覺에 들어갈 때'라고 하는 원효의 코멘트에 주의하고 싶다.
一覺은 衆生의 本覺이고 同一覺의 뜻이지만, 그것은 또 일거에 本覺에 들어간다고 하는 頓覺 · 頓入(돈각·돈입)의 의미를 포함한다.
始覺(시각)의 뜻이라는 것은 始覺이 곧 本覺과 같다는 것을 나타내는 곳에 轉識(전식)의 妙(묘)가 있는 것 같다. 本覺과 始覺이라는 말이 眞諦 譯(진제 역) [起信論(기신론)]을 근거로 한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까지도 없다.
'始覺이 곧 本覺과 같다'는 句는 사실은 眞諦 譯 [起信論]에 근거하였지만 唐(당)의 實叉難陀(실차난타) 譯에서는 '始覺의 때[時]에 곧 이것이 本覺으로서 다른 覺은 일어나지 않는다(T32-585a)'고 되어 있고 時라는 한 글자가 첨가되어 있다.
원효는 實叉難陀 譯을 몰랐지만 '本覺에 들어갈 때는 모든 8식이 본래 적멸함을 깨닫고'라고 해석하여 轉入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一覺의 설정은 轉入(전입)의 뜻을 위해서이고 始覺이 곧 本覺과 같다는 것, 覺心의 初起(초기)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金剛三昧經]은 始覺이란 말을 쓰지 않고 始覺이 本覺과 같다는 것을 특히 一覺이라 부른 것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轉識(전식)의 뜻을 포함한 始覺門(시각문)으로서의 行入을 설하는 것이 [金剛三昧經]이 노리는 바이다.
本覺으로부터 始覺으로는 아니고 不覺으로부터 始覺에, 여기에 一覺說의 동기가 있다.
예를 들면 원효는 [起信論疏] 上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먼저 또한 本覺에 대비하여 不覺이 일어나는 뜻을 나타낸 다음에 不覺에 대비하여 始覺의 뜻을 해석한다. 이 중의 大意는 始覺은 不覺을 기다리고[待(대)] 不覺은 本覺을 기다리고 本覺은 始覺을 기다린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서로 相對(상대)할 때는 곧 自性(자성)이 없다. 自性이 없는 것은 곧 覺이 없다. 覺이 없는 것은 서로 相對하는 데에 말미암아서이다. 相對해서 이루어질 때에는 곧 覺이 없음이 아니다. 覺이 없음이 아님인 고로 설해서 이름붙이기를 覺이라고 한다. 自性이 있음이 아니라면 이름붙여 覺이라고 한다
(T44-209a).

本覺과 不覺은 서로 相對(상대)하는 이름이다. 覺은 절대이고 對槪念(대개념)을 잡을 수 없으므로 覺의 반대는 不覺밖에 없다. 覺하든가, 覺하지 않든가 이어서 兩者(양자)의 途中(도중)은 없다.
그러한 중간개념이 없는 곳을 임시로 頓覺이라고 이름붙여도 좋지만 頓(돈)은 漸(점)에 대립하는 것이므로 頓覺이라고 하는 이름은 覺 그것의 표현에는 부적당하다.
頓漸의 개념은 원래 階位(계위)에 대한 말이어서 실천의 內實(내실)을 표현하는 것에는 대단히 어울리기 어렵다. 悟(오)도 역시 迷(미)에 대립하는 말이어서 미혹하지 않으면 깨달음도 아니고, 미혹함[迷]을 실질[實]로 할 수가 없고 悟의 조건으로 하는 것은 안 된다.
[起信論]이 本覺과 不覺, 그리고 始覺이라고 하는 三者의 辨證(변증)을 주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실천에 근거한 것이고 최후는 唯佛與佛(유불여불)의 세계가 된다.
앞에 인용한 원효의 注(주)가 의거한 起信論의 텍스트에 의하면,
'心源(심원)을 깨달은[覺]고로 究竟覺(구경각)이라 이름붙이고 心源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究竟覺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원효가 후자를 金剛已還(금강이환)이라 하고 전자를 '佛地(불지)에 있다'고 말한 所以(소이)이고 覺이든 不覺이든 어느 것이든 漸次(점차)의 중간은 아니다. 말해 보면 本覺과 不覺의 중간에 始覺을 놓는 [起信論]에 대해서 金剛三昧經의 一覺은 그 究竟性을 나타내는 것에 진일보한 것이 있다.
一覺了義라는 것은 一切衆生의 同一本覺인 것이고, 無覺으로써 覺하고, 覺하고서 覺에 머물지 않는 唯一心(유일심)이다. 理入說의 본문에 '金剛心地(금강심지)'라고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金剛心地'라는 것은 凡聖(범성)이 不二이고 나도 없고 他도 없어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닌 佛性(불성)에 住(주)는 無住의 住이다.


金剛의 智地(지지)에서는 解脫(해탈)의 道가 끊어지고 이미 끊고서 無住地에 들어간다. 출입이 없다. 心處(심처)에 있음이 없고 性地(성지)를 결정한다 (T34-979a).

智地라 하고 性地라 하는 것은 아무래도 階位說(계위설)에 約한 말이다
후에 禪佛敎의 別名이 된 心地法門은 그것들을 이어받은 것이다. 본래 [本覺利品(본각이품)]의 테마는 本覺과 本利를 밝히는 것에 있고 覺은 妙觀察(知)[묘관찰(지)]이고 慧日(혜일)의 빛과 같은 것이고, 利는 得本(득본)을 이루어 大法雨(대법우)와 같은 뜻이다.
金剛智地는 佛智地인데 一覺의 聖力(성력)이고 四弘(사홍)의 聖地(성지)이고 一切衆生의 根本覺利(근본각리)임을 가리킨 것이다. 覺이라는 것은 앞에 말한 究竟覺(구경각)이고, 利라는 것은 일체 중생을 성취하는 成佛의 근거이다.
無住菩薩(무주보살)이 이유를 물어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一切 衆生은 곧 이 몸 중에(그 근거를) 본래 만족합니까?"
佛은 "如是(여시)"라고 인정한다
(T34-979c).

'一切衆生 卽此身中 本來滿足(일체중생 즉차신중 본래만족)'의 一句는 대단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 같다. '此身'은 개개의 중생의 몸이고, 여기의 나는 결국 唯我(유아)이다.
후에 臨濟(임제)가 卽今目前聽法人(즉금목전청법인:T47-497b)이라고 부르고 卽今目前孤明歷歷地(즉금목전고명역역지)에서 듣는 者, 이 사람은 處處에 걸리지 않고 十方에 通貫(통관)하고 하고 三界에 自在(T47-498b)라고 하는 것을 金剛三昧經은 이미 먼저 가지고 있다.
'覺이라고 하는 것은 妙觀察(묘관찰)하고 慧日의 光과 같다'고 텍스트에 말하는 것과 臨濟가 '光影(관영)을 弄(농)하는 정도의 사람은 이 사람이 諸佛의 本源 云云'이라고 하는 것과 하등 저촉되지 않는다.
나는 일찍이 初期禪宗史書の硏究 (p.81)에서 東山 法門의 텍스트로서, 修心要論(수심요론)의 초두에 인용한 다음과 같은 [十地論]의 句에 특히 주의했던 적이 있다.


[十地論]에 말하기를, 衆生의 身(신) 중에 金剛(금강)의 佛性(불성)이 있어 日輪(일륜)과 같고 體(체)가 밝고 圓滿(원만)하고 廣大無邊(광대무변)하지만, 다만 五陰黑雲(오음흑운)에 덮인 바이다 (T48-377a).

十地論의 텍스트가 어디까지인가? · · · 다음 >>>계속(3/3)

제 3집_14 (2/3) 금강삼매경 연구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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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三昧經の硏究
(금강삼매경の연구)   번역·512/논평·541/답변·547
柳田聖山    日本 花園大學 國際禪學硏究所 所長    慶南大學校 敎授
金剛三昧經의 硏究   -中國佛敎에 있어서 頓悟思想의 텍스트-   崔裕鎭 譯

 

 

      -목     차-          | (1/3) | (2/3) | (3/3) |
        問題の所在(문제의 소재) ◁ 첫 페이지 (1/3)
       중간>金剛三昧經의 성립에~   중간>東海上의 龍宮(용궁)에~   중간>원효 ~ 현존의 20부
       다음 페이지 (2/3) 중간>敦煌 寫本의~   중간>(입실제품)의 텍스트~
       중간>원효의 코멘트~   중간>唵摩羅(암마라)~   중간>굴린다[轉]는 것은~ ◁ 두번째 (2/3)
       현재 페이지 (3/3) ▶ 중간부분> 十地論의 텍스트가~   ◁ 세번째 (3/3)
       金剛三昧境の硏究에 대한 논평   1.   2.   3.   4.   5.      논평에 대한 답변


  앞 내용 : 이후계속

十地論의 텍스트가 어디까지인가? 인용이 확실하지 않은 위에 현존하는 [十地論]과 [十地論]에 이 句를 대조하여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같은 句가 따로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 (T85-1285c)와 觀心論(관심론) (T48-367)에 인용되고, 宗鏡錄(종경록) 第八十(T48-858b)에도 十地論의 句라 하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如來藏系(여래장계)의 텍스트에서, 예를 들면 寶性論(보성론) 등에서 유사한 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十地經]이라 하는 것에 지금은 커다란 의미가 있고, 위의 金剛三昧經에 말하는 '이 몸 중에 本來 滿足(만족)한 金剛의 佛智地'의 句에 대비해도 좋은 것은 아닐까?
특히 [金剛三昧經] [本覺利品]이 이것을 거듭 '得本을 이루는 것, 大法雨와 같다'고 하고 本利의 포인트로 하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텍스트는 이 一段에 유명한 방탕한 아들의 비유를 인용한다.
[法華經(법화경)] [信解品(신해품)]을 근거로 하면서 문맥을 달리 하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이다.


비유하면 迷子(미자)와 같으니 손에 金錢(금전)을 쥐고서도 갖고 있는 것을 몰라서 十方에 遊行(유행)하여 오십 년을 경과했다. 貧窮因苦(빈궁인고)해서 전적으로 찾아 헤메는 것을 일삼으나 몸을 보양하는 데도 충족하지 못하였다.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와 같은 일이 있음을 보고 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네가 손에 金錢을 쥐었는데도 어찌하여 取(취)하여 사용하지 않느냐? 뜻에 따라 필요한 바에 모두 충족하리라"라고 하였다.
그 아들은 깨어나 金錢을 얻고 마음에 크게 기뻐하여 돈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 아버지는 말하기를 "미혹한 아들[迷子]아, 기뻐하지 말아라. 얻은 金錢은 본래 너의 것이고 네가 얻은 것이 아니다. 어찌 기뻐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T9-369a).

一讀(일독)해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처럼 迷子(미자)가 손에 쥔 금전은 본래 迷子의 것이다.
타국에 돌아다니느라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본래는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아니니 얻었다고 기뻐할 것도 잃었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오히려 얻었다 기뻐해서는 안 되고[喜風(희풍)에 動(동)하지 않는다] 本物임을 證하는 것이 테마이고 이미 本物임을 깨달으면, 本物임을 깨달은 것도 이미 동시에 無住가 된다.
達摩의 二入四行論에서 四行의 第二를 髓緣行(수연행)이라 하고 得失髓緣(득실수연)을 說하고 喜風(희풍)에 움직이지 말고 道에 冥順(명순)하라고 가르치는 것도 金剛三昧經과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
喜(희)는 열반의 動이고 잃어서 50년을 경과했다는 것도 一念의 움직임일 뿐이다. 十方遊歷(시방유역)은 遍計(편계)였고 一念心이 動해서 五陰을 生하고 五陰이 生하면 五十惡이 된다. 50년이라는 것은 五十惡이다.
지금은 迷子의 遊歷(유역)을 佛(불)이 遍計(편계)라고 한 것에 주의하고 싶다. 저 아버지는 아들이 迷한 것을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아들이 50년이 지나도록 十方遊歷(유역)하고 貧窮因苦(빈궁인고)해서야 바야흐로 처음으로 말한 것인가 하고 無住菩薩이 물은 것에 답해서 佛은 그것을 遍計라 한 것이다. 遍計(편계)의 體는 本利이다.


저 중생으로 하여금 心神(심신)을 安坐(안좌)시켜서 金剛地에 住(주)하고 靜念(정념)까지도 일어남이 없고 마음이 항상 安泰(안태)하도록 해서 (거기에서 처음으로) 곧 一念도 없는 것이다.
衆生의 心이 安泰한 것은 곧 本覺이고 本利인데, 利이며 움직임이 없고, 항상 있어 無는 아니다
(T9-369a).

텍스트는 迷子의 遊歷유역)을 遍計(편계)라 할 뿐이고, 그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作者는 명백히 唯識(유식)의 三性說(삼성설)에 근거하고 있다. 唯識은 識에 대해서 三性을 나누고 識의 성질을 말한 것이지만, 金剛三昧經은 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常在不無(상주불무)의 理가 테마이다.
唯識說(유식설)과 如來藏(여래장)이 다른 점은 이 경우 가장 명확하다.
如來藏은 唯心論이고 理로서의 心이다. 理는 實在이다.
八識의 外에 庵摩羅(암마라)를 두는 것도 완전히 동일한 구조인데 이른바 第九 庵摩羅識은 이 텍스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金剛三昧經의 庵摩羅(識)은 이른바 眞諦의 九識說과도 十卷 楞伽의 경우와도 다르다.
[入實際品]의 理行二入이 문제의 관건이다. 庵摩羅는 理이고 識은 아니다. [本覺利品]의 一覺은 그러한 理行二入의 근거이고 迷子의 비유는 그 설명에 해당한다.
텍스트는 [入實際品]에 와서 갑자기 五空(오공)과 三性空寂(삼성공적)을 말하고 자신들도 없고 타인들도 없으며, 乃至(내지)는 二入(이입)함도 마음을 내지 않는다 한다. 갑자기 등장한 乃至二入은 사실은 迷子의 비유를 이어받은 것이다.
'心은 본래부터 生하지 않는다. 어떻게 들어가는 것이 있는가'라고 하는 大力菩薩(대력보살)의 물음에 답한 것이다.
[法華經]의 迷子의 이야기는 迷子가 본래 잃어버리지 않은 金錢(금전)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망각하고 있는 迷子가 어떻게 기억을 되찾는가 하는 것이다. 차라리 기억을 어떻게 되찾게 하는가이다.
밖으로부터 가르치는 한은 더욱 더 不信(불신)에 빠져 가는 내 아들에게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 줄 것인가, 스스로 잃어버리지 않았고 잃어버리지 않았으므로 얻은 것도 없는 본래의 자기를 어떻게 깨우칠 수 있는가?
사실은 거기에 커다란 모순이 있는 것이지만 굳이 밖으로부터 하게 만들어간 아버지 측으로부터의 배려, 특히 敎化(교화)의 깊어짐에 주제가 있다.
본래 잃어버리지 않은, 따라서 얻은 것도 없다고 하는 絶對平等(절대평등)한 理의 철학은, 굳이 말하자면 方便이고 거기로 향한 절차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敎判論(교판론)에 시종하는 것이다. 사실, 후에 諦觀(제관)의 天台四敎儀(천태사교의)와 같은 장대한 五時八敎(오시팔교)의 체계를 그 비유에 배치하고 있다.


金剛三昧經의 텍스트가 여러 시기의 과제를 重層的(중층적)으로 받아내고 있는 것은 확실한가?  理行二入을 하나 문제삼아도 그것을 達摩의 二入四行說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敦煌本(돈황본) 理入四行論 쪽이 金剛三昧經과 績高僧傳(적고승전)을 받아들여 새로이 집대성했다고 보고 싶다.
金剛三昧經의 理行二入은 庵摩羅와 不可分이지만, 績高僧傳 이후의 二入四行說은 庵摩羅識(암마라식)을 잘라 버렸다.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의 [求那跋陀羅章(구나발타라장)]에 인용한 유명한 四心說과 같은 것은 金剛三昧經 이전의 것 아닌가?
여기에는 명확하게 階位(계위)가 있고 앞에 인용한 迷子(미자)의 비유와 겹친다.


지금 安心을 말함에 대략 四種이 있다.
첫째는 背理心이니 한결같은 凡夫心이다.  둘째는 向理心이니 生死를 싫어해서 열반을 구하며 寂靜(적정)을 趣向(취향)함을 말하는데, 聲聞心(성문심)이라 한다.
셋째는 入理心인데 장애를 끊어 理를 드러낼 수 있지만 能所(능소)가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菩薩心(보살심)이다.
넷째는 理心인데 理外의 理가 아니요, 心外의 心이 아니다. 理가 곧 心이고 心이 능히 평등한 것을 일러, 그것을 이름붙이기를 理라 한다. 理가 비추어서 능히 밝게 되는 것을, 그것을 心이라 한다. 心과 理가 평등한 것 그것을 佛心이라 한다.
實性(실성)을 안 사람은 生死(생사)와 涅槃(열반)이 구별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凡과 聖이 無異이고, 境과 智가 無二이다. 理와 事가 모두 융화되고, 眞俗齊觀(진속제관: 眞과 俗이 평등)하고, 染淨一如(염정일여)이고, 佛과 衆生이 本來平等一際이다
(T85-1284a).

이 一殷은 따로 頓悟眞宗論(돈오진종론)에 인용되고(T85-1278b), [宗鏡錄(종경록)] 第百則에서도 跋陀 三藏(발타 삼장)의 말이라 한다(T48-953a).
[楞伽獅子記(능가사자기)]가 이미 몇 행 앞에 둔 '圓通無碍 名大修道(원통무애 명대수도)'의 一句를 頓悟眞宗論과 [宗鏡錄]이 모두 일괄한 것에 의하면 본래 跋陀 三藏의 것이었던 것 같다. 跋陀가 求那跋陀羅(구나발타라)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남지만
[楞伽師資記]가 인용한 四心說은 理를 중시하는 것이 金剛三昧經의 理入과 대단히 닮았다. 背理心은 迷子의 遠行遍計(원행편계)이고, 向理로 깊어지는 것은 理行二入의 구조에 비교해도 좋다.


모두 추정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敦煌本 [二入四行論]과 같은 내용과 형식 모두 뛰어난 작품이 金剛三昧經 이전에 있고 禪宗 初祖의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새삼스럽게 [金剛三昧經]과 같은 佛說의 권위를 빌릴 필요는 없다.
達摩를 禪의 初祖로 하는 東山 法門의 宗統(종통), 그것이 반드시 확립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玄장 唯識이라고 하는 강렬한 性相分判(성상분판)의 움직임에 金剛三昧經이 우선 반격을 가한다.
楞伽經에 의거하는 일파가 達摩를 初祖로 해서 운동을 일으킨다. 楞伽經의 心識說에 의하면서 앞에 인용한 四心說과 같은 理를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이다. 法沖(법충)도 또한 그런 한 사람이고, 그는 명백히 '玄장'을 의식하고 있었다.
[績高僧傳] 二十五의 法沖傳(법충전)은 道宣(도선)이 만년에 補正(보정)한 것인데, 舊譯(구역)의 경전을 講(강)하는 것을 싫어하는 玄장에게 法沖이 화살을 향하고 있는 얘기로 끝맺는 것은 慧可에서 시작한 楞伽師(능가사)의 움직임이 함께 같은 경향을 갖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T50-666a).
본래의 達摩와 慧可에 理를 중요하게 보는 생각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반드시 명확하지는 않다. 玄장唯識(현장유식)의 움직임 중에서 [金剛三昧經]의 理行二入에 근거해서 敦煌本(돈황본) [二入四行論]이 생겨 온 그러한 새로운 경과를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金剛三昧境の硏究에 대한 논평               - 최유진(경남대 교수) -

미즈노(水野)의 논문 [菩提達摩의 二入四行說과 金剛三昧經]은 菩提達摩의 二入四行說이 金剛三昧經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고
金剛三昧經을 唐初(당초)의 텍스트로 보고 菩提達摩의 二入四行說의 편에 육조 말기 북위불교에 고유한 창안을 인정하려고 하는 근대 문헌 연구로서의 문제 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논문은 그러한 미즈노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돈황본 [二入四行論]과 같은 내용, 형식 모두 뛰어난 작품이 金剛三昧經 이면에 있었고 그것이 禪宗 初祖의 것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달마를 禪의 初祖로 하는 東山法門의 宗統(종통) 그것이 반드시 확립되어 있던 것은 아니라 한다. 오히려 현장 唯識이라고 하는 강렬한 性相分判(성상분판)의 움직임에 金剛三昧經이 우선 반격을 가하고 [楞伽經]에 의거하는 일파가 달마를 初祖로 해서 운동을 일으킨다고 보고 있다.
요컨대 현장유식의 움직임 중에서 金剛三昧經의 理行二入에 근거해서 돈황본 [理入四行論]이 생겨왔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金剛三昧經의 성립에 대해서는 원효의 金剛三昧經論이 먼저 있고 그것을 大安이 八章의 金剛三昧經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원효를 金剛三昧經의 저자로 보고 있다.
본 논평자는 선종의 발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므로 다만 원효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1. 金剛三昧經의 성립에 대하여 특히 그것을 원효의 작품이라고 하는데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이 주장은 상당히 과감한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근거가 약한 듯하다.
金剛三昧經의 성립은 논문 필자에 의하면 道宣(도선)이 績高僧傳의 初稿(초고)를 완성하고 그것을 補正하는 시기에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金剛三昧經을 근거로 해서 績高僧傳의 텍스트가 생기고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에 전하는 [略辨大乘入道四行(약변대승입도사행), 弟子曇林序(제자담림서)]가 이루어진다(p.10)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645년(績高僧傳 初稿완성)에서 667년(道宣의 사망) 사이가 된다.
원효의 金剛三昧經論의 저술이 이보다 후라면 원효가 金剛三昧經論과 함께 金剛三昧經을 제작했다는 가설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金剛三昧經이 언제 씌어졌는가를 확정짓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金剛三昧經論이 원효의 비교적 말년의 작품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자신의 저서 중에서 [二障義], [起信論疏]가 인용되고 있고 딴 저서에는 金剛三昧經論이 인용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는 최후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Robert E. Buswell, Jr., The Chronology of Wonhyo's Life and works : Some Preliminary Considerations, {원효연구논총}, p.740).
원효의 비교적 말년이라고 하는 것을 667년(51세) 이후로 볼 수 있을 것 같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 그 집필 연대를 알 수 있는 저술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원효의 저술 중에서 우리가 그 집필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현재로서는 [判比量論(판비량론)]이 유일하다.
그것은 671년의 작품이다[韓國佛敎全書 제1책 p.817 判比量論, 跋文에 咸亨二年歲在辛未七月十六日 住行名寺 著筆租이訖(발문에 함형이년세재신미칠월십육일 주행명사 저필조이흘)라고 되어 있음].
그리고 判比量論(판비량론)은 현재 남아 있는 저술 중에서는 제작 연대가 가장 빠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判比量論은 그렇지 않은데 현재 남아 있는 저서들은 의상이 전한 智儼(지엄)의 화엄교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신현숙, [원효의 인식과 논리], p.15).
이런 여러 가지에서 볼 때 判比量論보다는 후에 썼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논문 필자의 金剛三昧經 원효 작품설은 설득력이 없어진다. 그 밖에 원효는 法相唯識에 대한 핍박감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鎌田武雄(검전무웅), [十門和諍論(화쟁론)의 思想史的 意義], 佛敎學 11, pp.10-11),
원효의 기본 사상이 화쟁적이라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法相唯識(법상유식)에 대한 반발로 金剛三昧經을 제작했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전하여 오는 역사적 기록을 일단은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 기록에 대한 확실한 반대 증거가 없는 한에는 원효가 제작했다기보다는 기록대로 어딘가에서 새롭게 나타난 [金剛三昧經]에 대해 원효가 주석을 붙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논문 필자에 의하면 원효의 金剛三昧經論의 이론을 績高僧傳의 텍스트가 이용했다는 것인데 金剛三昧經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까? 설득력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金剛三昧經만으로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생각된다.
金剛三昧經의 성립은 원효의 論 이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원효의 이론과 金剛三昧經 본문을 구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문제는 남는다. 金剛三昧經에는 玄장의 새로운 번역 용어가 나오므로 그것은 649년 이후 667년 이전의 성립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원효의 論 이전에 딴 사람이 그것을 보고 績高僧傳의 텍스트를 만들었다고 해야하는데 원효의 論 이전에 과연 중국에 金剛三昧經이 알려져 있었을까?
원효의 金剛三昧經論 덕분에 金剛三昧經이 유명해진 것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2. 원효는 金剛三昧經論 卷上(한국불교전서 제1책 606a)에서 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금강삼매본성청정불증불감경)을 인용하고 있다.
大正新修大藏經(대정신수대장경:T34-962a)에서는 그렇게 끊어 놓지 않았지만 내용을 살펴볼 때 [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으로 읽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이기영 역([삼성관 세계사장전집] 11)에서도 [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으로 읽고 있다). T55-121a에는 金剛三昧本性淸淨不壞不滅經(금강삼매본성청정불괴불멸경)으로 나오지만 같은 경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논문 필자도 그렇게 보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필자가 언급한 T55-121a에는 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은 없고 金剛三昧本性淸淨不壞不滅經만이 있기 때문이다. 金剛三昧本性淸淨不壞不滅經(T15-697)에서는 金剛三昧가 궁극적인 경지가 아니다.
따라서 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의 金剛三昧는 有學位이나 金剛三昧經의 金剛三昧는 無學位(무학위)라는 金剛三昧經(한국불교전서 제1책 606a, T34-962a)에서의 원효의 말과도 일치한다. 이상과 같이 볼 때 金剛三昧經을 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과 혼동하여 眞經(진경)으로 인정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3. [金剛三昧經]을 초기 禪思想의 여러 가지 경향과 唯識 - 如來藏 혼합이론을 종합한 문헌으로 신라의 禪僧(선승)인 法朗(법랑)이 창작한 것으로 보는 버스웰의 입장(The Korean Orlgin of "The Vajrasaadhisutra" : A Case Study in Determining the Dating, Provenance, and Authorship of a Buddhist Apcryphal Scripture, p. iii)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 주장에 대한 검토가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버스웰은 특히 원효의 주석이 아닌 [金剛三昧經] 자체가 그런 경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金剛三昧經]과 원효의 [金剛三昧經]을 동일선상에서 취급하는 논문 필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것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4. 논문 필자는 '海東佛敎는 현장 · 자은의 唯識法相宗에 대항하여 십지론계의 여래장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주장을 하려면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唯識法相宗(유식법상종)이 바로 신라에 도입되고 華嚴宗(화엄종)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한 학파를 이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신라적인 특성을 보이기는 하나 그 근본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海東佛敎가 唯識法相宗에 대항하여 십지론계의 여래장에 경도되어 있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유식(唯識法相宗)이 생겨나기 전에는 십지론계의 여래장에 경도되어 있었을지 모르나 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대항으로 표현하여서는 곤란하다.
원효가 현장 · 慈恩(자은)의 문하를 사모하여 入唐하려 하였다는 [宋高僧傳]의 기사도 원효가 새로운 유식에 대하여 일단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할 것이다. 물론 원효는 入唐을 중지하지만 새로운 유식에 호의적 태도를 갖고 入唐하려고 했던 그런 태도가 당시 海東佛敎의 일반적인 경향이 아니었을까?
海東佛敎의 개념 규정도 모호하다. 중국 측의 登州(등주)와 고구려 일대의 지방이 해동불교의 거점이라면 어떻게 원효 · 의상이 그런 해동불교에 포함되는가? 좀더 명확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5. 四世懸記(사세현기)의 문제에서 의문점 한 가지를 제기하고자 한다. [績高僧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可가 법을 說해 마칠 때마다 (無臂林은) 말한다. 이 경은 四世 후에 변하여 名相을 이룰 것이다. 어찌 슬퍼할 것인가 (p.3;T50-552b)."
원문 : 每可說法竟曰 此經四世之後 變成名相 一何可悲(매가설법경왈 차경사세지후 변성명상 일하가비


이것은 曇林(담림)이 4세 후에 名相(명상)을 이룰 것이니 슬퍼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曇林은 名相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名相과의 관련에서 의문이 생긴다.
논문 필자는 이전에는 名相을 이룰 것이므로 슬프다고 해석하고 慧可의 말로 인정했었다. ([初期禪宗史書의 硏究], p.26) 그런데 이제 이것이 曇林의 말이고 名相을 이룰 것이니 슬플 것이 없다고 해석된다면 曇林을 끌어들인 사람들은 四卷 楞伽를 名相化하는 경향에 반대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名相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인가? 만일 名相化하는 경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曇林을 끌어들인 것이라면 앞의 "어찌 슬퍼할 것인가"(원문은 一何可悲)라는 말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다.
名相을 이루는 것은 그들에게는 슬픈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名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曇林을 끌어들인 것이라면 "四卷 楞伽를 名相化하는 당대 일반의 경향에 대하여 그것을 편향되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達摩 · 慧可를 祖로 하는 운동을 일으키고 曇林을 達摩의 측으로 끌여들였다"는 말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어찌 되었든 좀더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논평에 대한 답변         : 柳田聖山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저자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는데, 금강삼매경론의 저자가 원효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금강삼매경의 저자도 원효가 아닌가 하고 말했습니다. 금강삼매경론이 만들어진 신라야말로 위경의 본산지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만약 원효의 저술이 아니다라고 하는 확실한 증거가 나온다면 저도 거기에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까지는 거기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의 젊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하여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에 대한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원효대사의 기본사상을 우리는 화쟁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쟁론을 말하는 원효대사는 대단히 비판적인 글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비판이 없이는 화쟁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원효대사는 비판도 대단히 많이 하고 있고, 나중에 가서는 비판이 하나로 일치되었을 때 그것을 화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달마대사의 저작으로 알려진 [이입사행론]의 관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달마대사의 저작으로 되어있는 것과 한국에 전래된 것, [속고승전]에 나오는 것이 모두 같다고 보고 있는데, 저는 다르다고 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문제는 한번 써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정리하고 새로 바꾸어 나가는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면 이번의 주제인 돈오돈수의 문제에서 돈오문제의 원전은 무엇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저는 금강삼매경이 바로 돈오문제의 원전이라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고 이야기할지라도 제 생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다음에 만나뵐 때에는 지금까지 한 것을 전부 정리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가짐으로 더 연구하여 보고할까 합니다.

제 3집_14 (3/3) 금강삼매경 연구_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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