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역사의 향기 ♧

[스크랩] 제19대 숙종실록

화엄행 2009. 4. 13. 22:36

[1. 숙종의 환국 정치와 왕권의 안정]

(1661-1720, 재위 기간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숙종 시대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기간이다. 그러나 숙종은

비상한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를 안정시켰다. 따라서 숙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계속되던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조선 사회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중전과 후궁들에 대한 애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숱한

옥사를 유발하여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다.

  숙종은 현종의 외동아들로 명성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경희궁)

회상전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순, 자는 명보였다. 이후 1667년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74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곧바로 친정을 시작하였다.

  숙종의 치세 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계속 되어온 붕당 정치가 절정에 이르면서 붕당 내부의

파행적 운영이 심화되어 자체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러한 붕당의 자체 파탄을

심화시킨 사건이 현종 이후 숙종 대까지 계속 이어진 예송 논쟁이었다. 숙종은 즉위하자

곧바로 현종 시대 정쟁의 핵심 사안이었던 이 예론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1674년 정월,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1차 예송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을 차자로, 그리고 인선왕후를 차자비로 다루어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가 9개월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대공설을 주장했다. 반면 남인측은 여전히 효종이 왕위 계승자임을 내세우며

1년 장자부 기년설을 내세우며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현종은 남인의

기년설을 받아들인 바 있었는데, 현종이 그 해 8월에 죽자 그 때까지도 인선왕후의 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서인에 의해 다시 복상 문제가 거론되었던 것이다(현종실록 '예송 논쟁'

부분 참조).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 세력이 다시 복상 문제를 들고 나오자 그 해 9월에 남인의 지지

세력인 영남학파의 진주 유생들은 송시열의 예론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기호학파를

지지하던 성균관 유생들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리며 진주 유생들을 공격했고, 이

때문에 전국 유생들은 모두 예론 시비에 휩싸이고 말았다.

  숙종은 예론 정쟁이 발발하자 즉각적으로 부왕의 의견에 따라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을

지지하면서 송시열을 유배시켜버렸다. 그것을 기화로 서인의 세력이 약해지고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조정은 남인에 의해 장악된다. 그러나 기호세력의 유생들이 집결하고 있던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 구명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편에서는 영남 유생들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선비 사회는 여전히 예론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재야 선비 사회의 이같은

현상과는 별도로 조정은 남인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게 되자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기용해 남인

세력을 견제해 나갔다.

  김석주는 원래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제2차

예송 때 남인 쪽을 응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송시열을 제거하자 많은 서인들이 함께

제거되었고 그 때문에 서인 세력은 극도로 약화되고 말았다. 급기야는 서인 세력의 발언권이

정계에서 완전히 상실될 지경에 이르자 김석주는 송시열 세력과 다시 손을 잡고 남인을

몰아내려 했다.

  김석주가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짠 계략은 이른바 '삼복의 변'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남인의

영수 허적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남인 세력의 축출 사건을

'경신대출척' 또는 '경신환국'이라고 한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1688년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의 장옥정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를 서둘러

원자에 정호하려 했는데, 서인측이 정비 민씨가 아직 젊어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왕자 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 만에 왕자 균을 원자에 정호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며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때문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인들이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은 사사되기에 이른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폐위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이렇게 노론계가 정치 일선에서 제거되자 서인은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정에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정국의 주도권은 민암, 이의징 등의 남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 서인 대출척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은 정권을 독점하게 되지만 그 기간은 5년밖에 가지

못한다.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이것을 기화로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폐비 복위 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고, 반면에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 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또 노론계의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등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소론계를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은 남구만 등의 소론 세력이 장악했으나 이들은 7년 뒤에 발생한 '무고의

옥'으로 노론계에 정권을 내주게 된다.

  갑술환국으로 인해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자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오빠 장희재가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려는 문구가 있어 대신들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소론의 남구만이 세자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고 간언해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어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난다. 희빈 장씨는 그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가 죽기를 빌었고, 이 사실을 안 숙종은 진노하여 그녀를 자진케 했는데

이를 듣지 않자 사약을 내렸다. 또한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비롯한 궁녀 및 무속인들을

국문하도록 하였다.

  이 때에도 소론은 세자를 위하여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고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의 소론 세력까지 귀양보내거나 파직시켜 정치 일선에서 제거해 버렸다. 이로써 소론은

세력이 대폭 축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이 사건을 무속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이후 조정은 노론과 소론의 불안한 연정이 계속 이어지다가 1711년 윤선거와 유계가 공동

집필한 '가례원류'에 대한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의 저자 논쟁으로

소론측이 위축되자 1716년부터 노론측이 노골적으로 소론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게 된다.

  이 사건은 원래 윤씨와 유씨의 집안 싸움이었는데 각자 몸담고 있던 정파가 달랐기 때문에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다. '가례원류'는 원래 '가례'를 본문으로 삼아 의례, 주례, 예기 등

삼례에 관계되는 사항을 뽑아 '원'이라 하고, 주희 이후 여러 학자들의 사례에 관한

예절을 나누어 모아 '류'라 하여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서인 유계와 윤선거가 함께 집필하고 윤증이 증보한 것이었는데, 유상기가

저자를 유계 단독으로 표시하여 숙종에게 품신했다. 이 일을 알게 된 윤증은 유상기를

비방하게 되었고, 유상기 또한 반론을 제기하며 윤증을 비난했다. 당시는 서인 사이에서 노론,

소론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었기에 이들의 집안 싸움이 확대되어 소론과 노론의 정쟁으로

번졌고, 결국 윤증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함으로써 소론측이 위축되었다.

  숙종 대에는 이미 열거한 당쟁 이외에도 정권을 주도하기 위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복제와

관련하여 송시열의 오례 문제를 둘러싼 '고묘논란', 김만기, 김석주, 민정중 등 외척 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 정치에 대한 유생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송시열의 '임술삼고변' 공방, 존명 의리와

북벌론의 허실을 둘러싼 명분 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비롯된 왕과 신하들간의 충돌, 그리고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일컫는 '회니시비' 등 수많은 정쟁들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소론과 노론 사이에 왕세자(경종)과 왕자(영조)를 둘러싼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경종, 영조실록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이러한 수많은 정쟁은 당대의 숱한 명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붕당 정치의 폐단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정쟁의 격화는 붕당 정치의 갖은 폐단들이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나, 한편으로 보면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벌인 환국 정치의 결과이기도 했다.

숙종은 현종 대의 예송 논쟁으로 손상을 입은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환국 정치를 감행했다. 즉, 왕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용사출척권'을 행사하여 정치 국면의 전환을 꾀함과 동시에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했던 것이다.

  이렇듯 숙종 대는 대신들 사이의 정쟁이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지속되던 사회 체제 전반의 정비 및 복구 작업이 거의 종료되었다고 할 만한 치적을

남길 수 있었다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대동법이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시킴으로써 광해군 이래

계속된 세입일원화 계획을 완성시켰고, 또 광해군 때에 시작된 양전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강원도와 삼남 지방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화폐 주조 사업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호조, 공조 및 훈련도감, 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 전라, 경상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통용케 했다. 숙종 치세에 이루어진

이같은 경제 정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는데, 먼저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 공사를 하였다. 특히 이유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효종 시대 이후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설하고, 5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임진왜란 이후 계속 추진하던 군제 개편 작업을 끝마쳤다. 이 밖에도 양역이정청을 설치하여

민폐의 첫번째 요인이던 양역 문제의 해결을 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군포 균역절목이

마련되어 이전에는 양정 1인의 군포 부담이 1필에서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던 것이 2필로

균일화됨으로써 민간의 부담을 줄였다.

  이즈음 국방과 관련하여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군이 설치되었다 폐쇄되었던

폐사 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여 고토 회복운동을 벌였고 이 결과 압록강 연변에 조선인의

출입이 잦아지게 되어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 측과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숙종 시대는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였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올렸다. 뿐만 아니라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으로 하는 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역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300여 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고, 그 중에

131개소가 자연 폐쇄되는 서원 누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 '대명례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저자초방' 등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숙종은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 폐위사건으로 보듯이 애증의 편향이 심하여

그것을 정치 쟁점화시켜 당쟁을 격화시키는 흠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의 통치

전반을 평가해 볼 때 왕권 강화를 위해 고의적으로 반복하던 환국 정치의 일면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결과만을 놓고 볼 때 그의 외척과 아내까지도 철저하게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같은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시키며 조선을 안정시켰던 숙종은 1720년 약 46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인경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6명의 아내에게서 9명의 자녀를 얻었다. 능호는 명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의 서오릉에 있다.



  [2. 숙종의 가족들]


  숙종은 인경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6명의 아내에게서 9명의 자녀를 얻었다. 이들 중에서

인경왕후 김씨가 3녀, 인현왕후 민씨와 인원왕후 김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희빈 장씨가

경종을 비롯 1남 1녀, 숙빈 최씨가 영조를 비롯 1남 2녀, 명빈 박씨가 1남을 낳았다. 이들 중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의 중전들과 많은 물의를 일으켰던 희빈 장씨의 삶을

요약하고 경종, 영조는 각 실록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인경왕후 김씨(1661-1680)

  김장생의 4대손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이다. 1670년 열 살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별궁에 들어갔으며, 다음해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고, 1676년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680년 10월에 천연두 증세가

보였는데, 이 때 숙종은 천연두를 겪지 않은 터라 약방도제조 영의정 김수항의 건의에 따라

편전을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20세를 일기로 경덕궁에서 세상을

떴다. 이후 경덕궁 영소전에 위패가 모셔졌고, 능은 익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1)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다. 1681년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며, 당시 소의였던 희빈 장씨가 왕자 균을 출산하자

정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움을 당해야 했다.

  숙종은 1689년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노론의 송시열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숙종의 진노를 사서 사사되었다.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 인현왕후

역시 왕의 미움을 받아 서인으로 강등되어 폐출된다. 이후 그녀는 안국동 본가에서 지내게

되었고, 희빈 장씨가 중전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비한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소론파의 폐비 복위운동으로 남인 세력이 실각하는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복위되었다.

  복위 후 그녀는 다시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와 화합을 도모하며 지내다가 병을 얻어 1701년

소생없이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 궁녀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해지고 있다.

  능호는 명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다. 후에 숙종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인원왕후 김씨(1687-1757)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이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궐에 들어가

다음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711년 천연두를 앓았으나 회생했고 2년 뒤에 혜순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720년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에 올랐고 1724년 경종이 죽은 뒤 다시

대왕대비에 올랐다.

  소생은 없으며 능은 명릉으로 인현왕후, 숙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에 묻혔다.


  희빈 장씨(1659-1701)

  이름은 옥정이며, 역관 장형의 종질녀로만 알려져 있을 뿐 아버지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한때 그녀가 장렬왕후의 동생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어머니와 조사석이 내연의 관계였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는 조사석과 숙종의 종친인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으며, 장렬왕후의

시종으로 있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1686년 숙원이 되고, 1688년 소의로

승격되었으며 이 때 왕자 균을 낳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숙종이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할 때 서인의 노, 소론 대신들은 왕비 인현왕후 민씨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 상소를 올려 후일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1689년 정월에 균을 세자에 책봉하고, 장소의를 빈으로 승격시킨다.

  기사환국 이후 같은 해 5월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인 오두인, 박태보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참혹한 형벌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이후 조정은 남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이 사건 후 숙종은 민비를 폐비한 것을 후회하였는데 1694년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이를 눈치채고 폐비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남인의 영수 민암 등이 이 문제를 기화로

조정에 남아 있던 서인 세력을 모두 제거하려고 김춘택을 비롯 수십 명의 서인을 감옥에

가두는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숙종은 민비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던 중이라 오히려 서인들을 옥사로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한 후 사사시켰으며,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시키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환

등을 등용했다. 그리고 중전으로 올랐던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위되었던 민씨를

복원시켜 왕비에 앉혔는데, 이 사건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갑술옥사 이후 숙종은 사사시켰던 송시열, 김수항 등을 복작시켰고,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몰려날 때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속에 폐비 민씨와 관련된 문구가 발견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부

신하들은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소론의 남구만, 윤지완 등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용서하자고 하여 이 사건은 무마되었다.

  1701년 왕비로 복위되었던 민씨가 병으로 죽은 뒤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것이 발각되었다. 숙종은 이 일에 관련된 희빈 장씨와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사사하고 궁인, 무녀 등도 함께 죽였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이로써 궁녀에서 후궁생활을 거쳐 왕비에 오르기까지 했던 희빈 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이후로는 빈이 후비로 승격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해 버리기까지 했다. 희빈 장씨가 죽자

그녀를 지지하던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의 소론 세력이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된다.

  희빈 장씨의 소생으로는 경종과 옹주 하나가 있다.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에 용두동

서오릉에 있다.



  [3. 노론과 소론의 성립]


  인조반정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공신 세력과 이를

관망하던 세력으로 분리되었다. 공신 세력을 공서 또는 훈서라 했고, 관망파를 청서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훈서파의 영수는 정사공신 김류였으며, 청사파의 거두는 김상헌이었다.

  훈서와 청서로 갈린 두 파는 다시 훈서는 노서, 청서는 소서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둘로 갈라진

서인 세력은 인조말에 이르러 훈서파는 원두표를 당수로 하는 원당과 김자점을 당수로 하는

낙당으로 분파되고, 청서파도 사림의 청의를 주장하는 사류(사림)들이 중심이 된 산당과 권력

지향적인 한당으로 분리되어 서인은 사분되었다.

  그러나 효종, 현종 대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서인이 다시 규합되어 서인 일당이

되었다. 하지만 서인은 숙종 대에 이르러 다시 둘로 갈라서고 말았는데, 이것이 노론과 소론이다.

  분당의 계기는 1680년에 발생한 경신환국 때 남인 탄압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남인의 영수

허적의 유악(기름 천막) 남용 사건과 서인 김석주, 김익훈 등에 의하여 고변된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 사건(삼복의 변)으로 남인이 대거 숙청된 이른바 경신환국(경신대출척) 이후

서인은 남인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놓고 일대 지도권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다.

  1683년 서인 노장파인 김익훈 등은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추진했는데, 한태동을

중심으로한 소장파는 오히려 김익훈을 탄핵했다. 그래서 송시열 등의 노장파는 이 탄핵

상소를 반박하며 소장파와 대립하였고, 특히 송시열은 제자 윤증과 사적인 감정까지 좋지

않아 분파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서인은 노장파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소장파 한태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분파되었다. 이리하여 조정은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붕당이 성립되었다.

  노, 소론에 속하는 사람들은 원래 예악의 태두 김장생의 문인들로 구성되었고, 한편으로는

청의를 생명으로 하는 산림 사림들의 정치 집단이었던 산당에 속하였던 서인들이다. 노론의

대표적 인물은 송시열, 김만기, 김만중, 김석주, 김수항, 김수홍, 김익훈 등이었고, 소론의 대표적

인물은 김춘택, 남구만, 박세채, 박태보, 오도일, 윤증, 한태동 등이었다.

  서인은 분파 이후 노론이 정권의 주도권을 쥐며 정국을 운영해가다가 1689년 노, 소론이 함께

희빈 장씨 소생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대거 숙청되어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으로써 실각하게 된다(기사환국). 이 때 노론의 송시열, 김수항 등이 유배당해 죽고 소론

인사들도 대거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5년 후 갑술 옥사로 남인의 대거 쫓겨나자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희빈 장씨와 관련하여 1701년 무고의 옥이 일어나면서 소론이 밀려나고 노론이 대거

등용되면서 노, 소론이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며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그래서 경종, 영조 때에는 노, 소론의 당세가 정국을 양분하는 형국이 되었다. 경종 대에는

주로 소론이 우세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대표적인 4대신이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이었다. 그리고 노론이 우세했던 영조 대의 4대신은 민진원, 이관명, 정호, 홍치중 등이었다.



  [4. 숙종의 환국 정치로 인해 계속되는 정치 옥사]


  숙종은 이른바 용사출척권(왕이 정계를 대개편하는 권한)을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시켰던 왕이다. 그는 정국 전환을 뜻하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권을 교체하면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급부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가 이같은 환국 정치를 구상하게 된 배경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붕당의

한계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꿰뚫고 있던 붕당의 한계성은 바로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시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점을

시의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숙종이 환국 정치를 택하게 된 것은 아마 그것만큼 왕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책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환국 정치를 이끌어 가면서 허적, 윤휴, 이원정, 송시열, 김수항, 박태보 등 수많은 뛰어난

신하들을 희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부인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거나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죽이기까지 했다.

  숙종의 이같은 환국 정치에서 비롯된 사건들을 열거해 보면, 남인이 대거 축출당하는 1680년의

경신환국,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서인이 제거당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689년의 기사환국,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통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의 소론이 집권하게 되는

갑술환국,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701년의 '무고의 옥'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경신환국(1680년)

  경신환국은 1680년(숙종 6년)에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축출된 사건을 일컫는다.

  남인은 1674년의 제2차 예송 논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추천에 따라 그녀의 종질 김석주를 요직에 기용하여 남인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김석주의 세력은 남인을 견제할 만큼 강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숙종 초기는 남인의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숙종은 남인의 지나친 성장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면적인 경계심은 허적의 유악 남용사건으로 폭발하게 된다.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 허적은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이날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다. 그래서 숙종은 허적에게 유악(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바른

천막)을 내어주라고 명한다. 하지만 이미 유악은 허적이 빌려간 상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심하게 분노하여 패초(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것)로

군권 책임자를 모두 불러들였다. 사실 유악은 군사 물자였기 때문에 개인이 사사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혹 유악이 필요할 때에는 왕이 선처하여 빌려주는 형태를

취했는데, 당시 군권과 조정을 거의 장악하고 있던 남인은 허적의 권세를 믿고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유악을 빌려 주었던 것이다.

  숙종은 이 일을 남인이 권세를 믿고 왕을 업신여긴 행동이라고 단정하면서 남인이 거의

차지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겨 버린다. 훈련대장직은 남인계의 유혁연에서 서인계의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서인 김철을, 수어사에는 서인 김익훈을 임명한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서인 김석주가 맡고 있었으므로 보직을 유임시켰는데, 이로써 서인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남인은 설상가상으로 '삼복의 변'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정원로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 삼복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했던 것이다.

  고변 내용을 살펴보면 허견과 삼복 형제들은 숙종이 즉위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 보았고, 또한 도체찰사부 소속 이천 둔군에게 몇 차례에 걸쳐 특별한 훈련을

시켰다는 것이 골자였다.

  도체찰사부의 둔군을 사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때문에 도체찰사였던 영의정 허적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요소였다.

  문제가 되었던 도체찰사부는 효종 대까지는 잦은 전란과 군비의 필요성으로 상설되었으나,

평화가 정착되던 현종 대에 폐지된 기관이었다. 그러다가 숙종 초에 중국 대륙의 정성공,

오삼계 등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윤휴, 허적 등의 주장에 따라 1676년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허적은 지방 군대는 물론 훈련도감, 어영청 등 도성의 군영도 도체찰사부에 소속시켜

군권을 일원화하자고 하였으나, 김석주의 반대로 1677년 6월에 도체찰사부 자체가 일시

혁파되었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이 이

기관의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 국왕 및 궁성 호위부대로 발족한

중앙 군영은 예외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도체찰사부에 예속되지 않았다. 허적이 중앙 군영까지

그곳에 예속시키려고 하다가 김석주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 후 1678년 12월

도체찰사부는 영의정 허적의 주장으로 다시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숙종은 허적을

견제할 요량으로 부체찰사로 김석주를 임명하였다.

  비록 도체찰사부에 중앙 군영이 통합되긴 했으나 이들 군사 기관은 사실 서인측이 창설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에 서인은 그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중앙 군영의 지휘권도 거의 남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던 것인데, 허적의 유악

남용사건으로 서인이 다시 중앙 군영의 군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한편 허적의 아들 허견과 복창, 복선, 복평군 삼형제의 모반 행위에 대한 고변의 주요 내용이

도체찰사부의 군사를 동원한 것이었기 때문에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역모에

연루되게 되었다. 그래서 허견과 삼복 형제 뿐만 아니라 허적, 윤휴, 유혁연, 이원정, 오정위 등

남인 중진들이 대거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또한 고변자 정원로 역시 역모자의 하나로

지목받아 처형되었다. 이로써 남인은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대폭 등용되어 조정은 서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기사환국(1689년)

  기사환국은 후궁 소의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숙종의 정비는 원래 서인 노론의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였으나 그녀가 1680년에 죽어 숙종은

노론 민유중의 딸(인현왕후)을 계비로 맞이했다. 그런데 그녀는 원자를 낳지 못했고,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숙종은 소의 장씨가 낳은 아들 균을 인현왕후의 양자로

삼아 원자에 정호하려 했는데, 서인측은 이를 반대하였다. 영의정 김수홍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 호조판서 유상운, 병조판서 윤지완, 공조판서 심재, 대사간 최규서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된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서인 노론측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 균의 정호를 정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빈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발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송나라 신종이 28세에

철종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어서 번왕으로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게 되자 그 때

비로소 태자로 책봉하여 후사를 이은 고사를 예로 들며 후궁 소생인 왕자 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재차 강조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반대 상소를 접하고는 이미 종묘사직에 고하여 원자로 확정했는데도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지적하며 심하게 분노하였다. 그래서 그는 승지

이현기와 윤빈, 교리 남치훈, 이익수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키고, 이어서 영의정 김수홍을 파직시켰으며, 목내선, 김덕원, 민종도, 민암, 목창명 등

남인계 인사를 대거 등용하였다.

  반면에 노론계는 송시열이 유배되어 사사된 것을 비롯하여 이이명, 김수항, 김만중, 김수홍

등도 유배되거나 사사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숙종은 본질적인 원인이 민비에게 있다 하여 다시 중전을 폐비하려 했다.

그러자 노론측이 오두인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숙종은 그

주동자인 박태보, 이세화, 오두인 등을 국문한 후 위리안치하거나 귀양보냈으며, 그 해 5월

민비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한편 원자 균을 세자에 책봉했다.

  궁인 출신의 후궁 장씨는 1686년 처음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숙원을 거쳐 소의에

봉해지고, 왕자 균을 낳은 후 그가 원자에 정호되어 이듬해 세자에 책봉되자 그 해에 중전이

되었다.

  그녀가 일개 궁인에서 왕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장렬왕후(인조의 계비)의 동생

조사석과 종친인 동평군 항의 힘이 많이 작용했다. 조사석은 남인과 연결을 맺고 있었고 동평군

항은 궁중과 연결을 맺고 있었기에, 장씨는 조사석을 통해 남인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고

동평군을 통해 종친의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장씨에게 조사석을 연결시켜 준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장씨의 어머니는 조사석과 한때

내연의 관계에 있던 여자였는데, 이 때문에 장씨가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한편

동평군 항을 끌어들인 사람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였다. 동평군 항은 종친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선혜청제조를 맡고 있었기에 궁중을 무상으로 출입할 수 있었는데, 장희재는 그 점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접근하였다.

  왕자 균이 원자로 정호될 당시에 남인의 민암, 민종도, 이의징 등이 이들과 은밀히 손을

잡았다. 이 때문에 원자 정호 문제로 서인이 대거 축출당하자 남인이 다시 등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남인 세력과 장씨가 은밀히 연합 세력을 형성하고 서인과 인현왕후를 공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사환국과 인현왕후 폐출사건은 이러한 세력 구도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갑술환국과 무고의 옥

  갑술환국은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이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 문제와 관련하여 대거

축출하고 다시 서인이 집권한 사건이다. 그리고 '무고의 옥'은 취선당에 마련된 신당 문제로 희빈

장씨가 죽은 사건인데, 이 일로 그녀를 지지하고 있던 소론측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지고 나아가

남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거세당하게 된다.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은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들이 민씨의 복위 운동을 전개한 것은 당시 숙종이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른 것이다.

  그들이 민씨의 복위를 꾀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남인의 민암, 이의징 등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복위 운동 주모자들을 심문하여 그

사실을 파악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폐비 사건 이후 중전 장씨와 연합한 남인 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팽창되고

있음을 염려하고 있었고, 장씨에 대한 애정이 식고 숙빈 최씨에게 애정을 쏟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대신들에게 민씨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은근히 주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서인측이 민씨 복위 운동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오히려 서인을

제거하려 한 남인들을 궁지로 몰았다. 그리고 기사환국 당시에 서인에 대한 국문을 주관하던

민암과 판의금부사 유명현 등을 제거해 버렸다. 제거된 남인들은 유배당했고, 훈련청과 어영청의

지휘관도 소론의 신여철, 윤지환 등으로 교체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소론의 환국 도모는 대체로 두 방향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소론 쪽의 한중혁이 집권 남인측의 막후 실력자이며 총융사인 장희재(왕비 장씨의 오빠)와

동평군 항에게 뇌물을 주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되 별궁에 거처하도록 한다'는 내부 계획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인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는 동시에 세력을 잃은 서인의 정계

진출을 도모한다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인과 왕비 장씨에 대한 숙종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당시 숙종이 총애하던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숙빈 최씨로 하여금 왕비 장씨와 남인들의 잘못을 고변하도록

했다. 즉, 왕비 장씨가 질투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하는 한편 남인에 대해서는 민암,

이의징 등이 소론측 인사들이 인현왕후에게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내용을 숙종에게 고했던 것이다.

  숙종은 숙빈 최씨의 말을 듣고 왕비 장씨와 남인에 대해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그 때문에

남인이 폐비 민씨 복위 운동에 대한 보고도 하기 전에 이미 마음이 돌변해 민암, 이의징 등을

유배시켰다. 그리고 이어서 유배된 그들을 사사시키고 목내선, 김덕원, 민종도, 이현일, 장희재

등의 남인 중진들을 유배시키고, 장씨를 빈으로 강등시켰다.

  이 사건의 뒤처리 과정에서 중인, 상인 계층의 자금이 뇌물 수수의 방법으로 이용된 사실이

드러나 왕과 조정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인, 상인 계층이

중앙 정치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사대부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대부 중심의 조선 사회가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남인은 대거 축출되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등이 중용되었으며, 노론측도

폐비 민씨가 복위되고,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김수홍, 김수항 등이 복관되었다. 따라서 조정은

서인의 소론측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런데 소론측은 '무고의 옥'으로 인해 노론측에 주도권을 내주고 만다. 소론은 정권을 잡은

이후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따라서 희빈 장씨를 은근히

지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내 복위된 왕비 민씨를 모해했을 때 조정

일각에서 그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소론의 남구만이 나서서 세자의 앞날을

생각해서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해 무마되기도 했다.

  그러나 1701년 민비가 죽고 나서 취선당 서쪽에 신당이 발견되자 숙종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희빈 장씨는 신당을 차려놓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민비가 죽기를

기원하며 자신의 복위를 꾀했는데, 실제로 민비가 죽자 이 신당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사건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숙종은 신당 사건의 전모를 보고받고 희빈 장씨와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죽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때 소론측의 남구만은 후에 세자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당시의 정국은 장씨 소생의 세자에 대한 지지 여부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숙종은 소론측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희재와

무속인 그리고 희빈 장씨의 주변인들을 국문하여 죽였으며, 희빈 장씨에 대한 치죄를

만류하던 소론 세력도 제거해 버렸다. 그 결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의 소론 거두들이 유배되거나 파면되었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다시 노론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세자 지지 문제를

중심으로 소론과 노론의 대립은 가속화되어 점차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조 대의 장헌세자 사건 이후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분리되고, 소론과 남인이 시파에 합류해

조정은 시파, 벽파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5. '숙종실록' 편찬 경위]


  '숙종실록'은 총 65권 7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674년 8월에서 1720년 6월까지 숙종 재위

45년 10개월 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720년(경종 1년) 11월부터 1728년(영조 4년) 3월까지 지속되었다. 이 작업이

9년이나 걸린 것은 숙종의 재위 기간이 약 46년이나 되는데다 편찬 과정에서 노, 소론의

정쟁이 심화되어 정국의 잦은 전환으로 인해 편찬 책임자가 여러 번 바뀌었기 때문이다.

  1720년 11월 편찬에 착수했을 때는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노론의 김창집이

총재관이 되어 도청과 1, 2, 3방의 당상 및 낭청을 선임하고,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등 국가

기록을 자료로 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그러나 이듬해 12월에 소론의 김일경 등에 의해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이 탄핵을 받아 실각했기에 총재관이 소론의 조태구로 변경되었으며, 나머지 당상,

낭청들도 대부분 교체되어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뒤로 최석항, 이광좌로 총재관이 바뀌었으나

같은 소론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1724년 경종이 죽고 노론측이 지지하던 영조가 즉위하자 조정은 다시 노론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실록 책임자도 바뀌게 되었고, 다시 당상 및 낭청도 일부 교체되었다.

그 후 노론에 의해 실록 편찬 작업이 지속되어 1727년 9월에 겨우 완성하여 인쇄하였다.

  인쇄가 완료될 무렵 다시 정미환국이 일어나 노론측이 물러가고 이광좌 등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들은 실록을 개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각 권의

끝에 소론측이 빠졌다고 주장한 내용들을 보충하거나 잘못된 기사들을 바로잡는 이른바

'보궐정오'를 덧붙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에 실록보궐정오청을 설치하고 이광좌를

총재관으로 하여 이듬해 3월까지 보궐정오의 인쇄를 마쳐 노론측이 편찬한 '숙종실록'과 합쳐

각 사고에 봉안하였다.


  숙종 시대의 세계 약사

  숙종 시대의 세계사를 살펴보면 동아시아에서는 청이 여러 정난들을 평정하고 세력권을

확대했으며, 영국 등의 유럽 국가와 무역을 시작했다. 이 때 인도에서는 네덜란드에 의해 커피

농장이 건설되어 유럽에 의한 침략 위협이 노골화 되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영국이 해상권을

장악했고, 각 국가간에 동맹이 결성되어 블록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식민제국을 조직하고 서로간에 식민전쟁을 감행했다.

  한편 라이프니쯔와 뉴턴이 미분과 적분을 동시에 발견했고 헨델의 음악이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볼테르의 연극이 유럽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출처 :한국(桓國)의부활&가우리상점 원문보기 글쓴이 : 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