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saam.net/saamacu/revolution/rev4-1.htm
4. 오운 육기
1.
인간이 지닌 욕망에 1, 2, 3차로 세 가지가 있고, 천지에는 五運과 六氣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風・寒・署・濕・燥・火의 육기와 우리 마음이 일으키고 있는 어떤 감정(1, 2, 3차 욕망의 만족과 불만족)과 六經(厥陰~太陽)의 흐름이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공식이 있다면 우리가 병을 보는데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
이 八卦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하늘과 땅 사이에 못과 불과 우뢰와 바람과 물과 산이 있지요. 그러므로 천지 사이에 육기가 돌아가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天밑에 감독할 督자를 쓰고, 地밑에 任脤의 任자를 쓰십시오. 澤밑에는 太陰을 쓰고, 澤과 반대되는 山밑에는 陽明을 쓰십시오. 火밑에는 少陰이라고 쓰고 그 반대인 水밑에는 太陽을 쓰고, 雷밑에는 少陽을 쓰고 그 반대인 風밑에는 厥陰을 쓰세요. 乾卦는 세 개가 모두 陽입니다만 兌卦를 보면 陽爻2, 陰爻1이지요. 그런데 이 兌卦 전체를 일컬어 陰이라 해야 할지 陽이라 해야 할지가 문제입니다.
남자를 상징하는 卦는 艮, 坎, 震(三男, 즉 艮은 少男이고, 坎은 中男, 震은 長男입니다). 여자를 상징하는 卦는 兌, 離, 巽(三女, 즉 兌는 少女이고, 離는 二女 즉, 中女이며, 巽은 長女)입니다. 上・中・下의 둘이 陽爻이면, 당연히 하나는 陰爻가 되고, 둘이 陰爻이면 하나는 陽爻가 됩니다(乾과 坤은 예외임).
이 때 둘인 卦는 무시하고 하나인 卦를 보고 그 괘의 명칭을 정합니다(이 하나인 爻를 움직이는 卦라고 함). 兌卦를 예로 들어보면, 陽卦 둘을 무시하면 上에서 動하는 陰爻가 바로 이 卦의 명칭을 결정지어 줍니다. 즉 少女인 兌卦지요. 음이둘 양이하나를 예를 들면, 위의 陰爻, 둘을 무시하면 맨 아래의 陽爻가 이 卦의 명칭을 결정지어줍니다. 맨 아래 하나만 하면 陽爻인 것은 長男인 震卦이지요. 그러니까 動하는 것이 陰이면 음괘이고 陽이면 양괘입니다. 그리고 乾卦는 양이 셋이므로 양괘이고, 坤卦는 陰이 셋이므로 음괘가 됩니다. 八卦 중 乾과 坤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卦가 바로 六氣와 六經의 근거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주워 듣는 데에는 대학교 졸업후 거의 6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공을 들여야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六經을 八卦에 결부시킨 것이 학계에 논란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다른 교과서에는 이런 식의 연결(결부)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乾卦 밑에 督脤을, 坤卦밑에 任脤을 쓰게 한 까닭은 차차 설명드리겠습니다.
경락상 太陰은 手足으로 구성되는 手太陰肺, 足太陰脾로 되지요. 하나는 土, 하나는 金인데 같은 太陰에 속하지요. 어떻게 土와 金이 같은 太陰經에 속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머리 속에서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는 五行上의 관점은 잊으세요. 나중에 다시 접합을 해드립니다.
厥陰, 少陰, 太陰, 太陽, 陽明, 少陽을 심리적으로 표현해서 六淫이라고 하는데, 가령 바람에 상해서 입이 비뚤어졌다고 한다면 六氣에 상했다고 하고, 속에서 오르는 욕망 때문에 화가 동해서 상했다고 하면 六淫에 상했다고 합니다. 즉 내상적으로 볼 때 六淫이라는 표현을 하지요. 그런데 6이라는 숫자를 상대적인 개념으로 구성 되었다고 본다면 긍정적인 3과 부정적인 3이 되겠지요. 그런데 이 3이란 무엇이냐? 인간이 지닌 각각 리듬이 다른 세 가지 욕망으로 봅니다. 바이오리듬에서도 신체리듬, 감성리듬, 지성리듬의 주기가 23일, 28일, 33일로 다릅니다. 허기와 배신감과 불안감이 모두 욕망의 부정적인 상태이나 각기 괴로움의 모양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아무튼 이렇게 셋씩으로 나눠놓고 또 수족으로 구분시켜 놓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여러분은 순간순간 변하는 욕망을 잘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肺를 예로 들어 봅시다. 肺란 肉변에 市자를 붙인 것이지요. 시장이란 무엇이 왔다갔다하고 물건이 교환되는 곳이지요. 따라서 폐가 하는 일의 질적인 차원을 六經的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시장 市자가 들어간 이면에는 무엇인가의 상징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책의 포인트입니다. 뜻밖의 이야기나 황당무계한 학설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의 주장을 하는 이유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여러분들이 어떤 이론가가 되기 보다 그때 그때의 상황을 판별하여 느낌을 분류할 줄 아는 지혜를 드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화가 났을 때 열이 나고 눈에 핏발이 서는데 이런 현상은 성충동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둘 다 열이지만 그 속성은 전혀 다릅니다. 또 지구내부에서 발생되는 열과 태양으로부터 비춰지는 열도 전혀 별개의 것이지요. 전자가 '火焰'쪽이라면 후자는 '光明'쪽에 가깝다할 수 있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가 느끼는 심리적인 반응도 다양하지만 크게 세 가지로 大別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곧 1차적인 욕망, 2차적인 욕망, 3차적인 욕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물질적으로, 육기적으로 유추를 시켜 그것을 세 가지 욕망과 연관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이 연관을 짓기에 앞서 六氣와 六經과의 종합관계를 먼저 살펴봅시다.
水는 寒에 가깝고, 風은 그대로 風, 澤은 濕, 火는 君火가 되고, 雷는 相火, 山은 燥가 되지요. 그리고 이 風, 火, 澤, 雷, 山, 水는 厥陰, 少陰, 太陰, 少陽, 陽明, 太陽인 六經과 결합 되어서 厥陰風木, 少陰君火, 太陰濕土, 少陽相火, 陽明燥金, 太陽寒水가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반드시 외우셔야 합니다. 이리하여 六氣와 六經과의 관계가 대체적으로 구분 되었습니다. 제가 陰을 욕망이라고 했으므로 陰을 +(플러스)로 보고 陽을 -(마이너스)로 본다면 +는 마음의 긍정적인 상태, -는 마음의 부정적인 상태가 됩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陰이 들어 있는 경락은 마음의 긍정적인 상태, 즉 뭔가 좋아서 취하려고 하는 상태입니다. 1차욕망(신체리듬)은 二 兌濕(太陰經)에 속하고, 2차욕망(감성리듬)은 三 離火(少陰經)에 해당하고, 3차욕망(지성리듬)은 五 巽風(厥陰經)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七 艮山(陽明經)은 1차욕망(신체리듬)의 부정적인 상태가 되고, 六 坎水(太陽經)는 2차욕망(감성리듬)의 부정적인 상태, 四 震雷(少陽經)는 3차욕망(지성리듬)의 부정적인 상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太陰經 즉 手太陰肺經과 足太陰脾經은 우리 인체 내 신체리듬의 긍정적인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手・足으로 나누었느냐 하는 것은 전체적인 이해를 한 후에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신체리듬의 긍정적인 상태가 배부름, 부유함이라면, 신체리듬의 부정적인 상태는 허기, 빈곤감 등이 되겠지요.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개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들은 七情의 浮沈을 보아야 하는 사람들이므로 예민하게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의 눈빛과 행동, 권력자의 모습, 예술가나 문필가의 분위기가 각각 다 다른데 이것을 날카롭게 읽어 내는 눈이 있어야 됩니다. "나이 40이면 제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공자의 말은 참으로 시사적이지요.
길거리를 가다가 깡패를 만났다고 합시다. 옆구리에 손을 척 걸치고 시비를 걸어올 때 아직 맞지는 않았지만 그 때 감지되는 느낌이 있지요. 공격적인 자세는 주로 옆구리에 손을 얹게 되는데 옆구리에 손을 얹게 되면 足少陽膽經의 에너지가 흐르게 되지요. 이런 이야기 처음 듣지요? 정말 기가 막힌 겁니다. 무심코 하는 행동에 따라 어떤 경락의 에너지가 흐르게도 되고 그치게도 된다는 사실은 권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手厥陰心包가 심장을 싸고 있는 막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그런 사람이 心包經에 어떤 에너지가 흐르는지 알 리가 있겠습니까? 요즘 한의학자들은 이런 공부는 안합니다. 물론 自己觀察을 한 사람도 없지요. 불쌍합니다. 정말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배가 고플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표정을 짓게 되고, 뭔가 잘못 되었을 때는 손으로 이마를 짚게 되지요. 여러분들은 이런 태도를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모르면 경락에 흐르는 기운을 알 수가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1차 리듬의 긍정적인 차원이 太陰이라면 부정적인 측면은 陽明, 2차 리듬의 긍정적인 차원이 少陰이라면 부정적인 측면은 太陽, 3차 리듬의 긍정적인 차원이 厥陰이라면 부정적인 측면은 少陽으로 나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陽明經絡은 太陰經絡의 부정적인 측면이므로 좀 못 먹고, 못 입고, 집이 없다든가 하는 의식주문제가 좋지 못할 때 일어나는 불만감의 표시가 아니겠느냐? 하는 거지요. 어떤 지식욕이라든가 권력욕 또는 명예욕이 만족되었을 때는 手厥陰心包經이나 足厥陰肝經에 에너지가 강하게 흐를 지 모를 일입니다. 이것은 이해를 해야 됨은 물론 각 경락의 성격이나 종류 등을 모두 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간이 크다고 얘기할 때의 간이 크다는 뜻 이면에는 어떤 경락학적인 암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쪽에서 제가 구체적으로 경락의 리듬을 설명드리지요. 어째서 경락이 유심적인 차원과 연결이 되는지 그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黃帝內經"에서 특히 강조 되어지고 있는 五運・六氣法은 동양 최대 최고의 이론입니다. 五運(木・火・土・金・水의 相生相克作用)과 六氣的인 차원에서 우주의 모든 실상을 파악해 보려는 일련의 시도가 지극히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일부 운명론자들이나 운명감정사들의 미신적인 도구로 전락되어 버린 듯한 五運・六氣에 대한 재조명과 철저한 탐구는, 동양의학의 독특성과 전체적인 관찰을 증명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五運・六氣的 차원에서 '인체는 小宇宙'라는 生理・病理를 관찰해 온 고인들의 탁월한 안목과 관점은 놀라울 정도로 세밀합니다. 인체 내에 흐르고 있는 모종의 리듬과 天地間을 흐르고 있는 리듬을 구분짓지 않고 두 리듬의 통일성을 추구했음은 참으로 큰 의미이지요. 더구나 甲子, 乙丑, 丙寅, 丁卯... 이런 식으로 상호 교차적이고 복합적인 만남 속에서 우주의 리듬을 파악한 것은 경이적인 관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청강생 여러분들에게, 보라색은 五行上 어떻게 표현이 되나요? 하고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그런 건 없어요"하거나 "모르겠어요"하고 대답을 합니다.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없다고 합니까? 이렇듯, 우주가 생긴 후 五運・六氣가 대두되었지 五運・六氣 이론이 전제되고 우주가 형성된 것은 아니지요. 그러므로 현상관찰을 먼저 해야 됩니다. 이론은 남에게 설명을 해 주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맥주를 먹었는데 왜 웨하스를 먹으라고 하십니까"하고 질문을 하는데, 맥주 먹고 난 뒤 웨하스를 먹기까지는 어떤 이론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먼저 맥주와 웨하스가 생기고 나서 그것에 대한 종합적인 눈이 생긴 것이지 이론이 먼저 나온 것은 아니지요. 알코올은 물과 少陰君火의 복합체입니다. 술이 몸을 차게 하느냐 덥게 하느냐 하는 것은 역대 모든 의사들의 논쟁거리였습니다. 먹었을 때에는 분명히 몸을 데우는데 나중에는 冷하게 하거든요. 그것은 술이 체내에서 濕의 작용을 일으켜 몸을 축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濕의 작용 때문에 맥주를 많이 마시고 나면 몸이 찌뿌둥합니다. 따라서 陽明燥金에 해당하는 스폰지와 같은 퍽퍽한 것을 먹으면 좋지 않겠느냐 하는데서 그 이론이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五運・六氣學을 오래 공부하다 보면 모든 상황을 상대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질병치료방법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뚱뚱한 환자가 왔다면 일단 病症을 불문하고 半夏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른 환자에게는 熟地黃을 써야 합니다.
半夏는 건조한 땅에서 재배해야 합니다. 습기 있는 진흙땅에 재배하거나 물을 많이 주게 되면 半夏 재배는 망치고 맙니다. 半夏나 貝母같은 것은 모래땅처럼 수분이 잘 흡수 되는 곳에 심어야 합니다. 약초나 식물의 특성을 보면 그것이 나온 땅을 알 수 있게 마련입니다.
麥門冬이나 天門冬, 熟地黃과 같이 습기가 많은 약초들이 모래땅처럼 건조한 땅에서 나왔을 리가 있겠어요? 그러므로 맛을 보거나 모양만을 보고도 그것의 특성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모밀국수를 먹을 때, 매운 맛을 내는 데 겨자 대신 고춧가루를 넣는다면 그 모밀국수 맛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겨자와 고춧가루는 같은 陽明燥金에 속하는 매운 맛이지만 五運・六氣로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장의 맛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白芍藥, 桂枝, 甘草에 엿을 넣는 小建中湯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애들 배 아플 때 이것처럼 좋은 약이 없지요. 여기에 엿 대신에 설탕을 넣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단 맛이 太陰經이지만 꿀과 설탕, 조청 등이 다 다르듯이 분류를 한다면 그 수가 엄청나게 많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체험만이 그 해답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론이 없어지는 장면입니다.
가정학과나 요리학과를 졸업한 사람에게 배추를 소금에 절여보라고 하면 "배추 1킬로그램에는 소금 몇 그램"하면서 앞 뒤 볼 것없이 섞어 버립니다. 산에서 자란 배추와 들에서 자란 배추가 다르고 그 중에서도 억센 것과 부드러운 것이 또한 다른데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이런 미묘한 점들은 여러분들이 체험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론으로는 안됩니다. 어느 선을 넘어서면 이론은 사라지고 맙니다. 五運・六氣를 흔히 사주를 보고나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데 사용하는 예지의 학문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물론 五運・六氣에 예지능력에의 갈망은 대단한 것이므로 그런 인간의 갈망에 따르는 부작용 역시 심각합니다. 어떤 욕망에 대한 욕구충족의 한 방편으로 五運・六氣學을 공부한다면 이것은 직관적인 깨달음을 기본으로 하는 학문연구 태도가 아니고, 현학적 내지는 지적인 쾌락을 목표로 공부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여러분들이 五運・六氣學과 舍岩針法의 내용만을 외워서 많은 성취감을 얻어 가려 한다면 하나의 지적인 쾌락, 즉 厥陰經絡의 病邪만을 한아름 안고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전에는 못 듣던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므로 무척 얻은 것이 많은 듯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지적인 쾌락만을 가지고 간다면 여러분들도 결국은 교만한 학자밖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거듭 강조드리지만 이 자리는 상대적인 세계의 모든 조화, 한 생각 이전의 마음의 깨끗함을 배우고 가는 자리여야 합니다. 환자가 왔는데 사주를 말하면 그 사주를 컴퓨터에 넣고 작동시키면 ××湯, 諸味十八湯...하고 툭 튀어 나옵니다. 이렇게 하는 한의사도 있습니다. 인간이란 이렇게 사주팔자로만 분석되고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五運・六氣學도 그저 대입식의 암기나 산술적 계산만으로 풀어내는 학문이 아닙니다.
각각의 환경을 무시한 채 그저 "사주팔자만 똑 같으면 같은 병이 온다"고 해서야 어떻게 한의학을 공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환자가 고열인데도 사주 컴퓨터가 "사주팔자에 冷하게 되어 있으니 附子를 한 兩 쓰라" 한다 해서 附子를 한 兩쓰면 환자의 병이 낫겠습니까? 사주팔자에 아무리 水氣가 많고 冷하다 하더라도 머리에 열이 끓는 현장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기본게임(Before Game)'에 산술적인 계산이나 대입식의 암기능력이 필요합니까? 그저 현장에 답이 있을 따름이지요. 뚱뚱한 사람의 몸을 가볍게 해주는 약으로 升麻가 있지요. 그런데 굉장히 몸이 마른 환자에게 컴퓨터가 조제해 준대로 升麻를 많이 넣어 준다면 氣가 가벼운 이 환자가 다음날 한의원에 들어올 때는 발이 땅에 닿지 않아서, 둥둥떠서, 날아들어 올 것입니다.
현재의 리듬은 과거의 리듬을 들여다 봄으로써 알 수가 있고, 미래의 리듬은 현재의 리듬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 三世를 공히 정리할 수 있는 五運・六氣리듬 학설을 엄밀하게 따져보면, 우리 일생이 결코 고착적인 리듬의 반복이 아니라는 암시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진실로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60년을 주기로 한 그 리듬이 항상 꼭같은 반복을 한다면 아마도 인생은 예측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커다란 흐름을 우리가 예측할 수 있다하여도 커다란 흐름 속의 까다로운 변화는 역시 직관적인 안목을 가지고 수시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黃帝內經"에서 강조되고 있는 五運・六氣學의 기본정신은 통치자로서 백성을 염려하는 충정에서 비롯된 이론뿐만 아니라, 전체 우주와 조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수행자적, 구도자적인 가르침인 성인의 뜻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서양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바이오 리듬의 연구가 오직 인간자체 내에 있는 리듬의 연구에 그치고 있음은 유감이지만, 그런대로 서양 생리학적 연구의 진보를 뜻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신체에 있는 모종의 리듬과 우주 리듬을 상호복합적으로 관찰해 온 동양의 오운・육기학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五運・六氣學에 접근함에 있어서 먼저 필요한 방법론은 역시 외부적인 運氣의 대표적 모습인 봄・여름・가을・겨울의 기온과 風・寒・署・濕・燥・火의 기후 변동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신체적, 감성적, 지성적 리듬 조건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는 법이 꼭 뒤따라야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소위 十二經絡 體系로 불리는 경락의 신비를 탐사하기 위해서는 우선 十二經絡의 근원인 六經 즉, 厥陰, 少陰, 太陰, 少陽, 陽明, 太陽으로 불리는 그 언어의 배경을 살펴봄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 六經은 風・寒・署・濕・燥・火의 六氣와 아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데, 동양의 고전인 "內經"에 다분히 상징적이고 난해한 용어로써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厥陰이 在泉하여 酸味를 이룬다고 했는데, 흔히 우리가 시다고 느끼는 맛은 厥陰의 기운이 在泉하여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在泉의 의미는 많은 고찰을 필요로 하는 난해한 용어 중의 하나지요. 이렇듯 모든 맛[味]과 색깔[色]과 吉凶, 모든 질병에 이르기까지 모두 六氣的, 六經的 체계로 설명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또한 五行的인 차원과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체 내에 흐르는 어떠한 기운, 즉 어떠한 무형의 흐름, 어떤 기능적인 상황, 나아가서 어떤 감정적인 배경, 더욱 더 나아가서는 바이오 리듬과의 연관성 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도표를 여러분들께 제시한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를 가지고 정기적으로 순환하는 신체, 감성, 지성이라는 세 리듬이 반드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서양에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빌어서 설명한다는 사실이 썩 내키지는 않으나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할 수 없이 도입한 것일 따름입니다. 동양의 옛 성인들은 厥陰과 少陽, 太陰과 陽明, 少陰과 太陽을 짝지어서 어떤 리듬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용어의 정의를 내리기 전에 먼저 광범위한 마음의 탐사작업을 해야합니다.
Copyright(C) 2001 Sa-Am non-profit Acupuncture Service All rights reserved.
http://www.saam.net/saamacu/revolution/rev4-2.htm
4. 오운 육기
2.
그러면 경락 체계라고 불리는 이러한 리듬체계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金容沃 교수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인용하여 문제점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김용옥씨는 心包에 대한 의문을 예로 들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흔히 心包를 해부학적인 측면으로 연구 파악하려는 경향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하였습니다.
"산림경제" 제1권 P.50에 包絡으로 된 번역문에 주를 달기를 (포락(包絡):심장을 싸고 있는 얇은 막, 즉 心臟膜이다)라고 하여, 包絡을 心臟膜 곧 心包와 동일시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文意를 크게 벗어나고 있지는 않다고 할 것이나 包絡을 곧 심장막과 동일시하는 것은 많은 곡해를 유발시킬 우려가 있다. 高世植의 說을 따르자면 包絡의 包만으로 心包의 뜻이 되며, 包絡이란 정확하게는 心包의 絡脈을 설명하면서 그 중 一經으로 '心主手厥陰心包絡之脈'을 들고 있는데, "靈樞"가 漢代의 古經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꽤 오래 전부터 心包와 心包絡은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임을 알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주석에 의존치 않고 "內經"의 原義에만 卽하여 해석할 때 '包絡絶'의 '包'가 과연 心包를 정확히 의미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黃帝內經素問" 卷第三 鈴蘭秘典論篇 第八에 十二藏之相使(十二藏腑의 서로 부림)를 논하는 곳에서 十二經脈의 하나로서 心包에 해당되는 장기를 心包라 하지 않고 단중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심포와 단중이 동일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데에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시 말해서 "內經素問"이 씌어진 그 당시 心包라는 장기의 개념이 정확히 성립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心包를 심장막이라고 해설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심장막이라고 하면 현대어로서는 꼭 심장의 판막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에 '심장을 싸고 있는 얇은 막'이라는 단서가 붙었기 때문에 그러한 오해가 발생치 않는다고 변명할 수 있겠으나,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반 독자들에게 心包의 해설로서 '심장을 싸고 있는 얇은 막'이라는 해부학적 정의 자체가 적합치 못하다는 것이다. 心包라는 장기가 한의학에서 차지하는 총체적 의미가 먼저 밝혀졌어야 했을 것이다.
心包는 결코 심장을 싸고 있는 얇은 막이라는 심장의 부속기관적 해부학적 실체가 아니다. 心包는 심장과 독립된 별개의 독립 장기이다. 즉 한의학의 인체론의 最基本인 十二經脈 중에서 五臟六腑를 제외한 나머지 하나의 經脈으로서 육부의 三焦에 부응하는 하나의 독립장기가 곧 心包이다. 心包가 과연 실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느냐 하는 것은 역자의 해설처럼 그렇게 간단치 않다. 오늘날까지 心包의 실체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心包라는 장기의 개념 성립 과정이 心包라는 해부학적 실체가 먼저 발견되고 거기에서 시작되는 經脈이 상정되었다고 보기보다는 十二經脈이 먼저 성립하고 난 후에 十二經脈 중 하나에 해당되는 어떠한 기능적 단위로서의 장기가 상정되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생론적 고찰은 중국의학 술어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일반가설을 성립시킨다. 즉 한의학에서 말하고 있는 장기의 명칭이 실체적 규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기능적 규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의학의 장기들은 오늘날 서구 의학에서 발달시킨 병리해부학적 인식 위에서 성립한 실체가 아니라 경락상의 기능을 담당하는 어떠한 개념적 단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의학에서 말하는 腎은 곧바로 오늘날의 腎臟(kidney)이라는 실체와 동일시되기 힘든 면이 많다. 腎은 신장 그 자체라고 보기보다는 先天의 元氣가 모이는 곳이며, 생식기능과 관련되어 있는 어떠한 기능상의 기관으로, 오늘날의 서양의학적 해부학적 실체로 말하자면 副腎과 性腺의 복합적 기능을 상징하는 그 무엇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脾도 오늘날의 脾臟(spleen)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 현대 서양의학에서 취급하는 비장은 일종의 조혈기관으로, 여기서 적혈구가 파괴되고 헤모그로빈(Hemoglobin)이 유리되어 간으로 수송되어 빌리루빈(Bilirubin)으로 전화하는데, 이 임파성 기관은 한의학에서는 독립장기로 확연히 인식된 적이 없고 개념적으로 肝의 개념 속에 포섭되는 종속된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內經學에서부터 명시되고 있는 脾는 오늘날의 의학술어로는 膵臟(pancreas)을 의미한다. 췌장 중에서도 외분비(즉 랑게르한스섬의 기능을 제외한) 관계의 소화효소분비 기능을 지칭하며, 胃라는 腑와 상응하는 臟이다.
우리 속말에 '그 녀석 비위도 좋다'라고 할 때 脾와 胃는 모두 土에 속하며 모두 소화관계 기관이다. 이 때 脾는 물론 비장(spleen)이 아니라 췌장(pancreas)이다. 고전 속의 脾를 '비장'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자적 동일성 때문에 개념적 동시성을 파괴하는 좋은 일례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장기의 실체성에 관한 문제 또한 번역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이다. 우리 고전상의 한의학 개념을 서양의학 개념과 대비시키는 작업은 일본의 蘭學子(란가쿠샤)들이 화란에서 수입된 의학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췌장의 膵란 말도 중국글자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擬字이며, 그들이 Spleen을 낮을 卑자가 들어간 脾로 번역하고 pancreas를 새롭게 발견함에 따라 모인다[集, 聚]의 의미를 갖는 萃자를 고기 肉변에 붙이어 새로이 만들어 pancreas를 지칭하게 하였다. 췌장의 해부학적 인식은 유명한 蘭學子 衫田玄白(스기타 겐파구 1733~1817)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후 우다가와 겐신(宇田川玄眞 1768~1834)의 "醫範提要" (1805)에 膵라는 글자로 최초로 등장한다. 서양에서도 팽크리아스의 기능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며, 19세기 중엽에나 프랑스 병리학자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의 토끼 해부로 인하여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검토해 볼 때 우리가 한의학의 술어들을 번역할 때도 함부로 오늘날의 개념으로 단순한 문자상의 동일성으로 인하여 대입시킬 수 없다는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인체에 대한 개념의 토폴로지(topology 사전적 의미로는 지형 지세학을 뜻함. 여기서는 상징적으로 인간이가진 개념의 지도를 뜻함. 곧 오운육기란 것이 인간이 가진 하나의 개념의 지도라고 볼 수 있음)가 전혀 다른 가설적 기반 위에 서 있다는 확연한 인식이 없이 그 文意의 정확성이 기술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오늘날 한방의 많은 오류가 이러한 개념적 혼동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임상적 현실 또한 지적됨이 마땅하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心包와 심장막은 같은 것이다'라는 말을 들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洋方에서 통용되는 해부학적인 용어와 우리가 사용하는 무형적, 기능적, 경락학적인 이름과의 동일시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말하자면 洋方에서 말하는 기관적(organ)이름인 Kidney가 한방의 足少陰腎經과 동일하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舍岩針法강의를 40일간이나 듣고도, 洋方에서 신장염이라고 하니까 "음! 足少陰腎經을 補해야 되겠군" 혹은 위궤양이라니까 "음! 足陽明胃經을 놓으면 되겠군"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한의학을 그만 두십시오!
모짜르트는 피아노를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 "전에 피아노를 배우신 적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하여 배운 적이 있다는 사람에게는 수강료를 두 배로 받고 전혀 배운 적이 없다는 사람에게는 반만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 바둑계의 명인인 사까다 역시 "바둑이 무엇인지 모르고 오는 사람은 단기간 내에 초단으로 만들어 줄 수 있지만 바둑을 좀 알고 오는 사람을 초단으로 만들기는 참으로 많은 기간이 소요된다"고 했습니다. 한의학이라는 이상한 학문을 배우기 위해 들어온 여러분들에게도 五運六氣에 대한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강의의 총론이 끊임없는 잔소리의 연속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선입견을 배제시키기 위해서이지요. 잡초가 없는 땅이라면 그냥 씨를 뿌리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는 많은 자갈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자갈을 제거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는 거지요. 이렇게 40일을 듣다 보면 "아-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군!" "내 마음을 관찰해야 되겠군" "경락은 모두 雙을 이루고 있군" "마음은 상대성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역대의 모든 성인이 말씀하신 경전과 "內經"의 원리올시다.
道를 팽개치고, 학문도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마냥 洋方의 해부학적인 명칭에 이끌려 병명을 동일시하거나 기관(organ)과 기능을 동일시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것을 김용옥교수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의학자가 아닌 분의 이야기를 인용하게 된 것을 저는 수치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권위가 있는 사람이나 옛 성인의 말씀을 비유해야만 인정하려고 하는 여러분들의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김용옥교수의 책을 읽어보면 그는 心包를 깊이 아는 大家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한의학자가 아니니까요 저로서는 오히려 "心包의 개념은 參禪學的으로 이렇게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라고 건의를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여러분들에게는 그분의 학문태도를 본받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의문이 많지요. 미국, 중국, 일본 등지로 다니며 공부를 해 보아도 우리나라 학문은 역시 우리말로 해야 된다는 것을 그분은 인식한 것이지요. 저 역시 의문과 반항과 정열의 학문적 정신을 존중합니다. 괴테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독일어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나의 생각입니다.
그분은 "東洋學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우리 東醫學者들이 해야 할 "內經"의 영역을 마구 침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옳으니 받아들여야지요.
김용옥교수는 "山林經濟(조선 후기 실학자의 한 사람인 홍만선(유암, 1643--1715)의 저작으로 농업과 의학에 대한 연구서)"라는 책에서 번역상의 결점을 발견하고, 이 글을 쓰게 된 것이지요. 산림경제란 책은 의학서적이 아니고 '민중 속의 생활, 지혜 안내서' 정도로 씌여진 책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상당히 탁월하다고 하는 고전의 책 속에서 誤譯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 중공이나 대만에서도 터무니 없는 번역을 많이 하는데, 그러한 중공이나 대만 책만 번역하면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그 쪽에도 洋方 물이 들어 있는데다 자체적 결함이 없지 않은데 우리는 그저 그것을 번역해서 그들의 뒤만 쫓아가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참으로 주체성 없는 어리석음이지요.
"心包는 심장을 싸고 있는 얇은 막이라는 심장의 부속기관적, 해부학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 심장과 독립된 별개의 臟腑이다"라고 "內經"을 공부하는 韓醫學者도 하기 어려운 말을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이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김용옥 교수의 제자 한 사람이 우리집에 놀러 왔는데 "동양철학을 하려면 반드시 內經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동양철학의 몇 구절도 해석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김용옥교수가 역설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김용옥교수도 心包의 정확한 지칭은 못했지만 그게 심장을 둘러싼 막이 아님은 간파했습니다.
"아닌 것을 제거하다 보면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고 크리슈나무르티 선생은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면 "이건 사랑이 아니지 않겠나" 하는 것을 제거해 보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김용옥교수가 心包의 개념을 설명은 못했지만 기존의 개념을 틀렸다고 지적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心包라는 장기의 개념 성립 과정이, 心包라는 해부학적 실체가 먼저 발견되고 나서 心包에서 시작되는 경맥이 상정되었다고 보기보다는, 十二經脈이 먼저 성립되고 난 후에 十二經脈 중 하나에 해당되는 어떠한 기능적 단위로서 心包가 상정되었다고 본다는 김용옥교수의 견해에 어느 정도 동감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화를 많이 내다 보니 그 에너지가 축적될 수 있는 창고가 필요했던 것이지, 화보다 창고가 먼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心包를 有名無形 또는 無相有用이라고 합니다. 막연하게 나마 권력욕, 지식욕, 명예욕 등 어떤 무형의 욕망을 간직하고 있는 장기가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는 했지요.
옛날 사람들은 心包를 알았는데 우리가 모를 이유가 없지요. 그것에 대한 이미지를 탐사해 들어가 보기로 합시다.
옛말에 "심보가 더러운 놈... 저 놈은 심보가 고약해!"이런 말이 있지요. 머리핀 하나 머리카락 하나의 증거를 가지고 날카롭게 수사를 해 들어가는 수사관과도 같은 날카로운 번득임이 있어야 됩니다. 옛날에 부산에 사시던 어떤 선생님은 제게 "수사관 노릇 3년만 하고 와라. 그러면 내 제자 만들어 주겠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사관 노릇 3년만 하면 한의학이 금방 이해가 된다는 그 말 뜻을 그 당시에는 이해를 못했었지요. 여러분 김용옥교수의 얘기들을 잘 새겨 들어야 됩니다. 정말 멋있는 말이지요. 논문 중에 최고의 논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용옥교수가 한방의 옆구리를 호되게 걷어찬 겁니다. '한방혁명 같은 소린 하지도 마라' 하고 한방 꽝 걷어찬 것이지요. 차마 눈뜨고 한국 한의학을 보아줄 수 없어서 誤譯된 것을 비판함으로써 서양과학의 똥이나 빨고있는 우리의 실상을 호되게 질타한 것입니다. 지금 우린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참으로 수치스런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됩니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못 받으면 학문적으로라도 인정을 받아야 되는데, 지금 한의학자들은 어느 한 쪽도 인정을 못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면허 돌팔이도 덩달아 대학교육을 얕잡아보고 있는 현실이지요.
어쩌면 한의대 나온 사람들이 五兪穴(사지의 원단(상지는 주부이하, 하지는 슬부이하)에 있는 상용혈위의 총칭으로, 이들 혈위는 임상상 거의가 비교적 상용되고 있는 유효한 혈위이다)도 못 외우고 十全大補湯(이 방은 인체의 기혈, 음양, 표리, 내외가 모두 허한 경우에 사용하는 것으로 사군자탕과 사물탕에 황기와 육계를 보태 열가지 약물로 이루어짐. 십전대보탕이 치료할 수 있는 증상으로는 전신쇠약, 빈혈, 심장쇠약, 위장장애, 몸이 약한 경우, 맥이 약한 경우 등)도 못 외우느냐고 합니다. 이건 정말 문제입니다. 반성해야 됩니다. 이 모두는 선배들이 뿌린 업인데 지금 그것을 불쌍하게도 여러분들이 받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래선 안되겠지요. 학문적으로 혁신이 된 눈으로 새로운 이론체계, 새로운 관점을 후배들에게 제공해 드리세요. 그리하면 서서히 세대교체가 일어나면서 한방이 개혁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김용옥교수가 주장하는 관점에 전적인 동감의 의견을 표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心包를 추적하는데 있어서 三焦와 상응이 되는 기관이라고 하는 것 만으로는 불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五運六氣學과 經絡學的인 개념을 혼합시켜 얘기를 하면, 心包란 五運上 火요, 六氣上으로는 手厥陰, 즉 厥陰이라는 장기의 개념이며, 三焦 역시 五運上 火이며 六氣上으로는 手少陽 三焦, 즉 少陽이라는 개념의 장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五運上으로만 관찰해 보면 心包, 三焦는 물론 심장, 小腸이 모두 火에 속하게 되지요. 그러나 六氣的으로 따져보면 같은 火라도 少陽相火와 少陰君火가 다르고, 五行上의 心臟, 小腸의 火와 心包, 三焦의 火가 별개의 개념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추리할 수 있습니다. 심장과 소장이 五運上 둘 다 火이지만 六氣와 서로 어울려 돌아갈 때는 手少陰心經과 手太陽小腸經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러므로 六氣的인 관찰에 들어가서는 少陰君火와 太陽寒水라고 하는 전혀 상반된 개념이 심장과 소장 경맥의 상황을 표현해 주게 됩니다. 이 차이점, 이 딜레머의 극복은 六氣개념의 해석으로써만이 가능합니다. 五行上 같은 火라 하더라도 위의 경우처럼 六氣상의 개념을 활용하지 않으면 그 경맥의 흐름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본다면, 여러분은 흔히 신장을 五行上 水라고만 알고 있는데 六經的으로 보면 足少陰腎이 됩니다. 그렇다면 腎을 生長化收藏, 春夏秋冬, 相生相克에 해당하는 五行上의 개념인 水로만 판단하느냐, 아니면 少陰君火의 개념으로 판단하느냐는 무척 어려운 문제입니다. 또 少陰君火만 하더라도 경맥상 手少陰과 足少陰으로 나뉘어 존재하므로 이렇게 둘로 나뉘어 존재하는 근거는 더욱 더 세밀한 분석을 필요로 하게 되지요. 이러한 고찰이 되고 있지 않는 기존의 한의학은 다리가 불구자인 상태로 한의학에 접근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정적인 차원에 있는 六經과 현대적으로 언급되는 리듬(신체, 감성, 지성) 그리고 六氣的인 관찰과 유물적, 유심적 관찰을 도표화 시킨 것을 일단 배정을 하고 외우셔야 합니다.
위 도표를 보면 돼지[亥]부터 시작하면 厥陰→少陰→太陰→少陽→陽明→太陽으로 변해가지요. 그러나 이 순서가 실질적으로는 얼마든지 다른 양상으로 변해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명예욕이나 지식욕을 많이 가진 사람[厥陰之氣]이 나이가 들었을 경우, 반드시 색을 밝히거나 쾌락을[少陰之氣] 추구하게 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요. 다만 그렇게 되기 쉽다는 것일 따름이지요.
그런데 명예욕, 지식욕, 혹은 색을 밝히는 것이나 재물에 집착하는 것 등의 이런 모든 것을 일컬어 소유욕, 즉 '먹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렸을 때 엄마 젖을 충분히 먹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성장후 담배를 많이 피우지 않으면 욕구불만 되기 쉽답니다. 또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면 아쉬운대로 자기 혓바닥이라도 빨게 됩니다. 그래서 관상학상 자기 입술을 자꾸 빨아대는 사람은 음탕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자들이 길을 가다가 멋진 남자를 보면 깊이 숨을 들어마시지요. 이것 역시 소유욕의 범주에 속합니다.
왜 담배가 몸에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피워대는지 아십니까? 계속해서 밥만 먹고 변을 보지 않으면 그 사람을 변비증 환자라 하지요. 그런데 계속 지식만 얻고 망각을 모르는 사람을 두고는 변비증 환자라 하지 않고 오히려 '유식하다', '기억력이 좋다'고 합니다. 도가에서 볼 때는 이 또한 병자입니다. 이렇듯 앎을 저축시킬 뿐, 망각의 통로로 배설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手少陽三焦經으로 들어가는 담배같은 것을 피우게 되지요. 그것은 변비증 환자가 자기가 먹은 음식에 비하여 아주 조금 변을 보는 것이나 같지요. 바로 약물의 힘을 빌어서 三味에 빠지는 것입니다.
六經 중에도 陰이 붙은 것은 대체로 取하는 성질이 많습니다. 먹기만 하고 배설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불행이 싫으니 太陰經絡만 발달되었으면 좋겠어. 陽明經絡(태음경의 반대개념)은 없으면 좋겠어", "나는 그냥 만나기만 하면 좋겠어, 이별은 싫어!", "난 무엇이든 알고만 싶어, 모르기는 싫어, 기억력이 남들보다 월등하면 좋겠어!"
바로 이런 사람들이 바보지요. 마음의 상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지식은 얻어서 쓰고 나면 버리세요. 헤어짐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나에게만은 이별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나 욕심은 無常(일정하게 고정되지 않음)합니다. 그래서 석가께서는 諸行無常이라 하시며 모든 것은 항상된 것이 없다고 갈파하셨던 것입니다. 노처녀는 신랑감을 얻고자 갈망하다가, 되지 않으면 그 구하고자 하는 욕심[少陰欲]이 빵, 우유, 아이스크림, 커피, 과일을 먹어치우는[太陰欲] 쪽으로 전변되기 쉽습니다. 노처녀가 곧잘 살이 찌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또한 지식욕이나 권력욕, 명예욕을 가진 사람이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어느날 전혀 엉뚱하게 色을 밝히는 경우가 많습니다(厥陰欲이 少陰欲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될런지...) 이상의 여러 욕심들은 표현만 다르게 되었을 뿐 근본은 다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욕망을 스스로 잘 알지 못할 뿐더러 무의식 중에 감추며 살아 갑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요. 여자만 보면 지레 몸이 움츠러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학문 빼면 쓰러지는 사람입니다" 그로부터 10년 후...(五運六氣를 보면 어쩔 수 없이 12년 내에는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하지요. 짧은 주기로는 6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생! 여자맛이 어이 이리 좋소. 거참! 신통하지..." 하다가 얼마후에는 "純粹理性이고, 비판이고, 칸트, 헤겔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하더니, 그로부터 10년 후... "저는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저에게 한표를..." 아 글쎄 권력자가 되어 있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지요. 인간이란 이렇게 가변성의 동물입니다. 그로부터 또 10년 후... "세상 사는 재미란 그런 게 아니야 그저 돈 모으는 재미가 최고지..." --은행, ××은행... 아침 일찍부터 그저 은행을 들락거리며 돈이란 돈은 모두 통장에 저축하기가 바쁩니다. 이게 인간이 가진 대표적인 욕망의 변형이올시다.
어느 뚱뚱한 친구 하나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도무지 욕망이 불만을 수반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먹을 것만 있으면 아무 바램이 없어요. 저는 또 생전 화를 내 본 적이 없습니다. 욕망이 불만을 수반한다는 따위의 말씀은 화 잘내는 저 사람에게 나 하세요" 그런데 이 뚱뚱한 친구가 맛있게 먹는 음식을 한 번 빼앗아 보세요. 그 누구보다도 격분하여 화를 냅니다.
"저는요. 성질이 조금 급하긴 해도 절대로 욕망은 없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미묘한 동물이므로 식욕이나 색욕이 없다 하여도 자존심은 있기 마련입니다. 이 사람에게 자기가 연구한 학문체계를 한 번 부정해 보세요. 혹은 그 사람의 종교관을 부정해 보세요. 천벌 받을 놈이라고 밤을 새워 욕을 하고도 분을 못 풀 것입니다. 아니면 기도를 합니다. "주여! 저 불쌍한 사람을 용서하세요..." 말로만 용서지, 속에서 끓는 화를 억지로 눌러 두고 있는 거지요. 이게 바로 위선입니다. 우리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자리한 종교적 Ego, 정치적 망상,... 이런 것들까지 이해해야 하므로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깨어있지 않으면 마음의 無常性, 相對性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참으로 어렵지요. 여러분들도 지금 웃고 있지만, 그것은 여러분들 마음 속의 어떠한 위선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로서의 웃음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자! 그러면 이 心包와 三焦, 脾와 胃, 肝과 膽, 心臟과 小腸, 肺와 大腸, 腎과 膀胱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감정적 측면이 무엇인가를 고찰해 보기로 합시다.
識情 |
識情의 六經的 觀點 |
惡 |
惡의 六經的 觀點 |
識 |
心包 |
不識 |
三焦 |
意 |
脾 |
失望・挫折 |
胃 |
喜 |
肝 |
怒 |
膽 |
愛 |
心 |
惡 |
小腸 |
(快)樂 |
肺 |
哀 |
大腸 |
欲 |
腎 |
恐 |
膀胱 |
陰 |
肯定 |
陽 |
不定 |
위에 있는 이 도표는 외우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마음의 전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것입니다. 우선은 위 도표를 개의치 말고 제 이야길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주인공이 되어 제 이야기에 출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과 학생하고 자주 만나면 헛 소문이 떠도니, 어느 명문대학 애들과 미팅을 하고자 어울린 한의대 여학생 한 무리가 있다고 하는 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註:이 이야기는 마음의 전체성과 미묘한 심리변화, 욕망 등을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꾸민 - 講師 金烏가 지어낸- 것일 뿐입니다).
남학생 열 다섯명, 여학생 열 다섯명이 다방에서 만났습니다. 서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눈은 다소곳이 내리깔고는 얌전한 모습들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이미 다 훑어봤습니다. 그런데 유수한 명문 대학생이라 해서 기대가 컸었는데 막상 보니 실망이 커요. 15명 모두 한결같이 마음에 들질 않아요. "오늘 실망이다. 얘!" "대강 놀다가지 뭐" 고개 푹 숙이고 수줍어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파트너가 정해졌습니다. "저는 경상도 안동의 양반으로서... 미래에는 어쩌고..." "저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못하고..." 대답은 "네. 네..." 하면서도 속으론 "남자 자식이 술 담배도 않고 무슨 재미로 사냐? 웃기고 있네" 합니다. 기분이 나지 않으니 차 맛도 없고, 그저 심드렁하니 돌아오는 길에 굳이 묻지도 않은 하숙집 전화번호까지 손에 쥐어 줍니다. 다음날 친구들과 어울려 종로에 나갔는데 어디서 뛸듯이 반가운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는 인삿말이 들리고, 그 지겨웠던 어제의 파트너가 등장을 합니다.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실례지만 누구신데요?" "예에? 어... 어제 미팅에서 만났던..." "전 기억이 안나는데요?" (기억이 안나기는 그냥 모르는 체 무시하는 거지)
이런 상황은 저(金烏)와 여러분 사이에서도 종종 생깁니다. 밖에서 우연히 대폿집 같은 데에서 만났을 때 "안녕하십니까? 금까마귀 선생님!" 하면 "저는 모르겠는데요" 합니다. "제가 선생님 강의를 들어서 선생님을 아는데요..." "글쎄. 전 잘 모르겠군요"라고 대답합니다(사실 여러분이 제 무엇을 안다는 겁니까?) 자! 이쯤 되면, 여러분 심경에 어떤 생각이 들어가게 됩니까? 금새 기분이 틀어지지요. 안다는 사실이 가진 쾌락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 자네. 기억하지. 강의때마다 맨 앞에 앉아서 파편(침) 많이 맞았지"라고 말하면 자기를 내가 알고 있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로 마음이 감동으로 물결칩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우리 심중의 작은 감정 하나에 불과합니다. '識情'이라고 하지요(주의를 기울여서 강의를 들어야 합니다). 자! 한글자 (*을과 지로 합성된 글자)를 써볼까요!
(안다는 것은 위의 글자 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자입니까? (독자 여러분도 알아 맞춰 보세요). '을'자, '지'자? ... 무슨 자? ...(대답이 가지가지 입니다). 이때 한 친구가 말하기를 "모르겠는데요" 예! "모르겠는데요"가 정답입니다. 이런 한문은 옥편에 없습니다. 제가 처음 써 본 글자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은 모른다고 말하기는 싫고, 모른다고 하면 왠지 수치스럽고 해서 자꾸 답을 주워 섬기려 합니다. 이 마음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 마음은 여러분들이 집착하는 '앎'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아까 중단되었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모르겠노라고 그럴듯하게 시치미를 떼자, 당황해 하던 그 남학생은 고개를 푹 숙이고, 청바지에 손을 깊이 넣고는 자신의 매력없음을 한탄하며, 어깨까지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걸어 갑니다. 그 순간 여학생의 가슴이 찡하게 아파왔어요. "내가 순진한 남자를 너무 희롱했나봐" 이번엔 그의 장점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보세요. 돌석씨"하고 불렀어요. "예? 예!" 이 친구가 되돌아 봅니다. "아이- 미안해요. 여자가 처음부터 아는 척 할 수 있나요?" 모성애가 발동을 했는지 남자 사기를 돋워 주는 사이 두 사람은 조금 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안다는 사실, 이것은 참으로 미묘하고도 다양한 감정을 연출시킵니다.
코미디언이 "지금부터 지리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인도의 수도인 런던에서 어쩌고 저쩌고..." 하면 사람들은 와- 하고 웃습니다. 청중들이 왜 웃습니까? 서너살 된 애들은 웃지 않는데... 인도의 수도가 런던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의 '아는체'하는 의식을 역 이용하는 사람이 바로 개그맨 부류의 직업인 입니다.
제가 어느 대학교 강의 첫시간에, 바지를 양말에 집어넣고 Y사쓰를 바지 밖으로 빠져나오게 해서 입고 들어갔습니다. 학생들이 웃느라 정신이 없더군요. 웃든 말든 저는 계속 강의를 했습니다. 웃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보편성,상식을 초월한 옷차림을 했다는 것이 이유이겠지요. 코미디언들도 마찬가집니다. 실수나 불완전성을 연출하는 거지요. 너무 완벽하면 매력이 없거든요. 아주 잘 생기고, 달변이고, 돈도 잘 쓰고 하면 여자들이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머리칼이 좀 부수수하거나, 눈꼽이 끼었다거나,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하나쯤 끼어 있어야지, 몸에서 향수 내음이 나고 온통 유명메이커 옷으로 치장을 한 사람은 꺼립니다. 옛날 서양의 왕궁에서는 광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사회나 단체 내에도 웃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오늘날 왜 그렇게도 많은 수의 개그맨들이 인기를 얻을까요? 어린아이들은 왜 그렇게도 개그맨을 좋아할까요? 어째서 실수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코미디언이 인기가 좋겠습니까? 이것은 아는 일에 지친 사람들에게 상대적인 것을 배려한 신의 조화입니다. 아는 일 만큼이나 모른다는 것이 중요함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어쨌거나 위의 두 사람은 안다, 모른다의 시비를 넘어선 사이가 되었습니다.
여학생이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자기도 뭐 그리 남다른 데가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래! 저정도 남자면 한 번 교제를 해 봐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뜻을 세우게 되면 어떤 차원을 지나게 됩니다. 제가 강의를 한다고 했을 때 여러분들은 들어볼까 말까하고 마음의 갈등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선배들의 조언도 구해 보고 40일 동안의 투자에 대해 손익계산서 작성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결정을 내릴때까지 많은 생각을 해보고 이 강좌를 듣기로 결정했을 것입니다.
여학생 역시 어제까지는 마음이 없다가, "한번 교제를 해 볼까?" 하고 뜻이 서려하자 그 못생기고 밉상이던 상대가 조금씩 달라보이기 시작합니다. '명문대학을 다닐 정도면 공부도 꽤 했을 것이고, 마음 중심도 서 있을거야. 힘없이 돌아서던 모습으로 보아 의외로 순진한 것 같애. 그래 사람이 너무 실리적이어도 곤란해' 아직 연민, 사랑, 그리움 등의 단계는 아니지만 만남의 시작에 해당하는 '뜻'이 일어나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보세요. 돌석씨"하고 불렀을 때 반가와서 어쩔 줄 몰라하던 돌석의 모습이 이제는 밉기는커녕 슬며시 흐뭇해지기 시작합니다. 바야흐로 두 사람은 서로의 전공에서부터 시작하여 취미, 인생관까지 서로의 뜻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서로가 조금씩 확인을 하기 시작합니다(벌써 이 단계에서 소유감각이 개입됨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이 여학생에게 돌석이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얘. 돌석씨란 사람 어때?" "응. 그저 그래" 별 사심없이 말합니다. "나 파트너가 필요한데 내일 하루만 파트너로 하면 안되겠니?" "뭐? 뭐야" 친구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자의 마음 속에서 원인모를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개인적으로는 별 욕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사람을 네가 알려고 해?' 하는 상황에 이르자 소유욕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툭 하고 튀어 나왔습니다. "얘. 별 사이도 아니라면서 뭘 그러니?" "얘! 그래도 네가 그럴 수 있니?" 시기 질투를 느끼진 않지만 주기는 아깝고 자기가 갖기는 또 좀 그렇고 한 이 식정(識情)의 단계에 벌써 미묘하나마 소유감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럭저럭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각자 자기네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게 됩니다. "야! 난 6년 후면 무위도식해도 또 내가 술먹고 병이 나도 다 고쳐줄꺼고..."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레코드 음반을 선물해야겠는데 재즈가 좋을까, 클래식이 좋을까?"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친구와 연구도 하게 됩니다.
결국 베에토벤 Symphony 5번 디스크를 사서 여자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 여자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상대방에게 정확히 맞는 선물을 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와 시사성이 내포된 것입니다). 아주 만족해 하는 여자를 보고 돌석이 말하기를 "말자씨가 기뻐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그런 뜻에서 제가 오늘은 disco hall에 가서 한 잔 사겠습니다. 춤이나 한 번 추실까요?" "숙녀에게 무슨 실례의 말씀이에요? 나는 디스코 출 줄 몰라요" 이렇게 하는 사이에 둘 사이는 점점 깊어갑니다. 이름과 성을 알고 난 뒤에는 '六感(眼・耳・鼻・舌・身・意)'의 접촉이 시작됩니다. 이게 바로 12인연론입니다. 사람들은 이 여섯 감각기관의 접촉에 의해 인식하고 뜻을 세우게 됩니다. 결혼 동기를 예로 들어보면, 얼굴이 예뻐서, 목소리에 반해서, 그 여자의 향수가 어릴 적 어머니 분냄새 같아 마음이 편안해져서...이렇듯 접촉에는 뜻[意]이 따르게 되고, 뜻이 생기면 갈등을 하다가 좌절감 또는 성취감을 느끼게 됩니다. 뜻에 뒤따르는 상대개념으로, 뜻을 이룬 성취감을 脾主思, 脾主意로 본다면, 뜻을 이루지 못한 실망감 좌절감은 胃가 主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六經的으로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럭 저럭 정이 깊어져 뻐드렁니도 늠름해 보이고 빈대코도 화통해 보이게 되자 그 남학생을 생각함에 가슴 울렁거리는 즐거움이 동반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일전에 돌석이를 파트너로 빌려 달라던 여자가 돌석이와 어딜 놀러갔다 왔다고 자랑을 합니다. 격분한 말자는 당장에 돌석을 만나러 갔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어요?" "어! 말자씨 모르셨군요. 그 친구(말자친구)가 말자씨 허락을 얻었노라고 하도 간청을 해서..." "그런 적 없어요" 화가 난 말자를 바라 보며 돌석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돌석은 빙그레 미소하며 "말자씨에게 그런 성격이 있는 줄 몰랐는데요!" "뭐예요? 화난 사람 약올리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성낸 말자씨 얼굴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사실은, 그 날
저는 나갔다가 제 친구를 소개 해주고 바로 돌아왔습니다. 말자씨를 두고 제가 어찌..." 이 말을 듣고 말자의 마음은 봄눈 녹듯 풀렸습니다.
이 상황이 세 번째 단계인 '喜'와 '怒'. 즉 기쁨과 슬픔의 단계입니다. 이때의 분노는 아직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요. 다만 이 날의 일을 계기로 서로의 소유감각이 좀 더 짙어졌을 뿐. 이날 이후로 두 사람은 손목과 팔짱을 넘어섰습니다. 손목→팔짱→어깨→허리로 손을 두는 위치가 바뀌어갔습니다.
"말자씨 우리 어디 여행이나 한 번 가실까요?" 이런 제의가 자연스러워지던 어느 날 두 사람은 1박 2일 코스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무슨 놈의 차가 그리도 복잡한 지 말자 히프를 이 놈도 툭 건드리고 저 놈도 툭 건드리는데, 보면서도 말리지 못하는 돌석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어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돌석은 말자를 다그칩니다. "아니! 여자가 그렇게 둔해서 어떻게 해?" "난 자기하고 얘기하느라 몰랐어" 그래도 화를 진정치 못한 돌석은 "말자는 내가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를거야!" 말자는 '드디어 돌석씨가 나에 대한 사랑에 빠졌구나' 전에는 바닷가에 가면 생선회 생각밖에 안나더니 이젠 상대방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 때쯤이면 자기 파트너가 지나가는 남자나 여자와 눈만 마주쳐도 속에서 화가 치밉니다. 바야흐로 두 사람은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됩니다(道家에서는 점차 위험해 진다고 하지요). 만나기만 하면 으슥하고 어두은 공원 구석을 찾게 되고, 남들이 종로 2가를 팔짱만 끼고 가도 욕하던 사람들이 허리를 껴안고 몸의 거의 절반을 밀착하고 걸어가는 파렴치한이 됩니다.
바로 '愛'와 '樂'의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이젠 하루만 못 봐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함께 걷던 오솔길, 노을이 붉게 물든 바닷가, 그가 들려주던 시, 이 모든 것들이 알알이 추억으로 아로 새겨지기 시작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소유인 양 생각하고 있던 어느날,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약속 장소에 말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어요. 당황한 돌석은 어쩔 줄 몰라합니다. "약속장소가 틀렸나?" "아닌데" 30분, 1시간, 2시간이 지나고... 그런데 저만치서 말자 동생이 헐레벌떡 달려옵니다. "언니가...흑흑...언니가 백혈병으로 ○○종합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이젠 눈물이 등장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애간장을 끊는 애절함. 이 애절함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쾌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쾌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哀와 樂의 중간에서 일어나는 부작용이올시다.
그런데 일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죽지 않고) 더 진전이 되어 서로 결혼을 하는, 즉 바로 욕망의 단계입니다. 결국, 이 지상세계는 곧 욕망의 세계입니다. 불교의 三世論에 보면 欲界 위에 色界, 色界위에 無色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곧잘 자기 소유를 강조합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어떻게 내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그저 부모의 몸을 잠시 빌어 태어났을 뿐인데 어떻게 부모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까? 죽으면 한 줌의 흙도 못 되는 이 장래의 시체를 누구 것이라고 소유를 밝히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옛날 일곱 賢女가 숲을 거닐다가 한 구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한 여자가 "시체는 여기 있는데 주인은 어디로 갔는고?" 이 말에 일곱 사람은 일제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앞의 두 사람과 같이 애절함과 슬픔이 지대하다 보면 閉氣가 되고, 또한 氣가 소멸되어 중병이 생기게 되고 더불어 공포가 수반됩니다. 그래서 욕망과 공포는 상대적입니다. 배우자에 대한 욕망이 너무 크게 되면 의처증과 의부증이 생기게 되어 구타와 구속의 공포를 초래하게 되고, 소유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집 주위를 삼엄하게 경비합니다. 이런 것의 근본이 바로 공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참고로 정리를 해 보면 마음이 움직이는 앎의 성정은 心包경에 해당하고, 모른다고 하는 마음의 움직임은 三焦經에 해당이 됩니다. 어떤 일에 뜻을 가짐의 심적 상황은 脾經, 그 뜻의 좌절은 胃經, 기쁨의 마음은 肝經, 분노는 膽經, 사랑의 감정은 心經, 싫어하고 꺼리고 경계하는 것은 小腸經, 이렇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론에 가면 상세히 다룹니다. 그리고 왜 이런 식으로 장황히 설명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차차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처음엔 미미하게 얼굴을 익힌 정도에서, 뜻을 가졌다가, 차차 서로 즐기며 기뻐하다가, 사랑하게 되고, 그 다음엔 아주 즐김을 탐[快樂]하다가, 급기야 욕심을 내게 되는 여섯 단계의 마음 유동의 '無常性'을 깊이 공감하면 굳이 臟腑와 결부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예로 들어드린 이 이야기는 앞으로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어떠한 관계에 있을 때 스스로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그때 그때 상황이나 표현형식은 다 달라도 그것들은 이 여섯 단계의 마음 변화 속에 다 포함이 될 것입니다. 옆집 처녀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데 오느날 그 여자가 시집을 갔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파 며칠씩 술을 마신다거나, 오드리헵번을 열렬히 사모하여 방안에 그 여자 사진을 붙여 놓았다가, 다른 영화에서 어느 남자 배우와의 키스신을 보고는 그 여자의 사진을 뜯어내며 이틀밤을 울었던 저의 경우, 그저 이미지만을 대상으로 했음에도 이렇게 질투가 動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이 현실에서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면 그것이 일게 된 배경을 찾아 보세요. 애초에 내가 이 일을 접하여 알지 못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생기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원점으로 돌아가 보세요. 시중에 유행하는 T M명상술의 첫 수련과정이 어떤 생각의 처음을 觀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道로 향하자고 하는 것은 識情, 즉 소위 안다, 모른다 하는 識情에서부터 욕망과 공포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관찰하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수행이 잘 된 사람일수록 욕망과 공포가 없어 얼굴이 맑지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욕계이므로 질병이 많이 생깁니다. 공포로 인해 몸이 冷해지고, 부질없는 시기, 질투로 인해 膽에 結石이 생기고, 쓸데없는 의심, 생각이 너무 많아 脾가 약해지고 소화기능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유심적인 부분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강의를 그저 웃음으로 넘기지 말고 전체적으로 깊이 살펴보시면 여러분들 스스로 그 주인공들과 조금도 다른 사람이 아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나 역시도 常情에 매여 있구나! 나 역시도 見物生心인 걸 보니 내게도 도둑놈의 기질이 있구나! 아, 내가 연애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 역시도 배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구나! 왜? 여러분들 몸 속의 경락이 모두 그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태까지 사용하지 못한 경락을 없는 것으로 알고 '나는 그렇지 않다' 하며 스스로 예외의 존재인양 착각하지 마십시오. 깊이 느끼고 알아서 인정하게 되면 常情, 盜性, 戀愛...등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C) 2001 Sa-Am non-profit Acupuncture Service All rights reserved.
http://www.saam.net/saamacu/revolution/rev4-3.htm
4. 오운 육기
3.
주역은 인간사이므로 周易八卦를 공부하다 보면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보이지 않는 불문율을 공부하게 됩니다. 인간이 대체적으로 음과 양으로 분류된다고 하더라도 남편과 아내의 경우와, 남편과 시어머니, 아내와 시아버지 사이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특히 대가족일 때는 그 집안 사람 사이의 예절, 혹은 불문율이 얼마나 복잡해 지겠습니까. 少陰君火인 사위와 太陽寒水인 며느리는 다른 혈통에서 들어왔으므로 그 집안 내의 엄청난 변수로 작용하게 됩니다(그래서 사위나 며느리는 잘 맞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천지가 있는데 해와 달이 중간에서 온갖 조화를 다 부림과 같지요. 태극기의 天地日月 4卦도 인간관계와 꼭 같이 비유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며느리 한 사람을 중심으로 볼 때에도 며느리와 아들, 며느리와 시누이, 며느리와 시아버지... 등 무수한 관계가 있는데 가족구성원 서로 서로의 관계는 얼마나 복잡하고 또 경우가 많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러한 관계! 이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이 관계의 기초훈련을 시켜주는 것이 바로 주역입니다.
만두나 찐빵을 손으로 눌러보면 그 알속이 약한 부분으로 터져 나오듯이 우리 인체내의 12장부 중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부인이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면 남편이 먼저 우울해집니다. 남편이 우울하니 남편의 어머니가 또 우울해집니다. 다시 아버지도 우울해집니다. 한편 부인에게 병이 생긴 원인도 남편으로 인해서 혹은 시어머니, 시누이, 시아버지 등 다양해 집니다. 이렇듯 복잡하고 다양한 것입니다. 부인이 병이 났다는 사실 하나로부터 파생되는 일이 이러한데 복잡다단한 인간사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간장병의 원인이 꼭 쓸개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다만 쓸개로부터 오기 쉽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장병! 木에 병이 생겼으면 水生木이니까 腎臟만 補하면 되겠군' 이런 식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인체는 평등한 유기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디서, 어떤 원인으로 병이 왔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五行理論이나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六氣理論도 중요하겠으나 결국은 여러분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경락 중 補와 瀉를 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24이지요. 이 중 하나를 선택하는 확률은 1/24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자에게 적합한 하나의 방법을 택하기까지 여러분이 깨어 있지 않고는 힘들다는 말입니다. 몇 가지 공식만을 막연하게 외워서 쓰는 방법과는 아주 다릅니다. 확률이 1/24이므로 저 역시도 끊임없이 토론과 그룹미팅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이런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은 '깨어있음'입니다. 우주가 그러하듯 순간순간의 변화가 극심한 우리 인체의 病變을 여러분이 이해하려면 반드시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장병이 발병했을 때 쓸개, 소장, 심장 등 12가지 상황과 治法上의 복합적인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方藥合編" 中統의 6번 靈仙除通飮을 보면 "治肢節... "'濕에 風寒이 겹쳐 濕熱이 나는데 이것이 肢節사이로 유주할 때 일어나는 통증을 다스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風은 厥陰(厥陰風木), 寒은 太陽(太陽寒水), 濕은 太陰이므로 위의 병은 3개의 경이 혼합된 것이지요. 色으로 볼 때 빨강, 파랑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라색도 있다는 것이지요. 또 風濕이 합쳐질 수도 있고, 寒熱이 서로 교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TV에서 과학자와 의사가 대담을 하는 데 한약이나 生藥으로 治病하지 말고 모든 것을 과학으로 해결하라더군요. 과학은 분류이고 이론 아닙니까? 병을 치료 하는데 있어서 이론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론과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한 순간이라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질병이 나타날 수 있는 원리와 실제로 질병이 서로 연관되어 나타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다시 八卦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周易八卦를 인간세계에 대비시켜 운동성이 없는 평면적인 관찰을 했습니다. 2차원적 평면관계로 보았지요. 2차원에 공간적 요소를 첨가하면 3차원이 되고, 공간에 시간(운동성)을 부여하면 4차원이 되지요. 운동성 차원인 4차원까지는 못본다 할지라도 우리 인체를 뒤돌아 살펴보면 항상 天과 地로 나뉘어집니다. "黃帝內經" 五運六氣 편 첫머리에 보면 '左右는 陰陽之道요, 天地는 萬物의 上下이다. 水火는 陰陽의 상장이고, 金木은 生成의 始終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始終, 象徵, 上下, 左右, 表裏 등이 陰陽입니다. 이렇게 陰陽을 나눈 것은 陰陽자체를 일정한 기준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그냥 전체적으로 나눈 것입니다.
"內經"五運六氣 편에 岐伯이 말하기를 '그러하오나 얼핏 보아서 다른 두 개의 법칙을 합하여 생각하면 거기엔 일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대체로 음양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것을 넓혀서 만가지로 분류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五運六氣의 음양이치가 상식적인 陰陽五運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것입니다. 요컨대 병은 우주만물의 현상이며 이 현상이란 어떠한 것에 대한 상대적인 부조화이므로 어떤 것이 상대인가를 추측할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제가 설명하는 오운육기 법칙이 오행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일단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설명하는 이것대로 좋은 것이니까요.
'左肝右肺'라는 말이 있습니다. 肝은 인체의 오른쪽에 있는데 왜 좌측이라고 하는가? 臟腑論으로 볼때는 右肝이지만 左右에 각기 대표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血과 氣論이지요. 바로 右氣左血論에서 左肝右肺論이 나온 것입니다. 左肝右肺論은 경락학적으로 이해해야지 臟腑가 붙은 위치나 모양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유심적으로 본 八卦유추를 보십시오. 오른쪽은 氣, 왼쪽은 血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우리는 氣와 血에 대한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합니다. 氣는 陽, 血은 陰입니다. 또 한방에서는 精・氣・神・血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 강의의 기본은 '한방에 나오는 어떤 언어라도 그것은 인간이 일으키고 있는 생각이다'라는 전체조건하에 진행이 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체는 전체가 氣와 血로 뭉쳐져 있는데 보편적으로 여성은 血이 實하다고 보고 남성은 氣가 實하다고 봅니다. 물론 어떤 남성은 血이 實하고 氣가 虛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많이 일으키면 기가 실해지고 어떠한 생각을 많이 일으키면 혈이 실해지겠습니까? 取하는 쪽은 陰的이니까 血이 實하다 할 수 있고, 주는 쪽은 陽的이므로 氣가 實하게 되겠지요. 남자들은 주길 좋아하고 여자는 받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이 陰陽의 조화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Egoist입니다. 이 Ego에는 '나' '너'라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되지요. '나'가 '우리'가 된 것은 Ego의 확대일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 관념의 최고의 분리의식입니다. 나라고 하는 상태, 나를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陰的인 사람이고, 남을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陽的인 사람입니다. 남녀가 함께 살다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만 남자는 여자의 속성을 이해할 수 없고 여자는 남자의 속성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남녀를 공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이나 道人이지요.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밤을 새워 바둑을 두는 남자들을 여자들은 이해할 수 없지요. 여자들은 돈이 생긴다면 어떤 일이고 다하지만 실리가 없으면 안합니다. 그런데 남녀가 데이트를 할 때,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지만 한 번 사랑에 빠진 여자는 남자에게 기댄 채 도취가 되어서 누가 보든지 말든지 아예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구상의 음양이 만나게 되는 아프지 않은 형벌이자 사랑이 일어나는 동기입니다. 이 陰陽의 조화로, 그 힘에 의해서 각각 서로 다른 에너지가 만나서 그 무언가 모르는 세계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성적으로는 오르가즘, 또는 無我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깨달음이란 무아의 오르가즘과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율법학자가 와서 하는 말이 "형이 죽으면 형의 부인을 동생이 取妻하고 그 동생이 죽으면 또 밑의 동생이 물려받고 해서 한 여자를 칠형제가 물려받았을 때, 죽어 하늘나라에 가면 어느 남자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고 교활한 함정이 들어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는 결혼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는 결혼이 없는 세상은 생각지 않고 오직 누구의 마누라가 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자기 남편 이외의 섬김을 간음이라고 설법했던 예수님 말씀에 꼬투리를 잡으려는 이 교활함. 이것은 깨달음의 세계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지상세계와 비교될 수 없고,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어떤 세계, 그것이 바로 도인 것입니다.
인간이 마음 속에 가진 '나', '너'라고 하는 相. 이것은 아주 고질적인 相입니다. '나', '우리'를 너무 강조하면 陰的인 것이 발달되고, 血이 발달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좌측은 '나'를 많이 강조한 사람이고, 우측은 '너'를 많이 강조한 사람입니다. 이런 식의 유심적인 결부는 잘 생각해보면 근거가 있는 이야기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대가족제도에선 자식교육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시켰습니다. 이 교육은 전적으로 자유교육입니다. 즉 가만히 지켜보는 교육이지요. 그런데 요즘 부모들의 자식교육은 부모의 야심을 주입시키는 교육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지혜, 이것이 없으면 국가도 흥할 수 없고 학문도 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연세 많은 분들의 한방 경험을 고리타분하다고 무시를 하고 배척을 합니다. 실험을 해서 화학적인 성분 분설을 해야 옳고 바른 줄 알고 있습니다. 노인의 지혜, 단순하게 보는 지혜를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午・未・申・酉・戌・亥는 좌측에 해당하여 여름에서 겨울까지 가는 陰이 되고, 子・丑・寅・卯・辰・巳는 陽이 됩니다. 午・未・申・酉・戌・亥는 後天, 子・丑・寅・卯・辰・巳는 先天이라고 합니다. 지금 시각이 12시 5분 전이라면, 先天에서 後天으로 바뀌려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手少陰心經의 火氣가 강하기 때문에 옛날 인류 5천년의 변화가 지금은 한 달이면 가능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앞에서 乾卦는 督脈, 坤卦는 任脈에 해당한다고 말씀 드렸는데 이것은 '유심적인 한 생각이 경락을 이루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증거이므로 이렇게 따로 장을 만들어서 말씁드리는 것입니다. 督脈과 任脈은 우리가 지닌 경락의 유심적인 통로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도구라는 거지요. 남자의 임맥은 會陰에서 출발 하는데 반해 여자들은 거꾸로라고 합니다. 독맥은 天이고 임맥은 地氣를 감독한다고 하는데 얼굴로 비유를 해봅시다. 上下운동을 하는 것으로 눈(目)과 입(口)이 있는데 눈은 윗눈까풀이 움직이고 입은 아래턱이 움직이지요. 또 얼굴의 구멍(竅) 중 2개는 들어가고 2개는 밖으로 나와 있지요. 밖으로 나온 코와 귀는 陽이고 들어간 눈과 입은 陰입니다.
好相이라거나 耳目口鼻가 수려하다는 것은 얼굴의 조화가 좋은 것을 말합니다. 눈은 아주 작은데 코가 갈구리같은 메부리코라면 성질이 급한 사람이 틀림없으며 남 흠잡는데 능한 사람입니다. 한편 눈은 쌍꺼풀지고 코가 납작하면 남녀 불문하고 색을 밝히는 사람입니다. 어린애가 사람을 보고 참 예쁘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애가 어떻게 예쁜걸 알까요? 그건 陰陽의 조화에 대한 직감입니다. 가장 쉬운 관상법은 입술을 보는 것입니다. 윗 입술이 天(督脈)이고 아랫 입술은 地(任脈)입니다. 그런데 '任'자는 일임한다, 신임한다, 믿고 맡긴다는 뜻이고 여기에 계집 女 자를 추가하면 회임한다, 임신한다, 품는다는 말이 됩니다. 한편 '督'자는 앞에 監(볼) 자를 붙여 "감독한다, 나는 너를 의심한다"는 말이 됩니다. 즉 임맥은 긍정적인 상태, 독맥은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하지요. 앞으로는 사람을 대할 때 입술 끝만 보고 이야기를 하세요. 그러면 그 사람의 진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속이 상해서 "에이 콱 죽어버리고 싶다"고 할 때 윗입술이 아랫입술을 덮은 입모양이 되지요. 즉 하나는 生, 하나는 死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족스러울 때의 표정은 아랫 입술이 윗 입술을 덮으며, "으응" 합니다. 만족과 신뢰로 긍정할 때는 임맥이 작용합니다. 대화 중 말로는 "예예" 하면서 윗 입술이 아랫 입술을 자꾸 덮으면 그 사람은 내 말을 믿지 않고 있는 증거입니다.
입술이 교차되는 곳은 天地기운이 교차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입술만 보아도 병의 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자들(督脈의 성질)에게 감독하고 의심하라 하면 잘 하지만 믿으라면 잘 듣지 않지요. 그러나 여자들(任脈의 성질)은 터무니 없이 잘 믿지요. 임맥과 독맥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데에 촛점을 맞추십시오. 선천적으로 독맥이 발달된 사람은 감독하는 일을 잘 하므로 작업장 감독관을 시키면 딱 맞습니다. 듬직하게 생긴 사람이 아랫 입술이 나와 있다면 그 사람과는 함께 일을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아랫 입술이 너무 올라간 사람은 터무니 없이 믿으므로 도둑놈도 믿고, 강도도 믿고 따르는 어리석은 신심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이 경락의 개념을 깨닫거나 여러분의 마음을 관찰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예입니다. 나머지 여섯 경락도 모두 이런 식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저 예민하게 관찰하지 못해서 모를 따름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사물의 본심을 통찰해야 합니다.
날으는 새의 예를 들어보면, 독수리의 부리는 윗부리가 아랫부리를 덮고 있습니다. 즉 督脈이 발달되어 공격적이고, 의심이 많고, 경계심, 복수심이 강합니다. 반면에 펠리칸과 같은 새는 아래턱이 발달되어 있어서 아래부리 속에 새끼를 넣고 다닙니다. 선천적으로 任脈이 발달된 게지요. 저하고 공부를 잘하고 나면 새 관상, 토끼 관상, 물고기 관상까지도 볼수가 있지요. '저 물고기를 먹으면 몸이 냉해지겠구나!' 혹은 , '더워지겠구나!' 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상어를 보세요. 독맥이 발달되어 있어서 성질이 사납습니다. 경계심, 의심이 많고, 공격적이고 陽的이므로 머리쪽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이 상어고기를 많이 먹는다면 어디가 발달될까요? 독수리의 경우는 머리가 작은 반면 깃털의 발달이 좋으므로, 성질이 나면 상체쪽으로 에너지가 쏠리므로 털이 꼿꼿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명태는 윗턱보다 아랫턱이 훨씬 더 많이 나와 있습니다. 제사에 명태를 쓰는 까닭은 명태의 이미지를 선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상어와 명태 중 어느 쪽이 알이나 새끼를 많이 낳겠습니까? 물론 아랫턱(任脈)이 발달된 명태가 임신에 능하겠지요. 이렇게 임맥과 독맥만 관찰하여도 그 자체의 성품을 반은 간파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韓醫學徒라면... ) 이런 이야기에 충격을 받으셔야 합니다. 본과 3, 4학년 중에 많은 고민을 해 본 사람은 충격을 받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쉽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乾卦는 '君子가 종일 건건하여... ' 군자는 하루종일 기분좋게 누굴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종일 근신하고, 경계하여 삼가고, 나를 깍고, 자기를 죽여서 살신성인할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坤卦는 '항상 유순하고 부드럽고... '무엇이든 받쳐주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父德과 母德을 取象해 낸 것이지요. 嚴父, 慈母의 이 두양친의 조화는 중요합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자식이 버릇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방적으로 임맥의 영향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을 감독하고, 의심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편이 전에는 일찍 귀가를 했는데 요새는 매일 밤 12시 넘어서 들어오는데 고민이 있어 보이면 "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그런가? 내가 어떻게 돕지?" 이런 의심을 해 봐야 합니다. 무조건 믿고"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하면 남편은 멀지 않아 지겨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 독맥만 발달되어 의심이 많아도 곤란합니다. 임맥과 독맥이 서로 조화가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임맥과 독맥을 각각 심리적인 상황으로 나눠서 설명하는 강좌는 우리 한방계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환자가 왔을 때, 그 환자의 아래 윗입술이 평등하면 다른 데에서 원리를 찾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독맥과 임맥을 자극시켜주면 됩니다.
아무리 유명한 한의사를 찾아가도 실제적인 경락과 심리적인 특성을 결부시켜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환자의 특성에 맞춰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많은 방황과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한방의 새로운 접근방법을 찾게 될 것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D大 P교수님과 제가 학교 다닐 때 함게 하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히프가 커서 '오리 궁둥이'란 별명을 가졌는데,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해요. 그저 자고 쉬는 것만을 좋아합니다. 이런 분들은 陰德이 있습니다. 인내심이 강하고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반면 머리가 크고 몸통이 작은 사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陽的인 사람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크고, 陰的인 사람은 몸집에 비해 머리가 작습니다. 독맥과 임맥으로 표현되는 이 두 특성은 기본적인 마음의 어떤 긍정적인 상태와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함을 알아야 합니다.
周易이 경락으로 있음을 一 乾天, 二 兌澤, 三 離火, 四 震雷, 五 巽風, 六 坎水, 七 艮山, 八 坤地, 任脈・督脈의 예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방이란 참 오묘한 학문입니다. 환자를 보고 "임맥을 補해야겠군", 혹은 "독맥을 瀉해야겠어" 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臟腑상태라든가 觀形察色도 했겠지만 그 환자의 성격이 어떻겠구나를 간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七情의 浮沈을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환자가 오면 그 환자의 긍정적인 차원과 부정적인 차원,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남을 위주로 생각하는가, 욕심이 많은가, 분노가 많은가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체내의 經脈이 서로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상대성이란 곧 우리 마음의 상대성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성을 예민하게 관찰해야 각 경락이 지닌 특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육은 거의 주입식 교육이지요. 자신의 알고 있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형식인데 저는 그런 식으로 교육시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본래 갖고 있는 것을 재확인하고, 확대 해석을 통해서 보다 큰 눈[目]을 뜨고 올바른 길을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의 기쁨과 슬픔, 긍정과 부정, 적극과 소극... 들을 觀해야 임맥과 독맥을 깊이 인식할 수 있듯 여러분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의 상태까지, 그 갈등의 작은 부스러기까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바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함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陰陽・四象・八卦・五行의 움직임과 六經을 이야기 했고, 특히 六經의 상관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직관을 터득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병이란 엄청나게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黃帝內經"을 보면, '가까운 것을 빌어 먼 것을 얘기하고, 안을 터득해서 바깥을 안다. 몸 가까운 일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으면 신변에서 먼 일까지 반드시 추리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긍정과 부정은 天地問題이고, 나와 너는 氣血問題이므로 이러한 상태의 에너지를 잘 관찰하면 임맥, 독맥이 갖는 병환까지도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든 것은 모두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공부를 자기 관찰없이 남의 이론만 등장 시켜서 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內經"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뛰어난 학술을 이용하는 자는 점점 번영하고, 경멸하여 돌아보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 학술의 정도로 가지 않고 억측을 멋대로 하여 엉터리 학술을 논하는 자는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다' 라는 경고를 "內經"은 여러 차례하고 있습니다. '사물의 첫머리를 알면 끝도 완전하고 명백하게 察知할 수 있다' 사물의 첫머리란 사물을 볼 때 일어나는 여러분들의 인식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요 마음입니다. '이러한 정연한 조리를 가미하되 빠진 것 없이 영원히 보존토록 하라' 고 학문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경희 학회지 "醫仁"에 '東洋醫學革命小考'란 제목 하에 한의학의 문제점을 제시해 놓았는데 여러분이 그 내용을 참조해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속의 내용을 한 마디 인용해 보면 '건강한 동양의학자라면 "本草綱目"에 없는 국내 처음으로 수입된 약초라도 그 성분을 알아낼 수 있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엔 건강한 동양의학자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입이 쓰디쓴 담배 골초에서 맛을 보라고 한다면 (감별하라고 한다면) 문제가 있겠지요. 맛을 제대로 본 후에라야 무슨 경락에 入經하겠는가를 알아 낼 수 있겠지요.
"方藥合編"의 구성은, 맨 윗편은 본초에 대한 지식, 上統은 補하는 약, 中統은 和解하는 약, 下統은 瀉하거나 치는 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령 杏林書院版 182페이지 136번 附子를 보면 附子의 藥性, 歸經 등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설사약은 설사시키는 약 입니까, 설사를 멎게 하는 약 입니까? 후자지요. 해열제는 열을 식히는 약인데 약성이 덥겠어요? 차겠어요? 이것은 어린아이 같은 질문이지만 六經은 이렇게 쉬운 논리로 추론해 들어갑니다. 두통은 주로 火熱에 의한 것이므로 두통약의 성분은 차겠지요? 두통약의 70%정도는 차가운 성분이라는 것이 우리 한방의 추리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頭無冷痛, 腹無熱痛', '머리는 차가와서 아픈 법이 없고, 배는 뜨거워서 아픈 법이 없다' 이건 치료의 대원칙입니다. 이번엔 利尿劑를 봅시다. 이뇨제는 맛이 어떨까요? 담담하지요. 그러면 왜 이뇨제의 맛이 담담할까요? 이론상 淡味는 行氣시키고 利한다고 하지요. 木通・澤瀉・車前子・燈心 등 일체의 이뇨제는 그 맛이 담담합니다. 그런데 같은 이뇨제라 해도 車前子는 몸이 허한 사람의 몸기운을 깎지 않고 이뇨를 시키고 싶을 때 쓰고, 木通은 성분이 강하기 때문에 좀 건강한 사람에게 쓰는 겁니다. 淡味가 行氣시키고 利尿시키는 작용이 있지만 그저 淡味 하나로만 외워서는 곤란합니다. 그 담담한 맛중에서도 輕重을 가릴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附子를 먹으면 몸이 더워진다는데 그렇다면 厥陰・少陰・太陰・少陽・陽明・太陽의 六經 중 어디로 들어가겠습니까? 少陰 또는 少陽으로 들어갑니다. "方藥合編"에서 附子의 藥性을 보면 (手少陰命門三焦也... )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命門, 三焦는 少陽입니다. 이렇게 附子는 少陰經과 少陽經으로 들어가므로 몸을 덥게 하는 성질을 가진 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少陰經으로도 들고 厥陰經으로도 든다면 이건 덥기도 하고 風氣도 있겠구나 하고 추리할 수 있지요. 어떤 약의 약성이 시큼하기도 하고, 짜기도 덥기도 한데다, 또 甘味도 있다면 4가지 경락에 들어가겠지요. 神農氏의 혀와 오늘날 건강한 우리의 혀와 다르지 않을텐데 우리 왜 이런 것을 추리하지 못하는가? 그 까닭은 六經과 四象이 기본적으로 이해되지 못한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것은 手太陽小腸經으로 들어가고, 어떤 것은 手太陽과 足太陰으로 入經하는 지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며, 氣와 味와 性이 그 경락의 성질과 어떻게 유사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약은 藥性이 冷한데도 少陰經으로 들어간다고 해 놓은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경락을 치료한다는 뜻으로 붙여 놓은 것인데 "本草綱目"에도 잘 설명을 못하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잘 새겨 들어야 합니다. 少陰經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少陰經絡을 치료한다는 말입니다. 즉 해열제나 설사약이라는 말은 똑같습니다.
고전의 내용을 풀이하다보면 난해한 부분이 많은데, '醫者는 醫也라' 의사는 그 뜻을 얻어야지 문자에만 매달리면 참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네 부모형제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했고 한편으로는 "네 부모를 하느님같이 공경하라"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二律背反的이라고 비판합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성전에서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오니까 "저 여자가 누구냐?"라고 했어요. 그러자 어느 신학자가 예수님을 불효자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근시안입니다. 이런 것을 방편설이라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방편설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상황을 접함에 觀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 때의 상황을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방편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만은 겸손으로 치고, 너무 열등감에 젖어 있는 사람에겐 자신감을 넣어주는 식으로 상황에 따라 방편을 달리해야 하는데 하나는 攝受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折伏하는 방법입니다. 받아들일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실한 건 깎아주고 虛한 것은 補해 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날카로와서 치고 부수는 특징이 있고 또 한 사람은 너무 온후하고 나약해서 남을 살리되 자신을 죽인다면 이 두 사람은 모두 결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無有定法이 佛法이라'했습니다. 일정한 법이 없음이 깨달은 자의 법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의 법은 단지 불법만으로 제한되지 않고 "黃帝內經"의 법도 되는 것입니다. 세상사에 일정한 법이란 없습니다. 더운 것은 차게, 찬 것은 덥게, 또는이열치열도 있습니다. 산에 불이 났는데 오히려 다른 쪽에 불을 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일정한 법이 없음을 앎이 바로 깨달은 자의 모습입니다. 太陽經이다, 少陽經, 혹은 厥陰經이다 하는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동의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의학의 기본철학적 구조는 인생을 유쾌하게 사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유태인의 상술을 보고, "당신은 일하기 위해 먹는 거요. 아니면 먹기위해 일하는 거요?" 하고 질문을 하면, 유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먹기 위해서 일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지요. 식사 중에라도 책이나 서류를 봐야할 때가 있는가 하면, 식사를 마치자 마자 소화도 되기 전에 책상에 앉기도 하고, 마치 쫓기듯이 허겁지겁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태인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식사는 유유하게. 한두어시간씩 즐깁니다. 여러분은 먹기 위해 공부하십니까? 공부하기 위해 먹습니까? 공연히 의무감 속에서 공부하지는 마세요. 학문 그 자체가 즐거워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엔 학점도 없고, 아무런 권위의식도 없고 시험의 공포도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찾아온 이 기백은 일단 학문하는 태도에서는 100점입니다. 그만큼 학문하는 태도는 즐거워야 합니다. 세상 고민을 다 짊어진 듯한 의연하지 못한 학문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Copyright(C) 2001 Sa-Am non-profit Acupuncture Service All rights reserved.
http://www.saam.net/saamacu/revolution/rev4-4.htm
4. 오운 육기
4.
내가 "음양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음양이란 "黃帝內經"에는 어떻게 씌어 있고, "醫學入門"에는 어떻고, 어떤 책에는 어떻고... 지금은 말들이 너무 어려워요. 또 너무 현학적입니다. 어렵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용어의 난해성을 즐기려는 태도, 高踏적인 모우션 등은 학자적인 생의 괴로움만을 연출합니다. 고인들의 교수방법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와 일화 등은 진리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재치 넘치는 이야기지요. 사라져 가는 교수방법의 개발은 매우 시급합니다. 동양학이 재미 없는 학문이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쉬운 전달 방법을 찾지 않는 가르침은 교사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선 음양과 사랑에 관한 여러분들의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단편적이나마 東西洋의 견해를 레이 탄나힐 여사의 "성의 역사(Sex in history)"라는 저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중국편
중국에서는 음양이 서로 조화를 이룬 상태를 道라고 일컬었다. 도의 개념을 중심으로 발전된 철학이 道敎이다. 도교 사상가들은 인위적으로 짜여진 인간사회에 속박되지 않고 자연과 완전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장수와 행복, 심지어 永生까지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간은 각자의 존재 속에서 자연 속의 음양 조화와 같은 조화를 자기속으로 이룩해야 하며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로 접촉하고 서로 흡입함으로써 음양의 두 요체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두 힘인 음과 양은 여러 자연현상 속에서 볼 수 있다. 달과 겨울은 음이고, 해와 여름은 양이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여자는 완전한 음이 아니라 '少陰'이며 남자 또한 완전한 양이 아니라 '少陽'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서방에서는 물론 중국에서도 여러가지 오해가 퍼져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가장 수동적인 여자에게도 양의 요소가 있고 가장 능동적인 남자에게도 음의 요소가 있다는 심리적 측면의 진리를 인식한데서 나온 결론이었다.) 남녀 다같이 이 보조적인 요소가 원래적 요소를 보완하고 강화한다는 생각은 도교와 성에 관한 중국인들의 모든 사고를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인도편
카마수트라(Kama sutra 인도말로 Kama는 사랑을 뜻하고 Sutra는 경전을 뜻하는 말로 인도의 성에 대한 경전이다)에서 사용된 '사랑'이란 단어는 한숨과 그리움, 요염, 가짜 열정, 또는 오비디우스에서처럼 호색적인 거래를 위한 계산된 책략같은 게 아니었다. 뭔가 그 이상의 거창한 것이었다. 철인 바챠야나(카마수트라를 편찬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는 분명히 오묘한 감정의 뒤얽힘도 인정하긴 했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가 사랑이란 말 속에서 남녀간의 화학적인 반응을 인식했다. 그 반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신경을 몽땅 사로잡아 그 밖의 것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를 뜻했다. 그것은 사랑을 할 때는 언제나 일어나는 현상일 뿐만 아니라 사랑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었다. 이 철인은 성교본을 써가는 도중에도 이른바 어떤 규칙이란 게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여러번 강조했다. 그는 또 아내가 갖추어야 할 조건을 떠나서 남자는 반드시 '사랑받는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걸 지적했다(3장 1절). 카마수트라는 연인들에게 등급을 따지지 말라고 건의하면서도 사랑 자체를 분류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랑을 만족할 만큼 분류하지는 못했다. 카마수트라에 따르면 사랑에는 4개의 유형이 있었다. 우선 성교만을 목적으로하는 단순한 사랑, 이는 습관이나 약물과 같은것으로 도박군이 도박을 사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다음엔 키스 포옹 구강섹스처럼 특정 행위에만 집착하는 사랑이 있다. 다음엔 두 사람이 자석처럼 서로 이끌리는 사랑, 이것은 본능적이고 자발적이며 소유적이다. 마지막으로 상대의 아름다움에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일방적인 사랑이 있다(2장 1절).
유럽편
유럽궁정식 사랑의 대표적인 인물로 길뎀(Guilhem)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서방기독교권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다. 그는 아랍의 영향을 받은 스페인의 연애시와 사랑의 철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관능과 유혹적인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에 그것을 깊이 고민하면서 그 문제에 대한 숙고의 결과를 시로 표현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사랑은 굴종이 아니라 의기의 고양이요, 더러운 죄악이 아니라 신성한 신비요, 사랑의 선물을 받은 귀부인은 찬양받아야 할 여신'이라고 했다. 몇몇 학자들은 그의 이같은 관점의 변화에서 빈정댄 듯한 편의주의의 낌새를 배제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쨌든 마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
성문제에 대한 이런 불확실성은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복합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자주 논란이 되고 있지만 성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시기는 풍요를 구가하는 시대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목적을 갖지 못하는 시기임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성이 지나치게 중요시되던 때는, 더 이상 정복할 곳이 없어진 국가의 '황금시기'였다. 로마제국 굽타제국 중국의 청대 루이 14세 때의 프랑스 영국의 후기 빅토리아기가 그 예이다. 그런 한가한 시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성적인 데로 쏠리게 되면 어떤 이들은 그것이 도덕적인 타락의 징조라고 개탄한다. 많은 사람들은 성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때로는 전부인 양 행동하기도 한다. 그리고 20세기가 되면서, 역사상 최초로 나타난 매스컴의 영향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東西洋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음양에 대한 인식을 고찰해 보았습니다. 결코 어려운 문구로 된 심오한 사상이라든가 논리가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습관 풍습 등이 진실을 이해하는데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여러분들에게 간략히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평범하고 통속적이랄수도 있는 이런 생활사에서 인생의 진실을 캐기 위해서는 직관의 개발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직관의 개발을 위해서는 예화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음양관을 배울 때 굉장히 어렵지요? 相生이 어떻고 相克이 어떻고 하는 것은 순전히 말장난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개인적으로 선생님을 찾아 공부할 때는 그러질 않았습니다. 약간은 고지식하게 설명하시더군요. "선생님, 滑石이 왜 변비에 좋고, 또 애기를 낙태시킵니까?" 하고 학생이 질문을 하자, "먹어봐, 만져봐, 미끌미끌 하잖아. 지가 어디로 가겠어? 大腸에서 활동을 잘 할 것아냐, 그러니까 매끄러울 滑자를 쓴 거 아냐? 고인들이 미쳤다고 미끄러울 滑자를 썼겠어?" 그러자 학생들은 그 말을 들으며 "어휴! 저러니까 한방이 개화가 안되고 시대에 뒤진다고 하지"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유기화학시간처럼 C.H.O가 어떻고 이렇게 육각형(벤젠고리)도 그려넣고 했으면 여러분들은 귀가 솔깃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 무얼 하자는 이야기입니까? 이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탄소원소와 금강석의 원소는 똑 같습니다. 원소가 같은 것이라 성분이 밝혀지는 것(다 밝힐 수도 없지만)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겐 실험・분석 기구보다 더 뛰어난 눈・코・귀・입 그리고 직관이 있습니다. 컴퓨터가 아무리 뛰어나도 사람보다는 못합니다. 직관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의 순진무구한 눈, 생각 이전의 消息, 깨어 있는 마음, 지식이 개재되지 않은 마음, 공포나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 마음, 미래의 희망에 들뜨지 않는 마음, 겸손한 마음, 교만하지 않은 마음...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기화학식으로 설명을 해주면 잘 아는 것처럼 인식이 되고, "먹어봐! 매끌매끌 하잖아. 그런데 애기가 안 나오겠어?"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우습게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옛날 선생님의 그러한 설명들이 한 10년 뒤에는 이해가 가더군요. 단순한 논리이지만 이렇게 인생의 진리가 숨어있는 예화를 많이 들으면 차차 심오한 음양 감각에 익숙해집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許浚(조선 중기의 한의학자이며 선조때의 전의. 선조의 명으로 의서 편찬에 착수 광해군2년(1610) "동의보감"25권을 완성. 이 책은 동양 최대의 의학서로서 당시 일본 중국에서도 널리 익힘)선생님은 말년에 낚시를 좋아했습니다. 그 분이 살생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향토에 있는 약초를 발굴하기 위해서 낚시를 핑계로 전국을 돌아다녔지요. 하루는 제자를 데리고 수원근처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 사이에 명의가 왔다고 소문이 좌악 퍼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낚시에 바늘도 달지 않고 음풍농월을 즐기거든요. 여러분! 허준선생님을 가볍게 생각지 마십시오. 그 분은 도인이셨습니다. 그 유명한 "東醫寶鑑"을 저술하시면서도 옛 사람의 말을 한가지라도 바꾼 것이 있습니까? 한 마디도 바꾼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보니까 옛 사람의 표현방식이 딱 맞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허준 선생이 있던 수원 근처의 낚시터로 어떤 부인이 시름에 찬 얼굴로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참 용하시다는데 제 소원을 좀 들어 주십시오" "무엇이오?"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애기가 없는데 애기를 가질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자 선생은 그 여인을 한 번 쓱 보더니 "이슬을 하루 한되씩 100일 동안 잡수시오" 그랬거든요. 그래서 그 여인은 100일 동안 이슬을 먹고 난 10개월 후 애기를 낳았습니다. 임신 못하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슬을 먹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임신을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허준 선생이 전국을 한 바퀴 돌다가 그 동네를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임신 못한 아낙네들이 몰려와서 "아니, 선생님! 우리는 왜 임신을 못합니까? 선생님 처방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허준 선생이 "무슨 이슬을 잡수셨소?" 하고 물으니 "애기 낳는게 제 소원이라 새벽이슬을 먹었습니다" "그럼 새벽 이슬을 잡수셨단 말이오?" "네 물론입니다" "저녁이슬을 잡수셔야지 새벽이슬은 안됩니다"라고 점잖게 말하고 되돌아 갔습니다. 이런 걸 우화라고 합니다. 혹시라도 좋은 처방 배웠다고 써 먹지 마세요. 우화란 그 속에 들어 있는 비유만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새벽이슬은 풀 끝에 달렸다가 태양이 뜸으로 해서 막 발산되려는 이슬이고, 저녁에 맺힌 이슬은 하루의 생성과 성장이 모여 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임신과 그 의미가 같은 것이지요.
임신을 시키는 데에 신맛이 좋겠읍니까? 단맛이 좋겠습니까? 아직 여러분 육경의 맛에 대해 아무런 공부를 안 했지만 그냥 생각해 봐도 왠지 신맛이 적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이것을 뚱뚱한 사람에게 가르쳐주면 큰일납니다. 신[酸]맛은 거두어 들이고 매운[辛] 맛은 발산을 시키지요. 그러므로 해삼장사들이 해삼을 싱싱하게 보이게 하려고 식초를 뿌립니다. 신맛이 마른 사람에겐 좋지만 뚱뚱한 사람에게 쓰면 안되지요. 오미자가 불임병에 좋다고 하는데, 五味子나 木果 같은 신[酸] 약을 마른 사람에게 쓰는 것은 좋으나 뚱뚱한 사람에겐 조심을 해야 합니다. 濕이 많은 신맛으로 물을 더 넣어주면 큰일이지요. 뚱뚱한 사람은 물꼬를 내고 利水를 시켜 물을 빼주어야지요. 옛날에 조조가 적군에게 쫓길 때 군사들이 심한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저 산만 넘어 가면 살수(신맛)가 있다고 하자 병사들의 입안에 침이 고이게 되어 잠시 갈증을 잊고 무사히 산을 넘어 후퇴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 '韓方'입니다. 이것이 바로 '陰陽觀'이고요. 그런데 이런 것을 외우거든요. 이치만 알면 아무것도 아닌데 외워서는 결코 깨우치지 못합니다.
어느 날 허준선생에게 한 여인이 달려와서 "우리 며느리가 애기를 낳고 있는데 애기가 나오질 않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하자 이끼 낀 여울목의 돌을 한 솥 삶아서 그 물을 먹이라 했지요. 그랬더니 글쎄 순산을 했습니다. 이걸 보고 제자가 "石室秘綠(청나라 진사탁(우경지, 호원공, 산음인)의 저서로 모두 6권으로 되어 있음. 주된 사상으로는 128법을 나누어 방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보신 보비 서간에 치중하고 있음), 傷寒論, 黃帝內經 어디에도 없는 처방인데 어찌 제겐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까?" 하자, "너에게 수없이 가르쳐 주었건만 네가 觀이 없어서 스스로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라며 꾸짖으셨다 합니다. 또 한 여인이 달려와서 "선생님 우리 며느리도 애가 나오지 않습니다"고 하자 그 집에 가서 산모를 보더니 "이것 참 큰일났군"하고는 산모의 머리채를 풀어서 입에다 넣었어요 그러자 여인이 구토를 하더니 또한 순산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무턱대고 이렇게 따라 하면 큰일 납니다.
앞의 부인은 羊水不足(요즘 말로는 早期破水)이므로 빠르게 흐르는 여울목에 낀 이끼(매끄러움의 극치)의 매끄러운 성분을 썼던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산모의 腹壓不足이므로 구토법을 썼던 것입니다. 첫번째 것은 양의사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두번째에 대해선 아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方藥合編" 下統 82번에 禹功散이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不拘時腹 小時以鷄翎探吐痰之...' '닭 깃으로 목구멍 담을 뒤져서 催吐시켜라'라고 씌어있지요(禹功散의 상세한 내용은 뒤에서 다룸). 인체는 마치 管처럼 되어 있어서 위를 뚫어주면 아래로 나오게 되어 있지요. 옛 사람들은 이 자연의 이치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대롱에 물을 넣고 위를 막으면 물이 밑으로 나오지 않지만, 위를 열어주면 대롱 속의 물이 주르르 흐르거든요. 그래서 옛날 서양산부인과 의사들 가방에는 언제나 닭털(구토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 변비에 걸렸을 때 우리 인체의 맨 위에 있는 百會穴에 침을 놓는 것이나 설사를 할 때 百會穴에 뜸을 뜨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바둑을 둘 때의 병법이 환자들 치료하는 방법과 유사한 것이 많습니다. '貪不得勝(탐욕하면 이길 수 없다)'라는 말처럼, 병을 고치겠다고 너무 욕심을 내면 병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의 경계에 들어갈 때에는 완만하게 들어 가라' 라는 것도 있습니다. 중병이라고 하여 처음부터 약을 너무 강하게 쓰면 안됩니다. 약은 서서히 써야 됩니다. 열병에 大黃이나 芒硝 같은 약을 조심없이 쓰면 마구 타오르는 불에 어설프게 물을 잘못 붓는 격이 되므로 薰氣가 올라서 죽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을 치료하는 데는 작전이 필요합니다. 암을 치료할 때, 암 세력이 강한데 무조건 이기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적당하게 조화를 시켜줘야 합니다. 사소한 병이 중병으로 되기까지에는 하루 이틀 걸렸겠어요? 손자병법에도 '적의 10배가 되면 공격하여 죽이고, 두 배면 시기를 보고, 적과 비슷하면 화해하고, 적보다 수효가 적으면 도망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36계 줄행랑은 손자병법의 맨 마지막에 있는 방법입니다. 못고치는 병은 못고치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다 고치겠다는 욕심은 금물입니다.
맛(酸・苦・甘・辛・鹹)과 소리 (宮・商・角・徵・羽)와 형상이 六經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한 나라 언어의 성조를 듣거나, 노래를 듣거나, 어떤 사람의 행동상의 특징을 미루어, 각기 어떠 어떠한 기운(어떤 경락)이 많이 작용하고 있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군가와 사랑노래, 교가가 각기 다른 분위기인 것은 각기 가진 기나 기운의 종류와 강약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수의 노랫소리만 들어도 '음~ 당신은 어떤 기운이 강하겠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의사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동양의학자입니다. 이렇듯 약초의 맛, 냄새를 딱 보고서 추리할 수 있고, 목소리를 듣거나 형상, 모습을 보고서도 알 수 있는 추리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오운과 육기가 혼합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달마대사(중국 선종의 초조. 남인도 향지국왕의 셋째아들로 본명은 보데다라. 520년(양나라 보통1년) 중국으로 건너와 소림사에서 면벽9년하고 2조인 혜가에게 법을 전한 뒤 영안1년의 10월 5일에 입적함. 당나라 대종이 원각대사라고 시호를 내림.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보리달마"라 불림)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외부에 있는 일체의 모든 인연을 쉬고 (外息諸緣)
안으로 헐떡거리는 마음을 쉬어라.(內心無喘)
마음이 마치 장벽과 같이 단단하면(心如墻壁)
가히 도로 들어간다.(可以入道)
Copyright(C) 2001 Sa-Am non-profit Acupuncture Service All rights reserved.
http://www.saam.net/saamacu/revolution/rev4-5.htm
4. 오운 육기
5.
여러분들은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찌 道를 닦지 않는지요. 몇가지 잔꾀만 부려가지고 인간을 간파할 수가 있을까요? 옛말에 '추운 겨울을 나지 않으면 매화 향기가 코를 찌르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일체의 인연을 일단 쉬라는 얘기입니다. "黃帝內經"한 페이지를 품고 입산을 한다든가 스승을 구하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는 이런 최소한의 구도심은 있어야 합니다. 어쩌다 로맨스 영화를 보면 주르르 눈물을 흘리고, 키스신에선 가슴이 쿵쿵 거리고, 조금만 잘생긴 남자를 보면 좋아 어쩔 줄을 모르고, 어깨라도 슬며시 만지면 그저 좋아하는 여자들이나, 조금 반반한 여자가 끼어들어도 친구의 의리를 저버리는 남자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런 말법시대에 道를 모르거든 德이라도 길러 남에게 베풀라고 제 사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의리가 없으면 교활하긴 하나 지식이라도 길러라. 지식이 없으면 순종이라도 할 줄 알아라... " 道에 뜻을 둔 사람은 그 뜻이 마치 산과 같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단단히 뜻을 세워 쉬는 사이 없이 정진을 하면 어느 순간 한 생각이 확 트이면서 膽이 시원하게 뚫리게 됩니다.
"당신은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고 받는 법칙은 삶에 있어서 변치 않는 하나의 길이 된다. 태양이 당신에게 생명을 주고 있는 것처럼 당신은 다른 길에서 태양에게 생명을 주어야 할 지도 모른다"
라고 라즈니쉬는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태양에게 뭘 주고 있는지를 모르듯이 여러분의 사소한 재채기 한 번이 저 우주에 있는 어떤 별의 운명을 변화시킬지도 모릅니다.
"만물은 서로 관련이 되어 있다. 사람은 달의 먹이이다 라는 말은 그 속에 진리를 품고 있다. 보름달은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사람의 감정을 압도하므로, 인간의 자각을 먹이로 한다. 자각을 보름달에게 뺏긴 사람은 보름달에 대한 열정과 열광으로 반쯤 미치광이가 되기 때문이다. 보름에 바닷물이 거칠어지듯, 70% 이상이 물이며, 바닷물과 같은 염분 비율을 가진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 열정을 갖게 됨을 당연하다"
시인은 보름밤에 더욱 아름다운 시를 노래하고, 연인은 더 한층 낭만적이 됩니다. 옛날에 여자들이 남자들을 유혹하여 동침을 요구할 때 "달이 오늘 참 밝지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달의 주기와 감성리듬의 주기, 여성의 생리주기가 28일로 같음과 상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과를 먹는다. 어느날은 사과나무가 우리 육체를 먹을 것이다. 당신의 육체는 비료가 될 것이다. 당신이 사과를 먹고 있을때 그 사과속에 당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 어느날은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을 먹을 것이다. 모든 것은 관련되어 있다. 이 관련되어 있음에 도라는 말이 뜻하는 어떤 것이 있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Ego는 불합리하다. 오로지 전체성으로만이 나를 말할 수 있다. 부분들로 나를 말 할 수는 없다. 만일 부분들로 나를 말하려 한다면 그것은 단지 언어적인 형식에 불과하다. 그 부분들은 결코 나를 표현하지 못한다.... "
이렇듯 여러분들 현재의 모든 상황은 먹고 먹히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모든 종교가 침략적, 남성적임에 반해서 도는 실로 여성적이며 묵종적이다. 기억하라, 진리는 여성적인 자각의 상태에 있을 때만이 온다. 당신은 진리를 정복할 수가 없다. 진리를 정복하려는 생각조차도 어리석다. 부분이 어떻게 전체를 정복하겠는가? 부분은 단지 허락될 뿐이다. 집착으로 인해 그릇된 개념을 갖게 된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당신에게 진리가 허락되어 들어가는 것조차 막히게 된다"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의 우화가 있습니다.
제비들이 가을날 남쪽으로 날아가자, 모든 짐승들은 제비와 남쪽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도 내년에는 남쪽으로 가야지!' 하고 암탉들도 회의를 했습니다. 이듬해, 제비가 남쪽으로 떠날 때 암탉 한마리가 그 뒤를 따라서 양계장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계속 달렸습니다. 며칠 후, 남쪽으로 떠났던 암탉이 돌아왔습니다. 많은 차들, 넓고 긴 도로, 사람들의 무리와 마을 등을 자기가 본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야! 굉장하구나" 다른 닭들은 그 암탉을 부러워하며 숭배했습니다. 이듬해 쯤 남쪽에서 다시 제비가 돌아왔을 때, 남쪽 바다와 따사로운 햇볕을 이야기 하는 제비들을 암탉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암탉의 주장은 정당했습니다. 자기로서는 갈 수 있는데까지 가다가 지쳐서 돌아오기까지 본 것들을 주장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암탉은 결국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 밖으로 나가보질 못했던 것입니다.
지식은 한 마리의 암탉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남쪽을 좀 안다고 폼 잡고 다닌 암탉에 불과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장자의 제자들이 모여서 '장자가 죽으면 어떻게 할까' 의논을 한 끝에 땅 위에 두면 짐승이나 새의 밥이 될 것이므로 땅 속 깊이 묻기로 결정을 보았답니다. 이 말을 들은 장자가 깔깔 웃으며 "야! 이 미친놈들아, 네 놈들 지금까지 엉터리로 공부했구나. 땅속에 묻으면 구더기의 밥이 되지 않겠느냐? 이놈들 헛공부했구나" 이렇게 꾸짖었답니다. 우리도 죽으면 먹이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지식은 한 마리 암탉처럼 멀리 가지 못합니다. 암탉은 자기가 본 것이 남쪽의 전부인 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남쪽으로 멀리 갈 이유가 없고, 또 불가능 합니다. 남쪽을 전혀 몰랐다면 모험심이라도 있을텐데, 그 앎이 방해가 되어 평생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지식을 버려라! 그렇게 하더라도 당신은 잃는 것이 없다' 여러분! 아는 것을 다 버리세요. '그렇게해도 당신은 그저 당신의 허위만 앓을 따름이다. 그리하면 당신은 아주 남쪽까지 갈 수 있다. 비로소 당신의 원천인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질 것이다' 우리는 지식을 죽여야 합니다. 道는 죽음과 동시에 출발하는 것입니다. 한 번 죽기 전에는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지식과 이론은 물론이고 여러분이 가진 허위와 Ego 이 모든 것으로부터 풀려나야 합니다. 이것이 "黃帝內經"의 본 뜻입니다. 정원에 독초와 돌이 무성한데 아무리 좋은 꽃을 심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서양인이 찾아와서 주역을 묻는데, "어떠어떠한 卦가 있는데 그 卦가 그 다음엔 어떻게 변합니까?"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64卦 어느 것으로도 변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변하는 법칙이 있지 않겠느냐?" 하고 반문하더군요. 서양사람들 사고방식이 매사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배가 고프다면 어느 쪽이든 배를 불릴 수 있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陽明에서 太陰으로 갈 수가 있지요. 그런데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은 주지 않고 자꾸 약을 올린다면 陽明之氣에서 少陽之氣로 변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술을 오래 두면 식초가 됩니다. 이것은 少陰君火가 厥陰으로 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식초를 오래 두면 다시 술이 됩니까? 안되지요. 厥陰이 少陰으로 변한다고 외우신 분들! 아시겠어요? 十干이나 十二支나 이런 모든 것은 하나의 양상일 뿐입니다. 외우면 안됩니다.
舍岩針法의 五兪穴을 외웠다 하더라도 모든 치료가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手陽明大腸經의 예를 보면, 手陽明大腸經은 건조하면서 차게하는 힘이 있지요. 몸이 덥지 않은 환자의 陽谷, 陽谿를 瀉하게 되면 몸이 너무 冷해질 수도 있으므로 이 때는 이 穴을 뺄 수도 있습니다. 암기해서 될 것 같으면 전 여러분들에게 이 내용의 99.9%를 가르쳐드릴 수 있습니다만 公案法, 五運六氣, 唯心的 안내 등을 다 동원해도 겨우 3%밖에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라즈니쉬의 말을 전합니다.
"죽음! 죽음에서 당신은 경계가 흐려지고 죽음에서 당신은 사라진다. 죽음에서 비로소 Ego는 녹는다. 죽음에서 마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서 비본질적인 모든 것이 사라진다.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道가 무엇인지, 길이 없는 길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믿음과 사랑도 죽음의 길이며, 기도와 명상과 같은 학문 또한 죽음의 길이다. 명상은 자발적인 죽음이다. 죽음은 삶의 절정, 가장 높은 오르가즘이다. 당신은 절정을 섹스의 봉우리로만 안다. 그러나 섹스의 봉우리는 히말라야의 가장 낮은 봉우리에 불과하다. 섹스는 가장 낮은 출발이나 죽음은 가장 높은 정상이다. 서양의 심리학은 성을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동양의 심리학, 붓다의 심리학, 모든 동양의 도인들의 심리학은 죽음을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서양은 이제 겨우 성을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동양은 아예 죽음을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차원이 이렇게 다릅니다.
"죽음을 이해함으로써 당신은 의식적으로 죽을 수가 있다. 만일 당신이 의식적으로 죽을 수 있다면 당신은 그때마다 새로이 탄생할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은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리하여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 속으로 거듭 되돌려지지 않는다. 당신이 깨닫기만 하면... "
이건 멋진 시와 같은 말입니다. 몇 가지 외웠다고 하는 하나의 교활한 Ego, 몇 가지 성취감 속에서 남을 굽어보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죽음과 명상적 차원의 도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周易卦象의 6가지 감정적인 배경을 공부하는 것 이외에, 64卦가 서로 부딪치는 것까지는 제게 강의할 실력도 없을 뿐더러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64卦는 여러분 각자 그것의 의미를 열심히 공부하면 알게 될 겁니다. 周易卦象은 항상 두 가지가 복합이 된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그 복합적인 상황은 곧 '全體'를 알기 위한 상황 설정이지요. 그런데 전체에 접근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상황 중 어느 하나에도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음운학적인 예를 들어 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는 상대방의 말을 해석해서 그 뜻을 이해해야 하는 것과 별 다른 해석적인 의미는 없으나 긍정 혹은 부정의 뉘앙스를 가진 언어가 있습니다. 반가움의 인사를 나눌 때 "야... ! 너 참 오랜만이다"라고 하지, "우... ! 너 참 오랜만이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야구경기를 볼 때 '우(부정적인 의미)... '라는 비난과 야유의 환성은 질러도, '아아... ', '어... '하고 야유하지는 않지요. "아! 그렇군" 할때와 같이 '아'가 긍정음이라면 '우'는 부정음입니다. 그런데 '아'와 '우'의 중간적인 의미의 음은 무엇일까요? 가령, "저하고 오는 토요일 데이트를 좀 해주시겠어요?" 라고 물을 때 긍정적이면 "아! 좋아요" 부정적일 때는 "에이! 집에 일이 있는데..."라고 하지만, "음... 생각해 보겠어요" 할 때의 '음-- --'은 중간적인 의미의 음이지요. 이것을 中央土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음양공부를 현장에서 그것의 증거를 보고 있는 것이지 결코 이론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 '는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므로 陰에 해당합니다. 물론 '우... '는 陽이 되겠지요. 동물울음 소리에 '口'가 많이 들어가는 동물이 있다면 그 동물은 어떤 성질이 많을까요? 틀림없이 中央土적인 기운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소는 생각이 아무리 많아도 좋다 싫다 말 한 마디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와 '우'와 '음'이 세 음을 합하면 어떤 음이 되겠습니까? '옴'이란 소리가 됩니다. 인도 브라만교에서는 우주전체의 소리만 오직 읊어라. 다른 명상 법 없이 온 종일 '옴'만 읊는 옴 명상법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자기 자신이 우주 전체가 되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우리 주위에 보면, 어떤 말이든 긍정하는 사람과 또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모두 우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中央土가 너무 발달하여 너무 오래 생각하는 사람, 또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중간에 머물러도 안되고, 긍정이나 부정에 너무 치우쳐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道란 그저 왔다갔다 하는 흐름입니다. 찼다 기울었다 하는 하늘의 달도 도라 할 수 있겠지요.
곡예사들이 줄타기를 할 때 좌나 우로 흔들리지 않고는 중심을 잡을 수가 없지요. 좌나 우로 조금씩 흔들면서 중심을 찾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흠! 나는 여기와서 명상을 공부하고 道를 배웠으니까 앞으로는 화도 안내고 좋고 싫음도 없도록 해야지" 이런 무식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나는 똥 누기 싫으니까 먹지도 않을꺼야!" 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잘 먹고 잘 살 생각을 해야지요. 여러분! 화도 내고 욕심도 내세요. 단 마음의 양면성을 깨어서 이해하세요. "아! 내가 지금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내 마음이 긍정적인 상태로 가는구나, 혹은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런 것을 깨어서 읽고 또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만 인정하지 말고, 내게도 이렇게 미워하는 마음이 있구나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 사람을 우둔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 여름철 매미소리를 듣고 매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는 다른 곤충의 소리를 듣고도 그 곤충의 성질이 어떠하리라고 이내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같은 종류인 까마귀와 까치를 보세요. 그것들의 울음소리와 몸짓은 분명히 일관성이 있습니다(까마귀는 소리와 몸짓 둘 다 느리고 음흉, 까치는 그 반대)
五行상 五音으로 宮・商・角・徵・羽가 있지요. 한글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는 열심히 발음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전 음을 발음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반치음, 중간음 등은 없애버렸고, 또 ㅆ, ㄲ, ㅉ 등으로 경화되어가고 있는데, 본래 한글이 가졌던 양적인 音, 음적인 音, 중간음을 다 발음하다 보면 전체적인 인간성으로 승화되는 수행자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불란서 사람들은 비음을 많이 내는데 비음이 가진 우울성이 그들에겐 있습니다. 가나문자에는 강한 음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일본인의 성품을 알 수 있음은 물론, 그 강한 음이 어떠한 경락의 활동을 특별하게 하는 것인지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란 국가는 아주 흥망성쇠가 심합니다.
전체적인 음운을 개발해 낸 문자는 우리 한글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도 도가 아니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周易卦도 마찬가지로 어떤 卦라도 전체를 깨달으면 吉한 것입니다. 凶한 卦가 어디 있고 吉한 卦가 어디 있겠습니까. 周易을 읽어보세요. '아무리 凶한 卦도 元亨利貞하면 길하리라'라고 씌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天火同人이라는 이 卦는 '하늘과 불이 만나면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는 것이 이롭다. 元亨利貞하면 길하리라'라고 씌어 있습니다.
元이란 春의 德이므로 '生'이고, 亨은 夏의 덕이므로 '長'이고, 利는 벼[禾]를 칼로 쳐서 내것을 만드는 것이므로 '收'이며, 貞은 '藏'에 해당하고, '化'는 亨과 利 사이에 들어갑니다. 무더운 여름날 숲에서 매미가 우는데 그것은 그 때밖에 울 수가 없어요(化는 계절상 長夏, 매미는 長夏에 盛함). 결국 元亨利貞이란 곧 '全體'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天과 火가 만난 이런 두 가지 상황이란 것 天火同人은 너와 나의 만남입니다. 그때 내가 어떤 상황이었고 네가 어떤 상황으로 만났는가 하는 복합적인 상황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파랑과 빨강이 만나서 보라가 되지만 보라색의 상황은 빨갛지도 파랗지도 않지요. 그러나 분명히 靑과 紅이만난 것 아닙니까? 이런 상황을 표현하려고 주역의 괘는 언제나 두 가지가 합쳐져 있는 것입니다.
天干合五行
甲・己合土…脾
乙・庚合金…肺
丙・辛合水…腎
丁・壬合木…肝
戊・癸合火…心
地合과 六經
子・午…少陰(君火)
丑・未…太陰(濕土)
寅・申…少陽(相火)
卯・酉…陽明(燥金)
辰・戌…太陽(寒水)
巳・亥…厥陰(風木)
十天干
天干 |
甲 |
乙 |
丙 |
丁 |
戊 |
己 |
庚 |
辛 |
壬 |
癸 |
五行 |
木 |
木 |
火 |
火 |
土 |
土 |
金 |
金 |
水 |
水 |
陰陽 |
+ |
- |
+ |
- |
+ |
- |
+ |
- |
+ |
- |
季節 |
春 |
夏 |
長夏 |
秋 |
冬 | |||||
方位 |
東 |
南 |
中央 |
西 |
北 |
十二地支(지지 오행 음양 계절 방위의 순)
天干 |
寅 |
卯 |
辰 |
巳 |
午 |
未 |
申 |
酉 |
戌 |
亥 |
子 |
丑 |
五行 |
木 |
木 |
土 |
火 |
火 |
土 |
金 |
金 |
土 |
水 |
水 |
土 |
陰陽 |
+ |
- |
+ |
- |
+ |
- |
+ |
- |
+ |
- |
+ |
- |
季節 |
春 |
|
夏 |
|
秋 |
|
冬 |
| ||||
方位 |
東 |
中 |
南 |
中 |
中央 |
中 |
西 |
中 |
五運六氣에서 甲子라고 하는 말 중에 甲을 가령 土라고 한다면 子는 少陰君火지요. 따라서 土와 少陰君火가 복합이 된 것이 甲子年의 이미지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이해시켜 드리고자 지금까지 여러 잡다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런 까닭에 五運六氣法은 窮理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요. 聖人들이 만들어 놓은 이러한 것을 통해서 직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단 앞의 도표는 꼭 외우십시오.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개념과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의 개념이 각기 하나씩, 둘이 되어 서로 혼합되어져서 어떤 기운을 형성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五運六氣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臟腑를 取象할 때, 이것은 추리방법입니다만 肝臟을 예로 든다면, 五行상 보는 것을 밑에다 두고, 六氣상 보는 것을 위에다 둔다 하면, 五行상 肝은 木(그릇)이고, 六氣상 厥陰風木(내용물)이 됩니다. 이것의 取象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릇은 나무요, 내용물을 바람이 흐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세요. "피리!" 예 좋습니다. 八卦 중 가령 兌卦를 소녀나 무당으로 取象하듯 肝臟을 피리로 取象하는 것은 같은 방식이지요. 오행은 形의 성쇠이고 六氣는 氣의 多少라고 했는데, 肝臟의 예를 보면 그릇은 나무(形의 성쇠), 내용물은 바람(氣의 多少)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취상에 대한 연구는, 옛날에 周易卦象을 왜 써 놓았는지 그것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한 방편입니다.
날씨가 무더운 날 방안이 무척이나 덥다고 합시다. 밖에 차가운 공기가 있다면 문을 여는 행위를 통해서 밖에 있는 찬 공기를 안으로 들여보내게 됩니다. 이 창문을 여는 행위가 오행의 補瀉法이지요. 밖에 있는 찬공기를 안으로 들여보낸다면 補가 되겠지요. 한편 방이 무더울 때 방안의 더운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어도 시원해지지 않겠습니까? 더운 공기를 내보내려고 환풍기를 돌렸다면이것은 瀉가 되겠지요. 五行과 六氣에 대해 착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중심적으로 다루는 것은 六氣的인 사고방식, 즉 내용물[質]에 대한 사고방식입니다. 위의경우 더운공기나 찬공기는 둘 다 質입니다.
"肝臟은 피리요"라는 말을, 이게 무슨 말인가 하기에 앞서 두 가지의 복합된 상황을 이야기한 것이로구나 하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잠깐 열이 나는 두 가지 상황을 알아봅시다. 하나는 少陰君火, 다른 하나는 少陽相火지요. 少陰君火는 즐거워서 일어나는 충동(火)인데 성충동과 같이 후끈 달아 올라서 (불을 일으키는 욕망이므로 欲火라고 함) 뭔가 죽이고 소멸시키는 것이지만 즐거운 욕망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것은 자기 것을 만들면서 좋아 하는데 性은 자기가 죽으면서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죽음과도 같이 내가 없어지면서 즐거워하거든요. 이렇게 불의 성품과 욕망의 성품을 동시에 갖는 少陰君火는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그런데 화가 났다거나(예:남에게 두들겨 맞았을 때) 순식간에 불끈 치밀어 오르는 火, 전광석화 같은 火, 이것을 '相火'라고 합니다. 이것이 相火와 君火의 차이점입니다(內經 五運六氣 편에는 상화를 재상과 같다고 했음). 相火와 君火를 물질적으로 표현한다면 지구와 태양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지구 안에 있는 火, 지구속 열을 君火라고 한다면 태양이 비춰 주는 火를 相火라 합니다.
우리의 생명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성적인 원동력입니다. 여러분 性을 추하다고 하지 마세요(性은 나중 少陰君火 편에서 자세히 다룸). 그것을 하나의 현상으로 솔직하게 받아들이세요. 相火는 화가 났을 때의 공격적인 열인데 이것 또한 나쁘다고 하시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잔소리 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크지 못합니다. 지구는 태양이 없으면 크지 못하고, 달걀은 어미 닭의 따뜻한 품이 없으면 크지 못합니다. 이것이 相火입니다. 생명이 들어 오는 문을 命門相火라고 하지요. 여러분을 생명력 넘치게 하는 것은 君火보다 오히려 相火일 수가 있습니다.
결국 君火의 불과 相火의 불,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인간의 미묘한 육체활동, 우주활동, 심적인 활동인 것입니다. 우주활동이나 지구활동은 너무 거창해서 모르니까 인간의 심적인 활동을 연구하면 쉽게 알 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제가 접근하는 방법이므로 이렇게 君火는 성적인 충동, 相火는 공격적인 열이라고 주로 설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臟腑의 取象은 왜 공부하는가? 臟腑가 五行상 水이고 六氣상 火인 것을 예로 들어보면, 足少陰腎이 오행상 水이고 육기상 少陰君火이지요. 그러므로 足少陰腎經에 흐르는 경락의 에너지를 이해하려고 하면 水라 하는 五行的인 배경과 少陰君火라는 六氣的인 배경을 동시에 연구한 어떤 복합적인 상황을 공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행상으로 공부하고 足少陰腎經에 흐르는 에너지를 이해했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이야기입니다. 한강물이 맑고 차가우면 太陽寒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흙탕물일 때에는 어떻게 표현해야 됩니까? 기운은 물인데 거기에 太陰濕土가 들어갔으니까 丙辛 水와 太陰濕土인 丑의 만남, 즉 丙丑이라고 표현하지요. 이것은 참으로 과학적이지요.그러나 이 표현이 그렇게 정확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한방의 어려운 점입니다.
삼강오륜의 '綱'자가 벼리 강자입니다. 그런데 벼리는 어디에 쓰이는 것입니까? 고기 잡을 때 쓰지요. 그물을 잡아당길 때 위에 하나만 잡아당기는 것을 태극에 비유한다면 그물모양이 된다. 이것들만 잡아당기면 그물 전체가 움직이게 되지요. 五運六氣法이 아무리 세밀하다 하더라도 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전체를 낱낱이 이야기 할 수는 없고 마치 이것만 잡아당기면 전체를 다 이해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욕망이 어디 세 가지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 3대 욕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3가지 벼리가 되는 것입니다. 三陰三陽이란 六綱이 되는 것입니다. 즉 6개의 벼리가 되는 거지요. 세밀한 것은 여러분들이 알아서 미루어 추측해야 합니다. 紅과 靑은 火와 木입니다. 그럼 보라색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여러분이 창조해내야 합니다. 적절한 이름을 붙이기에 달렸지요. 그러므로 여러 기발한 취상들이 나오게 되는 동기가 입체적인 접근방법으로 여러분의 상상력을 동원해보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왔는데 뚱뚱하고 성질이 급하게 생겼다 그러면 뚱뚱하니까 濕이 많을테고 그 가운데 相火가 들어가 있으니까 어떤 臟腑가 상했을까? 그러면 치료는 어떻게 해야 할 까? 이런 식으로 마치 치밀한 수사관과 같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러한 취상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느냐 해서 제가 이상한 방향으로 공부를 시켜드리는 것입니다.
足少陰腎이라 하면, 形의 성쇠인 五行과 氣의 다소인 六氣라는 관점을 공부함과 동시에 八卦도 공부하고, 유심적인 차원도 공부하는 것입니다. 腎臟을 단순히 kidney 라고 할 때는 形이지만, 足少陰腎經이라 하면 흐르는 어떤 에너지를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質이지요. 이것을 통해서 치병을 하려면 여기에 흐르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알아야지요. 인체 내에서 물을 기본으로 하고 내용물이 火인 腎臟이 精을 저장하고 있다는 이미지는 이렇게도 복합적인 상황입니다. "腎臟을 補하면 精氣를 보한다"로부터 精氣란 어떤 것이며, 어떤 상황이겠는가 하는 것을 거꾸로 추리함으로써도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이 방법이 참으로 이상한 방법이지만 이것은 혁명적인 방법이올시다.
腎臟의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해부학적으로 무조건 구성이 어떻고, 걸러내는 작용을 하고, 신우가 있고, 수뇨관이 있고... 이런 식으로 공부하는 것보다 유심적인 차원의 무형의 통로를 공부해야만 이 足少陰腎經의 에너지를 알 수 있겠지요. 다른 경락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기분을 느끼지요. 예를 들어, 殺氣를 느낀다면 "음! 너는 足少陽膽經이 實하겠구나. 소화장애로 왔든 두통으로 왔든 너에겐 足少陽膽經을 瀉해 주어야겠군" 이렇게 추측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舍岩針法이올시다. 그러니까 반은 독심술인 것이지요. 우격다짐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차근차근 이해해 나가는 겁니다. 제가 명상, 근본, 도, 무심 이런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의 맘 속에 있는 이론이나 지식의 선입관을 제거하려는 제 나름의 노력입니다.
그러면 동양의학 혁명 소고를 간추려 보겠습니다. 저는 직관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직관의 개발은 다분히 광범위한 뜻을 포함하며, '修行的 要素'를 증진시켜줍니다. 직관이란 주관적이므로 자칫 그 요체를 잡기가 힘든 것처럼 보이나 주관적인 요소가 배제된 객관적인 직관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신념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이 보면 少陰人이고 저 사람이 보면 少陽人, 또 다른 사람이 보면 太陽人이라면 이건 문제가 크지요.
저는 대학교 시절에 참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나라 四象醫學의 대가선생님의 진단학 시간에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저는 무슨 人입니까? "으음, 자네는 耳目口鼻도 수려하고... 어쩌고 하니 太陰人이야" (아니! 제 이목구비가 수려해요? 그것보다는 제가 좀 엉큼하니까 太陰人이겠지요). 다음날, 다른 四象醫學의 대가인 병리학시간에 또 같은 질문을 합니다. "응... 자네는 少陰人이야. 한국사람의 100%는 少陰人 아닌가?" "이상한데요? 다른 선생님께서는 태음인이라고 그러시던데요" 그러면 자기가 내뱉은 말은 있고 그렇다고 다른 선생님 욕은 할 수 없고...
도대체 우리는 어디까지 혼란에 빠져야 합니까? 똑같은 병을 두고 어떤 사람은 大黃을 써서 몸을 차게하라 하고, 어떤 사람은 附子를 써서 몸을 데우라고 합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것이 한의학입니까? 옛날 한약방이나 의원에서는, 제자를 자기 밑에서 10년 정도 꾸준히 공부를 시킵니다. 10년 이상 지난 후 어느 날, 환자가 오면 제자의 의견을 물어봅니다. 이렇게 해서 제자의 의견이 자신과 60% 이상 맞을 때 비로소 개업을 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내 것을 주고, 나를 희생하고, 나를 죽이면서도 기뻐하는 것이 性이지요. 자기 자신의 이상을 기꺼이 희생시켜 가며 사랑하는 연인을 대학까지 뒷바라지 하는 여인을 우린 드물지 않게 봅니다. 少陰君火에 해당하는 식물은 아름답기 그지 없으나 생명력이 강하지 못합니다. 厥陰에 해당하는 것은 근육의 이미지이므로 과일로는 섬유질이 없으면서도 질기고 팽팽하며, 소음에 해당하는 것은 아름답고 수려하며 굉장히 예민합니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머리모양을 자주 바꾸고 싶어한다거나 이 옷은 오늘, 저 옷은 내일,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는 그런 마음이 少陰에 해당합니다. 화려하고 청초한 식물이 가녀린 모습으로 한들한들 피어 있으면 '그것은 少陰之氣가 많은 것이구나' 하고 짐작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요즘은 남자들도 여성화를 추구하여 Unisex Mode가 유행하는데, 이런 양상은 비단 인간뿐 아니라 동 식물까지도, 필요없는 장신구나 꾸밈을 가진 것은 모두 少陰君火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겠지요.
少陰之氣 성질을 지닌 식물씨나 열매는 거의 먹을 수 없는데 반해 太陰之氣의 성질을 지닌 열매는 肉質이 풍부하지요. 촉촉한 습기에서 자라는 太陰은 대체로 원만한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열매나 나무 자체의 모양이 주로 통통하고 풍부하므로 인간의 식생활에 가장 요긴하고 少陰은 주로 관상용으로 애용되며, 厥陰은 주로 약용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少陰君火는 불이 타오르듯 한 모양으로 올라가는 느낌이 있는 것으로 그런 빛을 가진 것을 일컫습니다. 太陰은 肉質이 풍부한 과일이나, 나무로 보면 열매부위, 그리고 채소 종류의 대부분이 이에 속합니다. 무우나 버섯따위가 太陰의 대표적인 식품이지요. 버섯이나 무우는 모가 나지 않고 대체로 둥근 모양을 하지요. 수분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지면 생김새가 둥근 식물이 잘 자랍니다. 엄마 얼굴을 그려보라고 했을 때 눈도 동글, 코도 동글, 입도 둥글동글하게 그리고 어린이는 太陰의 덕성을 지닌 아이입니다.
또 어떤 아이는 삼각 사각으로 얼굴을 모가나게 그린다거나 산과 나무를 뾰족뾰족한 예각으로 그리는데 그것에서는 번뜩이는 살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무심코 그리는 형상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이 지닌 감정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화가는 그림의 균형을 중요시합니다. 뾰족한 산을 하나 그리면 이어서 동그란 초가집을 그려 넣습니다. 그러면 陽明과 太陰이 조화를 이루게 되지요. 새가 날아오르는 걸 그린 뒤에는 폭포수가 아래로 떨어지게 합니다. 이렇게 조화를 맞추다보면 사람의 심성도 탁마가 되는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그림이 명상의 좋은 매체가 되기도 했습니다. 옛날 어느 그림 스승이 뚱뚱한 제자가 오면 계속해서 蘭을 그리게 하거나 피어 오르는 연기를 그리게 하여 氣의 상승을 느끼게 하고, 마른 사람이 제자로 들어오면 왼쪽으로 돌아가는 동그라미를 그리게 하여 외부의 기운이 빨려들어 감을 느끼게 했다고 합니다.
기름진 태음의 땅에선 식물이 위로 뻗지 않고 원만한 모습으로 바닥에 깔리지요. 그렇다고 그리 크지도 않지요. 少陽之氣의 식물은 키가 크고 뾰족뾰족하여 어떤 불안감 내지는 發散之氣를 느끼게 합니다. 또 잎이 톱니바퀴처럼 날카롭고 특히 솜털까지 나 있는 것은 少陽之氣가 성합니다. 이건 식용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맛이 대체로 쓰[苦]지요. 少陽之氣가 많은 칼, 창 따위는 그 자체를 보는 것 만으로도 섬짓함을 느끼지요. 언제라도 공격해 올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코가 뾰족하고, 얼굴이 역삼각형으로 생긴 사람은 웃어도 조심이 되지요. 그저 단순히 뾰족한 것이(동식물을 막론하고) 少陽之氣의 殺氣를 가졌다는 관찰은 탁월한 식견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전쟁이 터지려 할 때는 숲속에 少陽之氣의 식물이 우거지기 시작하고 나라가 부유해지려면 채소가 잘 자라고, 문화가 발달되려면 화초가 잘 된다고 합니다.
陽明은 少陽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키가 크고 가시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키는 少陽보다 더 큰 경우도 있으나, 가시가 少陽이라면 가시보다 좀 연한 솜털 종류가 陽明입니다. 그리고 陽明은 섬유질이 많습니다. 가시나무가 많은 동네에서는 탁발을 하지 말라는 스님들의 이야기가 있지요. 그런 동네에서는 차라리 동냥을 주고 오라고 합니다. 왜? 그 동네 사람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貧寒합니다. 陽明之氣의 식물은 여름보다 가을, 겨울에 강합니다. 그래서 사철 푸른 식물이 많습니다. 少陽之氣는 잘 먹고 배가 부른후 그 힘으로 죽이려 하는 것인데 비해 陽明之氣는 배가 고파서 잡아 먹는 상황입니다. 파리지옥풀 같이 다른 동물을 잡아 먹는 기관이 특별히 발달되어 있는 것들이 많지요. 배고픔의 설움에 받쳐 마구 일어나는 에너지가 형상화된 것이 陽明의 Image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취하고자 하지요.
태양은 寒水라고 해서 물이 많은 것이라고 추측하면 안됩니다. 寒氣가 많으므로 딱딱하게 굳은 상황입니다. 어떤 여유로움이나 탄력성을 가진 게 아니라 완전히 위축이 된 것입니다. 흡사, 어린애가 이불에 세계지도를 그린 벌로 키를 뒤집어 쓰고 소금을 얻으러 대문을 나설 때 같은 위축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夜尿를 하는 마음의 방심을 소금을 얻어오게 함으로써 위축시키는 거지요. 水에 해당하는 太陽寒水는 生長化收藏에서 간직하는 藏에 해당하지요. 味가 鹹이지요. 그러므로 간직하는 기운이 약해서 오줌을 곧잘 싸는 아이에게 소금을 얻어 오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멋진 조상들의 지혜입니다.
건드리면 확 움츠러드는 神經草인 미모사(Mimosa)의 위축성과 긴장성이 太陽입니다. 등줄기로 얼음물을 흘려 넣는 것과 같은 위축성이라면 이해가 쉽겠지요. 그런데 너무 위축이 되면 생식능력이 형편 없이 됩니다. 꽃을 피우지 못한다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지요. 아이를 너무 눌러 키우면 겁쟁이가 됩니다. 이렇게 太陽寒水의 기운이 實할 때에는 少陰君火로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자꾸 풀어내리고 발산을 시켜주어야 하지요. 미모사가 잘 자라는 나라는 우리가 가서 보지 않아도 공포정치가 행해져 내려왔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지요. 위축되고 주눅이 들면 잘 크지를 못합니다. 또 겁이 많은 사람은 십중팔구 폭력자이기 쉽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어떤 식물을 갖다 놓아도 그것의 성질과 전반적인 특성을 알 수 있겠지요. 자란 환경과 번성하는 계절과 뿌리 내린 토양의 風・寒・署・習・燥・火를 따지기만 하면 간단하겠지요. 겨자는 진흙땅에 심으면 안되고, 木果(신맛을 가진 厥陰風木의 식물)는 통풍이 안 되는 온실 속에서 키우면 열매를 맺지 않고, 熟地黃, 二門冬(天門冬, 麥門冬), 黃精과 마찬가지로 배추를 모래땅에 심으면 안된다는 이유 정도는 이제 이야기하지 않아도 잘아시겠지요.
Copyright(C) 2001 Sa-Am non-profit Acupuncture Service All rights reserved.
http://www.saam.net/saamacu/revolution/rev4-6.htm
4. 오운 육기
6.
山査는 산에서 나는 사과로 고기먹고 체한데 좋다고(채소먹고 체한데는 草果) 합니다. 山査는 肉質이 많으므로 통풍이 잘 되는 산 중턱이나 벌판에서 잘 자라고, 고원지대나 척박한 땅에서는 잘 자라지 않습니다. 또 계피나무는 너무 축축한 땅에서는 잘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식물에 따라 각기 자생지역이 다르고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陽明燥氣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식물 열매의 맛을 보거나 잎 등을 보고 자생지역 등을 잘 판별할 수 있도록 관찰력을 기르십시오.
이번에는 향기입니다. 허준선생이 사향 대신 오래된 절간의 똥으로 병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를 해드렸듯이 냄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냄새에는 陰인 香과 陽인 臭가 있습니다. 香은 냄새가 좋은 것이고, 臭는 악취지요. 우리가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그 냄새를 좋다고 합니까? 숨이 콱 막히지요. 이렇게 香은 통하게 하고 臭는 막히게 합니다. 또 香은 吸, 臭는 呼하게 하지요. 陰(厥陰, 少陰, 太陰)에 속하는 신맛이나 단맛은 삼키고 싶지요. 焦할 때 나는 냄새를 보더라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커피나 콩을 볶을 때의 구수한 냄새와 黑으로 아주 새까맣게 태울 때의 악취가 있지요. 前者는 少陰, 後者는 少陽에 해당합니다. 발효시키는 냄새나 술익는 냄새 그리고 메주 띄우는 냄새같은 것은 少陰君火에 해당하지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몇가지 비린내, 지린내... 등은 太陽에 속합니다. 비린내도 맡기좋은 것은 太陰(향긋한 바다 냄새 같은 것)에 속하고, 맡기가 거북한 것은 太陽에 속합니다. 그리고 香이 속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일 때는, 太陰의 香에 해당한다고 봐야됩니다. 厥陰에 관계되는 香은 시큼하면서도 아주 산뜻한 것입니다. 산에 가서 바람을 쐬는데 상큼함이 표현할 수 없도록 좋은 때가 있지요. 이렇게 시원하고 상쾌한 냄새같은 것도 厥陰에 해당합니다. 수목을 통해서 나오는 바람냄새같은 것이 기분좋은 厥陰風의 냄새입니다. 목욕 중에서도 風浴에 해당되지요. 수목과 교접을 하면서 땀이 촉촉하게 나도록 뛰는 것이 풍욕입니다. 옛날에 봄바람이 불 적에 신선들은 머리를 탁 풀어뜨리고 바람이 부는 동쪽을 향해서 바람을 쐬었다고하는 말이 있지요. 이것이 풍욕입니다. 그래서 厥陰은 익을 때 시큼하게 나는 아주 상쾌한 냄새이고, 少陰은 볶을 때의 구수하게 익는 냄새입니다. 향긋한 비린내나 달콤한 냄새는 太陰이지요.
또 향기가 사람의 어떤 감정을 자극시킨다면 어떤 독특한 향이 나올 것 같군요. 예를 들면, 肝硬化症 환자의 입에서는 간경화증 환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냄새가 납니다. 위암 환자에겐 위암 환자가 갖는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훌륭한 의학도가 되려면 코도 발달되어야 합니다. 구취에도 속에서 무언가 타는 듯한 냄새의 구취가 있고, 비린 구취가 있고, 냄새 맡기 역겨운 것도 있는가 하면 어떤 구취는 산뜻함이 향기롭기까지한 좋은 구취가 있습니다. 이런 예를 통해서 보아도 사람에겐 그사람 특유의 냄새가 있다고 봅니다. 동물에게도 독특한 냄새가 있듯이 사람도 각기 독특한 체취가 있습니다. 인간의 향기가 동물의 그것과 다른 점은 좋은 냄새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를 닦아 어느 경지에 오르면 향기가 난다는데 이것이 진짜 향기인 것입니다.
어떤 병에 걸리면 어떤 내음이 나는 것으로 미루어봐서도 알 수가 있겠지요. 따라서 식물도 어떤 내음이 나는 것이라면 그에 부합되는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환자에게서 어떤 구취가 난다고 하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위장이 나쁠 때, 비장이 나쁠 때, 간장이 나쁠 때, 심장이 나쁠 때 냄새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 입에서 탄내가 자꾸 난다면 그 사람은 초조하다고 볼 수 있지요. '아유-전 자꾸 요새 입안에 단내가 나요'이것은 脾臟에 열이 있는 징조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입이 써요'이것은 傷寒病에서 少陽病의 증상입니다. 口苦, 咽乾, 目眩(목구멍이 마르고 눈이 어질어질한 것)은 少陽病에 해당하는 겁니다. 입안이 단 것은 太陰으로 足太陰脾經에 열이 생겼을 때와 脾臟에 濕熱이 생겼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지요. '에이, 더러운 세상, 콱 죽어버리고 싶어!'라고 했더니 입이 막 짭니다. 이 경우는 죽어버리고 싶다하는 어떤 공포라든가 긴장감, 슬픔 때문에 입이 짠 것이지요. 또 입이 매운 것을 느끼는 분도 있어요. 매워도 무엇인가 매운 향기이면서도 냄새가 좋은 향기같은 것은 들어마시게 되는 것이지요. 少陰이나 厥陰이나 太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더라도 매우면서도 향기라고 볼 수 없는 톡 쏘는 냄새, 그러니까 辛香이 아니고 辛臭인 고춧가루 냄새를 갑자기 맡으면 吸하게 됩니까? 후~후 하고 내뿜지요. 톡 쏘는 매운 냄새, 아주 자극적인 냄새는 陽明에 속합니다. 기분 나쁜 노린내나 털이 타는 냄새는 대체적으로 太陽에 속합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고나도 식물관찰을 가보면 꽉 막혀버리지요. 무슨 기운을 어떻게 관찰합니까? 부분부분이 다르지요. 뿌리는 少陰인데 지상으로 올라온 부분은 太陰濕이 되고 열매는 厥陰風이 될 수 있습니다. 가시가 있다면 陽明도 있는 것이고, 잎이 톱니바퀴처럼 생겼다면 少陽도 있는 것입니다. 식물이 꼭 한 가지 성질로만 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여러 가지를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부분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 약성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시가 있지만 濕地에서 자랐으니 太陰濕이겠지'하고 쓰면 안됩니다. 어느 땅에서는 고염이 되고 어느 땅에서는 감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특수하게 변하는 경우도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상황은 그때 그때의 경우에 맞게 관찰을 해야지, 외워서도 안되겠지요. '감이군! 이것은 앞으로 어느 정도 크고 그 모양이 어떻게 되겠군!' 이렇게 예언을 할 것이 아니라 그 땅이라든가 환경 등을 충분히 살펴서 變種이 되는 경우까지도 읽어내야 합니다. 첫째는 부분 부분의 다른 점을 참조하고, 둘째는 부분의 이질요소를 참조하고, 셋째는 開花되는 시기를 참조하세요. 어느 철에 번성하느냐에 따라 성질상 큰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예로 쌀과 보리 중 어떤 것이 더 차겠습니까? 보리가 더 찹니다. 五運・六氣를 공부한 사람이면 자연관찰을 자꾸해야 됩니다. 여름을 지나는 쌀이 보리보다는 덥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같은 술이라도 보리술이 더 차죠. 여름에 피는 꽃 나무와 겨울에 피는 동백꽃과는 차이점이 많지요. 동백꽃 씨는 기름이 많아요. 그런데 여름꽃의 씨에는 기름이 없습니다. 겨울에 피는 꽃들은 대체적으로 다 기름이 많아요. 그것은 足少陰腎經이 기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피가 手太陽小腸經에 해당한다면 기름은 足少陰腎經이 되고 인체에 비유한다면 精에 해당합니다. 기름이 많다면 정력적인 사람이고, 피가 많으면 부자로 잘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차이점을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습관 때문에 인생의 진리를 곧잘 놓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道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사소한 습관 때문이지요. 어떤 부자가 눈이 튀어나오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보였더니 의사는 "아무래도 위장이 잘못된 것 같으니 내시경을 한번 투사해 봅시다" 위가 잘못되었으니 잘라내는 것이 좋겠다하여 수술을 하였지만 튀어나온 눈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다시금 흉곽내과를 갔습니다. 肺를 찍어보니까 아무래도 肺의 기관지를 수술해야 할 것같다면서 기관지의 일부를 수술해서 제거했지요. 그러나 소용이 없었어요. 이번에는 비뇨기과를 찾아가보니 "당신은 너무 色을 밝혀서 아무래도 전립선에 염증이 있는 것 같아요" 고환의 일부를 잘라야 한다고 해서 한차례 수술을 또 받았습니다.
그래도 처음의 눈알이 튀어나온 것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치과에 가봐도 별로 소용 없었으며, 안과에서 눈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이상한 안경을 맞춰줍니다. 이쯤되고 보니 병은 고사하고 사람 꼴이 말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정신과 의사를 찾아 갔습니다. 정신과 의사 가로되 "여보시오. 여기 잘라내고 저기 잘라내고 당신은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삽니까? 이제 앞으로는 당신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여태까지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입고 싶은 것 안 입고 모은 돈 아닙니까? 그래서 눈알이 자꾸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부자는 은행에 맡겼던 돈을 몽땅 찾아가지고는 집과 승용차를 샀습니다. "다 부서진 몸으로 오래 살기 틀렸으니 쓰고나 가자!" 이젠 단벌신사도 면해보고 전에는 와이셔츠 하나로 10년을 견디었는데 한번에 10벌쯤 맞춰입자 하고는 양복점을 찾았지요.
양복점 재단사가 기장 몇 인치 허리 몇 인치... 하다가 "목 16인치"라고 하거든요. "아니? 무슨 소리야! 내 목은 지난 50년동안 14인치인데, 난 그 이상의 치수로는 입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선생님 목 사이즈는 16인치 입니다" "아니오. 14인치가 내 사이즈요" "진짜로 선생님은 16인치라니까요" "아! 글쎄 14인치라니까" 이러다가 싸움이 벌어질 판이 되었는데,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습니다. 14인치로 원하시니 해드리긴 합니다만 손님께서 목이 졸려서 눈이 튀어나오고 혓바닥이 빠져나오고 눈알이 퉁퉁 붓는 병에 걸릴 확률이 많습니다" "무엇이라고? 당신이 내 병을 어찌 그리 잘 아시오?"
이사람 멀쩡한 몸 병원다니며 다 망치고난 뒤에 우습지도 않게 깨달았지요. 이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와이샤쓰 2인치 차이 때문인걸 갑상선의 이상이라느니, 가슴이 어떻다느니, 신장이 어떠니 불알이 어떠니 이빨이 어떠니 했던 엉터리 같은 의사들 만나가지고 노리개가 되었는데 알고보니 병의 원인이 고작 와이샤쓰 2인치 차이에 있더라는 이야기지요. '와이샤쓰 2인치 差'. 깨달음이란 이렇게 쉬운 겁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여러분들의 소홀함 때문에 '와이샤쓰 2인치 差'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것들이 여러분들의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으니까요.
"方藥合編"서문을 보도록 합시다. 어떤 책이든지 읽을 때 저자의 서문이라든지 역자의 후기를 안 읽는 사람은 그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는 필자의 진심 토로가 몇마디 들어있지요. "方藥合編"은 "東醫寶鑑"을 다이제스트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돌팔이들을 많이 양성시켰다는 어느 한의학자의 항변도 있습니다만 그런 사실을 저자가 예상 못하고 책을 쓴 것은 아니지요. 책을 펴낼 적에 그러한 염려를 무척이나 했습니다. 한약인구라고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는 떠돌이가 3만명, 한의사가 약 4~5천명 그리고 돌팔이와 한약업사, 거기다 건재약방 사람들까지 합치면 총 한약인구가 약 10만명쯤 되는데 그 사람들 중에 "方藥合編"한권 안들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의 아버지들만 보아도 좀 유식하다 하면 "方藥合編"을 보고서 "얘야, 가서 十全大補湯 좀 지어 오너라" "가서 雙敗湯 좀 지어 오너라"고 합니다. 아무리 "方藥合編"이 옛 사람들의 필수 애독서라 해도 이건 안 되지요. 陰陽의 이치를 깨닫지도 못한채 그렇게 濫讀하면 곤란하지요. 난 레미제라블을 읽었다. 어떻게 흘러가다가 끝 부분에서 죽었다. 또는 복수를 하고 결혼을 했다고 이야기하지요. 우리는 소설을 그렇게 읽습니다. 지금은 다이제스트 시대입니다. 이 강의도 어떤 의미로는 "東醫寶鑑"의 다이제스트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이제스트가 가지고 있는 나쁜 면보다 좋은 쪽으로 많이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나 陰陽觀도 없이 마구잡이로 무슨 병에는 무엇, 그냥 무슨 탕 무슨 탕 무슨 탕 하는 정도로 오용이 되면 "方藥合編"의 해독은 무지하게 크게 되지요.
제가 떠돌아 다니던 시절에 어느 돌팔이가 경영하는 집에 의사로 들어가고, 그 사람은 업주로서 있었는데, 글쎄 이 사람이 내가 자리만 뜨면 자꾸 진찰실로 들어 오려고 폼을 잡아요. 이 사람이 환자를 보면 병명이 한결같이 같아요. 무어라고 하냐면 무조건 "신우신장염" 눈이 아파서 오는 경우에도 그렇고 위장이 아파서 와도 신우신장염... 조그만 종이에 처방을 적는데 하나같이 五積散 하나 뿐이었어요. 무조건 이 약을 줍니다. 정말 사람 잡는 것이지요. 쇠고랑차기 딱 알맞죠. "方藥合編"중의 처방 하나로 어쩌다 환자가 나으면 그것만 외워서 쓰는 사람들도 있지요. 이 또한 엄청나게 큰 잘못입니다.
"方藥合編 序文"
"오호라! 선친 혜암공이 저술한 方藥의 서적이 상당히 많으나, 거기에는 모두 저자인 자기의 이름을 적어 두지 않고, 다만 施治者로 하여금 잘 치료하기에 손쉽게만 하였으니, 남에게 지식을 공개하면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음이 이러하였다. 그의 저서 중에 "活套"라는 책이 하나 있는데, 글이 간명하고 내용이 풍부하며 조리가 명료하여, 누구나 한 번 보면 병증을 관찰해서 치료할 수 있었으므로, 본래 의학을 전공하지 못한 사람조차도 이 책을 갖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인쇄 발간하여 공급하지 못하고 걱정하고 있던 중에, 마침 동네 분들이 인쇄를 도모하여 본을 가지고 와서 아버님께 고하니, 아버님이 말씀하시기를 '책이란 물론 펴서 전하는 것이 가당하나,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달렸으니 서둘러 펼 필요는 없으며, 또 사람들이 본초를 읽지 않는데 치료법만으로서야 어찌 활투를 다 한다고 하겠는가.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구세코자 하는 뜻은 간절하나, 역시 증상이 비슷한 딴 병으로 알고 잘못 施治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망설이오'라고 하였다. 그래도 동네 분들의 요청이 더욱 간절하매 세상에 수응하려는 뜻을 끝내 막을 수가 없었다. 아버님께서 연로하시기 때문에 몸소 책의 초를 잡을 수가 없으므로, 이 자식에게 책을 넘겨주면서, 서례는 왕인암의 "본초비요"와 "의방집해"를 합편한 방법을 본뜨되, "손익본초"를 먼저 놓고 거기에 용약강령 및 구급과 금기 등 십여 가지를 더 보태어 "방약합편"이란 책명을 붙이라고 명하셨는데, 일이 반도 진척되지 못했을 때에 아버님이 우연히 병을 얻어 '내 병은 회복되지 못할 것이니, 약으로도 목숨을 연장할 수가 없다. 완전무결한 양의란 그 생사를 식별하는데 있다'고 말씀하시고 끝내 약을 복용하지 않다가, 이 해 8월 17일에 별세하셨다.
아아 슬프다! 자식으로서 선친의 세법을 계승하고 아버님의 책을 채 다 읽지도 못했는데, 하물며 아버님이 전하신 바를 감히 초잡을 엄두가 나겠는가. 그러나 동네 분들이 시작한 판각이 중단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어, 장례를 치른지 두달만에 눈물을 닦으면서 일을 끝내어 이것을 판각에 돌렸으니, 다소 잘못된 데가 있음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책을 펴지 않았다고 한 것은, 선친의 뜻을 좇아서 의명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본서의 전말을 약술하고, 이에 관한 감회를 덧붙인다. 아아! 이 책을 보시는 분들이요, 아버님의 노파심을 상기해주소서.
고종 21(서기 1884)년 갑신 12월 상순. 혜암공의 아들 불초 黃泌秀는 피눈물을 머금고 삼가 씀.
"본초도 읽지 않고 入經(다른 말로는 귀경이라고 함. 약물의 작용이 장부경맥의 관계와 결합해서 어떤 약이 어떤 장부경맥의 병변에 대하여 일정한 치료작용을 하는 것을 말함)도 모르고 맛도 모르고 볼 줄도 모르는 자들에게 치료법만을 가르쳐 주고서 어떻게 활용을 다 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널리 펴서 세상 사람을 이롭게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증상이 비슷한 다른 병으로 잘못 알고 施治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우리 사부님과 동명인 혜암 公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 첫째는 증상은 같은데 약이 다른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浮腫에는 陰虛浮腫과 陽虛浮腫이 있습니다. 陰虛浮腫에는 六味地黃湯에 牛滕, 車前子를 가미하여 처방합니다. 陽虛浮腫일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같은 부종이라 하더라도 氣가 부족하여 부종이 왔다면 무엇이 좋을까요? 補中益氣湯에 이뇨제를 가미하면 좋습니다. 퉁퉁한 사람들이 氣가 부족하여 虛性으로 오는 陽虛浮腫에는 藿香正氣散에 利尿之劑를 가미해도 좋습니다. 氣를 보충시키는 약이니까. 신장염에 무조건 이뇨제를 쓰면 부종은 다 낫습니까? 陰虛와 陽虛의 구별이 없으면 자칫 큰일나는 거지요.
여러분 앞에 두통환자가 찾아왔습니다. 두통에는 '蔓荊子散'이 얼른 떠오르겠지만, 무슨 두통이지요? 陽明頭痛? 太陽頭痛? 少陽頭痛? 사람은 뚱뚱해? 말랐어?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한의사의 기본자세입니다. 여자라면 經度를 물어보아야 되고 성격, 취업, 환경, 취미 등을 수사관이 수사대상을 면밀하게 검토하듯 신중해야 합니다. 실제로 수사보다도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경솔하게 대하는 사람이 많지요. 수사관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것처럼 우리도 유심히 보아야 되는데도 외운 것으로만 대충 넘어 가지요.
둘째는, 증상은 다른데 약이 동일한 경우입니다. 약은 똑같이 쓰는데 증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 별명이 金 四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耳鳴症으로 온 환자에게 四物湯, 眼部充血로 온 환자에게도 四物湯, 肩臂痛으로 왔는데도 四物湯, 口渴로 왔는데도 四物湯, 원 세상에 다섯 사람이 다녀가도록 계속 사물탕만 쓰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밑에서 배우던 제자가 무조건 사물탕이면 되는줄 알고서는 12살에 들어와서 겨우 스무살인데 바로 개업을 하고 싶어서 안달복달을 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절대로 30년 제자 노릇하기 전에는 개업을 안시켰지요. 허준선생이 개업을 한 때가 언제인지 압니까? 40대 넘어서지요. 고생을 무지하게 했지요. 유의태 선생님 집에 가서 10년을 똥빨래해주고 그 아들에게 얼마나 멸시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金 四物의 제자가 10년만에 자립해서 나가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金 四物이 "나가는 것은 좋은데 너 내이름으로 개업하지 마라"고 했지만 그렇게 안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밑에서 10년이나 있었는데 10년 동안 맨날 본 것이 사물탕인데 陰과 陽을 동시에 볼 줄 아는 觀이 있을리 없지요.
칼날이 양쪽에 다 있는 양날검을 禪家에서는 '깨달음'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도무지 陰陽觀이라곤 없는 제자놈이 급기야 金 四物한약방 옆에다 元祖金四物한약방이라고 간판을 내 걸고는 사람들을 현혹시켰다고 합니다. 해장국 원조인 할머니는 그저 해장국을 맛있게 끓이는데 전념하는데 바로 옆에 '元祖해장국', 또 그 옆집에 '진짜 원조 해장국' 또 그 옆집에는 '원원원조 해장국' 개업이야 누군들 못하겠어요? 觀이 없던 그 제자놈은 6개월도 채 못되어 줄행랑을 놓았다고 합니다. 이건 실화입니다. 이렇게 陰陽觀이 투철하지 못한 사람들을 염려하여 "方藥合編"의 저자도 책을 지음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方藥合編"의 藥性歌 첫 藥物이 인삼이지요. "人蔘味甘補元氣 止渴生津調榮衛" 옛날엔 七言絶句로 藥性을 외웠습니다. 藥性綱領도 빠짐없이 읽어보도록 하세요. 그런데 "일이 반도 진척되지 못했을 때 오호통재라 내 병은 회복되지 못할 것이니 약으로는 목숨을 더 이상 구할 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良醫는 생사를 식별하는데 있다'며, 그래서 약도 복용치 않으시다가 8월 17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아! 슬프도다. 오호라! 이 책을 보시는 사람들이여, 아버님의 노파심을 상기하라 공의 노파심 헤아리길 간절히 바라노라... 외로운 아들 피눈물을 머금고 삼가 쓴다"고 했습니다. 참 기가 막힌 겁니다. 그리고 혜암선생의 원래의 서문은 "方藥合編 原因"바로 뒤에 있는 "醫方活套原序"입니다. 그 내용 중에 "지금의
세상 일이란 규범은 전할 수 있어도 솜씨는 전하기가 어려운데 한 때의 사견으로써 어찌 천하의 만가지 病變을 다 알게 할 수 있겠는가. 설령 그렇게 한다해도 그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면 되풀이 설명 해야만 의술이 늘 터이니 이를 어찌 감당하겠는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슬비가 나의 옷을 적실 때
나는 보지 않고 붓다를 본다
꽃잎이 소리없이 떨어질 때
나는 듣지 않고 붓다의 목소리를 듣는다.
醫者들이 환자를 대할 때의 마음자세를 적절히 표현한 禪詩의 하나입니다.
하나의 졸렬한 사견으로 천하의 萬變하는 이치를 어떻게 궁구할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압축하면 "道 닦아라!"는 말씀이지요.
"투약은 형편에 따라서 적당하게 증감하고 치유는 경우에 따라서 선후를 가려서 할 것이다" 혜암선생이 제가 그동안 입이 아프게 강조했던 말들을 딱 한마디로 간추려서 써 놓았습니다. "치유는 경우에 따라서..."라는 부분의 '경우'옆에다가 크게 괄호를 하고는 '陰陽'이라고 써 넣으세요. 陰陽에 따라서 먼저 치료할 것과 후에 치료할 것 즉 오래묵은 병, 최근의 병을 가려서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한 환자가 당뇨병을 10년 동안 앓아왔고 최근에는 위궤양까지 얻었다면 그를 대한 의사는 먼저 위궤양을 다스려야 합니다.
"열 가지 병에 동일한 처방을 쓰기도 하고, 하나의 처방에 여러 가지 약제를 합하기도 한다. 초보자는 例方에서 뽑아쓰기가 어렵겠기에 方門을 분리한 다음에 이런 三系統으로 하여 補益, 和解, 攻伐의 세 가지 품성을 알게 하고 따로 운용법을 조금 설명하여 배우는 이가 책만 보면 대충 치료 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옛 사람이 한 것은 아니나 역시 對證投藥 정도는 될 것이다. 이대로 따라서 널리 응용하는 길을 추구하면 의문에 들어갈 것이다"
"東醫寶鑑"을 기본으로 하는 이 활투를 집대성해서 편집한 곳이 '游藝室'이라고 했습니다. 유예실이란 蕙庵公의 서재입니다. 1807년(순조 7년)에 태어나셨는데 고종 때에는 典醫도 지냈습니다. 또 찬화당이라는 약국을 열었던 당대의 명의였습니다.
Copyright(C) 2001 Sa-Am non-profit Acupuncture Service All rights reserved.
http://www.saam.net/saamacu/revolution/rev4-7.htm
4. 오운 육기
7.
이 단락에서는 첫째, 禪問答의 등장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고 둘째, 唯心的인 관찰에 의한 기존 음양관의 혼란유발이 또한 특징입니다. 이 五運六氣를 그동안에도 자꾸 조금씩 나열해 드렸던 이유는 전체성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시겠지만 甲・乙・丙・丁...을 天干이라고 하고 子・丑・寅・卯...를 지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말을 써 놓았는지 알 수가 없고 무슨 뜻인지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地支를 보면 동물에 대한 取象이므로 이해할 수가 있지요. 天干은 五行×2, 地支는 六經×2로서 五行과 六經이 둘로 나뉘어진 상황임을 알 수가 있는데 그러면 왜 五行이면 다섯 가지만으로 분류를 하고 六經은 여섯 가지로 나누지 않고 둘로 나누는 상황이 필요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五行에도 서로 상대적인 陰陽이 있기 때문에 六經과 마찬가지로 둘로 나눌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少陰이라 하더라도 陽少陰, 陰少陰이 있고, 木인 봄(春)이라 하더라도 陽春이 있고 陰春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성을 보더라도 여성적인 여성이 있고 남성적인 여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을 나누고자 하면 한이 없어요. 편의상 이렇게 둘로 나누어 놓은 거지요.
우리 인간을 볼 때 최초에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고, 남자와 여자가 분리된 것에서 다시 남성같은 여성, 여성같은 남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여성같은 남성 중에 더 여성같은 성격... 이런식으로 분류해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곱하기 나누기를 한 十干十二支는 64卦에서 水火旣濟, 火水未濟, 重天乾, 重地坤卦를 뺀 60괘가 서로 맞물고 돌아가는 겁니다.
土중에도 路傍土가 있고 壁上土가 있지요. 길거리에 있는 흙과 벽에 붙어 있는 흙이죠. 또 木이라 하더라도 平地木과 山中木, 甲子乙丑 海中金...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주 보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복합적인 상황에 대한 예만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이 五運六氣 각론은 너무 어려워서 확대해석이 어렵습니다. '甲子乙丑 海中金'이런 말이 나오는데 저는 갑자을축 해중금에서 꽉 막혀버리면 그 다음으로 진척을 안하는 사람이예요. 그래서 연구를 하다가 시간도 없고 놀기에도 바빠서 공부를 못했습니다. 같은 金이지만 옛사람들은 陰金이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러면 海中金 즉 바닷속에 있는 金과 모래속에 있는 沙中金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옛날 선승들은 수수께끼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여학생들이 오면 꼭 물어 보는 것이 있는데, 여학생들만 한 번 대답을 해 보세요. "무우말랭이에 꼭 들어가는 것이 뭐겠습니까?" 公案法에서는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돌리지 않는 것을 칭찬합니다. 무우말랭이에 꼭 들어가는 것은 무우거든요. 그런데 학생들은 이것을 꼬집어 내지 못하고 고춧가루, 참기름, 설탕, 미원 등... 복잡하게 대답을 하거든요. 계속 '틀렸다, 틀렸다'라는 것을 되풀이 해 듣다보면 그제야 무우 라는 대답이 나오는 거예요. 공안에 접근하는 길은 단순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눈이 바로 공안에 근접해 있는 거지요. 十牛圖(십우를 나타낸 그림.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순서를 표시함 것임. 십우란 자기의 본심을 찾아 진리를 깨닫는 순서. 인간의 본심을 소에 비유하여 소를 찾고 얻는 순서와 이미 얻은 뒤에 주의 할 점을 10가지로 설명함)중의
하나를 보면...
返本還原
본래 청정하여 한 티끌도 받지 않는다.
有相의 영고성쇠를 보고 無爲의 凝寂에 이르니
幻化와 같지 않으므로 어찌 修治를 假할 것인가.
수록 산청으로 앉아서 성패를 본다.
本來淸淨하여 不受一塵이로되
觀有相之 榮枯하고 處無一爲之凝寂하니
不同幻化豈假修治리요
水錄山靑하니 坐觀成敗로다
五運六氣는 이 정도로 천진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겁니다. 교활하게 잘 돌아가는 머리가 아니라 천진한 눈, 순수한 머리만이 이것을 이해 할 수 있는 겁니다. 저희 한의원에 외국인 교수 하나가 "周易"을 배우러 가끔 오는데 "周易" 64卦는 저도 잘 모르니까 주로 唯心的인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죠. 그런데 이 친구가 저에게 하도 공안 문제를 가지고 당하다 보니까 어느날은 자기가 공안 문제를 하나 내겠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그 친구의 'American chicken' 공안은 조금 저차원 공안이긴 하지만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제가 여러분들에게 공안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통밥"을 굴리는 공부만을 해 왔으니까 여기서는 "통밥"을 쉬는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치킨공안(?)이라 하는 것은 미국에서 어린이들이 많이 하고 있는 것인데, "병아리가 횡단 보도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왜 건너 갈까요?" 길이기 때문에...?, 집이 그쪽이기 때문에...?, 건널목이기 때문에...?, 가고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다 틀렸습니다. 또 다른 분 대답해 보십시오. 신호등 불이 켜져서...지금 가장 통밥을 잘 굴리는 사람의 가장 유치한 통밥이 하나 나왔습니다. 벌써 파란 신호등까지 생각을 한겁니다. 지금 신호등 불이 켜져서라고 대답하신 분 성이 무엇입니까? 허 씨요? 예! 앞으로 학생의 이름은 '허 유통'이라고 하십시오. 유치한 통밥의 대가, 허유통 씨, 머리 좋은 사람들은 파란 신호등이 있으니까, 엄마 보고 싶어서, 엄마 따라서, 켄터키 치킨 집이 있어서 등등... 온갖 대답들이 다 나오는데 이것은 지식입니다. 이 답은 간단합니다.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지요.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五運六氣에서 甲子乙丑 海中金, 沙中金 또 路傍土, 壁上土, 平地木 등 이런 말들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五行을 가지고 곱하기 나누기 하시면 안풀어지는 겁니다. 제가 이것을 강의 듣다가 강사분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질문을 그만 두었었는데 어떤 周易學者가 시원하게 풀어주더군요. 그 분은 완전히 직관에 의해서 설명을 해 주셨는데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五行의 이론에 의해서 海中金은 金과 水, 沙中金은 金과 金이 아니고 海中金이라고 하면 바다 속에 금이 있는 그 상황, 沙中金은 모래 속에 金이 있는 그 상황을 보고 그 차이점을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五行的으로 金과 水가 부딪치는 상황을 생각하지 말고 어떤 비교기준에 의해서 이 말을 써 놓은 것이므로 그 비교기준이 어디에 있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壁上土, 벽에 바른 흙과 路傍土, 길가에 버려진 흙이라고 했을 때 그 기준을 어디에 두었을까요? 모든 것은 기준이 있을 때 陰陽이 정해지는 것이지, 기준이 없으면 陰陽도 정해 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주볼 때 소위 命理學(하늘에서 주어진 명과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주로 쓰는데 인간사에 이용할 때는 "당신은 꼭 路傍土와 같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흙과 같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아무튼 어떤식으로든 확대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지하게 어렵지요. 여기서는 직관이 필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足厥陰肝經은 피리요, 어쩌구 하면서 取象을 하였는데 어느 정도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해 보시고 명상 재료로 삼으세요. 이것을 해석을 잘 하면 五運六氣 命理學이 끝나는 것이라고 하던데 어떤 선생님은 처음에 五行的으로 공부를 하다가 周易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그제서야 인간사에 비유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아까 어떤 여학생이 海中金과 沙中金을 有用과 無用의 用, 不用의 차원이 아니겠느냐고 이야기 했는데 이 지구상에는 모든 것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有無, 貴賤, 强弱, 上下, 貧富, 緩急, 大小, 生死...이런 것을 30가지로 분류한 것에 불과한 거지요. 그러니까 이러한 卦가 나오면 海中金과 沙中金의 차이점을 보아야지 어느 한쪽만을 공부한다고 하면 100년을 공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內經"五運六氣編에 보면 陰陽은 5로도 10으로도 千・萬...으로도 나눌 수 있다고 했거든요. 제가 "內經"에 있는 근거를 대드리면 여러분들은 아하! 이런 것을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內經"五運六氣編 五運行大論에 보면
"余가 알기에는 十干의 五行的 관계나 十二支의 方位的 관계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상의 陰陽이나 五行의 분류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대체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岐伯이 대답하여 말씀드린다. "그것은 분명한 도리가 아니겠사옵니까? 鬼臾區가 아뢰온 것은 天池를 운영하는 五運・六氣상의 陰陽이나 五行이옵고,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지 인간들에게 관계가 있는 일반적인 陰陽으로 이것 또한 五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다른 2개의 법칙을 합하여 생각해 보아도 거기에서 일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체로 陰陽 등 2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활용하여 십으로 분류하거나 백으로 분류하거나, 혹은 또 천으로도 만으로도 분류할 수는 있는 것이므로 형편에 좋도록 適宜・融通無碍하게 분리하면 좋을 것이옵니다. 이러한 이유로 五運六氣의 陰陽・五行의 이치가 상식적인 陰陽・五行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좋은 것이옵니다" (五運行大論)
그러니까 五運이라고 하는 것은 사계절의 변화, 즉 春・夏・秋・冬이고, 六氣라고 하는 것은 風・寒・署・濕・燥・火인데 봄이라고 하여 바람만 있습니까? 태양이 비치고 추운 날도 있고 風・寒・署・濕・燥・火가 다 있지요. 그러므로 지지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天氣, 즉 氣運에 해당하는 것이고 天干이라고 하는 것은 春・夏・秋・冬의 변화를 말하는 겁니다. 대다수의 많은 학생들이 五運六氣라고 하면 굉장히 어렵게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니까 어떤 교수들은 "그 사람은 오운육기파야 오운육기파..." 그렇게 이야기들을 한다고 하던데 아니! 세상에 오운육기파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운육기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실상을 종합해서 이야기 하려는 노력인데 우주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에 파가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선입관을 가지지 마세요.
제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오운육기는 甲子乙丑...에 대한 해석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앞에서 공부한 六氣的, 차원인 少陰, 厥陰, 太陰, 少陽, 陽明, 太陽과 여러분이 알고 있는 木, 火, 土, 金, 水를 혼합하여 얼마나 확대해석을 잘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확대 해석을 잘해야 命理學의 대가가 되고 또 한방으로 들어오면 기후라든가 사람의 病變을 보는 대가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海中金에 대해서 한 번 해석해봐라" 이런 것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금에 대비된 海中金이냐 하는 기준이 있어야지요.
黃帝가 岐伯에게 "짐이 듣기에는 十干의 五行的 관계나 十二支의 方位的 관계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상식적인 陰陽이나 五行의 분류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본인도 이 점에 동의합니다. 예를 들어 少陰君火는 方位上으로 어디에 속해야 할까요? 일반적인 五行上으로 보면 南方에 속해야 합니다. 手少陰은 南方에 속한 것이 사실인데 足少陰은 제일 北方에 속해 있거든요. 또 陽明燥金만 하더라도 西方에 속해야 하는데 手陽明은 東方에 속해 있거든요. 더구나 手陽明같은 경우는 五運과 六氣가 모두 金인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참 이상하지요. 제가 앞에서 조금 이야기하다가 그만두었는데 겨울철에 우물물이 따뜻해지는 것과 여름철에 우물물이 차가와지는 것이 단순히 감각적인 차원이겠습니까? 아니면 실제로도 온도가 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감각적이라는 쪽이 절대적으로 우세할 겁니다. 그렇지만 몇몇 분은 실제로 온도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온도계를 가지고 실험해 보세요. 단순히 감각 차이라고 중고등학교때 배웠다 하더라도 그것이 틀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여름철에 떠온 샘물을 더울 때 먹으니까 시원함을 느낀다고 했는데 냉방이 잘 된 방에서 그 샘물을 마신다고 하면 다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까요? 또 겨울철에 먹는 샘물이 춥기때문에 따뜻함을 느낀다면 히타 장치가 잘된 방에서 그 샘물을 먹는다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실제로 실험해 보세요.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기존의 사고방식에 많은 혼란을 드렸는데 그 이유는 제가 五運六氣를 설명하면서 말씀드린 겁니다.
黃帝는 十干十二支에서 혼란을 느껴 "어째서 少陰이 북방으로 가고 상식상의 陰陽이나 五行의 분류와 다른 것이 어떤 연유인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岐伯은 "그것은 바로 당신이 알고 있는 인간사에서만의 이야기이고 천체 우주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겨울이면 무조건 추운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꼭 그런것만은 아니죠.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에서 이것을 평면적으로 본다면 壬癸는 北方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甲己 合土가 되거든요. 솔직히 내용상의 문제는 저도 어려워서 모르겠고 이걸 설명할 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壬癸는 北方水로 이것이 風・寒・署・濕・燥・火와 서로 어울려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겨울철에 바람이 많다고 하면 壬과 厥陰風이니까 壬巳가 되고, 겨울철에 유별나게 춥다고 하면 太陽寒水에 해당하는 辰・戌이 더해지게 되면 壬戌이 되겠지요. 하지만 五運六氣를 해석하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예는 여러분들을 평면적으로 이해가 쉽도록 하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니까 이것을 외우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옛날에 제가 五運六氣를 배울 때에는 五運六氣를 이해하려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한번 관찰해 보고 낮의 모닥불과 밤의 모닥불을 관찰해 보라고 했거든요. 똑같은 少陰君火라고 하더라도 春夏秋冬에 작용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상상력과 추리력을 많이 키워야만 합니다. 특히 지금 말씀 드리는 부분은 더욱 그러하지요. 제가 여러분에게 六十甲子를 써오라고 했는데 이것은 꼭 쓰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그것을 외우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한 번 씀으로해서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무조건 외우지 마시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甲子年이라고 하면 그 甲子年의 의미를 터득한 사람만이 五運六氣에 접근한 사람이죠. '天火同人'의 卦가 있다고 할 때 1爻는 어떻고 2爻는 어떻고를 외우는 것보다 天火同人의 天卦와 火卦를 확실히 고민하여 보고 자기 나름대로 연구하여 생각해 본 사람이 진리에 가깝게 접근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六十甲子를 써 보면서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卦가 무슨 卦입니까? 足少陰腎에 해당하는 地雷復卦죠. 위에 있는 卦는 무슨 卦입니까? 八坤地卦에 해당합니다. 여러분들 지금 八卦를 모르시는 분이 있으면 절대 안됩니다. 八坤地卦는 任脈에 해당하고 아래에 있는 卦는 四震雷에 해당하는 소양경입니다. 그러면 少陽經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배경은 쌀쌀맞고 남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의 느낌이겠죠. 그러니까 相火만 하더라도 '寅申相火의 해에는 장군이 태어난다. 난리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 더위가 밀어닥칠 수도 있다. 가뭄이 온다'등의 여러가지의 해석이 등장하게 되죠. 또 寅申相火가 들어간 사람은 '장군감 아니면 깡패다'라고도 하는데 하나는 좋게 작용한 것이고, 하나는 나쁘게 작용한 겁니다.
우리가 先天과 後天의 이야기를 참 많이 하고 있는데 이 선천과 후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麥門冬씨가 있다고 합시다. 본래 麥門冬種子는 좋은데 바람에 날려서 건조한 땅에 떨어졌다고 하면 이건 先天(麥門冬種子)은 좋은데 後天(건조한 땅)이 나쁜 경우죠. 그런데 이 맥문동 종자가 습한 땅을 만났다고 하면 선천도 좋고 후천도 좋은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아주 지혜도 좋고 공부도 잘 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태어난 곳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게 되어 공부를 하려고 하면 엄마가 나가서 돈벌어야 하니까 동생 보라고 하고, 또 나가서 돈벌어오라고 하면 사람이 쪼그라붙어서 말년까지 가난한 신세 못 면하게 되고 그저 죽을 때까지 자신의 환경 탓 만을 하다가 죽게 됩니다.
Copyright(C) 2001 Sa-Am non-profit Acupuncture Service All rights reserved.
http://www.saam.net/saamacu/revolution/rev4-8.htm
4. 오운 육기
8.
여러분! 熟地黃밭에 무엇이 들어가면 다 말라 죽습니까? 무우가 들어가면 熟地黃이 다 말라죽게 되지요. 옛부터 전해오는 것 중에 熟地黃 먹고 무우를 먹지마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무우를 식물학상으로 볼 때 어느 부분이 성합니까? 또 무우를 던졌을 때 어떤 부분이 먼저 떨어집니까? 물론 아래 부분인 뿌리가 먼저 떨어지겠죠.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을 종합해 본다면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어디로 작용하는지 짐작이 갈겁니다. 우리가 무우를 먹었을 때 트림이 먼저 나옵니까? 방귀가 먼저 나옵니까? 트림부터 먼저 나오지요. 무우가 소화된다는 것은 기를 위로 올림으로써 아래가 뚫리는 즉 기를 위로 상기시키면서 消食시키지요. 그런데 熟地黃은 어떤 작용을 합니까? 補血, 補陰 시키는 작용을 하지요. 그러니까 기를 위로 상기시켜 주는 것과 補陰시키는 것을 한데 섞어놔 두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새로 개업한 똑똑한(?) 젊은 한의사들은 "괜찮아요. 옛날 사람들이 그저 모르고 한 소리니까... 과학적인 근거가 없거든요" 이렇게 곧잘 이야기합니다.
제발 여러분들 만큼은 이렇게 똑똑한 한의사가 되지 마세요. 얼마전에 어느 대학교 연구팀이 녹용에 대해서 연구발표를 하였는데 "녹용은 약간의 제라틴 성분과 섬유질 성분 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을 사용하고 있는 한방의학이 한심하다" 그러더군요. 그러고는 뒷 구멍으로 자기 자식을 歸脾湯 먹이고, 얼마나 우습습니까? 정말 녹용에는 약간의 제라틴 성분과 섬유질 밖에 없을까요? 왜 옛사람들이 녹용을 사용했을까요? "개에게 돌을 던지면 돌을 쫓아 다니고 사자는 바로 사람을 문다(韓盧逐塊獅子咬人)"고 했거든요. 녹용을 알려면 사슴을 관찰해야지요. 녹용은 좋아하면서 사슴은 관찰하지 않거든요. 사슴의 생태를 잘 관찰하면, 녹용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알 수 있잖아요.
여러분! 돼지가 陽的인 동물입니까? 陰的인 동물이겠습니까? 돼지를 足厥陰肝經에 배속을 시켜놓았지만 어떤 기준에 의해서 陰的이 될까요? 우선 많이 먹는다는 측면에서는 陰的이 되겠지요. 무엇이든지 취하려는 기운은 강하고 내 놓으려는 기운은 별로 없지요. 돼지가 방귀를 뀌거나 트림을 하는 것 보셨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자기에게서 나가는 것이므로 잘 내놓질 않죠. 그런데 스컹크나 오징어 같은 것은 조금만 건드려도 내뿜습니다. 그러면 이런 놈들은 △△之氣가 강하겠습니까? 어쨌든 이것이 少陽인지 太陽인지는 딱 잘라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들어 마시는 쪽보다는 내 쏘는 쪽이 강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돼지는 흡수하는 기운이 강한 것으로 보아 陰的이지요. 이렇게 본래 陰的인 돼지의 신체구조 중에서 제일 아래에 돼지 족발을 쓰게 되니까 몸에 물이 고이겠습니까? 안 고이겠습니까? 그러니까 四物湯과 돼지족발을 잘 쓰면 여자들 젖 안나올 때 좋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다리부분과 머리 부분을 비교해 볼 때 어느 부분이 陽이 될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머리 부분이 陽이 될 것입니다. 사슴을 보면 아주 짧은 털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추위를 잘 견디고 오히려 눈에서 막 뒹굴지 않습니까? 눈 위에서 뒹굴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가 덥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옛 사람들은 사슴의 生態를 관찰하고 사슴의 경락을 관찰한 거지요. 그러면 경락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관찰해야 그 특징을 알 수 있을까요? 물론 사슴의 성격을 알아야지요. 사슴은 옆에서 바스락하는 소리만 나도 잘 躁動하고 튑니다. 잘 튄다고 하는 것은 陽的일까요. 陰的일까요? 일단은 陽的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니까 사슴고기 많이 먹고 녹용 많이 먹으면 아무일에나 잘 놀래고 반응이 빠르고 괜스리 민감해집니다. 어린아이들한테 몸이 더울 때 녹용을 쓰면 부작용이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기 뒤끝에 餘熱이 不退했을 때, 녹용을 쓰면 안됩니다. 세간에 떠도는 녹용 먹고, 부작용 났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한의원에 식물학을 전공한다는 여학생이 왔길래 사과와 배 중에서 어느 것이 건조한 땅에 잘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더군요. 그러나 우리 대충 생김새, 맛, 색깔만 보더라도 그것의 정체를 알 수가 있지요. 바로 이것이 사물의 말미만 보고도 근본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五運六氣의 근본 또는 상황을 보자는데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內經"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만 상황을 깨어서 단순하게 보자는 것이 저의 근본 뜻임을 여러분들은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모든 氣運이 교차하는 곳을 1차로 입술, 즉 任脈과 督脈이 만나는 자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두번째로 氣交하는 곳은 배꼽(臍)이지요. 이때에 五運六氣에서는 배꼽 위와 배꼽아래로 나누어서 보지요. 上과 下로 나누어 볼 때 天干이 지배하는 것은 계절같은 것을 말하고, 地支는 그때 그때에 변하는 기후같은 것으로 변수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가 陰陽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것을 10으로 넓혀서 분류한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만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더욱 더 연구하여 산술학적으로 발전한다면 이것을 20으로 분류한 사람도 나올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사주를 볼 때 年・月・日・時를 따져서 어쩌구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꼭 100% 맞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루 중에도 子・丑…申・酉・戌・亥가 있는데 예를들어 子時라고 하여 꼭 춥겠습니까? 한여름 밤의 子時는 춥지 않지요. 또 午時는 춥거든요. 그렇다면 사주라고 하는 것이 꼭 맞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만약에 사주가 전부 맞는다고 하면 年 月 日 時가 똑같고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하면 그 사람들의 운명도 똑 같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예를 들어 子時라고 하면 이 두 시간 안에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당나라 시대 때의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당대에 배휴와 배탁이라고 하는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일란성 쌍생아 였습니다. 그러니까 얼굴 생김새가 똑같았지요. 둘이 태어날 때 등이 붙어서 나왔으니까 거의 동시에 나왔지만 배휴가 발을 먼저 디뎌서 형님이 되고 배탁이 동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쌍동이의 부모는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세상을 떠나 하는 수 없이 외삼촌 집에서 배휴와 배탁은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동생인 배탁은 외삼촌 집에서 도망가버리고 형인 배휴만 남게 되었지요. 이 쌍동이는 어찌나 못생겼던지 둘 다 이빨은 완전히 옥니박이에다가 머리털은 하늘로 뻗치고 눈썹은 송진 붙여놓은 것같고 인상은 항상 찌부러져 있고, 너무 못생겼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가까이 하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떤 스님이 지나가다가 배휴를 보더니 "저 아이가 있으면 이 집안이 망하게 됩니다" 하고는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는지 모르지만 옛날 할아버지나 할머니께서 집에 가정부가 잘 들어오고 못 들어옴에 따라 집안이 흥하고 망한다고 하는 '業덩어리'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집에 업덩어리 하나 들어왔어" 그러거든요. 이 말 안에는 사람이 하나 들어옴으로 해서 우리집을 잘되게도 못되게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거여요.
어느 날 가정부가 하나 들어왔는데 거지가 동냥하러 오면 며느리는 "아니! 사지가 멀쩡해 가지고 동냥하러 다녀요?" 하면서 내쫓아 버리는데 새로 들어온 가정부는 몰래 뒷구멍으로 거지를 불러서 쌀독의 쌀도 내주고 밥도 먹여 보내거든요. 또 어떤 때는 자기 돈으로 동네 할머니들 모셔다가 밥도 지어드리고 도시락도 싸 보내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아들이 하는 일이 잘 되고 집안의 분위기가 이상스럽게도 화평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또 어떤 경우는 파출부 하나가 집에 들락거리면서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어제 20원을 전화거는데 쓰고 나머지 80원 하고 토큰 두 개를 책상위에 올려 놓았는데 찾아 보니까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동생이 가져갔나 보다'하고 "얘! 말자야. 내 책상위에 토큰이랑 80원 가져갔니?" "아니? 세상에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하면서 신경질을 냅니다. 그러면 혹시 엄마가 가져갔나 싶어서 "엄마! 혹시 책상위에..." "얘! 치사하게 엄마가 그걸 가져가겠니?" '그렇다면 혹시 아빠가...아니야. 아빠가 가져갔을리는 없어' 그러면서도 의심이 딱 생기게 되는거죠.
또는 아버지가 소중히 여겨온 만년필이 책상 위에서 없어진 것입니다. "차라리 돈 2~3만원이 없어지는 것이 낫지 추억이 담긴 만년필이 없어질게 뭐람"하며, 아들을 불러 세웁니다. "야! 이리와, 벌써 아버지 물건에 손을 대!!!" "아니예요. 저 필기도구 많아요" "어-엉! 그래? 그러면 아빠가 잘못 생각했구나"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왠지 석연치가 않지요.
엄마가 어느날 아빠 드리려고 손수건을 사다가 부엌에 두었는데 그 손수건이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야! 너는 아빠 드리려고 손수건 사두었는데 네가 가지면 어떡하니?"하고 야단을 칩니다. "에이! 왜 자꾸 나만 가지고 매일 그래!! 나 안 훔쳤단 말이야" 자, 그러면 지금 이 집안에 전부 없어진 것을 합쳐보면 불과 몇 천원도 안 되는데 전부 의혹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더니 이 집안이 망해요.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파출부가 들락거리면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가져간 것이거든요. "야! 이 볼펜 좋다. 재수하는 우리 아들 갖다 주자. 또 손수건 챙겨서 우리 남편 갖다 주자. 이 토큰 두 개 정도야 이 집에서 괜찮겠지"하는 盜心이 발동한 거지요. 나중에 그것이 모두 파출부의 짓이라는 것이 들통이 났어요. 그래서 "아니 그런 짓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하니까 "뭐 전부 합쳐봐야 만원도 안되잖아요" 돈 만원이 문제가 아니라 도심은 똑같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한사람으로 인해서 그 집안의 運氣가 바뀐거지요.
제가 아는 어떤 집에는 파출부는 3시간 일해주러 와서 6시간 일해주고 가고 아이들 노래도 가르쳐주고, 그림도 가르쳐주고, 책도 읽어주고 함께 놀아주니까 아이들이 안떨어질려고 하는 겁니다. 나중에는 엄마가 질투가 날 지경이지요. 그러니까 아빠, 엄마의 기분이 좋아지고 또 집안에 대한 걱정,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안하게 되니까 아빠는 사업에 전념할 수 있고 엄마는 학교 강단에 설 수 있고, 그러다 보니 파출부 한 사람 들어와서 집이 흥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옛날에 제 觀相선생님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있는데, '觀相이 不如骨相이요. 骨相이 不如心相이라' 관상이 뼉다구 相만 같지 못하고, 骨相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마음 잘 쓰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心相이 중요한 거지요. 결국은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배휴라는 아이가 그 스님의 말을 듣고 외삼촌집에 사는데 '業덩어리가 된다'고 하니, 어린 마음에 서러운 생각도 들고, 걸식을 하고 다니더라도 이집을 망하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두 가지 생각에 외삼촌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집을 나와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우물가에서 옥띠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玉으로 만든 허리띠인데 얼마나 비싸겠습니까? 이 옥띠를 본 배휴는 '이 좋은 물건을 잃어버린 주인은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하는 생각에 사흘 밤낮을 꼬박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헐레벌떡 뛰어왔어요. 이 옥띠야말로 자기 아들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그 옥살이를 면제시키기 위한 뇌물이었거든요. 이 아주머니는 절에 가서 지성을 드린다고 우물에 와 목욕을 하는 새에 벗어 놓고는 집에 가서 옥띠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거죠. 이제 사흘이 지났으니 없으려니 하고 달려왔는데 이 친구가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래서 사례를 하려고 하니까 본래 아주머니 것을 아주머니가 가져가는데 무슨 사례를 하느냐고 필요없다고 하면서 휙 가버리는 거예요. 요즘 같으면 1/10이냐, 1/100이냐? 하고 고소 붙을 판인데 그냥 가버리는 겁니다.
그러고는 여기저기 걸식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결국 외삼촌 집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힘이 들어서 도저히 거지 노릇 못하겠으니 외삼촌집에 다시 있자고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외삼촌은 옛날에 스님에게서 들은 말이 있어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할 수 없이 허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옛날의 그 스님이 우연히 그 마을을 지나가다가 이 아이를 보더니 정승이 된다고 하거든요. 아니! 옛날에 집안을 망해 먹을 놈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정승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이 아이의 운세가 바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나중에 한 나라의 정승이 되었어요. 그 스님이 이 아이를 보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니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옥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스님이 "그래, 네가 네 운명을 바꾸었구나"하고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러니까 運氣라고 하는 것도 여러분들의 用心에 달린 것이지요. 너무 외부적인 것에 기대지는 마세요. 관상도 못 생긴 상에다가 生年月日時까지 나쁘고 또 身相까지 나쁜데 心氣를 올바르게 씀으로 해서 인생이 뒤바뀌지 않습니까? 그 후로 배휴가 자기 아우인 배탁이 궁금해서 수소문하여 찾아보니까 강나루에서 뱃사공을 하고 있더랍니다. 같은 뱃속에서 같은 시간에 똑같이 태어난 이 두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운명이 다를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이 五運六氣를 잘못 공부하고 나면 자칫 운명론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 五運六氣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心氣로써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甲子年이라 하여 甲子年의 해석을 실컷하고 나면 여러분들은 갑자년이라는 것의 해석에만 매달려 가지고 자기의 心相을 평정시키려는 생각은 안하고 '나는 갑자년에 태어났으니까 갑자년생은 항상 바람을 피운다더라. 할 수 없다. 바람이나 피우자'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그건 그럴 수 있는 확률이 강하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사람이 왔다고 하면 관상가가 그 사람을 보자 마자 "당신은 어느 날 사람을 죽이겠소"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말을 들은 이 사람은 그 말이 한생각이 되어서 자기 뇌파에 입력이 되고 자기 최면이 되어서 진짜 사람을 죽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길을 가는데 여인을 겁탈하려는 놈이 있어서 두들겨 패주었다고 하면 義氣 아닙니까? 그러니까 똑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좋게 해석해 주어야 하고 또 힘이 있어 보이면 힘의 사용처를 일러 주어야지 나쁘게 해석을 해주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꼭 나쁘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전쟁이 터져서 우리 국민들을 막 죽이고 있는데 不殺生이라고 해서 적의 만행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라시대 원광법사는 세속오계를 정하면서 '殺生有擇'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 佛經의 보살경에 보면 "백만명을 살리기 위해 열 명의 악질이 있다고 하면 그 악질을 죽이는 것이 보살행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지옥에 가더라도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어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이 보살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五運六氣의 사상이 命理學 쪽으로 치우쳐서 운명론적으로 전락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후천적인 요소는 생각하지 않고, 선천적인 성품만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저는 불변이고 약간 운명론적인 선천보다는 후천적인 것이 70%이상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지요. 아무래도 선천적으로 잘못 태어나면 후천적으로 조심을 해야 됩니다.
롤스로이스나 링컨 컨티넨탈같은 차를 물려 받았다고 하더라도 매일 200km이상 속력을 내고 아무데서나 좌회전, 우회전 하다보면 사고나서 죽는 수가 있지요. 사람이 선천적으로 튼튼하게 태어나고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교만방자하여 못된 짓만을 일삼는다면 제명대로 못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천은 롤스로이스 같이 좋은 것을 타고났는데 후천적으로 용심을 못하면 안되지요. 그런데 어쩌다 모범운전수가 되어서 얍실얍실한 포니차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매일 닦고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면 자식들 대학 보내고 딸 시집보내고 저축도 착실히 하게 되니까 말년에 편안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물론 링컨 컨티넨탈같은 차에다가 그런 운전수를 만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그런데 모든 이 우주의 운세라고 하는 것은 吉・凶・禍・福이 서로 상충되게 되어있거든요. 여러분들이 완전히 깨닫기 전에는 이 운기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날씨가 흐리고 바람도 없는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라고 합시다. 외부의 이런 기운 때문에 마음은 많은 신경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조심하질 않고 매운 것에 소주까지 한 잔 먹어 놓으면 이성을 잃어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괜히 시비를 걸어서 싸움도 하고 싶고 길가의 돌맹이도 집어 던지고 싶어지는 겁니다. 버스 안에서 싸움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 싸움은 불쾌지수가 작용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기후의 영향을 안 받는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천지의 氣가 작용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五運六氣의 피해를 안 받을 겁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있습니까? 결국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 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쉽게 이야기를 한다면 선천적으로 寒氣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비오는 날 冷한 날을 싫어합니다. 뚱뚱한 사람들은 가을날을 좋아하게 되지만 여름이 되면 헉헉거리게 되고 아이스크림 먹고, 콜라 마시고, 선풍기 에어콘 다 틀어 놓아도 답답하다고 하지요. 그러나 몸이 좀 냉한 사람은 여름철에 활동적이거든요. 그러니까 風・寒・署・濕・燥・火가 인간의 기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內經"을 한 번 볼까요?
黃帝가 말씀하신다. "천지의 기가 활동하지 않는 시기가 있을 것인가?" 岐伯이 대답하기를, "만약 있다고 하오면, 만물은 발생을 정지하고 化育도 하지 않는 天池가 정지된 때일 것이옵니다" 黃帝가 말씀하신다. "천지가 정지한다면 만물의 발생, 화육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岐伯이 말씀드린다. "우주의 음양의 기가 서로 출입하지 않게 되면 창조주의 기능이 소멸되어 天氣와 地氣의 昇降이 없어져 天氣는 上에 地氣는 下에 있어서 서로 교류하는 일 없이 독립되옵니다. 곧, 음양의 氣가 서로 출입하지 않게 되오면, 만물은 일생을 통한 生・長・壯・老・死를 되풀이할 수는 없사옵니다. 天氣와 地氣의 昇降이 없어지면, 만물은 春夏秋冬의 1년을 통한 生・長・化・收・藏을 행할 수도 없는 것이 옵니다" (內經 五運六氣編 六微旨大論)
天이 위에 있고 地가 아래에 있는 卦는 불길한 卦죠. 왜냐하면 陽은 陽대로 움직여 버리고 陰은 陰대로 움직여 버리니까 氣가 소멸되어서 서로 교류하는 일이 없는 겁니다. 이런식으로 하다보면 生・長・壯・老・死, 즉 태어나서 자라고 장성하게 되고 늙고 죽는 것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결국은 우리가 왜 죽게 됩니까? 간단하게 대답해 보세요. 태어났으니까 죽는 것 아닙니까! 석가모니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고행을 하고 명상을 하다가 깨닫고 나서 첫번째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生하므로 저것이 生하고, 저것이 生하므로 이것이 生한다.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滅하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하는구나' 생이 있음에 사가 있다고 했거든요. 그럼 결국 생은 왜 있습니까? 사가 있기 때문에 생이 있는 거예요. 자! 생사문제가 나왔는데 결국은 이러한 음양이니 뭐니 하는 분류는 10으로나 100으로나 1,000으로나 10,000으로나 분류해도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融通無碍하게 분류를 하라고 "內經 五運行大論"에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이 방안에 물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처치를 하겠는가? 꼭 土克水의 원칙에 의해서 흙을 뿌리는 것이 아니고 드라이로 말려버리는 火克水의 방법도 있고, 바람으로 하겠다는 木克水의 방법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요. 그러니까 五行의 이치는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岐伯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요. 岐伯이 먼저 五運六氣의 법칙을 얘기하면서도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훨씬 많은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처음에 陰陽五行을 가르쳐주는 것은 어린아이 달래기 위한 사탕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 사탕을 먹고 들어오면 그 다음에는 휘황찬란한 꽃밭이 있는데 이때부터는 여러분들의 직관이 작용을 해야 하는 거지요.
五運六氣의 음양은 정상적인 數나 규칙으로서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象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取象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有無, 貴賤, 上下, 海中金, 沙中金, 路傍土, 壁上土 등 이 모두가 비교를 가지고 정하는 겁니다. 비교를 하려면 중심이 있어야 되는 것이죠.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늘은 陽이고 땅은 陰이다'라고 하지 않고 '하늘은 陰이고 땅은 陽이다'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어? 그럴리가 없는데...' 하며 반문을 하겠지요. 어떤 기운, 어떤 관점에서 그렇게 이야기 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손톱을 보고 陰이다 陽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건 말도 안됩니다. 비교기준이 있어야지요. 손톱을 鐵에 비교한다면 陽的이 되지만 온도상으로 피부와 비교하면 손톱이 陰的이 되는 겁니다.
제가 포항에 있을 때 손톱이 오이씨처럼 나오다가 마는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는데, 만약 여러분들이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는데 이런 환자가 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치료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울때 손톱은 어디에 속한다고 배웠습니까? 肝・心・脾・肺・腎 중에서 肝에 속한다고 배웠지요. 그러면 족궐음간경을 놓으면 좋겠네요. 아무튼 이것이 옳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손톱을 五運六氣上 어디에 두면 괜찮을까요? 陽明燥金에 들수도 있겠지요. 제가 지금 陽明燥金에 분류시켰다고해서 이것을 100%신봉하시면 절대 안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足厥陰肝經만 생각하셨으니까 이제부터는 陽明燥金도 생각을 해보라는 뜻에서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집이 한채 있다고 합시다. 철근으로 기둥을 세우고 시멘트를 바르고 안에는 도배를 깨끗이 해 놓았습니다. 또 창문을 열어 놓으면 통풍이 되는데 난방장치와 온방장치까지 두루 설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철근은 陽明燥金에 해당될테고 시멘트는 太陰濕, 난방장치는 少陰君火, 냉방장치는 太陽寒水, 또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니까 厥陰風, 따뜻한 햇빛은 少陽相火,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바람이 심하게 부니까 골재인 철근이 약해서 집이 흔들거린다고 하면 陽明燥金인 철근을 보충시켜 줄 수도 있지만 거꾸로 厥陰風을 瀉해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無有定法이 佛法이라'정한 법이 없는 것이 깨달은 사람의 법입니다. 제가 佛法이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불들은 아무래도 지겨울테니까 '無有定法이 正法이다'라고 기억해 두세요.
黃帝의 질문 중에 "象이라고 하는 것 즉 비교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象이라고 하는, 즉 비교라고 하는 것은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와 같은 것이 결국 비교된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甲이 이야기 되어질때 甲과 상대되고 그 무엇이 이야기 되어진 것입니다. 子와 午가 불이라 할 때 하나는 陽化, 다른 하나는 陰火가 되는 것인데 이런식으로 다섯 가지로 분류 비교한 것이 十干인 것입니다. 같은 少陰君火일지라도 하나는 陰火가 되고 다른 하나는 陽化가 되는데 왜 이렇게 나뉘어 지겠습니까? 그것은 주어진 어떤 환경의 차이에서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오늘 사랑하는 애인을 만났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애인의 손도 잡아주고 싶고 키스도 하고 싶고 그렇습니다. 애인 역시 마음 들떠 있는 것 같고 아주 기분이 좋은 것같아요. 그러면 만나서 둘이 아주 기분이 좋은데 만약, 애인이 집에서 나올 때 아빠에게 심한 꾸중을 들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남자 만나고 다니느냐", "다시 또 만나는 것을 알면 대학교 학비도 대주지 않는다"하고 옆에서 엄마, 오빠까지 한마디씩 거들다보니까 애인의 기분이 몹시 상해서 나온 거지요. 그러면 나의 마음이 그렇다 하더라도 애인의 기분이 몹시 나빠있는데 내 뜻대로 할 수가 있나요? 그게 잘 안되지요. 또 물질적인 상황에서 예를 보면 겨울철에 피는 모닥불과 여름철에 피는 모닥불이 똑 같이 타오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有無, 貴賤, 上下, 貧富, 緩急, 大小, 生死등은 어떤 차원의 기준에서 비교한 것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니까 깨어있는 옛 사람들의 말장난이죠. 그러니까 제 이야기의 결론은 쉽게 이야기해서 그 말장난에 속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비교 없는 마음으로 중심만 잡고 있으면 속지 않게 되지요. 이런 관점에서 경전을 본다면 "아하! 黃帝는 이런 눈으로 陰陽을 이야기 했군 五運六氣의 海中金, 沙中金의 의미는 이런 것이었군"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먼저 이론을 외우기보다는 이러한 이해의 차원을 포착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관점이 생기게 되면, 얼마든지 수많은 陰陽論을 쓸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天干地支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림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남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天干地支를 인체에 비유를 합니다.
天干과 地支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제가 天을 사람의 머리라고 이야기를 많이해 왔는데 그렇다면 머리의 운동에 따라 대비를 시켜야 당연한 것이겠지요. 뒤에 있는 그림은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를 평면적으로 이야기한 것인데 내용적이 아닌 계절적으로 배당을 해 놓은것입니다. 甲은 오른쪽 눈, 乙은 왼쪽 눈에 해당하는데 丙丁인 입은 左右가 없지요. 그러면 입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먹는일, 둘째는 말하는 일이죠. 그래서 일단 丙은 주로 언어를 주관하고 丁은 주로 먹는 것을 주관한다고 해두었습니다. 음식이라고 할 때 飮은 陽이 되고 食은 陰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飮은 마시는 것, 즉 부드러운 것을 먹는 것이고, 食은 딱딱 한 것을 먹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음식이란 말의 정확한 해석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는 색을 보면서 질을 보게 되는데 왼쪽 눈은 대체적으로 形이라든가 색을 보게 되고 오른쪽 눈은 質이라든가 光澤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제가 말씀드린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하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들으면 웃으실지 모르지만 사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하는 일이 서로 다릅니다. 실제 브라만교의 요가에서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코도 마찬가지예요. 왼쪽 코는 香을 주관하고 오른쪽 코는 臭를 주관하게 됩니다. 왼쪽은 향을 주관해서 냄새가 좋으면 왼쪽 코가 예민하게 벌렁벌렁하는 것이고 오른쪽 코가 발달된 사람은 주로 기분 나쁜 냄새를 빨리 판단하게 됩니다. 이것은 최근에 실제적으로 증명이 되었는데 그 증거로는 左腦와 右腦의 기능이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본 사람들은 계산능력이나 수학능력같은 것은 좋은데 창조적인 능력이나 종교적인 능력이 없다고 하지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창조적인 두뇌 위주로 많이 발달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민한 민족이라고 하지요. 이 左腦右腦가 공히 발달해야 잘 할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인가 하면 의사입니다. 이것은 현재 컴퓨터 상으로도 나온 것입니다. 그 다음에 庚은 우측에 있는 콧구멍, 辛은 왼쪽에 있는 콧구멍이 됩니다.
戊와 己는 제가 따로 이야기 할 것이고 壬癸는 귀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소리를 들을 때에 무엇과 무엇이 있습니까? 고저, 장단이 있고 리듬이 있지요. 그러니까 음과 율이 있는데 왼쪽 귀는 소리를 듣는다면 오른쪽 귀는 박자를 듣게 됩니다. 어린 아기들이 엄마의 젖을 먹을 때 제일 가까이 듣는 것이 엄마의 심장소리라고 합니다. 쿵쿵쿵하는 소리가 가장 기본적인 리듬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요즘 유행하는 빠른 탬포의 음악, 아프리카 원시인들이 두드리는 북소리같은 것을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지요?
유치원 꼬마 아이들을 모아 놓고 외국곡을 틀어주면 신나게 춤을 추는데 갑자기 한국전통의 음악인 아리랑 같은 음악을 틀어주면 금방 춤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자체의 리듬이 있지요. 우리나라는 문화가 상당히 오래 되어서 넉적지근하게 교활하고 세련된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초적인 리듬은 아프리카 토인들이 가지고 있는 원시적인 리듬에 가깝다고 합니다. 아기들이 모체내에서 듣는 음이 엄마의 心音인데 -태내에서는 얼마나 크게 들리겠습니까? 평소의 엄마 마음이 평정되어 있을 때에는 쿵쿵쿵하다가 불안정한 상태가되면 쿵쾅쿵쾅 요란스럽게 되겠지요. 가만히 보면 모든 북소리는 심장음과연결이 되는 것같습니다. 호흡은 1분에 1②!16번 정도가 정상인데 우리 민족은 호흡의 민족이고 아프리카같은 곳은 심장의 민족입니다. 그러나 서양은 두뇌의 리듬만을 생각하지요.
여러분! 이 소리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TV를 틀어 놓고 소리를 안나오게 해보세요. 얼마나 우습습니까? 그러니까 이 리듬이라고 하는 것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하고 또 인간들은 이 소리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거든요. 이제 戊와 己가 남아 있는데, 己는 나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戊는 너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앞의 그림을 보시면 전체적으로 이해하기가 쉬워질텐데 대체적으로 나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음식을 좋아하고 향을 좋아하고 형상이나 색깔 있는 것을 좋아하고 음악도 리듬 위주 보다는 고저위주를 좋아합니다.
그러면 이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가 전부 무엇으로 총괄되느냐? 하나는 나 위주로 생각하는 것, 다른 하나는 너 위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것은 陰이면서 氣穴論에서는 血에 해당하고, 너 위주로 생각하는 것은 陽이면서 氣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꼭 그런것은 아니지만 중풍같은 경우에 뚱뚱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어느 쪽으로 중풍이 오겠습니까? 뚱뚱한 사람이 중풍이 온다고 하는 것은 오른쪽 氣가 虛해서 오는 것이거든요. 또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陰的인데 어느 쪽으로 중풍이 오면 불길하겠습니까? 여자들은 선천적으로 무엇이 허합니까? 氣가 虛하거든요. 여자들은 본래 陰이 實하고 陽이 虛한데 본래 虛한쪽으로 중풍이 왔으니까 虛한 쪽이 또 늘어져 버린 겁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陰陽氣血論에 근거하여 나온 말들인데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냥 說로만 들어두시기 바랍니다. "우리 엄마는 오른쪽으로 중풍이 왔는데 잘낫던데요" 이러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설이 있다는 이야기 정도로 들어두시면 됩니다.
자! 그러면 몸통에 관하여 한 번 볼까요?(앞의 그림을 참조하세요.) 子와 午는 少陰으로 子는 足少陰腎, 午는 手少陰心이 되고, 卯酉는 陽明으로 卯는 手陽明大腸, 酉는 足陽明胃가 되지요. 丑과 未는 太陰이며, 丑은 手太陰肺, 未는 足太陰脾... 이런 식으로 있는데 이 도표를 자세히 보면 상하의 관점에서 辰・戌・丑・未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辰戌丑未는 命理學에서 우리와 같이 六氣的인 방법으로 보지 않고 五行的 방법으로 보아서 土라고 합니다마는 手太陰의 자리에 足太陰脾가 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실제로 '의학입문'에 보면 앞의 도표처럼 되어 있거든요. 일단 내용상으로 도표처럼 배속을 시켜 드렸습니다. 그럼 子에 해당하는 足少陰腎의 卦를 한번 볼까요? 地雷復卦라고 하는데 앞에서는 우리가 六氣와 五運이 혼합된 火水未濟卦로 足少陰腎經의 성격을 관찰했지만 이제 여기서는 계절적인 관점, 소위 春夏秋冬의 관점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一陽이 하나, 두개, 세개가 되는 地雷復, 地澤臨, 地天泰卦는 여러분들이 周易책을 찾아서 연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차례로 12卦를 조사하고 나면 벌써 24卦는 공부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이거든요. 이 卦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잘 모르고 저도 잘 모르는 것이지만 走馬看山격으로 대충 卦象이라도 한번 짚어보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위에 그려진 12地支에 해당하는 卦象이 진짜 卦象입니다. 그러니까 足少陰腎에 해당하는 子의 卦象을 그려보라고 하면 一陽이 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거든요. 앞에서는 六氣적인 관찰을 한것인데 이는 방향적인 관찰일 뿐 입니다. 이 정도로 五運六氣에 대한 개괄적인 얘기를 끝내고 좀더 세부적인 사항을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Copyright(C) 2001 Sa-Am non-profit Acupuncture Service All rights reserved.
http://www.saam.net/saamacu/revolution/rev4-9.htm
4. 오운 육기
9.
이 四象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분들에게 많은 암시를 드렸습니다. 四象은 어쨌든 선천적인 것, 불변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제가 말씀드리는 四象과 이 제마 선생님의 四象論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여러분들은 혼동하지 마세요. 제가 이 강좌를 하면서 사실은 무척 불안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禪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너무 안다고 하는 자만심에 정신차리라고 찬물을 끼얹는 것이며 각성을 촉구시키기 위함이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四象이나 五運六氣는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甲戌生이다'라고 하면 甲은 木火土金水 중에서 어디에 해당합니까? 甲己 合土가 되지요. 그러면 土가 實한 것입니까? 虛한 것입니까? 實한 것이지요. 土가 實하면 상대적으로 무엇이 虛해 지겠습니까? 당연히 土克水가 되니까 水가 虛해지겠지요. 또 土가 實하니까 무엇이 무시를 못할까요? 木이 무시를 못하겠지요. 木이 무시를 못하니까 木도 虛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1차로 虛해지는 水와 2차로 虛해지는 木의 상황을 다각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五運六氣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우리 인체에 예를 든다면 脾臟을 볼 때 신장도 검토하고 간장도 검토하는 것이 바로 의학적인 차원의 五運六氣法인 것입니다. 그런데 命理學에서는 辰戌丑未를 무엇으로 봅니까? 土로 보지요. 그중에서도 어느 것이 陽이고 어느 것이 陰입니까? 辰戌丑未 중에서 어떤 것이 陽土이고 어떤 것이 陰土인가를 구분하여 그것이 서로 만나는 상황을 플러스시켜 일어나는 일체의 일을 추리해 내는 것이 命理學입니다. 이것은 "內經"에 있는 법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命理學을 공부한 사람들은 또 혼동이 되죠. 우리는 戌을 어떻게 공부했습니까? 太陽으로 공부했잖아요. 그러면 太陽은 무엇입니까? 太陽寒水아닙니까. 그러므로 太陽寒水와 土가실한 것(甲)이 플러스된 종합적인 상황을 공부하는 것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전반부에 太陽寒水가 司天을 지배하면 후반부에는 무엇이 지배하게 됩니까? 太陰濕土가 지배하게 되지요. 전반부 6개월을 太陽寒水가 지배하면 후반부 6개월은 太陰이 지배를 하게 됩니다. 다음의 도표는 司天과 在泉을 나타낸 것으로 여러분들은 꼭 아셔야 합니다.
|
司天 |
在泉 |
子午 |
少陰君火 |
陽明燥金 |
丑未 |
太陰濕土 |
太陽寒水 |
寅申 |
少陽相火 |
厥陰風木 |
卯酉 |
陽明燥金 |
少陰君火 |
辰戌 |
太陽寒水 |
太陰濕土 |
巳亥 |
厥陰風木 |
少陽相火 |
五運六氣의 해석은 命理學(하늘에서 주어진 명과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과는 전혀 다릅니다. 五運六氣에서는 비유가 많지요. 여러분 이지함선생이 쓰신 "土亭秘訣"을 보면 마치 시와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작은 글자 안에 많은 의미를 포함시키려는 옛 선인들의 노력이며, 또 이 모든 것들이 경전에 근거를 둔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 하는 四象論은 전혀 문헌적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만들어 내었는가? 저도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인데 제게 이것을 일러주신 분도 "그냥 그렇게 보는 법이 있다더라. 그런데 재미가 있지 않느냐? 임맥과 독맥만 가지고 보는 것이 사실적일테니까..." 하더군요.
자! 그러면 四象이란 무엇인가? 쉽게 이야기 하면 眼・耳・鼻・口죠. 이것이 四象이라는 전제조건 하에 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물론 이것은 東武 이제마 선생의 四象論에도 나오지요. 귀로는 무엇을 듣고 입으로는 어떻고, 눈으로는...그래서 肝大肺小, 肺大肝小, 脾大腎小, 腎大脾小가 등장하고 4가지의 虛實을 보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저는 四象에 肝脾腎肺가 존재한다기 보다는 八卦에 가서 존재한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 하면 肝이라고 한다면 六經上으로는 足厥陰에 관계되고 五行上으로는 木에 해당하는 것이거든요. 五臟은 六腑와 상대적이니까 5장을 이야기 하려면 6부를 이야기 해야 되고 또 5장을 이야기 하려면 6經을 이야기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그냥 알기쉽게 眼・耳・鼻・口로 나누는 겁니다.
얼굴을 보면 둘은 들어갔고 둘은 나왔거든요. 눈과 입은 들어가 있으니까 陰이라고 보고 코와 귀는 나왔으니까 陽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얘기하는 四象이라고 하는 것은 陰과 陽이 갈라져 하나는 太陰, 하나는 太陽이 되고 중간에 少陰과 少陽이 되지요. 그러면 陽에는 무엇이 배속되고 陰에는 어떤 것이 배속될까요? 陽에는 우선 코와 귀가 나왔으니까 陽이 되는데 코는 太陽, 귀는 少陰이 배속되고 陰인 눈과 입은 太陰과 少陽이 됩니다.
그러니까 肝大肺小, 肺大肝小 이런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아서 두개는 陽, 두 개는 陰인데 卦象으로 본다면 太陽은 陽중의 陽, 少陰은 陽중의 陰, 少陽은 陰중의 陽, 太陰은 陰중의 陰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결국은 眼・耳・鼻・口의 虛實에 따라 그 사람의 선천운, 대부분의 성격 또 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질병을 추리하는 독특한 周易法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太極에서 陰과 陽을 낳고, 이 陰陽이 陽陽, 陽陰, 陰陰, 陰陽으로 분화되고 다시 여기에서 八卦로 나뉘어지는데 陽陽, 陽陰, 陰陽, 陰陰이 鼻耳口眼이라는 서로 짝이 되는 상황을 유발시켜 놓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은 잘 들으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陽陽을 비라고 배속시켜 놓고, 코는 實하고 눈(陰陰)은 약하다고 합시다. 코가 가지고 있는 상황이 강하고 實하니까 (陽陽)여기에서 갈라진 督脈과 太陰이 강하겠지요. 그러므로 이 사람은 대체적으로 督脈과 手太陰肺, 足太陰脾 쪽에 實病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대신 거꾸로 眼(陰陰)이 약하니까 여기(陰陰)에서 갈라진 任脈과 艮山卦인 陽明經이 虛할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말씀 드린 것중에서 肺와 脾가 實하다, 약하다 하는 의미는 경락상의 이야기 일 뿐이지 실제 臟腑인 肝腎脾肺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절대로 혼동은 일으키시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선 이 사상이 가지고 있는 도리는 어떤 것이 있는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가? 눈・코・귀・입 중에서 눈과 입은 들어가고 코와 귀는 나왔는데 서로 相合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코(陽陽)와 눈(陰陰)이 서로 相合이 되고, 귀(陽陰)와 입(陰陽)이 相合이 됩니다. 그러니까 鼻大眼小, 眼大鼻小, 耳大口小, 口大耳小 등 4가지로 분류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코가 크고 눈이 작은 사람의 체질을 太陽人, 눈이 크고 코가 작은 사람을 太陰人, 귀가 크고 입이 작은 사람을 少陰人, 입이 크고 귀가 작은 사람을 少陽人이라 이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다가 東武 이제마 선생님의 의견을 존중하여 臟腑를 하나씩 집어 넣는다면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됩니다. 肝大肺小는 太陰人, 肺大肝小는 太陽人, 脾大腎小는 少陽人, 腎大脾小는 少陰人이 되지요. 이것은 이제마 선생님의 四象論에서 각자 取象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마선생님께서 四象을 처음 의학계에 내 놓으시면서 굉장히 고민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東武선생님께서 四象醫學을 내 놓느시게 된 이유는 똑같은 약인데도 어떤 사람은 감기에 걸리던, 소화가 안되던 간에 六味地黃湯만 쓰니까 낫더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구태여 복잡하게 병을 볼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어느 정도 결정된 상황을 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요즈음도 일부 四象醫學者들은 일생동안 변하지 않는 본질들을 분류해 놓고 또 거기에 혈액형까지 첨가시킨 분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이 四象醫學을 깊이 연구하고 천착하여 이제마선생님의 위대하고 깊은 뜻을 더욱 발전시키시기를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이제마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5臟의 虛實로 분류한 臟腑四象論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대로 눈・코・귀・입을 보고 太陰・少陰・少陽・太陽을 분류하는 觀相四象論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죠. 우리는 어떤 얼굴의 생김새, 즉 코가 크고 눈이 작느냐? 귀가 크고 입이 작느냐? ...를 보고 선천적인 성품이라든가 운명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가 않거든요. 더구나 우리는 관상적인 면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성품적인 차원에서 많이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상상력과 추리력이 많이 필요하게 되지요. 그런데 사람 얼굴을 보면 눈・코・귀・입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런 사람을 보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陰陽和平之人'이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제 얘기는 누구나 다 四象으로 나눌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東武(동무이제마(1838~1900) 조선말기의 한의학자. 혼는 동무. 한의학을 깊이 연구하고 총정리하여 '사상의학'이라고 하는 새로은 한의학의 한 계통을 세웠다. 그의 학설은 사람이 각기 타고난 체질을 잘 파악하여 거기에 맞는 치료법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선생님께서도 四象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은 성인이나 도인, 또 나름대로 무언가 화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東武선생님께서도 마지막 돌아가실 때는 회의를 느끼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일생 동안 연구를 했는데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뭔가 잘 안되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실토를 하시면서 후학들의 천착을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학 중의 하나가 바로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전부 눈이 크고 코가 작고 귀가 크고 입이 작은, 즉 공식에 맞는 얼굴들만 있는 것이 아니죠. 눈이 크고 귀가 작고 입이 클 수도 있고 입이 작고 눈이 큰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제 四象論이라고 하는 것은 어거지로 갖다가 붙여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을 볼때 직감으로 보아서 조화가 있는 얼굴을 아무리 작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왠지 아름다와 보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덩치가 크더라도 가분수가 되면 이상하고 또 신체의 아래위가 균형이 맞는다 하더라도 눈은 큼지막한데 코가 조그맣다거나 입은 큼지막한데 눈이 쬐그만하다면 어딘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지요.
이 우주는 완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四象論에 의거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종들을 본다면 이 지구는 太陰・太陽・少陰・少陽人이 다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저 우리 나라 사람들만을 보고 '少陰人이 많겠구나'하고 생각한다면 이건 편협된 생각이지요. 예를 들어서 서양인들을 보면 코가 상당히 크지요. 그러니까 그들의 성격은 어떻겠습니까? 살기가 많고 이기적이고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대신에 또 장점도 있지요. 그러나 동양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보편적으로 보면 아무래도 콧대가 좀 낮거든요. 그러니까 콧대가 높은 서양인을 太陽人이라고 한다면 콧대가 낮은 사람이 콧대가 높은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자기의 허한 부분을 실한 상태가 보충해주므로 기분이 좋겠지요. 厥陰經이 虛한 사람이 厥陰經이 實한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콧대가 높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행세를 하고 황제감이라고 추앙을 받는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처럼 콧대가 낮은 사람들은 거꾸로 서양에 가면 황제감이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서양은 전부 코가 큰 사람들 뿐이므로 전부 자기가 가지고 있는 氣運이 實하기 때문에 자기들도 괴로운 법이거든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 四象醫學的으로 太陽人은 만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하다고 합니다. 이제마 선생님은 자기자신을 어디에 분류했을까요? 자기자신을 太陽人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은 太陽人이라고 했거든요. 그렇다고 太陽人이 꼭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나라에 가면 太陽人만 존재할지도 모르잖아요. 이기주의자인 여러분들은 四象醫學을 공부한 교수가 진맥을 해보고 "자네는 太陽人인데"하고 이야기 해 주길 원하지요. "자네는 국무총리감이야. 장군감이야. 자네는 리더쉽이 있어" 이런 말을 해 주면 좋아합니다. 실상은 전혀 리더쉽도 없으면서 太陽人이라고 분류해주면 좋아하거든요. 저는 사상의학을 공부한 이래로 친구들만 보면 "아무래도 자네는 찾아보기 힘든 太陽人같애"하고 아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좋아 하더군요. 코도 납작하고 진취력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 해 주었다고 해서 좋아하는 모습은 정말 가관입니다. 그런데 이 太陽人 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그렇게 좋은 것일까요? 넷중에 하나가 분류된 것인데 말이죠.
길에서 파는 인형이라 하더라도 생김새가 오목조목하고 잘생긴 것을 갖고 싶어하잖아요. 여자가 비록 키는 작다하더라도 오밀조밀하고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올 데는 나온 여자와 결혼하고 싶지 덩치는 큰데 코는 한주먹에다가 눈은 아주 작고, 입은 함지박만한 여자, 이런 여자는 매력이 없거든요. 덩치가 크면 농구선수로 보내든지 씨름판에 내 보내야지 여러분들이 같이 살려고는 안하잖아요.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지요. 좀 작더라도 균형 있는 남자를 좋아합니다. 인간은 체격 뿐만아니라 얼굴에 어딘가 균형이 있으면 아름다와 보입니다. 그러니까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균형이 잡힌 그림을 좋아하잖아요.
이 지구를 보면 어느 곳은 太陽人이 많이 살고 어느 곳은 少陰人, 또 어느 곳은 太陰人 이런식으로 특정한 인종이 모여사는 곳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부류가 많이 살고 있을까요? 少陰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유럽 쪽에서도 희랍지방 사람들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서양적인 냄새가 있으면서도 동양 사람들과 비슷하거든요. 감정도 비슷해요. 그러므로 그들 또한 少陰人에 가깝겠지요. 그러면 눈이 크고 코가 쑥 들어간 민족이 어디에 있을까요? 아프리카 흑인들을 보면 남녀 모두가 눈은 크나 코는 납작합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을 볼 때 눈이 큼지막하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됩니까? 어딘가 마음이 약해 보이고 서글서글해 보이지요. 대체적으로 돼지코에다가 눈이 큰 사람들은 덕성이 좋고 뒤를 잘 돌보아주지만 남 앞에는 잘 나서지 않습니다. 진취적이질 못하죠.
이 우주는 완벽한 神의 작품이거든요. 그러므로 지구상에 있는 모든 實하고 虛한 것을 한데 섞어 놓는다고 하면 어느 나라는 그와 상대적인 어떤 나라와 맞물고 돌아가게 되겠지요. 그래서 어떤 周易學者는 우리 나라와 미국을 卦象으로 풀어내는데 미국은 少女卦인 兌卦가 되고 우리 나라는 少男인 七艮山卦에 해당되어 少男少女가 친하게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이 말은 제가 어떤 사람한테 들은 말인데 그저 들은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이 많아서 못살 수 밖에 없었고 미국은 평야지대이어서 곡식이 많이나므로 우주의 섭리상 미국과 한국은 친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들어보니 그럴듯 하긴 한데 '잘도 갖다가 붙이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周易卦象으로 볼 때 지구는 하나로 보게 되거든요. 地球村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는 어느 나라와 친하게 될 수밖에 없고, 또 어느 나라와는 밀어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六經上으로나 八卦上으로 가능한데 우리가 어떤 나라의 기후라 든가 풍습을 잘 모른다 하더라도 四象的인 관점에서 생김새만 보더라도 알 수가 있겠지요. 여러분!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 코는 빈대코인데 눈이 크다 그러면 그와 반대되는 여자를 만나면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내가 입이 크고 귀가 작다 하면 입이 작고 귀가 큰 여자와 만나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 뿐만이 아니라 친구도 마찬가지이고 사업이나 인생의 모든 문제에 전부 맞아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의 얼굴만 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 심지어는 臟腑의 虛實論까지 알 수가 있지요.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臟腑의 虛實論이란 肝大肺小, 脾大腎小 등이 아니고 鼻大眼小라 할 때 太陽人이 되니까 陽卦에서 갈라진 乾卦와 兌卦가 實하게 되고 坤卦와 艮卦가 虛하므로 어느 경락은 實하고 어느 경락은 虛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마 선생님께서 언제 四象醫學을 쓰셨는지 아십니까? 일반적인 처방으로 잘 낫지 않는 난치병에 많이 썼지요. 난치병에 四象方을 많이 씁니다. 환자를 볼 때 처음부터 四象方을 쓰시는 四象醫學의 대가들도 많이 계십니다만 도저히 경락상으로 포착을 하지 못할 때, 선천적인 경락의 문제가 제기될 때 이 四象方을 쓰게 됩니다. 환자를 치료하는데 갖은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그 환자의 입술이 유난히 크다는 것을 보고 '어느 경락이 實하고, 어느 경락이 虛할테니까 어떤 경락을 補해 주면 되겠다'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입이 크기 때문에 五巽風卦와 六坎水卦가 實하니까 厥陰經과 太陽經이 實하겠죠. 그런데 입이 하는 일은 음식을 먹는 일과 말하는 일인데 이 환자는 말은 잘 못하는 것에 비해 먹는 것은 잘 하므로 음적인 것이 발달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역적이고 귀납적인 추리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舍岩鍼術法이라고 하는 것은 신비한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앞으로 환자를 볼 때 이렇게 치료를 해도 안 낫고 저 방법을 써도 안 나을 때 얼굴의 균형을 한번 훑어보세요. 그 중에 눈이 하는 일, 귀가 하는 일, 입이 하는 일을 잘 생각해서 陰陽으로 나누어보면 그 경락이 둘로 압축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補하든지 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눈코귀입이 하는 일을 다시 한번 살펴 볼까요? 눈과 입은 상하로 움직입니다. 입은 아래(下)가 動하고 눈은 위(上)가 動하지요. 그러니까 하나는 陰이 動하고 하나는 陽이 動하게 됩니다. 제가 앞에서 왼쪽 눈은 形이나 色, 오른쪽 눈은 質을 본다 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눈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보는 일이지요. 여러분들이 어떤 대상을 '좋다 싫다 안다 모른다'하는 인식은 우선 먼저 보고, 듣고 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六經的인 차원보다는 四象論이 훨씬 더 원초적인 것이며,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어떤 대상을 보고 전부 좋다 싫다하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에 눈길이 가는 곳 귀에 들리는 것이 제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재즈음악이 들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영화간판이 눈에 잘 띄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로얄 오페라단 공연 포스타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소리가 유난히 잘 들릴 것입니다. 왜 그렇게 똑같은 눈코귀입인데 하필이면 그곳으로 눈이 자꾸 가고 귀가 움직일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사물을 그저 무의식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있지요. 이 眼・耳・鼻・口 四識이 움직이는 것은 너무 빨라서 포착을 할 수 없지만, 도인들은 자기가 듣고 보고 느끼고 있는 것을 깨달으면서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하는 이 4가지 識이 움직이는 지각이라고 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9/10는 무의식 세계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의 의식 세계는 1할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어느날 남편이 부인의 뒷머리를 힘껏 쳤습니다. 그런데 그만 부인의 눈이 바닥에 툭 떨어져 버렸지요. 놀란 남편이 황급히 부인의 눈을 주워서 얼른 끼워 주었는데 이 부인이 신경질을 내면서 하는 말이 "여보! 골이 보여" 남편이 급히 주워서 끼운다는 것이 그만 거꾸로 끼운 것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눈은 밖을 쳐다보는 眼識보다는 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눈을 개발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눈으로 보이는 肉眼의 세계만이 전부인 양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것은 혹시 여러분들이 만들어 내는 환상이 아닐까요? 지금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이곳에 벽이 있어서 바깥이 보이지 않지만 벽을 헐어내면 바깥이 잘 보이게 될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의 육안이 마치 벽과 같아서 영적인 사실들을 보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육안이 대단한 것인양 생각하시겠지만 이것이 어떤 매개체는 되겠지요. 허나 그것이 바로 번뇌의 근본이올시다.
道를 닦는다는 것은 이러한 본다는 것, 듣는다는 것으로부터 자유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안 들리고 보이는 것이 없는데 개는 왜 멍멍 짖고 꼬리를 흔듭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어떤 여자가 옆에서 노래를 부르면 왜 그곳으로 마음이 확 끌려갈까요? 개들끼리 막 짖어대고 까치들이 까깍 거리며 이리저리 오가곤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만이 가지고 있는 靈性, 자기들만의 전달방법, 그러므로 저는 그들만이 보고 느끼는 眼・耳・鼻・口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눈을 한번 감아보세요. 눈을 감았다고 잠을 자는 것은 아니죠. 깨어 있는 상태에서 캄캄한 것이 보입니다. 눈이 하는 일은 일체의 색깔과 물질을 봄인데 눈을 감으면 깜깜한 것이 보입니다. 눈도 서로 상대적인 관계가 있는데 눈이 색깔이나 딱딱한 질같은 것을 보면서 피로했다면 우린 무엇으로 풀게 됩니까? 수면으로 풀게 되지요. 눈을 감음으로써 풀게 되잖아요. 그런데 자꾸 수면만 취하면 어떻게 될까요? 눈이 안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色과 空의 상호 보완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또 귀의 역할을 우측 귀와 좌측 귀로 구분을 해보면, 하나는 聲을 듣고 하나는 靜을 듣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베에토벤의 교향곡에서부터 브람스, 바하 또 비틀즈, 마이클 잭슨에 이르기까지 많은 음악을 듣고 지쳤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의식이 많이 작용했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편히 쉬고 싶을 것입니다.
입은 먹는 일과 말하는 일을 하는데 그런데 말을 지나치게 많이 했다고 합시다. 말도 많이 하게 되면 지치거든요. 그런 때는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말과 침묵은 서로 상대적인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많은 津液이 소비되므로 말을 적게해서 內氣를 길러야 합니다. 또 말을 너무 안하는 사람은 말을 시켜야 되지요.
그 다음에 코가 하는 일을 볼까요? 코는 주로 냄새를 맡는데 냄새 중에서 하나는 기분 좋은 냄새인 香과 기분 나쁜 냄새인 臭가 있습니다. 그런데 코는 내뿜는 일과 들이 마시는 일을 하거든요. 이 호흡 말고 通과 塞이라는 것이 있지요. 눈은 色과 空, 귀는 動(聲)과 靜, 입은 언어와 침묵, 코는 通과 塞 이것이 四象이 하는 일입니다. 이 유식론은 불교에서 도통했다고 하는 사람에게 13년을 강의해도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 만큼 內觀이 어려운 것이겠지요. 여러분! 종이와 붓을 꺼내 놓고 한일(一)자를 한번 써 보세요. 어떤 글을 정성들여서 쓴다거나 명치 밑을 觀하려는 마음을 갖는 즉시 호흡이 딱 멈추어지게 되지요. 기분이 나쁘거나 최루탄 연기를 마셔서 숨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기분이 좋고 무엇인가 응시를 하게 될 때 숨이 꽉 막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렇게 멈추는 작용을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눈을 감을 때는 휴식의 방편도 있지만 '보기 싫다'라는 뜻도 내재되어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대상을 볼 때 눈・코・귀・입이 움직이는 것이 제 각각 모두 다릅니다. 귀로 들으며 말하는 사람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래위로 훑어보는 사람도 있고 옆으로 쳐다보는 사람, 또 눈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어느 경락이 虛하고 實한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경계할 때의 눈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눈을 부릅뜹니까? 눈을 감게 됩니까? 여러분이 애인과 입맞춤을 할 때 애인의 눈이 어떻게 됩니까? 스르르 감게 되지요. 만약에 눈을 안 감는다고 하면 그건 분명 섬뜩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과 입이 하는 일도 아주 미세하긴 합니다만 긍정과 부정의 뜻이 내재해 있는 겁니다. 여자가 키스를 해 달라고 하면서 눈을 부릅뜬 경우 봤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는데 통달했을 겁니다. '아하! 이건 시기로군', '질투로군', '이건 탐욕이로군', 이런것을 관찰했으면 이제부터는 '이건 코가 움직이는 것이로군', '귀가 움직이는 것이로군', '혀가 움직이는 것이로군'하는 것을 느끼셔야 합니다. 이것까지 관찰해야만 천지를
초월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넓게 각성한 의식이 우리 감각을 활짝 열어 물질적인 사물과 접촉케 한다. 만일 거기에 우리에게 직접으로 접촉할 수 있는 보다 고상한 정신적 작용이 있다면, 그 정신적 작용의 심리학적 조건은 잠재의식계의 소유일 것이며, 이 잠재의식계만이 정신적 작용에 접근하는 기회를 줄 것이다. 각성한 생활의 소음은 꿈같은 '승화'로 반개 혹은 전개된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몇년 전에 읽은 吳經熊(1899년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법철학을 공부했으며 그후 미국에서 중국철학과 문학, 법학등을 가르치면서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 교황청의 공사로도 근무했다. 유명한 홈즈 대법관의 정신적인 제자인 동시에 법학자이며 외교관이자 철학교수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정의의 원천", "동서의 피안"등 종교와 동양사상 그리고 자연법에 관한 심오한 책들을 써냈다)의 '東西의 彼岸'이라는 책에서 내가 읽은 내용입니다. 이 소음이란 바로 우리에게 매달려 있는 번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바른 직관을 가지려면 이 번뇌란 '놈'을 이겨야만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감정공부보다는 눈길이 가는 곳, 들리는 것마다 느끼고 깨달아 보세요. 옛말에 "여자의 고개가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눈도 왼쪽으로 내리 깔고 있거든 네 말을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라 하지만 오른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으면 살기를 가지고 있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관상법에서는 움직임까지도 포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眼・耳・鼻・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차원을 깊이 연구하셔서 이런 차원에서 가질 수 있는 성격같은 것을 많이 유추해 보십시오. 이론이나 지식의 움직임 보다는 직관적인 차원을 개발해 보십시오.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삶과 죽음이 분리되어 있고 건강과 불건강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런 분리의식이 우리에게 질병을 주는 것입니다. 건강과 질병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질병이 곧 불건강이죠. 제가 처음에 여러분들에게 '妙觀察智'를 주장했습니다. 사람이나 동물도 묘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을 太陰으로 치료할 것이냐, 太陽으로 치료할 것이냐 하는 것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만 이제부터는 '平等性智'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의사라 하여 "나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라고 하고 있는데 도대체 병은 누가 고치는 것인지, 어떤 것이 질병을 고치는 주인공인지, 과연 꼭 약물에만 의존해야만 하는 것인지 또 神이 고친다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인지 이런 것을 한번 짚고 넘어가 봅시다. 결국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陽明이라든지 太陰이라든지 어떤 한 기운이 오래 쌓인 것이 바로 질병입니다. 그런데 이 질병이 영원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한 것일테죠. 그러나 이 우주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주의 법칙은 무상하거든요. 질병 자체도 변하는 것입니다.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약물로 치료를 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觀하는 능력,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게 약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몇 가지 약이나 침을 놓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환자를 치료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참으로 치사스런 얘기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설령 병을 여러가지의 합병증으로 지녔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주 전체에서 볼때 있을만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또 그것 자체가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불건강이라는 차원만 이해하고 나면 또 질병 자체가 영원하다는 생각만 떨구어 버리고 나면 질병 자체에서 오는 공포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의 양방의학이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가장 무서운 세뇌공작 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불치다. 고칠수 없는 암이다.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라고 하는 그 '불치'라고 하는 강박관념이올시다. 그런 말을 환자가 듣게 될 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 스스로는 죽지 않는것, 죽음의 공포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깨닫기만 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를 않는 겁니다. 저는 우리 의사들이 제3세계에 제3의 물결이 벌어질 이 시대에 이런 능력을 일깨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정신적, 사상적 배경이 "內經"이나 우리의 경전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제게 와서 이제 많이 피곤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禪問答도 던져 보고 수많은 유심적인 차원에서 많은 암시를 드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많은 혼란을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이면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눈치를 채셔야 합니다. 제가 여러 잡다한 것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여러분들은 혼란에 빠지질 않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끊임없는 말장난을 늘어 놓는다면 여러분들은 나중에 제가 이야기 한것을 이론화하여 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관념의 노예가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은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죠. 현재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과거에 사는 사람이 됩니다. 제가 舍岩針法을 이론과 지식으로 공부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연구하여 보자고 제창했다면 이론부터 가르쳤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전혀 이론부터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舍岩針法 책 처음에 어떤 환자를 手陽明大腸經으로 치료해서 낫게 해 주었다면 '왜 手陽明大腸經을 썼을까'하는 한가지 만을 가지고 그것이 이해될 때까지 설명했겠지요. 저는 한 가지가 풀어지지 않으면 그 다음을 진행시키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많은 학문체계를 완성하고 나름대로의 어떤 것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저는 긴세월 동안 무지무지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마치 백내장 걸린 사람이 엉터리 수술을 받아서 희끄무리하게 세상이 보이는 것처럼 그저 조금 보일락말락할 정도로 보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식물과 광물, 모든 무생물과 인간이 모두가 똑 같은 識情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 모든 것이 신의 내재된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 모든 병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하나가 부족해서 오는 것이고, 하나의 깨달음이 없어서 오는 것인데 그 깨달음만 얻으면 질병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여러분들 중에서 舍岩針法을 공부하고 五運六氣 조금 알았다고 해서 자기 Ego의 확대로 삼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저에게 속은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나를 얻어서 이렇게도 얘기해 보고 저렇게도 이야기 해 보고 그때그때의 분위기에 따라서 예를 다른 것으로 들어드린 것 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때그때의 분위기에 따라서 예를 다른 것으로 들어드린 것 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때 뿐이었습니다. 옛날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소용돌이, 나는 불교인, 나는 기독교인, 나는 한국인, 너는 일본인 이라고 하는 터무니 없는 민족주의, 종교주의에서부터 지연에 얽매이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이런 관념의 분리가 심지어는 건강과 질병도 분리를 시켜버리더군요.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분노가 있고 시기 질투가 있는데 나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지구상에 있는, 남을 건강하게 해주려고 하는 의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건강할까요? 한의학과 학생들이 본과 4년을 마치고 나면 국가에서 인정한 면허증을 받지마는 정말 그러면 한 생각 이전의 도리, 진리에 대한 각성, 또 진정한 의미에서의 환자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서는 의사로서 공부를 시키는데 있어서 질병을 치료하는데도 어떤 이론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陰陽이니, 四象이니 이야기 하는 것은 옛 성인들이 부득불 그렇게 이야기 했다는 것을 예를 들어 보인 것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실로 사랑하는 애인이나 정말 사랑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들이 항상 의사에게 돈 내놓고 자신의 몸을 맡기도록 해야할까요? 혼자서 병을 치료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지요. 바로 이런 것을 黃帝內經에서는 암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강좌에서 여러분들이 전혀 듣지 못하던 이야기를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호기심을 돋구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만약 제가 매일 본마음을 찾아라. 분리 없는 마음, 공포 없는 마음, 소유없는 마음만을 강조한다면 금방 지루해지겠지요. 그러니까 몇 가지의 이론 체계를 드러내면서 신의 공덕, 깨달음의 공덕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도 이야기 해보고 저렇게도 이야기 해보는 것에 여러분이 속는다면 여러분들은 40일 동안 더 죽어서 나가게 됩니다. 舍岩이란 도인의 노예가 돼버리는 거죠. 도대체 舍岩針法을 들으러 온 놈은 누구며 厥陰・少陰・太陰을 운운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제가 사상이 어떻고 오운육기가 어떻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필요이상으로 많이 들어있는 이론이라는 허상을 깨기 위해서 극약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개중에 영적으로 아주 개발되어 있고 사랑이 넘치고 마음이 비어 언제든지 겸손한 상태로 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군더더기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한번 보면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이 빈 상태까지 갈 수가 있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우리 한의사들이 "東醫寶鑑"의 지식만 가지고 더구나 양방지식만이 결부가 된다면 창조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이 공부의 중요성이 결국은 진리에 대한 자각에 있음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禪問答이라고 하는 것은 그 문제를 주는 가운데 분리 없는 마음, 비교없는 마음, 높고 낮음이 없는 마음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앞으로 우리 한방계의 샛별이 되고, 수많은 생명들을 영적으로 개화시키고 지구를 개화시키려고 하는 노력에 한 부분을 담당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의 이슬에서부터 날아가는 새, 어떤 초목에 이르기까지 고요히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師자붙은 도둑놈이라든지, 옛날 의사같은 면이 없다는 그런 비난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질병도 하나의 현상이라고 하는 것, 분리나 비교가 없는 마음으로 진리를 깨달았기에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도 침이나 약물에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깨달을 때 '아하! 진리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간명한 것이로구나, 결국 모든 것이 나한테 있었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외부로 헤맸구나'하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디에 유명하다는 선생이나 도사같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게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 판단이 되어질 때 한방이 개화가 되고 창조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五運六氣도 이야기를 하고, 禪法도 이야기를 하고, 四象도 이야기를 하여 여러분들에게 혼란도 주지만 신선한 감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여러분들도 못듣던 소리를 해야 합니다. 무언가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직관 간명한 깨달음, 이런 것들이 먼저 선행이 되어야 지구상에 존재하는 의학이나 침이나 약물의 조잡스러운 작업을 거치지 않고 나야말로 정말 의사라고 하는 '관'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Copyright(C) 2001 Sa-Am non-profit Acupuncture Service All rights reserved.
http://www.saam.net/saamacu/revolution/rev4-10.htm
4. 오운 육기
10.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제가 감명스럽게 읽었던 책 중에서 감동스러운 장면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지는 않으나 몇몇 타고난 영적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교통할 수 있는 성인이 어느 의사에게 나타나서 들려준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성인이 의사에게 들려준 말이므로 같은 의사로서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읽어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맥도널드 베인의 "Beyond the Himalayas(히말라야를 넘어서)"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 인간은 병을 고치는 힘과 진리를 전해주는 힘을 누구나 타고 난다. 神癒 가운데에는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만도 하다. 그 때문에 회의가 생기고, 신유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놀라운 치유의 본질을 부정하려는 온갖 시도가 있어 왔던 것이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여자는 시어머니, 남편, 아들 이렇게 4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위암에 걸렸습니다. 위암 선고를 받고 굉장히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그만 남편과 집을 뛰쳐 나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집을 뛰쳐 나온지 6개월만에 위암이 다 나아버렸습니다. 이 여자는 시어머니를 마치 벌레처럼 싫어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이여자도 문제고 또 그 시어머니도 문제였지만 이처럼 인간관계에서 얽히고 설켜서, 암이 조장되는 환경이라는 것 또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환경에서 벗어나고 나니까 암이 나았다고 하는 것이 정말 희한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간암이 나았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불공을 드리다가 자궁암이 나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어떻게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우리 한의사들은 양방에서 하고 있는 세계보다는 더욱 깊은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경락 세계를 탐사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보다 더욱 더 깊숙한 본질적인 것은 없는지...
"신유는 어떠한 물질적 방법을 써 보아도 낫지 않는 질병에 놀라운 효과를 눈으로 보게 해주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거대한 영의 힘에 아직도 눈뜨지 못했다. 그 까닭은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을 넘어선 세계에까지 미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가 지금까지 厥陰・少陰・太陰...등을 이야기 한 그러한 것들은 결국은 마음의 장난입니다. 이런 마음은 결국은 생각도 되고 추리도 되고 또 이것이 조화를 하여 하나의 선도 이루고 악도 이룹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개종을 했습니다" 불교를 믿다가 천주교로, 천주교를 믿다가 기독교로...이것은 대상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여자를 버렸습니다" 그러면 여자로부터 자유스러워졌느냐? 그렇지 않지요 다른 여자와 사귈 뿐입니다. 그러니까 대상만 바뀌었지 마음이라는 문제를 한번도 해결해 본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제된 상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좋고 싫음이 정제된 상태, 인간들은 참으로 어리석어서, 심지어는 의학을 공부하는 여러분들까지도 그러한 신유라든가, 근본적인 도리, 한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陰陽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善惡이전의 에덴동산, 至人, 眞人에 대한 이야기도 먼 산 속에나 있는 達人의 경지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의사도 엄밀하게 따지면 의사가 아니라 환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의사들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환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음은 마음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나, 이론을 알지 못하는 것이나, 이론은 넘어선 것은 규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만들어 내는 이전의 것을 마음이 알 수가 없지요.
"신유가 일어나는 것은 실로 그와 같은 영역에서이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았다고 하는 자가치료,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병은 하느님이 고치고 돈은 의사가 받는다" 영국에서 이런 얘기도 있지요. 어떤 의사가 환자에게 "술을 끊으십시오"하니까 환자가 그냥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환자를 불러 세우더니 "뭘 잊어 버리신 것이 없으십니까?" "잊어버린 것이 있다니요? 전 아무 것도 잊은 것이 없는데..." "돈을 내고 가셔야지요" "저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는데요" "충고해 드렸잖아요" "나는 당신의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낼 필요가 없지요"
요즘 의사들의 현재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한 배양보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몇 가지 된다 안된다 하는, 어찌보면 뻔한 것을 팔아 먹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요. 환자들로 하여금 이런 체질에는 이런 것이 맞고 저런 체질에는 어떠한 것이 맞는다고 하는 교육도 필요할 뿐아니라 모든 병은 이러이러한데서 온다고 하는 자체 원인의 근본은 마음에 있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교화작업이 필요합니다. 목사나 승려들이 다하지 못한 분리없는 마음에 대한 깨우침을 우리 한의과 학생들이 환자들을 대상으로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신유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에 있는 어떤 문제를 떠난 상태, 초월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현상이든 모두가 스스로 지혜있는 법칙에 의하여 나오는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가령 자네가 어떤 일을 두려워하거나 또는 무엇인가를 믿고 있으면, 거기에 어떤 크나큰 지혜가 작용하여 자네가 두려워하거나 또는 믿고 있는 그것을 바로 만들어 내고 만다. 이것이 상념의 법칙내지 전자작용의 법칙이다"
소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생각의 파도 즉 염파, 이것이 의사에게는 유효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함과 동시에 비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네를 둘러싸고 있는 혼란의 원인은 그 밑바닥에 있는 생명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러한 어리석음 때문에 훌륭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인간, 그것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생명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항상 잠잘 때나 앉을 때나 설 때나 데리고 다니는 근원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한다 이거지요.
"수학의 법칙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일 것이다. 진리와 진리의 법칙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진리의 법칙을 이해할 수는 있다..."
지금 이 성인은 인간의 질병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질병을 보더라도 질병 자체를 건강과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말고 '질병 자체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창조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저는 한의과 학생들에게 수차에 걸쳐서 어느 한 쪽 분야만 지망하지 말고, 종합과를 지망하라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의사가 가지고 있는 지혜가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별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간장암만을 전문으로 보게 된다면, 간암이 가지고 있는 독소를 한 경락으로만 받게 되어 큰 병을 얻게 됩니다. 그렇지만 종합과를 다루고 있는 의사는 큰병에 걸리지를 않습니다. 요즘은 자꾸 분업화 되어서 '내가 하는 일 이외에는 모른다'라고 하는데 분명히 마음의 어떤 에너지도 한 곳으로만 쓰게 되면 병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분리 편재된 마음의 에너지 때문에 오는 것인데 사실 의사라고 하는 것은 질병 때문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의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질병의 근본인 에너지의 편재 즉 마음을 잘못 쓰는 문제를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죠.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눈을 거꾸로 돌려서 내면의 세계를 주시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저에게 속은 것이 되고 설령 여기에서 사암침법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환자를 볼 때 각자의 관념이 작용하게 되어서 엉뚱하게 환자를 고치기는 커녕 자기 자신의 Ego를 투영시키는 이상한 의사가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항시로 마음이 일으키는 질병을 전부 없앨 수 있는 비결은 없겠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원인들의 결과이고, 자연의 법칙을 어기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무지, 공포, 사랑의 결여 곧 사랑을 주는 힘의 결여,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아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생겨난다. 병은 육체와 마음이 그 본래의 리듬을 잃었음을 나타내는 현상이며, 동시에 그것은 본래의 리듬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싸움이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사람이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마음의 평안을 잃어 허둥댄다면 마음의 주의는 나타나는 증상에 쏠리게 된다. 왜냐 하면 육체가 신경을 통해 그 증상을 마음에게 알리면 마음은 육체가 느끼는 것의 포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육체를 그 증상에서 구해내려고 애쓰게 된다. 그리하여 육체의 원자들을 휘저어 놓고 결국은 고통이나 불쾌감이 오게 하는 것은 마음이 육체를 구해 내려는 그 싸움이다. 이런 이치를 알 때 싸움은 멎는다"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얼마나 실천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볍게 체했을 경우 痛處에 마치 물고기를 들여다 보듯이 가만히 관하는 방법, 그것이 뒤에 염화약방문에도 나오는 "정심주"라는 방법입니다. 病處를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병명이 무엇일까? 원인이 무얼까? 하는 수많은 질문에 부딪히게 되지요. 그러나 그 원인을 알아 내려고 하는 노력 또한 또 하나의 마음이므로 그것 마저 떨구어 버리고 관하는 것입니다. 禪家의 禪師들은 처음 禪家에 입문한 사람의 질문에 대답을 많이 해줍니다.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어떻고, 나는 그 속에서 어떤 구박을 받고 자랐고, 집안 식구들은 어떻고, 애인도 나를 배반하고...그러면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느 시기가 되면 일체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에 대답하여 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禪師들은 알고 있지만 처음에는 대답을 해주는 거죠. 처음부터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범부들에게는 무리이니까요. 그러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났을 때 이 사람은 질문을 부여안고 끙끙 앓다가 질문을 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차차 공부를 하다보면 집안의 문제, 애인의 문제 등등 여러 가지 문제를 잊어버리게 되고, 모든 문제는 자기가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 또 문제의 해결도 자신이 해결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舍岩針法이라는 문제도 모든 사람의 병을 보는 것도 여러분 스스로의 눈으로 보아야지 결코 교수이든 누구이든 타인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유스러운 마음으로 하나의 이론을 수용하고 잊어버리고 또 이론을 수용하고 잊어 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이론에 집착을 하면 큰일나지요.
"마음은 육체의 느낌을 의식하고, 그 느낌이 어떤 '병'으로서 마음에 기록되며, 거기에 어떤 병명이 붙으면 마음은 그 병명에 사로잡히고, 더구나 그것이 어떤 불치의 병이라 하게 되면 마음은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여 부담은 더더욱 커진다"
제가 누차에 걸쳐서 양방병명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는데 양방병명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병명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어떤 환자가 왔을 때 이것을 비만증이라고 해야 할까? 陰虛라고 해야 할까? 陽虛라고 해야 할까? 자꾸 우리 의사들은 어떤 증상에 이름을 붙이려고 합니다. 이때 병명을 붙이는 순간 그 사람은 과거의 기억이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환자의 실재 모습을 보는데서 멀어지게 되지요. 환자를 보면서 "象에서는 어떠했고 五運六氣는 어떠했고, 六氣는 어떠했으므로 이 사람은 이런 체질이다"고 딱 규정을 짓는 순간 여러분은 실상에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少陰人, 太陰人, 太陽人, 少陽人이라고 하는 四象이 難變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이 항상 변한다는 것, 諸行無常이 참 진리일진대 모든 것을 고착적으로 결정해 버린다는 것은 우둔한 의사의 모습일 뿐입니다.
요즘의 의사는 환자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심어주고 있습니다. "혈관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르므로 X-ray를 찍어 봅시다, 가슴 속의 덩어리가 혹시 암이 아닐지 모르겠군요, 정밀검사를 해봅시다"등등 이런 공포의식은 마치 인간이 신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목사나 승려, 신부라는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는 그 티켓을 따낼 수 없다는 논리와도 똑 같습니다. 요즈음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전부 이러한 공포의 변형된 실체, 공포의 변형된 움직임에 불과합니다.
진리에 대한 각성 이전에 "이 약을 먹어야 됩니다"라는 겁을 던져주는 것이지요. 이런 공포는 심리적인 이득, 물질적인 이득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선생은 말하기를 "항상 공포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심리적 존경 내지는 물질적인 것을 얻고 싶기 때문에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자꾸 습관화가 되면 재미가 붙게 되고 그러다보면 환자나 의사나 모두 찐득찐득한 업의 수레바퀴로 기어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환자를 볼 때 병명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하고 또 불치병이라고 하는 선고를 함부로 내리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억지로 희망을 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병이 오게 된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고 환자 스스로가 모든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라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공부를 하는 과정에 가정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사람입니다. 누가 누구를 버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의 장손이면서도 제사에도 안 가는 엄청난 불효자로 낙인이 찍혀 버렸습니다. 같은 서울 시내에 살면서도 서로 찾아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친께서 방광암에 걸려서 찾아오셨습니다. 혹시 무슨 방법이 없을까해서 저를 찾아온 것이었지요. 저는 미리 예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올 것이 온 것이로구나'하고 말입니다. 사실 제 가족의 욕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저는 있는 그대로 털어 놓는 성격이기 때문이니까 그냥 들어두십시오. 저의 아버님의 성격은 긴장이 많고 공포가 많고 조심이 많은 성격인데 금방 어머니와 몽둥이를 들고 싸우다가도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My darling"하면서 맛있는 것 좀 내오라고 졸지에 표변할 수 있는 교활성, 가족들에게 집안에서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바깥에서는 체면 세우느라고 사랑이 넘치는 행동을 하는 이런 이중성을 저는 어려서부터 보아왔기 때문에 저것이 언젠가는 병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방광암에 걸려서 왔더군요. 이것은 사형선고입니다.
"방광암은 불치입니다. 잘라내야 합니다"하고 양방의사들이 관념을 딱 넣어주니까 저와 한 달간 입씨름을 했는데도 결국은 자르고 말더군요. 그러더니 지금은 후회를 하는 겁니다. 소변기를 옆에 지니고 다니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진리에 가까와지면 질수록 제일 믿어주지 않는 사람이 가족입니다. 특히 사촌이나 동생, 아버지, 어머니를 치료할 때 전혀 믿으려고 하지를 않죠. 도나 진리를 공부하는 초반전에는 가족들에게서 받는 고통은 대단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부모는 비록 자기 자식이지만 손아귀에서 떠난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애정이 참 사랑이 아닌 소유일 뿐이거든요.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날 도를 공부하고 진리를 공부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게 되니까 그만 자기에게서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식의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저희 아버님도 양방의들의 말을 듣고 방광을 떼어내고는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지요. 그러므로 병에 대한 관념을 여러분들이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의사들이 먼저 공포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며 정말 죽음과 삶이 분리가 되어 있는 것인지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은 실제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말이 그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말 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따분하고 지루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처음 들으니까 신선한지 몰라도 저는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것이므로 지루할 뿐입니다. 저는 간단히 말해서 여러분들 손에 칼을 그냥 쥐어주고 싶고 물감과 붓을 그냥 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려 놓은 그림만 그냥 구경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그리는 그림을 아무리 이야기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저 여러분들 마음에 是非之心만 들끓을 뿐이지요.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하고 여러모로 부족해 보였던 친구가 개업하고 나서 환자들이 많이 밀려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학교 다닐 때 바보 같았다고 욕을 해서 될까요? 여러분들은 아는 것만 가지고 학교에서 1등을 했지만 그 사람에게는 환자를 향한 사랑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환자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는 그런 기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舍岩針法 강좌를 하면서 인간이 가진 靈性에 대하여 단순히 몇 개의 이론이나 박학다식한 이론관을 창조하여 내었다면 이것은 하늘에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 안토니오가 이야기 하는 기발한 질병관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다시 듣기 힘든 것인데 저는 이 안토니오의 질병관이 시금석으로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병의 원인이 자신의 참 모습(實相, 自我)에 대한 무지와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데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때는 그 무거운 부담이 사라지며, 대 생명인 한얼이 마음을 變性시켜 육체는 자연의 완전한 작용에 순응하게 된다"
"인간은 육체에 이상이 있으면 병으로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지금 여기에서 질문자는 영국인 의사로서 티벳 지방을 여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책을 낸지는 오래 되었는데 우리 나라에는 최근에 번역이 되었지요.
"그렇지, 육체의 세포사이에 어떤 분리가 생기면 그것은 뇌의 중추에 전달된다. 그러면 마음의 현재 의식이 그것을 불건강으로 인식한다. 근본적으로 한얼, 곧 인간의 참 모습인 완전한 힘을 깨닫지 못한 데서 공포와 불안이 생겨났다. 그러나 마음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뇌 중추에 전해지고 그리하여 육체 세포의 재건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고 불교인도 있으며 이 派도 있고 저 派도 있습니다. 그리고 혹자는 자기가 속한 곳의 편을 들어 과다하게 다른 부분을 배척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분리 의식 속에 살아가고 있는 한의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의사 이전에 비열하고 자기 Ego적이고 분리의식에 가득찬 추악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의 터무니 없는 망상, 분리의식이 깨어지면서 세포가 변화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의사다, 나는 한의과 대학을 다닌다, 나는 舍岩針法 공부하였다'라는 그런 相이 없는 사람만이 신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의 우리 의학이 좀더 영적인 상태로 개화하려면 깨닫는 의학, 신을 찾는 의학, 종교적인 의학으로 분명히 승화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이말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핵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육체를 어떻게 해보려는 싸움에 사로잡혀 버리면 첫번째의 방위선인 이성의 벽이 무너져 결국 육체 세포의 부조화라는 정보를 최후의 선고로 받아들이고 만다. 그러나 자기 존재의 진리를 깨달으면 치유작용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마음이 강하게 충전되어 완전하고도 순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신유이다"
저는 지금 제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 자신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말을 듣고 있는 그 주인공, 만약 여러분들의 육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어째서 시체는 스스로 움직이지를 못합니까? 그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주인공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옛날에 제 사부님께 어떤 사람이 와서 "요즘 스님들은 술만 먹고, 고기만 먹고 여자들만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 사부님께서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는고?"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소문은 무엇으로 들었는가?" "제 귀로 들었습니다" "네 이놈! 귀로 들었냐? 죽은 시체는 귀가 있는데 어찌 듣지 못하느냐? 당장 꺼져라! 이놈! 어디다가 입을 함부로 놀리고..."
바로 이와 같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시비만 일삼을 뿐이지요. 이것이 禪問答이 올시다. 죽은 시체도 귀가 있는데 어째서 듣지를 못할까요? 지금 제 말을 듣는 사람, 보는 사람, 생각하는 주인공이 이 우주의 영겁을 통하여 존재하여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며, 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깨달음의 근본의 자기 확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일러주고 있는 저나 혹시나 하고 의심하는 여러분들이나 모두 똑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의존하고 또 무엇하러 공부를 하고, 또 무슨 주고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 스스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에 항상 의존하고 권위자가 생기고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일종의 공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처럼 되어 보려고 하고 무언가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 합니다.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하나의 소유에 해당합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이 혹시 여러분 가운데 단 몇 사람만이라도 깊은 이해가 있으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병이 시작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자기 존재의 진리 곧 참 나는 완전・무한・절대라는 자각이 마음에서 사라지고 불건강이라는 의식이 마음을 지배하여 쾌활함과 생동감을 잃는 것이다. 그때까지 육체를 지탱해 오던 마음이, 병이 실제로 있다는 미망의 마력에 굴복하여 진리가 한 때 사라지는 것이다"
성안토니오의 질병관은 간단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질병도 없어 진다는 것이지요. 특히 이 점을 의사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지닌 한얼(大靈)의 종주권에 관한 지식을 부조화 혼란이라는 세력에 내어주고 마는 것이다. 자,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어떻게든 회복하려고 약제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약제의 힘을 완전히 미신하게 된다. 그러다가 병의 상태가 다시 나빠지기라도 하면 완전히 미신하고 있었던 만큼 혼란은 더욱 커지고, 끝내 믿을 수 없음을 깨달으면 그대로 절망과 공포의 늪으로 빠져버린다"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해서든지 회복하려고 온갖 약제에 매달리지요. 十全大補湯・雙和湯・諸味十八湯...그러다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혹시 내가 중병이 아닐까? 싶어서 한약도 써 보았다가 양약도 써 봤다가 X-ray도 찍어봤다가 빚을 얻어서 큰 병원에 입원도 해보고 여기 저기 검사를 다해 봅니다. 왜냐하면 불안하고 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어쩌다가 화학적인 변화로 병이 좀 낫게 되면 그 약제가 나를 낫게 했다고 완전히 맹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나빠지면 '내가 나았었는데 왜 또 병에 걸렸을까?'하고 병의 상태가 나빠진 만큼 절망과 공포의 늪으로 빠지게 됩니다.
실패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인데 그 실패로 인한 공포감, 좌절감 또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이 왔을 때 병 그 자체를 보지 못하고 병에 대한 연상, 죽음을 죽음자체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치지 못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병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절망과 공포가 문제라는 거지요.
"육체는 화학작용의 구성물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깊이 알아야 한다. 육체에는 지혜와 기능과 육체의 영위를 유지하는 놀라운 짜임새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것이 곧 대생명의 활력이고, 그 대생명의 활력이 육체의 운동과 변화를 일으키는 바탕이다. 약초나 생약, 호메오파디(同種療法), 水治療法 등의 자연요법은 대개의 경우 세포에 작용하여 生化學 반응을 일으키고, 그것이 강력한 암시가 되어 그 암시에 따라 마음이 작용하게 된다. 마음에 미치는 이런 작용이 결국 건강의식과 몸속의 균형 조화를 회복시키고 재생시키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내재의 靈力의 법칙을 깨닫지 않은 상태에 있다면 다음에 오는 2차적 상태는 처음의 그것보다 더 나빠지기 일쑤이다.
병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자아뿐인 것이다. '얼(靈)'은 병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 이기심, 빼앗고 받기만 하는 마음, 탐욕, 미움, 적의, 인색, 완고, 난폭은 자아의 것이며 이것들이 거의 모든 병의 원인이다. 비인격적이며 치우침 없는 한 얼은 그런 부덕에 대하여는 아는 바 없다. 따라서 치우침 없고 비인격적인 것이 신유이다. 비인격적으로 되면 될수록 사랑이 깊어지고 친절해진다. 왜냐 하면 사랑은 비인격적인 것이며, 사랑은 용서요, 치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이며 사랑은 무릇 반작용이 따르지 않는 완전한 작용의 바탕이다"
우리는 보통 인격체가 되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의외로 여러분의 생각 속에 있는 그런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 사람인자 (人)옆에 아니불(弗)자를 쓴 것이 무엇입니까? 부처 佛자 아닙니까? 사람이 아닌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리 분별을 초월한 세계를 이야기 한것입니다. 사랑은 용서라고 했습니다. 공자에게 "일생동안 한 가지 글자를 일러주신다면 무엇을 일러주시겠습니까?"라고 하자 "恕하는 일이다. 오로지 恕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음을 같이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같이 하는 것은 용서입니다. 너그러운 척 하면서 무엇이든지 '잘했다'라고 칭찬하는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딸이 엄마와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 나 오늘 남자친구 만났어" "응, 그래! 그건 너의 자유니까..." 이건 용서가 아니죠. "엄마! 나 그애하고 싸웠어" "응, 그래! 그것도 잘했구나" 이것도 용서가 아니죠. 사랑도 아닙니다. 딸의 심리적인 진행 상황을 이해하고 딸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같이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들 마음 속에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후배들의 정신적인 고통이나 학문적인 갈등을 함께 해결해 보려는 노력을 해 보셨습니까? 선배는 후배를 이용하고, 후배는 선배를 존경해 주는 척하는 관계 속에 운영되는 대학풍토에서는 신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이용하러 와서는 안됩니다. 오직 제가 가지고 있는 것만 받아 먹으려해서는 안됩니다. 저를 통째로 마시러 와야 됩니다. 뭔가 깨달음을 가지고 돌아가야 합니다. 무엇인가 풀어내 놓는 주인공에 핵심을 맞추지 못하고 제 말끝에만 끄달리면 여러분들은 제게 철저하게 속는 결과가 됩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의 눈으로 사물을 보십시오. 陰陽 이전에 선악이 없는 마음, 시기 질투 없는 마음, 욕망이 없는 마음의 상태로 모든 사물을 관해서 보게될 때, 즉 그 대상과 하나가 될 때 여러분들이 곧 神農氏요, 黃帝요, 岐伯이요, 예수요, 석가요, 神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목은 잊어버리고 자꾸 자기 자신을 비열하게 낮추거나 또 터무니 없는 몇 가지 지식만을 가지고 자기를 높이려 한다면 결국 이런 사람에게는 사랑을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옛날에 조주스님이란 분이 하루는 설법을 하러 올라가서 개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날 설법을 들으려는 대중이 250명 정도가 되었는데 조주 스님께서 생각하시기에는 너무 대중의 수가 많았던 것이지요. 조주스님께서 개다리를 뜯고 있으니까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뜨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5명만 남았답니다. 그러자 '너희가 진짜 대중이다'하면서 설법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250명 가운데는 잘 자라는 싹마저 꺾어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道의 익은 마음보다는 道人이 되어봐야 되겠다고 하는 즉 뭔가 되어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온 사람도 있을 것이거든요. 이러한 야심가는 언젠가는 자기 스승이고 친구고, 가족이고 간에 전부 다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 舍岩針法을 개설하게 된 동기는 나를 내던질 사람과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배우러 온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내놓은 사람들만이 모여서 지금 절망에 빠진 한의학을 고민해 보고 활로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연구해 볼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작은 라디오도 채널만 맞추면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데 여러분들이 이 우주에 무한히 떠다니는 念波, 텔레파시를 못잡는 이유는 여러분 스스로가 채널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空心法', 즉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不二法', 둘이 아닌 법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남의 말에 끄달리게 되고, 의사가 되어가지고도 병을 치료하러 다른 의사에게 가는 것이거든요. 그건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禪法의 근본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개체의 자아가 끊임없이 외적인 것과의 충돌과 갈등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을 깨달았음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비인격적 內在眞我가 해방되어 대생명의 모든 힘이 방사되며, 그 자연의 힘의 전자파가 마음과 육체를 변질시키기 시작한다.
이 안에서의 원자 작용이 잠재의식층에 대해 암시를 준다. 그러면 잠재의식은 순간적으로 온 몸에서 반응이 일어나게 하여 강력한 에너지의 흐름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 놓아 그 흐름이 향하는 곳에서 불순한 것을 밖으로 쓸어내고 혼란을 가라 앉힌다"
厥陰病은 少陽으로 치료하고 少陽은 厥陰으로 낫게 한다고 제가 이야기 했다고 해서 병이 꼭 공식에 맞게 厥陰・少陽・太陰 이런 식으로 될까요? 옛날에 임제스님이 "밝은 것은 밝은 것으로 치고 어두운 것은 어두운 것으로 친다"하고 돌아다니는 奇僧에게 묻기를 "밝은것도 오지 않고 어두운 것도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묻자 "내일 저 위에 있는 대비원에서 제사가 있느니라"하고 휙 가더랍니다. 그제서야 임제 스님께서 "역시 대단한 분임에 틀림이 없구나"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병이 厥陰으로도 오지 않고 少陽으로도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경주에 있는 동국대학교에서 강의를 그만둘 때, 저는 학생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일깨워주려고 노력했는데 학생들이 받아들이질 않더군요. 학생들의 태도가 엉망이었습니다. 강의 시작하고 10분 정도 지나서 한 학생이 일어나 하는 말이 "선생님, 저희들 데모좀 해야 되겠습니다" "무슨 데모인데?" "아니 한의사가 그런 것도 모르십니까? 양약사가 한약 제조하는 것에 대한 데모 아닙니까?" 이왕 시작하려면 강의 시작하기 전에 할 것이지 강의 시작한지 10분 정도 지나서 한 학생이 일어나서 유인물을 휙 뿌리더군요. 그래 좋다. 데모도 남자다운 기개니까 얼마나 잘 하나 싶어서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으샤으샤하면서 조금 나가다가 시내에서 검은 차 하나 들어오니까 30분도 못돼서 밀려 들어오더군요. "야! 오늘은 못하겠다. 내일하자" 그러면서 데모를 끝내더군요. 저는 한번 강의를 시작하면 4시간, 다섯시간 쉬지 않고 연속 강의를 했고 또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가지고 내려갔는데 시꺼먼 차 하나 오니까 밀려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속았다'라는 진한 배신감이 느껴왔습니다. 이런 대접 받고는 도저히 강의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모를 하려면 아예 예수나 석가처럼 하시오"하는 사행시 한번 읊어주고 강의를 끝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연민의 정이 있어서 혼란으로 지내온 여러분들이 안타깝고 정말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 학교 풍토, 제 나름대로 지내온 13년 동안의 괴로움을 여러분은 겪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일념에서 그것을 전해 주려고 했는데 그것을 그냥 잔소리 정도로 받아들이더군요. 그래서 그만두고 올라왔더니 이제는 아쉬워 가지고 "잘못했습니다. 강의를 해주십시오"하더군요.
제가 그때 돈을 많이 번 종합병원의 원장으로서 자가용 굴리고 내려갔었더라면 아마 제게 그런 대접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강의시간이 되면 눈이 빠지게 기다렸겠죠. 매일 세련되지 못한 옷차림으로 대 여섯 시간 강의를 하고 생맥주 한잔 마시고 올라오니까 은연중에 가볍게 보아도 되겠다는 식으로 여겼던 거지요 지금은 학생들은 진실한 醫師觀, 진실한 眞理, 의사로서 정신을 진심으로 알려주려는 사람보다는 돈이 많고 권력 있는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말을 따릅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으니까...
그래서 저도 '광화문 네거리에 간판을 하나 내걸고 왕창 돈이나 벌어야 되겠다. 왕창 돈을 긁어모아서 부자가 된 다음에 그 다음에 강의를 한다고 하면 벌떼같이 올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에 5년 후에나 강의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돈을 빌려 개업을 하고 비록 극소수의 학생일망정 올바르게 공부하려는 사람을 위주로 강연하기 위해서 禪室을 열어 두었는데, 제 나름의 신념에 1/100도 못 미치는 것을 느낄 때에는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자각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자각적인 종교, 자각적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해서 학문을 재정립하려고 해야 합니다. 지금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黃帝內經" 한 페이지를 찢어들고 산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혼자 명상하는 사람이 태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공부한 것을 여러분들의 후배에게 물려 주어야 합니다. 후배들에 대한 사랑, 후배들에 대한 교육을 외면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나는 내가 공부할 때 얼마를 투자했으니까 너희들도 돈 내놔"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얼마 후 아들이 돈을 벌어서 아버지한테 돈을 갚으러 왔지요. 그러자 아버지가 기가 막혀서 "야, 이녀석아! 너는 이다음에 네 아들에게 돈 빌려주면 갚으라고 할래? 가져가거라" 우리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대학 6년 졸업하고 나서 개업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대학원 들어가기도 힘들지요.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돈은 없고, 월급쟁이하러 제기동이나 종로에 나가 보세요. 어설픈 사람들 틈에 끼어서 "원장님, 담배라도 한 대 피우시고 다방에 가 계시죠. 제가 알아서 다 할테니까. 슬슬 놀다가 오세요" 저녁때 다섯시쯤 돼서 들어가면 "원장님! 책상에 5,000원 놔뒀습니다. 가져가세요" 이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체계적인 학문없이 경험만으로 유지해 온 사람들도 십전대보탕, 쌍금탕, 쌍패탕에 무슨 약 무슨 약이 들어가는지 외우고 있는데 우리 한의사들이 외우질 못하는 사람도...
지금 양의사들이 얼마나 권력을 잡고 있으면 한의사들이 군의관도 못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뼈저린 현실입니다. '우리집은 시골에서 부자니까 내가 졸업하면 개업시켜 주겠지' 이렇게 나 하나만 생각하시면 절대 안됩니다. 한의학 전체가 무너질지 모르는데 나 혼자만 생각해서 되겠습니까? 잘못하면 한의학의 전통이 무시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黃帝內經, 五運六氣法을 다른 사람에게 교육시킨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깨닫는 것은 여러분들도 수없이 깨달을 수가 있지요. 그러나 미래의 교육자로서 나서기에는 어마어마하게 힘이 듭니다. 나름대로 깨달은 뒤에 뼈저린 고통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안일무사합니다. '그냥 졸업만 하면 어떻게 되겠지' 여러분들 졸업하면 여러분들을 받아줄 만한 곳이 있는 줄 아십니까? 또 개업하려고 해도 여간한 돈이 드는 것이 아니고 또 연륜도 없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1년에 600명씩 쏟아져 나오게 되거든요.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칼날같이 무서운지는 여러분들이 졸업하고 나오면 잘 알게 될 겁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自覺의 힘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무엇인지, 陰陽 이전이 무엇인지, 한 생각 이전이 무엇인지 이런 영적인 깨달음 이외에는 우리 한방을 존속시킬 힘이 없습니다. 지금의 학문 체계에 도취되어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학교생활을 영위한다면 우리 한의학의 장래는 암담할 뿐입니다. 젊고 뜻있는 여러분들이 이 한의학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이 혼란이 가라앉는 것에 호응하여 '병'이라는 관념을 떨쳐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만 참된 평안이 확립되며, 그리하여 육체의 호소와 반란이 멎고 조화가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배우고 이렇게 앎으로써 조화가 회복되면 마음과 육체는 병의 성질이나 증상이 계속되어 기간 여하에 관계없이 변화한다. 진리에 따라 이끌어 줌으로써 병자는 고통이 한 때의 것이고 스스로 지어낸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앞으로 환자들한테 "나만 믿으세요. 우리집 약만 믿으세요" 이런 식으로 맹신적인 차원보다는 병의 원인이 당신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시켜 주어야 합니다.
"무릇 나타나는 현상은 한때의 것이며, 한때의 것은 그저 끊임없이 유동하고 그 자체의 근거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밖의 무엇인가에 사로잡히는 것은 무지한 자아뿐이다. 실재는 이 무지한 자아와는 전혀 다른 것, 실재야말로 완전하고 비인격적인 참 나이다. 만약 병이 실재라면 그것은 고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실재는 불변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공포를 품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뿜어내는 암시를 받아 공포 속으로 더욱 깊이 빠진다"
의사가 공포를 느끼면서 환자에게 '不治입니다'라고 선고를 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그 말한마디에 환자가 받는 암시는 대단한 것입니다.
"죽음에의 공포가 인류라는 한 가족에 스며 있는 여러가지 괴로움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 공포를 떨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인 것이다. 이 살아있는 우주에는 단 한 분자라도 죽은 것은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주기 바란다. 대생명에게 죽은 부분 같은 것은 한 구석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지금 자네가 보듯이 생과 사는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 속에서의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옮겨감에 불과하다"
생과 사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듣고 보고 느끼고 하는 그 주인공은 전혀 물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죽음과 삶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좋은 물건을 엉터리로 쓰고 있거든요. '죽는다, 산다'하는 겁을 가지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명상을 한번 해 보세요. 여러분들 내면 깊이 들어가 있는 공포를 한번 파고 들어가 보세요. 엄청난 긴장과 남에게 인정받지 못할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질병의 공포, 종교가 주는 공포, 여자들 같으면 얼굴이 상하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에 이르기까지 온갖 공포가 자리잡고 있지요. 이런 것들이 먼저 해결되기 전에는 의사 노릇해서는 안됩니다.
"생명은 보다 완전한 집, 곧 靈體같은 보다 정밀한 몸 속에서 존재를 계속하면서 개체 생명의 의식이 차츰 확대 심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두가 마음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 버리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의식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
환자들은 이러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병이 왔지만 의사야말로 우리 인간의 존재가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다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죠. 이미 그전에도 있었고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겠어요?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엄청나게 수행을 많이한 사람일 겁니다. 옛날에 이르기를 "人身難得이요. 正法難得이라" 즉 사람 몸을 받기가 어렵고 정법을 얻어 듣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정법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런 말을 툭 터놓고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근기가 낮은 사람은 의혹하고 근기가 높은 사람은 힘써 행해서 자기 근본을 찾으로 수행하러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차원이 되면 일당 백입니다. 혼자서 천명 만명을 당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의 구원을 호소합니다. 여러분 하나가 개화되세요. 사향냄새를 막으려고 아무리 겹겹으로 싸 놓아도 그 향기는 널리 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익으면 자연히 냄새가 나서 벌이 꿀을 찾아 모여들듯이 '불우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진리를 들으러 여러분에게 모여들 것입니다. 저는 이 사암침법을 빙자해서 '不分離性, 不二法, 無相對性'등 이런 정보를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까이로는 사명대사, 서산대사, 위로는 예수, 六祖, 부처님의 뜻이라고 나는 확고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제가 한의학을 이야기하면서 종교를 이야기 하느냐? 그것은 여러분들 속에 내재해 있는 불교를 비판한다든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또 기독교가 선하다든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그 주인공에 대한 인식을 빨리 가져달라고 하는 것이올시다. 마음을 주관하고 있는 그 주인공에 대한 인식을 말입니다.
"심신의 완전한 치유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소멸 되었을 때에만 이루어진다. 자네가 남을 도울 때는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가장 우둔한 마음일지라도 진리의 빛을 받은 의식은 그 속으로 침투할 수가 있는 법이다"
여러분들이 남을 돕기 위해서 "內革・一心・歸源・饒益蒼生"이라는 명분론을 먼저 공부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이것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사이기 이전에 전 중생계에 전부 필요한 말입니다.
"眞言(만트라)은 공포에 찬 마음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괴로움이라는 관념을 도리어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하여 사람들은 대립을 만들어나갈 뿐이다. 건강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죽음이라는 관념과 싸우며 선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악이라는 관념과 싸우는 것이다. 이 싸움은 끝이 없다"
지금 이 말은 그 동안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말을 빌어 다시 한번 증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깨달으면 성경이나 불경이 여러분들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지 성경이나 불경을 여러분들이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깨닫고 보면 "黃帝內經"이 여러분을 증명시켜주는 것이지 內經을 여러분이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神農氏가 가지고 있는 혀는 어떤 혀이며 岐伯의 눈은 어떤 눈입니까? 시력이 5.0이나 10.0정도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떠한 눈인데 그런 心眼이 있었을까요? 요컨대 우리 마음에 있는 시기, 질투, 공포, 분리의식 등 이런 것을 떨어버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떠들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자갈을 치우기 전에 씨를 뿌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여러분들이 지금 舍岩針法을 공부해서 어떤 소득이 있었다거나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잊어버리시고 '깨달음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은 사람들이 도대체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멍한 눈, 얼빠진 표정, 혹 무슨 이야기를 하면 난 모르겠노라는 식이예요. 강좌에서도 이전에는 문제하나 던져 놓으면 여기 저기서'혹시 이것 아닙니까?' 하면서 질문도 많았는데 요즘에는 어찌 그리 무관심한 얼굴의 사람들 뿐인지 모르겠어요. 이건 마치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주는 것과 똑같은 느낌입니다. 기껏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저희 엄마가 이빨이 아픈데 어디로 모셔올까요?" 또 "제가 허리가 아픈지 얼마가 됐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靈적인 이야기 해주고 또 肉的인 문제까지 다 치료해 주고 그러면 아예 保任까지 다 해서 보내드릴까요?
"제가 公安을 생각해 보았는데 지금 제 의견에 선생님 뜻은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이 없더군요. 제 친구가 어느날 찾아와서 하는 말이 "야, 이친구야! 지금 이 禪室에 앉아서 강의 듣고 있는 이 학생들이 진짜 중병 환자야, 이 사람들은 지금 환자를 치료할 사람들인데 바로 이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더 급해" "허긴 이 친구들이 나중에 내 고향에 가서 개업할지 모르니까..."라고 하더군요. 문앞에 와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오히려 우선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저와 일대일의 문제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한번 소견을 잘못 먹으면 천명, 만명, 수십만명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또 지금 이중에는 나중에 강단에 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교수로 나갈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교수가 깨어있지 못하고 몇 가지 외운 지식으로 남의 말만 인용을 한다면 밑도 끝도 없고 제자도 지루해지고 선생도 지루해지는 겁니다. 그리고는 똑똑한 제자가 나타나면 업수이 여기려고나 하고 또 쓸데없는 자만심을 넣어줘서 안하무인격이 되어 버리죠. 이런 것은 道家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깨달은 의식의 슬기로운 말의 방편을 쓰면 환자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기꺼이 협력하게 되며, 그리하여 변화가 순간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實在・實相의 眞理가 전자력의 파동을 발생시키고, 그 파동이 환자의 마음에 도달하면 그때까지 그를 얽어매고 있던 소극적인 정신상태가 타파되고 만다. 이런 방법으로 가까운 곳에서든 먼 곳에서든 환자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순간에 마음은 치유되었던 것이다. '딸아, 마음을 밝게 가져라.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느니라'는 말 또한 그것을 보여준다. 자네들은 이런 말들을 늘 듣고 있지 않은가. 이제야말로 그 참뜻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의 믿음이 낫게 했느니라"라는 말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진리를 알 때 '오오라'가 맑아지며 상념이 강력해진다"
'오오라'라고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의학에서도 활용을 하고 있습니다. 소련에서는 이 오오라를 X-ray로 투시하는 기계를 만들어 내었거든요. 그래서 몇 가지 광명의 색깔로 구분해 현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 육체적인 질병의 상태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하며 진단법에 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靈眼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오라가 눈에 띤다고 합니다.
"그때 대자연 속의 그 어떤 것도 그를 해치지 않게 되며, 그 또한 자연 속의 어떤 것에도 해를 미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네가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자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지배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자네는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힘과 주권을 이미 부여 받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반대관념인 공포를 거쳐서가 아니라, 깨달음 곧 속속들이 아는 것으로 참 믿음을 세우라. 공포에서 나오는 것은 믿음이라는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도리어 관념의 대립을 격화시켜 사람을 더더욱 대립 속에 갇히게 할 뿐이다. 기꺼이 귀 기울여 잘 듣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 마음에 스스로 지워 놓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는 것은 병자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모든 사람의 '참 나'가 병이나 죽음, 선이나 악, 실패나 성공으로 어떤 영향도 받는 것이 아님을 알고, 인격적 내지 인간적인 것을 넘어,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고요히 봄으로써 비인격적, 초인간적인 자네가 되어야 한다"
고요히 관조하라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강조 하는군요.
"觀心하라, 고요히 네 마음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체의 의식까지도... 네가 어떤 말이 나오려 할 때에 좀 더 깨닫고 쉬어라. 왜냐 하면 말은 곧 생각이기 때문에... 자네는 병자가 치유를 경험해 주기 전에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치유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러분들은 병자의 치유를 경험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의사 자신을 치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제가 하는 이 말을 단순하게 생각하셔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질병에 대한 이론보다는 깨달음 위주로 直觀위주로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깨달음이 없으면 학교에서는 교수에게 속고, 저에게 오면 저한테 속고, 대가에게 속고, 권위자에게 속고, 도인에게 속고, 말에 속고, 경전에 속고 이렇게 속고 속다가 일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이 책 다음 부분에는 식물이 가지고 있는 뜻이 등장을 하는데 식물이 어째서 우리 인간의 여러 가지 다른 차원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식물이 갖고 있는 靈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식물이나 광물이나 또 우리가 일으키는 감정적인 차원을 옛 성인들이나 지금의 깨달은 사람들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에 있는 커텐이나 사물들도 내 생각, 내 상념이 물질화 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물며 식물이 그렇지 않겠어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식물도 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불확실하게 이야기 한 것은 '그렇다'라고 단언적으로 이야기 하면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깊숙한 진리의 차원을 이야기 하면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념은 털끝만큼도 더하고 덜한 것이 없고 실제로는 그것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적인 현상 중에 미세한 것은 마음이요, 거친 것은 육체요, 물질인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시려면 "히말라야를 넘어서"를 사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유심적인 五運六氣'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논문을 보고 주위사람들은 '한의학에 종교와 公案을 접목하는 작태'라는 등 많은 혹평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 친구는 五運六氣派야'저도 이런 소리를 다 듣고 있습니다. 정말 당치도 않은 이야기죠. 제가 왜, 오죽하면 종교를 집어넣었겠습니까? 한의학을 정면으로 도전했다가 실패를 하고 워낙 힘이 드니까 명상법, 관심법을 통해서 도전해 보자는 것입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한때는 충분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성질이 끈기가 부족하고 여러 가지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그걸 끝까지 지속시키지 못하고 겨우 3% 정도밖에 알지 못하는 것을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도 '이 정도 40일 동안 편안히 앉아서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에 솔직히 여러분들이 부럽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쉽게 하는 한 마디를 얻기 위해서 6개월, 1년, 2년씩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워듣기 위해서 전국을 헤매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제게 어떤 감사의 마음을 느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심리적인 이득이나 공경을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여기는 하나의 살풀이 장소입니다. 혁명의 장소입니다. 여러분들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와는 어떤 거래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의 자발적인 참여만을 강조할 뿐입니다. 아래에서 소개하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마음같이 되어야만 합니다.
淸虛歌
그대는 거문고 안고 큰 소나무를 의지하나니(君抱琴兮依長松)
큰 소나무는 변하지 않는 마음이요(長松兮不改心)
나는 길게 노래하며 푸른 물가에 앉나니(我長歌兮坐綠水)
푸른 물은 맑고 빈 마음이다.(綠水兮淸虛心)
마음이여 마음이여(心兮心兮)
나와 다만 그대로다(我與君兮)
이제부터는 중반전에 접어들었는데 중반전 이후는 일종의 전투와도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말을 들으면서 명상의 경지로 몰입해 보려는 관조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나름대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또 거부되는 것은 왜 거부가 되는지 그래서 다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고 또 틀리는 것은 수정해 나가는 그런 분위기가 주어져야 합니다.
Copyright(C) 2001 Sa-Am non-profit Acupuncture Service All rights reserved.
http://www.saam.net/saamacu/revolution/rev4-11.htm
4. 오운 육기
11.
자! 그러면 앞에서 이야기 했던 四象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각 인종별로 太陰・少陽・少陰・太陽을 나눠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전부 해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四象을 두 개는 튀어나왔고, 두 개는 들어간 것이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저는 사실 이것을 굉장히 어렵게 얻어들은 것입니다. 이것을 어느 周易學者에게 전해 듣고 보니까 觀相說의 기본적인 의미를 알겠더군요. 눈은 상하운동을 하는데 주로 상(위꺼풀)이 움직이고, 입은 하(아래턱)가 움직이는데 입은 吐하는 언어가 있고 取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귀는 좌우가 있고 코는 전후를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이 아래로 감겼을 때는 긍정의 표시이고 눈이 떠졌을 때는 주로 윗꺼풀이 많이 움직이니까 부정적인 측면으로 감시하는 표시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눈을 사르르 감고 죽는 사람은 굉장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 이제 내가 갈 때가 되었구나. 이제 조용히 가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눈을 부릅뜨고 죽는 사람들은 죽기 싫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윗눈꺼풀은 督脈에 해당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부정과 감시, 경계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또 입은 "하나는 取하고 하나는 吐한다"라고 했는데 取한다고 하는 것은 生을 영위하고자하는 수단이고 토한다는 것은 자기의 주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서 말이 등장하는 거지요. 귀는 왼쪽과 오른쪽이 있는데 왼쪽은 血, 오른쪽은 氣에 관계되므로 氣血에 관계되는 것이 귀입니다. 코는 전후이므로 전진은 動, 후진은 靜의 관계이며 塞과 通의 작용을 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四象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한번 잘 생각해 본다면 일반적으로 눈이 잘 발달되고 코가 발달이 안된 사람(太陰人)과 코가 잘 발달되고 눈이 잘 발달되지 못한 사람(太陽人)을 識情인 차원에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총론의 앞부분에서 유심적 차원에서 본 八卦 유추라는 도표가 있었을 것입니다.
유심적 차원에서 본 八卦 유추의 도표를 보면 좌측을 陰, 우측을 陽 또 좌측을 나, 우측을 너라고 했으며 아래쪽을 안다, 위쪽을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太陽人, 즉 눈은 크고 코는 작은 사람을 도표에 집어 넣는다면 우측 아래가 되겠지요. 이러면 하나의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지 이론이 따로 있겠습니까? 문제는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識情으로 표현된 네 가지 표정을 여러분들이 한번 연구해 보시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太陰人인 경우 '나는 안다'고 하는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고 무엇이든지 모른다는 소리가 잘 안나오겠지요. 친구를 소개받아서 겨우 대폿집에서 술 한잔 마신 사이이면서도 "야! 우리 서로 편하게 대하자"고 하는 사람. 어떤 측면에서는 사교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제가 힌트만 드리는 것이니까 정신적인 특징을 여러분들이 조사해 보세요. 少陰人은 대체적으로 헌신적으로 少陽人은 자기 반성이 강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saddism 즉, 자기 자책이 강하죠. 자기 학대를 잘합니다. 무엇이든지 "잘했다. 잘했어"라고 칭찬을 잘하는 사람은 少陰人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인 인물 중에 많겠지요. 여러분들이 이런 차원에서 깊이 연구해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四象의 특징을 풀어나가는 열쇠입니다. 여기에서 얼마든지 확대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직업도 여기에 맞추어 분류할 수가 있겠지요. 少陰人이라면 남에게 헌신적이니까 여기에 맞는 직업이 있을 것 아니겠어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少陰・少陽・太陰・太陽을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六經的인 것과 혼동하시면 절대 안됩니다. 六經에서 나오는 少陰・少陽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요.
여러분들이 이러한 관점에서 四象醫學을 더욱더 보완한다면 앞으로 여러분들의 後學들은 공부를 좀더 현실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자리에도 四象을 공부하신 분이 계시겠지만 그런 분들은 좀더 관념을 넓혀서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장하는 눈・코・귀・입 이것을 알기까지는 저는 1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어떤 周易學者가 이것은 비밀이라고 하면서 죽어도 안 가르쳐 주고 비밀로 자기네 문중에만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렇게 쉬운 것이었습니다. 어느 곳에는 입술 보는 법만을 가지고 있는데, 任脈과 督脈의 움직임을 四行詩 칠언절구로 써놓은 노우트 한 권이 있더군요. 그것을 베껴 오지는 못했는데 절대로 넘겨 주질 않더군요. 東武 이제마 선생님께서도 결국 四象은 눈・코・귀・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肝・脾・腎・肺 이런 식으로 臟腑와 연결을 시킨 것이지요. 그러니까 四象醫學의 힌트는 周易에 있는데, 周易에서 天・池는 몸통과 머리(天圓地方)를 나눈 것이고 얼굴에 있는 4가지 움직임을 四象이라고 하고 그 밑에 八卦의 天과 地가 任脈과 督脈에 해당하고 나머지가 12경락에 해당한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간명하고 어찌보면 억지로 붙여놓은 것 같은데 참으로 기발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렇게 기발한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놀랠 줄을 모르는군요. 왜냐하면 그동안 周易을 가지고 씨름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고민을 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깨쳤다고 하는 기쁨 또한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그 환희감, 어떤 선승이 "八卦에서 天池를 뺀 것이 육기다. 그 안에 少陰君火・太陽寒水・厥陰風...이 다 들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1, 2, 3차 욕망이 다 들어 있다"라고 일러 주었을 때 그 진리에 대한 확인감이란 실로 큰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周易의 이론체계의 모든 것이올시다. 여기에 여러분들이 唯心的으로 대비시킬 수만 있다면 여러분들은 저보다 더 강의를 잘 할 수가 있고 새로운 한의학의 학설을 발표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것들이 우리 한방계에 박사논문이나 석사논문으로 천착되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쥐나 토끼를 갖다 놓고 감초가 어디에 미치는 영향 등이나 발표하는 이런 풍토는 하루 빨리 사라져야 우리 한의학계가 부흥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木通이 이뇨작용이 없다는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木通을 마른 사람에게 먹이니까 이뇨작용이 있을 수 있겠어요? 지금은 이렇게 터무니없는 삿된 논리가 들끓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작업은 '破邪顯正'입니다. 삿된 것은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내자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정말 지금의 이 정도 이야기만 들어도 10년 세월은 단축한 것입니다. 대학시절에 이런 말을 지나가는 풍월로만 들어도 40일 동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의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太極의 상태로 환원시켜야 합니다. 근본으로 귀일하는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제 강좌는 심신부흥 운동입니다. 저는 이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누누이 강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영원한 존재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 '내가 바로 신이다. 신농씨다. 나도 황제처럼 될 수가 있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大疑心・大憤心・大信心"을 가지고 마음을 움직여야 뜨거운 에너지가 마구 굽이치는 겁니다. 공부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분위기 입니다. 무당도 옆에서 돈을 얹어주어야 신명나는 법인데, 강사라고 하는 것은 듣는 쪽에서 자발적인 느낌이 없이 질질 끌려오는 것 같으면 금방 지루해져 버립니다. 닭이 천 마리이면 봉황이 한 마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전국 한의과대학생이 약 3,000명인데 그 중에 깨어있는 사람 세 사람은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어느날 道를 깨달아 버리면, 한 생각 이전으로 도달하면, 지금의 어수선한 한방계에 샛별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배운 바가 부족하여서 "內經"의 한자도 잘 모르지만 그 사람은 양방지식도 알 것이고 한문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을 것이니 많이 섭취한 지식을 깨달음과 함께 병행한다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저는 의학사상 노벨상이 나온다면 틀림없이 한국에 있는 한의과 대학교 중에서 나와야 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공은 공산주의 물결에 수축되어 있고 대만이나 일본은 양방의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거든요. 우리나라만이 周易學者나 禪學者들을 통해서 독특한 한의학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제마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벌써 1세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의학 5,000년 역사 중에서 이제마 선생님처럼 독창적인 분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제마 선생님이 왔다 가신 것이 우리 한방계가 일어날 징조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제마 선생님의 四象은 周易에 근본을 두고 있는 진리입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한방계를 자기멸시적인 눈으로 보지 마시고 창조적인 안목을 가지고 넓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四象에 대한 것은 이제 여러분 각자가 추리를 해 보기로 하고 그 다음에 五運六氣에 관한 것인데 여러분들이 天符니 歲會, 勝, 復 같은 말은 "內經"을 찾아서 공부하셔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子丑寅卯辰...각 방위에 대해서는 외우라고 했기 때문에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 五運六氣라고 하는 것은 五行과 六氣의 성분을 많이 확대해석하는 사람이 명쾌히 해낼 분야입니다. 그러므로 상당히 많은 추리력을 필요로 하지요. 五運六氣는 완전히 수학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 이전을 확 깨달아서 靈性을 개발한 사람이나 또 잔머리를 굴려서 이해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제가 직관을 굉장히 강조를 합니다만 직관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쉽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직관을 개발하여 五運六氣法을 터득하시든지 잔머리라도 많이 굴려서 이해하시든지 저는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직관을 공부한 사람은 직관으로 들어가고, 五運六氣운용에 곱하기 나누기 많이 하신 분은 또 나름대로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太陰 (眼) 上・下 (나는 안다) 사교적・이기적 |
少陽 (口) 上・下 (나는 모른다) 자기반성 saddism |
少陰 (耳) 左・右 (너를 안다) 헌신적・종교적 |
太陽 (鼻) 前・後 (너를 모른다)
|
'敷和'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木運이 정상적으로 들어 올 때를 말하는 것이지요. '升明'은 또 뭡니까? 火運이 정상적으로 들어올 때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備化・審平・靜順...등을 꼭 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것은 못 외운다 하더라도 水運이 미치지 못 할 때의 상황, 木運이 미치지 못할 때의 상황을 이해하면 되겠지요. 예를 들어서 木運이 미치지 못한 해에는 어떻게 될까요? 土가 盛하고 金이 盛하게 되겠지요. 이런 상황을 잘 추리하시면 됩니다. "內經"에 보면,
"木이 不及한 해는 委和라 하는데 木에 속하는 발생의 氣가 부족하여 金・土에 지므로 勝生이라고도 한다. 봄의 발생작용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고, 여름의 성장작용은 보통이며 여름의 土用, 곧 長夏의 化成作用은 浮湯하고, 가을의 收劍作用은 조기에 행해진다... 그 氣는 어떻고... 그 臟은... 그 果는...."
이런식으로 內經 약 1쪽 반 이상을 委和에 대한 설명으로 할애를 해 놓았는데 여러분들이 이것을 꼭 읽어 보십시오. 이것을 읽어보시면 아마 충분히 이해가 가실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木運不及, 火運不及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라고 하면 상당히 숙고를 해야 하실테니까 黃帝가 해 놓은 것을 활용해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五運六氣책을 활용해서 꼭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五運六氣의 虛實을 보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여기에 甲辰年生의 사람이 있습니다. 甲은 甲己合土에서 陽干이고 辰은 命理學에서는 土에 속하지만 六氣學상으로 뭡니까? 太陽寒水에 해당하지요. 그 중에서도 足太陽입니까, 手太陽입니까? 足太陽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足太陽의 寒水가 들어온 것과 土氣가 實하니까 무엇이 억제를 받고 있을까요? 水가 억제를 받는 해에 태어났습니다(土克水 원칙에 의함). 또 무엇이 별로 기운을 못쓸까요? 木이 土를 克해야 하는데 土가 너무 강하니까 木이 기운을 못 펴겠지요. 이때 주의 해야 할 것은 太陽寒水, 즉 찬물이 자꾸 누르는 것이 아니고 生長化收藏의 관계로 보아서 거두는 작용, 藏하는 작용, 발생하는 작용이 힘이 없고 주로 변화하는 작용, 성숙하는 작용이 굉장히 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만 따지고 보면 열매는 탐스럽게 성숙하고 결실도 잘 되겠지요. 왜냐 하면 목이 조금 虛하니까 金도 조금 세겠죠. 결실까지는 잘 되는데 봄에 싹이 잘 안납니다. 겨울철에 간직이 잘 안되지요.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결실이 되긴 되는데 씨 안에 핵이 잘 안된다는 뜻입니다. 또 그 해에는 유별나게 장마가 진다거나 하지요. 이런식으로 여러 가지 해석을 합니다만 이것을 인체에 비유해서 병리학적・생리학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土와 太陽寒水가 만난 상황을 플러스시켜야 된다는 것이지요. 이 甲辰年에 대한 해석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醫者는 意也라'의사는 뜻을 얻어야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甲辰이라고 하는 복합적인 상황은 열심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甲辰이라는 상황 하나만 놓고도 土氣가 實하니까 腎臟이 허하고 木이 虛하니까 어떻고 肝이 어떻고... 이건 전부 그저 하는 말이죠. 甲이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뜻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여기에서 水가 없는 것을 太陽寒水가 보충이 되어 주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해에 비해서는 무난한 해입니다. 平運의 해라고 하지요. 六氣상으로는 무난하다고 하는데 命理學상으로는 土와 土가 겹쳐서 좋지 않게 보거든요.그러나 命理學은 따로 命理學者에게 가서 하십시오. 그 곳은 그 곳 나름대로 보는 방법이 있으니까. 命理學에서는 내용물은 보지 않고, 계속 그릇만 보거든요. 사실 子・丑・寅・卯・辰...가 분명히 六氣學상으로는 질에 관한 것인데 그릇으로만 본다는 것이 저는 불만이죠. 五運六氣에서는 命理學에서 보는 사주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근거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죠. 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甲辰이라고 하면 太陽寒水로 보도록 하십시오. 이 해에는 전반부에 太陽寒水가 지배하니까 후반부에는 무엇이 지배할까요? 太陰濕土가 在泉을 지배하겠지요. 그러니까 후반부에는 土와 土가 끼어서 장마가 많이지게 되고 날씨가 축축할지 모르지만 전반부 6개월은 吉합니다. 이 해 후반부에는 어떤 사람이 병에 많이 걸릴까요? 마른 사람보다는 뚱뚱한 사람이 병에 많이 걸립니다. 五運六氣를 공부하고 나면 이런 것을 미리 예고해 줄 수가 있지요.
86년은 丙寅年입니다. 丙은 水이므로 水와 少陽相火가 플러스된 상황이지요. 전반부에 少陽相火가 司天하면 후반부에는 무엇이 지배하지요? 厥陰風木이 지배하거든요. 그러니까 후반부에 丙은 太陽寒水이고 厥陰風木이 혼합된 상황이니까 몸이 冷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뚱뚱하거나 말랐거나 설사 잘하고 몸이 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 여자들 중에 冷이 많은 사람은 후반부에 가서 고통이 심합니다. 이건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도 乾薑이나 肉桂, 吳茱萸같은 것을 많이 쓰면 좋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오하고 신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많은 추리를 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맞아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언제겠습니까? 아까 甲辰年을 예로 들었는데 土가 實하면 장마가 들어야 하는데 장마도 안지고 다른 病變도 일어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平氣의 해라고 하는데 이때는 천하가 태평하고 정치가 잘 되고 인심이 유화하고 모든 사람들의 덕성이 다 원만할 때는 五運六氣도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년 중 금년도에 平氣가 들어오느냐 들어오지 않느냐 하는 것을 언제 점치는가 하면 1월 1일 날 하기도 하고 一陽이 생한다는 동짓날 자정을 기해서 하기도 하고 별빛을 보고 한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너무나 심오합니다. 平氣가 들어오는 해는 어떤 해인가 하면 전년도에 인간들이 적선을 많이 하고 모든 衆生界가 서로 殺氣없이, 투쟁없이 원만하게 생활을 했을 때에 들어 온다고 합니다. 제갈량이 죽을 때에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금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점치는 방법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주의 비밀을 아주 극히 작은 일부분만을 알고 잘난 척하는 거지요. 85년을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85년은 乙丑年이었는데 乙丑年이 가지고 있는 특성대로 움직였지요. 여름에 유행한 병이 무엇이었습니까? 괴저병이었지요. 갯벌의 피조개에서 나오는 독소가 괴질을 많이 일으켰잖아요.
86년을 살펴봅시다. 86년의 감기는 지독해서 최소한 3~4주씩 고생을 하더군요. 특히 몸이 냉한 사람들, 냉수나 맥주 많이 먹고 몸이 冷해진 사람은 조심해야 됩니다. 85년도 乙丑年에는 뚱뚱한 사람들이 濕熱로 많이 쓰러졌습니다. 중풍에 많이 걸렸지요. 여름철에 무리를 하면 가을철에 걸리고, 가을에 무리를 하면 겨울철에 걸린다고 이야기하죠? 이 五運六氣상으로는 사람이 깨닫기 전에는 언젠가 한번은 하늘의 벌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나중에 다 하늘이 벌을 내리거든요.
그러면 丁卯年을 살펴봅시다. 丁이 무엇입니까? 丁壬合木인데 丁은 虛한 木이죠. 卯는 陽明燥金에 해당합니다. 木이 虛하니까 金이 木을 누르고(金克木), 또 木이 土를 눌러줘야 하는데 木이 虛해서 土를 눌러주지 못하니까 土가 木을 경멸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마른 사람들은 丁卯年에 살좀 찔 생각을 해야지 괜히 사우나탕에 가서 땀 빼고 매운탕 먹고 여자를 가까이 하게 되면 큰일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丁卯年・丁卯月・丁卯日・丁卯時에 위험합니다. 만약에 죽지 않더라도 큰병에 걸리게 되지요.
요즈음 바이오리듬 공부하는 사람들이 예언(?)을 하지요. 이것은 五運六氣를 본 것이 아니고 리듬의 낙차가 큰 날, 즉 '큰 위험일(critical day)'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바이오리듬 보다는 훨씬 더 세밀하게 나오지요. 色을 지나치게 밝히는 사람은 다 때가 되면 하늘이 벌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방탕한 사람은 少陰君火의 해에는 위험합니다.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 色을 밝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금방 고치려고 마세요. 五運六氣法만 알면 '금년에는 누가 큰일을 당하겠구나'하는 것을 미리 예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활용하는 五運六氣法은 그 사람의 사주를 보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생김새, 성격을 보아서 아는 것입니다. 少陽相火之氣가 꽉들어찬 해에는 창백한 얼굴에 남 욕만 하는 사람은 큰일나는 겁니다. 아주 대수롭지 않은 병으로 죽습니다. 원인도 모르는 병에 걸려서요. 그러니까 이 五運六氣의 활용이라는 것은 신비한 것이지요.
Copyright(C) 2001 Sa-Am non-profit Acupuncture Service All rights reserved.
'<♣ 휴게실 ♣> > 건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과 생명 (0) | 2009.11.16 |
---|---|
커피마실까? 녹차마실까? / 총명체조 (0) | 2009.09.22 |
슬로우 푸드의 대표주자 <발효음식> (0) | 2009.09.22 |
★ 五運六氣_&_동양의학혁명_총론.htm 파일입력 ★ (0) | 2009.08.24 |
3. 경락 팔괘 / 5. 오행 육경 (0) | 2009.08.23 |
1.머리말 / 2. 태극음양 (0) | 2009.08.23 |
사암침법의 특징 <동양의학혁명 총론> (0) | 2009.08.23 |
운기체질론(運氣體質論) / 오장육부의 건강 (0) | 2009.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