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泉隱寺, 鰲山

화엄행 2014. 11. 17. 13:08

泉隱寺

http://www.choneunsa.org/chun_history.html

 

 천은사의 역사

 

방제일선찰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지리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사찰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절은 지리산 가운데서도 특히 밝고 따뜻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지리산의 높고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절 옆으로 펼쳐지고 우람한 봉우리가 가람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워낙 광대한 지리산자락이라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지금은 노고단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절앞까지 이어져 있고 화엄사까지 직통하는 도로가 놓여 있어 어렵지 않게 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산문과 일주문을 지나 독특하고 운치 가득한 수홍문을 건너 절을 찾는 즐거움은 아주 특별합니다. 지리산의 빼어난 산수와 풍광 그리고 그 속에서 불법의 진리를 만나는 것은 더 없는 보람일 것입니다.


천은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이다. 신라 중기인 828년(흥덕왕3)에 인도의 덕운(德雲) 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산을 두루 살피던 중 지리산에 들어와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은사 중건 당시 지어진 극락보전 상량문에 의하면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 희종 건부2년(875년)에 연기(도선국사)가 가람을 창건하였고 후에 덕운이 증수하였다."

<唐 僖宗 乾符二載 緣起相形而建設 德雲因勢而增修.....>"


그런데 일제시대에 간행된 구례읍지에는 이 기록에서 창건주 연기는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의 별호인데 이것을 유래로 잘못해석하여 도선국사 이후의 스님인 덕운을 창건주로 왜곡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이 도선국사가 창건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 유학시 일행선사로 부터 3천8백 비보사찰을 중건 혹은 창건토록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신라 조정에 긴밀히 모의하여 신라 국토 곳곳에 사찰과 탑을 건립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천은사도 바로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게 볼때 인근 화엄사의 창건연대(544년)와 비교해 볼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기 보다는 중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창건주에 대한 기록은 밝혀진 바 없어 그 시기와 유래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절은 더욱 번성하여 충렬왕 때(1275~1308)에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지정되었다.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수도자가 진리의 광명을 터득하는 수행처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고,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등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후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610년(광해군2)의 일이다. 당시 절의 주지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소실된 가람을 중창하고 선찰로서의 명맥을 이끌어 나갔다.
뒤이어 1679년(숙종5)에도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했는데, 이로부터 절이름을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바꾸었다.


1715(숙종41)에는 팔상전에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고, 1749년(영조25)에는 칠성탱화를 조성하였다. 1774년(영조50) 5월에는 혜암선사(惠庵禪師)가 그 전 해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하였다. 혜암선사는 수도암(修道庵)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남원부사 이경륜(李敬倫)에게 도움을 구하고 산내의 여러 사찰과 힘을 합쳐 2년간에 걸친 중창불사를 원만히 이루어냈다.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모습이니 혜암선사의 중창은 절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은사의 설화와 전설

 

절이름이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으므로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고 한다

 

 

 

 

 

 

 

 

 

 

 

 

 

보물 제924호 아미타 후불탱화

천은사 극락보전 아미타후불탱화는 세로360㎝, 가로277㎝ 크기의 삼베바탕에 짙은 녹색과 적색으로 채색되었는데, 그 구도와 기법등이 매우 훌륭하고 보존 상태가 좋아 현재 보물 제924호로 지정되었다. 제작은 1776년(영조52)에 극락보전을 지금의 모습으로 중수하면서 신암(信庵)스님을 비롯한 14명의 금어 스님이 조성하였다.


구도는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광경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놓은 듯 아미타불을 비롯하여 8대보살, 10대제자, 사천왕, 호법신중 등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더욱이 각각의 불보살과 신중 등에는 옆에 그 명칭이 적혀 있어 불화를 조성한 화사(畵師)의 세밀한 배려와 독창성을 엿보게 된다. 곧 중앙 아미타불의 광배에는 ‘광명보조수명난사사십팔대원무량수여래불(光明普照壽命難思四十八大願無量壽如來佛)’이라 적었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에도 각각 ‘문성구고(聞聲救苦)’, ‘섭화중생(攝化衆生)’이라는 설명을 붙여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고 모든 이들을 교화시킨다는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본존 무량수불의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금강장(金剛藏)보살과 제장애(除障碍)보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짝을 이루고 있다. 관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이들 8대보살은 곧 「8대보살만다라경」등의 밀교 경전에서 나온다고 한다. 또한 화면 하단부의 좌우로는 다양한 지물을 지닌 사천왕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마귀를 물리치는 험악한 인상이 아니라 약간은 희극적인 모습을 지녀 친근감을 갖게 한다. 아미타불의 대좌 아래로는 ‘금리불존자(金利佛尊者)’라는 비구가 무릎을 꿇고 법문을 청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비구가 바로 10대제자 가운데 한분인 사리불존자이다.
이처럼 천은사 아미타후불탱화는 복잡한 극락세계를 모두 나타내면서도 보는 사람의 이해를 돕도록 각각의 존명을 적고 있다.
대체로 16세기의 설법도 둥근 원형의 구도를 지녔으나, 이후에는 화면 가득히 온갖 불보살과 신중을 복합적으로 배열하는 군도형식(群圖形式)의 불화로 변화한다. 이같은 군도형식의 불화가 가장 안정적이고 전형적으로 나타난것이 바로 천은사 극락보전 아미타후불탱화라 할 수 있다.


천은사 아미타후불탱화 보물 제 924호로 지정된 이 탱화(幀畵)는 삼베바탕에 진한 채색을 사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1776년에 제작되었다. 화면은 중앙의 사각대좌 위에 앉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보살과 사천왕, 10대제자 등이 둥글게 배열되어 있다.
각각의 불보살들에는 광배의 한쪽에 붉은색의 사각형 칸을 만들어 흰글씨로 그 명칭을 적고있어서 아미타불화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중앙의 본존은 화려한 금색 꽃무늬 단이 대진 붉은색 가사를 입고 있는데 가사에는 금색무늬가 일정하게 그려져 있다. 얼굴은 넓고 눈은 가늘며 입은 작고 입주변과 턱에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머리는 나발로 육계가 적고 중간에 초승달 같은 중간계주가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얼굴의 묘사는 다른 보살상들에도 거의 흡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여러색선의 원형 두광과 신광을 지니고 있는데 두광은 진한 녹색으로 처리하고 신광은 밝은 녹색을 사용하고 있다. 신광에는 향우측에 「광명보조수명난사사십육대원무양수여래불(光明普照壽命難思四十六大願無量壽如來佛)」이라고 씌여있어서 아미타불 중 무량수불임을 알 수 있다.
대좌 앞에 향우측 보살은 화려한 보관과 영락장식을 갖추고 정면을 향해 서 있다. 보관에는 화불이 그려져있고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어서 관음임을 알수 있는데 두광에 문성구고관세음보살(門聲救苦觀世音菩薩)이라고 되어 있다.
향좌측의 보살은 관음과 흡사한 얼굴에 천의를 걸치고 있는데 보관에 정병이 그려져 있고 손에는 경책이 들려져 있는 대세지보살이고 두광에 섭화중생대세지보살(攝化衆生大勢至菩薩)이라고 되어있다. 관음의 윗쪽으로 합장을 한 세보살은 문수보살, 금강장보살, 미륵보살이고 대세지보살의 윗쪽으로 합장을 한 보살은 보현보살, 연봉우리를 들고 있는 보살은 제장대보살이며, 승형머리에 석장을 든 보살은 지장보살이다.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외측에는 각각의 지물을 들고 둥근 눈과 거친 수염을 지닌 사천왕이 배열되어 있다.
향우측 하단에 칼을 비스듬하게 잡고 있는 동방천왕, 그 위로 비파를 들고 있는 북방천왕, 향좌측 하단에 여의주와 용을 잡고 있는 남방천왕, 그 위에 보탑과 창을 들고 있는 서방천왕이 자리잡고 있다. 8대제자는 보살들의 윗쪽에 좌우 네분씩 거의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각각의 명칭은 없다. 특이하게 대좌 아래쪽에 한 비구가 무량수불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 스님의 두광에 사리불존자(舍利佛尊者)라고 적혀있다.
사리불존자는 부처님의 10대제자중의 한 분이어서 이 불화에는 9분의 제자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화면의 좌우 하단에는 불화기가 적혀있지만 현재 봉안되어 있는 상태로는 조사가 불가능한 형편이다.


현재까지 불화기 전체를 소개한 책도 없어서 화기 전체를 그대로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 내용을 어느정도 알 수 있는 글을 첨부하기로 하겠다.


"화면 좌우 하단부에는 주색을 칠한 네모난 화기난을 두었는데 향우측 화기관을 보면 탱화의 제작년대와 불화의 명칭이 적혀있고 시주자 및 시명, 사명 등이 보인다. 이어서 이 불화를 그린 화사(금어)들의 이름과 이 불화에 직접 참가한 승려(僧侶)들과 그 직명(職 名)을 열거하고 있다.
향좌측 화기난에는 이 불화를 조성할 때 시주한 시주자들의 명단을 적고 있어 이 불화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 화기와 내용을 보면 1776년 8월 남원 천은사 대법당에 미타회를 조성하여 봉안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이 불화는 분명한 아미타불탱화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주상전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아울러 대시주질(大施主秩)을 만들어 삼십육명에 이르는 비구와 일전 신도들의 시주를 받고 있다. 이어서 록화질에는 이 불화를 그릴 때 염불[송주(誦呪)]을 한 사명의 비구와 완성 후 이 불화를 증명한 삼명의 승려(증사)들의 이름을 열기하고 있는데, 이 록화질에는 주목되는 점은 이 불화를 그린 화사(畵師)들을 명기한 곳이다.
화사를 보통 금어라고 하는데 금어로서 신암 등 십사명이 참가하고 있다.


고려 불화와 달리 많은 화사들이 공동 제작하였다는 점이다. 향좌의 화기난을 보면 십오명 가량의 또다른 시주자들과 승려(僧侶)의 명단이 나열되고 맨 끝부분에는 '이 공덕(功德)이 누구에게나 두루 미쳐 모든 중생(衆生)이 다 함께 불도 (佛道)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라고 끝맺음을 하고 있다."

(홍윤직 "탱화 및 불상탱"『동산문화재자료보고서』1987. 3. 문화재관리국)

 

 

 

 

 

 

 

 

 

 

 


 

鰲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