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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답사 <1> - 190716 - 대능원 (황남대총, 천마총)

화엄행 2019. 7. 18. 12:42

경주 답사 <1> - 190716 - 대능원 (황남대총, 천마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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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皇南大塚)

고대사유적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능.   돌무지덧널무덤·쌍무덤.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능.돌무지덧널무덤·쌍무덤.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황남동고분군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40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만 2,908㎡이다. 이 고분군 내에 있는 황남대총의 일련번호는 ‘황남동 98호분’이다. 황남대총은 1973년 7월과 1975년 10월에 문화재관리국 조사단이 발굴조사하고, 1980년 문화재위원회 회의에서 붙여진 별칭으로 황남동에 소재한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의미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현재 외형이 복원되어 있는 황남대총은 2개의 원분(圓墳)이 남북으로 연접된 표형분(瓢形墳)으로 동서 지름 80m, 남북 지름 120m, 남분 높이 23m, 북분 높이 22m에 이르는 신라 최대의 봉토분(封土墳)이다. 황남대총 남분의 피장자는 남자, 북분의 피장자는 여자이며 신라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봉토와 봉토의 기저부(基底部) 주위에 쌓은 바깥 둘레돌[護石]의 남·북분 연접상태로 볼 때, 먼저 남분이 축조되었고 뒤에 북분이 남분에 잇닿아 축조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북분 각각 봉토의 중심부에 덧널과 돌무지[積石]가 설치된 고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두 고분 모두 돌무지 부분 내부에서 나무기둥을 줄지어 세웠던 기둥구멍과 기둥 사이를 연결했던 횡가목(橫架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목조가구(木組架構)를 먼저 설치하고 그에 맞춰 돌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돌무지 부분 안에 설치된 이러한 목조가구는 고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을 계보상으로 북아시아 덧널무덤과 더욱 가깝게 접근시키는 중요한 근거로서 주목받고 있다.
남분의 돌무지 부분 안에는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이 동서로 배치되어 T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장축방향은 으뜸덧널이 동서로, 딸린덧널은 남북으로 두었다.
으뜸덧널은 원지표를 약 45㎝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한 바닥 위에 세운 내외 2중의 덧널으로 되어 있었다. 바깥덧널[外槨]은 동서 길이 6.5m, 남북 너비 4.1m, 높이 약 3.5m이고, 안덧널[內槨]은 동서 길이 4.7m, 남북 너비 2.3m, 높이 약 1.8m이다. 안·바깥덧널 사이에는 잔자갈이 채워져 있었다.
안덧널의 가운데에는 내외 이중의 널[木棺]이 동서로 놓여 있었다. 바깥널[外棺]은 동서 길이 3.6m, 남북 너비 1m, 높이 약 0.8m이다. 안에 칸막이를 세워 동쪽은 껴묻거리 수장부[副葬品收藏部]로 되어 있었고, 서쪽에는 안널[內棺]이 안치되어 있었다.
안널 안에서는 60세 전후의 남자로 판단되는 피장자의 유골 일부가 출토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피장자가 착장했던 금동관·금제관드리개[金製冠垂飾]·금제목걸이·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가슴장식, 금제허리띠[銙帶]와 띠드리개[腰佩]등의 장신구, 금동장고리자루큰칼[金銅裝環頭大刀]1개가 출토되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에는 윗부분에 금제관식·금동관·은관(銀冠)·은모(銀帽)·금동신·은제허리띠와 띠드리개·금은반지·금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10여 개의 금은장고리자루큰칼, 은제정강이가리개[銀製脛甲]가 놓여 있었다.
그 밑에는 각종 금속용기, 칠기(漆器), 봉황머리모양병[鳳首形甁]등의 유리용기 등이 담겨 있었다. 바닥부분에는 쇠솥과 각종 토기들이 놓여 있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윗부분의 바깥널 뚜껑 위에도 금동제 정강이가리개, 비단벌레날개로 장식된 금동허리띠 등이 놓여 있었다. 바깥널과 안덧널 사이의 잔자갈층 위에서도 각종 토기와 철기가 출토되었다.
으뜸덧널 내부에서는 순장(殉葬)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여자의 유골 일부도 발견되었다. 바깥덧널의 뚜껑부분에도 금제귀걸이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토기, 철제무기, 마구류가 배치되어 있었고, 새무늬[鳥文]가 새겨진 청동제거울 1점도 출토되었다.
딸린덧널은 으뜸덧널과 3m 두께의 냇돌벽을 사이에 두고 그 서쪽에 설치되었으며, 규모는 남북 길이 5.2m, 동서 너비 3.8m, 높이 약 1.3m이다. 흙바닥에는 각종 껴묻거리가 여러 겹으로 쌓여 있었다. 딸린덧널 안에서는 7구분의 안장틀[鞍橋]과 거기에 부속된 각종 마구류, 300여 점의 철제무기와 이기(利器), 1,500여 점의 각종 토기가 출토되었다.
그 중 안장틀을 비롯한 1세트의 마구는 모두 용(龍)무늬가 투조된 금동판 밑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한 호화찬란한 것이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쇠투겁창[鐵矛]는 형식이 10여 종이었다. 쇠스랑·가래끝 등의 농기구도 30여 점 포함되어 있었다.
북분은 남분의 북쪽 끝 봉토 일부를 절개하고 축조한 돌무지 부분 가운데에 장축을 동서로 둔 덧널이 하나만 설치되어 있었다. 동서 길이 6.8m, 남북 너비 4.6m, 높이 약 4m 규모의 외덧널[單槨]로 되어 있는 덧널의 바닥은 지반을 약 50㎝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되었다.
덧널 안에는 동쪽을 제외하고 잔자갈로 쌓은 너비 80㎝, 높이 55㎝의 ‘ㄷ’자형 석단(石壇)이 돌려지고 그 안에 널이 놓여 있었다. 널은 남분과 같은 구조의 이중 널으로 길이 3.3m, 너비 80㎝, 높이 약 80㎝였다.
바깥널의 서쪽 부분에 안치된 안널 안에서는 동쪽에서부터 금관과 3쌍의 금제관드리개, 금구슬과 유리구슬로 된 목걸이, 금제허리띠와 띠드리개, 11개의 금팔찌, 12개의 금반지 등 피장자가 착장했던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안널에서는 장신구만 출토되었으며, 허리띠의 좌우 양편에 5쌍의 귀걸이형 장신구가 띠드리개와 함께 수장되어 있어 이채로웠다.
바깥널의 동쪽 부분인 껴묻거리 수장부에서는 윗단에서 각종 장신구, 그 아래에서 금은장고리자루큰칼, 타출무늬은잔[打出文銀杯]등의 금속용기, 4개의 유리잔, 중국 육조시대의 흑갈유자기소병(黑褐釉磁器小甁) 등이, 바닥부분에서 쇠솥과 각종 토기, 그림이 그려진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되었다. 타출문은잔
덧널 뚜껑부분에도 각종 장신구, 토기,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마구류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북분의 출토유물은 남분에 비해 장신구가 월등히 많은 반면, 무기와 마구가 적었다. 또한 피장자가 큰칼을 착장하지 않은 대신 덧널 내에서 가락바퀴가 출토되어 피장자가 여자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에서 ‘부인대(夫人帶)’의 명문(銘文)이 있는 은제허리띠의 끝장식이 출토된 것도 이 고분의 피장자가 여자였음을 뒷받침해준다. 결국, 이 표형분은 부부총(夫婦塚)임을 알 수 있다.
남·북분 모두 봉분 정상부에 마구류를 위주로 하는 일괄유물이 매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분조성 마지막 단계에서 의도적으로 매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의 출토상태는 고분 조성 당시 덧널 내부, 덧널 상부, 봉분 정상부 등 당시의 장의절차에 따라 단계적으로 부장행위가 이루어졌던 것을 보여 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황남대총은 그 형태가 표형분에 속하는 부부총으로서 어울무덤[合葬墳]이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신라에 있어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 상한연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발굴조사자는 무덤덧널 형식의 변천, 고식(古式) 마구(馬具)의 등장시기, 신라토기의 편년, 북분에서 출토된 중국제 흑갈유자기소병(黑褐釉磁器小甁)의 매납시기 등을 근거로 남분은 4세기 중엽경, 북분은 4세기 말∼5세기 초경으로 추정하였다.
이에 반하여 고구려남정설이라는 고대사 연구성과를 근거로 삼는 연구자나 중국에서의 고식 마구 출현에 대한 다른 해석을 근거로 삼는 연구자들은 황남대총 남분을 5세기 중·후반, 북분을 6세기 초로 편년하기도 한다. 이밖에 또 다른 해석으로는 사료상에 나오는 왕세계와 혼인관계 등을 비교하여 남분의 피장자를 나물마립간(내물마립간)이나 눌지마립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
















경주 황남리 고분군 중 천마총
이칭
황남동 제155호분
분야
고대사
유형
유적
성격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
건립시기
신라시대(6세기 초엽)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경주역사유적지구 대릉원지구
소유자
경주시
시대
고대-삼국-신라
성격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
건립시기
신라시대(6세기 초엽)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경주역사유적지구 대릉원지구
소유자
경주시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세계문화유산.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천마총(天馬塚)은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에 조성한 고분공원[大陵苑] 안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황남동 제155호분으로 관리되어 왔다. 당시 정부의 경주종합개발계획에 의거 황남동 제98호 고분의 내부를 공개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제98호분은 한국 최대형 고분이므로, 이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이 고분보다 소형의 고분을 발굴하여 경험과 정보를 얻은 후, 제98호분을 본격적으로 발굴한다는 방침을 세워 제155호분을 먼저 발굴하게 되었다. 1973년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조사단에 의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155호분 천마총도 대형에 속하는 고분이고, 당시까지 발굴조사된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거의 완형에 가까운 고분이어서 신라의 왕릉급 대형고분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제공하였다.
고분이 소재한 곳은 경주분지 내의 거의 중심지이며, 주위는 논과 밭, 그리고 민가가 밀집되어 있는 평탄지에 속하고, 서천(西川)과 남천(南川)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지형으로 토질은 사질토(沙質土)와 냇돌로 이루어졌다. 고분의 형식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분류된다.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金冠)·금제관모(金製冠帽)·금제과대(金製銙帶)가 각기 국보 제188호·제189호·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분구(墳丘: 封土)
고분의 규모는 분구 높이 12m 70cm, 분구의 바닥지름 47m인 원형의 봉토분(封土墳)이다. 분구의 자락에는 돌로 쌓아 만든 호석(護石)이 돌담 형식으로 돌려 있다. 호석은 현 지표로부터 1.2m 높이에 있고, 직경은 약 20cm 내외의 냇돌[천원석(川原石)]를 사용하였다. 분구의 토층은 황갈색 점토를 지표에서 75cm까지 쌓고, 그 위부터 4m 높이까지는 황갈색 흙과 직경 약 10cm 정도의 자갈이 섞였다. 분구의 4m 이상부터 정상부까지의 적토(積土)는 흙과 자갈이 혼합된 층인데, 이 층은 내부 중심을 향해 경사지고 높이 올라갈수록 경사도가 급해졌다. 적석부(積石部) 상위 봉토의 두께는 6.2m이다.
적석부는 냇돌로 형성되었으며, 상단은 동서 15.5m, 남북 13m의 타원형이었고, 그 중앙에 동서 8.8m, 남북 7.5m의 함몰부(陷沒部)가 있다. 적석부 표면은 분구 정점에서 2.6m 높이까지 약 15∼20cm 두께로 점토층이 피복되었고, 외면의 경사도는 50∼60° 정도로 다소 급한 편이다. 적석부의 측벽 바닥의 너비는 동서에서 각각 8m 50cm이고, 전체 적석부의 바닥 직경은 23.6m이고, 높이는 6m로 적석부 위 봉토 두께와 같다. 적석부의 평면은 대체로 방형(方形)을 띠고 있는데, 전체 형상은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으로 마치 고구려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비슷하다. 적석부의 바닥은 목곽(木槨)의 바닥보다 38∼39cm 정도 낮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부시설
목곽부(木槨部)는 분구의 중심부 적석의 하부에 설치되었고, 무덤의 핵심부를 이룬다. 규모는 장변 6.6m, 단변 4.2m, 높이 약 2.1m(복원치)로 벽과 천정이 목재로 짜여진 목실(木室)이다. 목곽의 밑은 두께 40cm를 인두대의 냇돌과 자갈을 깔아 상면을 고르게 하고, 그 위에 목재로 관대를 마련하였다. 벽면은 판재가 아닌 통나무[原木]를 통째로 사용하였는지 또는 쪼갠 것을 사용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벽면이 서로 접하는 네 귀퉁이는 귀틀짜기 식으로 결구(結構)하였다.
그리고 당초에는 목곽의 전체에 붉은 옻칠을 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그것은 목곽의 상면(床面) 판재를 붉은 옻칠을 하였고, 또 목곽 주위의 냇돌에서 붉은 옻칠 흔적이 다수 발견되는 점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목곽의 바닥 유물층에 도달하기 직전에 쇠막대기[환두철봉(丸頭鐵棒)] 2개가 동서 길이 2.2m, 남북 너비 1.2m의 범위로 발견되었는데, 이 범위가 천정부에 설치한 출입문[開口部] 시설이고, 쇠막대기는 문의 빗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목곽은 목실 형식이고, 이 출입문을 통하여 관과 궤(櫃)를 격납하고, 작업 인부(人夫)가 출입한 것으로 보인다.
목곽 내에는 목관과 껴묻거리수장궤[副葬品收藏櫃]가 안치되었는데, 목관은 목곽의 중심에 동서 축선에 길이로 놓이고, 그 동쪽에 수장궤를 남북으로 놓아 관과 T자형을 이루게 하였다. 목관의 크기는 유물의 배치 등으로 미루어 보아 동서 길이 2.2m, 남북 너비 80cm로 추정된다. 수장궤는 남북 길이 1.8m, 동서 너비 1m, 높이 약 80cm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껴묻거리(副葬品)
고분 내에서 유물이 출토된 곳은 ①분구 내부, ②목곽 상부, ③목관의 주위와 내부, ④껴묻거리수장궤 안 등 4곳이다. ①과 ②의 유물은 껴묻거리라기보다는 고분축조와 관련된 의식용(儀式用) 유물이라고 할 수 있고, ③과 ④의 유물이 시체매장과 수반된 유물로 진정한 의미의 껴묻거리, 이른바 부장품이다.
①에서는 분구 정상부의 표토 아래 1.9m 지점에서 마구류(馬具類) 일괄유물과 유자철기(有刺鐵器) 철제낫·철모·유리옥 등이 발견되었다. ②에서는 적석부의 함몰 부분 아래의 목곽 측벽 위에서 철제 공부(銎斧)와 일렬로 배치된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남측 벽에서 금제태환이식(金製太環耳飾) 2쌍, 금제세환이식(金製細環耳飾) 3쌍이 출토되었다.
③에서는 우선 목곽 주위에서는 환두철봉(環頭鐵棒) 2개, 관모(冠帽)·과대(銙帶) 및 요패(腰佩)·옥류(玉類) 등 장신구류, 자작나무껍질[白樺樹皮]관모, 은제이형요패(銀製異形腰佩), 은제우각형구(銀製牛角形具), 대형은제요패(大形銀製腰佩) 2조, 은제과판(銀製銙板) 32개, 대소(大小) 옥류 5,000여개 등 장신구와 대형 철정(鐵鋌), 소형 철정, 대도(大刀), 측도부은도(側刀付銀刀), 삼지모(三枝矛), 유경삼각형철촉(有莖三角形鐵鏃), 금은장삼환대도(金銀裝三鐶大刀) 등 무기류와 철제등자(鐵製鐙子), 교구(鉸具), 금동제복륜(金銅製覆輪), 금동제선형구(金銅製扇形具) 등의 마구류가 발견되었다. 목관 내부에서는 금관(金冠)은 삼수지형입식(三樹枝形立飾) 3개와 녹각형입식(鹿角形立飾) 2개 및 수식이 달려 있었다. 금제세환이식, 목걸이[頸飾], 금제과대(金製銙帶), 금제팔찌[金製釧], 은제팔찌[銀製釧], 금제가락지[金製環], 금동투조조형수식(金銅透彫鳥形垂飾) 등 장신구와 봉황두식금동제대도(鳳凰頭飾金銅製大刀) 등이 출토되었다.
④에서는 금제조익형관식(金製鳥翼形冠飾), 금제나비형관식, 금동관(金銅冠), 금동투조금동관모(金銅透彫金銅冠帽), 금동경갑(金銅頸甲), 금동투조신발[金銅透彫靴] 등 장신구류와 은장복륜(銀裝覆輪), 청동제마탁(靑銅製馬鐸), 금동투조판식죽제장니(金銅透彫板飾竹製障泥), 자작나무껍질천마도장니[白樺樹皮天馬圖障泥], 서조도채화판(瑞鳥圖彩畵板), 기마인물도채화판(騎馬人物圖彩畵板), 금동판피말안장[金銅板被鞍橋], 목심금동판피발걸이[木心金銅板被鐙子], 금동경판(金銅經板), 말재갈[馬銜], 운주, 옥개형금동구 등과 청동제초두(靑銅製鐎斗), 철제솥[鐵製鼎], 은제대합(銀製大盒), 금동제대합(金銅製大盒), 금동제소합(金銅製小盒), 금동제대형고배(金銅製大形高杯), 우각형금동잔(牛角形金銅盞), 국자형칠기, 칠기잔류(漆器盞類), 찬합칠기(饌盒漆器), 토제구슬[土製玉] 159개 등 마장식구류(馬裝飾具類)와 기기류(器機類)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상의 유물의 수량은 장신구류 8,767개, 무기류 1,234개, 마구류 504개, 용기류 226개, 기타 796개, 총합 11,526개이다.
위의 껴묻거리 중에서 금관은 실용관이라기보다 의식용관(매장용 등)이라 할 수 있고, 금모(金帽)는 실용관이라 할 수 있다.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의 천마는 비상하는 모습으로 고구려벽화의 무용총(舞踊塚) 수렵도(狩獵圖)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천마의 말꼬리와 천마 주위의 당초문(唐草文)과 운문(雲文) 등은 고구려벽화와 양식적인 면에서 분명 유사한 점이 많다. 신라 지역의 거의 유일한 영주 태장리의 고분벽화와 함께 고구려벽화고분의 영향을 잘 나타내 준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고분벽화가 별로 없는 신라의 회화자료로서 천마총의 천마도는 매우 귀중하다고 하겠다. 근자에 천마에 대하여 기린이라는 이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장법(葬法)
천마총은 분구의 지름이 47m나 되고 높이도 12.7m가 되는 거대고분에 속한다. 고분의 형식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장법은 바로뉘어묻기[앙와직지신전장(仰臥直肢伸展葬)]를 채택하였고, 홀로묻기[單葬]이다. 순장(殉葬)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다만 발굴보고서에서는 분구 중에서 발견된 마구는 말 순장의 전통을, 목관 위의 세환이식(細鐶耳飾)과 수장궤(收藏櫃) 위의 태환이식(太環耳飾)은 남녀 순장의 전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경우『삼국사기(三國史記)』지증왕(智證王) 3년조에 순장금지 기사가 있어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점과 많은 고분에서 출토되는 이식의 과다한 수량을 해석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그리고 목곽(장변 6.6m, 단변 4.2m, 높이 2.1m)의 공간이 그 안에 안치한 목관(동서 2.2m, 남북 80cm)과 수장궤(동서 길이 1m, 남북 너비 1.8m, 높이 약 80cm)가 들어가고도 과도하게 넓은 공간이 남아 있는 점, 목곽 안벽에 잇대어 돌담이 돌아가면서 축조되었고 다시 목관의 주위에도 석단이 돌려 있는 점, 돌담과 석단 그리고 목관과 수장궤 상면의 공간 등 여러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목곽은 적석부 봉토와 같은 단순한 목관 보호의 외피시설의 기능만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이 목곽은 당초 목관을 안치하고 빈전(殯殿)으로 사용하다가 빈장(殯葬)기간 후에 적석과 봉토를 올려 분구를 완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목곽을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지상에 묘단을 축조하고 그 위에 설치한 점은 더욱 더 빈전이었을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피장자(被葬者)와 연대
이 고분의 축조 연대에 관하여 잠시 말하여 두고자 한다. 목관편(木棺片)의 방사성탄소측정(원자력연구소 검사) 연대는 서기 340년±70년이므로 축조 연대는 서기 270년∼410년 사이에 들어간다. 이 연대는 다소 이른 감이 드는데, 그것은 아마도 목관재료 자체의 연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발굴보고서에서는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과 지증왕을 이 고분의 피장자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분지에서의 돌무지덧널무덤이 지증왕대까지 축조되고, 그 다음 법흥왕(法興王)대부터는 서악동 무열왕릉(武烈王陵)의 후방 왕릉군(王陵群)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황남동에서의 돌무지덧널무덤의 연대는 6세기에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또 천마총의 묘단·목곽부·적석부·분구 등 구성요소의 규모가 합리적 비례를 취하고 있고, 목곽·수장궤 및 천마도·금관이식 등은 다른 무덤에서 볼 수 없는 발달된 양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황남동에서는 최후 단계인 6세기 초의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잠정적으로 지증왕의 왕릉으로 추정하여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