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암사 3충석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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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증대사 적조탑비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68186&cid=43667&categoryId=43667
신라 말기 선종 불교의 아홉 개 대표 종파였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 지증대사(智證大師)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 받침인 귀부(龜趺)와 비석 머리인 이수(螭首) 등이 전형적인 신라 말기의 탑비 조성 양식을 보여주는 데다 비문도 온전히 남아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 비석은 최치원이 지은 다른 비문들인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국보 제8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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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증대사 적조탑 (智證大師 寂照塔)
이 탑은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부도로 9세기 경에 팔각원 단형을 기본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여러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 부의 장신 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되어 당시 신라부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탑의 높이는 3.41m이고 지대석 너비는 2.28m의 당당한 탑이다. 전체적으로 장중하면서 당당한 모습에 그 앞에 서면 누구나 숙연해짐을 느낀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75901&cid=46710&categoryId=46710
이 승탑은 신라 선종 9산문 중 희양산문의 시조인 지증대사의 묘탑으로 기본평면은 팔각당형을 이루고 있다.
기단의 바닥돌은 사각형인데 하대의 괴임턱부터는 탑의 모든 부분이 팔각형의 평면으로 되어 있다.
하대는 모두 3단으로 밑면에는 각 면에 안상을 내고 사자상을 새겼으며 중단은 구름무늬를 입체적으로 돌리고 상단에는 가릉빈가상을 배치하고 있다.
중대에는 각 면에 유려한 곡선장식의 안상을 내고 여기에 공양인물상,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 사리합 등을 새겨 넣었다.
상대는 밑면에 꽃무늬장식의 연꽃무늬를 돌리고 윗면에는 난간모양의 탑신괴임대를 세웠다.
탑신부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문틀, 자물통, 문고리 등을, 그 좌우 면에는 사천왕상, 나머지의 양 옆면에는 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지붕돌은 매우 넓으며 서까래, 기왓골 등을 표현하고 처마끝은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추녀마다 귀꽃이 솟아 있다.
상륜부는 지붕 끝에 놓인 팔각의 연꽃무늬 대석을 별도의 돌로 짜고
그 위로 상륜부재를 받치고 있는데 노반, 복발, 보주 등이 남아 있다.
이 탑은 기단부의 하대가 매우 강조되어 있고 탑신부의 지붕돌이 넓은 특징을 지니고 있어,
승탑의 조형이 9세기 말로 가면서 조형양식이 서서히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지증대사영탱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00785&cid=40942&categoryId=33380
智證大師 (824 ~ 882)
호는 도헌(道憲), 속성은 김씨이다.
9세 때 아버지가 죽자 출가하려 했으나 어머니가 너무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부석사 범체(梵體)에게 배우고, 840년(문성왕 2) 경의(瓊儀)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혜은(慧隱)의 법을 이어 사자산문의 개조 도윤(道允)의 마지막 대가 되었다.
계람산 수석사에 머물면서 경문왕의 초빙을 여러 차례 거절하였고,
864년(경문왕 4)에는 현계산 안락사로 옮겨 교화활동을 하였다.
뒤에 희양산에 절을 지었는데 881년(헌강왕 7) 봉암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882년(헌강왕 8) 나이 59세, 법랍 42세로 입적했다.
헌강왕은 지증대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호는 적조이며,
지증대사적조탑(보물 137)과 최치원이 비명을 지은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138)가 봉암사에 남아 있다.
문하에 양부와 계휘가 있었으며, 양부는 법을 이어 구산선문의 하나를 세웠다.
희양산문은 양부의 제자인 긍양(兢讓)이 봉암사를 재건한 후 크게 발전했다.
曦陽山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568&cid=40942&categoryId=33076
법맥을 이은 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양부(楊孚)―남종선을 받아들인 긍양(兢讓)―형초(迥超)―종풍(宗風)을 세운 지공(志空)으로 이어졌다. 계보는 중국 선종의 4조 도신(道信)의 법을 받은 법랑(法朗)―북종선 나중에는 절 이름이 산문 이름이 되어 봉암산문(鳳巖山門)으로도 부른다. 후삼국 통일 전야인 935년에 긍양이 희양사에 도착했을 때 봉암사는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고 증언하고, 또한 그의 새김글에는 할아버지격의 도헌이 쌍계사 혜명에게 남종선을 받은 것으로 고쳐져 있다.
이러한 법계(法界) 변조는 직접적으로는 왕건의 고려 건국에 따른 새로운 종교와 정치관계의 재편성에 이유가 있었으며, 간접적으로는 남종선 일색인 당시 불교계의 분위기를 감안한 데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혜능(慧能)의 남종선이 고려 초의 선문을 주도하였음을 반영하는 법계 변조에도 불구하고 희양산문의 저류에는 북종선의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봉암사의 소진(燒盡)과 긍양의 법계 변조를 통해 후삼국시대의 정책방향이나 사회변동이 매우 역동적이었음과 함께, 후삼국 말기의 고려-후백제 전쟁에서 봉암사가 차지하는 지정학적 중요성과 왕건의 고려 건국에 즈음한 대불교정책의 한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도헌의 행적과 긍양의 초기 공주생활에서 9세기 중반부터 민(民)의 성장이 일정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러한 성장을 배경으로 9세기 말(889) 진성여왕대의 농민전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봉암사의 창건과 붕괴현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신라 말 민의 성장과 함께 민의 힘에 의해 선종의 성장이 이루어지나, 진성여왕 이후의 거국적 반란에 의식이나 행동을 같이하지 못하여 왕권이나 지방의 유력자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따른 민의 반감을 유발하여 일시적이나마 세력이 약화된 일이다. 이후에 봉암사의 중창을 긍양이 추진하여 고려왕실에 의해 우뚝 선 것도 초기 선종의 건강함을 상실한 징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희양산문태고선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5898&cid=40942&categoryId=33382
鳳巖寺磨崖菩薩坐像
경북유형문화재 제121호
1979년 1월 25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백운대의 북동쪽을 향한 큰 화강암 바위에 양각되어 있는 보살좌상으로,천태종의 개조 의천(義天)의 원불(願佛)이라고 한다. 고려 말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높이는 4.5m, 폭은 4.4m 정도이다.
불두(佛頭) 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광배(光背)를 겸한 것처럼 처리하였다. 불두는 두드러지게 표현하였으나, 몸체로 내려오면서 선각(線刻)으로 얇게 처리하여 불두의 조각수법과 다르게 하였다.
머리에 쓴 보관(寶冠)의 중앙에는 꽃무늬가 있고,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이며 무릎은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말기의 양식과 통한다.
보관의 중앙에 화문이 있고, 미간 백호가 뚜렷하다. 반월형 눈썹 아래 눈을 반쯤 뜨고 있으며, 코는 끝이 손상된 것을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입은 아주 얇고 작게,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다. 턱은 주걱턱이고 목에는 삼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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