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고전의 향기 ♧

三皇五帝

화엄행 2009. 10. 20. 22:36

3황이라 함은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헌원씨(軒轅氏)를 가리키는 말이며, 5제란 소호(少昊), 전, 곡, 요(堯), 순(舜)을 지칭하는 말. 
 
복희씨는 일명 포희(包羲), 희황(羲皇), 황희(皇羲), 태호(太昊)와 동일인물 이라는 설도 있다. 끈을 매듭지어 그물을 만듦으로써 사람들에게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고, 팔괘(八卦)를 창조해 천문지리와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견했다고 한다. 

신농씨는 처음으로 나무를 깎아 쟁기를 만들고, 나무를 꾸부려서 자루를 만들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 백가 풀을 맛보아 처음으로 의약을 만들어 백성의 질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마지막 3황인 헌원씨는 배와 수레를 만들어서 전에 다니지 못하던 곳을 다닐 수 있게 하는 등 문화를 크게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5제(五帝) 중에서는 중국의 유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제왕으로 칭송받고 있는 요·순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진다. 
 
요(堯)는 어진 정치를 펴 전쟁을 없애고 태평한 사회를 만들었으므로 주변 부락이 동맹하여 그를 영수로 추대했다.  
그는 인자한 성품으로 백성들을 덕으로 감화시켰으며, 홍수조절을 위해 물을 다스리기도 했다.  
만년에 왕위를 아들 단주에게 물려주지 않고 어진 신하인 순(舜)에게 넘겨줌으로써 후세의 유가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순(舜)임금은 요(堯)로부터 군위를 선양받아 초보적인 통치국가의 기본을 다진 인물로서 요임금과 함께 유가에서 최고로 받들어지는 성군이다.  
요임금처럼 덕으로 백성을 다스렸으며, 소(韶)라는 아름다운 음악을 지었다.  
만년에 자신의 아들에게 천자의 지위를 물려주지 않고 치수를 잘 한 우(禹)에게 군위를 선양했다. 

 

삼황오제는 중국의 고대 신화상의 제왕들이다. 사료에 따라 삼황오제의 이름은 조금씩 다르다.

 

삼황(三皇)

 

중국 역사상 "삼황오제"에 관한 설은 전국시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먼저 삼황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7종의 설이 있다.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 ≪사기(史記)≫「보삼황본기(補三皇本記)」에 인용된 ≪하도(河圖)≫, ≪삼오력(三五曆)≫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 :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記)」  

복희(伏羲), 여와(女娲), 신농(神農) : ≪풍속통의(風俗通義)≫「황패편(皇覇篇)」

복희(伏羲), 신농(神農), 공공(共工) : ≪통감외기(通鑒外紀)≫

복희(伏羲), 신농(神農), 축융(祝融) : ≪백호통(白虎通)≫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 : ≪풍속통의(風俗通義)≫「황패편(皇覇篇)」에 인용된 ≪예위(禮緯)≫「함문가(含文嘉)」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 《십팔사략》, ≪제왕세기(帝王世紀)≫와 손씨주(孫氏注) ≪세본(世本)≫

 

   

십팔사략에 나온 삼황

 

아래는 십팔사략에 나온 삼황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에서의 삼황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을 말한다.

삼황은 맨 처음 세 명의 왕도 아니고, 연속적인 세 명의 왕이 아니다. 그들은 각각 인류 문명에 필요한 획기적인 발명을 통해 후세에 큰 모범이 되었기에 '삼황'(三皇)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삼황의 첫 째인 복희는 태호(太昊:큰 하늘)라 불렸으며,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복희의 뒤를 이어 몇 번의 왕들이 자리를 잇다가, 두 번째 삼황인 신농의 시대가 왔다. 염제(炎帝:불꽃 임금)라고도 불린 신농은 사람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 그는 태양신이자 농업신으로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또한,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상업을 가르쳤다고 한다.

염제 신농의 자리를 이은 것이 바로 황제 헌원(軒轅)이다. 헌원은 사람들에게 집짓는 법과 옷 짜는 법을 가르쳤으며, 수레를 발명했다. 글자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해 천문과 역산을 시작하고, 의료술을 시작한 것도 황제였다. 어느정도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자 황제는 태산(泰山)에 행차하여 천지 사방의 신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황제는 큰 코끼리가 끄는 보물로 된 수레를 탔으며, 황제의 위세를 본 신들은 그의 위력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천지 사방의 신들 중, 황제에 따르지 않는 무리들은 치우(蚩尤)를 따라 반란을 꾀했다. 치우는 눈이 넷, 손이 여섯이었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쇠와 돌을 즐겨 먹는 신으로 자신의 72명의 형제와 함께 싸움에 매우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황제는 치우의 모반을 알자마자 군사를 모아 판천과 탁록에서 치우를 격파하였다. 치우는 부하인 풍백, 우사와 함께 저항했으나 결국 황제에게 항복했다.  

치우의 난을 평정한 황제는 이후 별 탈 없이 지내다가 백 살 되던 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가 하늘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치세가 계속되기를 기원했지만 황제는 중신들과 함께 용을 타고 승천하였고, 이후 황제의 다섯 자손들('오제')이 세상을 다스렸다.

 

오제(五帝)

 

오제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설이 없으며 주로 다섯가지로 요약된다.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 ≪황왕대기(皇王大紀)≫  

황제(黃帝), 전욱(颛顼), 제곡(帝喾), 당요(唐堯), 우순(虞舜) : ≪세본(世本)≫, ≪대대례(大戴禮)≫, ≪사기≫「오제본기」  

태고(太皋: 伏羲), 염제(炎帝), 황제(黃帝), 소고(少皋), 전욱 : ≪예기(禮記)≫「월령(月令)」  

황제(黃帝), 소고(少皋), 제곡(帝喾), 제지(帝摯), 제요(帝堯) : ≪도장(道藏)≫「동신부(同紳部)·보록류(譜錄類)·곤원성기(混元聖記)」에 인용된 양무제(梁武帝)의 말  

소호(少昊), 전욱(颛顼),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 : ≪상서서(尙書序)≫, ≪제왕세기≫, 《십팔사략》

 

★ 十八史略에 나온 五帝

 

십팔사략에서 오제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을 뜻하며,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제요 도당, 제순 유우의 다섯 명이다. 뒤의 두 명을 따로 떼어 요순임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호 금천(少昊 金天)은 황제의 아들로 황제가 승천한 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봉황이 날아들어 소호의 정치를 도왔다.  

소호의 뒤를 이은 것은 전욱 고양(顓頊 高陽)으로, 전욱은 소호의 형의 아들이었다. 아직 반고의 천지 창조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다. 전욱은 엄격한 법을 세워 하늘과 땅의 구별을 확실히 하고, 인간 세상에서도 주종관계, 남녀관계 등을 확실히 세웠다.

전욱의 뒤를 이은 것은 소호의 아들인 제곡 고신(帝喾 高辛)이었다. 그는 음악의 신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다.  

제요와 제순에 관해서는 요순임금을 참조하라.

 

 

삼황오제의 동이설

 

삼황오제는 중국역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나, 이들은 모두 동이이었다는 중국의 사료들이 존재하며[1], 이 “동이”의 역사적인 범주가 과거에 산동성이나 요동성 등을 포함했다는 점에 기반해 삼황오제를 비롯해 동이 전체를 한민족으로 보는 역사관이 존재한다.[출처 필요] 그러나 진(秦)나라 이전의 동이와 한(漢)나라 이후의 동이는 종족 구성 자체가 전혀 다른 존재로서 한민족이 속해 있는 동이는 한나라 이후의 동이이기 때문에 진나라 이전의 개념인 삼황오제의 동이 여부와 한민족은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인과 가야인은 그 조상을 소호 금천씨라고 했고, 고구려인은 그 조상을 제곡 고신씨 또는 전욱 고양씨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석

 

↑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복희씨를 말함), 제준(帝俊), 제곡(帝嚳), 제순(帝舜), 소호(少昊) 그리고 설(契)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의 선조)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고사변(古史辯)-

 

↑ 이성규, 〈선진 문헌에 보이는 '동이'의 성격〉, 《한국고대사논총》제1집, 1991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 《사기(史記)》에서는 3황을 복희(伏羲)·여와·신농(神農), 혹은 천황·지황·인황으로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복희는 역(易)을 만들고, 여와는 인류를 낳았으며, 신농은 백성에게 농업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3황의 전설에는 신화적 요소가 강하다. 또 사마천(司馬遷)은 5제인 황제(黃帝)·전욱·제곡·요(堯)·순(舜)에 대하여 《사기》 첫머리에 싣고 있지만, 3황에 대해서는 많은 의심을 품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3황이 《사기》에 첨가된 것은 당(唐)나라 때부터이다. 이와 같이 중국 고대사는 시대가 오래된 것일수록 나중에 첨가되었다. 이에 의하면 3황 5제시대는 중국 고대에 실재하지 않으며, 나중에 하왕조 앞에 접목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황 5제가 일정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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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五帝)의 정의

 

중국 고대의 전설에 나오는 다섯 명의 제왕(帝王)을 가리킨다.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記)>에서는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을 들고, <제왕세기(帝王世記)>에서는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을 들고, 그리고 주역(周易)에서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堯), 순(舜)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기를 따라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으로 가정한다.


1. 헌원씨(軒轅氏) 황제(黃帝)

황제는 소전(少典)이라는 부족의 자손으로, 성(姓)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 이다. 전설에 의하면 소전국(少典國)의 왕비가 들판에서 기도를 올리다가 큰 번개가 북두칠성의 첫째 별을 감싸고 도는 것을 보고는 그를 잉태하여 24개 월 만에 수구에서 황제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헌원의 시대는 신농씨(神農氏 : 고대 제왕의 하나 그가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신농씨라 했다. 염제(炎帝)라고도 한다.)의 세력이 쇠해져 가는 시기였으므로 제후들은 서로 침탈하고 백성을 못살게 굴었으나 신농씨는 이들을 정벌할 힘이 없었다. 이에 헌원은 창과 방패 등 무기의 사용을 익혀서 신농씨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는 제후들을 정벌했다. 그 결과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 복종했으나, 다만 치우(蚩尤)만은 가장 포악하였으므로 헌원도 그를 토벌할 수가 없었다. 염제가 제후들을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로 귀순했다. 헌원은 이에 덕을 쌓고, 병사를 정비했으며, 오기(五氣 : 木, 火, 土, 金, 水)를 연구했다. 또한 오곡(기장, 피, 벼, 보리, 콩)을 심어 백성들을 사랑으로 돌보았고, 사방으 토지를 측량, 정리하였다. 이어서 곰, 범 등의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서 판천(阪泉)의 들에서 염제와 여러 번 싸워 결국은 승리를 취함으로 해서 드디어 뜻을 이루었다. 치우(蚩尤)가 다시 난을 일으키자 황제는 제후들로부터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에서 싸워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염제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이다.

황제는 하늘로부터 보정(寶鼎 : 제위를 상징하는 보배로운 솥)과 신책(神策 : 점칠 때 쓰는 자잘한 나뭇가지)를 얻었고, 풍후(風后), 역목(力牧), 상선(常先), 대홍(大鴻)을 등용하여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2.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

황제는 헌원의 언덕에 살면서 서릉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 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유조(처음으로 양잠을 가르침)이다. 유조는 황제의 정실로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의 후손들은 모두 천하를 얻었다. 큰 아들은 현효(玄효), 즉 청양(靑陽)으로서, 청양은 강수(江水)의 제후가 되었다. 둘째는 창의(昌意)라고 했는데 약수(若水)의 제후가 되었고, 그는 촉산씨의 딸을 아내로 얻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창복(昌僕)이었다. 창복은 고양을 낳았는데, 고양은 성스러운 덕성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가 붕어하자 교산에 장사를 지냈고, 그의 손자이자 창의의 아들인 고양이 제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전욱이다.

그는 침착하여 지략에 뛰었났고, 사리에 통달했다. 또한 그는 적지를 골라 곡물을 생산하였고, 우주의 운행에 따라서 계절에 맞는 일을 하였으며, 귀신의 권위에 의지하여 예의를 제정하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신령에 제사를 지냈다. 그는 북쪽으로는 유릉, 남쪽으로는 교지, 서쪽으로는 유사, 동쪽으로는 반목에까지 다다랐다.


3. 고신씨(高辛氏) 제곡(帝嚳)

전욱은 궁선이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전욱이 붕어하자 현효의 손자인 고신이 제위에 올랐다으니 이 이가 바로 제곡이다. 제곡 고신은 황제의 증손자인데, 고신의 부친은 교극이며, 교극의 부친은 현효이고, 현효의 부친이 바로 황제이다.

고신은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또한 널리 은덕을 베풀어 남을 이롭게 했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으며, 귀가 밝아 먼 곳의 일까지도 잘 알았고, 눈이 밝아 자잘한 일들도 잘 관찰하였다. 그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였고 백성을 절박한 요구를 잘 알았으며, 인자하면서도위엄이 있었고 은혜로우면서도 신의가 있었으며, 깨끗하게 자신을 수양하였으므로 천하가 그에게 순종하였다.

그는 토지의 산물을 얻어 아껴서 사용하였고, 백성을 정성으로 가르쳐서 그들을 이롭게 이끌었으며, 해와 달의 운행을 헤아려서 역법을 만들어 영송하였고, 귀신으 권위를 이해하여 그들을 공손히 섬겼다. 그의 모습은 매우 온화했고, 덕품은 고상했으며, 행동은 천시에 적합했으며, 의복은 보통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제곡은 대지에 물을 대주는 것처럼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은덕을 천하에 두루 미쳤으므로, 해와 달이 비치고 비바람이 이르는 곳이면 다 그에게 복종하였다.


4. 도당씨(陶唐氏) 요(堯)

제곡은 진봉씨(陳鋒氏)의 딸을 아내로 맞아 방훈(放勛)을 낳았고, 또 추자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지(摯)를 낳았다. 제곡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지가 제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지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므로 동생인 방훈이 대신 제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바로 요이다.

그는 하늘처럼 인자하고 신처럼 지혜로웠으며, 사람들은 마치 태양에 의지하는 것처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만물을 촉촉히 적셔주는 비구름을 보듯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부유하였으나 교만하지 않았고, 존귀했으나 거드름 피거나 오만하지 않았으며, 황색의 모자를 쓰고 검은 색의 옷을 입고서 흰 말이 끄는 붉은 마차를 탔다. 그는 큰 덕을 밝히어 구족(九族)을 친하게 하였다. 구족이 화목하게 되자 백관의 직분을 분명히 구분하였고, 백관이 공명정대하니 모든 제후국이 화합하였다.

요는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춘분, 하지, 추분, 동지를 정하였다. 1년을 366일로 정하고, 3년에 한 번씩 윤달을 이용하여 사계절의 오차를 바로잡았다. 요는 백관들을 계칙하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업적이 다 올라갔다.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아들 단주(丹朱)가 덕이 없음을 알고, 적당한 후계자를 찾았다. 결국 순을 찾았고 그에게 두 딸을 시집 보내었다. 순은 등용된 뒤, 요를 대신하여 정치를 하였다. 순은 계절과 한 달의 날짜를 바로 잡았고 하루의 시각을 바르게 정했고,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오례를 제정하였다. 또한 십이주(십이주 : 기, 연, 청, 서, 형, 양, 상, 양, 웅, 방, 유, 관)를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물길을 잘 통하게 개수하였다.

요는 제위에 오른지 70년 만에 순을 얻었고, 순에게 천자의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스스로는 은거한 지 20년 만에 순을 하늘에 추천하였다. 요는 은거한 지 28년 만에 붕어하니, 백성들은 마치 자신들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요는 아들 단주가 불초해서 천하를 이어받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에 권력을 순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순에게 제위를 넘겨주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얻고 단주만 손해를 보지만, 단주에게 제위를 넘겨주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단주만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요는 "결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하고 한 사람만 이익을 얻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며 결국은 천하를 순에게 넘겨주었다.


5. 유우씨(有虞氏) 순(舜)

요가 붕어하고 삼년상을 마치자, 순은 단주에게 천하를 양보하고 자신은 남하의 남쪽으로 피했으나, 제후들이 조근할 때 단주에게로 가지 않고 순에게 왔으며, 소송을 거는 사람들도 단주가 아니라 순에게로 해결해달라고 왔으며, 소송을 거는 사람들도 단주가 아니라 순에게로 해결해달라고 왔으며, 송덕을 구가하는 자들은 단주가 아닌 순의 공덕을 구가하였다. 그러자 순은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하며 도성으로 가서 천자의자리에 올랐으니 이 이가 순임금이다.

우순(虞舜)의 이름은 중화(重華)이다. 중화의 부친은 고수이고, 고수의 부친은 교우이며, 교우의 부친은 구망, 구망의 부친은 경강, 경강의 부친은 궁선, 궁선의 부친은 전욱, 전욱의 부친은 창의이니, 순에 이르기까지 일곱 대가 흘렀다. 궁선부터 순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지위가 낮은 서민이었다.

순의 부친 고수는 맹인이었다. 순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 상(象)을 낳았는데, 상은 매우 오만하였다. 고수는 후처가 낳은 아들을 편애하여 항상 순을 죽이고자 하였으므로 순은 이를 피해서 도망 다녔고, 순이 어쩌다가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게 되면 곧 벌을 받았다. 그러나 순은 언제나 아버지와 계모에게 순종하며 잘 모셨고, 동생에게도 잘 대했으며, 날마다 독실하고 성실하며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순임금은 우를 천거 받았고, 우는 전국 아홉 개의 산을 개간했고, 아홉 개의 호수를 통하게 하였으며, 아홉 개의 강의 물길을 통하게 했고, 전국 구주를 확정하였다.

순은 스물 살 때 효자로 명성이 자자하였고, 서른 살에는 요임금에게 등용되었으며, 쉰 살에는 천자의 일을 대행하였다. 그의 나이 58살 때 요임금이 붕어하자, 61살에 요임금을 이어서 제위에 올랐다. 순임금은 제위를 이어 받은 지 39년만에 남쪽을 순수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죽었다. 그를 강남의 구의산(九疑山)에 장사 지냈으니, 이곳이 바로 영릉(零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