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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희망, 효명세자

화엄행 2010. 12. 1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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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희망, 효명세자

gauriyang  2010.06.11 22:47

조선왕조에서 세자 시절 아깝게 요절한 인물 중에서도 가장 아쉽고 아까운 인물을 꼽자면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앞선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과거와 근래에 이르러 그나마 알려진 인물들 이지만, 마지막으로 꼽은 효명세자는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는 역사에 추존 익종대왕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순원왕후 김씨 입니다.

순조 9년(1809)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출생 하였으며, 이때 부모의 나이는 순조 20세와 순원왕후 21세 였습니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첫 아이이자 장자로 태어난 익종은 태어난 순간부터 원자로 명명 되었고, 순조 12년인 1812년 6월 2일 휘(이름)를 대라 정하고 7월 6일 4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 되었습니다.


실로 효명세자의 탄생은 조선의 축복이었습니다.


현종과 명성왕후 슬하에 숙종대왕이 탄생한 이후로 150년여 만에 왕후의 몸에서 난 적통 왕자였으니 순조의 기쁨은 말로다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왕세자 책봉문에서 표현된 순조의 감격은 여느 군왕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 원자 너의 모습이 준수하고 영명하다"로 시작하는 어버지의 책봉문은 어질고 현명하게 자라 세자이며 아들의 본분을 다 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과 기대를 한껏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자는 그에 부응하는 성장을 합니다. 

여느 역대 세자와 비교해도 빠른 학습능력을 보였고, 용모에 있어서도 조부인 정조대왕을 빼 닮아 갔으니 순조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심경으로 아들의 성장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11세가 된 순조 19년(1819) 3월 20일 관례를 경현당에서 행하였고, 그해 10월 11일 조만영의 딸로 세자빈을 삼아 책빈례를 행하였으니 세자빈 조씨의 나이 세자보다 한 살 많은 12세였습니다.


순조 27년(1827) 2월 순조는 자신의 병을 핑계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합니다.

 

순조의 나이 불과 38세의 한창 나이였으나 어린 시절부터 왕의 격무와 안동김씨 세도의 등쌀에 시달렸던 순조는 무기력증과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명군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는 재위 초반에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친정 이후에는 아버지 정조가 자신의 후견인으로 내세워 준 장인인 김조순의 비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정순왕후는 정조대왕의 정치적 적대관계로서 정조대왕의 개혁을 무위로 돌렸고 순조 재위 초년 천주교 탄압이라는 껍질을 쓴 신유박해를 통해 노론 적대 세력이며 정조대왕 친위세력인 소론과 남인을 대거 숙청 하니, 그 수가 무려 500인에 달한다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등극 하자마자 그런 피바람을 목격 했으니 순조의 정신적인 충격은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런 탓인지 순조는 그 말년에 이르기까지 기를 펴지 못하고 정순왕후가 사망한 후에도 김조순이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대를 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순조의 유일한 희망은 아들 효명세자 뿐이었습니다.

 

군주로서의 자질이 남다른 세자에게 일찌감치 정치를 가르쳐 자신의 사후에는 더욱 영향력을 확대하길 바라는 순조의 마음이었습니다.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는 불과 4개월 만에 김조순의 아들인 김유근과 조카 김교근 등을 유배 보내고 사간을 통해 김씨 일족의 비리를 탄핵하는 등 세도세력을 약화 시키는 쾌거를 이룹니다.


세자의 청정을 통해 몰락했던 남인과 소론이 정계로 복귀 시켰고, 그간 세도 세력을 위해 자행 되어 온 과거제의 비리와 부정을 혁파 하고자 관련자에 대한 문책과 벌을 엄히 하였으며,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대리청정기간 3년 동안 무려 50회의 과거제를 시행 하는 등 인적 쇄신에 힘을 쏟게 됩니다.


 

특히 민생에 관심이 많던 세자는 자주 미행을 하게 되는데 그 길에 우연히 만난 박규수와의 인연은 군신지간을 넘어 친동기와 같은 우애로 발전하게 됩니다.


박규수는 북학파의 창시자이며 실학의 거두인 박지원의 손자로 초기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효명세자와 박규수는 북학과 실학을 함께 연구하며 개혁의 불씨를 함께 지폈습니다.


효명세자 사후 박규수 역시 은거에 들어가는데 그런 그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무려 50년 후인 고종 연간이었습니다.

 

개혁을 시도했던 효명세자는 그 방법으로 기존의 군주들과는 차별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바로 노래와 춤을 통해 왕권 강화를 꽤한 것입니다.


효명세자는 조선의 예악을 정립하는 것이 왕실의 권위와 전통을 내세우는 방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연회를 11차례나 마련함으로서 연회에 참석한 대소신료들에게 왕실의 건재함과 왕권의 신성함을 내세웠습니다.


1827년 9월,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첫 연회를 열었고


1828년 6월 순원왕후의 40세 축하연을 또한 개최 하였으며,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신경 쓴 1829년의 사순연은 세자가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메이드 인 세자의 연회였습니다.


사순연이란, 아버지 순조의 40세 생신과 즉위 30주년을 함께 기념하는 연회로서 여러모로 의미 있는 연회 였습니다.


순조 28년 11월 효명이 직접 아버지 순조에게 사순연을 열 것을 주청 하였고, 순조의 허락을 받은 세자는 곧바로 진찬소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연회 준비를 시작합니다.


전국에서 당대 최고의 기녀 85명을 선발 하였고, 한 달 동안 10여 차례에 이르는 예행연습에 직첩 참관 하여 진행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이때에 궁궐에 천한 기녀들이 돌아다니고 세자가 직접 무대를 참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세도 세력들이 공식적으로 불만을 터뜨립니다.


대사헌 빅기수 등이 1829년 1월 10일 이를 비판 하는 주장을 했으나 진노한 세자가 박기수 등을 유배 보내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사건입니다.


이는 사순연을 통한 세자의 계획이 비단 연회 개최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순연은 1829년 2월에 시작하여 6월에 이르기 까지 총 6회에 걸쳐 진행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순연에 선보일 춤과 노래를 세자가 직접 창작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궁중무용으로 유명한 춘앵전(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고 화문석 위에서 추는 독무)은 바로 효명세자가 창작한 노래와 무용입니다.


 

곱기도 하구나 달아래 걸어가는 그 모습

비단 옷소매는 춤을 추듯 바람에 가벼이 날리도다 - 춘앵전 중

  


이밖에도


무산향 - 효명세자가 만든 독무로 침상 모양의 대모반이라는 이동 무대 위에서 추는 춤.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의 기쁨을 표현.


가인전목단 - 목단 꽃을 꽂은 꽃병을 가운데 두고 그 꽃을 꺾으면 추는 춤


등을 만들었고, 고구려와 신라의 춤을 복원하는 등 한국사를 통틀어 예악에 있어서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깁니다.

  


세자는 시를 짓는 재능도 탁월하여 여러 수의 시를 남겼는데 특히 아버지를 향한 효심과 정국에 대한 포부 등을 담은 시가 많습니다.


봄 못이 맑으니 꽃 그림자 곱기도 해라

온 산천 붉어 비와 이슬을 머금으니

우리 임금 깊은 덕이 창생에 미쳐 이 같이 고르구나 - 효명세자 작 춘당대 중.

 

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구름을 일으키고 나와 안개를 토 하더라

이 용이 만물을 키워 내리

능히 사해의 물을 움직일 것이다 - 효명세자 작 잠룡.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깊었던 세자는 시를 지어 아버지께 바치고, 존호를 지어 바쳤으며 부모를 위해 11차례나 연회를 베푸는 등 정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훗날 세자가 돌연 사망하자 이에 세자에게 효명이란 시호가 지어 진 것도 세자의 효심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왕권의 강화와 부모님에 대한 효심의 발로로서 연회를 기획했던 세자는 연회 다음날 익일회작이라 하여 연회를 지휘한 신하들을 불러 개인적인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들 신하의 대부분은 세자 개인의 친위 세력 들이었습니다.

 

이 친위 세력들은 대부분 반 세도세력이었던지라 정치 회동적 성격이 매우 강했습니다.


또한 전 연회의 호위를 금군이 아닌 세자 개인의 친위부대에게 맡김으로서 군사적으로도 자신의 세력이 매우 우월함을 표현하였는데 이는 할아버지 정조가 화성연회를 베풀 때 군사적 우월함을 내세웠던 것과 일맥상통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자의 도발이 세도세력에게는 큰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1830년 윤 4월 22일 세자가 돌연 각혈 하자 궁궐에 초비상이 걸렸습니다.


그 전까지 세자의 건강은 문제가 없었고 각혈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순조가 약원에 숙직을 명하였고 종묘와 경모궁 등에 기도를 명하였습니다.


내의원의 탕제가 병에 효험이 없자 세자는 자신의 탕제를 직접 처방하였습니다.


정조의 경우 자신의 병이 갑자기 악화되자 스스로 처방하였던 전례가 있었는데 정조와 효명 모두 독살을 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5월 1일 측근 정약용을 입시케 하여 처방과 탕제를 맡겼으나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세자는 5월 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향년 22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은 3년에 불과 하였지만, 세자가 내보인 포부와 개혁의 강도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세자의 사망 후 순조는 모든 의욕을 상실 합니다.


그해 9월 15일 4세 된 세자의 아들을 세손으로 책봉하였고, 4년 후인 1834년 11월 13일 순조가 경희궁 회상전에서 향년 45세의 나이로 별다른 업적 없이 승하합니다.

 

효명의 아들인 헌종이 등극한 1834년, 헌종은 아버지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숭하였습니다.

 

고종이 익종의 양자로서 등극한 후에는 수차례에 걸쳐 양아버지인 효명에게 존호를 올렸고, 대한제국이 수립된 이후인 광무 3년(1899)에는 문조 익황제로 묘호를 추상하였습니다.

 

 

효명세자는 군주 등극하지 못하고 죽어서야 왕이 되지만, 그의 대리청정 3년은 조선왕국을 희망에 부풀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채 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꽃이 었으나 그 붉음 만큼은 누구라도 돌아보게 할 만큼 찬란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