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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당 일타스님 행장
뉴스일자: 2008년11월14일 16시19분
[일타스님 행장] 대중에게 깨달음의 길 인도한 관음보살의 현현
동곡당 일타(東谷堂 日陀)스님은 1929년 9월 2일(음력 8월1일) 충청남도 공주군 우 성면 동대리 182번지에서 연안 김봉수(鳳秀) 공을 아버지로 광산 김상남(上男)씨를 어머니로 4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36년 공주 본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4세 되던 해인 1942년) 친외가의 일족 41명이 모 두 출가함에 따라 보통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양산 통도사로 고경(古鏡)스님을 찾아가 출가 득도했다. 1949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와 보살계를 수지하였으며, 1950년(22세)부터 다시 운수납자의 길로 들어서서 진양 응석사 와 범어사, 성주사 선원 등에서 금오·동산·성철스님 등과 함께 정진했다. 1953년 자운율사의 권유로 천화율원에서 율장전서를 열람하고 계법을 정립했으며, 1954년 강원도 오대산 서대에서 전 조계종정 혜암 스님과 함께 생식과 장좌불와의 용맹정진으로 하안거를 마친 뒤, 적멸보궁에서 하루 3천배씩 7일 기도를 하고, 오른 손 열 두 마디를 태우는 초인적인 연지연향(燃指燃香)을 발원했다. 발원을 마친 뒤 세속과 관련된 사람노릇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중노릇만 잘 하리라’ 결심해 오른손 네 손가락을 심지로 삼아 불을 붙였다. 한밤중에 시작된 연비는 날이 환해질 때가 돼서야 끝났다. 계법 정립·계승한 한국 정통율맥의 큰별 이듬해인 1955년에는 경북 봉화군 소천면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가 동구불출(洞口不出)·오후불식(午後不食)·장좌불와(長座不臥)를 지키며 홀로 6년 결사를 시작했다. 태백산 6년 정진을 통해 정법과 대원과 대행을 구족하신 스님은 1960년 산에서 내려온 이후에는 걸림 없는 교화의 길을 열어 보였다. 1964년 은해사 주지를 거쳐 은해사 조실을 역임한 스님은 1976년 해인총림의 율사로 피임돼 후학 양성과 계율을 재정립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또한 1980년부터는 미국 LA의 고려사 포교를 시작으로 2년 동안 북미·남미·중미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한국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93년에는 조계종 전국 구족계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돼 모든 승려들에게 계를 수계하는 중임을 맡았으며, 1994년 5월에는 원로회의 위원으로 추대됐다. 해인사 지족암에 선방을 만들고 교구본사인 은해사의 조실로 계시면서 후학을 지도하기도 했다. 1999년 11월 22일 하와이로 건너간 스님은 11월 29일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상좌 혜인 등 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열반에 들었다. 세수 71세, 법랍 58세. <인연>에 묘사된 일타스님의 수행“경봉스님은 멋들어지게 사신 지장보살이셨고, 성철스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 문수보살, 일타스님은 한없이 자비로웠던 관음보살이셨다.” 불자작가 정찬주의 말이다. 현대사에 관음보살의 현현으로 칭송받았던 일타스님. 정찬주 작가는 일타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인연>에서 일타스님이 소신공양을 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새벽1시쯤이었다. 일타는 칠흑 같은 세상에 불을 켜는 심정으로 성냥을 그어 자신의 손에 붙였다. 곧 붕대를 감은 손가락이 어둠을 밝히는 등처럼 활활 타올랐다. 붕대를 감지 않은 엄지가 뜨거울 뿐, 정작 타는 네 손가락은 따끈하고 얼얼한 느낌을 줄 따름이었다. 네 손가락에 대한 애착이 떨어져버린 탓인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손가락에 붙은 불이 산바람을 타고 일렁이며 기세 좋게 타올랐다. 불꽃이 촛농을 녹이며 춤을 추었다. 일타는 연비삼매에 빠져들었다. ‘손가락이라는 것도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구나. 멋지게 타는 고깃덩어리구나.’ 일타는 신심의 불꽃이 욕망과 집착과 삼독(三毒)을 붙잡아온 손가락을 태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손가락이야말로 욕망을 붙들고 집착을 붙들고 삼독을 붙들어온 화매(禍媒)였구나. 이 손가락이 없어짐으로 해서 나는 오늘부터 욕망과 집착과 삼독으로부터 자유로우리라.’ 손가락을 감은 붕대에 붙은 불을 ‘어둠을 밝히는 등’으로 비유한 것은 단연 압권이다. 일타스님이 소신공양을 한 것은 무명에 쌓여있던 자신의 마음속에 환한 등불을 내건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인연>에는 일타스님이 활연대오(豁然大悟) 하는 장면도 너무나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일타의 눈에는 분명 부처님이 모란꽃 한송이를 들고 있었다. 마하가섭에게 꽃을 보이신 것처럼 일타를 향해 모란꽃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일타는 미소를 지었다. 전주 법성원에서 세존염화라는 화두를 든지 실로 5년만인 1956년 음력 3월 23일의 오도였다. ‘어제의 시간과 공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세상은 그대로이나 어제의 세상이 아니잖은가. 태백산이 바로자나부처님처럼 황금빛으로 빛나지 않은가.’ 만발한 모란꽃의 향기가 암자 마당을 적시고 있었다. 마당가 너머 비탈에 핀 야생화들도 꽃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저분은 부처님이 아니신가. 모란꽃을 연꽃인 듯 들고 계시는 저분은 부처님이 아니신가. 아, 나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더 할 일이 없지 않은가.’ 일타스님이 ‘세존염화’라는 화두를 든 지 5년만에 오도를 얻는 장면을 작가는 위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흔히들 선(禪)을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한다. 오묘한 깨달음의 모습을 감히 말로는 다 형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선의 특징을 생각한다면 오도의 순간을 이만큼 잘 표현한 것은 작가만의 탁월한 역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계한 제자를 용서하고 그 승적을 끝까지 지켜주거나 5계를 범한 제자를 올바른 길로 제도하고 자신에게 보시한 산삼을 아픈 제자에게 돌려보내는 일타스님의 모습은 각박한 현대인들에게 여유와 이해, 용서의 미덕,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비심을 일깨워준다. 남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운 인물이지만, 자신에게는 매우 혹독했던 게 일타스님의 삶이었다. 일타스님은 법 높은 스님으로 많은 제자들과 불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큰스님에 걸맞는 대우는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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