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谷堂 日陀大宗師의 風貌와 行狀
中和法陀(受法弟子, 은해사 회주)
<일타큰스님에 대한 간단한 약력소개>
1. 서문
지난 11월 22일 밤 8시 40분경, 하와이 玄虎 스님으로부터 큰스님께서 방금 열반하셨다는 국제전화를 듣고 눈앞이 캄캄하고 숨이 멈출 듯하였다. 7일 장례를 황망과 비탄 속에서 마 치고 큰스님께서 남기신 542과의 舍利를 수습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百齋가 오늘이다.
세월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이렇게 빠를 수 있을까? 아직도 큰스님 가신 것이 실감이 나 지 않는다. 정말 가셨을까? 어디에 꼭 계신 것만 같다.
영결식 날(11월 29일) 3천여 명의 스님네와 4~5만을 헤아리는 신남신녀 조문객들이 은해 사 골을 메우다 넘쳐 하양, 영천은 물론 고속도로 입구까지 차량행렬로 뒤덮였다 하니 큰스 님의 법력과 덕화를 이 이상 더 증거할 필요가 없겠다.
큰스님의 遺稿가 된 《日陀和尙水月銘》을 큰스님 百齋에 출판함에 있어 큰스님의 풍모와 행장을 무조건 승화시킬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사실에 근거하여 정리하라는 주변의 권고 에 따라 필요성을 동감하여 이 글을 썼다.
2. 인간적인 풍모
큰스님은 조계종의 傳戒大和尙을 역임한 한국불교 최고의 청정율사이셨다. 수행자의 본분 에서 어긋나는 일은 일체 용납하지 않으셨고 자신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하셨다. 그러나 큰스님은 엄격하신 분만은 아니었다. 수행에 어려움을 겪는 납자에게는 자상하게 길을 일러 주셨고 재가불자에게는 매우 자상하게 따뜻한 정을 베푸셨다.
큰스님은 茶를 사랑하고 무척 좋아하셔서 ‘茶香山房’을 즐겨 쓰셨으며 趙州禪師가 喫茶去라고 하신 부분을 喫茶去來라고 표현하기도 하여 다정다감한 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 습니다. 항상 붓을 곁에 두고 “글씨 한 장 받으러 왔습니다.” 하면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 해 주셨고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다른 사람 것이라도 먼저 주실 만큼 모든 것을 주셨던 스 님입니다.
멋과 맛과 아름다움을 몸과 마음에서 따뜻하고 깨끗한 향기로 중생들에게 심어 주셨던 스 님은, 차별심이 없어서 모든 불자를 똑같이 대해 주셨고, 늘 親見이 자유롭게 허용되었으며, 언제 보아도 한결같이 밝고 맑은 미소로 불자의 마음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셨습니다.(속 가제자 김시남 부산여대 교수 회고, 해인, 2000년 1월호)
평생을 검소하게 사신 큰스님은 가시는 길에서도 번다한 겉치레를 싫어하셨다. 큰스님은 遺敎書에서 死後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화장할 것이요, 외국이라도 한국으로 이운을 하지 말 것이며, 상여도 장엄하지 말고 가사만 덮도록 하셨다. 또 舍利 수습도 금하셨으며 쇄골하 여 一分은 풍선으로 허공에 날리고, 一分은 大地森林에, 一分은 흐르는 물, 강, 바다에 가벼 이 뿌려 주기를 바라셨다.
뿐만 아니라 큰스님은 49재, 제사 등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단 門孫들의 화목을 위하여 先師 古鏡 老스님의 제향은 문중이 함께 모여 慧印·性眞·法陀·慧國 등이 상의하여 어느 사암에서 지내도 좋다 하셨다. 또한 스님에 대한 비석, 부도 등도 따로 立石하여 조성치 말 도록 遺敎하셨다.
그간 큰스님 서적 출간에 애써온 재가제자 慧林 金鉉俊 거사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으셨 다. 큰스님 책에 대한 著作權과 板權을 金거사에게 일임하였음을 명기하고 혹시라도 발생할 상좌들과의 異見을 예방하셨다.
평생을 수행으로 일관하시고 크나큰 덕화를 베푸셨던 큰스님은 그러나 한없이 겸손하기만 했다. 큰스님은 遺敎書에서 이렇게 밝히셨다.
나는 본래 전생의 業이 무겁고 복이 가벼운(얕은) 가난한 중이었으며, 금생 이 세상에서도 인연업법을 역시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 다만 一念으로 十方을 꿰뚫으려 하였으나 이 관문 도 꿰뚫지 못하였으니 늙은 이때 마음먹은 일을 어찌 기대하겠는가? 죽음의 왕이 출동함에 病의 신하가 항상 따라다님을 어찌할 수 없지만 一心의 靈臺만은 잊거나 잃지 않고 간직하 고 있다.
我本前生 業重福輕 寒貧衲僧 今生此世 因緣業法 亦不善治 只此一念 光透十方 而不透關 年老心事 以何期待 死王出動 病臣常隨 又且如何 一心靈臺 不可忘失(遺敎書의 自嘆言)
나는 本是 一匹之鹿. 千山萬水에 自由로이 노닐고 푸른 산 흰 구름에 逍遙自在하며, 穴岩雲頭에서 칩거정좌하고, 아침 鏡 소리 저녁 쇳(磬)소리에 照顧脚下를 願할 뿐, 名利의 樂爲 의 그물에 매이고져 않으며, 모든 반연을, 번잡을 싫어하였나니, 내 오늘 娑婆의 緣이 다하 여 無爲의 故鄕으로 歸復코저 하는바……(遺敎書 頭文)
信心 戒行 願力을 生命으로 護持하여 各自가 一念 無生法忍을 觀한다면 더 바람 없겠다.
(遺敎書 마지막 부분).
3. 업적과 행장
큰스님은 학문과 수행과 계행으로 후학들의 귀감이 되셨다. 큰스님이 열반에 드시자 종단 의 대덕스님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一生을 活句參禪하시고 自性淸淨의 性空戒로 廣度衆生하신 스님으로…… 14세에 童眞으로 할애출가하시고 일문권속 40여 명이 또한 함께 출가하시니 이는 宿世에 佛種子를 심은 善根因緣의 발로이며,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燒指供養하여 戒體를 엄정히 하시니 이는 大隱·金潭·龍城·慈雲律師로 이어진 七佛祥瑞戒脈의 전승이시며, 출가 이래 제방의 선지식을 참방 하시고 태백산 도솔암, 가야산 해인사 등에서 長坐不臥로 용맹정진하시니 이는 佛心印과 祖燈의 면면한 전수이십니다. 때론 법좌에 높이 앉아 걸림 없는 辯才로 經을 설하고 律을 펼 치며 禪을 논하니, 이는 菩薩大悲願力의 示現이시며, 94년 종단개혁 이후 傳戒大和尙에 추대 되시어 율법 선양으로 淸淨僧風 진작의 기틀을 마련하시니 이는 ‘戒로써 스승 삼아라’ 하 신 如來遺囑의 봉지인 것입니다. ……禪·敎·律에 회통하여 광도중생하신 스님의 가풍이야 말로 흔들리는 교단의 위상을 바로잡고 분열된 종도의 뜻을 하나로 묶을 생명의 물줄기입니 다.(조계종 총무원장 正大 스님 弔辭中 인용)
종단이 어려웠던 시절, 스님의 높은 學問은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제도적으로 혼란하 던 시기에 스님께서는 戒律精神을 계승하며 종단의 각종 제도를 정립하는 데 정신적인 토대 가 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평소 禪師로서 정진하시다가 종단과 중생의 어려운 일을 보면 매번 떨치고 일 어나 바른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 뛰어난 說法으로 만중생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실로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스님의 설법에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금생이 다하면 ‘다음 생에는 미국 땅에 태어나 한국에서 수행한 후 미국을 비롯한 전세 계인을 제도하겠다’ 하신 발원 따라 미국 땅에서 입적하셨군요.(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탄 성 스님 조사 중 인용)
특히 스님께서는 淸淨戒律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시어 平生 戒德을 쌓으셨으니, 後學들 은 늘 큰스님을 귀감으로 삼았습니다. 교단의 戒律正脈을 바로 세우기 위해 수많은 律典을 강설하셨으며, 종단의 傳戒大和尙이 되셔서는 수많은 출가자에게 佛制淨戒를 설하시니 東土比丘는 모두 스님의 法恩에 戒體를 적셨습니다.
큰스님의 공덕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펼쳐주신 대중교화의 업적입니다. 큰스님은 평생 누더기를 걸친 산중의 수행자였으나, 설법을 요청하는 곳이 있으 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찾아오는 佛子는 僧俗을 불문하고 和顔愛語로 맞아서 甘露 의 法雨를 적셔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四部大衆은 스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親見하는 것만으 로 歡喜心을 냈고, 한 차례의 法門을 듣는 것만으로 般若智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법등 스님 조사 중 인용)
큰스님을 가까이서 오래 모셨던 상좌 慧國 스님은 한 기고문에서 “스님의 思想을 부득이 크게 나눈다면 捨敎入禪, 持戒淸淨, 慈悲布施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였다. 여기에 소납이 더한다면 和顔愛語, 因果輪廻, 廣度衆生이 아닐까 생각한다.
큰스님은 항상 맑고 밝고 환한 미소와 표정으로 모든 이를 제접하며 막힘 없이 부담없이 들려주시는 인과법문과 輪廻轉生談으로 만나는 이로 하여금 시름을 잊고 새로운 삶의 용기 와 수행에 자신을 갖게 해주는(拔苦與樂) 마력과 같은 道力을 지닌 원력보살이셨다.
큰스님은 실로 大禪師요 大律師요 大法師이셨으며 布敎師이셨다. 또한 여러 저서와 金石文集을 통하여 큰스님의 多聞博學과 國漢文章에 걸림 없는 大文章家로서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 총명으로 내외전을 두루 섭렵하였고 많은 독서로 온갖 經句, 詩句, 偈頌의 암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기억력으로 한번 보고 들은 옛 인과담이나 사례 등은 결코 잊지 않으셨으니 스님의 법문과 대화에는 늘 새로운 감동이 담겨 있었다.
1) 出家因緣 : 全家族의 出家
큰스님은 지금부터 71년 전인 1929년 己巳年 9월 2일(음력 8월 1일) 午時에 충청남도 공 주시 우성면 동대리 182번지에서 연안 金氏 鳳秀를 아버지로 光山金氏 上男을 어머니로 하 여 二男二女中 세번째 서열 次男으로 태어났다.
큰스님의 외증조 할머니인 平等月보살님과 외증조 할아버지인 寶雲거사(金永仁)는 신심이 장하셨다. 平等月보살님이 입적한 뒤에는 7일 동안 放光을 하였고 그 이후 자손들이 속속 49명이나 出家하였다.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큰스님의 아버지(金鳳秀)는 마곡사 산내암자의 太虛 노스님의 마을상좌로 극진히 스님의 시봉을 하였고, 스님의 生男축원 후 바로 입적하 였으며 그날로 임신하여 누님(應敏 스님)을 낳으니 태허 노스님 후신이라고 믿고 있다.
어머니(金上男, 후에 출가하여 性浩 비구니)는 대구 桐華寺 內院庵에 다니며 절 살림살이 뒷바라지에 열심이었다 한다. 시주물을 잔뜩 실은 소달구지 쇠바퀴에 발이 부서져 아픈 가 운데에도 果報에 대한 게송을 읊을 정도였고 남편에게 새장가까지 들여주며 출가할 정도로 신심과 수행의지가 투철하였다.(해성 노스님 회고)
큰스님은 스스로 “특별한 출가의 동기를 가져본 적이 없다. 있다면 전생에나 있었을까? 금생에는 전생의 인연을 따라 자연스럽게 중이 된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5살 때 《千手經》을 외우며 동냥하는 스님을 따라 다니며 《천수경》을 다 외워 학교장 기자랑에 염불을 하여 별명이 ‘중’이었기에 ‘중새끼’라고 골림받았다고 회고하셨다.
10살 때 일본 메이지 대학교에 다니던 막내 외삼촌(金容明, 震宇 스님)이 갑자기 승복 차 림으로 나타나 놀라는 큰스님에게 “‘작년 볼 때의 외삼촌하고 금년 볼 때의 외삼촌하고 다르냐?’ ‘다릅니다.’ ‘그러니까 一切唯心造니라.’는 말을 듣고 내 딴에 아주 발심을 했어.”라고 회고하셨다.(《시작도 끝도 없는 길》, 효림)
1939년에는 누님(敬喜, 應敏 스님)이 공주사범학교(현 공주사대)를 졸업함과 동시에 금강 산 신계사 법계암으로 맨 먼저 출가하였고, 뒤이어 형님(思悅, 月現 스님)이 1940년에 해인 사로 출가하였다.
이듬해 1941년에는 어머니(金上男, 性浩 스님)과 여동생(明喜, 快性 스님)이 四佛山 윤필암 으로 출가하였다.
1942년 큰스님이 소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鳳秀, 慈應堂 法眞 스님)도 수덕사 만공 스님 께 출가하였으며, 큰스님은 14세로 외할아버지 손에 잡혀 양산 通度寺 古鏡 스님께 출가하 였다.
그 후 집안의 親家, 外家 심지어 머슴까지 49명 모두가 출가하였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 님 이후 처음 있은 전가족 출가이다. 親家 쪽 出家直系 가족들은 큰스님 말씀대로 집안이 단명해서인지 모두 入寂하시고 막내 여동생인 快性 비구니 스님(明喜)만이 대구 염화사에 주석하고 계신다. 스님이 되신 대부분의 가족들은 ‘중노릇 잘한 분’들로 생전에 존경을 받았다.
2) 禪師 : 求道行者의 면모
14세의 어린 나이에 통도사에서 은사이신 古鏡 스님을 시봉하면서도 누비 장삼에 두루마 기를 입고 수좌들이 뒤에 졸졸 따르는 경봉 스님이 우리 스님보다 더 좋아뵈어 극락암을 쫓 아 올라가 “나도 참선할기요.” 할 정도로 큰스님은 禪師로서의 소질을 타고나셨다.
18세에 송광사 삼일암 효봉 큰스님에게서 간시궐 화두를 받아 첫 夏安居를 났으며 冬安居 는 속리산 복천암에서 났다.
22~23세 때 경남 진양 응석사에서 鄭金鳥 스님 회상에서 3철 冬安居를 마쳤다.
24세 때에는 범어사 東山 스님 회상에서 夏安居, 창원 성주사 성철 스님 회상에서 冬安居 하였다.
26세 때에는 범어사 東山 스님을 찾아가 화두를 점검받았고 하안거는 오대산 서대에서 혜 암(현 종정)스님과 함께 생식하며 장좌불와하셨다. 하안거 해제 후 3천배 7일기도 끝에 燃指燃香 발원하셨다.
27세부터 6년간 경북 봉화군 소천면 태백산 도솔암에서 장좌불와 결사를 마쳤다.
32세 때 지리산 화엄사 田岡 스님 회상에서 하안거를 하며 법거량을 하셨다.
33세부터 35세까지 해인사 퇴설당에서 指月, 西翁 스님 등을 모시고 6철 안거하셨다.
36세 때 통도사 극락암 경봉 스님 회상에서 夏冬安居하셨다.
37세부터 43세까지 해인사 퇴설당에서 안거하셨다.
46세부터 47세까지 다시 태백산 도솔암에 들어가 안거 정진하셨다.
49세 때 경주 불국사 선원에서 月山 조실스님과 夏冬安居하셨다.
50세에서 60세까지 해인사 지족암에서 안거하셨다.
62세 때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칠불암 亞字房에서 하안거하셨다.
62세 이후 열반시까지 주로 해인사 지족암에 修禪安居하시며 지병 치료를 하셨고, 68세 이후에는 제10교구 은해사 조실로서 후학들을 함께 지도하셨다.
이러한 수행이력이 증명하듯이 큰스님께서는 경봉, 전강, 동산, 성철, 효봉, 지월, 서옹 등 제방의 당대 선지식을 두루 모시고 修禪安居하셨으며, 신병이 깊을수록 加行精進하신 참 衲子이셨다. 律師로서보다도 禪師로 불려지기를 바랐던 큰스님의 求道修行으로 일관된 一生을 잘 보여 주고 있다.
3) 律師 : 律學者로서의 면모
큰스님께서 律藏에 관심을 둔 것은 24세 때부터이다. 위계질서가 문란했던 승가생활을 보 고 “부처님 율장에는 이런 현상들을 뭐라고 그랬길래 이러는가 궁금하여 율을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구먼. 마침 《사분율》 《범망경》 등 3권을 자운 큰스님이 주셔서 그것을 읽었다”. 이듬해 25세 때에 본격적으로 律공부를 하고 싶어 통도사 천화율원으로 慈雲律師 를 찾아가 1년 이상을 걸쳐 《사분율》(60권), 《근본율》(250권), 《오분율》(50권) 등 律藏 1천부를 독파하셨다.
1962년 12월(34세)에는 조계종단의 비구 대처간의 분규가 심각해졌을 때 조계종 정화대책 중앙비상종회의원이 되어 律藏부분을 맡아 ‘대처승이 佛法에 없음’을 율장을 통하여 증거 하셨다. 오늘 조계종의 괴색 가사와 회색 장삼도 큰스님이 중심이 되어 제정한 것이다.
1965년(37세)에는 해인총림 율원장으로 취임하여 율사 스님들을 양성하였으며, 그 제자들 이 오늘날 조계종 율사로서 율맥을 잇고 있다.
1976년(48세)에는 해인총림 율주로 복귀하여 지족암에 주석하면서 《沙彌律儀》와 《불교 와 계율》 등 律書들을 출판하여 일제 강점기에 무너진 계율을 재정립하는 데 노력하였으 며, 이 책은 각종 習儀山林의 지침서가 되었다. 조선조 배불정책과 일제의 한국불교 왜색화 정책으로 무너진 계율과 전통 기본의식을 비로소 바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1992년 64세 때에는 출가 50년 기념으로 그간 누차 설해온 《범망경 설법집》(전 5권)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대승불교의 청정 생활규범으로 큰스님께서 엄격한 계율 해석을 담고 있어 출가수행자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利己主義에 빠져 있는 일반인에게도 훌륭한 생활규범 을 제시해 주고 있는 모든 불자들의 교과서이다.
1993년(65세)에는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으로 추대되어 명실공히 출가 비구 비구 니, 사미 사미니 모든 조계종 승려에게 戒를 전수하셨다.
이 이력만 보아도 큰스님께서는 개인적으로 평생 淸淨持戒로 사신 철두철미한 律師이셨 고, 律學의 이론까지 심오하게 해석하여 새롭게 조명, 조계종의 계율을 정립한 律學者로서의 깊은 경륜을 알 수 있다.
4) 大法師·布敎師 : 敎學을 함께 통달하신 三藏法師
1947년(19세)부터 1949(21세)까지 통도사 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마침으로 이력종장이 되 었다. 회고담을 보면 큰스님께서는 이미 강원에서 《書狀》을 배울 때 다섯 장 백 줄이 넘 는 양을 하룻저녁에 외울 정도로 두뇌가 명석하고 이때 이미 한문 문장에 대한 文理가 터졌 다고 한다.
6·25 한국전쟁시기에는 북한의용군에 잡혀가지 않으려고 피신하고 있으면서 일본어로 된 세계문학전집 150권을 정독하였으며, 필요하고 중요한 문장은 대학노트 20권 분량이나 메모 를 해두었다 한다. 여기에 律藏까지 연구하셨으니 經·律·論 三藏에 통달하신 분으로 戒· 定·慧 三學을 고루 닦으신 명실공히 三藏法師이시다. 이 시대에 큰스님처럼 고루 갖추신 분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衆評이다.
큰스님께서는 혼자만의 法悅을 만끽하지 않고 天地十方을 돌며 큰스님을 필요로 하는 法會장소에는 시간과 공간이 허락하는 한 참석하여 사자후로 중생을 교화하셨다. 특히 해인사 송광사를 비롯한 전국 각 사찰의 보살계단에서 계를 설하여 큰스님에게 佛名을 받고 佛子가 된 신도가 기백만은 될 것이라 한다.
《법공양문》 《시작하는 마음》 《영원으로 향하는 마음》 등 20여 권의 저서들은 그간 의 각처 각종 법회 때 설법하신 녹음을 문장화한 것이 많으나, 그 어느 것 하나 빼고 버릴 것 없는 수려한 명문에 중생을 깨우쳐 주고 어루만져 주는 법문집이다. 이 저서들은 신도들 의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스님들의 좋은 설법자료가 되고 있다.
여기에 실린 내용만 살펴보아도 큰스님께서 얼마나 교학에 밝고 다방면에 博學多識하신가 를 알 수 있다. 큰스님께서는 추종을 불허하는 부루나 같은 大法師요 布敎師이셨으며, 大文章家요 진정한 三藏法師이셨다.
5) 燃指供養 올리신 신심 장한 스님
큰스님께서는 1954년 갑오년 26세 때에 강원도 오대산 서대에서 현재 종정이신 혜암 큰스 님과 함께 하안거를 나셨다. 두 분은 생식과 長坐不臥로 피나는 정진을 하셨다.
하안거 해제 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오직 중노릇 잘하겠다는 발원’으로 하루에 3천배 씩 절을 하며 7일기도를 회향하는 날 오른쪽 네 손가락 열두 마디를 부처님 전에 촛불로 태 워 燃指燃香供養을 올렸다.
현대불교신문(98. 8. 19자)에 기고된 그 당시 상황을 보면 큰스님께서는 淨化의 소용돌이 에서 빠져나와 공부하기 위하여 오대산 서대로 갔고, “굳은 심지가 없이는 생사일대사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연비공양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손가락이 없으면 세속적인 모든 생각이 뚝 끊어질 것이고, 손가락 없는 나에게 누가 사람 노릇 시키지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요. 연비에 대한 마음도 점검할 겸 여름 한철 동안 장좌불와하였고 오대산 적 멸보궁에서 매일 3천배씩 7일기도를 마친 후 오른손 열두 마디를 모두 연비하였습니다. 모 든 미련을 연비와 함께 태워 버리고 홀로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회고자료에는 “능엄경에 보면 내가 죽고 난 뒤에 어떤 비구가 발심을 해서 결정코 삼마디를 닦고자 할 때는…… 능히 여래의 형상 앞에서 몸을 한 등불처럼 만들어서 태우거 나 한 손가락을 태울 것 같으면 비록 無量光壽를 밝히지는 못했지만…… 세간을 멀리 떠나 서 모든 수를 벗게 될 것이니라. 모든 빚을 일시에 갚은 사람일지라(無始宿滯一時所畢)는 대 목을 보며 이왕 사람 노릇 안 하려면 연비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손가락 없으면 누가 악 수하자고 덤비지도 않을 것이고, 손가락 없으면 총무원장 하고 싶다, 종정 하고 싶다, 이런 名利에 끌리지 않을 것이고……”라고 회고하고 있다.
이것을 보아도 큰스님의 求道熱과 修道者로서 열망과 세상이나 종단에서의 名利까지도 일 체 초탈하여 平生을 사신 위대한 삶이 증거되고 있다. 연비 당시의 결심과 서원이 변치 않 고 칠십 평생을 중생의 師者가 되어 영원히 佛子들 속에서 살아 계신 것이다.
6) 참된 수행자의 면모:태백산 도솔암에서의 6년 정진
큰스님께서는 平生 동안 정말 ‘중답게 수도해 본 것’이 1955년(27세)부터 1960년(32세) 까지 6년간 경북 봉화군 소천면 태백산 도솔암에서의 結社라고 종종 말씀하셨다.
지난해 오른손가락 燃指 후에 아직 손에 붕대를 감은 채 더욱더 求道意欲이 넘쳐 종단 안 팎의 ‘대처승 정화’ 소용돌이를 벗어나 이곳으로 와 혼자서 洞口不出, 午後不食, 長坐不臥 로 지독한 참선수도를 하셨다.
현대불교신문(98. 8. 19자)에 실린 그 당시 상황에 대한 큰스님의 회고를 보면 “話頭가 잘 잡히지 않거나 밤에 잠이 오면 경전을 소리내어 읽기도 하였는데, 딱 그치면 밖에서 ‘스님, 경전 다 읽었다. 가자가자’ 하며 사람들이 흩어지는 느낌이 옵니다. 옛 게송에도 ‘깊은 밤에 경을 읽으면 보고 듣는 사람 하나 없어도 스스로 천룡팔부가 있어 귀기울여 듣 고서 헤어지더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도 그렇게 열심히 수행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하루 저녁은 “그날 저녁을 먹고 앉았는데 그야말로 惺惺寂寂이라. 잠도 안 오고 아주 생 생하게 밤새도록 화두도 순조로웠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셈 인지 창문이 자꾸 밝아져 열어보니 날이 훤히 밝았어요. 하룻밤이 후딱 지나가 버린 겁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놓고 보니까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목단꽃이 봉우리를 활짝 피운 채 방긋방긋 웃고 있는 거예요. 웃음 소(笑)자, 꽃필 소자가 같은데 꽃이 나를 보고 웃으니 그 게 바로 拈花微笑라고 느꼈습니다.”라고 하셨다. 이때의 깨달음의 경지를 스님은 이렇게 읊 으셨다.
頓忘一夜過
時空何所有
開門花笑來
光明滿天地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이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
이런 철저한 求道者의 참모습을 보며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스승이 바로 큰스님이시다.
7) 보배처럼 귀중한 저서들 : 대문장가·저술가로서의 면모
1992년(64세) 출가 50년 기념으로 출간된 《범망경 보살계 해설》(전 5권)과 1976년(48세) 해인총림 율주로 계시면서 저작하신 《사미율의》 《불교와 계율》 등은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 왜색화’ 내지 말살정책으로 형편없이 무너져버린 ‘戒律’을 회복정립시키고 현재까 지도 그 어느 율장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활용되는 계율 관계 교과서가 되고 있다.
1991년(63세)부터 在家弟子인 효림출판사 사장 金鉉俊 거사를 통해서 출판된 《기도》 《생활 속의 기도법》 《윤회와 인과응보이야기》 《시작하는 마음》 《영원으로 향하는 마 음》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 《불자의 기본예절》과 법어집인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 묘한 향이로다》 등은 불교서적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계속 들어 있을 만큼 신도들에게 신 앙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어려운 불교를 알기 쉽게 풀이하였고 인과응보와 윤회전생을 강조함으로써 ‘계율’을 중 히 여기고 도덕적이고 건전한 일상생활을 하도록 커다란 감명과 깨우침을 주고 있다. 마치 옆에서 다정다감이 속삭이듯이 정감어린 문장과 이야기 속에서 큰스님의 廣濟衆生 원력에 머리가 숙여질 뿐만 아니라 계곡을 졸졸졸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처럼 흐르는 법문과 같이 수려하고 부담없는 명문은 대문장가로서의 면모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큰스님 유고가 되고만 《日陀和尙水月銘》은 큰스님의 박학다식과 대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책은 근세 方漢岩 큰스님을 비롯한 24분의 고승들의 비 문을 지으신 것과 事蹟碑文, 공덕비문, 각종 상량기 같은 隨緣文 등을 모아 큰스님의 百齋 법보시판으로 출판한 책이다.
또한 《기도》를 일본에서 350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적인 출판사 ‘法藏館’에서 일본어 로 번역 출판한 《不安으로부터 희망을 주는 기도》는 1999년 일본 우량추천도서 10권 중 제6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한국인의 저서가 일본 전국민에게 베스트 10 안의 서 적이 된 예가 처음이라 한다. 큰스님의 포교 일념과 대문장가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증명되 고 있다.
8) 生舍利가 계속 나온 큰스님
큰스님 입적 후에 제자들이 다비장을 수습한 결과 큰스님의 舍利 542과를 수습하였다. 당 연한 귀결이다.
큰스님께서는 이 舍利말고도 1996년(68세)부터는 연비를 했던 오른손에서 수시로 生舍利 가 나와 그후 1백여 과가 넘는다. 한 달에 1~3과씩 열반하시기 전까지 사리가 계속 출현하 였고, 그 사리 중 일부는 점점 자라거나 分身하여 여러 개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한다. 최 근 수십 년 이래 이렇게 많은 생사리가 출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큰스님의 높은 도력 과 평소의 수행력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9) 因緣業報와 輪廻轉生을 강조하신 큰스님
큰스님께서는 제자들이나 신도들에게 인과응보와 윤회전생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다. 법문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저서 속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구한말 개혁파의 우두머리로 ‘三日天下’로 실패한 김옥균의 후신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전생에 ○○○이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생에 ○○○이었다 고 하는 불가사의하신 말씀을 종종 해주셨다.
제자인 자혜 스님은 香谷 큰스님의 사형이었던 瞿翁 스님이 윤회한 것이다, 제자인 慧國 스님은 古鏡 노스님이 다시 오신 것이라고 주변 상황을 예로 들며 자주 말씀하셨다. 큰스님 의 깊은 신앙심과 도덕적 풍모를 더욱 존경하게 하는 평상시의 모습이셨다.
10) 慈悲와 救世 원력보살로서의 큰스님
우리 스님처럼 자애롭고 착한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경우 바르고 욕심 없고 베풀기를 좋아하셨던 일타 큰스님.
정녕 친부모보다 더 포근하고 자애로우셨던 스님.
(문도 대표 慧印 스님, 불일회보 2544년 1월, 14~15쪽)
스님의 일생은 오로지 수행과 중생교화에만 모아졌을 뿐, 종단의 높은 자리나 명예 등에 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스님은 항상 용서와 사랑으로 상좌들을 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격의 없이 대해 주셨던 스님의 친절한 미소는 나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慧印스님, 同 16쪽)
평소에 길가에 버려진 포장지도 주워 모으시는 스님이셨기에 벽장 가득히 잡동사니를 모 아 놓으셨는데 금고를 열어 보고는 비로소 스님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밀려왔습니다. 그 안 에는 불감을 조성할 때 남은 나뭇조각과 톱밥, 현금 백만 원, 오백 원짜리 동전 7개, 망치와 펜치, 드라이버 등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특히 불상을 좋아하셨지만, 불상 조성하고 난 톱밥 까지 금고 안에 넣어두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 제 방에서 뭔가를 부지런히 붙이시고 계셨습니다. 한 번 쓴 편지봉투를 일일이 다시 풀칠하여 또 쓸 수 있도록 만들고 계셨습니다. 스님을 시봉하면서도 편지봉투 사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스님은 사바세계의 연꽃이었고, 삶 자체가 법공양이셨습니다.
(상좌 慧國 스님, 신라문화원신문 기고 중에서. 2543. 12. 27판, 해인, 2000년 1월호, 21쪽)
스님을 찾아뵈면 언제나 맑고 밝은 미소로 따뜻하게 맞아주시며…… 성내지 않고 부드럽 고 깨끗한 참다움과 미묘한 향을 간직하신 자비보살의 화현이셨습니다.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이를 보면 아픈 몸을 일으켜서까지 자상하게 깨우쳐 주시고 또 깨우 쳐 주셨던 큰스님!
(김시남 부산여대 교수, 해인, 2000년 1월호 5쪽과 9쪽 인용)
자애롭고 자상하기 그지없어 자비보살로 추앙받았던 큰스님…….
하지만 스님의 내면은 오직 참선정진과 깨우침으로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입을 열면 광장 설(廣長舌)이셨지만 입을 다물면 화두삼매(話頭三昧)에 젖어들었습니다.
보통사람이라면 한 번도 극복하기 어려운 대수술을 여덟 번씩이나 받고도 능히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화두삼매 속의 스님을 저승사자가 찾을 수 없어 그냥 갔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 각합니다.
남을 대할 때는 자비보살이요 자신에게는 철저한 선수행승이셨던 일타 큰스님! 그 미소와 법문과 실천으로 보여 주신 아름다운 모습들은 언제까지나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인생의 나 침반이 되고 깨우침을 주시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김현준 불교신행연구원장, 상동, 14~15쪽 인용)
생전에 정 많으시고 사려가 깊으신 스님―.
생전의 스님 처소는 늘 많은 사람으로 북적대고 쉴 틈이 없었지만, 한번도 싫은 내색 보 이지 않으시고 만나는 사람마다 편안하고 인자하게 대해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방생 갔을 때 큰 고기를 가리키며 사려고 하니 스님은 “가만히 있어 봐라.”며 먼길 차 비까지 다 털어 죽어가는 고기까지 몽땅 사서 “죽고 사는 것은 제 명이지만 살려주는 마음 엔 차별이 없어야 한다.”며 놓아 주실 때 저는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이대원성, 재가제자, 상동, 16쪽)
큰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다음 생에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 스님이 되어 전세계 사람 을 교화하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미국 땅에서 가셨습니다. “나고 죽 음은 공중 달 흐름이요, 동쪽 계곡에 해 저물면 서쪽 해안에 달 밝으리(生死出沒 月轉空中 東谷日陀 西岸月明)”라며 미리 일러주셨건만, 미욱한 저희들은 오늘에사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性觀 이인제, 弔辭中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