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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代 宗敎的 지도자 澄觀의 傳記 - 1. 2. 3.

화엄행 2009. 3. 27. 19:30

2005/12/23 오 전 5:07

 

                             唐代 宗敎的 지도자 澄觀의 傳記 - 1.

                                                            Imer Hamar
                         
                   도쿄 진보적 불교연구 국제대학 <불교학 국제 연구소>
                                                                    2002

 

 

                                       목   차

 ⊙  序
 Ⅰ. 出典
  1. 澄觀의 註釋書에 대한 陸長源의 序文
  2. 妙覺塔의 碑文(妙覺塔記)
  3. 佛敎徒의 史料編纂 作品
     a. 宋代  b. 宋代以後
  4. 地名索引
 Ⅱ. 澄觀의 批評的 傳記
  1. 제1期(726-776) ; 敎育
    a. 修道僧의 敎育  b. 俗世의 作品에 대한 敎育  c. 飜譯
  2. 제2期(776-796) ; 五臺山에서
    a. 順禮旅行  b. 華嚴經에 대한 註釋
  3. 제3期 ; 首都에서
    a. 華嚴經의 飜譯  b. 그의 僧侶階級과 職銜
    c. 皇帝와 高位官僚와의 交際  d. 그의 죽음
 Ⅲ. 結論 ; 澄觀은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
 ⊙ 보충A ; [妙覺塔記]
 ⊙ 보충B ; {宋高僧傳}에서 澄觀의 傳記
 ⊙ 參考文獻

 

 

 

※ 위의 보충 A와 B의 부분은 한문원전을 참조할 생각으로 번역을 생략하였습니다.

※ 그리고 본 논문의 주석부분의 번역도 생략했습니다.

 

※ 본 논문의 원문 그대로 직역하고자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다소 깔끄러운 곳이

있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본 논문은 영문으로 된것을 본행의 부족한 영어솜씨로 번역한 것입니다.

부족한 번역을 하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 화엄행 __()__ >

 

 

 

⊙ 序


 

중국 佛敎徒의 傳統에 의하면 澄觀은 唐代에 드날렸으나 唐의 붕괴 이후 덜 중요해졌던 華嚴派의 제4대 開祖였다. 징관은 굉장히 박식한 승려였다. 그의 작품들은 불교서적들과 중국고전들을 둘 다 참조문으로 인용하여 풍부하며, 그러므로 그의 생애의 학문에 대한 그의 완벽한 正統의 증거가 된다. 그의 많은 선배들처럼 그는 華嚴經에 대한 註釋書들을 썼는데, 그 경전은 화엄학파의 추종자들에 의해 부처님의 敎化에서 眞如가 실현됐던 완전한 표현으로서 간주된다. 그의 부피가 큰 주석서들은 경전 본문의 정교함을 애써 상세히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불교도의 학습에 대한 수집도 나타낸다. 이것이 왜 그의 작품들이 폭넓은 세상의 평판을 얻었고 뒷 세대 사이에 권위있어 졌는지에 대한 이유가 됨이 마땅하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주석서들은 현대 학자들에 의해 아직까지도 철저히 연구되고 있다. 그는 위대하게 영향을 미치는 사상가였고, 두가지 특별한 華嚴敎義를 종합한 제4법계의 이론에 입각하여 고심하여 만들었다. 즉, 性起(自然創生)과 法界緣起(法界의 從屬的 發生)이다.

해석 한가지로서 그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가 다만 학자나 철학자였다고 잘못 생각되곤 했었다. 그는 戒律(毘尼;Vinaya)스승들 밑에서 공부했고, 어떤 임명된 수도승에 대해 요구했었던 것들 보다도 훨씬 엄한 규칙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 그는 비구와 속인에게 똑같이 華嚴敎義를 설교하고, 華嚴儀式들을 이행하기 위해 집회를 갖았다. 더욱이 그는 성취된 冥想의 大家였다. 그의 정신 통일의 힘 때문에 그의 죽음 뒤에 그의 시체가 썩지 않는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의 불교승려로서 경력에 더하여 그는 고위 관료들과 황제와 교제 했었다. 그의 공로를 승인 함에서 그는 수도승의 관리자(僧統)와 국가적 스승(國師)과 같은 직함을 받았으며, 그는 황제 앞에서 화엄에 대해 설교하기 위해 궁궐에 초빙되기도 하였다. 지식계급은 개인적 스승으로서 그를 존경했으며, 화엄불교에서 어려운 문제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작품들을 쓰기 위해 그에게 질문했다. 징관이 그같이 유명한 수도승이였기 때문에 그의 전기는 몇몇 불교도나 공적인 역사적 출전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유명한 수도승들에 대한 전기들({송고승전}), 불교도의 기록들과 지방의 지명색인들에 대한 수집품들과 같다. 이들 작품의 저자들이 다른 출전에 접근했고, 징관의 인생과 그의 불교도의 경력에 대해 그들만의 균형을 가졌기 때문에, 이들 전기들은 몇몇 질문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되는 연구에서 우리는 징관의 생애에 대한 견해가 주의를 기울이며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출전을 맞추어 봄에 의해 언급했던 이상으로 토론할 것이다. 징관의 생애를 재 구성함에서 어려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회피한 초기의 학구적인 전기들과 달리, 우리는 그들 자료가 애매하거나 모순되다고 강조할 것이다. 어떤 경우엔 우리는 이들 문제들을 위한 해답을 제공할 수 있느나, 다른 경우에 우리는 단지 이들 애매한 표현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다.

 

 

 

Ⅰ. 出典

 

1. 澄觀의 註釋에 대한 陸長源의 序文

 

澄觀에 대해 최초로 남아있는 전기적인 출전은 징관의 주석서에 대한 陸長源의 序文이다. 그것은 일본에서 징관의 주석서에 대한 筆寫本을 통해 후세에 전해졌다. 그것은 가마쿠라 시대 것으로 인정되며, 가나자와 도서관의 소장으로 있다. 육장원은 징관의 전기들에서 그와 교제했던 고위 공직층들의 하나로서 언급된다. 즉, 그것은 그가 주석서에 서문을 썼기에 전적으로 가능하다. 인물로 경전 성격의 제목을 설명한 후에, 육장원은 징관의 생애를 처음부터 주석서를 완성했고, 그가 李自良의 초대에 의해 북부수도(太元)의 수도원인 崇福寺에서 설교했던 시기까지 요약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서문의 날자를 주목해야 한다. 육장원이 汝州의 서문에서처럼 언급했던 것에서 그의 공적인 전기는 794년 이전에 이 임무를 맡았다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 시기 전에 징관의 죽음보다 더 일찍 서문을 구성해야 했다. 서문이 갖춰진 날자를 검토하면, 우리는 어떤 것에 관해서는 그것이 우리의 다음 근거인 塔記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것에 의하면, 징관은 9살의 세상을 남겨두고 그가 연구했던 불교의 작품들을 기록하였다. 게다가 우리는 {송고승전}에 포함된 전기와 거의 일치하는 문장들을 발견한다.

{송고승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는다.

 "그는 (지금의 應天山이라 불리는)寶林寺의   명상지도자(禪師)의 지도 아래로 出家한 때가 겨우 11세였다. 그는 法華經을 독송했다. 14세에 그는 공적인 성직 수임식을 받았으며(得道했으며), 이 수도원에 등록되어졌다."

[서문]에서 그것을 읽으면 다음과 같다.

 " 9세에 그의 지역에서 寶林寺의   禪師의 지도하에 경전들을 암송했다. 14세에 그는 공적인 성직 수임식을 받았고, 寶林 修道院에 등록되어졌다."

{송고승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유명한 산들을 비밀의 가르침(秘藏)을 찾기 위해 방문했다. 그는 큰 비밀(壺奧)을 알기 위해 먼 곳까지 여행했다."

[서문]은 한가지 특징만을 덧붙인다.

 "그는 유명한 산들을 비밀의 가르침을 찾기 위해 '어디든' 방문했다. 그는 먼곳까지 큰 비밀을 알기 위해 여행했다."

이러한 발견들은 贊寧이 이 서문을 사용했거나 陸이 했던 것과 같은 출전을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그것들은 징관의 최초전기는 그가 죽기 전에 완성됐었다고 암시한다. 이것은 왜 塔記가 -우리가 보기엔 가치가 없겠지만 - 鄭汝慶(746-820)이 비록 징관보다 먼저 죽었을 지라도 징관의 전기를 10권으로 썼다고 진술하고 있는 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2. 오묘한 깨우침에 관한 塔 碑文 (妙覺塔記)

 

비문의 제목은 '妙覺塔記'인데, 元 王朝 동안 華嚴寺에서 再建되었고, 大唐 王朝의 淸凉國師를 위해 만들었는데, 그는 新·舊華嚴宗의 註釋者였으며, 불교경전의 번역에 대한 위대한 지도자였고, 서울에서 僧統(수도승의 관리자)으로서 섬겨졌다.

징관의 탑은 비문에 따르면, 元 왕조 동안인 至元(1272)代의 제9년에 재건되었다. 이는 {關中金石記(관중의 동과 돌로 된 銘文)}에 의해 중명된다. 화엄사의 수도승인 果安은 그것의 그림을 출판했던 유키레이몬에게 이 비문의 탁본을 주었다. 그것은 더 늦게 출판됐는데, 가마타시게오에 의해 편집되었다. 7m의 높이, 7층, 6각형 벽돌의 탑은 杜順의 탑과 거의 같이 淸 재건의 형태로 남아있다.

탑에 대한 현대의 재건동안, 그림은 탑의 더 낮은 부분에 자리하며, 그것이 원대에 세워졌다고 말해지고 있다. 다른 그림은 탑의 기초로부터 날자를 적지 않은 돌 상자에 보인다. 다음 두 그림들에서 우리는 탑에서 발견됐던 도금한 청동 부처상을 볼 수 있으며, 舍利를 담은 玉 항아리가 지하 궁전에서 발굴됐다.

華嚴寺는 西安에서 15㎞인 長安縣에 위치해 있으며, Qianlong시대 동안 산사태로 인해 붕괴됐는데, 단지 최근에 작은 사찰이 유일한 祠堂으로 재건되었고, 거기에 돌기둥이 존재하고 있다.

華嚴寺에서 暢耀는 그의 책에다 비문의 간행본을 포함시켰다. 그것은 기초적으로 가마타의 본문(비문의 탁본)과 일치하나, 더 분명치 않은 특징들을 갖고 있으며, 그 句讀法은 가끔 어렵다. 그러나 暢耀 역시 비문의 말미를 편집했는데, 돌 기둥의 설립에 대한 상황을 묘사하고, 이 작업에서 그것들이 수반했던 명칭들을 기록한다. 이것은 가마타의 간행본에서 빠져 있으며, 엘리사 쵸엔만이 가마타의 책에서 필사본의 기초로 그것을(창요의 간행본) 준비하였다. 그녀의 편집은 창요의 것 보다 더 믿을 수 있게 된 듯하다. 마사키 치쿠사도 역시 간행본과 이 본문(탁본)에 대한 일본어의 번역을 준비하였다.

龍川의 行吉祥은 永安의 직계제자(嫡子)였고, 간접적으로 淸凉의 제자(遠孫)라고 하며, 탑을 재건하길 원했다. 행길상은 白馬寺村에서 그의 비문에 대한 최근의 발견까지 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불교도의 사료편찬의 작업들처럼 이 시대와 관련시켜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못한다.
이 짧은 전기체의 출전을 따르면, 龍川 출신의 수도승인 行育(行吉祥)은 Jurchen家系 출신이었다. 쿠빌라이 황제는 그에게 불교도의 老莊哲學 論爭에서 그의 가치를 인정하여 '붉은 승가예복(赤僧伽梨)'과 '가르침을 설교하는 위대한 지도자(扶宗弘敎)'란 명칭을 수여했다. 남부 중국에 대한 몽고인의 정복 후에 그는 '남부 중국에 대한 전체순회에서 불교도의 사건에 대한 감독자(總攝江淮諸路僧事)'로 임명되었다. 제국의 교훈자의 부탁에 의해 그는 白馬寺의 복구를 경영했고, 거기서 그는 나중에 大修道院長이 되었다. 그는 Yuanzhen시대 2년(1296)에 죽었다.

그의 스승은 永安 柔 였는데, 그는 永安 비구 사원의 善柔로 확인된다. 그는(行吉祥은) 20세에 華嚴에 대한 미묘한 의미를 이해했다고 말했다. 그는 五臺山에서 화엄집회를 가졌고, 나중에 서울에서 화엄에 대해 상세히 말하였다. 그 시기 行育이 탑을 재건하길 원했던 때까지, 그것은 폐허에 놓여있었으며, 돌기둥은 없어지고 흩어졌다. 즉 그래서 시험하기 위해 아무것도 남지 않았었다.(塔廢碑亡漫不可考)
그는 燕京에서 甘肅의 臨 로 제국의 교훈자를 만나기 위해 갔는데, 다름이 아니라 위대한 사스키야파 라마이며, 파가스파(1235-1280)이고 사스키야 판디타의 조카였다. 1271-1273연 간에 파그스파는 臨 (싱쿤)에 거주했고, 거기에 사찰을 건립했다. 파그스파는 이 일을 이행하는 데 동의했으며, 그는 銀으로 된 主權 하나를 주었는데, 山西에서 수도승들의 지도자인 雄辯과 5개지역의 관리자인 遷君에게 이 일을 성취키 위해 명령했다.

雄辯은 역사를 알았다. 그는 雲南출신 수도승이였는데, 쿠빌라이가 운남을 차지한 후에 북쪽에서부터 갔다. 그는 거기서 25년간 머물렀고, 황제로부터 洪鏡이란 명칭을 받았다. 그가 운남으로 돌아간 후에 그는 불교의 경전을 지방언어(雲南語)인  (북)으로 번역했다. 그는 불교를 전파함에서 매우 활동적이였고, 그의 설교는 대중을 이끌었다. 그는 1301년에 73세로 죽었다.

雄辯과 遷君이 終南山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의 탑에서 유적을 찾곤 하였으나, 돌 토대(石座)만 찾을 수 있었다. 징관의 사리들은 수도승들과 제국의 군대가 떠난 후에 화엄사로부터 그것들을 받았던 지방 관리들의 가족들에게서 모여졌다. 그 사리들은 지방관들의 아내에의해 준비되었던 옥 항아리 안에 안치되었다. 추측상 이 옥 항아리는 탑 안에서 사리와 함께 발견됐으며, 묘사됐던 것 같다. 행렬이 유지됐고 봉납물들이 長安에서 만들어진 후에, 그 舍利들을 사찰로 가져왔다.

엘리사 쵸엔은 징관의 원래 탑은 종남산 어디엔가 있으며,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가 처음 작은 동굴을 좋아했던 곳인데, 元代의 원형 회복은 그것의 석조토대가 화엄사로 옮겨졌던 동안만이였다고 추측한다. 그렇지만 비록 작은 동굴에 대한 이 이야기가 사실일지라도 -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단지 두 印度의 神들이 그의 죽음 뒤에 그의 40개 이빨 중의 하나를 갖고갔다는 전설을 지지하기 위해 제공됐다고 추측한다 - 탑은 그가(징관이) 거주했던 화엄사에 안치하기 위해 그의 명성으로 뒤늦게 세워졌다.
그 비문은 그의 사리들이 화엄사에서 받아졌다고 말하며, 그의 탑이 거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종남산은 산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종남산 근처 지대도 똑같다. 唐代 동안 거기는 산을 숲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즉, 이것들은 그 결과 산과 함께 하나의 구성 단위를 형성했다.

澄觀의 塔에 대한 再建은 元왕조 동안 중국불교에 대해 두가지 측면을 반영한다.

 제일 먼저 화엄과 특히 징관의 가르침들이 북 중국에서 폭넓은 평판을 얻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行育은 그에게 명칭과 직위를 승인했던 황제에 의해 높은 존경을 받았었다. 게다가 그는 그의 시대의 유명한 스승이였는데, 그의 22명의 학생들은 그의 비문에 올려졌다. 그러나 화엄불교는 성직집단 뿐만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행되었다. 이것은 징관의 탑의 재건을 위한 귀족의 부인들의 많은 지지에 의해 증명된다. 禪불교의 영향으로 계통에 대한 중대한 것이 화엄에서 강화된다.

둘째, 중국 불교에서 파그스 파가 발휘했던 어떤 역할이 元 朝廷에서 티벳불교의 지배를 받았는지 불분명하다. 불교도의 노장철학 논쟁에서 그의 관여와 티벳어에서 중국어로 一切衆生戒律의 해석은 잘 알려졌으나, 중국 불교의 공동체에 대한 사건에서 그의(파그스 파의) 관련은 더 적게 참고문헌을 달았다. 여기서 우리는 行育 이전에 재건을 시작했으며, 그는 파그스 파의 허가를 얻기 위해 먼 곳에 갔다고 말했다. 그는 재건을 승인했고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이 작업을 성취하는데 行育을 돕기 위해 지역불교도의 관리들에게 명령했다. 게다가 행육의 전기에서 우리는 그가 파그스 파의 요청으로 중국에서 최초 불교사원으로 간주되는 白馬寺를 重創했다고 말한다.

이들 두 가지 경우는 行育이 중국 불교를 부흥시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과 서구의 학자들은 비문의 작가가 화엄학의 제5대 開祖인 宗密(780-841)의 제자였던 唐 왕조의 유명한 승려인 裴休(787?-860)라고 믿은지 오래다. 최근에 엘리사 쵸엔은 이 속성을 질문으로 야기시켰는데, 裴休에 의해 저술됐으며, {全唐文}과 두 가지 불교도의 역사편찬작품인 {隆興佛敎編年通論}과 {佛祖歷代通載}의 양쪽에서 유지됐던 찬양하는 작품이며 비역사적인 작품이고, 그것은 탑기와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全唐文}에서 宗密과 端甫(770-836)에 이어 裴休에 의해 찬양된 銘은 역사편찬적인 서문으로 우선하고 있으나, 澄觀의 경우에는 오직 銘만 발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송고승전}의 편집자인 贊寧(919-1001)은 전기들을 짓는 중에 이들 서문에 의지했으나, 우리는 징관의 전기 중에서 유사한 출처의 언급이 없음을 발견한다. 그녀는 배휴가 찬사만을 썼을 것이고, 징관에 대한 설명은 아니며, 혹은 만일 그가 그것을 썼다면, 그러면 그것에 대한 최초의 현존하는 견해는 元 왕조로부터이며, 탑기를 복구함으로써 발견됐고, 또는 普瑞가 {華嚴懸談會玄記}를 작업함에서 찾아냈다고 제안한다. 普瑞는 탑기를 인용했는데,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우리가 갖은 탑기의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탑기가 궁극적으로 印吉祥(行吉祥, 行育)에 의해 쓰여졌다는 엘리사 쵸엔의 시사에 동의한다. 비문의 말미에 '탑이 완성된 후에 인길상은 비문을 만들 것을 명령받았다(塔成命印吉祥記之)'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이 단언하기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고 솔직히 거절했는데, 그러나 마침내 압력하에 행동하면서 그는 槪要를 만들었다(枯述梗槪).
이와같이 탑기의 작가가 印吉祥이지 裴休가 아니라는 것이 매우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우리가 인길상의 저술을 받아 들이더라도 우리는 징관에 대한 그의 전기에 관해 裴休의 근거를 더욱 연구해야할 것이다.

비문은 두 가지 자료를 언급한다. 즉,

 "청량의 스승들과 그의 덕행과 가치있는 실행들을 찬미하는 것은 이것들이 장관지위(相國)인 鄭汝慶에 의한 10권 본문과 裴休에 의해 씌어진 '妙覺塔'의 돌기둥(碑石)에 철저히 기록된 만큼 여기서는 필요하지 않다."이다.

이것은 鄭汝慶에 의해 쓰여졌던 전기가 10권으로 있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한 첫째자료이다. 징관에 대해 비문에 언급했던 다른 자료는 위에서 토의했던 배휴의 비석이다. 印吉祥이 전기를 포함해 알렸던 비석인지, 또는 단지 찬양만 했던 비석인지를 결정하기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전기가 인길상에게 알려졌을 가능성은 약간의 인용문이 그것으로부터 게송자료에 남아있는 만큼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

晉水淨源(1011-1088)은 {肇論集解令模 }에 썼다.

 " '4가지의 우수한 논문(四絶論)'이란 용어는 裴休에 의해 씌어진 淸凉國師의 妙覺塔에 대한 비문에서 기초한다. 그 본문은 澄觀이 僧肇의 [四絶論]과 道生의 [十四科]의 풍취를 꾸준히 분석했는데, 마치 검은 龍이 如意珠를 갖고 노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 인용절은 印吉祥에 의한 碑文에선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 그는 [長安의 四絶論], 道生의 [十四科], 終南山의 杜順에 의한 法界緣起觀(法界觀), 天台의 止觀, 康藏의 還源觀으로 발휘하면서 탐닉하였다. 그는 이 작품들을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다루었다."고 하였다.

阮閱은 {詩話總龜}에 (다음처럼)썼다. 즉,

 " 그 탑 비문은 裴休에 의해 만들어졌고 말하길, '元和시대 5년에 (그는) 수도승의 지휘자라는 인감(僧統印)을 받았고, 그는 9명의 황제 밑에 살았으며, 7명의 황제의 개인적 교사(門士)였는데, 그의 수명은 102세였다."라 하였다.

비문에는, 즉

 " 元和시대의 庚寅年에 (그는) 僧統印을 받았는데 .... 그는 9명의 황제 밑에 살았고, 7명 황제의 門士였는데, 그의 수명은 102세였다."라고 하였다.

이들 인용문들은 찬양함에서가 아니라 배휴에 의한 전기적 작업으로 인해서거나, 혹은 최소한 배휴의 작품으로 간주했던 것이 분명하다. 淨源의 작품은 碑銘으로서가 아니라 塔記로서 이 전기에 언급한 최초 자료라는 것은 주목하기에 흥미롭다.

阮閱은 碑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塔銘으로 언급했다. 더군다나 元 왕조 이래 塔記의 시작에서 우리는 印吉祥이 실제로 다양한 더 초기 작품들에서 참조하면서 그것을 복구했다고 의미해야 했을 것과, 그가 다른 남아있는 징관의 전기들에서 전기적 자료를 덧붙여야 했을 것을 모았던 것을 풀이한다.

 

 


3. 불교도의 歷史編纂적 작품들

 

a. 宋代

 

송 왕조는 불교도의 역사편찬 작품들의 전성기였다. 즉 50권도 더 되는 책들이 불교도의 공동체가 960년과 1278년 사이에 쓰여졌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징관의 전기를 복원함에서, 나는 송 왕조에서 다음의 불교도의 역사 편찬 작품들을 활용할 것이다.


① {宋高僧傳} ② {廣淸凉傳} ③ {隆興佛敎編年通論} ④ {釋門正統} ⑤ {佛祖統記}

 

 

① {宋高僧傳}


유명한 승려들에 대한 송 전기들은 慧皎(497-554)에 의한 {高僧傳}과 道宣(667-696)에 의한 {續高僧傳}이란 두개의 더 이른 수집들을 존속시키기 위해 戒律派의 승려인 贊寧(919-1002)이란 제국의 지도자(國師) 밑에서 쓰여졌다.

贊寧은 988년에 그의 작업을 완성했다. 그는 10개 범주에서 531개의 전기들을 분할했다. 즉, 1.譯經 2.義解 3.習禪(명상의 연습) 4.明律 5.護法 6.感通 7.遺身 8.讀誦 9.興復 10.雜科 등이다.

징관의 전기가 해석계층에서 발견된 것은 그가 그의 화엄경에 대한 주석서들로 인해 유명해진 만큼 불가사의하지 않다. 위에서 토론했던 대로, 贊寧은 징관의 전기에서 裴休의 비문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징관이 획득했던 10가지 서약을 기록할 때 그의 문하생인 淸沔에 의해 쓰여졌던 [形狀(징관의 행동에 대한 평가)]에서 인용했다.

이 작품의 존재는 그의 기록에서 裴休의 碑文과 더불어 그것(形狀)을 받아들인 義天(1055-1101)에 의해 증명된다.

 " 청량의 形狀1권은 淸沔에 의해 저술됐다. 裴休에 의한 청량의 비문 1권은 형상과 일치하지 않는데, 이와같이 그것은 대조하기 위한 것이다."
보통 그의 혹은 그녀의 죽음 뒤에 곧 편집되었던 개인의 첫 전기는 역사편찬 작품들이 구성했던 비문과 그 후 전기들에 대한 形狀이였다. 義天은 形狀과 碑文 사이에 차별들이 있는것에 주목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形狀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두 자료 사이의 차이들을 알지 못한다. 송 왕조에서 普瑞는 {宋高僧傳}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였다.

 " 더욱이 (징관의 전기는) 宋高僧傳에서 발견된다. 승려들의 지휘자(僧統)인 贊寧이 썼던 전기들은 많은 오류를 포함한다. 즉, 그러므로 그것은 세부묘사에서 인용하기에 불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볼 것이니 만큼, {宋高僧傳}과 [塔記]에서의 징관의 전기 사이에는 중대한 모순이 있다.

 

 

② {廣淸凉傳}


淸?山의 장기에 걸친 역사는 五臺山에 있는 비구 수도원과 거기에 살았던 유명한 승려들을 묘사한다. 그것은 1060년에 그 시기에 오대산에 머물렀던 延一에 의해 쓰여졌다. 그것은 오대산에서의 더 이른 작품으로, 667년에 오대산을 여행했던 慧祥에의해 쓰여졌던 {古淸?傳(청량산의 오랜 역사)}보다 더 포괄적이다. 그것은 唐과 宋 왕조에서 몇가지 자료들을 인용한다. 이들 두 작품들은 {續淸?傳}과 더불어 1088년에 五臺山 3部作을 형성했던 張商英에 의해 구성됐다.

징관은 10년간 오대산에서 살았고, 거기에서 그의 화엄경에 대한 주석서를 썼을 때에, 그는 그가 '淸?國師(국가적 훈계자 청량)'라고 불려졌을 만큼 이 산과 교제하게 되었다. 그의 전기는 그가(張商英이) 그의(청량의) 주석서를 조성했던 상황에서 많은 세부묘사를 보탰으나, 그의 생애의 다른 면에서 오류를 포함한다.

 

 

③ {隆興佛敎編年通論}


불교 연대기는 송 왕조동안 처음 표현됐다. 祖琇는 1164년인 隆興期에 불교의 연대기에 대한 포괄적인 토론인 그의 '佛敎年代記'를 구성했다.
그는 後漢부터 960년까지 불교를 설명했고, 禪학파에게 上席을 주었는데, 그러나 다른 학파들의 유명한 지도자들과 현저한 지식계급의 불교도 구성원들과 불교의 지지자들을 언급했다.

 

 

④ {釋門正統}


'광명의 전달'이라고 칭했던 禪 작품들에 대한 특별한 시리즈는 禪가르침을 부처에게로 돌이켜 캐냄으로하여 宋에서 禪學派를 정당화할 목적에서 산출하였다.

첫째 주제는 {景德傳燈錄(경덕시대의 광명의 전달)}인데, 1004년에 道源에 의해 쓰였다. 비록 징관의 전기가 여기서 발견되진 않았지만, 그가 순종황제의 질문에 대답했던 그의 마음에 대한 본질적 敎義에 대한 가르침({答順宗心要法門})은 기록되어 있다.

이들 禪 작품들에서 天台學派의 창설자인 智 는 천태학파의 開祖로서 만이 아니라 천태집단으로부터 예리한 반응을 일으키는 持訶那(禪, Dhyana)실행에 대한 추종자로서 묘사되었고, 그들은 이러한 禪 역사를 비평했으며, 그들 자신의 역사 편찬적인 책들을 창작함에 의해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전달에 대한 견해를 확립했다.

먼저 학파의 남은 추종자들인 吳克己(1140-1214)는 {석문정통(불교의 학파들의 올바른 계통)}을 1195년과 1214년 사이에 저술했다. 이것은 확대됐으며 1330년대에 宗鑑에 의해 수정됐다. 그것은 공적인 역사의 구조를 따른 최초 불교도의 역사편찬적 작품인 것이다.

本紀(年代記)는 世家(세습의 집안)가 그들의 유명한 문하생에 대한 전기를 연결하는 동안 부처와 印度의 長老에 대한 전기를 포함한다.
宗鑑은 志(논설)을 썼고, 천태 지도자들과 그들의 俗人 추종자들에 대한 列傳을 구성했다. 華嚴과 禪 지도자들에 대한 전기를 따른 징관의 전기는 단락을 기록한 것([載記])에서 발견된다.

이 단락은 미개인(오랑캐)의 역사를 기록한 晉書에서 처음 사용됐다. 이 제목을 적용함에 의해, 宗鑑은 天台 전통을 따를 것을 강조할 생각이였는데, 그러나 이들 지도자들은 유명했겠지만 정식 계통의 부분은 아니다.

 

 

⑤ {佛祖統記}


{釋門正統}의 완성 후 오래지 않아서, 부처와 長老들의 계승을 기록한 또 다른 天台歷史는 1258-1269 사이에 志磐에 의해 쓰여졌다. 이것은 天台學에 대한 가장 부피가 큰 역사인데, 불교도와 非 불교도의 양쪽 자료들에서 기초 된 것이다. 그것의 선행자처럼 그것은 公的인 역사들의 구분을 채택했다. 징관의 전기는 [諸宗入敎志(학파들에 대한 가르침의 논문)]에서 발견되며, {석문정통}에서 그 본문을 밀접하게 따른다.

 

 

 

b. 宋代 以後

 

元代 ; {佛祖歷代通載} ; 念常.  {六學僧傳} ; 曇畺.  {華嚴懸談會玄記} ; 普瑞
明代 ; {釋氏稽古略} ; 覺岸.  {指月錄} ; 瞿汝稷.  {淸?山志} ; 鎭澄.
       {神僧傳}
淸代 ; {法界五祖略記} ; 續法.  {華嚴經持驗紀} ; 周克復

 

 


4. 地名索引

 

심지어 지방의 地名索引에서조차 징관의 전기들은 불교도의 자료들에 기초해 왔으며, 그 때문에 (그것에 의하여) 새로운 정보없이 준비됐는데, 그것은 그의 생애의 면들이 강조됐다는 것과 자료들이 이들 작품에서 사용됐다는 것을 보기에 흥미로운 것일 것이다. 나는 그의 전기가 발견되는 몇가자 지명색인들을 목록으로 나열한다.

山西通志 160.  陝西通志 65.  浙江通志 200.  紹興府志 69.  重修安徽通志 348. 등이다.

징관의 전기를 복원함에서 나는 宋 불교도의 역사 편찬적 작품들과 알려지지 않았거나, 그의 전기에 대한 더 초기 작가에 의해 사용됐던 자료들에 의지해야 했던 그의 탑비문을 사용했다. 나는 또한 이것은 그의 전기에 대한 가장 상세한 견해로서 뒤의 法界五祖略記를 언급했다. 다른 작품들은 진정한 자료를 준비하지 않고 위의 자료들에서 기초했던 정보를 되풀이 했는데, 그러므로 가치를 갖지 못한다. 여기 출판의 순서로 참고서들이 있다.

 

 

SGZ ; 宋高僧傳 988년,
GQZ ; 廣淸凉傳 1060년,
LFBT ; 隆興佛敎編年通論 1164년,
SZ ; 釋門正統 1237년,
FT ; 佛祖統記 1269년,
MT ; 妙覺塔記 1272년,
FWL ; 法界五祖略記 1680, 등이다.


 

 

 

                             唐代 宗敎的 지도자 澄觀의 傳記 - 2.

                                                            Imer Hamar

 

Ⅱ. 澄觀의 批評的 傳記

 

1. 제 1기 (736-776) ; 敎育

 

a. 修道僧의 敎育

 

그는 姓이 夏侯이고, 그의 字는 大休이다. 그는 越州山陰 또는 越州會稽의 출생이다. 그는 738년에 태어났다. [妙覺塔記]는 그가 9세였을 때 體眞했고, 명상의 개업자 禪德은 불교의 역사가에게 다른 방법으로 알려지지 않은 자인데, 寶林寺에서 그의 스승이 되었다. 1년 후 澄觀은 三藏(Tripitka)를 완전히 이해했고, 그는 11세에 恩度(황제의 은혜)로 정해졌다. 그가 필요한 나이에 도달했던 후에, 그는 757년에 완전한 戒律을 받았다. 불교의 저술에서 그의 박식함을 보면, 다음에 말하는 것은 그가 설명했던 작품들로서 목록에 올려졌다. 즉, {般若波羅密多經}, {維摩詰經}, {大涅槃經}, {완전한 깨우침의 경(圓覺經)}과 다른 경전들, 모두 14개이며, 그리고 {大乘起信論?(Mahayanasraddhotpda)}, {瑜伽師地}, {因明入}, {唯識悉地}와 다른 주석서들은 {長安 四絶論}, 道生의 {生公十四科}, 法界의 識別力, 天台冥想과 法藏에 의한 還源은 물론 9개 모두에 열거하고 있다.

澄觀이 사실상 {圓覺經(완벽한 깨우침의 경전)}을 제외하고 위에서 진술했던 모든 작품들을 언급했다는 것은 (정신적인 의미에서)가치가 없다. 澄觀의 문하생 宗密은 이 경전에다 몇가지 주석서들을 썼는데, 禪僧들에 의해 주되게 연구되고 있다. 비문의 작가처럼 아마도 澄觀과 禪佛敎사이에 강한 연합을 일으킬 생각이였고, 그는(종밀은) 이 경전의 연구를 그에게(징관에게)로 돌이켰다.

{宋高僧傳}에 따르면, 징관은 11세에 {송고승전}의 구성시대에 應天山이라 불렸던 寶林寺에   禪師 밑으로 승려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났다. 寶林寺는 會稽에 수도원이였고, 乾符시대(874)의 제1년에 그것의 재건 후에 應天이라고 불렸다. 23丈 높이 탑에서 그것의 이름을 얻었다. 禪僧  는 玄儼의 문하생이였음에 틀림없는데, 洪 는 寶林寺에서 살았다고 말해지고 있다. 징관은 이 수도원에 소속되었는데( 此寺), 그가 여기에 등록됐던 것을 의미한다. 그는 여기서 {法華經}을 암송했다. 이 진술은 보통의 성직 지원자가 - 때때로 {법화경}을 - 初心者시험을 위해 경전을 암송해야 했던 만큼 의미가 된다.
澄觀이 완전한 수도승이 된 후에, 그는 다양한 학파들의 가르침을 연구하기 위해 그 시대의 유명한 지도자들을 방문했다. {묘각탑기}는 그의 스승들로서 추종하는 지도자들을 목록에 올린다. 즉, 曇一, 禪師 常照, 無名(722-793), 法詵(718-778)등이다. 至德시대 2년(757)에 징관은 완전한 성직수임식과 曇一로부터 終南山戒律을 받았다. 사실 曇一은 相部宗으로부터 갈라졌던 東塔學派의 부분이였으며, 그는 南山과 相部 양쪽을 비판했다. 東塔學派와 나눈 澄觀의 교제는 동탑학파의 기초자였던 懷素에 의해 쓰여졌던 계율에 대한 주석서로부터 그의 인용문에 의해 확인된다.
징관은 會稽에 위치했던 開元寺에 曇一 밑에서 공부해야만 했는데, 曇一이 여기에 살았던 때는 737년까지이다. 다음은 曇一의 문하생인 禪師 常照밑에서 그는 菩薩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리고 더하여 그는 10가지 큰 盟誓를 했다.

{華嚴懸談會玄記}는 10개의 盟誓를 목록으로 넣은 {묘각탑기}를 기입했다. 아마도 이들 맹서를 기록한 첫 번자료일 {隆興佛敎編年通論}으로부터 가져왔을 이것들은 다음과 같다. 즉,

① 나는 성직생활을 포기하지 않겠다. ② 내 생각에 나는 부처의 법을 어기지 않겠다. ③ 법계의 경전에 앉아있는 동안 나의 등을 돌리지 않겠다. ④ 나의 천성을 욕망의 영역으로 오염시켜지도록 놔두지 않겠다. ⑤ 비구니 승방에 들어가지 않겠다. ⑥ 신도의 침실에 닿지 않겠다. ⑦ 부당한 호화로움을 보지 않겠다. ⑧ 오후에 먹지 않겠다. ⑨ 염주를 놓지 않겠다. ⑩ 밤새 나의 袈裟와 鉢盂를 떠나지 않겠다. 등이다.


{宋高僧傳}에도 징관이 획득하려 했던 맹서에 대한 결심을 제공하는데, 淸沔에 의해 쓰여졌던 그의 相部로부터 인용한다.

① 항상 수도원에 거주하며, 3벌의 袈裟와 鉢盂만을 소유하겠으며, 富를 모으지 않겠다. ② 내 시대의 名聲을 추구하지 않겠다. ③ 여성을 쳐다보지 않겠다. ④ 집안일을 꾀하는 데 머물지 않겠다. ⑤ {법화경}을 암송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 ⑥ 항상 大乘佛敎經典(Mahayana Sutra)을 읽겠으며, 삶의 본질에 응할 수 있게 하겠다. ⑦ 항상 {화엄경}을 설명하겠다. ⑧ 밤이나 낮이나 내 삶을 통틀어 눕지 않겠다. ⑨ 나의 善을 자랑함으로써 다른이들을 현혹키 위한 名聲을 추구하지 않겠다. ⑩ 법계를 救濟하기 위해 불쌍히 여김을 포기하지 않겠다.


 {송고승전}은 그가 결코 그의 서약을 깨지 않았다고 종결하고 있다. {隆興佛敎編年通論}에서 그 서약들은 전적으로 징관의 엄한 수도승적 억제력과 관련있는데, 그 誓約들은 {송고승전}에서 이 측면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有情의 존재를 향한 愛他的 자세도 강조한다.(6,7,10번 경우) 만일 그가 정말로 보살가르침을 받고 있는 동안 이 서약들을 지켰다면, - 비록 {송고승전}이 이것을 입증하지 못하지만 - {송고승전}에 그 서약들은 이 상황에서 보다 더 잘 적합했을 것이다.


[形狀]의 존재처럼 義天의 목록으로 입증되며, 먼저 이 문제에서 {융흥불교편년통론}보다 그것에 열중하는게 낫다. 그것은 맹서들이 화엄경(송고승전;7, 융흥불교편년통론;3)과 연결되어 나중에 써 넣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란 점에서 또한 중요한데, 이 경전이 그의 초기 경력에서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하진 않은 것 같긴 하지만말이다.


그의 계율학습을 완성하고 나서 징관은 荷澤神會(670-762)의 문하생인 無名(722-793)밑에서 공부했는데, 그는 南宗禪을 표방했다. 그들은 無名이 징관이 살았던 牛頭山과 天台山 근처지방으로 갔을 때, 洛陽이나 남쪽에서 만났을 것이다. 790년에 무명은 오대산으로 갔으며, 그는 그곳을 고정된 거주지로 정하진 않았다. 징관이 776년까지 오대산에 머물렀을 때, 그들은 거기에서 다시 만났을 것이다. 무명은 그를 위해 탑이 세워졌던 거기의 佛光寺에서 죽었다. {송고승전}에 그의 전기에서 징관은 그의 문하생으로서 언급되지 않으나, {景德傳燈錄}은 無名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유일한 사람으로서 澄觀을 묘사한다. 그는(無名은) 동부 수도, 즉 洛陽의 大詵으로부터 화엄을 배웠는데, 그는 法詵(718-778)과 일치한다. 낙양은 그의 출생지였을 텐데, 그의 전기들을 따르면, 그는 747년에 蘇州와 767년에 常州에서 설교했다고 말해졌다. 일본인 승려인 凝然(Gyonen)은 法詵을 慧苑의 문하생으로 간주하는데, 그는(慧苑은) 法藏의 가르침을 상속했다. 이것은 慧苑의 중요한 저술인 {刊定記}라는 이른바 그의 주석서에 의해 확인된다. 징관은 남부에서 그의 밑에서 공부했던 것 같으며, {석문정통}과 {불조통기}상태와 같이 낙양에서는 아니였다.


징관은 일단 자신의 다음시대를 가르칠 수 있는 敎義를 알기에 충분하도록 거침없이 화엄경 가르침을 습득했다. 그의 스승은 그에게 다음처럼 말했다. "법계는 네게 완벽하게 존재한다." 징관이 자주 그의 작품에서 화엄스승들인 杜順, 智儼, 法藏, 慧苑을 언급하지만, 결코 法詵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것은 그(법선)가 화엄계통에서 그리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였다.


{송고승전}은 징관을 불교의 철학과 冠禮에서 매우 광대한 교육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밖에 또 曇一, 無名과 法詵은 이상에서 토론했고, 다음의 지도자들이 그의 스승들이라고 목록되어지고 있다. 즉, 醴, 玄璧, 淮南 法藏, 成都 慧量, 湛然, 慧忠, 法欽, 慧雲 등이다.


乾元代(758-760)에 曇一을 방문하기 전에, 징관은 潤州(지금의 鎭江縣)의 수도원 棲霞에서 醴 大師 밑에서 相部學派의 가르침을 공부해야 된다고 말했다. 이 자료를 제외하고 지도자 醴는 중국불교의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징관은 三論學의 觀虛부문의 가르침들?이 玄璧에 의해 그에게로 전해졌던 金陵(지금의 南京)으로 갔다.


징관의 노력 때문에 三論學은 長江의 남부지역에서 폭넓은 평판을 얻었다. 우리는 玄璧의 전기를 갖지 못하고 있다. 大力代(766-769)에 징관은 瓦棺寺(江西지방의 江寧府)로 갔는데, 거기서 믿음과 涅槃을 일깨우는 경전({起信論}, {涅槃經})이 그에게  전해졌다. 게다가 淮南의 法藏 밑에서 - 화엄학의 제3대 開祖로 분명한 - 그는 元曉의 믿음을 일깨우는 것에 대한 주석서([起信論疏])를 공부했다. 淮南의 法藏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772년에 징관은 成都의 慧量 밑에서 三論을 연구하여 얻기 위해서 剡溪로 갔는데, (慧量)그는 다른 경우엔 알려지지 않았다.


775년에 그는 天台冥想과 法華에 대한 주석서들과 {維摩經}과 다른 경전들을 유명한 天台開祖인 湛然밑에서 연구하기 위해 蘇州로 갔다. 징관은 {宋高僧傳}에 [湛然의 傳記]에서도 {佛祖統記}에서도 湛然의 문하생으로서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湛然의 주된 문하생(그 방에 들어갔던 한 사람인)이였던 元浩의 전기에서 징관은 그의 동료학생으로서 언급된다. 그 {佛祖統記}와 {釋門正統}은 징관이 오대산으로 담연과 함께갔던 江과 淮의 40명 승려들의 하나였다고 말한다.


다른 출전들은 이 정보를 인정하지 않지만, 징관은 776년에 오대산으로 여행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러므로 이런 진술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天台哲學은 그의 작품들에 반영됐던 만큼 징관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釋門正統}과 {佛祖統記}는 湛然이 澄觀의 '無生物의 대상은 佛性(부처種)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반박할 목적으로 [止觀義例]와 [金碑論]을 썼다고 한다. 이것은 담연의 최근 주창했던 가르침과 첨예한 대조를 유지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이나 카마타 시게오는 다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실 징관은 무생물의 대상에 대해 불성을 붙임으로 인해 그의 선행자들 보다 더 멀리 한 발을 떼었다고 한다.


湛然에게서 화엄사상으로 인한 영향은 이들 작품들이 징관과 관련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할 지 모르며, 화엄이란 개념들은 그의(湛然의) 다른 작품인 [止觀大義]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은 그가 징관을 만나기 전에 著作됐다.
{송고승전}은 징관이 牛頭山 지도자 忠(忠師)밑에서 공부했다고 말하고 있다. 忠師는 慧忠(683-769)인데, 禪의 牛頭派의 5대 開祖이다. 혜충은 金陵으로 이동후에 그의 스승인 智威(646-722)로부터 牛頭山의 공동체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742년에 혜충은 縣의 행정관의 요청으로 금릉의 莊嚴寺로 이동했는데, 거기서 그가 聖職을 받았었고 최후에는 죽었을 것이다. 징관의 공부는 湛然과 天台를 공부한 후에 慧忠이 그 시기 전에 죽었으므로 그 밑에서 확실한 위치를 갖을 수 없었다. 그 가르침은 징관이 金陵에서 玄璧과 三論을 공부했을 시기에 속했어야 했으며, 莊嚴寺(Zhuangyan monastry)에서 자리를 갖았어야 했다. {景德傳燈錄}에서 慧忠은 최남단 중국에서 설교했던 36명의 문하생을 갖았었다고 말하는데, 그러나 징관은 그들 사이에서 기록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금릉에서 그들의 만남은 그의 아래주석( )에서 이 장소를 묘사한 것처럼, 牛頭山으로 갔을지 모른다.

 

"金陵의 남쪽 20리에 '소머리산(牛頭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다. 그것이 불려진 이유는 두 개의 산꼭대기를 갖았기 때문이다. 그것의 이름은 성공한 王朝들을 통해 변해왔다. 그것은 쌍둥이 望樓, 하늘의 망루, 남부의 祭壇, 不死身들의 동굴 등으로 불려졌다. 지역적 地名索引인 {域地誌}에 따르면, 이 산은 1400chi 높이와 둘레가 47리이다."

 

그는 또한 牛頭學派의 다른 스승들에게서 法欽이라 불렸는데, 徑山(Yuhang縣, 浙江)에서 거주했었으며, 그들은 아마도 거기서 만났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가 無名밑에서 南宗禪을 잘하게 됐으며, 慧雲밑에서 北宗을 잘하게 됐는데, 그들의 어떤 傳記도 발견되지 않는다.


Ui Hakuju는 만일 그들이 775년에 만났다면, 그는 普寂(651-739)의 문하생들 중 한 사람일 수 있다고 단언한다. 징관은 그들을(普寂의 문하생들을) '北宗이라고 평판하다'는 말씨로 언급한 것 처럼 확실히 北宗의 敎義와 친숙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다양한 禪學派들의 스승들 밑에서 연구했다. 이것은 그 경우에 있어서, 학자들은 그가 속할 수 있었던 학파를 결정하기위해 시도했었다. 그의 {心要(마음의 본질)}이란 작품에서, 타카민 로슈는 南宗의 영향을 발견했으며, 그러므로 荷澤 神會의 후계자로서 그를 동일시하였다. 카마타 시게오는 다른 면에서 그가 牛頭派의 입장에서 남종과 북종 양쪽을 비평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징관은 그의 가르침이 북종도 남종도 아니며, 그러나 心宗派이긴 하다고 주장한다. 요시쯔 요시히데는 징관이 禪敎를 華嚴學의 관점에서 평가했던 만큼 독단적으로 禪學派의 어느 한 가지와 연합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묘각탑기]가 無名만을 그의 禪 스승으로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데, 이에 반해서 {隆興佛敎編年通論}은 牛頭派의 두 스승을 명명하고 있다. 만일 그의 碑文이 裴休에의해 쓰여졌다면, 그 이유는 징관의 주된 문하생이고 荷澤 神會派의 開祖者일 뿐 아니라 화엄학의 제5대 開祖였던 宗密과 그의 가까운 친분을 갖았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裴休는 내가 생각하기에, 無名이 또한 징관의 전기의 한 부분이였던 만큼 징관의 전기에서 神會派에 먼저 부여되기를 기대했다고 보인다. {隆興佛敎編年通論}은 禪 年代記를 보유하고 있는데, 分派主義가 그의 스승들에 대한 전기의 평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했다.


마침내 그의 승려 교육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江西와 浙江에서 일어났으며, 그의 출생지와 같이, 그가 초심자와 승려와 모든 지위가 되었고 그가 공부하러 갔던 수도원은 이 지방에 위치될 수 있다고 단언하기로 했다. 그것은 776년에 오대산으로 그의 순례여행의 시작점이 되야한다. 그의 생애에 대한 제2기를 토론하기 전에, 우리는 그의 세속의 교육과 그의 이른바 번역에 참여를 다루어야 한다. 

 

   

b. 俗世의 작품에 대한 敎育

 

[묘각탑기]는 징관이 오대산에 체류한 동안 세속의 작품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하고 있다. {송고승전}은 이것을 입증하지 못하나, 그것은 그가 불교의 가르침들을 완수했던 후에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의 생각은 그를 세속의 작품들에 대한 중요성을 실감하는 데로 인도한다.

 

" 50단계(五地)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속세의 규칙들을 배우며, 如來藏을 실현하고 그의 마음이 부처의 국토에서 안식한다. 그는(五地의 사람은) 그의 계발 후에 지혜를 받고, 세상을 섬긴다는 사상이 발생한다. 내가 배움의 단계에서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일은 징관의 속세의 문학을 연구하기 위한 동기에 광명을 준다. 그는 중국 非佛敎의 작품들이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더 좋은 이해를 얻는 데로 이끌작정이었다.


그는 儒敎의 규범(經), 역사적 작품들(傳), 철학적 서적들(子)와 언어학(小學蒼雅)를 공부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는 인도 문화를 공부했다. 즉 悉曇文字, 이교도의 철학(諸部異執), 4베다(四圍), 5가지 과학(五明), 기도문(秘呪)와 종교적 의식(儀軌) 등이다.


징관의 중국 고전 작품에대한 박식함은 화엄경에대한 그의  에서 그것들로부터 충분한 인용문에 의해 입증된다. 화엄경의 어떤 密談에대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으로, 그는 다음의 책들을 인용한다. 즉, {周易}(Book of Change), {左傳}, Erya, {周禮}, {孝經}, {道德經}, {莊子}, {列子}, 選集·語錄, {管子}, 역사가의 기록, {漢書(漢 代의 연대기)}, Guangya와 {說文解字} 등이다. 이러한 책들을 인용하는 동안 그는 진술로 그의 거리를 유지한다. 즉, "나는 오직 그 단어들을 빌릴뿐이지 그것들의 의미를 채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징관은 고위 공직자들과 좋은 교제관계를 했는데, 우리가 아래에서 볼 것과 같다. 즉, 그것은 그러므로 유교와 도교의 저술의 이들 引喩를 통해서 불교의 敎義들을 이해하는데에 그들을 돕기 위해 그에게 중요했다. 그러나 그는 토착적 사상 이상으로 불교의 가르침의 卓越을 강조했다.


인도 문화에 대한 그의 지식과 관련하여, 불교의 작품들과 외국 번역가들에 의한 보고서들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다양한 梵書文字는 중국에서 산스크리트 기도문과 陀羅尼를 쓰기위해 사용됐다. 그것은 悉曇文字로서 알려져 왔는데, 그것에 대해 우리는 7C로부터 가장 이른 기록의 증거를 갖고 있다. 징관은 이 문자를 알고 있다. 즉 이것은 그러나 그가 그 언어를 똑같이 잘 배웠다고는 의미하지 못한다. 중국의 승려들이 일반적으로 書寫를 숙달함에 의해 그들이 언어를 알았다는 것을 믿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悉曇文字는 悉曇文學을 포함한다는 어떤 묘사는 징관의 주석(疏)와 아래주석( )에서 발견될 수 있다. 마침내 그는 힌두교의 시작에서 생존의 본질을 위해 梵摩(梵天)가 창작했던 기록까지 주목하며, 그 문자는 바뀌지 않았는데, 이런 점에서 그 기록은 중국에서 갖고 있다. 징관의 실담문자에 대한 지식은 그의 思索에 대한 탄트라(Tantra)의 감화를 묘사할지 모른다. 오대산은 - 帝國의 지지는 물론 不空金剛(Amoghavajra)의 노력들 때문에 - 대략 징관이 거기에 머물렀던 그 시대에 탄트라이즘(Tantraism)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러므로 그에게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만일 그가 그의 번역에서 不空金剛을 援助했다고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또한 이 문자에 대한 그의 지식의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아래에서 토론했다.


징관은 인도의 이교도의 견해에 대해 열가지 원칙(十宗)의 두 번째를 검토하는 동안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는데, 즉 法界의 存在와 自我의 없음인 法有我無이다. 法藏은 說一切有部(薩婆多, Sarvstivada)에 대해 이 범주를 사용했는데, 사실 그것의 주된 敎義는 자아가 활동하지 않는 동안 法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방향 하에 징관은 小乘의 說一切有部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印度의 異敎徒의 견해와 토착적 중국의 철학도 검토했다. 이것은 法藏의 문하생이였던 慧苑의 영향 탓으로 돌려질 수 있다. 가르침에 대한 그의 분류에서 慧苑은 가르침을 4단계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절대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교도의 가르침(迷眞異執敎)"인 것이다. 그는 먼저 인도의 이교도의 견해를 요약하면서, 토착적 중국의 철학으로 전환한다. 징관은 법장의 다섯개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본질에 대해 혜원을 맹렬하게 비판했으며, 그러므로 그는 혜원의 분류를 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또한 그의 방대한 저작(Opus Magnum)에서 이 주제를 처리했다. 그가 두 번째 원리에 대한 이 질문에 접근한 이유는 說一切有部가 이교도의 철학들의 잘못된 因果關係인 邪因과 非因果關係인 無因을 반박했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의 11개 인도의 학파들의 주된 가르침들에 대해 개요를 제공하고 있다. 즉, ① 數論, ② 勝論, ③ 塗灰外道婆羅門(금욕주의자들과 바라문), ④ 圍陀論師, ⑤ 安茶論師, ⑥ 時散外道, ⑦ 方論師, ⑧ 順世論師, ⑨ 因力論師, ⑩ 宿作論師, ⑪ 無因論師 등이다. 이러한 학파들을 검토하면서 징관은 자주 唯識悉地와 그것의주석인 瑜伽師地論(Yogacarabhumi Sastra), 阿梨耶 敎義章(Aryasasanaprakarana), 百論(Sata Sastra)을 언급한다. 징관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베다(고대 인도의 경전)에 대한 두 가지 언급과 다섯 가지 과학적 지식(五明 ; 언어학, 수공예, 의약 및 주술, 논리학, 종교)에 대한 몇가지의 언급들을 발견한다. 다섯 가지의 과학적 지식들을 언급함에서 그는 瑜伽師地論에 의존하고 있다.  


 
c. 飜譯

 

[묘각탑기]는 징관이 大力시대의 戊申년(768)에 경전을 번역했다고 한다. {隆興佛敎編年通論}은 그가 名文家(潤文大德)로서 Amoghavajra(不空金剛)과 함께 제국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인다. {法界五祖略記}는 번역이 771년에 興善寺에서 완성됐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곳은 不空金剛이 수도에서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120권에 77편의 작품을 번역했다. 이 자료의 마지막 부분은 확실히 써넣은 어구이다. 우리는 不空金剛의 전기에서 771년 황제의 생일에 그가 번역했던 경전을 증정했으며, 그가 天寶시대로부터 120권에 77편의 작품을 번역했던 현재까지라고 말한 무엇인가에 기념비를 썼다.


징관이 번역에서 불공금강의 보조자들 중의 한사람이였는가라는 질문은 아직 해답이 나질 않고 있다. 이 시기 즈음에 불공금강은 두 작품을 번역했는데, 密嚴經과 仁王經이다. 仁王經을 번역함에서 그의 보조자들 중 약간은 불공금강의 기념비에 기록되고 있지만 징관은 포함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경전이, 특히 護國品이란 칭호를 받은 章은 왕들이 자연적 혹은 사회적 장애의 경우에 이 경전을 암송할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에서 代宗황제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주 이곳에서 100명이 더 되는 승려들에게 필요할 때는 언제나 이 경전에 대해 해석할 목적으로 보급하였다. 우리는 징관이 그 시기에 수도에서 참석하였다는 가능성을 제외할 수 없다.


不空金剛 밑에서 번역함에서 그의 관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소용이 될 자료의 부분이 하나 더 있다. [묘각탑기]에 따르면, 징관은 9명의 황제(玄宗, 肅宗, 代宗, 德宗, 順宗, 憲宗, 穆宗, 敬宗, 文宗) 밑에서 살았으며 그들의 7명에게 제국의 스승(國師)으로서 복무했다. 이 정보에 따라서, 징관은 代宗황제의 스승이였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쩌면 번역 팀을 결성했을 것이다. {宋高僧傳}에 따르면, 無著은 767년에 징관이 오대산으로 떠나기 전에 수도에 雲華寺에서 징관 밑에서 화엄을 연구했다. 불행하게도, 淸?傳에 無著의 전기는 이것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징관은 수도에서 살았으며 번역에 참가했는데, 그는 단지 화엄경 주석을 완성한 후에 전국적인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황제를 가르쳤다는 것은 매우 애매모호하다. 수도에 징관의 출현에 관련하여, 우리는 이것은 代宗황제가 그를 소환했던 796년에 일어났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이 그의 최초 방문이였는지의 의문은 논쟁을 면할 수 없다.

 

 

 

 

2. 제 2기 (776-796) ; 五臺山에서

 

a. 巡禮旅行

 

[묘각탑기]에 의하면, 징관은 法詵밑에서 그의 화엄학을 완성하고나서 오대산으로 갔다. 그가 화엄경의 '菩薩住處品'을 읽을 때, 그는 文殊師利의 光彩가 오대산에 비춰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때문 일만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고, 그의 운명에 따라서 거기에 머물렀다. 그가 도착한 후에, 그는 華嚴寺에서 安住했으며 10년을 머물렀다. {송고승전}은 776년에 그가 오대산에 갈 맹서를 했다고 말한다. 종교적인 장소를 방문하고 나서 그는 峨嵋山으로 갔는데, 그밖의 유명한 불교의 거룩한 산이며, 그 산의 보호자인 普賢이 출현하시길 구하기 위해서였다. 아미산에서부터 그가 화엄사에 머물렀던 오대산으로 돌아왔다고 말해진다. 여기서 그는 懺悔의 方等儀式(方等懺法)을 실행했다. {廣淸?傳}은 징관이 화엄사의 般若院에 머무르면서 화엄경을 연구했다고 말한다.


아미산으로 징관의 순례여행에 대한 보고서는 {釋門正統}과 {佛祖統記}에 되풀이하여 말했고, 아마도 주석(疏)과 아래 주석( )에서 그의 자서전적인 언급들을 이유로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보살주처품'에 주석을 달면서, 그는 다음과같이 썼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이 경전을 읽었다. 내가 이 본문을 읽을 때 마다, 나는 탄식과 함께 그 書卷을 마쳤다. 그 때문에 나는 일만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았고, 나의 운명을 따라서 그 성스러운 지역에 거주했다. 나는 즉시 10년동안 머물렀다."

 

아래주석( )에서 그는 한층 더 상세히 말한다.
 
"먼저, 나는 내가 왜 이 산에 왔는가의 이유를 검토한다. 그 이유는 菩薩이 이 산에 거주하신다고 말한 본문이였다. 그 시대에 반란들과 산적들이 혼란을 일으켰고, 창을 가진 군인들이 언제나 벌떼처럼 들끓곤 했으며, 도로들은 늑대들(흉악한 천성의 사람)로 꽉 차게 되었고, 산과 강들이 그 길을 가로막았다. 아직은 나는 두려움 없이 여행했다. 그래서 나는 비록 그 길이 5천리, 왕복에 1만리일지라도 '내 운명을 따라서 나는 거주했다'고 말한다. 원래 나는 잠시 동안 머물려고 계획했었는데, 그러나 세월이 그 거룩한 지역에서 매우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15년중에 10년을 여기서 주석(疏)을 썼다."

[묘각탑기]는 疏가 "나는 1만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았고, 나의 운명을 따라서 나는 거기에 머물렀다"라고 말함으로부터 그 말들을 차용한다. 물론 그 여행이 1만리라는 진술은 글자 뜻대로 채택되지 않으며, 심지어  는 5천리라는 것은 5천리를 왕복한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그 산이 장안에서 1600리라고 쓰고 있다. 그 때문에 그는 분명히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징관은 아미산으로 그의 순례여행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는 그가 오대산에서 단지 잠깐만 보낼 작정이었다고 말하지만, 그는 세월이 흘러감을 실감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 산에 마음이 사로잡혔으며, 결국 10년간 머물렀다.
게다가 이러한 여행들은 오대산에서 그의 체류기간에 빛을 준다. [묘각탑기]는 그가 그 산에서 10년간 머물렀다고 말하는데, 疏로부터 채택해야 하는 지식의 한 부분이다. 疏는 787년에 완성됐으며, 만일 우리가 [송고승전]의 진술처럼 그가 776년에 오대산으로 출발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사실상 그의 작업을 마치기에 앞서  그 산에서 10년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의 주석서를 완성하고 나서 우리가 아래에서 볼 것처럼 그는 또다른 5년간을 거기에서 머물렀다. 징관이 그의 책을 작성하기 위해 전부 15년을 필요로했다는 것은 또한 주목할만한데, 그래서 그 때문에 오대산에 가기 5년전에 그것을 쓰기 시작했다.

 

 


b. 華嚴經에대한 註釋書

 

징관의 주요한 작업은 그의 화엄경에 대한 주석과 그것의  이다. 불교의 전승에서 그의 이름은 그의 주석과 결합시키게 되었다. 그는 화엄경의 疏主 또는 단순히 註釋者로서 언급된다. 역사적인 작품들은 {釋門正統}과 {佛祖統記}를 제외하고, 이 책의 구성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준다. 그의 전기에 대해 {廣淸?傳}은 이 의문에 최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징관이 오대산에서 그것을 썼듯이, {廣淸?傳}의 작가인 延一은 거기에 머물렀는데, 그 산에 대해서 약간의 자료나 전설들을 입수하여 간직했어야 했다.


[妙覺塔記]는 그 산에 승려들(山門淨侶)이 가르침을 펼치도록 징관에게 요청했다고 하고 있다. 그는 한가지 전달 수단의 명확한 가르침은 매우 설명하기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法藏은 그의 학파를 이 가르침을 토대로 설립했었다. 그의 추종자는 - 물론 화엄에 대한 언급은 - 그것의 비밀스런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지도자는 자신의 작품을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쇠퇴하였다. 그가 화엄 敎義의 추종자들이 혼동됐음을 알았던 만큼, 그는 침묵을 유지할 수 없었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그는 화엄사의 대수도원장인 賢林의 요청으로 화엄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망설였는데, 그 옛 주석서의 본문이 보다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었고 그것의 의미가 충분히 자세히 설명되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文繁義約) 두 자료는 80권 화엄경의 첫째 주석서인 [刊定記]를 언급한다. 法藏은 이 작업을 시작했으나, 그것을 완성하기 전에 죽었다. 화엄으로 끝냈으나, 그는 많은 면에서 그의 스승들의 가르침을 수정했다. 교의에 대한 그의 분류는 우리가 위에서 보았던 것 처럼, 물론 외부의 가르침을 포함했다. 그는 10개의 심오한 문들에서 두 부분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는데, 하나는 자연현상의 세계와 연결했고, 하나는 우주와 연결했다. 그의 주석에서 징관은 자주 이러한 허구들을 언급하며, 그것들을 날카롭게 비평한다.


{廣淸?傳}은 우리에게 그의 주석을 쓰기에 입각하여 징관은 般若院으로 이동했고 승려들에 대해 다음 요구를 했다고 말한다. "내가 억겁을 통해 이 성스러운 지역으로 오기는 드문 기회이다. 나는 맑은 마음을 가지고 주석을 구성하기 위해 다시 처리하고 싶다. 나를 위해 주석을 쓸 수 있는 곳인 별채를 세워줄 수 있겠소?"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별채는 짧은 시기 내에 완성되었다. 溫州의 無著은 지붕마룻대 위에 王羲之의 체로 서예를 썼다. 징관은 그의 주석을 쓸 자신의 집인 制疏道場을 세웠고, 興元시대의 첫해인 784년에 매달 4일의 8째 시각에 그는 훌륭한 노래로 기원했다. {隆興佛敎編年通論}과 {法界五祖略記}에 따르면, 이것은 建中시대의 4년인 783년에 일어났다고 한다.


모든 자료는 징관이 황금빛 사람이나 形象을 꿈 꿨다는 것에 동의한다. [妙覺塔記]는 이 황금빛 형상(金像)은 산만큼 높았고, 보름달 같은 얼굴을 하고 공중에 떠있었다고 말한다. 징관은 양손으로 그것의 얼굴을 가지고 그것을 삼켰는데, 그 때 깨어났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그는 金人을 봤는데, 그는 그것을 껴안고 씹지 않은채 삼켰다. 그가 깨어났을 때, 그의 몸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그는 기뻐했고, 그 빛을 삼킨만큼 그의 작품이 어디에서나 빛나리라는 증명을 의미했다. {隆興佛敎編年通論}은 황금의 幻影(金容)을 언급한다. {廣淸?傳}은 우리에게 그가 金人을 머리에서 시작하여 먹었고 다리에 이르렀을 때 깨어났다고 얘기해 준다. 그는 이 상서로운 신호는 위대한 보살(大聖)께서 보내셨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文殊師利와 관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의 순수한 의미를 분명히 이해함으로 하여 화엄의 가르침을 경험했었다.


[妙覺塔記]는 그의 꿈 뒤에, 그가 주석서를 쓰기 시작했고, 그는 마치 마음이 그의 작업에서 그를 원조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다. 그는 代宗휘하 元興시대의 甲子年에 시작했고 貞元시대의 丁卯年에 끝마쳤다. {宋高僧傳}은 더 정확한 날짜를 제공하는데, 즉 그는 元興시대의 1년인 784년의 1월에서 貞元시대의 3년인 787년의 12월까지 작업했다고 한다. 주석서는 20軸으로 이루어졌다. 중국 불교의 규범의 Taisho 전체부수에서 주석서는 60권의 구성인 만큼 이 자료를 반박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카나자와 도서관 소장품은 10軸으로 이루어진 카마쿠라 시대로 날짜가 기입된 筆寫本을 포함시키며, 그것은 각각 上과 下부분으로 나뉘고 있다. 이 번역은 외관상으로 그 작품의 최초의 구분을 유지했다. {廣淸?傳}에 따르면, 그는 깨우쳤던 후에 그의 손을 씻고 양치질을 했다. 그는 강당으로 갔는데, 거기서 길상적인 표시로 감사를 드렸다. 징관은 七處九會를 바탕으로 본문을 받아들였다고 말해진다. 그는 正元시대의 丁卯年 11월 5일에 끝마쳤다. 본문은 貞을 正으로 실수하고 있다.


주석서의 만료를 경축하기 위해, 징관은 1천명의 승려들을 위해 饗宴을 가졌다. 그가 주석서를 설명하기 전에, 그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용으로 변했는데, 그의 머리는 남쪽 난간에 눕고, 그의 꼬리는 북쪽 난간 주변에 사리를 틀었으며, 그의 비늘과 갈기는 빛나고 있었다. 그 용은 많은 용으로 바뀌었고, 그들은 빛을 발산했으며, 어디든지 퍼지는 중이었다. 징관은 이 꿈이 그의 가르침을 펼치기 위한 좋은 징조로서 간주하였다. {廣淸?傳}에 따르면, 그는 이 꿈을 꾸기 전에 그의 가르침에 대한 弘布라는 점에서 징조를 위한 기도를 했었다.


[妙覺塔記]는 그의 작품은 대단한 성공이었다고 한다. 불교의 신자들의 4계층인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등이 이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였다. 大衆은 징관에게 훨씬 더 상세히 말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것이 너무 그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면서, 그는 40軸으로 [隨疏演義]와 100軸으로 [隨文手鏡]을 僧睿, 智愷와 다른 그의 문하생들과 함께 만들었다. {宋高僧傳}에 따르면, 貞元시대의 1월에 대수도원장은 징관에게 그 새 주석서를 설명할 것을 요청했다. {廣淸?傳}에서 우리는 788년에 幷州 節度使 馬遂와 代州 都督 王朝光이 시주를 하고 징관에게 주석서를 설명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갔는데, 날마다 1천명 승려들의 존재를 목격했다. {宋高僧傳}에서 智 의 전기로부터 우리는 그가 이러한 집회를 위해 재정상의 받침과 1천 승려들을 위한 음식을 제공했던 강주였다고 안다. {宋高僧傳}은 河東지방의 節度使 李自良의 요청으로, 징관은 791년에 崇福寺로 갔다고 한다. 하동지방의 중심이 太元이였고, 오대산과 가깝기 때문에, 징관은 거기에 갔음에 틀림없다. 그는 그가 796년에 40軸 화엄경의 번역을 돕기위해 수도로 소환되기까지 여기에 틀림없이 머물렀을 것이다. 

 

 

       唐代 宗敎的 지도자 澄觀의 傳記 - 3.

                        Imer Hamar

 

 

3. 제 3기 ; 首都에서

 

  a. 華嚴經의 飜譯

 

 [妙覺塔記]는 단순히 貞元代의 796년인 丙子年에징관이 경전을 번역했다고 하며, 붉은 袈裟가 그에게 걸쳐졌다고 한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代宗황제는 李輔光에게  賓의 般若多羅와 함께 烏茶國의 왕에 의해 증정됐던 40軸 화엄경을 번역할 목적으로 수도로 징관을 소환할 것을 명령했다. 징관은 만일 다음 해에 갈 수 있는 가를 물었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그는 비서실 지도자 梁이 그의 필요에 대해 제공했던 蒲津(山西지역의 永濟郡)으로 갔다. 그는 中條山의 棲嚴寺에 거주했다. 그의 도착 전에, 어떤 열광한 禪僧은 위대한 보살께서 도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결국 징관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5월에 제국의 외교관인 中使인 ?仙鳴은 수도에 가도록 징관을 설득했다. 그의 도착으로 황제는 그를 대한한 존경으로 대했으며, 飜譯堂으로 그를 인도했다. 번역은 崇福寺에서 796년에 시작됐으며, 798년의 2월에 완성됐다. 황제는 그에게 새로운 번역에 대한 주석서을 만들 것을 명령했다. 그는 그것을 쓰기 위해 長安근처의 終南山에 草堂寺로 은거했다. 그것의 滿了후에 황제는 長安의 兩班(Both Halves)?에게 설명해야 할 것을 명령했다.
{隆興佛敎編年通論}은 河東지역의 節度使인 李詵과 禮部의 비서관(尙書)이 수도에 그의 도착으로 징관을 맞이했다. 황제는 매일 飜譯堂에 출석했는데, 그가 갈 수 없을 때엔, 황제는 그에게 변명하기 위해 승려 寂光을 보냈다. 

 


 
  b. 그의 僧侶階級과 職銜

 

[妙覺塔記]에서 우리는 먼저 貞元시대의 799년인 己卯年에 淸?國師라는 號가 징관에게 수여됐으며, 그리고나서 憲宗황제의 元和시대의 810년인 庚辰年에 그는 僧統印을 받았다고 해석한다. {隆興佛敎編年通論}에 따르면, 화엄경의 새로운 번역이 완성된 후에, 代宗황제는 징관에게 경전의 중심적인 개념을 설명할 것을 명령했다. 황제는 그가 그에게 붉은 가사와 敎授和尙(;불교 가르침에 대한 스승)이란 號를 수여했던 그의 가르침으로 너무 즐거워졌다. 799년 4월에 그의 전기에서 代宗황제는 화엄스승을 궁전의 說法堂으로 초빙했다. 징관은 황제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리고 이와같이 淸?國師라는 號가 그에게 수여됐다. {佛祖統記}에 따르면, 이것은 795년에 일어났다. 810년에 憲宗황제는 징관을 소환했으며, 그에게 法界緣起의 의미에 대해 질문했다. 이 애호자 다음에, 징관은 僧統에 임명되었다. {隆興佛敎編年通論}은 징관이 이러한 기회에 부응할 것으로 기대됐다는 말들을 포함하고 있다.


{宋高僧傳}과 {佛祖統記}는 {隆興佛敎編年通論}을 따르는데, 그러나 그들은 자주빛 가사를 언급하진 않는다. {法界五祖略記}는 징관이 僧統보다는 오히려 僧錄(;기록담당 성직자)이였다고 말하고 있다. {송고승전}이 僧統으로서 징관의 임명에 대한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한데, 비록 작가 贊寧이 그의 다른 작품인 {大宋僧史略}에서 성직자의 임무에 대한 역사를 토론했지만 말이다. 


僧統으로서 징관의 임명은 긴 논쟁이 되곤한다. 이에 대한 論據는 {大宋僧史略}에 한 구절이다. 그것은 穆宗황제의 元和시대의 1년 윤달에 龍興寺의 惟英이 翰林待詔와 僧統으로 임명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元和시대는 穆宗의 치세 휘하로 내려가지 않고 憲宗시대 휘하이다. 미치바타 료슈와 야마자키 히로시는 그 황제의 名號가 그 본문에서 틀렸고, 그러므로 惟英의 임명은 憲宗의 元和시대1년인 806년으로 날짜를 기입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들 둘은 사실상 그것(僧統)이 오직 징관에 대한 존칭적인 명칭일 때까지 惟英이 僧統의 의무를 지녔던 승려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나카토미 토시하루는 憲宗의 元和시대의 1년이던 穆宗의 Changqing대의 1년이던 간에 閏달이 없었다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元和시대 15년에 윤달이 있었고, 그 해는 穆宗이 皇座에 올랐던 해였다. 그러하여 징관이 惟英보다 10년 더 일찍 僧統에 임명되었다. {宋高僧傳}에 따르면, 징관은 元和시대 기간에 죽었으며, 惟英은 그 때문에 징관의 죽음 뒤에 임명되었다. 비록 이 추리가 매우 분명하여 거듭된 임명의 문제를 풀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묘각탑기]와 대부분의 자료가 징관의 죽음을 文宗의 開成시대의 3년인 837년으로 날짜를 매긴 것을 마음에 담고 있을 것이다. {송고승전}의 날짜기입은 틀린 것인 것 같다.


{大宋僧史略}은 그(惟英)의 미숙한 행동 때문에 惟英은 僧統의 직무에 적당하다는 것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직책이 교체되었다고 말한다. 이 직책은 폐지되었으며, 僧錄이란 직책이 설립되었다. 일본인 승려 옌닌은 838년에 중국에 갔는데, 그가 성직자의 직책들 사이에서 그것을 기록하지 않고있기 때문에,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왜 {法界五祖略記}가 징관은 僧錄이었다고 말하는가의 이유가 될지 모른다.


로재성은 穆宗이 황제에 오른 후 얼마 않되어 翰林院출신의 공무원 승려 大通이 맞아 죽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惟英은 翰林院에서 그의 자리를 가졌고 僧統을 임명받았다. 로재성은 僧統으로서 징관의 임명은 807년에 長安의 兩班에 대한 功德使로서 宦官總責인 吐突承 의 임명과 관계됐음이 틀림없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宦官 吐突承 )는 憲宗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죽었을 때 죽었다. 吐突承 의 죽음 이후 僧統은 징관에 대한 존칭적인 명칭일 뿐이었다.

 

 

 

  c. 皇帝와 高位官僚와의 交際

 

우리가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징관은 황제에게 華嚴敎義를 설명하기 위해 몇번이나 궁궐에 소환되었다. 이런 경우, 그의 재능에 대한 인식에서, 그는 다양한 명칭을 수여받았다. 그는 7명의 황제의 門師가 되었다고 말해진다. {송고승전}의 진술처럼, 황제는 그에게 화엄경에 대한 새로운 번역에서 임무를 맡을 것과, 수도의 兩班에게 설명해 줄 주석서를 쓸 것을 명령했다. 황제의 명령에 의해, 그는 {了義}, {心要(마음의 본질)}, {食肉得罪因緣} 각 1권을 저술했다.


唐의 제2기 절반엔 중앙정부의 힘이 감소됐고, 節度使의 영향이 증대됐으며, 그들의 약간은 조정으로부터 독립되는 중이였다. 그 때문에 불교도의 공동체의 번영이 황제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충분하지 못했는데, 그러나 징관과 같은 종교적 지도자들은 또한 불교를 향한 태도가 중국에서 불교의 발전에서 관계를 가져야만 했던 이들 지방의 관원들과 좋은 교제를 해야 했었다. 그는 이들 고위 공직자들에게 교훈을 주었고, 그들의 질문에 응하여 불교의 교리를 밝히기 위해 몇몇 작품을 썼다.


[묘각탑기]에 따르면, 징관은 추종하는 고위 공직자들의 요청으로 17권을 썼다. 즉, 相國 鄭汝慶(746-820), 南康王 韋皐, 越州觀察使 孟簡, 唐代의 유명한 詩人인 左拾遺 白居易(722-846) 등이다.


{隆興佛敎編年通論}은 징관이 관료들의 요청에 응하여 저술하기로 되어있었던 작품들의 명칭을 제공하고 있다. 相國인 齊抗(730-804), 鄭汝慶과 高 이 화엄스승에게 {華嚴綱要} 3권을 쓰도록 요청했다. 相國 李吉甫(758-814), 侍郞 歸登(754-820), 駙馬 杜琮은 {正要} 1권을 쓸 것을 요청했다. 南康王 韋皐와 相國 武元衡(758-815)의 요청으로, 그는 {法界觀玄鏡(법계연기의 식견에 대한 초자연적인 거울)} 1권을 썼다. 僕射 高崇文은 {鏡燈說文} 1권을 쓰도록 요청했다. 司徒 嚴綬, 司空 鄭元, 刺史 陸長源 등이 {三聖圓融觀} 1권을 쓰도록 요청했다. 節度使 薛華, 觀察使 孟簡, 中書 錢徽(755-829), 給事 杜羔 등이 七處九會를 제시할 것을 요청했다.


{송고승전}은 相國 齊抗(齊杭), 儀禮 專擔官 韋擧牟(749-801) 등은 징관의 것에 대한 가까운 친구였으며, 추종하는 관료들은 그의 도량이 큼을 숭배했고, 그의 訓令을 따랐다. 즉, 武元衡과 相國 鄭絪(752-829), 相國 李吉甫, 相國 權德輿(759-815), 相國 李逢吉(758-835), 兵部侍郞 歸登, 節度使 襄陽, 嚴綬, 越州觀察使 孟簡, 그리고 洪州의 韋丹 등이다.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그는 또한 河東 節度使 李自良에게 가까운 인연이 있었는데, 이자량은 791년에 崇福寺에서 가르침을 위해 그를 초대했다. 게다가 {송고승전}은 相國 齊杭의 요청으로, 華嚴經과 法華經 그리고 入楞伽經과 中觀論에서 주석서들을 다른사람이 개별적으로 유포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華嚴綱要}와 {法界觀玄鏡} 각1권과 {三聖圓融觀}을 구성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綱要}와 {玄鏡}에서 {宋高僧傳}은 {隆興佛敎編年通論}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징관의 지식계층과 나눈 교제는 그의 작품들과 특히 그의 화엄경에 대한 그의  에 반영되었으며, 유교와 도교의 책들에 대한 언급이 풍부하다. 그는 자주 불교 교의를 이해하는 데에 보조로서 중국 고전으로부터 인용했는데, 그리고 우리는 이런 가르침들이 사회를 배우기 위해 더 매력적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것이다. 다른 편에서 그렇게 함에서, 그는 불교의 교의에 대해 먼저임을 강조했는데, 세가지 가르침들(불교, 도교, 유교)이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정치적인 상황, 특히 힘있는 중앙정치의 부족 때문에, 그는 토착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에 조금 양보했는데, 그러나 그는 불교의 뛰어난 견해를 받들었다. 

 

 

  

  d. 그의 죽음

 

[妙覺塔記]는 開成代 己未年(839년)에 징관은 그의 가장 훌륭한 문하생인 寶印,海岸과 다른 사람들을 소환했고, 그의 가름침을 주었다(付法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는 10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서, 같은 달 27일에 그의 肉身은 終南山에 石室로 가져가졌다. 그가 죽었을 때, 황제는 궁궐에서 업무를 중지했고, 관료들은 喪服을 입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전설을 따르기로 한다. 그가 죽고 난 후 오래지 않아서, 蔥嶺에서 어떤 印度人 승려가 두 신령이 땅보다 위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것이 일어났다. 그 승려는 신비한 呪文으로 그들을 멈추게 했고, 그 신령들은 北印度에 文殊師利祠堂의 神靈으로서 그들 자신과 동일시하였으며, 그들은 그(文殊師利)에게 받칠 목적으로 華嚴菩薩의 앞니를 받기 위해 오게됐다고 말했다. 이 기록 후에 石室은 열려졌고, 징관의 앞니가 실로 없어지게 되었다. - 그는 39개의 이빨만 갖고 있다.(!) 그의 肉身은 火葬됐는데, 그러나 그의 혀는 태울 수 없었다. 火葬후에 몇 천개의 빛나는 사리들이 받아졌다. 文宗황제의 명령으로, 裴休는 碑文을 썼으며, 그동안 沈元及은 粘土로 그의 肖像을 만들었다. 그의 탑은 '妙覺塔'이라 불려졌다.


{宋高僧傳}에 따르면, 그는 훨씬 더 일찍 元和시대(806-820)에 그의 70세 나이에 죽었으며, {宋高僧傳}은 전설이던 또한 그의 葬禮에 대한 사건들이던 간에 언급하지 않고 있다. {隆興佛敎編年通論}은 그의 죽음을 838년으로 날짜를 적고 있으며,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들을 적고 있다.


요시카와 타다오가 보았던 것 처럼, 징관을 언급함이 없는 이 원문은 宗密의 {禪源諸詮集都序}에 裴休의 序文에 기초되고 있다. 그는 그의 마지막 말들이 그의 [行動綱領? ; Account of Conduct]에 기록되어졌고, 裴休가 그것을 인용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마도 다른 자료들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던 만큼,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隆興佛敎編年通論}이 또한 그 서문으로부터 이런 말들을 借用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石室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그러나 그의 죽음 후에 그의 肉身이 탑에 安置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전설은 근본적으로 [묘각탑기]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宋高僧傳}과 {佛祖統記}는 "그는 終南山의 석실에 묻혔으며, 그의 탑은 '妙覺'이라고 불려지고 있다."라고 간결하게 진술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전설을 기록하지 않으며, 그들은 왜 그의 遺骸가, 정말일지 몰라도, 石室에서부터 움직여졌는지를 설명하지도 않고 있다. {法界五祖略記}는 그의 장례에 대해 또다른 견해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육신이 탑에 안치되었으며(奉全身塔), 그리고 그 소문 후에 그것(탑)은 열려졌고, 그의 육신은 이슬처럼 빛나고 있었으며, 그의 겉모양은 살아있는 육신의 그것이 된 것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육신이 어떤 보관 방법을 사용함이 없이 자연적으로 미이라가 된 것을 암시하고 있다. 불교의 역사가들은 자연적 미이라상태의 몇가지 경우를 기록했는데, 그것은 죽은 승려들 중에서 智慧와 冥想의 실행으로 돌리고 있다. {法界五祖略記}는 그의 眞儀는 大興唐寺로 가져갔다고 진술하고 있다. 文宗황제가 징관에 대한 讚을 적었다고 말해지는데, 그것은 불교의 역사책들에 기록되어있다.

 

 

 

 

Ⅲ. 結論 ; 澄觀은 한 명인가 두 명인가?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澄觀의 전기에 대한 다른 견해간에 몇가지 모순들이 있다. 우리는 그의 스승들, 순례여행, 관직, 죽음과 장례날자 등에서 차이가 나는 정보를 갖는다. 어떤 경우에서 이것은 자료에서 잘못된 결과가 될 것이다. 가끔 그것은 작가들의 다른 시각들에 의한 것이 될 것이다. [妙覺塔記]의 작가는 그의 禪스승으로서 無名만을 기록함으로써 荷澤 神會(Heze Shenhui)계통과 징관의 강력한 연합을 입증할 작정이였다.


알려졌듯이, 징관의 문하생인 宗密은 華嚴學의 開祖 뿐만이 아니라 禪學의 開祖이기도 했는데, 裴休, 宗密의 문하생이  - 만약 우리가 그의 저술을 받아들인다면 - 그의 박식한 이 측면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송고승전}은 10가지 표제아래 유명한 승려들에 대한 생애를 토론하고 있다. 그 결과 그것의 분류를 구체화하는 것은 전기들의 양상을 두드러지게 한다. 징관은 경전의 주석으로서 묘사됐으며, 기적의 이행자나 명상의 개업자로서는 아니다. 이것은 그것이(비문이) 그의 앞늬를 가져갔던 신령들과 그의 천연적 미이라 상태가 명상에서 성취된 결과라고 추측되고 있는 것에 대한 전설을 생략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불일치는 그의 죽음에 대한 날자와 같이 다른 문제를 이끈다. 宋代에 {詩話總龜}에 의하면, 澄觀이라고 불렸던 4명의 승려들이 있다.


첫 번째는 洛陽의 澄觀으로서, 韓愈에 의해서인데, 그 유명한 反佛敎의 儒生학자는 [送澄觀詩]를 썼다. 이 문학에서 한유는 징관의 재능을 칭찬했으며, 시민의 (정중한) 써비스에서 한 사람의 公職者로서 그의(한유 자신의) 꼿꼿한 능력을 적용하기 위한 생애를 설정하기 위해 돌아오라고 그에게 권했다.


두 번째는 이 조항의 주제인 華嚴開祖이다.


세 번째는 {傳燈錄}의 기록에서 鎭國大師인데, 그는 황제에게 마음의 본질을 가르쳤다.


네 번째는 五臺山의 澄觀인데, 그는 無名의 禪敎의 상속자였다. 비록 그가 會稽의 澄觀과 일치되는 듯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대산의 징관에 대해 전해오는 말들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화엄학의 징관에 대해 현저한 차이를 들고 있는데, 그는 사실상 성과를 본 작가였고, 즉 그는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들을 전달하지 못했다고 말해질 수 없다.


{詩話總龜}와 대조적으로, 다른 송대 자료들은 韓愈가 華嚴學의 開祖를 위해 이 시를 썼다고 주장한다. 契嵩(1007-1072)은 한유가 불교에 대한 그의 경멸을 표현할 목적으로 구성했다고 믿고 있다. 그는(계숭은) 그 때문에 사실상 그가(한유가) 징관에게 그것을(시를)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隆興佛敎編年通論}은 그러나 한유는 징관을 國師로서 존경해야 했으며, 몇몇 고위공직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카마타 시게오는 泗州의 징관에 대해 많은 영향을 지적했고, 이 승려가 화엄개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泗州의 澄觀은) 曇의 碑文에 棲霞寺의 曇(723-798)의 문하생의 하나로서 기록에 올려졌다. 그는 臨淮의 開元寺의 澄觀이라고 불려졌다. 開元寺에 鐘모양의 碑文에서 수도원들의 건축들이 불과 물로 훼손됐을때마다 징관이 복구시켰다고 말했다. 카마타는 {송고승전}이 화엄개조라는 이 수도승의 죽음에 대한 날자를 잘못알았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게다가 {송고승전}은 그의 생애에 대한 다른 사건을 묘사함에서 같은 잘못을 했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것 처럼 화엄개조는 棲霞寺와 瓦棺寺에서 연구했다고 말해지고 있다. 다른 징관은 棲霞寺와 관계가 있던 曇의 문하생이였고 瓦棺寺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른자료들({佛祖統記}, {釋門正統}, {法界五祖略記})이 이 정보를 또한 제공하는 만큼 {송고승전}에 있어 독점적이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