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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寺 - 覺皇殿 佛菩薩象, 圓通殿 觀音像 & 탱화, 보제루, 사천왕 등등

화엄행 2010. 8. 9. 13:48

 

 

조선 19대 숙종 25년(1699년) 丈六殿 중건공사 시작

숙종 29년(1703년 癸未年) 각황전 완공 및 

'각황전'편액 (형조참판 李震休 書)하사 및 불단완공.

 

숙종 30년(1704년) 목조3불 및 4대보살 조성봉안.

 

<연잉군(영조대왕의 군호)과 모친 숙빈최씨의 수명장수를 발원하는 글이

숙종 27년 (1701년 辛巳年) 孟秋月인 음력 7월에 '丈六殿 重建 上梁文'에 적힘.>

 

 

본래 이 자리에는 2층 4면 7칸의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을 의상조사께서 조성 하였으나 임진란때 소실 되었다.

계파 성능선사(桂波 性能禪師)께서 장육전 중건 불사의 대발원의 백일기도로 문수보살의 선몽으로 공양주 스님이 화주승으로 선택되고, 시주자는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는 거지노파로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서원하고 소(沼)에 몸을 던지고 공주로 환생했는데 한쪽 손을 쥔채로 태어났으며 5년후 공양주 스님을 만나 손이 펴지니 손바닥에 장육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각황전은 숙종25년~28년(1699~1703)에 중건 되었으며 정면 7칸,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 수법이 웅장하니 어느 것도 비교할바가 못되는 법당이다.

법당안에는 3불 4보살인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다보여래, 지적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부처님을 깨달은 왕(성인중에 성인)이라는 뜻과 숙종 임금에게 불교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고 한다.
편액은 1703년에 형조참판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원융부동(圓融不動)의 무량법계
신라시대 이래로 지리산은 다섯 명산 중의 하나이며 천제를 지내던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그 산과 같이 광대한 법계처럼 느껴지는 화엄사로 가는 길에 잠시 멈추니, 구름너머 높고 장대한 연봉들과 물 건너 깊고 오묘한 골짜기들이 서로 조화롭게 틀고 휘어들며 사라진다. 각황전의 전신인 장육전을 초창했던 의상은 〈화엄경〉의 내용을 포섭한 〈법성게〉에서 “진성(眞性)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룬다(成)”라고 노래하였다. 예술과 종교는 진성의 인식을 미(美)로서 실천한다는 것으로는 동질의 의미이다. 그러나 때때로 철학적 사유에 의한 진리의 인식이 인간에게는 유효하나 예술에는 유효하지 않음을 발견할 때 예술의 초월성을 느낀다. 화엄사는 그러한 예술의 초월성과 함께 화엄의 종풍을 건축으로 드러내어 원융무애한 화엄법계에 증입(證入)할 수 있게 한다.

빛도 없고 형상도 없는 존재
신라 진흥왕 5년에 창건되어 화엄종의 본산이었으며 후기에는 선교(禪敎)양종의 대본산이었던 사찰답지 않게 작은 담으로 가린 소담한 일주문을 통과하면 휘어진 길과 통로 양측의 수목들사이로 차례차례 드러내는 동적 장면이 있다. 그 시점의 끝에 있는 금강문을 나오면 수직의 석단들 위로 천왕문과 보제루까지 이어서 나타나게 하는 산지사찰의 점진적 유도방법을 보게 된다. 그러나 화엄사는 측면에서 사선방향으로 바라보게 하여 천왕문의 정면과 우측면, 그리고 다음 목표인 보제루까지 중첩해서 보이는 입체적이고 동적인 지각을 하도록 유도한다. 주불전의 중심 공간에 이르지 않고 부분만으로도 무한한 생명적 법성이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화엄의 조형정신을 엿볼 수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좁았던 시야가 넓게 개방되면서 보제루만 보이는 것 같지만 왼편 상부의 사사자탑에서 시작하여 영산전과 각황전, 그리고 원래 지금보다 작고 멀리 있던 종각이 푸른 송림과 함께 종교적으로 승화된 천상세계의 건축인 듯 기대되는 상승 공간으로 시야에 펼쳐있다. 화엄경의 노사나품에는 항상 유전(流轉)하여 변하는 일체의 법은 부처님의 법신으로 불가사의하여 빛도 없고 형상도 없고 아무것에도 비교할 수 없으나 모든 세계는 여러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하듯 보제루 뒤로 펼쳐진 그 형상의 세계로 비로자나 부처님의 불법을 설하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 누마루형식의 보제루를 돌아서면 탑과 석축 위의 건물들과 비로봉의 잡화엄식이 텅 빈 마당에서 극적인 반전을 하여 한눈에 파노라마로 전개된다. 눈앞에 펼쳐진 총상의 무한 장면은 인식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한정된 공간의 형상이나 빛도 아니다. 상즉상입의 연기의 존재와 같이 개별적인 별상은 “많은 덕을 포함한 하나”로서의 총상을 의지하고 있는 화엄사상의 무량법계이다. 높이 4m, 길이 100m 이상되는 장대한 석축은 상승공간으로서 다양한 건물군을 하나의 전체로서 조화되고 통일되게 하였고 각황전과 원통전 그리고 대웅전의 주 건물은 합각지붕으로, 주변건물은 맞배지붕으로 하여 주 불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동시에 서로 맞물리게 하였다. 또한 진입부에서처럼 건물들을 다른 각도로 틀어 각황전의 좌측면과 대웅전의 우측면까지 동시에 보이는 입체적이고 변화적인 배치를 하여, 시선의 흐름을 수평적 흐름에서 비로봉까지 수직적 상승으로 연결하여 화려하면서 우아한 위엄과 섬세하면서 당당한 기품의 시각적 조화와 공간적 연속감을 준다. 마치 화엄경 입법계품의 비로자나장엄장 누각처럼 “크고 화려하기가 허공과 같아 서로 장애되지도 않고 어지럽게 섞이지도 않는다. 선재가 한 곳에서 모든 곳을 보듯 모든 곳에서 다 이와 같이 보았는바”, 이곳의 모든 건물은 생명적 원리의 조화를 전개하여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 속에 들어오는 무이(無二)의 법성을 표현한 법계가 되었다. 

모든 생명은 조화를 꿈꾼다
인조 8년(1630)에 중건된 대웅전과 숙종 29년(1703)에 중건된 각황전은 주불전인 대웅전의 중심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멀리 있으나, 또한 화엄종의 주존인 비라자나불을 봉안하고 있기에 더 큰 2층 건물의 1탑 배치처럼 지어서 조화와 대조를 동시에 표현하였다. 70년이나 늦게 세워졌음에도 각황전은 먼저 지어진 단층건물인 대웅전을 강조하여 느끼게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크나 모든 면에서 대웅전보다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비교된 절제를 통해 또 다시 화려한 별상을 취하고 있기에 각(覺)의 황(皇)으로서 부동하나 자유자재한 경계의 조화된 모습으로 있다.

모든 생명은 조화를 꿈꾼다. 생명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에 조화롭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다. 본능적으로 조화는 작위적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가 배제된 것으로 개별화되기에 앞서 하나라는 생명의 본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개별성은 다의적으로 언표되며 서로 부딪혀 상충적 욕구들을 추구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난 미의 상태에 다가가는 것이다. 조화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동일성의 발견이다.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나 서로 다르기만 하지도 않다”는 원효의 비일비이(非一非異)사상도 “다른 것과의 차이의 확인은 동일한 것을 해명한다”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도 결국 동일성에의 발견이다.

화엄사는 조화라는 추상적 진모(眞貌)를 형상의 충만함으로 선명한 세계를 펼친다. 조화에 있어 체계란 없다고 말하는 듯 이성적 비례나 서로가 대응되는 건축의 규칙들은 화엄으로 존재하여 쉽게 느낄 수 없다. 총상과 별상으로 구분 및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물들이 땅과 산과 하늘처럼 조응(照應)하고 화엄의 규칙들 속에서 수많은 움직임이 발견된다. 생명적 동일성 안에 다시 개별적 화엄이 자리하고 있는 각황전은 화엄미의 본질을 품고 있는 실체적 공간이다. 밖에선 2층이나 내부는 통층으로 그 높이를 짐작하기 힘든 고주들 사이로 사면의 고창을 통해 들어오는 은근한 빛의 광휘는 공간과 합하여 단청의 색과 화하여 화해하는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시각과 청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아닌 영혼에 의해 인식된 듯한 탈색되지 않을 광휘는 부처님의 반 쯤 감긴 눈꺼풀 아래로 인간의 불안과 절실한 갈망들과 마주할 뿐 열정과 엄격은 없다. 그저 아름다움만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미(美)는 신의 본성
미는 모든 생명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초월하게 하는 근원적 힘을 내포하고 있다. 가르쳐 준 것이 아닌 생명체 스스로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미적 정화의 기능은 두려움에 취약한 모든 생명체들 간에 사랑과 연민을 자아내며 화엄의 대라천을 이룬다. 사랑과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감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정성으로 가꾼 꽃이 잘 자라듯이 사랑은 생식적 본능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조화롭고자 하는 자연의 욕구이다. 진정한 미는 신의 본성이라 한다. 그래서 인류는 아름다워야 하는 신의 본성과 조우할 수 있는 종교 공간을 그토록 아름답게 표현해 내고자 하였을까. 그리고 그 미의 공간에서 진성을 깨달으며 신성과 합한 존재이고자 하였던가. 화엄의 추구는 신성과 맞닿아 있다. 모든 존재가 구별없이 통합되는 원융이 화엄의 법성이듯 이 곳에서는 모든 것이 조화를 꿈꾸는 본래 고요한 자연적 사랑인 자비에 스스로 동화된다.

 



명칭 : 각황전 주련(覺皇殿 柱聯)

偉論雄經罔不通
一生弘護有深功
三千義學分燈後
圓敎宗風滿海東

위대한 경전과 논서 모두 통달하시고
일생을 홍포하사 공덕 깊고 넓도다.
걸출한 삼천 제자 법등을 나누시니
화엄의 종풍 전국을 휩쓸었네.

西來一燭傳三世
南國千年闡五宗
遊償此增淸淨債
白雲回首與誰同

인도에서 온 일촉의 등불 온 세상 밝히니
천년을 전하여 다섯 갈래로 피어났도다.
이 많은 청정한 빗 노닐며 갚으려하니
백운에 머리 돌려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다보불     지적보살 

다보불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아미타불

 

 

 

 

 

 

 

 

인조10년(1632) 벽암선사께서 중건하였는데 정조조(正祖朝)에 화재로 소실된후 정조19년(1795)에 다시 담인(曇仁)선사가 중건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16분의 아라한(阿羅漢)을 모신곳이며 응진전이라고도 합니다.
번뇌의 적을 죽여 영원히 깨달음에 들어가서 어리석은 세계에 태어남을 받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베풀어 바르게 이끌어 주시니 사람들에게 존경얻어 공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훌륭한 분입니다.

 



명칭 : 나한전 주련(羅漢殿 柱聯)

諸大聖衆振玄飛
敎化羣生一體同
洞察人間如反掌
消災降福願皆脫


여러 큰 아라한 진리를 힘차게 드러내시어
한 몸 인양 수많은 중생 교화하시네.
인간 세상 손바닥 보듯 살피시는 분
원컨대 복과 지혜 주시고 모두 해탈케 하소서.

 

 홍매화

 

 

 

 

 

조선 숙종29년(1703) 계파선사께서 중건했다.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님,칠성,독성,산신이 모셔져 있으며 또 법당에 부휴집(浮休集), 염불직지(念佛直指)등 많은 귀중한 목판본이 보관 되어있다. 편액은 정조23년(1799)에 조종현에 의해 쓰어진 것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은 크고 넓고 자비로운 덕이 있으신 분으로 가장 널리 우러름을 받으시며 극락세계에서 아미타 부처님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곳에 나타나 형편을 살피시고 모든 이들을 괴로움과 어려움에서 구해 주시는 인자하신 분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도 합니다.

칠성(七星)님은 사람들의 좋은일,나쁜일,복덕,수명장수를 도와 준다고 합니다.

독성(獨聖)님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반존자로 천태산에서 혼자 도를 닦아 연각(緣覺)을 이룬분입니다.

산신(山神)은 산신령,산왕대신으로 산을 맡아 수호 하고 있는 분입니다.

 



명칭 : 원통전 주련(圓通殿 柱聯)

一葉紅蓮在海中
碧波深處現神通
昨夜普陀觀自在
今日降赴道場中

바다 속 붉은 연꽃 한 송이 피어나
푸른 파도 깊은 데서 신통을 보이시네.
어젯밤엔 관자재께서 보타에 계시더니
오늘은 화엄 도량 가운데 강림하셨네.

 

 

 

 

 

산신탱 

 

 독성탱

 

 칠성탱

 

조선 인조10년(1632)때 벽암선사가 중건 하고, 헌종 2년(1836)에 보수했다. 본래 영전은 응향각(凝香閣)의 중노전(中爐殿)으로 대웅전, 나한전의 소임을 맡은 스님이 거주했던 전각 이었는데 영전으로 바뀌면서 연기조사, 자장율사, 원효성사, 의상조사, 도선국사등 화엄사의 역대조사, 선사, 대사 분들의 영정(影幀)을 모셨던 전각이다. 그런데 아깝게도 영정이 1976년에 도난 당했으며, 현재는 보물인 화엄석경을 보관하고 있다.

 



장육전은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조사가 2층 4면 7칸의 사방벽에 화엄경(華嚴經)을 돌에 새기고 법당안에 장육황금입불상(丈六黃金立佛像)을 모셨으며, 법당을 짓게 된 연유는 의상스님께서 당나라에서 화엄경을 통달하시고 귀국하여 원효스님과 법담을 나누니 신라국에 없는 화엄경에 대하여 능통하여 사연을 물어본즉, 백제성왕 22년에 구차례(구례)라는 곳에 인도스님이신 연기조사께서 지리산 화엄사를 창건하여 천축적 화엄경을 설법하여 화엄의 꽃이 피어 있었다는 말씀을 듣고서, 화엄사에 와보니 부처님 성지에 온 느낌을 받고, 백두산 혈맥자리 아래에 부처님 나라에서 온 연기존자께서 화엄경을 설한 땅이며 화엄불국세계 화엄사가 화엄의 근본도량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장육전 법당을 세우게 되었다. 임진왜란때 건물이 파괴 되어 지금은 조각만 남아 화엄석경으로만 불리우고 있다.

※ 글씨는 신라 명필 김생이 썼다.

 


 
종목 : 보물 제1040호
명칭 : 화엄석경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석각류
수량 : 8980점외일괄
지정일 : 1990.05.21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석경(石經)은 경전의 원문을 돌판에 새긴 것인데, 화엄석경(華嚴石經)은 화엄경을 엷은 청색의 돌에 새긴 것이다. 통일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화엄사에 각황전을 세우고 이곳에 화엄석경을 보관하였다. 각황전의 안쪽 벽에는 현재 그림이 걸려 있으나, 원래는 여기에 화엄석경이 벽을 이루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경에는 네모진 돌들을 서로 맞추어 끼웠던 듯 모서리에 연결을 위한 홈이 파여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석경들이 파손되었고, 색깔도 회갈색 등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파손된 것을 모아 지금은 약 9천여 점이 남아 있다.

글씨체는 해서체로 최치원이 정강왕 2년(887)에 쓴 쌍계사 진감국사비문과 비슷한데, 당시의 글씨체를 잘 보여주고 있어 희귀한 석경의 대표적인 예로 주목되고 있다. 이 화엄석경은 우리나라 화엄종 사찰의 상징적 유물로서 비록 파편이기는 하나 신라 후기의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대웅전은 인조8년(1630)에 벽암(碧巖)스님과 문도에 의하여 중건 되었으며 화엄사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이며 크기는 전면19.5m, 측면12m로서 정면 5칸, 측면3칸이며 부처님 머리위에 못과 풀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우아하고 형태가 일품인 천개(天蓋)가 조각 되어있다.

법당에는 깨달음의 세계(진리)를 몸으로 삼기 때문에 모양과 빛깔이 따로 없고 오고 가는 곳도 없이 진리 그대로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과 열심히 수행하신 공덕으로 복과 덕이 가득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원만보신 노사나불(圓滿報身 盧舍那佛)과 모든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신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로 목불(木佛)인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후불 탱화는 영조 33년(1757)에 만들어 졌고 대웅전 편액은 인조 14년(1636년)에 의창군(義昌君)이 쓴 글씨이다.

 



명칭 : 대웅전 주련(大雄殿 柱聯)

四五百株垂柳巷
樓閣重重華藏界
二三千尺管絃樓
紫羅帳裏橵眞珠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가지 휘영청 늘어진 수양버들 마을
누각은 겹겹이라 화장세계로구나
높고 높은 루 관현소리 그윽함이여
자색 비단 장막 속 진주 보배 뿌리나니
법비 내려 중생 이익 허공 가득하고
일체 중생 근기 따라 큰 이익을 얻도다.

 

 

   

인조 8년(1630년) 벽암스님 중건, 1970년 리산 도광선사께서 중수했다. 편액은 정조 23년(1799)에 조종현의 글씨이다.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十王)들을 모셨습니다.

지장보살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남다른 칭찬과 당부를 받고 매일 선정에 들어 모든 이들의 마음과 힘을 살피며 중생들 모두를 괴로움과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기위해 죄를 짓고 고통받는 지옥중생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구제한 다음에 부처님이 되겠다고 서원을 세운 대비대원(大悲大願)의 보살님입니다.

시왕은 저승세계에서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판결하는 분으로 진광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오도전륜대왕 입니다.

명부시왕 소관사항
시왕명호
소      속      육      갑
소속지옥
형   벌   내   용
진광대왕
경오 신미 임신 계유 갑술 을해
도산지옥
칼산을 밟고 가기
초강대왕
무자 기축 경인 신묘 임진 계사
화탕지옥
끓는 물에 담그기
송제대왕
임오 계미 갑신 을유 병술 정해
한빙지옥
찬바람으로 춥게하기
오관대왕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무진 기사
검수지옥
칼로 몸베고 짜르기
염라대왕
경자 신축 임인 계묘 갑진 을사
발설지옥
쟁기로 혀를 갈기
변성대왕
병자 정축 무인 기묘 경진 신사
독사지옥
독사로 몸 감기
태산대왕
갑오 을미 병신 정유 무술 기해
좌대지옥
돌디딜방아로 몸찧기
평등대왕
병오 정미 무신 기유 경술 신해
거해지옥
톱으로 몸 자르기
도시대왕
임자 계축 갑인 을묘 병진 정사
철상지옥
불쇠판에 올리기
오도전륜대왕
무오 기미 경신 신유 임술 계해
흑암지옥
암흑 속에 가두기

 

 

보제루는 인조때 벽암대사가 건립하였고 순조27년(1827)에 중수한 2층 누각건물로 설법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면 7간, 옆면 4간(1층은 2간)의 맞배지붕인데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87년 6월 10일에 원응종원(圓應宗源)스님이 중창하였다.
본 당우는 1층은 공양간 및 식당, 목욕탕이 있고 2층은 원주실외 객실로 사용하고 있다.
걸리고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우러짐이 없이 가득하고 만족하여 완전히 일체가 되어서 서로 융합하므로 방해됨이 없는 것을 원융이라 한다. 이와같이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이 함께 지내는 요사(寮舍)이다.

 

 

 

 

조선 인조 10년(1632) 벽암각성대사께서 중건했다.

지국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동방(동승신주)을 수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는 천왕

증장천왕은 칼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남방(남섬부주)을 수호하고 항상 사람을 관찰하고 더욱 길고 넓게 중생의 이익을 많게 해주는 천왕

광목천왕은 용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서방(서구야니주)을 수호하고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넓고 큰 눈으로 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을 이익되게 해주는 천왕

다문천왕은 보천을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북방(북구로주)을 수호하고 재물과 복덕의 부귀를 맡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많이 들으며 불법을 옹호하는 천왕

 

 

 

 

인조 10년(1632년) 벽암 각성선사께서 중건했다.
금강은 쇠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라는 뜻이며 그 무엇도 이를 파괴할 수 없으나 금강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으므로 금강의 마음을 가지면 모든 번뇌도 없어집니다.

왼 쪽에 밀적금강 :
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이 있으므로 밀적금강이라한다.

오른 쪽에 나라연 금강 :
나라연은 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 백만배나 된다.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문수동자 :
문수보살이 동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보처로 지혜를 맡고 있으며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자를 타고 있다.

보현동자 :
보현보살이 동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우보처로 진리 광대행을 맡고 있으며 행원의 실천을 나타내기 위하여 코끼리를 타고 있다.

 

 

   寂滅堂前多勝景(적멸당전다승경)
   吉祥峰上絶纖埃(길상봉상절섬애)
   彷徨盡日思前事(방황진일사전사)
   薄暮悲風起孝臺(박모비풍기효대)


   적멸당 그 앞엔 경치도 빼어나고
   길상봉 높은 봉우리 티끌도 끊겼네
   진종일 서성이며 지난일을 생각하니
   저문날 슬픈 바람 효대애 감도네


대각국사(大覺國師 : 1055~1101)이신 의천(義天)은 고려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 11세에 통도사에서 출가하고 31세에 송나라로 건너가 화엄(華嚴), 천태(天台)등 중국불교를 두루살피고 돌아와 천태종을 일으겼습니다.
고려 선종(宣宗)11년(1094)에 남쪽지방을 순례중 화엄사에 머물면서 4사자 3층사리석탑(효대탑)에 올라 읊은 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비(碑)를 세운것입니다.


불기 2535년(1991) 12월
화엄사주지 종원(宗圓)
구례군수 윤관중(尹寬重)
글씨 이돈흥(李敦興)

 

이 비는 임진왜란때 소실된 화엄사를 중창하신 벽암스님(1575~1660)의 비이다. 법명은 각성(覺性), 호는 벽암(碧巖), 속성은 김씨, 충북 보은 출신이다.
10세때 화산(華山)의 설묵(雪默)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여 14세에 스님이 되었다. 1593년 19세때 승병에 가담해 자운(慈雲)스님을 따라 해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광해군때 봉은사에 머물면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이되었고, 부휴(浮休)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인조때 남한산성축성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승군을 거느리고 축성작업을 감독, 3년만에 축성사업을 마쳤으며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칭호를 받았다. 스님은 8원 81암자의 화엄사가 임진왜란으로 소실 된 것을 인조(1630~1636)때 대웅전, 보제루, 적묵당, 천왕문, 일주문등을 중창하였다.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한 소식을 듣고 남도 의승 3천명으로 항마군을 조직하여 호남의 관군과 호응하여 북으로 올라가던 중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도반인 고한(孤閑)스님과 더불어 화엄사로 돌아와 주석하시면서 그후 사신으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가던 중도에 병으로 사퇴하고 화엄사에 와서 후학을 지도하시던중 이곳에서 입적하시니 세수는 86세요, 법랍은 72세요 법 제자로는 백곡처능(白谷處能)이 있으며, 화엄사와 송광사, 해인사, 법주사에 부도탑을 세웠다.

 



금강문 오른쪽에 있는 벽암스님의 비석을 받치고 있는 동물이름이 연으로서 머리는 용(龍), 몸은 거북이, 날개를 달고 있다. 이 충무공의 군사(軍師)이며 부장군으로 활약하신 자운스님이 연기존자께서 타고 오신 연의 모습을 본따 거북선을 만들게 하였다 . 이 동물이 바로 연이요, 거북선의 원형이다.

 

 

 

 

 

 

 

백일홍 

 

 

 

일주문은 절 들어가는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문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서 지은 것이며 이문을 들어서면 오직 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 인조 18년(1640년)에 벽암선사가 중건 했고 고종 3년(1866년)주지 지선스님과 도감 회성스님이 연목과 부연보수, 1919년에 진응스님이 도리일부, 부연, 연목보수, 1998년 종걸스님이 보수을 하였다.
글씨는 선조대왕의 네 번째 부인의 네째 아들인 의창군의 글입니다.
※ 보물지정예정

 

1988년 10월1일에 원응종원(圓應宗源)스님이 중창하였다.
절의 입구에 있는 누문(樓門), 관문(關門)으로 이 문에 들어오면 너와 내가 없고 상대적 차별이 없이 원융한 한마음이 되어 중생이나 부처님이나 세간법(世間法)이나 출세간법(出世間法)이 평등하여 화엄법계인 연화장세계로 인도 (引導)하는 산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