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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1)(2)(3) -< 한국 불상 > , 신동아 1999년 7월, 8월, 9월호

화엄행 2013. 11. 2. 23:08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480.html


[새연재]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1)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새로운 천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우리 문화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짚어보자는 열기가 높다. '신동아'는 우리 문화의 원류를 찾는 첫 작업으로 미술사가 최완수씨의 글을 연재한다.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호응을 기대한다. <편집자>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불상연구의 중요성


     교가 우리 문화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서기 372년에 공식 전래된 이래 16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국토 어느 곳을 가더라도 불교문화 유적과 쉽게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이 불교 신앙의 주 예배 대상인 불상이다. 우리 미술사에서 불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큼 막중막대하여 조각사의 대부분이 불상 연구로 채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절에서나 반드시 만나고 어느 박물관에 가더라도 쉽게 마주치는 그 불상은 대체 언제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이 의문을 차례로 풀어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 문화를 바로 보려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는 10세 때 부처님을 처음 친견하였다. 충청남도 예산 군내에 있는 가야산(伽倻山) 보덕사(報德寺)가 우리 집안의 원찰(願刹)이었으므로, 선조모(先祖母) 밀양 박씨를 모시고 처음 이 절에 가서 극락전에 독존(獨尊)으로 모셔져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을 처음 뵙고 절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충격이 나를 장차 미술사 연구에 빠져들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듯하다.

유달리 탐미적인 기질을 타고나 꽃과 새 등 아름다운 것을 지극히 좋아하고 사람도 용모가 수려해야 마음에 들어하던 나는 황금빛 나는, 그 잘생긴 인물상에 우선 반하였다. 그러나 얼굴은 마음에 쏙 드는데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유심히 살펴보니 머리가 이상하다. 마치 사발 하나를 머리 위에 엎어놓은 것 같은데 노인들이 쓰는 탕건 같지도 않고, 그 표면에는 작은 고둥 껍데기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었다.

왜 저렇게 잘생긴 얼굴에 저런 이상한 머리를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 아는 스님께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석가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에 앉으셔서 6년 고행 끝에 큰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그 때 보리수 열매가 머리 위에 떨어져 쌓여 저런 모습이 되었다고 전해온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이 대답은 10세 소년인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아닐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슴속에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을 밝혀보겠다는 묘한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미 더 어린 나이부터 지적 호기심이 강했고 타고난 호고벽(好古癖; 옛것을 좋아하는 별난 성격)으로 노인들의 옛 얘기 자리에 즐겨 끼어들어 귀동냥으로 우리 역사 얘기를 듣고 일일이 기억해 두곤 했다. 이 과정에 우리 역사가 일제에 의해 왜곡 변조된 사실을 알고 어린 마음에 그 잘못 알려지고 있는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일을 내가 해야겠다는 건방진 결심을 다져가고 있던 때였으니, 이와 같은 지적 호기심의 발동은 당연한 일이었다.


팔만대장경 독파에 도전

이런 지적 호기심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많은 역사서를 탐독하게 하였고, 그 열정은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칠 결심을 굳히고 서울대학교 사학과로 진학하였다. 이제 전문학자들의 강의도 듣고 수많은 관련 전문서적들을 폭넓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부처님 머리 문제를 한번 본격적으로 구명해보려 하였다.

우선 전문학자라고 생각되는 분들께 질의해 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 분야의 연구논문이 있는가 하고 찾아보았으나 국내 학계에서는 아직 이에 대한 관심 표현이 없었다. 서구학자와 일본 학자 중에서 전체 불상 양식 변천을 연구해 가는 과정에 불상의 두상 변천을 간단하게 언급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결국 이 문제의 구명은 내 몫이구나 하는 판단 아래 우선 불교미술사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독파할 계획을 세우고 현대 활자로 인쇄된 가장 완벽한 체제의 대장경인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100권(본문 85권, 도상 12권, 목록 3권)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경주와 공주, 부여박물관을 순회하며 도처에 흩어져 있는 불상 자료를 조사하는 한편 일본과 서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섭렵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을 독파해내는 일은 아직 요원하기만 했다. 1965년경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대정신수대장경’ 전질이 다 갖춰진 곳은 서울대학교 도서관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이곳에서만 책을 빌려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그 빌려보는 번거로움이 적지 않았다. 이에 ‘대정신수대장경’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고 미술사 연구에 적합한 연구소가 있다면 한 10년 파 묻혀 이를 읽고 불교미술사 연구의 기초 다지기에 전념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66년 4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간송미술관)가 차려지면서 이곳에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고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선생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현장 여건을 확인한 다음 가부를 결정하겠노라고 말하고 북단장(北壇莊)을 찾아가 연구소 건물에 들어섰더니 연구실 방 안 사벽을 둘러친 책장 안에 미술사 연구에 필요한 책들이 가득 꽂혀 있고 게다가 ‘대정신수대장경’ 일습 100권이 봉도 뜯지 않은 새 책으로 완전하게 꽂혀 있지 않은가. 두말없이 즉석에서 이곳에 있겠다고 말했다. 매일 연구소 일을 마치고 나서 밤새워 대장경을 읽으며 이상한 부처님 머리가 어째서 지금과 같이 만들어지게 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구명하는 일에 몰두해나갔다.


불교의 출현배경

결국 이 일은 불상의 출현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하고 불상 출현의 이해는 불교의 성립과 그 발전 과정을 모르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껏 30여 년이 넘도록 이 문제를 밝히는 데 종사해오고 있다. 그동안 나름대로 얻은 연구성과를 토대로, 불상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음 만들어져 우리에게 전해져 왔는가 하는 문제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하여 우리 불상을 바로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일의 길잡이 노릇을 해나가고자 한다.

먼저 불교가 출현하는 과정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현재까지 알고 있는 인류문명은 서력 기원전 3000년쯤 4대 문명이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지구상에 출현했다는 것이다. 황하 유역에서 일어난 중국문명과 인더스강 상류에서 일어난 인도문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변의 메소포타미아문명, 나일강 하류의 이집트문명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4대 문명이 서로 아무런 관련 없이 독립 발생하면서 어째서 동시에 출현하였는지에 관해서는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지구상에 일어난 기후의 변화가 이들 지역의 농업생산력을 높여놓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또 어떤 까닭인지 서력 기원전 6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4대 문명권 각각에서 상업문명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역시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의한 잉여 농산물의 교역으로 말미암은 현상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지중해를 끼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연결돼 있던 그리스를 중심으로 상업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인류문명사상 최초의 상업문명권을 형성해간다. 이곳은 농경에 적합지 않은 악조건이기 때문에 농업문화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지중해를 통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대 농업문화 지역과 직결돼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이 상업문화를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건설이 바로 이를 증명해준다.

어떻든 이런 상황 속에 인도에서도 상업세력이 크게 성장해간다. 2500년 가까이 농업문명을 유지해 오면서 바라문교(br-ahmanism)의 이념 기반 아래 소위 4성제(四姓制)라는 엄격한 4단계의 계급제도를 유지해오던 인도 사회는 기반이 흔들리는 대변혁을 맞게 된다. 상업세력의 성장은 상업 이윤의 축적 결과 농토 소유의 유무다소(有無多少)를 전제로 하던 계급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계급제 부정하는 혁신이념

이에 급성장하는 상업세력은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는 보수이념인 바라문교를 압도할 수 있는 혁신이념의 출현을 고대하게 되는데, 이런 사회적 요구에 따라 출현한 혁신이념 중의 하나가 불교였다. 그래서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釋迦牟尼, 기원전 623~544년) 부처님은 평등과 금욕을 2대 강령으로 내세워 상업세력의 지위와 권익을 옹호하는 이념체계를 확립해낸다.

그 결과 바라문(婆羅門, br-ahmaa), 찰제리(刹帝利, katriya), 폐사(吠舍, vai′sya), 수다라(首陀羅, ′s~udra)의 4계급 중 최하층 천민에 속하는 수다라 출신의 우바리 (優婆離, Upali)를 10대 제자의 하나로 받아들여 사성제 계급제도 자체를 부정해버렸다. 출가한 승려들은 계급과 부귀의 표상이 되는 머리 장식을 근원적으로 소멸시키기 위해 머리카락을 밀어버리는 한편, 의복은 남이 내다버린 것을 주워다가 입되 주울 때 본 사람들끼리 서로 조각내어 나눈 다음 그 조각들을 잇대어 옷을 만들도록 하였다. 7조 가사니 9조 가사 내지 25조 가사가 이런 조각들을 잇대어 기워낸 줄 수를 표시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석가모니와 비슷한 시기에 출현하여 자이나교를 창시한 자이나(Jaina)도 역시 평등과 금욕을 내세우는 새로운 이념을 내놓았다. 그러나 자이나교는 의복을 거부하고 나체를 고집한다거나 신체상의 터럭을 모두 제거하는 등 극단적인 금욕을 표방하며 반윤리적 규범을 요구함으로써 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해 불교에 압도당하고 만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년)가 탄생하여 오히려 상업세력의 성장으로 도전받는 농업사회를 안정시키는 새로운 이념인 유가(儒家) 이념을 확립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기원전 623년에 탄생하여 기원전 544년에 80세로 열반하셨다 하니 기원전 551년에 탄생한 공자가 8세 되던 해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열반한 것이다. 공자는 이후 73세를 살고 기원전 479년에 돌아간다.

어떻든 이와 같이 농업문명과 상업문명의 교체기에 이 두 분은 각기 인도와 중국에서 탄생하여 새 질서를 마련하는 이념기반을 다져놓았기에 이후에 모두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불교는 갠지스강 중류에 위치한 마가다국이나 구살라국 등을 중심으로 갠지스강 물줄기를 따라 교세를 펼쳐나간다. 이후 불교는 석가세존 열반으로부터 200여년 뒤에 출현한 아소카(阿育, 기원전 269~232년)왕이라는 대 전륜성왕(轉輪聖王;천하를 통일한 왕중왕)의 광적인 외호로 그가 통일한 전인도 대륙으로 전파됨으로써 통일제국의 국교로 발돋움해 나간다.

   

불교미술의 시원


한편 그리스에서는 상업문명이 점차 발전해 나가면서 도시국가들이 교역대상 지역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정복전쟁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케도니아의 소년왕 알렉산더 (기원전 336~323년)는 20세에 등극하여 그리스 전역을 통일한 다음 22세 때는 지중해를 건너 페르시아 대제국 정복에 나선다. 그는 25세 나던 해에 고가메라 전투에서 소아시아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2세의 대군을 격파하여 페르시아 대제국을 멸망시키고, 패주하는 페르시아의 잔여세력을 추적하면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격해간다.

드디어 30세가 되던 해에는 인더스강 상류인 간다라 지역을 장악하고 강을 건너 갠지스강 유역인 중인도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가려 한다. 전인도의 여러 왕국은 이 미증유의 외침 소식에 접하여 아연 긴장한다. 그래서 최대 강국인 마가다 왕국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조직, 이를 격퇴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 마가다국왕 푸랏시가 맹주가 되고 마가다왕국 총대장 찬드라굽타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보병 200만, 기마병 8만, 전차 8000대, 코끼리부대(象軍) 6000의 병력을 모은 것이다. 첩보병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알렉산더 대왕은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고향 떠난 지가 10년이나 되었다는 핑계로 31세 되던 기원전 325년에 철군명령을 내려 회군하고 만다.

이에 격전을 예상하고 진격해 나갔던 연합군의 대병력은 허탈감에 빠져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회를 틈타 총사령관 찬드라굽타는 병권을 이용해 자국왕 푸랏시를 몰아내고 스스로 마가다 국왕이 되어 마우리아(孔雀) 왕조의 시조가 된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군소국가를 통일해 나가기 시작하니 그 손자인 아소카 대왕에 이르러서는 전인도를 통일한다.


아소카대왕에 대한 부처의 예언

그런데 이 아소카 대왕이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자신의 영토는 물론이고 그 주변지역까지 포함한 전인도문화권에 불교를 널리 보급하며, 현존 최고(最古)의 미술품인 아소카 기념주를 만들어 남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소카 대왕은 어떤 인연으로 불교의 대외호왕이 돼 이렇게 수많은 공덕을 지을 수 있었을까. 그 내용은 ‘아육왕경(阿育王經)’[512년, 梁 僧 伽婆羅 번역]이나 ‘아육왕전(阿育王傳)’[306년, 西晋 安法欽 번역], ‘잡아함경(雜阿含經)’[433년, 劉宋 求那跋陀羅 번역] 등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그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기(授記, 豫言)하신 형태로 꾸며진 내용인 ‘잡아함경’ 권 23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 대략을 살펴보겠다.

어느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타죽원, 즉 죽림정사에 계시다가 아침공양을 받으시려고 여러 비구들을 거느리고 왕사성 안으로 들어가시게 된다. 이때 길가에서 사야와 바사야라는 두 아이가 흙장난을 하고 놀다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공양을 받으러 오시는 것을 보고는 그 거룩한 모습에 환희심이 절로 나서 소꿉장난으로 보릿가루라고 챙겨두었던 모래를 그대로 부처님 바리 안에 담아드린다. 그리고는 장차 이 공덕으로 천하를 얻는 전륜성왕이 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그 진심을 아시고 미소로 이를 받으신 다음 뒤따르는 아난(阿難)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멸도(滅度;열반, 육신의 사멸, 즉 죽음을 일컫는 말)한 후 100년 뒤에 이 아이는 파련불(巴連弗;파탈리푸트라)에서 세상 한쪽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될 터인데 성은 공작 (孔雀;마우리아)이고 이름은 아육(阿育;아소카)이리라. 정법(正法)으로 다스리고 또 내 사리를 널리 펴기 위해 팔만사천탑을 건설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아난존자에게 그 일생 행적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미리 말씀하신다. 파련불에 월호(月護;찬드라굽타)왕이 나고 그 아들이 빈두사라왕이며 빈두사라왕에게 수사마 태자와 아소카 왕자 등 무수한 왕자가 있게 된다. 그중에서 수사마가 가장 잘생겼고, 아소카는 가장 못생기고 피부도 거칠어서, 빈두사라왕은 왕위를 수사마 태자에게 물려주려 한다.

그래서 왕은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소카 왕자에게 택차실라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라고 명하지만 오히려 아소카 왕자는 이를 평정하고 돌아와 대중의 환심을 산다. 반면 잘생긴 탓에 오만한 수사마 태자는 대중의 인심을 잃어 빈두사라왕이 병으로 위독해졌을 때 신하들의 간계에 빠져 택차실라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러 떠나는 바람에 아소카 왕자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왕위에 오른 아소카는 천하를 평정해서 전륜성왕이 되는데 자신이 정당하게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과 못생겼다는 열등감 때문에 한때 측근 신하들과 잘생긴 궁녀들을 대량학살하고 지옥(地獄)을 꾸며 놓고 죄인을 잡아다가 살육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런데 지옥에 잘못 들어갔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대각을 얻어 아라한이 된 해(海)존자의 신통력에 감복하여 아소카왕은 불교에 깊이 귀의하게 된다.

그리고 해존자와 장로 야사존자를 통해 자신이 팔만사천탑을 조성하여 부처님 사리를 널리 펼치고 불법을 자신의 영토 내에 전파하리라는 수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천하에 팔만사천탑을 건립하게 된다. 이어 야사존자의 천거로 우바굽타존자를 왕사 (王師)로 삼는데 우바굽타존자는 얼굴이 잘생기고 몸매가 좋으며 피부가 지극히 고왔다.

이에 아소카대왕은 자신의 못생긴 얼굴 및 거친 피부와 우바굽타존자의 용모를 비교하면서 그 까닭을 물으니, 우바굽타존자는 보시한 물건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준다. 아소카대왕은 모래를 부처님께 공양하였지만 자신은 좋은 재물을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불교미술의 시원, 아소카왕의 기념주

이에 크게 깨달은 아소카대왕은 우바굽타존자의 안내를 받아 부처님 성적지 모두를 찾아다니며 부처님을 상징하는 사자나 황소, 코끼리 등을 기둥머리에 장식한 아름다운 기념주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불교미술의 시원을 이루는 아소카왕의 기념주들이다.

이 기념주는 현존하는 것이 모두 14개인데 완전할 경우 높이가 12m 내지 21m, 기단 직경이 90cm 내지 125cm가 되는, 거대하고 둥근 돌기둥이다. 돌기둥 상부에는 인도 사람들의 전통적인 성수(聖獸)이며 불타(佛陀, 크게 깨달은 사람을 의미)를 상징하는 사자나 황소, 코끼리를 조각하여 장식하고 있다. 현존하는 14개는 사자 7개, 코끼리 1개, 소 1개이며 나머지 5개는 파괴돼 알 수 없다. 이는 한결같이 주나르(Junr)에서 산출되는 회백색 사암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왕의 명령으로 한곳에서 제작해 운반된 것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돌기둥의 건립은 페르시아 미술의 영향이었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정론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누리던 아케메네스왕조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폐허에 남겨진 왕궁의 돌기둥들을 보면 누구나 그 연계성을 직감할 수 있다. 또 알렉산더대왕에게 쫓긴 페르시아 귀족들이 대거 인도로 피난하였던 사실과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아소카왕이 통일인도의 대수도로 페르세폴리스를 모방한 파탈리푸트라를 건설하였다는 사실은 이를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이 <사자 기둥머리>(도판 1)는 현존하는 아소카왕 기념 기둥머리 중에서 조각기법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네 마리의 수사자가 서로 등을 맞대고서 사방을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는 모양이다. 사실적인 표현기법으로 물결치는 갈기털과 알통이 드러난 힘찬 앞발의 표현은 백수의 왕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한 자세를 과시한다. 이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23년, 北겆 曇無讖 번역] 권 27에서 사자후를 토하여 백수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마치 부처님의 설법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과 같다고 한 사실을 생생하게 실감시켜 주는 듯하다.

사자를 받치고 있는 갓머리돌은 법륜을 상징하는 수레바퀴로 네 구간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에는 역시 불타를 상징하는 말, 소, 사자, 코끼리의 네 동물들을 깊게 새겨 장식하고 있다. 이 동물들의 표현도 매우 사실적인데, 이러한 사실적인 표현기법은 아직 인도미술에서 그리 익숙지 않던 것으로 페르시아 미술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 갓머리돌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엎어놓은 모양의 연꽃잎 장식은 바로 페르세폴리스의 돌기둥 양식 그대로를 재현해낸 듯하다. 불교미술사의 서장을 장식하는 이 아소카왕의 기념주는 그 미술양식의 연원이 페르시아 미술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외래양식의 단순한 모방만은 아니고 인도적으로 저작된 의장과 표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이 방면의 학자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이 사자주두는 인도의 국장(國章)으로 돼 있다.

람풀와에 있는 두 개의 아소카왕 기념주 중 남쪽에 있던 것이 유일하게 <황소 기둥머리> (도판 2) 장식조각을 가지고 있다. 목덜미에 혹이 나 있고 앞가슴 중앙에 목젖이 늘어진 전형적인 인도 황소의 생김새로 두 뿔은 파괴되었으나 우신(牛腎)과 우낭(牛囊)의 표현이 분명하다.

황소 모습은 사자 기둥머리와 같이 사실적인 조각기법으로 처리되고 있는데, 갓머리돌은 손바닥 모양 당초와 접시꽃 모양 꽃무늬가 연속문양으로 장식돼 있고 기둥과 연결되는 엎은 연꽃 받침의 조각은 <사자 기둥머리>의 그것과 한솜씨임을 보여준다.

이는 ‘대반열반경’ 권 17에서 ‘부처님은 사람 가운데의 코끼리왕이며 사람 가운데의 소왕(牛王)이라’고 한 내용을 상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도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 인더스문명기로부터 코끼리와 황소를 성수로 떠받들어왔으니, 이 전통을 불교에서도 그대로 수용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는 아시리아문명 이래 태음숭배를 해오고 초생달과 같은 두 뿔을 가진 소를 그 상징동물로 삼았으며, 그에 대한 태양 상징물이 사자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혹시 이런 페르시아적 동물관이 인도에 전해져서 불교에 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상 불(不) 표현의 시대


‘장아함경(長阿含經)’[413, 後秦 佛陀耶舍와 竺佛念이 함께 번역] 권 4 유행경(遊行經) 및 ‘잡아함경’ 권 23, ‘대반열반경후분(大般涅槃經後分)’[665년, 唐 若那跋陀羅 번역] 권 하 등의 불교경전들에 의하면, 불타가 열반한 후에 화장으로 남겨진 사리(舍利, sarira;유골의 뜻)가 불교에 깊이 귀의하였던 여덟 나라 임금들에 의해서 나뉘어 탑파(塔婆 st-upa)에 봉안되고[8국 왕이 서로 사리를 독점하고자 전쟁에 돌입하기 직전 향성바라문(香姓婆羅門)의 중재로 8등분하였다고 한다] 예배 공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소카왕이 전인도를 통일하고 대불교외호왕이 된 후에 그것을 다시 모셔내 8만 4000등분해 천하에 그에 해당하는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아육왕전’이나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489년, 蕭齊 僧伽跋陀羅 번역] 권 1 등에 수록돼 있다.

물론 8만4000이란 실수 개념이 아니고 4와 8을 숫자의 기본 단위로 즐겨 쓰던 인도인들이 대량이란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야겠지만, 경전상으로 보면 이 시기에 엄청난 수의 탑파가 세워지고 탑파신앙이 크게 유행했어야 한다.

그러나 미술사의 입장에서 보면 아소카왕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거대한 규모의 탑파 유구는 지금까지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 다음 시대인 슝가왕조(기원전 184~72년)에 이르러서야 대규모의 탑파가 조영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소카왕 시대에 만들어졌으리라고 생각되는 소규모 탑파 위에 다시 대규모로 증축한 것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소카왕 시대에는 아직 탑파신앙이 크게 중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자료들일 뿐이다.


이라발용왕의 귀불도

그런데 슝가 시대에 이르면 갑자기 대규모의 탑파 조영이 이루어지고 아소카왕의 기념주와 같은 양식의 조영물은 더 이상 제작되지 않는다. 이것은 불교신앙의 성격이 변화한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교조 석가모니불에 대한 인간적인 추모의 단계를 벗어나 신격화시켜야 할 계제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유골(사리)을 신비화시켜 신앙의 주 대상으로 삼고 예배 공양하려 한 경향의 표현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높이가 15m 내외, 기단 직경이 35m 내외의 거대한 탑파를 건설하고, 그 주변에는 높이 3m 내외의 난순(欄楯, vedika;난간 모양 울타리)과 높이 7m 내외의 탑문 (塔門 toraa)을 설치하여 탑을 보호하고 장엄하게 했다. 특히 탑문에는 전생사(前生事;불교의 윤회사상에 의하면 불타는 전생의 수많은 선행의 결과로 불타가 되었다고 한다)를 얘기한 본생담을 주제로 한 본생도와 불타의 현생사를 얘기한 불전도가 부조돼 앞뒤를 가득 장식하게 된다.

이 장식 부조들은 불경에서 얘기한 전생·현생의 불타 생애를 설화의 진행에 따라 연속적으로 표현해 나갔기 때문에 한 장면에 시공을 초월한 여러 사실이 복합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시각을 관념화시켰으므로 서양화를 보는 투시적인 시각으로 보면 매우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불경의 내용을 도설적으로 표현해 나간 변상도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더 마땅한 방법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기에 조성돼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스투파는 바르하트(Bh-arhut)대탑과 산치(Sanchi)대탑이다. 그런데 이 두 탑의 탑문에 부조된 불전도에는 그 주역인 불타의 모습이 모두 표현돼 있지 않다. 그 구체적인 실례를 <이라발용왕귀불도(伊羅鉢龍王歸佛圖)> (도판 3)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라발용왕귀불도>는 바르하트대탑의 남문 기둥에 장식된 불전도의 한 장면이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592년, 隋 那 堀多 번역] 권 37, 38 ‘나라다출가품(那羅陀出家品)’ 상·하의 내용을 한 화면에 압축 표현한 것으로 나라다(那羅陀, Narada;불타의 10대 제자 중의 하나인 마하가전연의 속명)가 불타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도설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이라발(Elapattra)용왕이 과거 가섭불(迦葉佛)시대에 비구로 있으면서 이라수(伊羅樹)라는 나무를 꺾은 죄로 이라발용왕이 되었는데,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려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실 때 만나뵈어야 한다는 수기(授記)를 받는다. 그래서 무수한 세월을 기다리는데 마침 석가모니불이 성불하셨다는 소식을 친구인 상구(商쯖)용왕의 궁에서 다른 친구인 금제야차(金齊夜叉)로부터 듣는다. 그래서 상구용왕의 딸인 절세미인과 금은보화를 상금으로 걸고 부처님을 만나뵐 방도를 세상에 묻게 되고 당시 세상에서 현자로 추앙되던 나라다가 사람들의 요청으로 이들을 데리고 부처님께 나아가게 되는데, 이라발용왕이 너무나 기뻐서 한달음에 부처님 계신 곳으로 달려가려고 서두르다 보니 머리는 벌써 부처님 계신 곳에 와 닿았으나 꼬리는 아직 수천리 밖에 있는 자기의 용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 청년 바라문 수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뵙고 장차 미륵불이 나타날 시기에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수기를 받는데, 이를 지켜보던 나라다가 부처님의 성스러운 교화에 감격하여 무리를 이끌고 불타의 제자가 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복잡한 내용의 설화를 한 장면으로 압축 표현하기 위해 배경은 평면전개도식의 수직 시각으로 처리하고 인물과 나무는 수평시각으로 처리하는 이중시각법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투시도법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매우 어색해 보인다.


불타의 상징물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마땅히 불타의 자태가 표현되어야 할 곳에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불타의 존재를 암시하는 불좌와 녹야원(鹿野苑)의 설법을 상징하는 니구류 (尼拘類)나무가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에 불타를 인격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내용으로, 당시의 모든 불전도에 적용되던 원칙이다.

이는 인도문화권에서나 중국문화권에서 모두 성인으로 추앙되는 위대한 인물이 대중과 자리를 함께 할 경우 그 모습을 대중과 함께 표현하는 것을 불경(不敬)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 모습 대신 그 존재를 상징하는 어좌(御座)나 일산(日傘) 등을 표현하는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전통은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지켜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땅히 불타께서 계셔야 할 곳에는 불타를 상징하는 성수(聖樹;무우수 나무 아래에서 탄생했으므로 탄생의 경우는 무우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으므로 대각의 장면에는 보리수, 사라수 아래에서 열반했으므로 열반의 경우는 사라수를 표현함), 윤보(輪寶;법륜을 상징하는 수레바퀴 모양), 삼보표치(三寶標幟;윤보 위에 山자 모양의 장식을 붙인 것으로 불·법·승 삼보를 상징), 불족적(佛足跡;윤보 무늬가 선명한 부처님 발자국), 불좌 (佛座;부처님 자리) 등을 표현하였다.

<이라발용왕귀불도>를 살펴보면 니구류나무 아래 대좌를 향하여 합장하고 꿇어앉은 이라발 용왕과 물 속에 잠겨 있는 상구용왕을 비롯한 두 명의 용녀가 보이고 [터번을 쓴 머리 위에 오두룡의 생김새가 장식되어 용족(龍族)임을 표시하였다], 머리만 먼저 왔다는 오두룡 (이라발용왕)의 두상이 물 속에 크게 표현되었으며 그 위로 금제야차가 보이고 손으로 가리키며 길을 안내하는 나라다선인도 보인다.

이들이 모두 논둑처럼 생긴 육지로 양분된 물 속에 잠긴 듯 표현된 것은 용궁이 사실임을 강조하려는 화면구성 욕구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수면을 상징하기 위해 연꽃과 연잎들을 어지럽게 배치하고 물결무늬라 생각되는 종횡의 평행선을 산만하고 불규칙하게 표현하였으며 육지에는 떡잎 모양의 유치한 나무 표현이 있고 물 위를 나는 오리의 소박한 표현도 보인다.

전체적으로 표현기법이 매우 유치하고 표현 의욕이 너무 과다하여 회화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는 졸렬한 작품이다. 더구나 앞서 본 <아소카왕 사자 기둥머리>의 사실적인 표현 기법과 비교해볼 때 현저한 양식적 퇴보다. 그러나 이는 외래 미술양식을 받아들여 자기화 시켜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강한 자기전통 회복의 욕구가 작용해 외래미술 요소를 자기화해냄으로써 그 다음 단계에서 고도의 독자적 미술양식을 창안해내게 하는 저작 단계의 양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여기서도 인도미술의 전통적인 표현의지가 강하게 되살아나서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상징적인 신비성이 노골화하고 조잡한 화면충전(畵面充塡;화면을 그림으로 가득 채움)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건축구조를 상징한 좌측 기둥에서 보인 기둥머리 형태는 아소카왕 기념 기둥머리의 그것을 조잡하게나마 계승한 것이 분명한데, 이는 외래미술 양식의 자기화 과정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라발용왕의 뒤에 프라크리타(Pr-akta)어로 ‘엘라파트라 용왕’이라 새겼고 아래 난간에는 ‘엘라파트라 용왕 세존을 예배하다’라고 새겨놓아 이것이 <이라발용왕귀불도>임을 밝혀주고 있다.

   

불상의 출현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기원전 326~325년)은 인도인들에게 서방세계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한무제(漢武帝, 기원전 140~87년)의 확장 정책에 따른 서역 경영이 또한 동방세계의 실재를 증명해 주었다. 그래서 종래 인도대륙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 속에 안주하던 인도인들의 사고는 근본적으로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불교에서는 교조 석가모니불 이외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지구와 같은 사주(四洲) 세계 1000개가 합하면 1소천(小天)세계가 되고 1000개의 소천세계가 합쳐서 1중천(中天)세계가 되며 1000개의 중천세계가 합쳐서 1대천세계가 되는데, 이 1대 천세계를 3천대천세계라고도 한다. 지구의 10003, 즉 10억 개의 지구에 해당하는 세계란 의미]의 무수한 불보살을 상정하고 대승사상의 출현을 재촉하였다고 생각된다.

대승이란 문자 그대로 큰 수레란 뜻이다. 종래의 불교가 각자의 수행에 따른 자기 해탈만을 목표로 삼았던 것을 1인용 수레인 작은 수레에 비유하고, 주변의 일체 중생을 모두 큰 수레에 태워 함께 해탈시키기 위해 해탈할 능력을 모두 갖추고도 부처의 경지에 오르지 않는 보살의 행위를 큰 수레, 즉 대승에 비유한다. 물론 이는 대승 쪽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사상을 불교교단 내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대중부 계통이 중심이 되어 이뤄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그 발생이 어느 곳이냐 하는 점에서는 남과 북의 두 설이 있다.

그런데 현재 남겨진 불교미술품의 명문 내용으로 보면 대중부의 활동이 개방적인 상업도시에서 흥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략 서아시아와 동아시아 및 인도를 연결해주는 교통의 요로에 있으면서 상업적인 부를 축적하던 서북인도의 간다라(Gandh-ara)나, 서북인도와 인도대륙 및 아라비아해에 연결되는 마투라(Mathur-a)지역이 대승불교의 요람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를 대변하듯이 이 양대 지역에서는 이제껏 불상의 표현을 금기로 여겨오던 불상 불표현의 전통을 깨뜨리고 과감하게 불타의 자태를 표현하기에 이르렀다.이로부터 불교미술은 조상(造像) 중심의 불상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불교신앙도 불상예배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불상이 없던 시대를 인도미술사에서는 고대기미술이라 부른다). 그 시기는 대체로 서기 1세기를 전후해서부터 대제국을 건설해가던 쿠샨(Kus-an)왕조의 전성시대에 해당하는데, 이 왕조의 문화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쿠샨왕조와 불상

원래 이 쿠샨왕조의 지배층은 월지족(月氏族;월지라고 읽는다. 로마의 지리학자 스트라보가 동방 그리스문화의 파괴자로 열거한 四蠻族의 하나인 Asii 혹은 Assioi인 듯한데 이것이 아시아의 어원이라는 설이 있다)으로 중국의 서북부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 부근을 근거지로 하여 살던 유목민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150년경 흉노족의 팽창에 밀려 서남쪽으로 쫓겨가다가 기원전 120년경에는 서북인도 간다라지방에 정착하여 대월지국을 건설하고 기원전 80년경에는 그리스 원정군이 세운 식민국가인 박트리아(Bactria;‘漢書’의 大夏가 이 나라일 것으로 비정하지만 이미 박트리아를 신복시키고 있던 Tokhari 혹은 Tokharoi의 음역이 대하일 것이라는 설이 더욱 타당성이 있다)를 멸망시킨 다음 그곳에 안주하여 문명생활로 들어간다.

여기서 쿠샨왕조의 문화성격이 그리스적인 성향을 강렬하게 띨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을 수 있으니, 이는 야만의 정복민족이 고도의 문화를 가진 피정복민에게 문화적으로 역정복된 실례라 할 수 있겠다. 쿠샨왕조의 지배층은 동(중국)·서(그리스) 세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겸비할 수 있었으므로 당시로서는 가장 진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곳 간다라지역은 이미 아소카왕 때에 불법이 전래돼 기원전 2세기경에는 그리스계의 미란다(彌蘭陀;Menandros 혹은 Milinda 기원전 160~140년)왕이 불교에 깊이 귀의했던 사실을 ‘미란다왕소문경(彌蘭陀王所問經)’[한역 경전으로는 ‘那先比丘經’인데 이는 東晋代에 失譯]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형편에서 난만한 조형미술의 발달을 토대로 인격신상 제작 경험이 풍부하던 그리스인들에게 불상 불표현의 전통은 이해하기 어렵고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징물로 대신하던 불타의 자리에 어느덧 인간 불타의 모습을 표현하게 되었던 듯하다. 여기 <기원보시도(祇園布施圖)>(도판 4)가 바로 그런 예 중의 하나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타의 모습이다.


불전도 설화

프랑스의 불교미술사학자인 푸셰(A. Foucher)에 의하면 이는 ‘대반열반경’ 권 27이나 ‘오분율(五分律)’ 권 25 등에서 보이는 기원정사(祇園精舍) 건립 기증의 내용을 고부조로 나타낸 불전도라 한다. 설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위성(舍衛城;현재 중인도 Sahet-Mahet)에 불타와 그 제자들이 머물 수 있는 정사 (精舍;사찰이란 뜻)를 기증하기로 마음먹은 수달장자(須達長者;고독한 사람을 잘 돕는다 해서 給孤獨長者라고도 함)가 기타(祇陀, Jeta)태자 소유의 원림이 마땅한 장소임을 알고 사려고 하자, 태자는 이를 거절하려고 금으로 땅을 모두 덮는다면 팔겠다고 한다. 이에 수달장자가 흔쾌히 응낙하고 금으로 땅을 덮기 시작하자 기타태자는 그 용도를 묻고 불덕의 위대함에 감동한다. 태자는 자신이 원림을 기증하고 정사는 수달장자가 지어 공동명의로 불타께 기증하기로 합의한다. 이를 완성하여 기타태자의 수림에 급고독장자가 지은 정사란 의미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란 이름을 붙여 불타에게 공동 기증한다.

푸셰는 이 장면이 그 기증의 현장을 부조로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원광이 있는 맨상투, 통견의(通肩衣;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 입은 옷차림) 차림의 인물상이 불타이고 그 뒤 비구 차림이 이의 건설을 감독 지휘했던 불제자 사리불(舍利弗) 이어야 하며 불타께 마주서서 물병을 기울이는 듯한 인물을 비롯한 귀인 차림의 네 사람이 기타태자와 급고독장자 및 그 수행원이라야 한다.

그러나 ‘잡아함경’ 권 22, ‘중본기경(中本起經)’[後漢 建安 12년, 207년, 曇果와 康孟詳이 함께 번역] 권 하 수달품 제7, ‘현우경(賢愚經)’[445년, 元魏 慧覺 등 번역] 권 10 수달기정사품(須達起精舍品), 40권본 ‘대반열반경’ 권 29, 36권본 ‘대반열반경’ 권 27 및 ‘오분율’ 권 25 등에서 기원정사의 건립 시말을 상술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보병을 들고 향수를 불타께 공양하는 의식을 행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이런 내용은 오히려 ‘과거현재인 과경(過去現在因果經)’[435~443년, 劉宋 求那跋陀羅 번역] 권 4의 죽원정사봉시 (竹園精舍奉施) 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 불전도의 내용은 <기원보시도>라기보다 <죽원봉시도(竹園奉施圖)>일 가능성이 크다. 푸셰가 서슴없이 <기원보시도>라고 단정한 것은 바르하트대탑의 난순부조로 장식된 <기원보시도>에서 기타태자라고 생각되는 귀인이 물주전자[水注] 형태의 그릇을 들고 불타께 공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과 바로 연결지어 생각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명문이 없는 이 봉시 장면의 묘사가 어떤 내용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경설의 내용만으로 본다면 차라리 빈비사라(頻毘娑羅, Bimbis-ara)왕이 불타께 최초로 사원을 건립 기증하는 죽원봉시의 장면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전체적인 조형기법이 그리스 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1896년 인도불교미술사 대가인 프랑스인 푸셰가 북부 인도의 영국수비대가 있는 호티 마르단(Hoti Mardn)을 방문하였다. 그는 초대받은 장교식당에서 벽난로를 장식하고 있는 일군의 부조를 보고 심장이 멎을 만큼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는 “아, 이 수비대는 흥미로운 그리스 미술관을 가지고 있군요!”라고 감탄하는데, 그 내용이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간다라 불상의 초기양식을 보이고 있는 불전부조였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이 귀중한 불교미술유품은 여러 박물관으로 나뉘어 보관되는데 <기원보시도>나 이제 언급하고자 하는 <사천왕봉발도(四天王奉鉢圖)>(도판 5)가 모두 그중의 하나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마르단 수집품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마르단 주변의 간다라 지역 여기저기에서 수집된 것으로 출토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탑파나 사원의 계단층후판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라고 추정된다. 원래 청흑색질의 편암(片岩)으로 만들어져서 검푸른 색조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벽난로 연기에 오래 그을어 더욱 검은빛을 드러내고 있다. 인체의 사실적인 표현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그리스 조각기법을 철저히 계승하고 있어 그리스적인 조형기반 위에서 불상들이 출현하였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다만 <기원보시도>의 불상이 비구나 태자 등 일반인과 같은 크기로 표현돼 자연인으로서의 불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데 반해 이 <사천왕봉발도>에서는 불상의 크기가 사천왕이나 천상의 보살들이라고 생각되는 불타의 권속들보다 배는 더 커져서 신격화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것은 장차 대승경전에서 신비적 요소로 받아들여 구체화시키는 내용이다.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683년, 唐 地婆訶羅 번역] 권 3에서는 부처님의 몸길이가 7주(七?, 열네 뼘)로 보통사람의 두 배가 된다고 하였으며,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703년, 唐 義淨 번역] 권 49, ‘동불의량작의학처(同佛衣量作衣學處)’에서는 부처님의 열 뼘은 보통 사람의 서른 뼘이라 하여 부처님의 몸 길이가 보통 사람의 세 배라고 한 것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부처의 32대인상호의 기원

간다라의 불교도들이 불상 표현의 금기를 깨뜨리고, 불멸 후 5세기 남짓 지난 시기에 갑자기 불타의 자태를 만들어낸 데는 인도에서 베다시대 이래로 위대한 지도자가 가져야 할 관상상의 특징인 32대인상호(大人相好)라는 것이 전해져 내려와서 불교에서 이를 불타 상호의 특징으로 수용하였던 사실에 크게 힘입었던 듯하다.

이것은 간다라 불상과 거의 동시대에 출현하는 마투라 불상이 전혀 상이한 조형 기반 위에서 양식적으로 서로 무관하게 불상을 창조해 내면서 원칙적인 특징에서 모두 크게 어그러짐이 없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장아함경’ 권 1 대본경이나 ‘중아함경’ 권 1 등 비교적 원시 경전에 속하는 경전에서부터 32대인상을 타고난 사람은 출가하면 불타가 되고 재가하면 전륜성왕이 된다고 했다. 따라서 간다라 불교도들은 당시 그 지방의 왕자상을 불상의 본보기로 삼았으리라 생각된다. 실제 <기원보시도>에서 태자의 모습과 불타의 모습은 거의 동일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불타는 출가한 성자의 자태를 보이기 위해 장식적인 터번을 벗고 양어깨를 덮는 점잖은 옷차림을 하였으며 머리 뒤로 원광이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이 <사천왕봉발도>의 부처님 역시 이런 기본적인 요소를 계승하여 눈이 크고 콧날이 오똑하며 윤곽이 분명한 동서 혼혈적인 얼굴(현재 파키스탄 사람들의 얼굴 모습도 이와 비슷함)에 코밑수염을 기른 장년기의 건장한 남자 모습으로 되어 있다. 터번을 벗은 알상투는 상투끈(쬇紐)과 그를 맺어주는 상투구슬(쬇珠)로 다스려서 마치 중국 무협영화에서 나오는 옛사람의 북상투(團쬇)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매우 사실적인 표현이다.

이 불전도의 내용은 ‘보요경(普曜經)’[308년, 西晋 竺法護 번역] 권 7 상인봉초품 (商人奉?品),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 32 이상봉식품(二商奉食品)을 도설화한 변상도 (變相圖;불경의 내용을 도설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경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타께서 49일을 굶으면서 용맹정진하신 끝에 대각을 이루시고 차리니가(差梨尼迦)나무 아래에서 허기를 달래고 계셨는데, 북천축의 두 상인이 중천축에 와서 장사하여 많은 이득을 얻고 돌아가다가 임신(林神;수풀을 다스리는 신)의 권고로 보릿가루에 우유와 꿀을 탄 음식을 공양하게 된다(이렇듯 불교는 그 출발에서부터 상인들과 밀착돼 상업세력의 사상기반으로 성장한다).

이때 불타께서는 이를 받아 먹을 그릇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사천왕들이 이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각각 발(鉢, patra; 鉢多羅의 약자, 밥그릇의 의미, 중국 문화권에서는 보통 鉢盂로 통용한다) 하나씩을 가져와 바치는데 그것이 금제로부터 은, 유리, 마노(瑪瑙), 차거 (?ㄲ) 등의 보석제품이었다. 그렇지만 불타께서는 이를 모두 물리치고 감청색 돌발우만 받아 그 그릇에 담아드셨다는 것이다(현재 승려들의 발우도 네 짝이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차리니가나무라고 생각되는 오엽수 아래 불타께서 좌정하시고 사방에서 사천왕이 발우 하나 씩을 들어 바치고 있어 경전 내용과 일치된다. 천상에는 두원광의 표시로 보아 천인이나 보살이라고 생각되는 네 사람이 합장으로 이를 축하하고 있다. 눈썹 사이에 백호의 표현과 손바닥에 윤보의 표시가 분명하다.

   

단독 예배상으로 진전


1세기경 쿠샨 왕조 초기부터 대승사상에 입각하여 불전도의 주역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기 시작한 불상은 2세기 중반에 이르면 카니슈카(Kani′ska, 128~151년)대왕의 천하 통일과 불교 외호(外護)의 호운(好運; 좋은 운세)을 만나 화려하게 발전한다. 아마 천하를 통일한 강력한 국력과 전륜성왕으로 군림한 카니슈카 대왕의 광적인 불교 외호의 분위기가 이를 재촉하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카니슈카 대왕의 측근인 협(脇)존자나 마명(馬鳴)존자, 승가라찰(僧伽羅刹)존자, 세우(世友)존자 등 대승론사(大乘論師)들의 입김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결행한 제4결집(結集)에서는 이런 불상 조성을 기정사실화 하였을 것이다.

이로부터 불상은 탑파를 대신하여 가장 중심적인 예배 대상으로 승격되고 본생도나 불전도의 주역에서 탈출하여 단독예배상(單獨禮拜像)으로 독립 조성되기 시작하였던 듯하다.

이것은 현존하는 간다라 불상의 단독 예배상으로 가장 초기 단계의 특색을 보이는 불입상(佛立像)들의 양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큰 북상투(團쬇)를 상투구슬과 상투끈으로 묶은 자연 상투를 보이고 있으며 눈을 크게 뜨고 보통의 귀에 코밑수염이 분명하여 2세기 전기에 제작되던 불전도의 주존으로 부조된 불상양식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도판 6).

그런데 바로 그 뒤를 이어 2세기 중반 양식을 주도하는 단독예배상에서는 초기 부조나 원조(圓彫)양식보다 한 단계 더 진전되고 있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준다. 상투끈을 맺어주는 고리 형태의 구슬 장식인 상투구슬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 상투의 의미가 퇴색되고 상투 자체가 양식화하면서 신비화하는 현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는 양식사의 입장에서는 또 한 단계의 양식 진전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도판 7).


상투 틀기 풍습

원래 인도 문화권에서 남자들이 머리 가꾸는 형태는 머리를 위로 걷어모아 상투를 틀고 그 것을 그루터기 삼아 터번을 두름으로써 추위와 더위 및 모래바람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엄격한 계급사회이던 이곳에서는 상투가 자연히 신분의 차이를 나타냈다. 신분이 높을수록 상투와 터번을 많은 금은보배로 장식하기 위해 높은 상투가 요구되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상투를 트는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장치는 상투 트는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마투라 지역의 우렁상투에서는 비틀어 올린 머리 끝을 상투 끝에서 고정시켜줄 동곳[導玉] 형태의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고 간다라 북상투에서는 상투끈과 그를 맺는 고리[帶鉤]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본 <사천왕봉발도> 등 초기 간다라 불상에서는 상투끈과 상투끈을 맺어주는 고리인 상투구슬이 분명히 표현되었다.

물론 이런 표현은 출가성자(出家聖者)로서 불타가 가지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장신구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406년, 後秦 鳩摩羅什 번역, 줄여서 法華經이라고 한다] 권 5, 안락행품(安樂行品) 제14에는 이렇게 표현돼 있다. ‘법화경’이 대승이라는 한 수레의 신묘한 뜻을 열어내 보이는 유일한 여래(如來)의 감춰둔 경전으로 모든 경전 중에서 최상위에 놓이는 경전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전륜성왕이 천하를 평정하는 과정에 자신의 상투구슬을 최후의 유공자(有功者)에게 하사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상투구슬이 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최후의 보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자연인의 모습을 범본으로 한 초기 불상에서 이렇게 중요한 상투구슬은 당연히 강조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점차 진행되는 양식진전과 신비화 과정에 상투의 본래 의미가 상실되면서 상투구슬 없이도 상투끈이 저절로 맺어지듯, 상투끈만 표현되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양식단계에서 불상은 단독예배상으로 독립 조성되는 것이 일반화되어갔던 듯하다.

이런 양식진전 단계가 바로 카니슈카 대왕의 치세시기(治世時期)였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양식의 단독 예배상들이 갑자기 많이 만들어진 사실을 현존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도판 8).

그런데 2세기 후반에 이르면 상투구슬과 상투끈 내지 상투끈으로라도 묶여 있던 자연 상투인 북상투의 묶는 장치들이 양식 진전의 결과로 모두 제거하고 만다. 상투를 묶은 흔적이 없는데도 상투 부분이 저절로 솟아 있는 모습의 양식기법이 나타난 것이다.

차르삿다 출토의 페샤와르박물관 소장 <불입상>(도판 9)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그 양식기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상투끈의 소멸은 코밑수염의 소멸과 병행하면서 눈두덩의 확장과 귓불의 늘어짐과도 비례하는데 이런 양식진전 현상이 이 <불입상>에는 고루 나타나고 있다. 즉 조각기법에 있어서 양식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술사의 진행 과정을 보면 이런 양식화의 심화가 의외로 신비화 내지 이상화로 발전해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차라리 그런 경로를 거치면서 미술 양식이 발전해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불입상>의 경우도 양식화가 바로 신비화로 이어진 좋은 본보기다. 몇 가지 양식화에서 온 비현실적인 인체의 특징이 오히려 불타의 신격을 상징하는 특상(特相; 특별한 상호)으로 수용되고 있다. 32상 중에 열거되는 육계상(肉쬇相; 살이 상투처럼 솟아 있는 상호)과 수족망만상(手足網킏相;손·발가락에 물갈퀴가 달려 있는 상호)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수족망만상은 원래 간다라 단독 예배상의 출현 초기부터 손가락의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손가락 사이를 연결시켜 놓았던 데서 연유한 특징이므로 양식 진전에 따른 내용의 변경과는 별로 상관 없다. 그러나 육계상의 경우는 애초에 자연 상투인 북상투가 양식 진전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그 명칭과 양식 출현의 선후문제를 놓고 세계의 불교미술사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인도불교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간다라 불상의 초기 양식에서 자연 상투인 북상투를 확인하게 된다.

그 다음 초기 단독 예배상에 이르면 상투구슬을 갖춘 양식을 잠시 거치고 나서 상투구슬 없이 상투끈으로만 고정된 북상투로 양식 진전한 것을 보게 되고, 그 이후에는 <도판 9>의 불입상과 같이 상투끈조차 사라졌으면서도 북상투는 여전히 남아 있는 양식을 대하게 된다. 따라서 일찍부터 불교미술사학자들은 육계상이란 조기(早期) 대인상(大人相)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거나, 간다라 조공(彫工)들이 그리스인들의 속계(束쬇 ; kr-obylos)를 모방하여 만들어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시사를 받아서 만들어냈으리라는 등 잡다한 주장을 하게 되었다.


육계에 대한 논쟁

이에 인도 학자인 쿠마라스와미(A. K. Coomarasw-amy)는 육계의 산스크리트 원어(原語)인 우스니샤 실샤(uia-ira) 혹은 우스니샤 시라스카타(unia-iraskata)가 원래 육계란 의미가 아니라 ‘머리수건을 높이 쓸 수 있는 머리나 머리칼’ 혹은 ‘갓장식을 높이 붙일 수 있는 머리나 두발’이란 의미라고 밝혔다. 이런 원의(原意)가 2세기 중기 어름에 육계(protuberance of the skull)의 의미로 변질되는데, 이는 32상에 대한 경전 해석의 변화에 연유한 것이며 이런 신비화 작업은 불두(佛頭) 표현의 양식 진전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으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머리수건을 높이 쓸 수 있는 두상(頭相;머리의 상호, 즉 머리의 생김새)’이라는 자연적인 의미가 ‘육계상’이라는 신비적 의미로 이상화됨으로써 두상 표현을 육계의 형태로 유도해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네덜란드의 미술사학자 반 로하이젠(Van Lohuizen de Leeuw) 여사는 양식사 (樣式史)적인 견해에 주안점을 두고 상투 표현의 양식화 결과로 서기 1세기 말경에 간다라 조각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에서 우스니샤 실샤가 육계라는 제2 의미로 변전(變轉)하였다고 주장하여 쿠마라스와미에게 맞섰다.

두 이론이 결국 우스니샤 실샤의 양대 의미를 모두 인정하고 양식 진전과 의미 변화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에서는 공감하면서도 결국 양식 진전이 먼저냐 의미 변화가 먼저냐 하는 것으로 대립한 것이다.

이는 반 로하이젠 여사가 쿠마라스와미의 주장을 지나치게 의식해 제기한 반론이라 할 것이니, 구태여 선후문제를 따질 것이 아니라 표리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그래서 경전(經典)이 한역(漢譯)되던 시기인 3세기 이후에는 우스니샤 실샤의 의미가 모두 육계로 바뀐 듯하다. 한역 경전에서는 고역시대(古譯時代; 후한, 서진)부터 구역시대 (舊譯時代;남북조)에 걸쳐 모두 ‘육계’로 번역하고 있다. 다만 당대 이후 신역시대(新譯時代)에 이르면 우스니샤 실샤의 음역(音譯)인 오슬니사(烏瑟춁沙)로 쓰고 있지만 혜림 (慧琳, 737~820년)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권 4 오슬니사조에 “범어(梵語)니, 여래의 정상(頂相;정수리 상호)을 일컫는 이름이다.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에 이르기를 여래 정상의 육계는 둥근데 가운데가 우뚝 솟아서 드높고 단정하여 위엄이 있는 것이 천개 (天蓋)와 같다고 했으며, 또 하나의 번역에서는 무견정상(無見頂相;볼 수 없는 정수리 상호) 이라 하니 각각 깊은 뜻이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오슬니사도 육계의 의미로 쓰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육계를 칭송하는 대승경전

뿐만 아니라 많은 대승경전들에서는 이 육계상을 선행(善行)의 과보(果報)로 나타난 상서로운 상호로 합리화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失譯 在後漢錄] 권 7에서는 “선행을 잊은 자에게 생각나게 하고, 스스로 오계(五戒)를 지키며, 돌이켜 남을 가르치고, 자비심으로 큰 법보시를 행한 공덕으로 육계상을 얻었다” 하였으며, ‘현겁경(賢劫經)’[300 혹은 291, 竺法護 번역] 권 3, 32상품 11에서는 “보시보(布施報)와 지계보(持戒報)에 의해서 육계를 얻었다”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우바이정행법문경 (優婆夷淨行法門經)’[失譯 附北凉錄, 397~439년] 권 상·하에서도 “신구의업(身口意業)으로 보시 지계를 실천하고 달마다 육재(六齋)를 닦고 부모, 사문(沙門;승려), 바라문(婆羅門), 친구, 일가붙이, 덕망 있는 노인 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에 육계상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281년, 西晋 竺法護 번역] 권 4, 32상품 제9에서는 “어진 이를 공경하여 받들고 존장에게 예절을 지킨 까닭으로 육계상을 얻었다” 하였으며, ‘불설무상의경(佛說無上依經)’[557년, 梁 眞諦 번역] 권 하 여래공덕품(如來功德品) 제4에서는 “십선(十善)을 스스로 행하고 남에게 수행하도록 가르치며 수행자를 보면 환희찬탄 (歡喜讚歎)하여 한량없는 대비심(大悲心)으로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큰 맹세하는 마음을 내 바른 법을 거둬들인 업연(業緣)으로 두 종류의 상호를 얻으니 그 하나가 울니사상 (鬱尼沙相)으로 정골(頂骨)이 솟아올라 자연히 상투를 이루었다” 하였다.

이들은 모두 대승경전에 속하는 불경이다. 따라서 육계상을 포함한 32대인상을 불타만이 가질 수 있는 공덕상(功德相; 공덕을 지은 결과로 얻은 상호)으로 개별적인 합리성을 부여하는 것은 대승사상의 출현 이후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는데, 이 <불입상>에서 보인 것처럼 양식화된 상양식의 비현실적인 인체의 특징(양식화된 북상투)을 특상으로 수용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불상 출현이 대승사상과 관련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증거의 하나로 꼽아야 할 일인 듯하다.

손발이 모두 파손되었을 뿐 광배(光背)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어 2세기 말경이라고 생각되는 양식단계를 대표하는 좋은 자료다. 상투끈이 사라져서 상투는 육계로 신비화되고, 코밑수염도 소멸하여 고졸(古拙)한 미소인 듯 윗입술에 흔적만 남겼으며, 눈은 반쯤 감고 내려다보는 명상형(瞑想形)으로 이상화되었고, 귓불은 귀고리를 단 듯 길게 늘어져서 특상으로 신비화가 완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제반 신비적 요소들은 양식 진전이 그 절정에 이르면서 나타난 양식화 현상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육계(肉쬇)와 나발(螺髮)


2세기 후반기부터 조각기법상 양식화 현상을 보여 사실적인 인체 표현의 의미를 상실하기 시작한 불상은 첫째로 상투끈을 표현하지 않았는데도 상투가 매어져 있는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 육계로의 신비화를 진행시켰고, 둘째로 코밑수염이 소멸하여 흔적만 남김으로써 결과적으로 윗입술을 긴장시킨 고졸(古拙)한 미소를 짓게 하였으며, 다시 귓불을 지나치게 늘여 귀고리 장식에 유리한 모습을 나타냈다.

이것은 분명히 양식화 진행에서 이루어진 세부 표현의 원의(原意) 상실에서 기인한 퇴영양식(退창樣式)으로 보아야 하는데, 불교 교단에서는 오히려 이런 양식화 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신비적인 요소로 소화시켜 나간 듯하다.

그래서 본래 32대인상 중의 하나로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할 수 있게 높고 큰 상투를 틀 수 있는 숱 많은 머리라는 의미인 ‘우스니샤 실샤’가 정수리의 살이 상투 모양으로 솟아올라 있다는 ‘육계’의 의미로 신비화되고, 귀고리 장식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늘어진 귓불이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 10에서 “고리 끼우는 곳이 실하게 늘어져 있다”고 말하였듯이 정도 이상으로 늘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유행상(遊行相; 돌아다니는 모습)을 기본으로 하는 입상의 경우 왼손으로는 대의 (大衣) 자락을 잡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게 쭉 펴 보여서 두려움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손짓을 짓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것은 마투라와 간다라 입상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 경우 이들 손가락을 하나하나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칫 파손되기 쉬운 결점이 따른다. 그래서 마투라의 경우는 쳐든 손의 손등 뒤에 정면으로 보이지 않도록 꽃봉오리 모양의 받침을 어깨에 수평으로 연결시켜놓는 기법을 사용하였고, 간다라에서는 손가락 사이를 서로 연결시켜 개별적인 파손을 막았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마치 손가락 사이에 막(膜)이 형성된 것처럼 보이게 했는데 불교 교단에서는 이것 역시 신비적인 요소로 긍정하였다. 32상의 “손발에 물갈퀴가 있어 기러기 왕과 같다”는 항목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젊어지는 부처상

어쨌든 2세기 후반으로부터 불상의 양식 진전과 신비화의 진행은 표현과 의미 부여의 양대 요소가 표리를 이루면서 활발하게 변천해가는데, 3세기 전반에 이르면 그 정도가 우심(尤甚)해진다. 라호르 중앙박물관 소장의 <불입상>(도판 10)도 기법상의 양식화와 불신관(佛身 觀;부처님 몸에 대한 생각)에서의 신비화가 한창 진행되던 3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 중의 하나이다.

우선 머리 모양을 보면 상투 밑부분은 곱슬머리 모양의 자연 상태 그대로인데 상투 부분을 보면 덩어리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돌고 있어서 이른바 나발(螺髮;소라껍데기 모양으로 돌아 올라간 머리카락) 형태를 짓고 있다. 이미 상투끈으로 매어진 자연계의 사실적인 의미는 흔적 없이 사라졌고 육계이면서도 그 부분만은 나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본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의 <불입상>에서 상투 밑머리의 연장 표현이던 육계 부분의 머리 표현보다 분명히 한 단계 더 양식 진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양식 진전이 하필이면 이와 같이 나발 형태로 진행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불경에서 들고 있는 부처님의 특상인 32상의 내용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중아함경’ 권 11 왕상응품(王相應品) 삼십이상경(三十二相經)에서는 “정수리에 육계가 있어 둥글고 가지런하며 머리카락은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른다” 하는 항목을 들고 있으며, 이보다 대승 색채가 농후한 ‘방광대장엄경’ 권 3에서는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 같은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고 빛은 검푸르다”는 두 항목을 들고 있는데 모두 머리카락이 나발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로써 나발의 표현을 육계로부터 시도해낸 듯한데, 곱슬머리가 지나치게 곱슬거릴 때도 나발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곱슬머리 표현의 자연적인 양식 진전의 당연한 귀결이 이와 연결되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는 것을 나발이라 하는 것은 마투라 불상에서 보이던 나계(螺쬇;우렁상투)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마투라 불상을 이야기하는 기회에 자세히 밝히기로 하겠다.

수염이 사라지는 것도 마투라불상에서 적용되고 있던 불신소년신관(佛身少年身觀; 부처님 몸은 영원히 소년의 몸이라는 생각)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입상에서도 수염 흔적은 더욱 엷어져서 수줍은 듯 미소짓는 앳된 소년의 용모로 변하고 있다.

굵은 목과 윤곽이 분명한 이목구비, 고졸한 미소, 이런 것들이 그리스 신상(神像)과 상통하는 점이 있어 이의 영향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간다라 불상이 마투라 불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스스로의 양식진전에 의해 이룩한 독자적인 기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불전에 나타난 32대인상을 비롯한 불신관이 음양으로 작용하였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무외인을 하였을 오른손이 파손되었을 뿐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대좌의 정면에는 사리탑(舍利塔)을 공양하는 비구들의 모습이 부조되어 아직도 사리(舍利)신앙이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지나치게 크지 않은 두 원광에 장식이 없는 것은 간다라 불상 양식의 전통을 잘 계승하는 것이다.


황홀한 아름다움 보여주는 페샤와르의 불입상

3세기 중기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한 간다라 지역에서는 쿠샨 왕조의 번영과 함께 수도권 문화의 난만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난숙기 문화의 특성이 모두 그렇듯이 극도의 세련(洗練)과 전형(典型)의 형성이라는 양대 국면이 전개되어 미술 양식에서는 완성된 양식으로 표준화되어 간다.

키는 130cm 내외이고, 어깨는 둥글어 체구에서 여성화 현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얼굴은 수염 흔적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앳된 소년의 용모로 바뀌는데 수염의 흔적이 남아 고졸한 미소를 보이던 전 단계의 그것에 비해 훨씬 자유로워진 가녀린 미소를 머금는다. 그래서 훨씬 더 이지적이고 냉철한 표정이 되었는데 이것이 당시 사회의 세련된 귀족적 풍모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의 다울라트 출토 <불입상>(도판 11)이다. 이 <불입상>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눈은 더욱 실눈으로 감기고 귓불은 더욱 길어져서 냉소인 듯 엷은 미소와 함께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나, 자칫 냉엄한 신비 속에서 교태가 배어날 듯 위태로운 면이 없지 않다. 이것이 난숙기 미술품이 가지는 황홀한 아름다움이다.

이 불상에 신비적인 요소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머리카락의 전면 나발화(螺髮化) 현상이다. 바로 전단계에 육계로부터 시작된 나발의 표현이 이제 두발 전면으로 확산되어, 종래 곱슬머리의 자연스러운 두발 표현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 대신 머리카락은 마치 옥수수 알이 박힌 듯이, 작은 소라껍데기를 질서 정연하게 늘어놓은 듯한 도식적 표현으로 바뀌었다.

이는 미술사적으로 볼 때 양식화의 진행이 가져온 도식적인 표현의 확산이라는 기법상의 뒷걸음질 현상으로 파악해야 할 요소다. 그러나 미술사의 진행 과정에 이렇게 굳어지는 현상이 의외로 하나의 틀로 자리잡는 경우가 허다한데 대개 이들이 신비적인 요소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이러한 전면 나발화 현상이 이후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물론 여기에는 앞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부처님 머리카락은 오른쪽으로 돈다는 32상 중의 한 항목을 현실화시켜 부처님 머리카락의 특상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는 교리적인 배경이 작용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원시경전에서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돈다고 한 것은 우렁상투를 틀 때 전체 두발이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간다는 의미였으므로, 그 본래 의미는 하나 하나의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돌아서 각각 소라껍데기 모양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와 같이 두발을 전면 나발화시키고 난 다음 단계에서는 교단 쪽에서 오히려 이에 합리성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전면 나발화 현상이 이루어진 이 불상의 출현을 의식하고 기술되었다고 생각되는 ‘선비요법경(禪벙要法經)’[402~412년, 후한의 구라마습 등이 번역] 권 중(中)이나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398~421년, 東晋 佛陀跋陀羅 번역] 권 1 관상품(觀相品) 등 대승경전에, 부처님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소라껍데기처럼 오른쪽으로 말려 있는데 그것을 쭉 뽑아 늘이면 길이가 1장 2척(또는 1장 2척 5촌)이 되고 놓으면 다시 도르르 말려서 소라껍데기처럼 된다고 기록된 것 등이 이를 증명해준다.

어떻든 이러한 단계적인 양식 진전과 교단의 추후 인정이라는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부처님의 특상 중의 특상인 나발이 형성돼온 것을 우리는 이 불상을 통해서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이 불상 양식은 바로 이후 불상의 전범(典範)이 될 만큼 양식적으로 거의 완벽하다고 보아야 하겠다. 즉 신격으로서의 불상양식이 이제야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맨 처음 간다라 미술에서 출현했던 <기원보시도>의 위엄 있는 중년왕자풍 불상이 보이던 자연인으로서의 사실적인 표현과 비교해볼 때 하늘과 땅만큼 용모의 변화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기본적인 자세에 있어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아무 장식 없는 원판형두광이 그대로이고 양쪽 어깨를 덮어 내린 후직의(厚織衣;두꺼운 천으로 짠 옷)의 통견의복 표현에도 큰 변화가 없다. 다만 옷주름선이 복잡해지고 치마의 아랫부분이 넓어져서 세련된 표현을 보일 뿐이다.

손은 양쪽이 파손되어 자세한 모양을 알 수 없지만 <기원보시도>로부터 입상의 기본적인 자세인 시무외인 형태로 미루어보아 오른손은 어깨 가까이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옷자락을 잡은 모습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양발은 맨발인 채 좌대를 밟고 서 있다. ‘중아함경’ 권 11 왕상응품(王相應品)에서 32상을 열거하는 가운데 발에 대해 제1에서 제6까지 무려 6항목을 첫머리에 들고 있는 것처럼, 이 불입상의 발은 발가락이 가늘고 긴 편평족에 복사뼈가 두드러지지 않은 단정한 생김새다. 1000개의 살이 달린 수레바퀴 문양이 있다는 발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손·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는 것은 확인된다.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나타나므로 파괴된 손가락 사이에도 그것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좌대 정면에는 4부대중이 탑을 공양하는 광경이 부조돼 있어 탑파신앙의 여운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양식의 파탄 현상

3세기 말경에 이르면 쿠샨제국이 노쇠해지면서 불상에서도 양식 파탄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호르 중앙박물관 소장의 <불좌상>(도판 12)이라 할 수 있다.이를 통해 그 실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불좌상은 양식파탄을 보인 퇴영양식이다. 육계 부위가 나발화돼 있는데 상투끈뿐만 아니라 상투구슬의 표현이 분명하고 상투 아래는 편도 모양의 머리카락이 있어 간다라 불두의 변천과정 가운데 어느 단계에도 편입시킬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좁은 이마에 눈썹과 눈자위 위에 윤곽선이 가해지고 두 눈썹이 백호 아래에서 연결돼 마투라 후기 양식에서 보이던 특징까지 나타난다. 귓불은 늘어지고, 코밑수염이 양감있게 표현되며, 목에는 삼도 (三道;세 가닥의 목줄선)가 분명하고, 옷주름 표현에는 마투라적인 음각선이 첨가되는 등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에서 보이던 모든 양식적 특색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이로 보면 이 불상은 이미 간다라에서 양식 진전의 한계를 보인 3세기 후기에 종래의 모든 양식적 특색을 아무 생각 없이 혼합하여 이루어낸 파탄양식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파탄양식이 양식으로 정립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런 파탄 양식은 몇몇 일관되지 않은 양식의 불보살상을 남기고 소멸한 듯 그 유례가 많지 않다. 쿠샨제국 문화의 노쇠화를 반영하는 양식파탄현상인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8/nd99080450.html


[우리문화 바로보기 (2)]

부처님 머리는 왜 솟아 있는가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마투라 불상의 출현

     기전 2세기는 세계사의 판도가 달라지던 중대한 시기였다. 서방세계에서는 그리스와 로마가 패권을 다툰 끝에 대로마제국이 이루어졌으며, 동방세계에서는 흉노와 한(漢)이 천하를 다투다가 흉노가 한에 밀림으로써 민족 대이동의 단서를 열어놓았다. 그 결과 인도 대륙은 쫓기는 흉노세력에 밀려 내려오는 샤카(塞, aka)족, 월지족 등 북방 유목민족들의 연쇄적인 침략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서북인도 지역은 물론이려니와 중인도의 서북지방까지도 이들 유목민족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이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슝가왕조는 이들의 침공에 시달리느라 피폐해져서 상신(相臣) 바수데바(婆須提婆)에게 왕위를 찬탈당한다. 그러나 바수데바가 수립한 칸바왕조(Knba·서기전 72∼서기전 27년)도 반세기 미만에 남인도의 안드라왕조에 멸망되고 만다(서기전 27년).

안드라왕조는 중인도를 방패로 하여 외침에 시달리지 않고 착실하게 성장해왔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이때부터 중인도 지역은 이민족의 지배와 군웅할거의 단계로 돌입해, 사회분위기는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띠게 된다.

특히 동·서세계가 각각 대제국으로 안정되면서 상대방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기한 물품을 대량으로 요구함으로써 서북인도가 그 중개무역의 중심지로 상업적인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 세력이 다시 중인도 지방으로 확산되자 서북인도와 중인도의 교통요로에 위치한 마투라(Mathura-)는 상업도시로 급성장한다.

그래서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더욱 진취적인 사상 경향이 뿌리를 내리니 이것이 대승사상의 정착이었다. 이에 마투라에서도 대승사상을 바탕으로 불전도에서 불타의 모습을 사람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던 오랜 전통을 깨고 불상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중인도는 교조(敎祖) 석가모니불의 역사적인 활동 무대로, 불타의 발자취가 생생히 남아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불타의 형상을 표현해내는 데도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던 듯, 초기에는 많은 불전도 중에서 전통적인 상징물과 함께 성불(成佛) 이전의 불타, 즉 보살 수행시의 불타부터 인체 표현을 시도했다. 이는 탑문(塔門) 장식의 부조[浮彫;돋을새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는 곧 예배 대상으로 삼을 불상을 제작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마투라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진취적인 기상과 상업적인 부가 예배상의 조성을 갈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여기에는 이 지방을 다스리는 절대권자인 태수(太守, mahksatrapa)의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종교정책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간다라 불상과 순인도적 불상

그러나 불상이 처음 출현하는 1세기 말기에서 2세기 전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불상을 만들어놓고도 그것을 불상이라 표현하지 못했으니, 이는 카트라(Katr)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菩薩銘佛三尊碑像)> (도판 1)의 대좌에 새겨진 브라흐미[brahm 梵字; 고대인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표음문자] 문자의 명문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다라키타(Buddharakhita)의 어머니 아모하아시(Amoh-s)는 자신의 절에 보살상을 만들어 모신다. 일체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그런데 이 비상(碑像)이 보살상이 아니고 불상이라는 것은, 이보다 조금 뒤에 이와 똑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지면서 불상이라는 명문을 새겨 놓은 다른 삼존불비상에서 확인된다.

이 삼존비상은 대체로 마투라가 쿠샨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간 이후인 2세기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거의 동시대에 출현하는 간다라 불상과는 양식적으로 전혀 상이한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간다라 불상이 그리스 조형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이 마투라 불상은 순인도적인 조형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체[肢體;팔다리와 몸통]를 과장되게 표현하여 힘차고 안정감 있는 결가부좌[結跏趺坐;다리를 꼬아 책상다리를 한 앉음새]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조상(造像)의 선례는 이미 서기전 3000년경 순인도적인 인더스문명의 유적층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 배꼽이 내비치는 얇은 옷의 표현도 아쇼카왕 시대 이래의 야차신상(夜叉神像)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타의 고향답게 ‘부처님 몸은 항상 젊고 늙지 않는다(佛身常少不老)’는 불신소년신관[佛身少年身觀; 부처님 몸은 소년의 몸이라는 생각]에 입각하여 처음부터 불상을 소년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654년, 唐 阿地瞿多 번역] 권5에서 “여래(如來)의 형상은 16세 동자(童子)와 같다”는 등 불신소년상(佛身少年相)을 주장하는 경전의 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 모양도 성인식을 갓 치르고 난 동자의 머리인 주라(周羅, cda)나계[螺쬇;주변의 머리칼을 깎아버리고 정수리의 머리칼만 모아서 소라껍데기 모양으로 틀어올린 상투]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수염 하나 나지 않은 동안(童顔)으로 탐스럽고 둥글며 싱싱하다. 이목구비가 분명하고 시원스러워 우람한 체구와 함께 육감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는데, 이는 옷주름이 없다면 나체로 보일 만큼 얇은 의복표현이 가져오는 효과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의복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놓도록 대의[大衣;맨 위에 입는 겉옷으로 승가리라 부르는 장방포(長方布)인데 우리는 보통 가사라고 부른다]를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빼내, 왼쪽 어깨 너머로 넘겨 입는 편단우견[偏袒右肩;오른쪽 어깨만 드러냄]의 옷 입는 법으로 표현돼 있다. 손바닥에는 윤보(輪寶) 표시가 분명하고, 눈썹 사이에 백호(白毫)가 있어 높은 상투와 함께 역시 경전에서 이야기되는 32상(相)의 기본 요건에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간다라불상에 비해 거대한 원광(圓光)을 지고 있으며, 그 뒤로는 보리수라고 생각되는 장식이 있고, 그 위에는 비천(飛天)이 좌우에서 날고 있으며, 불타의 좌우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의 왕이라고 생각되는 협시인물(脇侍人物)이 각각 불자[拂子;먼지떨이]를 들고 시립하였다. 세 마리 사자가 좌대를 받치고 있어 사자좌(獅子座)를 상징한다. 이것이 삼존불상의 시원양식(始原樣式)이라 하겠다.

   

양식화의 진행

    진보적인 대승사상과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중인도 불상을 탄생시킨 마투라는 불상 조성의 성역이었다. 특히 부근 시크리(Sikri)에서 산출되는 적색사암이 불상 조성의 재료로 환영받음으로써, 카니쉬카 대왕의 성세(盛世)를 지나서까지도 마투라에서의 불상 조성은 계속 활기를 띠었다. 가위, 마투라는 불상시대 이후 중인도 불교미술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었다.

인도 뉴델리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32년명불삼존비상>(도판 2)도 역시 마투라 공방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예배상으로, 마투라 부근 아히차트라(Ahicchatr)의 절터에서 출토된 것이다.

한눈에도 앞서 살펴본 카트라 출토의 <‘보살’명불삼존비상>(도판 1)과 동일양식 계열의 삼존비상임을 알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보살’이라는 구차한 명문(銘文)도 들어 있지 않다. ‘32년 겨울 4월8일 비라나(Virana)비구가 부모 일족과 함께 기증한다. 노비구들과 그 여러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비구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라는 간단한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불상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불상으로 알고 만들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명(王名)이 없이 32년이라 한 것은 카니쉬카대왕 이후에는 그 위덕(威德)을 기리기 위해 카니쉬카대왕 기년(紀年)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카니쉬카대왕 이후를 역사에서는 제2쿠샨시대라고도 한다.

이 예배상은 서기 160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카니쉬카대왕의 즉위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론이 있으나 현재 비명학자나 미술사가들이 서기 128년 설에 대체로 동조하고 있다). 카니쉬카대왕 이전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보살’명불삼존비상>과 비교하여 보면 양식적으로도 그만한 시차의 진전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불상에서 소라껍데기와 같이 틀어올린 주라나계의 사실적인 표현이 본뜻을 상실하고 삼층 뿔 모양으로 무의미하게 양식화되었으며, 얼굴 모습도 순진무구한 동안에서 노성한 장년기의 엄숙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힘차게 솟아오른 가슴과 길고 날씬한 허리에 적당히 발달된 근육이 보여주던 이상적인 인체미가, 밋밋하고 힘없는 조각 기법으로 둔화되었으며 지체도 약화되었다. 그래서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이 가지는 건강미나 순진성, 육감적인 매력까지 모두 소멸되고 있다.

이는 미술사에서 항상 반복되는 양식변천의 과정이기도 하다. 어느 한 양식이 이루어진 다음 그것을 무의미하게 답습 모방할 때 빚어지는 양식화 현상인 것이다. 이런 양식화의 진행 과정에 다른 양식의 영향이 그것을 더욱 가속화하는 것이 또한 예사니, 여기서도 간다라불상의 근엄한 용모가 동안을 노화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사자가 표현돼 있는 좌대 정면에 보리수를 둘러싼 인물상의 표현이 바로 간다라불상의 좌대양식이라는 점은 이 사실에 더욱 신빙성을 부여한다.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에서는 시무외인[施無畏印;오른손을 어깨높이로 쳐들어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손짓]을 한 손이 쉽게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꽃모양 화침[花枕;꽃베개] 으로 비체[碑體;비상의 몸통]와 연결시켰는데, <32년명불삼존비상>에서는 손을 직접 비체에 붙여 조각함으로써 불필요한 화침을 제거하였다. 이것은 선의의 양식 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를 호위하는 범천과 제석

협시한 두 인물은 대승사상이 일반화된 후대의 삼존불에서라면 분명히 보살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주존을 ‘보살’이라고 명기하고 있는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에서는 범천과 제석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26 향보리수품(向菩提樹品) 중(中)이나 같은 경전 권33 범천근청품(梵天勤請品) 하(下)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범왕[梵王;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주재자로 사바세계의 주인]과 제석[帝釋;도리천(利天)의 주인으로 수미산(須彌山) 위 33천(天) 중 중앙 선견성(善見城)에 거주하며 사천왕(四天王)을 거느린다]은 항상 불타의 주변을 감돌면서 보호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경전 권31 석여마경품(昔與魔競品) 제34에서는 불타께서 대각을 이루신 후 여러 천인(天人)들이 꽃비를 내리며 달려와 찬탄하였다고 한다. 배경으로 표현된 보리수나무로 보아 이 <32년명불삼존비상>은 대각의 장면을 상정(想定)하여 만들어진 예배상이 분명하므로 협시도 여러 천인의 대표인 범왕과 제석이라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에서는 두 협시상이 각각 불자(拂子)를 들고 시립해 있다. 그런데 이 비상에서는 이들의 지물(持物)이 불자가 아니라 왼쪽은 연꽃, 오른쪽은 금강저(金剛杵)이다. 이로 말미암아 일부 미술사가들은 이들을 후세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연화수(蓮花手)보살과 금강수(金剛手)보살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과 자세히 비교하면 오른쪽은 불자의 자루가 과장돼 금강저로 양식화되고 왼쪽은 불자의 머리가 잘못 이해돼 연화로 표시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무의미한 양식화의 결과로 빚어진 표현의 오류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양식화 현상이 장차 현실화해 보살상으로 진전함으로써 후세의 삼존불로 되어간 것은 사실이다. 협시의 의복 표현도 카트라상에서 보이던 마투라식의 투박의(透薄衣;투명하게 비치는 얇은 옷)가 아니고 간다라 영향을 생각할 수 있는, 두껍게 짠 옷이다. 보리수의 표현은 사실성을 상실하고 소략한 음각선으로 기계적인 처리를 하였다.

   

성인식과 소라 상투

고대 인도사회는 바라문교(婆羅門敎, brhmanism)사상에 입각하여 사성제(四姓制, caste)의 엄격한 계급 의식에 지배되고 있었다. 바라문교 승려층인 바라문(brhmana)들은 신을 대신하여 사회를 이끌어가는 최고계급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신권이 왕권 위에 군림하는 신정(神政)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사회제도가 종교의식에 방불하여 많은 사회의식이 엄수되었다.

그중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누구나 치러야 하는 의식으로 결발식 (結髮式, cdkarman)과 치발식(kenta)이 있었다. 결발식은 성동식(成童式), 즉 동자가 되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의식은 계급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생후 1년에서 7년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문자 그대로 머리칼을 모아서 정수리에 묶어놓는 의식으로 동자가 되었음을 세상에 알리는 의식이었다.

다음 치발식은 동자기를 지나서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으로 바라문은 16세에, 크샤트리아는 22세에, 베이샤는 24세에 각각 치렀다고 한다. 이 의식은 정수리를 제외한 모든 머리칼을 밀어버리고, 정수리의 머리칼만 가지고 상투를 틀어올리는 것이었다. 이런 상투를 주라(周羅)라 하였으니 산스크리트어인 츄다(cuda)와 팔리어인 츌라(cla)를 한자로 음역한 말이다. 그래서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605∼ 616년, 隋 達摩쳥多 번역] 권1에도 이렇게 주석을 달고 있다.

“주라라는 것은 수나라 말로 상투라는 의미다. 외국인들은 정수리 위에 조금 남긴 긴 머리로 상투를 튼다.”

‘불설입세아비담론(佛說立世阿毘曇論)’[559년, 陳 眞諦 번역] 권6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혹은 정상에 하나의 상투를 남기고 남은 머리칼을 모두 깎으니 주라계(周羅쬇)라고 한다.”

이 치발식은 중국문화권의 관례(冠禮)와 같은 일종의 성인식으로, 이를 치르고 난 이후부터는 사회적으로 성인 대접을 받고 상투를 틀어올릴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인도인들은 치발식을 갓 치르고 났을 때만 이런 주라계를 틀고 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투라 불상의 불두를 보면 바로 이런 치발식을 치르고 난 형태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머리 모양은 이미 앞서 본 카트라 출토의 <‘보살’명불삼존비상>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트라상에서는 머리칼을 틀어올려서 나계를 만들고 그 상단에 동곳모양의 상투구슬(쬇珠)로 고정시킨 사실적인 표현의 주라나계였다.

그렇다면 마투라에서는 불상을 출현시킬 때 처음부터 성인식을 막 치르고 난 청년상을 본보기로 하였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간다라 불상의 초기 형태인, 코밑수염이 무성한 장년기의 근엄한 왕자상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리스 조각 전통을 이어받은 간다라 쪽에서 미모의 청년신상으로 불타를 표현해냈음직한데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는 이것을 몇 가지 관점으로 살펴보아야 하겠다.


부처님은 왜 16세 소년 모습일까

인류학상 인도유럽인으로 분류되는 아리안족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상소불로[常少不老;항상 젊고 늙지 않음]의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고대기 미술에 있어서 야차나 야차녀 등 잡신일지라도 항상 청년상으로 표현해내고 있으며, 원시경전 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마나바[摩納婆, mnava;젊은 수행자]가 항상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이에 불타가 신격화하면서부터는 전통적인 신상관(神像觀)에 입각하여 불신상소불로[佛身常少不老; 부처님 몸은 항상 젊고 늙지 않음]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불신관(佛身觀)의 한 요소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불신상소불로의 내용은 대승경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대표적인 것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불설급고장자녀득도인연경(佛說給孤長者女得度因緣經)’[980년, 宋 施護 번역) 권 상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세존(佛世尊)이란 분은 … 모든 곳의 상호(相好)가 단정엄숙하게 잘 갖추어 있고 소년상을 나타내는데, 뛰어나고 미묘하기가 비길데 없다.”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 권5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부처님의 형상은 16세 동자와 같다.”

그리고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660∼663년, 唐 玄 번역] 권381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존의 얼굴 모습은 항상 젊고 늙지 않는다.”

따라서 인도적인 전통에 충실했던 마투라에서는 이런 경전들의 불신관에 입각하여 애초에 16세 소년, 즉 바라문 계급이 이제 막 치발식을 치르고 났을 때의 모습을 본보기로 하여 불상을 만들어냈다고 보아야겠다.

이에 반해서 간다라에서는 비록 그리스의 조형기반으로부터 출발했다고는 하나 페르시아와 월지족 등 잡다한 문화 전통이 뒤섞여 있었고 역사적 인물로 불타의 면목을 상상할 수 없었던 이역(異域)이었다. 따라서 간다라에서는 다만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모습과 같다는 대인상관(大人相觀)에 의해서 당시 군림한 왕자의 상을 본보기로 했기에 그와 같은 장년상의 불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후 곧 마투라의 영향을 받자마자 간다라에서도 수염을 감소시켜가며 동안형의 청년상을 지향하게 됐을 것이다.

인도 마투라박물관이 소장한 차우바라 출토 <3층나계를 가진 불두(佛頭)>(도판 3)는 앞서 든 <32년명불삼존비상>(도판 2)보다도 더욱 양식 진전이 노골화되고 있어, 주라나계가 복발형[覆鉢形;사발을 엎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의 3층탑 모양으로 양식화했다. 다만 표면에 머리칼을 상징하는 가지런한 가로 줄무늬가 무수히 표현되어 아직 상투의 의미는 유지되고 있다. 아래 위 눈꺼풀이 확대되어 상대적으로 눈이 반개(半開) 형태에 가까워지고, 눈 가장자리를 강조하는 테가 굵게 표현되었으며, 입술 윤곽도 같은 수법으로 강조되어 길게 늘어진 귓불과 함께 양식화 현상이 노골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장차 굽타불상의 신비주의 양식에 연결될 조짐을 보이는 특징들인데, 이런 과장적인 요소들이 오히려 얼굴 전체에 청년다운 순진성과 활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간다라 영향과 신비한 육계

카니쉬카대왕의 인도 통일이 중인도의 마투라에서 출현한 순인도적인 불상양식과 서북인도의 간다라에서 출현한 그리스적인 불상양식을 신속하게 융화시켜 나갔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대체로 간다라지방에서는 카니쉬카대왕의 치세 후반기인 2세기 중반에 이미 간다라불상의 양식기반 위에 마투라식의 편단우견, 양족노출[兩足露出;두 발을 드러냄] 및 사자좌의 특징을 도입하고 설법인 [說法印;설법할 때 만들어지는 손짓. 오른손을 높이 들고 왼손을 낮게 들어 엄지손가락과 둘째 혹은 셋째 넷째 손가락을 마주 대게 한다]이라는 독창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새로운 양식의 불설법좌상을 출현시켰다. 일종의 혼합양식을 창안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마투라지역에서는 서기 160년에 만들어진 <32년명불삼존비상>(도판 2)에서 겨우 협시천왕의 치마 표현에 간다라식의 두껍게 짠 옷 표현이 가해지고, 대좌에 성수(聖樹)를 예배공양하는 인물상의 부조가 나타나는 정도다. 이런 소극적인 영향은 중인도가 가지는 보수적인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보수성도 결국 쿠샨제국의 정령(政令)이 미치는 동일 국토 내에 존재한다는 정치적인 이유와 함께 승려들의 활발한 교류에 의해 조만간 깨뜨려지게 된다.

우리는 그 물증을 마투라박물관 소장의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도판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불입상은 용모로 보면 틀림없는 마투라식 불상이다. 비록 약간 노성한 듯한 느낌이지만 마투라불의 앳된 얼굴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으며 상투도 비록 머리칼 표현은 사라졌지만 주라나계의 잔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주변에 연호문[連弧文;원의 일부분인 호를 연속적으로 반복시켜 만들어낸 무늬]을 두른 대형 광배와 시무외인을 한 오른손 뒤에 받친 화침에 이르면 마투라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보게 된다.

그런데 문득 의복에 이르게 되면 돌연 간다라풍으로 바뀌어서 통견후직의[通肩厚織衣;양쪽 어깨를 통틀어 감싸 입은 두껍게 짠 의복]의 형태가 된다. 물론 이 통견후직의는 간다라식의 자연스러운 형태가 아니다. 오른손은 마투라식으로 어깨 위까지 쳐들었는데 옷자락이 따라 올라가지 않고 가지런히 내려가 있으며, 왼손 역시 그와 비슷한 높이로 들어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따라 올라가지 않고 옷 자락이 돌처럼 굳어진 채로 가지런히 내려와 있다. 마치 멕시코인들의 의복과 같이 장방형 포의 가운데를 뚫어 머리를 넣은 듯한 형태다.

따라서 옷주름이 비스듬한 포물선을 긋는 간다라 불의와는 달리 물결무늬와 같은 가지런한 타원형선이 중첩(重疊)된 모양으로 형성돼 있다. 그리고 주름선 자체도 간다라식으로 주름선을 융기(隆起)시킨 것이 아니라 마투라식으로 주름선을 파 나갔다.

이렇게 간다라식 통견후직의에 대한 이해가 덜 된 상태라 하더라도 마투라 불상이 간다라식 통견후직의를 입었다는 사실은 마투라불상 양식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 불상양식은 마투라공방의 혁신적인 조각가들이 시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불입상의 양식이 얼마나 혁신적인 의미를 가졌느냐 하는 것은 머리 생김새의 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제까지 주라나계의 사실적인 표현으로부터 양식화가 진행돼왔지만 아직 그것이 상투라는 의미를 상실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체두[剃頭;깎은 머리] 형태로 주라나계의 머리칼 표현을 완전히 제거해버림으로써 살이 솟아난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즉, 주라나계가 완전히 육계(肉쬇)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렇게 마투라 불상에서 신비로운 육계가 탄생함으로써, 곧 나계(螺쬇)를 전제로 하여 부처님 머리칼 전체가 왼쪽으로 돌아 난다는 32대인상 중의 발모우선상[髮毛右旋相;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도는 상호]은 머리칼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오른쪽으로 돌아 난다는 나발[螺髮;소라 껍데기 모양의 머리칼]로 의미 변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일각두[一角頭;하나의 뿔이 달린 머리]의 민짜 머리에 소라껍데기 같은 나발들을 덧붙여 나가게 된다. 간다라 불상에서 육계가 되고 나발이 되는 것과는 서로 다른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끝에 가서는 육계와 나발이라는 하나의 귀착점에 이르고 있으니, 이는 큰 상투가 인도 사회가 희구하는 신비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됐으리라고 생각된다.

얼굴 모습에서도 초기 불상에서 보이던 발랄한 소년의 천진성이 감소돼 있다. 대신 웃음기를 머금은 약간 감긴 눈과 과장된 입술선이 유도하는 신비로운 미소에 의해서 고요하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강조되고 있다. 이런 모든 요소들이 굽타불상의 선구를 이루어 장차 굽타시대가 되면 세계조각사상 가장 신비로운 인체 표현인 굽타 불상 양식을 이루어내게 된다.

손바닥에 아직 윤보(輪寶)의 표현이 뚜렷이 남아 있지만 다리 이하는 파손되어 대좌(臺座) 형태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런 양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마투라 지역이 쿠샨제국에 점령되어 그 영향이 막강하게 미치던 시기일 것으로 보아야 하니 늦어도 3세기 전반기를 넘지는 않을 듯하다.

   

나발의 생성

마투라박물관 소장 <가로띠에 세로 금 낸 머리칼을 가진 불상 상반신>(도판 5)은 남겨진 상태만 가지고는 입상인지 좌상인지 구분하기 힘든데,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도판 4)을 바로 뒤잇는 양식인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얼굴에서 웃음기 담은 눈과 초생달처럼 입끝을 올려 미소를 상징한 입술 및 분명한 백호(白毫)가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의복도 통견후직의인 간다라식 불의(佛衣)에 음각선으로 옷주름선을 넣은 표현을 계승하였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지은 오른손과 옷자락을 잡은 왼손이 거의 어깨 높이로 올려지고 손바닥에 윤보의 표시가 분명한 것도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 그대로다.

그러나 횡대종선[橫帶縱線;가로로 구역을 나누고 세로로 금을 그음]의 머리칼 표시가 육계를 포함한 머리 전면에 가하여져서 민짜의 깎은 머리 모양에서 나발이 생성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옷주름선도 음각선에 제법 입체감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보여 층단의 기미(機微)가 있으며, 두원광에서는 연호문대(連弧文帶) 안으로 연주문[連珠文;구슬을 연속적으로 반복시켜 만들어낸 무늬] 띠(帶)를 더 추가 장식하는 등의 양식진전이 있다.

이것은 장차 굽타불상으로 넘어가려는 과도기 양식임을 확실히 해주며 마투라불상 양식에서 쿠샨양식과 굽타양식이 연결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분명한 자료다.

<가로띠에 세로 금 낸 머리칼을 가진 불상 상반신>의 상양식을 가장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이 <51년명불좌상>(도판 6)이다. 의복표현은 동일한데 다만 옷주름의 음각이 훨씬 입체성을 띠어 <가로띠에 세로 금 낸 머리칼을 가진 불상 상반신>이 보인 시험조각 형식을 극복하였고, 머리위 전면에 굵은 나발을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 다를 뿐이다. 나발은 <가로띠에 세로 금 낸 머리칼을 가진 불상 상반신>이 보인 횡대종선의 머리칼 표현이 한 단계 더 양식 진전하여 소라껍데기 모양이 된 것이라고 파악된다.

‘51년 여름 제 3월 4(?)일 보살(?像)…대중부(大衆部) 여러 비구의 소원으로 하여’라는 명문이 대좌에 새겨져 있어 카니쉬카대왕 기원 151년(279)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보살’이라는 명문은, 이 불상 양식이 이미 마투라 불상양식에서 굽타 불상양식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에 위치한 것이므로 불상을 ‘보살’이라고 표현하는 초기 단계의 편법이 적용되지 않았을 것이니 [?像]이라는 글자의 오독(誤讀)일 것이다.

또 51년이란 연대는 반 로하이젠 여사가 주장한 것처럼 백자(百字)가 생략되었다고 보아 카니쉬카 대왕 151년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러면 양식사적으로도 타당한 기년이 되니, 이후 4세기에 나타나는 굽타 불상양식이 바로 이를 뒤따르기 때문이다.

대좌에는 중앙에 같은 양식으로 표현된 선정불삼존상(禪定佛三尊像)이 부조되어 있고 좌우에 사자상이 있어 아히차트라 출토 <32년명불삼존비상(佛三尊碑像)>(도판 2)의 사자좌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투라 공방의 신파와 구파

마투라 공방(工房)에서 간다라 불상양식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도 간다라풍의 외형을 성급하게 추종하려는 신파(新派)와 마투라의 조각 전통 속에 이를 용해해들이려는 구파(舊派)의 대립이 있었던 듯하다. 앞서 든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도판 4)이 신파에 속하는 것이라면 마투라 고고박물관 소장의 <22년명불좌상>은 구파에 속하는 것이라 해야겠다.

우선 의복 표현에서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은 간다라식으로 두터운 옷에 같은 간격의 옷주름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오른쪽 어깨로 옷자락이 넘어오면서 만드는 옷주름선의 자연스러운 표현도 망각한 채 실제로는 생길 수 없는 긴 타원형의 음각선을 가슴에서부터 발등에 이르기 까지 같은 간격으로 연속되게 표현하고 있다.

이를 계승한 <51년명불좌상>(도판 6)에서는 의복이 결가부좌한 무릎을 완전히 덮어서 두 발이 노출되지 않는 간다라 좌불(坐佛) 옷주름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에 반하여 <22년명불좌상>은 비록 통견후직의를 받아들이기는 하되, 우선 왼쪽 어깨 부분에서 마투라불 옷주름 전통을 고집하여 평행 수직의 옷주름선을 계승하고 있다. 다만 편단우견법(偏袒右肩法)에 의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 옷주름을 표현할 수 없었던 오른쪽 어깨부분에서만 간다라식의 비스듬한 옷주름 무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결가부좌한 두 발은 마투라전통 양식대로 계속 드러내고 있다.

이로 보면 두 불상양식은 그 출발에서부터 전통의 고수와 탈피라는 대립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대좌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22년 여름 제2월 30일에 불상이 베 짜는 일 하는 사람들의 절(Prvrika vihra) 안에 만들어 세워지다.’

따라서 <22년명불좌상>은 반 로하이젠 여사의 백자(百字) 생략설에 의해서 카니쉬카대왕 기원 122년 (249년) 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라크노주립박물관 소장의 사헤트마헤트 출토 <대형 나발불좌상>(도판 7)은 <22년명불좌상>과 동일한 양식의 불좌상이나, 의습선의 음각 기법이 심화되어 입체성을 띠므로 조금은 뒤늦은 양식일 개연성이 있다. <22년명불좌상>의 머리와 오른쪽이 파손된 것과 달리 <대형 나발불좌상>은 광배와 왼손이 파손되었을 뿐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었는데, 특히 머리가 온전한 것은 이 종류 상양식(像樣式)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

대좌에 ‘사케타(Sketa)의 베 짜는 일 하는 사람(Prvrika)인 시하데바(Sihadeva)의 기증’이라 씌어 있어 <22년명불좌상>에서 ‘베 짜는 일 하는 사람들이 세운 절에 만들어 세운다’고 한 명문의 내용과 관련성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런 보수적인 상양식을 고집한 것이 마투라에서 상당한 경제 기반을 누리고 있던 세습적인 직포업자[인도에서는 일반인들의 외투인 사리(sri)나 승려들의 삼의(三衣)를 모두 치수대로 맞추어 짜내므로, 곧 베 짜는 일 하는 사람이 옷 만드는 일을 겸하게 된다]들일 경우 이들의 보수적 경제 기반이 능히 그렇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은 카트라 출토 <‘보살’명삼존비상>(도판 1)에서 보이던 윤곽이 뚜렷한 동안(童顔)인데 머리에는 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나발의 초기 형태라고 생각되는 굵은 소라껍데기 모양의 돌기들이 시원스럽게 덮여 있다. 시무외인을 지은 오른 손바닥에는 윤보 표지가 뚜렷하고 결가부좌한 발바닥에도 역시 윤보 표지가 있다. 광배의 남은 조각에는 연화문(蓮花文)이 보여 굽타시대의 연화나 초화문(草花文)으로 장식된 화려한 광배의 전구를 보는 듯하다. 양쪽에 사자가 앉아 있고, 그 사이에 좌우로 4위(位)의 협시를 거느린 불좌상이 안치된 대좌도 <22년명불좌상>과 형식이 동일하여 혹시 동시대 동일인(적어도 동일 공방)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비로운 굽타불상

    인도는 고대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고도의 문화 역량을 과시해온 지역이면서도 역사기록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남겨져 있지 않아서 그 역사전개의 과정을 잘 알 수 없는 이상한 나라다. 그래서 서북 인도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이룩하였던 쿠샨왕조의 역사도 매우 불투명하니,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불리던 카니쉬카대왕(128~151년) 전후의 제왕세계(帝王世系)도 확실치 않다. 다만 카니쉬카대왕 이후 100여년 동안 제국의 통치력이 중인도 지역에 계속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후비쉬카(Huvika)니 바수데바(Vsudeva)니 하는 제왕들의 이름과 카니쉬카 기원의 기년명(紀年銘)이 새겨진 비명(碑銘)을 통해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쿠샨왕조는 대체로 바수데바 시기(3세기 후기)에 사산족인 샤풀 1세의 침략을 받아 쇠망한 듯한데, 이로부터 중인도의 제국 영토들은 거의 따로 나뉘어서 독립적인 소국가(小國家) 형태를 유지한다. 이러한 상태가 반세기 이상 지속되다가 갠지스강 하류에 위치한 마가다국의 소왕(小王)이던 찬드라굽타 1세 (CandraguptaⅠ, 320~335년)가 점차 주변을 아우르기 시작하여 왕중왕인 전륜성왕(mahrjdhirja)의 칭호를 얻게 된다.

이로부터 그 아들인 사무드라굽타(Samudragupta, 335~375년)와 손자인 찬드라굽타 2세 (CandraguptaⅡ, 375~414년)의 양대에 걸친 천하통일 정책은 곧 아쇼카왕 시대의 마우리아왕조가 차지했던 영토를 대부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즉 서북은 수틀레지(Sutlej)강으로 이어지는 인더스강을 경계로 하고 북쪽은 히말라야산(雪山)에 이르며 남쪽은 크리슈나(Krishna)강을 경계로 하고 동쪽은 아삼(Assam)지역에 이르는 인도반도 거의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굽타제국의 국력은 인도 역사상 공전절후한 것으로 문화의 발전도 극치에 이르러 인도 문화사상 다시 볼 수 없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더구나 이제까지 이민족의 지배 아래 놓여 외래 문화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왔던 인도인들로서는 중인도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일어난 굽타왕조의 순인도적인 문화 성향에 긍지와 공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왕조가 순인도적인 문화 성향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의 하나로 바라문교(婆羅門敎)를 숭상함으로써 비슈누나 시바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힌두교가 이루어졌고, 이것이 민중 사회에 깊이 침투하게 되었다. 이는 이 시기 중국의 남북 분단과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 및 해로의 개통 등으로 비단길 무역이 위축되어 인도에서도 상업세력이 쇠퇴해갔던 것과도 연관된다. 즉, 굽타제국이 중농정책을 표방한 결과 농업사회를 주도하는 데 알맞은 새로운 이념의 필요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위에 굽타왕조의 절정기를 다스리던 찬드라굽타와 찬드라굽타 2세 및 쿠마라굽타(KumraguptaⅠ, 414~455년)의 3대 왕은 문예(文藝)에 정통한 임금들로 문예부흥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힌두교 문화가 난만한 발전을 보이게 되고, 전시대 이래 융성해온 불교문화 역시 현란한 발전으로 이어지니 불상조각 사상 신비로운 이상미(理想美)의 극치를 이룩했다는 굽타양식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굽타 불상의 특징

당시 불교 교단의 동향을 살펴보면 간다라 출신인 무착(無着), 세친(世親) 형제와 같은 대승론사(大乘論 師)들이 굽타제국 수도인 아유타(阿踰陀, Ayodhy)에 와서 활약하다 서거했다 한다. 이는 서북 인도적인 취향이 강한 논소불교[論疏佛敎;경전에 철학성을 담기 위해 장황한 논리적 해석과 주석을 붙이는 일에 열중하는 불교. 이런 일은 불교를 도리어 어렵게 만들어 대중과 멀어지게 함으로써 불교 소멸의 원인이 되었다]가 굽타왕조의 수도권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미 쿠샨왕조시대 후기로부터 간다라 불상양식의 영향을 받아오던 마투라 조각양식이 점차 간다라 조각의 특징을 소화, 흡수하는 현상을 보이다가 드디어 굽타 성시(盛時)에 이르러서는 간다라적인 특징도 마투라적인 조형감각으로 변형시켜 자기화하는, 순인도 취향의 양식통일을 꾀하는 듯하다.

그 결과 세계 신상사상(神像史上)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운 불상 양식을 창안해내게 된다. 육계와 나발의 분명한 표현, 어깨까지 늘어진 귓불, 수려하고 빼어난 용모에 윤곽이 분명한 이목구비, 삼도(三道)가 둘려진 굵고 긴 목과 늘씬하게 빠진 팔다리 등이 모두 신비감을 강조하는 구체적인 요인들이다.

그 위에 마투라식 투박의[透薄衣;투명하게 비치는 얇은 옷] 기법으로 표현된 간다라식 통견의(通肩衣)에 비쳐 나오는 균형잡힌 청년의 몸매는 육체의 아름다움이라는, 중인도 미술의 전통인 관능미를 더욱 증가시키고 있다.

게다가 간다라풍의 옷주름선이 잔주름 형태의 융기선으로 중첩되어 상쾌하게 나열됨으로써 자칫 관능으로만 흐르기 쉬운 육체미에 신비감을 조성해 준다. 투명한 옷감에서 잔물결처럼 일어난 옷주름이 육신을 보일 듯 말 듯 가려준 결과다. 힘차게 솟아오른, 크고 잘생긴 코와 탐스럽고 탄력있어 보이는 두툼한 입술, 수려하게 빼어난 미목[眉目;눈썹과 눈]에 살집 좋은 동안(童顔)에서도 육감적인 관능미를 실감할 수 있다.

거기에 큰 눈을 반쯤 감아 내려뜨게 하는 명상의 자태를 짓게 함으로써 이를 더욱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손은 간다라식 물갈퀴가 손가락 사이에 표현되고 발가락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남성의 상징인 성기 표현은 비치는 의복 표현에서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는 부처님 성기는 말과 같이 평소에는 속에 감춰져 있다가 필요할 때만 나타난다는 32상 중의 음마장상(陰馬藏相)을 노골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투박의의 표현법을 쓰면서 불상을 신비화시키는 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표현수단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 불상양식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는 두원광[頭圓光;머리 뒤를 둘러싼 둥근 광배, 머리에서 나오는 빛의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이다. 머리를 중심으로 한 대형 원판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마투라식 두원광이 기본이 되고 있다. 쿠샨시대 마투라 불상의 두원광이 다만 원판 둘레에 연호문(連弧文)이 둘러진 간단한 양식이었던 것에 비해, 이제 굽타 성시가 되면 머리 둘레에 4중의 동심원이 그려지면서 그 사이에 공작당초(孔雀唐草) 무늬띠, 소철(蘇鐵)잎 무늬띠, 연주(連珠) 무늬띠 등 복잡한 초화문(草花文) 장식이 가해지는 것이다.

마투라 부근의 자말푸르에서 출토된 <대통령관저소장 불입상>(도판 8)도 이러한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왼손 끝과 오른손, 그리고 두발이 파손되었을 뿐인 이 불입상은 현재 인도 대통령관저에 소장돼 있다.

마투라 고고박물관 소장의 붓디슈왈(Buddhishwar) 출토 <434년명불입상>(도판 9)은 1976년에 발견된 불상이다. 대좌에 굽타 기원 115년(434)이라는 명이 있어 굽타불상 양식 편년에 결정적인 기준을 마련해준 귀중한 자료이다. 쿠마라 굽타 1세(414~455년) 시대에 제작된 것이 분명한 이 불입상은 전체적으로 자말푸르 출토의 <대통령관저소장 불입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일견해 알 수 있다.

선명한 나발의 표현과 작은 육계, 과장된 귓불, 백호의 불표현, 살집 좋은 얼굴에 크고 분명하게 자리잡은 눈과 코와 입술, 반개부시(半開俯視)한 눈, 수려한 눈썹, 뚜렷한 삼도, 통견투박의에 물결치듯 일어난 의습선, 이런 것들이 모두 서로 비슷하여 같은 사람의 솜씨가 아닌가 의심 날 정도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불입상에서는 얼굴에서 인중(人中)의 표현이 얕게 형식화되고 옷주름선도 오른쪽 어깨에서 자연스러운 굴곡(屈曲)이 이루어지지 않고 훨씬 도식적인 처리로 끝나고 있다. 이로 보면 적어도 이 상이 <대통령관저소장 불입상>보다는 반세기 이상 뒤지는 시기의 상양식을 가지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목 뒤로 조금 남겨진 광배에서 빛살이 창날(槍鋒)처럼 연꽃잎 장식을 둘러나간 합리적인 양식화 현상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굽타 불상에서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지은 오른손이 남아 있는 예가 극히 드물어 그 양식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이 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 상이 가지는 자료적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손마디의 상안형[象眼形;코끼리 눈 모양] 표현은 카트라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도판1) 이래의 마투라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고 물갈퀴 형태의 망만[網뇬;살가죽 막]과 윤보표지(輪寶標識) 없이 손금만 표현한 것은 간다라식을 수용한 것으로, 두 양식을 신묘하게 조화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모두 통견투박의의 신양식과 동궤(同軌)를 보이는 양식 기법이다. 비쳐나온 배꼽 아래로 군대[裙帶; 치마 끈] 표현이 엷게 비쳐보여서 치마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의재[衣財;옷감]는 모두 투박성(透薄性)을 띠고 있다. 코 끝이 약간 파손되고 왼손이 떨어져 나갔을 뿐 상 자체는 완전하게 남아 있고, 대좌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마투라 양식의 최후

(도판 10)은 굽타시대의 마투라 불상양식 중에서 조금 독특한 옷주름 표현법을 가진 불상이다. 일반적으로 오른쪽 어깨로 대의(大衣)가 넘어와 왼쪽 어깨로 걸쳐지는 대의(大衣) 입는 법에 따르면 오른쪽 어깨부터 옷주름선이 비스듬히 일어나 물결 무늬를 만들며 점차 중앙으로 내려오게 마련인데, 이 은 다르다. 옷주름선이 옷깃의 중심으로부터 V자형 물결무늬를 일으키기 시작해 그대로 파상[波狀;물결이 일어나 퍼져 나가는 모양]을 연장해 감으로써 V자형의 옷주름이 인체의 중심축을 따라 차례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런 옷주름선 표현법은 간다라식 옷 입는 법을 처음으로 수용하던 단계의 <깎은 머리에 두터운 옷을 입은 불입상>(도판 4)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어서 혹시 이 마투라 신파를 계승한 옷주름 표현법이 아닌가도 생각되나, 아직 다른 예들이 많이 발견되지 않아 성급히 단정지을 수 없다.

다만 이런 V자형의 단순한 옷주름 표현법이 <434년명불입상>(도판 9)에서처럼 비스듬한 물결무늬 옷주름선을 굴곡 없는 V자형으로 만드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과 <434년명불입상> 두 상을 비교하면 인중이 얕게 새겨져 양식화한 것이 서로 같아 거의 비슷한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니 그 영향 관계는 더욱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대체로 마투라 지역에서 출토되는 굽타시대의 불상양식으로는 이보다 더 양식진전을 보인 예는 그리 흔치 않다. 다만 라크노 주립박물관 소장상이 하나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마투라로부터 잠나(Jamna)강을 타고 코삼비(Kaubi)를 지나 파탈리푸트라 (Ptalliiputra, 巴連佛 혹은 波?俚)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사르나드[Srnth, 鹿野苑;석가모니불의 최초 전법(轉法)이 이루어진 성지(聖地)]에서 갑자기 마투라 불상 양식과는 약간 다른 새로운 양식의 불상이 대량 제조된다.

그런데 그 상들에 새겨진 기년명을 보면 거의 굽타 기원 154년(474), 157년(477) 등으로 나타나서 굽타왕조가 제국의 영토를 거의 상실하고 소왕국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후굽타기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인도의 국내사정을 잠시 살펴보아야 하겠다.

3세기 중·후반기에 걸쳐 사산족의 침입을 받아 해체된 쿠샨제국의 영토 내에서는 간다라의 키다라쿠샨 왕국과 중인도의 굽타왕국이 점차 주변을 아우르기 시작하여 각기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특히 굽타왕국은 중남인도를 거의 통일하여 대제국으로 성장한다. 두 나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150여년간 평화를 유지하며 문물을 교환한다.

따라서 마투라는 키다라쿠샨왕국과 교류하는 관문(關門) 역할을 하면서 쿠샨시대 중인도 불상미술의 발상지답게 간다라 불상양식을 수용하여 굽타 불상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해낸다. 그래서 5세기 중반까지는 비록 굽타제국의 서북변경에 위치해 있으나 굽타미술의 중심지로 주도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수로(水路)에 의해 불교 미술품들이 수도권으로 쉽게 운반될 수 있었던 지리적인 이점도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5세기 중반에 이르러 중앙아시아의 초원으로부터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쳐들어온 야만족 백흉노(白匈奴, Hephthalites)가 키다라쿠샨왕국을 멸망시키고 인더스강을 건너 굽타제국을 넘보게 되자, 마투라는 서북 인도와의 문물중계지라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오히려 대흉노전의 전진기지로 변화한다. 이에 자연히 불교미술의 발전은 중단되고 그 주도권은 굽타제국의 수도권인 갠지스강 중류지방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래 굽타제국은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서기전 269~232년)이 건설하였던 파탈리프트라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갠지스강의 큰 지류들이 합수되는 수로의 요충이었다. 그런데 굽타제국의 제3대 제왕으로 천하통일을 완성한 찬드라굽타 2세(375~414년)는 지키기 쉬워서인지 이곳을 버리고 갠지스강의 한 지류인 고그라(Gogra) 강가의 아유타(阿踰陀, Ayodhy)에 도읍을 새로 건설하여 옮긴다. 이곳에서 굽타제국은 그 극성시기를 보낸다.

그러나 백흉노의 침입과 내부의 분열로 국세가 기울어 소왕국으로 남게 된 쿠마라굽타 2세(473~477년) 치하에서 다시 잠나 하구(河口) 근처인 갠지스강 중류의 교상미로 수도를 옮긴다. 대개 이때부터 마투라는 굽타왕조의 변방 도시로 전락하고 불교미술품 제작의 주도권도 교상미에 가까운 갠지스강 중류의 사르나드에게 빼앗긴 듯하다. 그래서 마투라에서는 5세기 중기 양식보다 더 진전된 양식의 불상이 갑자기 줄어들고, 사르나드에서는 이 시기의 기년명을 가진 불교상들이 새로이 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신(裸身)과 같은 사르나드 불상

    굽타제국은 쿠마라굽타 대왕의 성세를 끝으로 하여 급속히 쇠퇴한다. 이미 쿠마라굽타 1세 대왕시대의 극성 속에는 쇠퇴의 요소가 내재했던 것이다. 한 세력이 극성에 이르면 곧 내리막길로 접어든다는 것은 우주자연의 섭리이고 역사 진행의 법칙이다. 따라서 극성의 이면에는 향락과 안일을 추구하는 퇴폐적인 사회풍조의 자생으로 말미암아 갈등과 모순이 싹트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굽타제국의 쿠마라굽타 1세를 정점으로 하는 극성 속에 자괴(自壞)의 요소들이 팽배하다가 드디어 스칸다굽타(Skandagupta, 455~467년)시대에 이르러 백흉노족의 침입을 받자 서북 지방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고 만다. 이어지는 내부 분열로 인하여 국기(國基)가 크게 흔들리니 대제국의 영화는 끝나고 겨우 갠지스강 유역을 다스리는 소왕국으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역사 변천의 상황을 대변하듯, 쿠마라굽타 1세의 치세 시기 이후라고 생각되는 사르나드기의 불상양식은 난만한 발전의 극에 이르러 퇴폐적인 요소를 드러내기까지 한다.

캘커타박물관이 소장한 사르나드 출토 <옷주름 없는 불입상>(도판 11)도 그런 사르나드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예 중의 하나다. 유명한 녹야가람지 출토의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轉法輪佛坐像)>(도판 12)과 거의 같은 솜씨로 만들어진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양식적인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다만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초전법륜처[初轉法輪處;처음 법륜을 굴린 곳, 즉 최초의 설법을 행한 곳]의 성적(聖跡)을 상징하는 주불답게 세심한 공력으로 처리된 것에 비해, <옷주름 없는 불입상>은 비교적 소략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두 상 모두 두 눈썹 사이를 중심점으로 한 대형 원판의 두원광을 지고 있는데, 이들은 다같이 중심원과 그 밖으로 이어지는 당초(唐草) 무늬띠와 판 끝을 장식하는 연호(連弧) 무늬로 이루어지면서 그 사이를 같은 시대 보살상의 장신구에서 볼 수 있는 영락형[瓔珞形;구슬 꿰미 모양] 연주(連珠) 무늬띠로 구분짓고 있다.

당초 무늬의 경우 <옷주름 없는 불입상>은 오직 단순한 당초 무늬의 연속일 뿐이나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에서는 당초 무늬 사이 사이에 마치 목련꽃과 같이 생긴 많은 꽃들을 봉오리에서부터 활짝 핀 상태 등 여러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어 복잡하고 화려한 양상을 보인다. 당초의 경우도 그 끝을 여러 갈래로 갈라놓고 연호 무늬의 호(弧) 모양을 더 작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주 무늬의 토막형 보석도 훨씬 많이 끼워 넣어 전체적으로 장식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래서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옷주름 없는 불입상>보다는 조금 뒤지는 양식이라고 생각되는데,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장식적인 의지가 크게 작용한 대형의 주불이라는 면을 감안한다면 시대 차이는 그리 크지 않으리라고 본다.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에서는 마투라 불상 초기의 카트라 출토 <‘보살’명삼존비상> (도판 1)에서처럼 꽃을 뿌리는 비천을 광배 양쪽 위에 표현하였으며, 등 뒤에서 두원광을 받치고 있는 신광[身光; 몸에서 나는 빛, 곧 몸체 뒤에 붙은 광배]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윗단과 당초 무늬 사이를 헤집고 나와 혀를 빼문 마가라[麻伽羅, makara;악어나 고래 등의 대형 물고기]를 조각하였고, 아랫단 역시 당초 속에 날개 달린 말을 표현하여 중인도적인 장식의장(裝飾意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로 보면 사르나드 시기의 불상양식은 인도적인 요소로 복귀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된 듯하니, 이 두 상에서 보인 옷주름 없는 의복의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상뿐만 아니라 사르나드기의 모든 불보살상들이 옷주름 없고 투명한 얇은 옷을 입는데, 이는 열대문화의 특성으로부터 말미암은 인도 미술의 뿌리 깊은 인체 표현기법의 조형전통이었다.


불상의 성기 표현

이에 마투라식 굽타불상과 달리 관능미를 억제하는 신비로운 요소로 작용하던 옷주름선이 사라진 사르나드 불상에서는 인도 전통의 관능미가 되살아나게 된다. 이는 당시 난만한 굽타제국의 문화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런 관능미의 풍미는 당시 힌두교 조각에도 일률적으로 적용되어 이후 인도 조각의 주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불교조각에서도 이로부터 시작된 관능적 표현이 밀교사상(密敎思想)과 표리를 이루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8세기 팔라시대의 퇴폐적인 불상 양식을 낳게 되며, 한편으로 중국에 영향을 끼쳐 성당(盛唐)시대 불상양식에 관능미를 부여한다.

중인도식 투명한 얇은 옷 표현 기법은 불신(佛身)을 거의 나신에 가깝게 노출시킬 수밖에 없으니, 제일 처리하기 곤란한 것이 성기(性器)였을 것이다. 그래서 32상 중의 부처님 성기는 음경(陰莖)이 말처럼 숨어 있다는 음마장상(陰馬藏相)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듯하다. 이에 ‘대승백복상경 (大乘百福相經)’ 권4에서는 “음경이 감춰져서 나타나지 않는다” 하고,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 권4에서는 “부처님이 과거세에 몸을 근신하고 욕망을 멀리한 까닭으로 성기가 노출되지 않고 완전히 숨는다’고 하였다.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권8 관마왕장품(觀馬王藏品)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처님의 국부가 아무것도 없이 펑퍼짐해서 이를 보던 여자들이 부처님은 무근인[無根人;성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흉보는 소리를 듣고 부처님께서 마왕법(馬王法)을 써서 성기를 크게 노출시켰다.”

이 모두 부처님의 성기가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내용은 실제 마투라식 굽타불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르나드 양식에 이르면 상당히 양감 있는 국부의 표현을 보이는데, ‘우바이정행법문경(優婆夷淨行法門經)’ 권 하에서 말한 대로 천 명의 아들을 둘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거대한 성기라는 음마장상 본연의 모습을 표현해내고 있다. 이는 마투라 초기 불상으로의 복고(復古) 현상이라고 하기보다는 관능적 요소의 강조라는 퇴폐풍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마투라식 굽타불상은 입술에 분명한 윤곽선이 돌려져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얼굴 표정은 근엄하며 방정강건[方正强健;몸매가 네모 반듯하고 굳세며 씩씩함]한 몸매를 가져 신비의 극을 이루면서도 건실성을 잃지 않았었다. 그런데 사르나드식에 이르면 섬약과 관능적 요소의 노출로 세련미에 비례하여 퇴폐적인 경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것을 이 <옷주름 없는 불입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녹야원의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

사르나드는 부처님 당시에 녹야원(鹿野苑, Mgadva)이라 불리던 곳으로, 힌두교의 성지로 알려진 베나레스(Benares;옛날의 婆羅奈)에서 10리쯤 북쪽에 떨어져 있다. 이곳은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초전법륜[初轉法輪;처음 법륜을 굴림. 즉 처음으로 설법함]이 행해진 불교의 성지로, 아쇼카왕 이래 많은 불교 유적을 남기고 있다.

당나라 현장(玄裝, 602∼664년) 삼장이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녹야(鹿野) 가람[伽藍, 僧伽藍, saghrma의 준말. 절의 통칭]은 8구로 나뉜 여러 층의 정사(精舍)로 승려 1500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한다. 정전은 높이가 200여 척이나 되는데 벽돌로 쌓아올린 건물 각층의 감실에는 황금불상이 안치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유석(鍮石)으로 만든 사람 몸 크기의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모셔져 있었다. 아마 여기에 들고 있는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도판 12)이 바로 현장이 배관(拜觀)하였던 그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일 것이다.

놋쇠빛 나는 돌이라는 의미의 유석(鍮石)이 푸른 기가 도는 흰색의 주나르산 백색사암을 가리키는 말일 터이니, 바로 그 백색사암으로 만든 이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현장 삼장이 배관할 당시는 이 상이 만들어지고 나서 200여 년이 지난 시기였을 터이고, 크기가 여래의 몸과 같았다는 내용이 높이 159cm의 이 상과 매우 방불하며 그 위에 이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굽타시기 사르나드 불교미술 양식을 대표할 만큼 우수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 녹야가람의 정전터에서 수습되었음에랴!

다시 녹야가람의 남쪽에는 아쇼카왕이 최초로 법륜을 굴린 곳, 즉 부처님 최초의 설법처에 세웠다는 100여척 되는 탑이 있고, 그 앞에는 70여척 되는 기념주가 세워져 있었으며(돌빛이 옥색의 윤기를 머금고 있으며 여러 모양을 비춰낸다고 하였다), 다시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탑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아약교진여(阿若喬陳如, Kauinya) 등 다섯 비구가 석가보살의 고행 포기에 충격을 받고 자기들끼리 독립하여 나와 습정[習定;선정(禪定)을 익힘]하였던 곳이라고 하였다[이상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 권7 참조].

이제 우리는 이상과 같은 유적들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남겨질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경전에 나타나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기를 통해서 알아보아야 하겠다.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권7~권12의 고행품(苦行品) 17, 왕니련하품(往尼連河品) 18, 예보리장품(詣菩提場品) 19, 엄보리장품(嚴菩提場品) 20, 항마품(降魔品) 21, 성정각품(成正覺品) 22, 찬탄품(讚歎品) 23, 상인몽기품(商人蒙記品) 24, 대범천왕근청품(大梵天王勤請品) 25, 전법륜품(轉法輪品) 26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다른 본연부(本緣部) 경전들도 대동소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싯달타 태자가 밤을 도와 성문을 빠져나가서 출가하고 난 다음, 정반왕은 심산궁곡의 사람 없는 곳에서 홀로 수행하는 태자의 신변보호와 시중을 위해 대신의 자제 다섯 사람을 선택하여 보낸다. 이들은 만약 중도에서 되돌아온다면 5족을 멸하겠다는 정반왕의 위협 때문에, 태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태자가 간 방향을 따라가다가 당시 제일 뛰어난 선지식(善知識)이라는 라마오특가(羅摩烏特迦)의 제자가 되어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마침내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니던 싯달타태자, 즉 석가보살이 이곳에 들러 라마의 오도처[悟道處;도를 깨달아 이르른 곳]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생각을 안 하고 생각을 안 한다고 생각지도 않는 곳]의 경지를 쉽게 깨치고, 그것이 해탈의 길이 아니라 하며 떠나려 한다.


부처와 다섯 수행자

이에 다섯 수행자는 석가보살을 따라나서서 가야산 기슭의 니련선하(尼連禪河)로 가 함께 6년간 고행을 하며 용맹정진하는 석가보살의 시중을 든다. 이런 고행 끝에 석가보살은 고행만이 해탈의 길이 아님을 깊이 깨닫고 고행을 푼 다음 선생(善生, Sujt)이라는 촌장의 딸에게 우유죽을 얻어 마시고 체력을 회복한다. 다섯 수행자들은 이를 퇴전[退轉;뒷걸음쳐 아래로 굴러떨어짐]으로 보고 크게 실망한 나머지 석가보살을 버리고 자기들끼리만 수행을 위해 길을 떠난다.

이들이 머문 곳이 바로 녹야원(鹿野苑)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석가보살은 우유죽으로 원기를 회복한 다음 현재의 부다가야(Buddahagay)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나아가서 선정에 든 다음 마왕 파순(波旬, Ppyas)에게 항복받고 해탈을 얻어 부처님이 되신다. 12월8일(인도력으로는 2월8일, 혹은 4월8일)에 샛별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대오각성(大悟覺醒)하신 것이다. 그래서 생사의 유전(流轉)에서 완전한 해탈을 얻으셨다.

이에 칠칠일(49일) 동안 해탈의 환희를 음미하면서, 지나던 두 상인이 바치는 제호(醍?)에 찹쌀가루와 꿀을 타서 끓인 죽(경전에 따라서는 꿀에 탄 보릿가루라고도 한다)을 받아 마시고 원기를 돋운다. 그러면서 자신이 깨친 미묘한 진리를 중생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다. 이때 범천왕과 제석천왕을 비롯한 여러 천왕이 부처님께 깨친 법을 설하지 않는다면 착한 무리가 줄어들고 악한 무리가 늘어난다는 명분을 들어 간곡하게 설법할 것을 권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상·중·하 세 부류의 근기(根器)를 타고난 중생들 중에 상근(上根)의 중생은 설법하지 않아도 깨칠 것이며, 하근(下根)의 중생은 설법을 해도 깨우치지 못할 것이지만, 많은 층을 차지하는 중근(中根) 중생은 설법을 함으로써 깨우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설법을 하기로 작정한다. 그래서 맨 처음 설법의 대상으로 라마와 아라다 선인을 생각했지만, 이들이 며칠 전에 고인이 된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시중을 들다 떠난 다섯 수행자들을 꼽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곧 이들이 머물고 있는 녹야원으로 찾아간다.

여기서 이들 다섯 사람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게 되는데 이때 전법륜(轉法輪, Dharmacakravartin)보살이 나타나 윤보(輪寶)를 바친다. 세속의 전륜성왕은 금, 은, 동, 철 등의 윤보를 가지지만 부처님께서는 법륜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에 다섯 수행자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인 연법(十二因緣法)의 중도법문(中道法門)을 최초로 설하니, 이들은 모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고 출가하여 비구가 된다.

이런 최초 설법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 바로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이다. 다섯 비구와 어린아이가 딸린 여자 공양자가 윤보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합장하여 꿇어앉아 있는 대좌의 부조는 이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다섯 비구의 이름은 경전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사분율(四分律)’ 제32에 의하면 아약교진여 (阿若喬陳如, jnta Kauinya), 아설시(阿說示, Avajit), 마하남(摩訶男, Mah-rman), 파제(婆提, Bhadrika), 바부(婆敷, Vpa)라고 하는데, ‘법화경문구(法華經文句)’ (隋 智 說) 제1 상에 의하면 교진여와 아설시 두 사람은 부처님 모계 친척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부계 친척이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9/nd99090470.html


[우리문화 바로보기 (3)]

중국인 닮은 불상이 태어나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중국에 전해지는 불교

     이제까지 우리는 간다라와 마투라의 불상 조각을 중심으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印度)에서 어떻게 불상이 출현하여 양식이 진전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겨우 기념주(紀念柱)나 세우던 초기 불교미술 단계로부터 불상의 표현을 금기로 여기던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를 거쳐 불상이 출현하여 양식변천을 거듭하는 과정을 시대적으로 또는 지역적으로 추적하면서 고찰해온 것이다.

가능한 한 한 시대 한 지역의 대표적인 양식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왔지만, 워낙 장구한 세월 동안 광대한 지역에서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전개되었던 미술활동이라서 그 대강의 줄거리조차 잡혔는지 의심스럽다.

이제 법수동류(法水東流;법의 물길이 동쪽으로 흐름)의 인연에 따라 동쪽으로 눈을 돌려 인도대륙에서 싹튼 불상 조각이 중국대륙에서 어떻게 꽃피고 열매맺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는 것은 대체로 후한(後漢) 명제(明帝, 58~75년)시대라고 한다. 옛날부터 주석가(註釋家;경전이나 역사책의 알기 어려운 구절을 쉽게 풀어놓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나 불교학자 중에는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6국(國)을 통일한 다음 병장기를 모아들여 이를 녹여서 만들었다는 12금인 (金人;쇠로 만든 사람)이 중국 불상의 시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한(漢) 무제 (武帝) 때의 장군 곽거병(藿去病)이 흉노를 정벌하고 나서 깨뜨려버렸다는 흉노의 금인(金人)이 불상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흉노의 금인은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천신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한다.

그러나 진시황이 12금인을 만든 것은 진시황 26년, 즉 서기전 221년의 일이고 곽거병이 휴도왕의 제천금인을 파괴한 것은 한무제 원수(元狩) 2년, 즉 서기전 121년의 일이니 인도에서도 아직 불상이 출현하기 이전의 일이라 이제껏 우리가 살펴본 인도 불교 조각사의 지식으로 보면, 이런 주장들은 성립할 수 없다.

불교측의 기록에서는 명제 영평연간(永平年間)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온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최근 수야청일(水野淸一) 등 일본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런 기록은 대체로 삼국시대인 3세기 중반부터 그 골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육조(六朝)시대 초기인 5세기경에 완성되는 설화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설화가 후대에 사실(史實)로 인정되어 ‘위서(魏書)’ 권114 석로지(釋老志)에 그대로 수록되면서 정사(正史)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후한 명제 영평연간에 황제가 꿈을 꾸니, 키가 장륙(丈六)이나 되는 금빛 나는 신인(神人)이 목 뒤에서 태양과 같은 빛을 내며 하늘을 날아 전각(殿閣) 앞에 내려앉았다. 다음날 명제는 이 사실을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고 무슨 조짐이냐고 물으니 통인(通人) 부의(傅毅)가 나서서 이렇게 아뢰었다.

“서역(西域)에 불타(佛陀)라는 호신(胡神;오랑캐 신)이 있고 그 몸에서 금빛이 난다 하니 아마 그 금빛 나는 신인은 불타일 것이며 전각 앞에 날아 내린 것은 그 법이 전해올 조짐인가 봅니다.”

이에 명제는 낭중(郎中) 채음(蔡?)과 박사제자(博士弟子) 진경(秦景), 왕준(王遵)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불법을 받아오게 하는데, 이들이 대월지(大月氏)국의 국경에 이르니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라는 두 전도승(傳道僧)이 부처님 당시에 우전왕(優塡王)이 네 번째로 만들었다는 석가모니 불입상 (佛立像)과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모시고 중국으로 오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 돌아와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모시고 온 석가입상을 명제에게 보이자 명제는 바로 꿈에 보았던 것이라고 크게 기뻐하면서 화공(畵工)으로 하여금 이를 그리게 하여 청량대(淸凉臺)와 자신의 수릉(壽陵;중국 문화권에서는 제왕이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마련해 놓고 부장품을 생시에 계속 비치해 두는데 이를 수릉이라 한다)인 현절릉(顯節陵)에 안치하게 한다. 그리고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낙양성 서문 밖에 절을 지어 살게 하는데 백마(白馬)가 경전과 불상을 실어왔다 하여 절 이름을 백마사(白馬寺)라 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종교적인 색채가 농후하여 설화 이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당시 불교가 분명히 전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후한서(後漢書)’ 권42 광무시왕열전(光武十王列傳) 초왕(楚王) 영(英)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왕 영이 불교를 믿었으며 이포새(伊蒲塞, 優婆塞, up~asaka의 음역)에게 반공(飯供; 음식을 공양함)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기록이 아니더라도 당시에 서역도호(西域都護) 반초(班超, 42~102년)가 서역경영(西域經營)에 열을 올리고 있어 쿠샨왕조의 웨마카드피세스 군대와 맞부딪칠 정도였으니 불교 전래는 당연히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초기 기록들은 모두 영평연간이라고만 하던 것을 수대(隋代)에 와서 비장방(費長房)이 ‘역대삼보기 (歷代三寶記)’ 권4에서 영평(永平) 7년이라 했고, 당(唐) 도선(道宣)은 다시 ‘집고금불도론형(集古今佛道 論衡)’ 권 갑(甲) 및 ‘광홍명집(光弘明集)’ 권1에서 영평 3년이라 했으며, 원(元) 염상(念常)은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권4에서 영평 4년이라 하여 일정치 않은데, 요즘 통용되는 영평 8년설은 아마 ‘후한서(後漢書)’ 권42 광무시왕열전 초왕 영(英)조의 영평 8년 불교관계 기사에서 빌려온 내용일 것이다.

이 시기는 인도에서도 불상이 이제 막 출현하는 시기이므로 불상이 들어왔다면 초기 사실적인 표현을 한 간다라 불상이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아직 발견된 예는 없다.


비단길을 따라온 불상

다만 1902년 일본인 대곡광서(大谷光瑞)가 이끄는 대곡탐험대가 타클라마칸 사막의 서역 남도에 위치한 코탄(Khotan, 和? 또는 于?)의 절터에서 발견한 <금동불두(金銅佛頭)>(도판 1) 하나가 초기 간다라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간다라 불상양식이 이 서역 남도를 거쳐 중국으로 전래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대곡탐험대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그 경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후반기 이래 러시아의 팽창정책이 노골화되자 중앙아시아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러시아 뿐 아니라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은 학술조사라는 명목 아래 중앙아시아의 오지(奧地)에 탐험대를 계속 파견하여 그 정황을 탐지하게 된다.

이에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년)으로 뒤늦게 세계 열강 대열에 끼게 된 일본도 대륙 진출의 꿈을 안고 이들과 함께 이 일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서구 열강이 기독교 선교사를 앞세워 식민(植民)의 발판을 마련하는 방법을 지켜보고 있던 일본은 불교의 원류(源流)를 탐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불교 교단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탐사를 시도하게 한다. 이 역할을 담당한 것이 본파본원사(本派本願寺) 22대 종주 (宗主)로 본원사 관장직(管長職)을 겸하고 백작(伯爵) 작위를 이어받고 있던 약관 25세의 패기만만한 소장 귀족 승려 대곡광서(大谷光瑞)였다.

대곡 일행은 1902년에 영국의 도움을 받아 런던에서 탐험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고 8월에 런던을 떠나 러시아의 카스피해 서안 바쿠(Baku)에 도착한다. 바쿠에서 카스피해를 건너 사마르칸트(Samarkand)를 거쳐 천산(天山)산맥 테레크령을 넘어서 중국 신강성(新彊省) 카슈가르(Kashgar, 疏勒)에 도착한다. 즉 파미르고원(蔥嶺) 동쪽의 동(東)파키스탄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이들은 야르칸트(Yarkand, 莎車)를 거쳐 타슈쿠르간(Tashkurgan, 盤陀)의 탐험에 들어간다. 타슈쿠르간에서 이들은 대(隊)를 나누는데 대곡은 본다혜륭(本多惠隆)과 정상홍원(井上弘圓)을 거느리고 힌두쿠시 산맥의 민다카령(嶺)을 넘어 카슈미르(Kahsmir)로 가서 인도 탐사에 들어가고 도변철신 (渡邊哲信)과 굴현웅(堀賢雄) 두 사람이 주축이 된 일대(一隊)는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서역(西域) 남도(南道)에 위치한 코탄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 서역북도에 위치한 아크수(Aksu)와 쿠챠(Kucha, 龜玆), 그리고 천산북로(天山北路)의 투르판(Turfan, 高昌), 합밀(哈密, Hami), 오이목제(烏爾木齊, Urmuchi)로 해서 난주(蘭州) 서안(西安)에 도달하는 여정을 잡는다. 이때 도변-굴 탐험대가 코탄의 절터에서 찾아낸 것이 이 금동제 불두이다.

우리는 이 불두가 간다라 초기 불상 양식을 구비하고 있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높고 크게 틀고 있는 북상투(團쬇)의 사실적인 표현에서 상투끈을 맺어주는 계주(쬇珠)의 표현이 분명하다든지 코밑 수염이 뚜렷하고 눈이 전개정시(全開正視;완전히 뜨고 똑바로 쳐다봄)로 크게 표현되었으며 귓불이 크게 늘어지지 않는 등 양식화나 신비화가 조금도 진행되지 않은 초기 간다라 불상의 사실적인 표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간다라 지역에서도 단독 입체상으로 이와 같이 초기 양식이 분명한 단독 불상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불전부조(佛傳浮彫)에서 이런 특징들을 구비한 예들이 상당히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불두 양식이 초기 불전부조의 불상 양식과 약간 다른 것은 상투끈이 2중으로 되어 있고, 계주의 표현에서 구슬 모양의 대구(帶鉤;혁대고리) 형태가 아닌 매듭(鉤紐)형인 듯한 점이다. 백호(白毫)의 표현이 미간(眉間)이 아닌 이마 위(天庭部位)에 있는데 중앙의 백호 둘레에 일곱 개의 백호를 돌려 장식한 복잡한 모형태여서 한 개의 구슬로 표현되던 간다라 초기 불전부조의 불상양식과는 크게 다른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이 불두가 이 코탄 지역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지역 풍속 습관을 반영한 것으로 파악해야 할 특징 같다.

어떻든 이와 같이 간다라 초기 불상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불상이 만들어지려면 간다라 불상 편년상으로는 2세기 전반을 내려올 수 없다. 그런데 이 불두의 얼굴 모습으로 보아서는 페르시아계의 용모임에 틀림없다. 이런 용모의 특징이 이후 코탄의 불상이나 불화에 계속 이어지므로 이 불두 자체는 코탄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렇다면 간다라 지역에서 파미르고원의 험난한 준령을 넘어, 열사(熱沙)의 땅 타클라마칸사막을 지나서 찾아와야 할 이 오아시스의 나라 코탄에서 어떻게 이런 초기 양식의 불상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당시 코탄이 차지하고 있던 경제적인 중요성과 그에 따른 동서세력의 각축쟁탈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코탄 지역에는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흘러오는 카라카슈다리아(Karakashdaria, 黑玉河)와 유룽카슈다리아(Yurungkashdaria, 白玉河)라는 두 강이 흐르는데 이 강물은 건기(乾期)가 되면 하상(河床)이 드러나고 거기에서 곤륜산으로부터 실려온 옥(玉)을 채취할 수 있었다. 이 옥은 중국과 페르시아에서 보석(寶石)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특히 중국에서는 가장 값진 보배로 여기는 전통이 이미 은·주 (殷·周)시대로부터 확고하게 자리잡아왔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옛날부터 이 옥을 감숙성(甘肅省) 근처에 살던 페르시아계의 대월지족으로부터 사들였으며(소위 힚氏玉) 대월지족은 이 옥의 중개무역으로 상당히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대월지족이 흉노에 밀려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간다라 지역에 정착하게 되고 거기서 쿠샨왕조를 열게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서 간다라 지역을 중심으로 대제국을 건설했던 웨마카드비세스 대왕은 대월지족이 버릴 수 없었던 옥에 대한 미련 때문에 험난한 파미르고원을 넘어 자신들이 쫓겨 지나온 사막을 되건너서 코탄을 정복, 판도 안에 넣으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후한 명제 영평 3년(60년)에 서역도호 반초는 웨마카드비세스의 군대를 격퇴하고 코탄을 한의 영토로 편입시킨다. 이 과정에 불교가 코탄을 거쳐 후한에 전래되었던 모양인데 그 사실을 이 <금동불두>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에 출현한 초기 간다라 양식의 불보살상

중국 문화 중심부에서 출토된 간다라 초기 양식의 불상으로는 하북성(河北省) 석가장(石家莊) 부근에서 출토되었다는 <견염선정불좌상(肩焰禪定佛坐像;어깨 위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선정에 든 불타의 좌상)>(도판 2)이 있을 뿐이다. 이 불상은 하북성(河北省) 석가장에서 미국인 윈드로프(Winthrop)씨가 인수하여 하버드대 포그(Fogg)미술관에 기증한 것인데 간다라 불상조각의 초창기인 2세기 전반기의 양식적 특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다만 아직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한 쿠샨왕조 수도권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견염(肩焰;어깨에서 솟아나는 불꽃) 형태의 배광(背光;등뒤에서 일어나는 빛)이 뿔처럼 양어깨에 돋아나 있어 마치 카피시 불상의 견염과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눈을 크게 뜨고 코밑수염이 분명한 간다라 풍모의 사실적인 얼굴 표현이 간다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초기 간다라식 불상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다만 상투부분에서 간다라식 북상투가 가지는 사실성을 상실하고 중국식 상투관과 같은 형태로 표현되어, 이것이 중국식 이해의 한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점이 바로 이 불상을 중국제품으로 인정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솟아오른 눈두덩도 중국인의 눈모양에 가까워진 까닭이라고 보아야겠다.

대좌(臺座) 좌우에는 포효(咆哮)하는 사자를 두 마리 배치하여 사자좌(獅子座)를 상징하고 정면에는 꽃항아리에 연꽃과 연잎을 꽂아놓음으로써 또한 연화좌(蓮華座)를 상징했다. 대좌의 양측면에는 각기 등(燈)과 연화를 든 공양비구상(供養比丘像)이 고부조(高浮彫)로 장식되고 있다.

옷주름은 오히려 간다라 불상이 가지는 기계적인 획일성에서 탈피하여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을 보이는 바, 어깨 부분에 주름을 넣지 않은 것이나 오른쪽 겨드랑이 부분에서 옷주름을 소멸시킨 것이나 옷자락이 꽃잎 모양으로 들쭉날쭉 늘어진 것은 탁월한 조형감각이라 하겠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것이 후한 명제시대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밝힌 사실이다. 그러나 명제감몽구법(明帝感夢求法;명제가 꿈에서 보고 감동하여 법을 구하여 옴)의 내용은 종교적인 신비성이 매우 강하여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올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니 신비적 요소만 제거한다면 이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다만 이 시기에는 전후한 400여년을 주도하는 유교 이념이 아직 건재해 그 주도력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었으므로 새로 유입된 외래이념인 불교에 중국사회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 당시 유교이념이 얼마만큼 철저하게 중국 사회를 이끌어 나갔는가 하는 사실은 명제가 즉위하여 스스로 태학(太學;유생을 가르치는 국립 최고학교)에 나가 제생(諸生;태학에 재학하는 여러 학생)을 상대로 강경(講經;유교경전을 강의함)하였다거나 호위 무사까지도 ‘효경(孝經)’ 장구(章句)에 능통했으며 흉노의 왕공귀족 자제들까지 태학에 입학시켰다는 사실로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회분위기이니 불교는 비록 쿠샨왕조의 전도승들에 의해 비단길을 따라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전도가 전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더구나 중국문화는 지구상에서 가장 적합한 농업환경에서 일구어낸 당시 최고 수준의 농업문화였다.

중국문화가 일어난 황하 유역은 직경 0.5mm 이하의 황토먼지가 수수만년 동안 서쪽 사막지대로부터 불어오는 편서풍에 실려와 북중국 대륙에 떨어져 쌓여 높이 10m에서 100m에 이르는 황토지대가 무려 132만4000㎢의 넓이로 펼쳐진 대평원이다. 이런 일망무제(一望無際;한 번 바라봄에 끝이 없음)한 황토 평원을 황하가 동서로 관통하여 흐르니 기후만 적합하다면 농사짓는 데는 특별한 농기구도 필요없을 만큼 적당한 곳이었다.

그런데 기후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농사에 적합하다. 1년이 4계절로 분명히 나누어지는데 봄철은 기후가 따뜻하면서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려 씨앗이 싹트기 좋고, 여름은 무더운 장마철이 되어 고온다습해지니 곡식의 성장에 더없이 알맞으며, 가을은 한랭한 기운이 감돌아 낮은 햇살이 따가우나 밤기운은 차가워 일교차가 커지면서 건기로 접어들어 강수량이 적어지니 곡식의 결실에 더없이 적당하다.

만물이 얼어 붙는 겨울철은 농사지은 곡식으로 편안히 들어앉아 배불리 먹어가며 여가를 즐기면서 다음 농사에 대비하게 되니, 자연환경은 곧 인류가 농경문화를 일으키며 살아가는 데 적합한 요건을 모두 다 갖춘 완벽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중국문화권에서는 자연에 순응해 사는 현세의 삶을 삶 이상으로 생각하는 현실긍정적인 사고가 자연히 싹터 현실적인 인간관계를 규정짓는 윤리철학이 발달할 뿐 우주나 내세를 얘기하는 우주철학이나 종교가 발달하지 않았다.

그런 윤리철학 중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유교가 주도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고 있을 때 내세를 말하고 우주를 논하는 불교가 들어왔으니 중국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불교는 공허하기 짝이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이념이었을 것이다. 이에 유교이념이 주도력을 계속 행사해 나가는 이후 100여년 동안에는 불교는 거의 활동을 정지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기록에서도 불상조성에 관한 기록은 물론 불교관계기사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유교이념이 전한 200년과 후한 200년을 주도하고 나서는 극도의 노쇠화 현상을 보여 후한말에 가서는 더이상 사회를 주도할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이에 유교를 대체할 만한 이념을 찾지 못한 중국 사회는 이념 공백기를 맞아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이 틈에 주변의 이민족들이 침입해 주도권 쟁탈을 벌이게 되니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라는 중국 최초의 식민지 시대가 전개되어 나간다.

다섯 오랑캐가 16국을 건설한 시대라는 이름만으로도 그 시대의 혼란상을 짐작할 수 있으니 이제껏 자기들이 사는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이며 그 세계의 주인이 자신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한(漢)족들은 이제 최초로 지옥고를 겪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그 동안 치지도외(置之度外;내버려두고 문제삼지 않음)하고 쳐다보지도 않던 불교의 존재를 재인식하고 그 내세관에 의지하려는 새로운 경향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착융의 불상 조성

그래서 불교를 믿고 불상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상류 지식층을 중심으로 일어 나는 듯하니 불상에 관한 확실하고 구체적인 기록이 진수(陳壽, ?~279)의 ‘삼국지(三國志)’ 권49 유요전(劉繇傳)에 처음 나타난다. 유요전에 붙여 쓴 착융(?融)이라는 인물의 전기(傳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착융이란 사람은 단양인(丹陽人)인데 처음 무리 수백 명을 모아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에게 가 의탁하니 겸(謙)이 광릉(廣陵)과 팽성(彭城)의 조운(漕運)을 감독하게 했다. 드디어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3군(郡)을 마음대로 하며 보내라고 맡긴 것들을 제가 가져버렸다. 그리고 크게 부도사(浮圖祠)를 일으키고 동(銅)으로 사람을 만들어 황금을 몸에 바르고 비단으로 옷을 해 입혔다.”

이로 보면 부도사란 불사(佛寺), 즉 절이란 의미이니 절을 크게 짓고 동으로 불상을 주조한 다음 도금(鍍金)하여 비단으로 가사(袈裟)까지 지어 입힌 사실이 분명하다. 정사(正史)의 기록이니 가장 믿을 만하다 하겠는데, 사실 이 시기는 불교가 중국 사회에 맹렬히 침투해 들어오는 시기이므로 이 기사에 조금의 무리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일본학자 대곡승진(大谷勝眞)의 연구에 의하면 착융의 이런 활동이 후한 명제 중평(中平) 6년(189년)으로부터 헌제(獻帝) 초평(初平) 4년(193년)에 걸친 시기일 것이라 하니 이 시기는 황건란(黃巾亂)을 계기로 천하가 대란(大亂) 상태에 들어 군웅(群雄)이 할거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어떤 구원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외래종교(外來宗敎)의 교세 확장이 얼마나 용이한가 하는 것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기독교 세력이 기적에 가깝도록 확산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떻든 이 기록에 의해서 2세기 후기부터 중국에서 불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만들어진 불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초기양식의 불상이 석가장 출토의 <견염선정불좌상>(도판 2)이니, 이때 만들어진 불상도 그와 같은 양식의 불상이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의 제작기법을 보이는 예가 또 하나 있으니 여기 들고 있는 <미륵보살입상(彌勒菩薩立像)>(도판 3)이다.

일본학자 족립희육(足立喜六)의 ‘장안사적(長安史蹟)의 연구(硏究)’에 의하면 섬서성(陜西省) 삼원현(三原縣)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연과(蓮果;연밥) 위에 서 있는 유행상(遊行像;돌아다니는 형상)으로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짓고 왼손은 물병을 들고 있어 간다라나 마투라에서 보던 미륵보살상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낸다. 언뜻 보면 간다라의 미륵보살상인 듯 그 용모나 의복표현이 방불하여 이 <미륵보살입상>도 간다라 양식을 조형(祖型;기본틀)으로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수리의 머리칼을 위로 걷어 모으고 나머지 머리칼은 뒤로 넘겨 늘어뜨리는 머리카락 모양이라든지, 코밑수염이 나 있고, 굵은 목걸이나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의 네모진 가슴걸이로 장식한 것, 시무외인을 지은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의 표현이 분명한 것, 두꺼운 천의 의복 표현, 엄지발가락 사이에 끈을 꿰어 신게 되어 있는 샌들(革履) 등등 어느 한 가지도 간다라 미륵보살상이 가지는 양식적 특징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얼굴은 면적이 넓어지고, 눈은 크게 표현하려 했지만 눈꺼풀이 두꺼운 황인종의 행인형(杏仁形; 살구씨 모습)을 면치 못했으며, 표정도 황인종 특유의 근엄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머리칼도 곱슬머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앞부분만 땋은 것 같은 표현으로 이를 모방하면서, 끝내 직발형(直髮形;곧은 머리칼 형태)의 평행선으로 처리하는데 그나마 상투 부분은 머리칼 표현이라기 보다 칠량관(七樑冠)을 쓴 것 같은 모습이다. 신체의 비례도 머리 부분이 커져서 지체가 늘씬한 간다라 조각의 균제미 (均齊美)와는 거리가 있고, 장신구들도 무겁게 느껴진다.

특히 의복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부족했던 듯 양쪽 어깨로 넘어가고 오면서 치마와 연결되는 표현이 종잡을 수가 없다.

이로 보면 이 <미륵보살입상>은 불상에 대한 이해가 아직 철저하지 않은 시기에 중국인의 손으로 모방 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 제작 시기가 2세기 후반을 더 내려오지 않을 듯하다. 배면(背面)은 뒤로 산발(散髮)한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는데 약간 곱슬기가 있는 직발이며 일자(一字)로 가지런히 다듬어져 있다. 옷주름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를 반쯤 감싸고 겨드랑이를 돌아 나가면서 전신(全身)을 감싸 나간 대의(大衣)의 전면에 새겨 넣었는데, 비스듬히 내려가며 파낸 포물선을 가득 채워놓는 양식화(樣式化) 현상을 보였다.

머리 뒤에 네모난 꼬챙이(鏃)가 나와 있어 두원광(頭圓光)이 있었던 흔적을 남겼다. 정면에서 보아도 두부(頭部)가 큰 편이지만 측면에서는 하체의 빈약한 처리로 더욱 불안정한 비례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부터 미륵보살이 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중국 불교계의 동향을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 격의불교(格義佛敎;불교의 空개념이 이해되지 않아 道家의 無개념을 빌려 이해하던 중국 초기의 불교)를 청산하고 불교의 중국화를 이룩해 낸 석도안(釋道安, 314~385년)이 “제자(弟子) 법우(法遇) 등과 더불어 미륵 앞에서 도솔천(兜率天)에 상생(上生)하고자 하는 서원(誓願)을 세웠다”는 ‘고승전(高僧傳)’ 권5 의해(義解)2 석도안조(釋道安條)의 기사 내용과 연결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지옥과 같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고 미륵보살이 계신다는 도솔천으로 올라가 태어나서 현세와 같은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난세인(亂世人)들이 갖는 소박한 열망이 바로 미륵신앙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양식화의 진행

석가장 출토 <견염선정불좌상>과 같이 간다라 불상 양식을 그대로 본뜬 불상이 만들어지고 난 후 중국 불교도들 사이에서는 이를 다시 본뜨고 또 본뜨는 일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을 것이다. 예배상 (禮拜像;예배 드리는 대상으로의 불상)으로 또는 호신불(護身佛;몸을 보호하기 위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불상)로 그 수요가 교세의 확장과 비례하면서 급격히 증가했을 터이니 이에 따라 불상을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되었을 것인가는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실제 이를 증명하듯이 석가장 출토 <견염선정불좌상>을 다시 본뜬 듯한 같은 양식 계열의 불좌상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그중에서 이 <동경대학(東京大學) 공학부(工學部) 소장 선정불좌상>(도판 4)이 가장 원형(原形)과 비슷하여 다시 본뜬 초기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상투관(冠)으로 이해한 북상투는 상투끈의 흔적조차 소멸하여 주판(珠板)알 모양으로 바뀌니 마치 족두리를 머리에 얹은 듯한 형상으로 되고, 머리칼의 표현은 편도형(扁桃形)으로 빗어 올린 곧은 머리로 바뀌었다. 이마는 좁아지고, 백호(白毫)가 사라졌으며, 눈두덩이 더 솟아올라 눈이 더욱 좁고 가늘어졌으며, 앞에서 보이던 큰 귀가 뒤로 젖혀져서 정면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눈썹과 눈두덩 사이가 깊이 패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길고 측면이 두터운 소위 심목고비(深目高鼻;깊은 눈과 높은 코)의 호모(胡貌;서역 오랑캐, 즉 간다라 사람의 용모)인 것만은 틀림이 없으며, 코밑수염까지도 석가장 출토 <견염선정불좌상>을 그대로 본받고 있어 느낌만으로는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다.

크기가 석가장 출토 <견염선정불좌상>의 반도 안 된다는 점도 있겠으나 옷주름의 표현이 한결 생략되어 오른쪽 겨드랑이 부근에서 일어난 4줄의 파낸 옷주름선은 마치 갈퀴발처럼 성글게 왼쪽 어깨 위로 모아지듯 사라지며, 병신스러울 정도로 크게 확대된 손이 선정인(禪定印)을 짓고,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똑바로 흘러내린 포물선을 3중으로 일으켜 상체의 옷주름선과는 별개인 듯한 느낌을 준다. 팔뚝을 따라 내려온 옷주름선 역시 마치 용수철과 같이 규격 있는 계단을 이루면서 다른 옷주름선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고 있어 마치 아래위 옷을 구별지어 놓은 듯하니 소매가 달린 중국식 복장의 옷주름을 염두에 두고 표현해낸 옷주름선인 듯한 느낌이 든다.

대좌는 사자도 연화도 생략된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앞은 네모나고 뒤는 둥근 모양)의 소박한 형태이고 광배가 붙어 있었던 듯 뒤통수에 꼬챙이가 솟아 있는 것이 아마 두원광(頭圓光)이었던 듯하다. 석가장 출토 <견염선정불좌상>에서 거신광(擧身光;온몸에서 일어나는 빛)을 상징하는 견염(肩焰)의 표현을 생략하면 자연히 이와 같은 두광의 표현만 남게 될 것이니 신광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뒷면은 왼쪽 어깨 너머로 넘겨진 대의(大衣)의 옷자락이 마치 수건을 걸어 넘긴 듯 간단하게 표현되는데, 세 줄의 굵은 음각선(陰刻線)이 포물선을 이루고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를 향하여 패어 나가 옷 주름선을 형용하는 생략기법으로 처리되었는데, 양팔뚝을 따라 내려온 옷주름선은 역시 별개의 주름더미를 이루어 소매를 상징했고 꼬리뼈 부근에 한 가닥 선을 넣어 엉덩이의 갈라진 모양을 나타냈다.

석가장출토 <견염선정불좌상>으로부터 이 정도의 양식화가 이루어지려면 적어도 반세기는 걸려야 할 듯하니, 이 상양식을 3세기 전반기에 두는 이유이다.


무의미한 형사

진(晉)의 삼국통일(280년) 어름에는 돈황보살(敦煌菩薩) 혹은 월지보살(月氏菩薩)이라 불리던 월지계 (月氏系)의 돈황 출신 축법호(竺法護, Dharmaraka, 曇摩羅察, 241~313년)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역경사업(譯經事業)을 크게 일으켜 175부 354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불경(佛經)을 번역해 낸다. 이외에도 무라차(無羅叉), 법립(法立), 백법조(白法祖), 섭도진(쉈道眞), 성견(聖堅) 등 많은 역경사 (譯經師)들이 활약하여 소위 고역시대(古譯時代)를 연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함부(阿含部)와 본연부(本緣部)에 속하는 근본경전(根本經典)을 비롯하여 대승경전(大乘經典)의 백미(白眉)인 반야경(般若經)과 법화경(法華經)까지도 번역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도가적 (道家的)인 이해체계(理解體系)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소위 격의불교(格義佛敎)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불상도 아직 상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미흡하여 무의미한 형사(形似;비슷하게 본뜸)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무외불입상(施無畏佛立像)>(도판 5)도 그런 단계의 상양식(像樣式)을 나타내는 것 중 하나다. 간다라 초기 불입상을 모방했으나 <견염선정불좌상>의 직모형식(直模形式;그대로 모방한 형식)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북상투가 감(枾) 모양의 무문단형(無文團形;무늬 없는 둥근 모양)으로 변하고 머리칼은 정면 머리 위에서 편도형(扁桃形)으로 표시되었으며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지은 오른손도 병신스럽게 확대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통견대의(通肩大衣)는 시무외인을 지은 오른손과 옷자락을 잡은 왼손에 의해서 똑바로 내려간 포물선이 가슴을 따라 내려와 넓적다리 사이에 이르고, 넓적다리 사이로부터는 별개의 포물선 무더기가 일어나 옷자락에까지 미치는데, 이런 아래위 옷주름선의 뚜렷한 구분은 역시 간다라 불입상의 옷주름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 잘못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뒷면처리 역시 단순한 음각 포물선으로 옷주름선을 상징하고 넘겨진 옷자락은 일본 <동경대 공학부 소장 선정불좌상>의 뒷면 옷자락보다는 입체감을 냈으나 겹겹이 접힌 형태로 상당히 경직되어 있다.

옷자락을 잡은 왼손이 오른손보다 작게 표현되어 균제성(均齊性)을 상실했고 왼쪽 팔뚝에 걸어 넘긴 옷자락이 포개져 만들어진 수직 옷주름 역시 구리관 모양으로 굳센 모양을 보여준다. 이런 여러 가지 양식적 특색이 이 불입상을 3세기 중기 제작이라고 보게 하는데 이는 선학(先學)들도 이미 지적한 바이다.

단판복련(單瓣覆蓮;홑꽃잎으로 엎어 놓은 연꽃)과 자방(子房;씨방)으로 이루어진 연화좌는 따로 부어 만든 것이다. 두원광을 꽂았던 꼬챙이가 길게 돌출했고 대좌(臺座) 측면 중앙 간주(間柱;사이 기둥) 표면에 ‘조상구구(造像九軀;만든 불상이 아홉 분이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업도상(業道像; 죄업을 소멸하기 위해 만드는 불상)으로 만들어진 9체의 불상 중 1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퇴영화의 극치

외래양식에 대한 무의미한 형사가 반복될 경우 형식적으로 퇴영(退孀)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어느 미술사에서나 보이는 보편적인 진리다. 중국불상 조각사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견염선정불좌상>을 그대로 본뜨는 데서부터 두번 세번 본떠 나갈수록 양식적 퇴영현상이 노골화하더니 드디어 이 <퇴영선정불좌상>(도판 6)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극도의 퇴영양식을 보여주니 형식적으로는 <견염선정불좌상>을 계승했으나 그 본래의 면목은 이미 망각되고 없다.

머리는 머리칼의 표현이 사라지고 북상투는 의미없이 우뚝 솟아 있으며, 얼굴도 깊은 눈 높은 코의 간다라적 특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눈두덩이 훨씬 높이 솟아오르고 눈은 좁고 긴 버들잎 모양으로 바뀌었으며, 볼의 굴곡 있는 양감도 소멸하여 평평하게 되었고, 간다라식 코밑수염도 없어져서 중국화하는 기미가 역력히 드러난다.

옷주름도 극단적으로 형식화하여 가슴에서는 비스듬한 돋을무늬 포물선이 거의 직각에 가깝도록 무의미하게 겹쳐지고 선정인을 지은 손 아래로 내려온 옷자락에서도 역시 네모에 가까운 돋을무늬 옷주름선이 중첩되어 도식적인 느낌을 가지게 하는데, 대좌의 사자 표현에 이르면 거의 추상성밖에는 찾을 길이 없다. 등뒤에 팬 옷주름선 역시 성긴 갈퀴발처럼 휘어지게 새겨 넣었으며, 왼쪽 어깨 너머로는 앞에서 넘긴 옷자락 표현을 보였지만 어느 경우에나 무의미성이 지배하고 있다.

엉덩이 아래로 깔고 앉은 대의(大衣)의 옷주름선이 대좌에까지 연장되는 불합리성을 보였고 앞에서 넘긴 옷자락은 입체감 상실이 고려되지 않았다. 옆면은 얇아졌으며 팔뚝을 따라 내려온 옷주름선은 파 넣은 선의 중첩이다. 귀가 떨어져 나간 듯 머리에 달라붙어 형식적인 표현에 그쳤으며 머리 뒷면에는 두광이 고정되었던 꼬챙이가 솟아 있다.

이런 극단적인 퇴영양식은 곧 이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래요소의 퇴영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면 본질에 대한 철저한 이해의 바탕 위에 그를 자기화해 나가는 길밖에 없다. 미술사를 통해 보면 인류는 유일한 통로를 잘도 찾아가고 있다. 중국 불상조각사에서도 바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니, 이 <퇴영선정불좌상>과 거의 동시 제작이라고 생각되는 <건무4년명선정불좌상(建武四年銘禪定佛坐像)>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회복의 길

외래양식의 맹목적 추종결과로 나타난 퇴영현상을 자기화로 극복할 단계에 이르면, 그 본질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선행했으므로 외래양식 자체에 대한 이해도도 그만큼 높아진다. 따라서 점차 외래양식을 본격적으로 재현해내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경우 저도 모르는 사이에 토착성이 적용되어 또 하나의 신 양식이 탄생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즉 자기 조형기반으로 외래양식을 소화해냄으로써 퇴영양식을 극복하는 방법과 외래양식을 철저히 이해하여 재현시킴으로써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양대 양식의 출현은 거의 동시적인 것이지만 어느 경우거나 자기 문화능력만큼 그 수준을 상승시켜 가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고도의 청동기문화 전통과 인체조각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곧 자기 역량을 되찾아 본궤도에 이르기 시작한다. 이 <외래재현선정불좌상> (도판 7)은 이와 같이 자기 역량을 회복해 가는 과정에 외래양식을 재현해낸 좋은 예 중 하나다.

우선 상형식으로 보아 극단적인 퇴영양식을 보이던 <퇴영선정불좌상> 계열임을 일견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지나치게 높고 커져서 얼굴과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던 육계(肉쬇;이미 북상투의 사실적인 의미는 인도에서도 사라져서 이 시기 조상에서는 북상투를 모두 육계로 표현하고 있었으며 고대계의 의미인 uiaira는 육계로 번역되고 있었다)가 크기는 하지만 머리와 조화를 이루는 적당한 비례를 보여주게 된다.

얼굴도 기괴성을 보이던 각 부위의 무의미한 과장표현이 정리되어 서역풍이 있는 중국인의 용모로 바뀌었으며 옷주름도 도식화된 어색함으로부터 입체감이 되살아나고 있다. 상형식은 철저하게 동일한데 조각 전체에서 흐르는 생경감과 원만감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르게 느껴진다. 이는 외래양식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바탕 위에서 자기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것과 맹목적인 추종으로 형사에 급급하던 것과의 제작자세 차이에서 연유하는 현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를 뒤이어서는 자기화 양식과 외래양식의 혼합이 다시 이루어지는데, 이는 불교가 중국의 토착화에 성공하는 것과 표리(表裏)를 이루는 것으로, 불교의 원형유지와 중국화라는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지키려는 신경향이었다. 이것은 대체로 불교를 우리나라에까지 전도할 만큼 불교의 이해와 중국화에 자신감을 가졌던 도안(道安, 314~385년)시대에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한다.


중국인 얼굴의 불상 출현

그런데 중국은 끊임없이 침략해 들어오는 이민족을 격퇴하거나 흡수하면서 항상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유지해왔다. 그 결과 진한(秦漢)시대에 이르면, 중국 민족만이 사람다운 사람이고 주변의 이민족들은 금수(禽獸)에 가까운 이적(夷狄;오랑캐)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외래문화 경시의 풍조가 전통을 이루는 바, 전후한(前後漢) 400년 동안 사회를 주도해온 유교이념이 이를 더욱 굳건하게 다져 놓았다.

그러나 후한 말에 이르면 유교이념의 말폐 노정으로 윤리의 실천방법이던 예교(禮敎)가 본질을 망각하고 형식만 남아 허례화(虛禮化)하면서 현실 주도 능력을 상실하게 되니 지식인들은 노장(老莊)철학의 허무관(虛無觀)으로 허례화한 유교이념을 타파하려 한다. 그러나 고답적 처세(處世)이념인 노장철학은 오히려 공리공담과 현실도피를 일삼는 허무주의를 조장하여 청담(淸談)의 유행과 같은 파행적(跛行的)인 기속(奇俗)을 유발하여 더욱 민중과 유리됨으로써 사회는 이념부재의 사상적 공백기를 맞게 된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진(晋)제국이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민족에게 멸망당하고 남쪽 양자강 (揚子江)가로 옮겨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곧 수천년 동안 지켜오던 중국문화의 기반인 황하유역을 이민족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에 중국인, 즉 한족(漢族)은 무력으로 굴복당한 패배감 위에 이념부재라는 절망감 속에서 끊임없는 호족상쟁(胡族相爭;오랑캐족들이 서로 다툼)의 전화(戰禍)를 겪어야 하는 암흑기를 맞게 된다.

이런 상황에 중화의 자존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실제 그들을 지배하는 호족들은 한구(漢狗)니 악한(惡漢), 치한(癡漢) 등으로 한족을 멸시하는 칭호를 서슴지 않았으므로 현실적으로도 그것이 용납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이 다만 외래사상이건 어떻건 간에 이런 현실적인 고난을 구제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믿고 의지하고 싶은 것이 당시 중국인들의 생각이었다.

불교는 이런 기회를 맞아 쿠샨제국의 불교 보호를 배경으로 하여 맹렬한 공세로 전도승(傳道僧)을 파견하여 중국 교화에 열을 올리게 되니, 삽시간에 불교가 전중국에 확산되어 중국은 불국토를 연상할 만큼 철저히 불교화하게 되었다. 불교가 이처럼 기름에 불붙듯이 퍼지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시대 여건이 작용한 것이지만 불교 자체가 가진 장점에도 원인이 있었다.

우선 불교는 인과응보에 입각한 윤회설로 합리적인 내세관을 제시하고 있어 내세관이 없던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다음 불상이라는 인격신상을 가지고 들어 왔다든가 수준을 달리하는 경전을 많이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 상하에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탈속한 신선의 생활을 동경하는 중국인들에게 교단조직을 가진 사원생활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사리신비와 의약구제 또한 대중의 신앙을 얻게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정자들에게 정치와 무관한 구세(救世)의 이념이라는 것이 해롭지 않았고, 끊임없는 쟁패(爭覇) 속에서 도술로 신이(神異)나 기적을 일으키는 신승(神僧)들의 도움이 전술적인 면에서 절대 필요했다. 그 위에 문화전통이 빈약한 호족에게는 한문화(漢文化)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 수준의 이방문화(異邦文化)라는 데서도 필요성이 더욱 공감되었을 것이다.

그중에서 호족 지배자들을 사로잡는 큰 매력은 역시 신승의 활약이었으니, 진(晋) 회제(懷帝) 영가(永嘉) 4년(310년)에 중국으로 온 서역승 불도징(佛圖澄, 232~348년)이 석조(石趙)의 국사(國師)가 되어 북중국을 교화한 사실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불도징은 신술을 방편으로 삼아 교화하면서 불교의 중국화를 꾀했다. 그래서 중국인 제자 1만여명을 길러냈고 평생 892사(寺)를 건립했으며, 석조의 황제이던 석호(石虎)로 하여금 ‘부처님이 융신(戎神) 이라면 호족인 내가 받들어야 할 신’이라고 하게 할 만큼 불교를 북중국에 토착화시켜 놓았다.

그래서 중국인 얼굴을 닮은 불상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불도징의 수제자인 석도안이 도가적인 이해방법을 빌려 불교를 이해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를 탈피하여 불경에 직접 주석을 달면서 불경 그 자체를 원의대로 이해하려는 불교의 중국화운동을 일으키는 것과 표리를 이루는 현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즉 극단적으로 퇴영화한 외래요소를 본질적인 이해의 바탕 위에서 자기화해냄으로써 새로운 미술양식을 창안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불교이념이 중국화되었기 때문에 그 중국화된 뿌리에서 중국화된 꽃이 피어날 수밖에 없어 중국화된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불상이 바로 하북성 석가장 부근에서 출토된 <건무4년명(建武四年銘)선정불좌상>(도판 8)이다.

이 <건무4년명선정불좌상>은 앞에서 본 간다라풍의 불상과는 전혀 상이한 조형기반 위에서 만들어졌음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중국 고유의 조형기법으로 만들어낸 불상인 것이다. 얼굴이 둥글납작하고 눈두덩이 솟아 있으며 머리칼이 곱슬머리가 아닌 곧은머리 형태라는 등 황인종 용모의 특색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체표현 기법은 이미 진·한시대 조각에서 그 선구를 찾을 수 있으니, 진시황릉 출토의 인물상 (도판 9)이나 한묘 출토의 인물상 등이 그것이다. 옷주름이 기계적인 층판형식을 이룬 것이나 상 자체가 철저한 좌우균제에 지배되고 있는 것에서도 중국 전통의 권위주의적 조형감각을 실감할 수 있다.

이 불좌상의 방형대좌 후면에는 “건무(建武) 4년 무술(戊戌) 8월30일에 비구 아무개가 만든 업도상 (業道像)”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것이 불도징과 도안이 석조에서 활약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건무(建武)는 후조(後趙, 또는 石趙)의 태조인 석호(石虎)가 다스리던 시대의 연호로 건무 4년이 서기 338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역시 하북성 석가장에서 미국인 브런디지(A. Brundage)가 수집하여 샌프란시스코의 드영박물관(De Young Museum)에 기증한 것이다. 측면 처리는 등뒤로부터 이어지는 옷주름선이 위 팔뚝으로 이어지고 아래 팔뚝에서는 입체적인 옷주름 모양이 일어나서 깊이 있는 표현이 되고 있다. 얼굴은 동양적인 용모라서 측면이 편평하나 흠잡을 데 없이 사실적인 표현이다. 진한 이래의 사실적인 인체표현 전통이 이와 같이 쉽게 불상을 중국화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귀는 아직 자연인의 보통 귀 모양으로 귓불이 늘어지지 않았고 두원광(頭圓光)을 부착시키던 꼬챙이가 돌출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