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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長生神道碑 - 해석문

화엄행 2009. 11. 12.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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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생신도비(金長生神道碑)  
 
 
     
  김장생신도비(金長生神道碑)

사계김선생신도비명(沙溪金先生神道碑銘)
유명조선국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행가의대부 형조참판 사계김선생 신도비명(有明朝鮮國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行嘉義大夫 刑曹參判 沙溪金先生 神道碑銘) 서문을 병기하다.
문인(門人) 분충찬모립기정사공신정헌대부(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正憲大夫) 신풍군(新豊君) 장유(張維) 가 찬술하였고, 수록대부(綏祿大夫)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으며, 가의대부(嘉義大夫) 행사간원대사간(行司諫院大司諫) 김광현(金光炫)이 전액을 썼다.

김씨는 광산(光山) 지방에 있는 누구나 우러러 보는 집안이었다. 그 계보는 멀리 신라로부터 유래하였다. 신라 말엽에 왕자 흥광(興光)이 장차 나라가 어지럽게 될 것을 알고 광산으로 나와 은둔하였는데, 이로부터 자손들이 이곳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 때에는 김씨 가문에서 무려 8대에 걸쳐 계속 평장사(平章事)가 배출되었으므로 그 동네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이 집안은 대대로 저명한 인사들을 배출하였다. 국광(國光)이라는 분은 관직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공신에 책훈되어 부원군(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 분이 극뉵(克忸)이라는 분을 낳았으니 관직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는데 바로 선생의 고조(高祖)이다. 증조 종윤(宗胤)이라는 분은 진산군수(珍山郡守)였으며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추증 받았다. 조부 호(鎬)라는 분은 지례현감(知禮縣監)이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부친인 계휘(繼輝)라는 분은 박학한데다 재질이 뛰어나서 사람들이 공경대부가 되리라고 기대했는데 관직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마쳤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부인 평산 신씨(平山 沈氏)는 우참찬(右參贊) 영(瑛)의 딸로서 가정(嘉靖) 무신년(명종 3, 1548년)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의젓하고 무거웠으며 말을 망령되게 하지 않았으며 버릇없이 장난치는 일도 없었다. 애초에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서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 여러 책을 배우면서 마음 속으로 즐거워하며 이를 늘 몸에 익히곤 하였다. 이를 보고 대헌공(大憲公)이 기뻐하며, “우리 아이가 이미 학문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으니 나는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장성해서는 율곡(栗谷) 이문성공(李文成公)을 스승으로 모시고 도의(道義)의 요체(要體)에 대해서 빠짐없이 듣게 되었다. 율곡도 공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대헌공은 관서(關西) 지방의 관찰사로 나간 적이 있었다. 관서 지방은 본래 번화(繁華)한 곳으로 일컬어지던 곳이었으므로, 놀러 온 손님들이 날마다 잔치를 벌이며 가무와 여색(女色)을 즐기는 것을 일삼곤 하였다. 선생이 부친에게 문안을 드리러 올 때마다 사람들이 그를 그러한 것에 주선하곤 하였는데, 겉으로는 유별나게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몸가짐을 정숙하고 확고하게 단속하여 한번도 문란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품행을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만력(萬曆) 무인년(선조 11, 1578년)에 조정에서 학행(學行)이 뛰어난 인사를 선발할 때, 성인의 경전에 침잠하고 옛 가르침을 독실히 믿는다는 이유로 선생을 천거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선생은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로부터 한참 뒤에 대헌공이 경사(京師)에 가게 되었을 때 선생이 그를 수행하려 하자, 이조에서 직책을 비워 둘 수 없다고 하여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으로 바꾸어 임명해 주었다. 왕복으로 수천만 리나 되는 그 도정(途程)에서 선생이 부친을 모시고 근실하게 복무한 행동이야말로 그지없이 효성스럽고 지극한 것이었다. 다시 재행(才行)이 탁월한 인사로 선발되면서 승서(陞敍)의 명을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헌공의 상(喪)을 당하게 되어 여묘(廬墓) 살이를 하였다. 상제(喪制)를 다 마친 뒤에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물러났다.
얼마 안 있다가 평시서 봉사(平市署 奉事)로 승진되었으니, 이는 전에 내린 승서의 명을 적용한 것이었는데, 곧이어 그 직책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로 여러 차례 활인서(活人署)와 사포서(司圃署)의 별제(別提) 및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를 제수 받았으나 모두 병 때문에 사직하였다. 이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가 전례에 따라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로 승진한 다음 정산현감(定山縣監)으로 외방에 나갔다.
이듬해 임진년에 왜구(倭寇)가 쳐들어와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는 상황에서 융사(戎事)가 한창이었으므로 고을 백성들이 그 명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이 접응하고 무마하는 일을 각각 온당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일도 제대로 거행되면서 백성의 생활도 안정이 되었다. 이때 방백(方伯)이 포상할 것을 보고하면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거짓 없이 정성을 쏟으면서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정사를 행하였다.”고 일컬었다. 임기가 만료되자 해면되어 돌아와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제수되었다. 중국 군대가 남정(南征)하였을 때, 호남에서 군량을 조달하였다. 일이 끝나자 조정에 돌아왔는데, 곧이어 일이 생겨 관직을 그만두고 해서(海西) 지방에 살았다.
당시 큰 난리를 막 겪은 때라서 학업을 할 겨를이 없었던 때였는데, 선생은 날마다 문생(門生) 자제들과 중단 없이 강송(講誦)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단양 군수(丹陽郡守),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호조정랑, 양근군수(楊根郡守),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 등에 제수되었지만 선생은 모두 숙배(肅拜)하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서 선생은 또 군자감 첨정을 제수받자, 그는 마지못해 나가 사은(謝恩)하였으며 그 뒤 안성군수(安城郡守)의 임명을 받았다. 조정에서 국(局)을 설치하고『주역구결(周易口訣)』을 교정할 때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고 들어와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났기 때문에 실제로 나아가지 못하고 직을 내놓았다.
그러다가 정인홍(鄭仁弘)이 정권을 잡는 데 미쳐서 시대 상황이 크게 변하자, 선생은 서울에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시고 드디어 고향인 연산(連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임명되자 이에 숙배하고 3년 동안 있다가 그만두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광해(光海) 초년에 익위(翊衛)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뒤이어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의논하는 이들이 회양은 북관(北關)의 요로(要路)인 만큼 무인(武人)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철원부(鐵原府)로 바꿔 임명하였다.
계축년에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선생의 서제(庶弟)인 아무개가 고발을 당해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이어 육시(戮屍)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 서제를 대역죄(大逆罪)로 논했으므로 선생의 가문 전체가 연좌(緣坐)될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친척들이 공포에 떨며 화(禍)를 완화시킬 방도를 모색하였으나 선생만은 평온한 모습으로 “화(禍)를 받는 것이나 복(福)을 받는 것은 모두 운명이다. 그러니 사람의 힘으로 요행히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마침 한 법관(法官)이 율(律)에 의거해 볼 때 연좌시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주장하였고 대신들의 의논도 이와 같았으므로 일이 마침내 그것으로 끝났다.
애초에 광해군이 직접 나서서 죄수들을 국문(鞫問)하며 상변(上變)한 사람에게 “김 아무개도 이 일에 관련되어 있는가?”라고 묻자, 그 사람이 “김 아무개는 현자(賢者)입니다. 그래서 아무개 등이 모의를 하면서도 오히려 그가 알까봐 두려워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뒤에 정협(鄭浹)이 무복(誣服)했을 때에도 광해가 전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정협의 대답도 이와 같았다. 이 때문에 선생이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이윽고 시골에 돌아와서는 은거하여 문을 닫아걸고 외부 사람들과 일체 접촉하지 않으면서 오직 경훈(經訓)에 침잠하여 완미(玩味)하면서 자적(自適)한 생활을 보내었다.
금상(今上)께서는 즉위하신 초기에 하교하기를, “김장생은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그 이름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다. 즉시 사헌부 장령을 제수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선생은 상소하여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하였다.
선생은 이 기회에 여러 원훈(元勳)들에게 편지를 써서, 임금의 덕을 잘 보필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형벌을 완화시키고 인재를 거두어들이고 공도(公道)를 넓히는 방책에 대해서 극력 말하고, 제공(諸公)들도 청렴과 근신으로 자기 몸을 단속하여 정국(靖國) 3장(三將)의 오류를 답습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여러 원훈들이 글을 받아 보고 탄복하였으며 마침내 상에게까지 이 일을 알렸다. 그리하여 선생의 사직소(辭職疏)가 들어오자, 상이 비지(批旨)를 내려 온유하게 유시(諭示)하면서 말과 수레를 타고 올라오도록 허락하였고, 곧 이어 또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하는 유지를 내렸다. 선생이 빨리 조정에 나와서 또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장차 사묘(私廟)에 친제(親祭)를 거행하려 하자 조정 신하들이 모두가 축하하며 환영하는 논조로 의논을 올렸다. 예조판서인 이정귀(李廷龜)와 부제학인 정경세(鄭經世)를 위시하여 여러 대신들의 여러 의논을 종합하여, “상이 친손(親孫)으로 조상의 계통을 잇고 있는 것은 방계(旁系) 지손(支孫)이 계통을 잇는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일단 선묘(宣廟)에 대해서 고(考)라고 하지 않으니 사친(私親)에 대해서도 고(考)가 두 분 있게 되는 혐의가 없어지게 되므로 사친을 ‘고(考)’라고 일컫고 상은 자(子)라고 자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제왕(帝王)의 예법 가운데 계통을 잇는 것보다 더 엄중한 것은 없으니, 비록 형이 아우의 뒤를 잇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잇게 되었다 할지라도 모두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춘추전(春秋傳)에서 노(魯) 나라 민공(閔公)과 희공(僖公)은 부자지간과 같다고 하였고, 한 선제(漢宣帝)가 소제(昭帝)의 뒤를 이었는데도 사황손(史皇孫)을 높여 황고(皇考)라고 일컫자 선유(先儒)가 이를 비난했던 것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선조의 뒤를 이으신 만큼 사친에 대해서 다시 고(考)라고 칭해서는 안 되니, 의당 정자(程子)의 설에 따라 숙질(叔姪)의 관계로 재정립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당시 조정의 의논이 이미 확정된 상태라서 선생의 주장은 채택되지 않았다. 뒷날 선생이 입시(入侍)했을 때 상이 그지없이 위로하며 유시하자 선생이 배사(拜謝)를 하고서, 그로 인하여 품속에서 주차(奏箚)를 꺼내어 제왕의 학문의 도에 관해서 논하니 상이 가상히 여기며 받아들였다. 뒤 이어 선생은 체직되어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이 되었다. 그 뒤 연신(筵臣)의 건의에 따라 특별히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의 관직을 설치하여 선생을 머무르게 하면서 많은 선비들을 잘 가르쳐 인도하는 동시에 원자(元子)를 보양(輔養)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이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강석(講席)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원자에게 글 뜻 이외에도 일에 따라 바로잡고 권장하곤 하였으므로 원자가 선생을 매우 공경하며 중히 여겼다.
선생이 상을 알현할 때마다 번번이 질병을 이유로 물러갈 것을 청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상이 억지로 머물러 있게 하였다. 뒤에 계속 청하여 마지않자 상이 이르기를, “돌아가도 좋다만 오래 머물러 있지는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선생이 하직하던 날 술을 하사하며 위로해 보냈는데, 이때 원자(元子)도 직접 나와서 간절하게 말을 하며 시골에 오래 있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선생이 고향에 돌아간 뒤 상소하여 사은(謝恩)하고 아울러 백성이 당하는 고달픈 일들을 진달을 드리니 상이 또 위로하며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상이 공주(公州))에 행행(幸行)하시자 선생이 길에서 대가(大駕)를 영접하였다. 이윽고 적이 평정되어 도성으로 돌아갈 때에 상이 이르기를, “이 길로 입경(入京)해서 원자를 교도(敎導)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자, 선생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뒤 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쳐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는데 3번이나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말미를 청해 향리로 돌아간 다음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면서 13개 조목의 일을 진달하였다.
선생은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때 사헌부에서 내노(內奴)를 구속하고 그 죄를 다스렸는데 일이 자전(慈殿)과 관련되자 상이 엄한 분부를 내려 사헌부를 꾸짖었다. 이에 승정원이 상의 분부를 도로 봉하여 돌려보내자 상이 이번에는 승정원을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이 사직소를 올리는 기회에 그 일을 진달하여 아뢰기를, “이번에 범한 전하의 잘못이 비록 작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종국에는 필시 사(私) 때문에 공(公)을 멸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그리고 뒤이어 소명(召命)을 내리자 선생이 이에 응하여 나아가서 사은하였는데, 경연에서의 신하가 아뢰기를, “김장생이 일단 올라온 만큼 경악(經幄)에 출입하게 하는 동시에 원자를 시강(侍講)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보탬이 되는 점이 분명히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따르면서 이내 강학관(講學官)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왕세자를 책립(冊立)함에 이르러 선생의 품계를 가선대부로 올리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선생은 뒤이어 또 말미를 청해 시골로 돌아가서 누차 소를 올리며 해직을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계운별궁(啓運別宮)의 상(喪)에 선생이 상경하여 조위(弔慰)하며 열흘쯤 머물러 있다가 청고(請告)한 다음 앞질러 향리로 돌아갔다. 이때 승정원이 선생을 머물러 있게 할 것을 계청하여 그렇게 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선생은 이미 떠난 뒤였다.
이에 앞서 영월 군수(寧越郡守) 박지계(朴知誡)가 상소하여 대례(大禮)를 논하였는데, 그 주장이 선생의 뜻과는 상반되었을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 추존(追尊)해야 한다는 의논을 개진하였으므로, 선생이 마음속으로 그르다고 생각한 나머지 조정에 몸담고 있는 친구에게 글을 지어 보내 통렬하게 반박하였다. 그런데 원훈(元勳) 중에 박씨의 설을 옹호하는 자가 있어서 차자(箚子)를 올리면서, 선생 역시 옛날의 견해를 고쳤다고 잘못 일컫자, 선생이 또 소장을 올려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였다.
오랑캐가 침입하여 경기 지역에까지 육박해 오자,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行幸)하면서 세자에게 분조(分朝)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그리고 분부를 내려 선생을 호소사(號召使)로 삼았는데, 선생이 이에 재빨리 명을 받들어 군병을 불러 모으고 군량을 마련한 뒤 직접 분조에 나아가 알현하였다.
어느 날 밤 적이 이미 임진(臨津)을 건넜다고 소문이 잘못 전파되자 분조의 여러 신하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동궁(東宮)을 모시고 영남 지방으로 옮겨 가려고 하였다. 이때 선생은 이는 옳은 계책이 못 된다고 극력 말하면서 대비책을 세울 것을 청하며 이해 관계를 설명하자 세자가 수긍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잘못된 소문 역시 진상이 알려져 자연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고 나서 선생이 곧바로 분조를 떠나 강도(江都)로 급히 달려가게 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화의(和議)가 성립되어 적이 물러가려고 하던 때였다. 상이 선생을 인견(引見)하고 그동안의 수고를 위로하자, 선생이 그 기회를 타서, “적의 형세가 조금 완화되었는데, 신은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사직하고 물러갔으면 합니다.”라고 아뢰고, 또 “강화(講和)하는 일은 물론 임기응변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척화론(斥和論) 역시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말하는 자들 중에 혹시라도 척화론을 주장했다고 해서 견책을 받게 된다면, 앞으로 국가에 일이 생겼을 때 기꺼이 해야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강도에서 돌아와서는 해직된 상태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2번이나 사직하며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상이 선생을 사모하며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김장생과 장현광(張顯光) 모두 숙덕(宿德)인데, 서울에 오려고 하지 않을 뿐더러 와서도 금방 돌아가 버리곤 하니, 이는 나의 정성이 천박하고 예우를 소홀히 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하고, 즉시 하교하여 마여(馬轝)를 타고 올라오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자, 상이 손수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경은 나라의 대로(大老)로서 그 덕행은 누구도 따를 수가 없다. 그러니 지금 서울에 와서 머물러 있어 주기만 하더라도 사대부의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깨우쳐 주는 유익함이 반드시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경은 다시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선생의 나이가 이미 83세에 이르렀으므로,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세상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아 정력이 모두 쇠진된 상태였으므로 잇따라 소장을 올리면서 더욱 사직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때 마침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이 베풀어졌으므로 규례에 따라 선생은 품계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올랐다.
이듬해 신미년 8월 3일에 선생이 병으로 작고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애도의 뜻을 표하며 관원을 보내 제사를 드리게 하고 부의(賻儀)를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세자 역시 강(講)을 중단하고 소선(素膳)을 들면서 강관(講官)에게, “예전에 내가 학문에 어두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김공이 가르쳐 깨닫게 해 준 은혜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궁관(宮官)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상이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역부(役夫)를 내주어 묘역(墓域)을 경영케 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의 문도(門徒)로서 복(服)을 입은 자가 수백 명이요, 장례를 거행할 무렵 원근(遠近)의 지역에서 찾아와 모인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해 10월 19일에 진잠현(鎭岑縣) 서쪽 새로 마련한 묘역에 안장(安葬)하였다. 선생은 휘(諱)가 장생(長生)이요, 자(字)는 희원(希元)인데, 학자들은 사계 선생(沙溪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선생은 천품이 두텁고 조화롭고 순수하여 원래부터 도(道)에 가까웠다. 매우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둔데다가 또 대현(大賢)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가짐이 전일하고 확고했으며 공력을 들이는 것이 치밀하고 독실하였다. 그리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 서로 조화롭게 되는 가운데 공부가 발전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 때부터 70, 80세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덕의 근기가 혼연히 이루어져서, 밝고 화평한 기운이 그대로 밖에 드러났다. 그래서 선생을 알거나 모르거나를 가릴 것 없이 덕을 이룬 군자를 논할 때면 사람들은 으레 선생을 첫 손가락에 꼽곤 하였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었으므로 조부인 찬성공(贊成公)이 데려다 길렀다. 그 뒤 찬성 부인이 세상을 떠날 때, 선생이 해서(海西)에 있다가 홀연히 슬픈 심정이 안에서 솟구쳐 올라오면서 마구 눈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며칠 있다가 부음(訃音)을 받았다. 그리고 임진년 난리 때 맏아들 은(檃)이 다른 곳에 가 있다가 적을 만나서 해를 당하고 말았는데, 그때에도 선생이 문득 알아차리고 종일토록 비통해하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지극히 정성스러우면 먼저 알게 되는 하나의 징험으로 여겼다.
선생은 스승의 은혜와 친구간의 의리에 대해서도 매유 독실한 면모를 보였다. 송귀봉(宋龜峯)이 참혹한 화를 당하여 원수를 피해서 탈출했으나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선생이 집에 모시고 근실하게 봉양하였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일단 죄명(罪名)을 얻은 뒤에는 당화(黨禍)가 더욱 심각해지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더러 부화뇌동하여 비난하면서 시의(時議)에 빌붙곤 하였으나, 선생만은 그의 심적(心迹)을 분명하게 해명해 주면서 사방에서 헐뜯는 말이 있었어도 전혀 거들떠 보지 않았다.
선생의 학문 세계는 본디 율곡(栗谷)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소급해 올라가면 주희(朱熹)에 그 근본적인 토대를 두고 있었다. 근대(近代)의 유자들이 논하는 바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이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등에 대해서는 그 같고 다름과 이론의 득실(得失)을 모두 율곡의 설에 입각하여 절충(折衷)하였는데, 정밀하게 분석해 나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터득한 바도 많았다.
선생은 예학(禮學)에 가장 많은 공력을 쏟았는데, 그 고증(攷證)이 정밀하고 해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변례(變禮)에 직면하거나 의심스러운 예문(禮文)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선생을 찾아와 질정(質正)을 받곤 하였다. 그런데 급기야 국가의 전례(典禮)를 논할 때에 미쳐서는 선생만이 홀로 여러 설을 배격하면서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고 아래로는 제공(諸公) 들과 마찰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어리석은 내가 볼 때에도 부당한 요소가 없지 않아 누차 의문점을 진달하였으나, 선생은 처음의 견해를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끝내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선생은 평생 저술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독서하면서 얻는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차록(箚錄)해 두었을 따름이다. 현재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과 서(書), 소(疏), 잡록(雜錄) 약간 편(篇)과 『첨주가례집람(添註家禮集覽)』 3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고,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이 세상에서 읽혀지고 있다.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첨추(僉樞) 대건(大乾)의 딸로서 현숙하고 부도(婦道)가 있었는데 선생보다 45년 앞서 36세의 나이로 죽었다. 처음에 연산현(連山縣) 선영의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선생의 장례를 행할 때 옮겨 부장하였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은(檃)은 바로 임진년에 해를 당하였고, 둘째아들인 집(集)은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셋째 아들인 반(槃)은 홍문관 전한이 되었다. 장녀는 감찰 서경율(徐景霱)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일찍 죽었고, 셋째 딸은 군수 한덕급(韓德及)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 소생의 아들로 여섯 사람이 있는데, 첫째 영(榮)은 생원이고, 들째 경(檠)은 일찍 죽었고, 그 다음은 이름이 고(杲), 구(榘), 규(槼), 비(棐)이며, 그 밖에 딸 두명이 있다.
지평은 측실의 아들인 익형(益炯), 익련(益煉)과 딸 2명을 두었다. 전한은 6남을 두었는데, 익렬(益烈)은 별제(別提)이고, 익희(益煕)는 예문관 검열이고, 익겸(益兼)은 학생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딸이 네명 있다. 서경율은 딸 2명을 두었고, 한덕급은 3남 4녀를 두었다. 그 밖에 내외 손과 증손들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인품이 크고 굳세어야 멀리 이를 수 있고
질박하고 어눌(語訥)하여야 인에 가깝다
성인의 가르침이 밝히 분명하나니
공문(孔門) 사과(四科)의 반열 속에
증삼(曾參)은 노둔하여 끼이지 못했어도
끝내 공부자(孔夫子)의 전함을 터득하였네
아 선생께서는
기질이 묵직하고 기질이 순후하여
확고히 고요하고 전일했는데
일찍부터 대유(大儒)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가르침 마음 속 깊이 새겨 간직하며
그 행동거지가 법도에 맞았도다.
세상 학자들은
껍데기에 의존하여 멀리 치달리면서
겉모양만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나
선생은 이와 달라
조금씩 조금씩 쌓아 나가니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아시는도다.
중용으로 사물의 이치 통달하여
사지에 아름답게 넘쳐흐르며
혼연히 덕을 온전히 하셨구나
만년에 성상이 밝히 아시고
융숭한 예우에 관품도 높이셨도다
성상과 기탄없이 정사를 의논하였네
나라의 원로로서
장수하고 또 강건하시니
혈색좋은 얼굴빛과 빛나는 이마
사림이 모두 우러러 보네
마치 태산(太山)과 같고
북두(北斗)처럼 여겼다오
서산에 해가 기울어 걸릴 무렵
대들보 홀연히 부러졌도다.
슬픔과 영예 모두 다 하였네
봉긋이 솟은 저 언덕
빗돌에 명 새겨서
이로써 만년토록 전해지게 하려 하노라.

숭정(崇禎) 7년(인조 12, 1634년) 8월 일에 의논하는 자들이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를 특별히 증직하였다. 경진년(인조 18, 1640년) 12월에 진잠(鎭岑)의 터가 이롭지 않다고 하여 연산(連山)으로 이봉하였고, 신사년(인조 19, 1641년) 정월 초 9일 우도리(牛首里) 고정산(高井山) 곤좌(坤坐)의 뜰에 안치하였다. 부인은 왼쪽에 합부되었으니 곧 선조비(先祖妣) 정경부인(貞敬夫人) 허씨(許氏)의 묘역 뒤이다. 서북 쪽으로 대헌공(大憲公)의 묘와 떨어진 거리가 1리에 불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