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역사의 향기 ♧

강동욱기자의 경남문화유산 답사기 http://kdo.gnnews.co.kr/

화엄행 2009. 9. 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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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욱기자의 경남문화유산 답사기

 

교방 문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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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문화는 진주 문화의 한 맥(脈)이다. 옛날 진주목 관아 근처 교방에서 진주의 풍류와 멋을 창출해 낸 주인공들은 바로 진주 교방 사람들, 즉 기녀와 악사들이다. 엄격한 유교문화 질서속에서 신분적으로 천대와 멸시를 당하면서도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지켜온 것이다. 그러다가 교방문화는 일제 때 들어온‘유곽’즉 창기들로 인해 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단지 그들의 흔적이라고는 애틋한 사랑을 담은 문학작품 그리고 춤과 노래가 ‘교방무’ ‘교방가요’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본보는 교방문화의 주인공인 기녀(妓女)들의 흔적을 찾아 이를 재구성해 소개하는 것은 물론 이들이 남긴 문학 작품 그리고 춤과 노래에 얽힌 이야기들도 함께 다룰 예정이다. 또 한국화가 창전 조원섭씨의 그림을 곁들여 독자들에게 교방문화의 풍류와 멋을 알기 쉽게 전할 것이다. 〈편집자주〉

1. 교방 문화를 찾아서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에 위암 장지연은 진주의 정경과 문화를 노래한 ‘진양잡영(晋陽雜詠)’ 14수를 연재하면서 “풍부한 물산(豊産), 아름답고 요염한 기녀(娟妓), 무성한 대나무(竹蠅)를 진양삼절(晋陽三節)”이라고 했다.
일찍이 약 100년전 위암이 ‘진양삼절’ 중 하나라고 만천하에 알린 아름답고 요염한 진주 기녀. 바로 진주 교방문화의 주인공들이다.
진주의 풍류와 멋을 창출해낸 사람들인 것이다. 진주의 논개 평양의 계월향으로 인해 절개와 풍류를 아울러 ‘남진주 북평양’란 말이 회자 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이평양(二平壤)·삼진주(三晋州)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진주 기녀들이 만들어 낸 찬란한 교방 문화로 말미암아 진주에는 많은 시인묵객과 가객들의 출입이 있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가객 안민영이 진주 기생 비연을 만나기 위해 천리길 진주를 찾지 않았던가. 그는 비연을 만나고 그 감흥을 시로 표출하기까지 했다.
굳이 ‘논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진주 기녀는 조선 최고 수준이었다. 이는 진주 교방문화가 우리나라 최고 수준이라는 증거이며, 지금도 진주는 교방문화의 도시인 것이다.
일찍이 이능화(李能和)는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지방에 따라 나름의 특색이 있었는데 평양기생이 그 숫자나 기예에서 가장 으뜸이었고, 다음이 진주기생으로 나와 있다. 의절 논개말고도 역대 진주 기생으로는 승이교(勝二喬)·계향(桂香, 蘭香)·매화(梅花), 진양의 옥선(玉仙) 등이 빼어난 명기(名妓)들이었다.”고 할 정도 였다.
교방문화는 교방을 중심으로 만들어 졌다. 교방(敎坊)은 고려·조선 시대 기녀(妓女)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래와 춤을 관장하던 기관이다.
교방청(敎坊)은 본래 중국 당나라 때 궁중 내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관기들과 악공들에게 가무악(歌舞樂)을 가르쳤던 곳이다. 이러한 중국 교방의 전통은 우리 나라의 경우 발해를 거쳐 고려 문종 조에 도입되었고, 조선조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장악원(掌樂院) 소속의 좌방(左坊)과 우방(右坊)을 교방이라고 불렀다. 1458년(세조 4)에 전악서(典樂署)를 장악원으로 개편하고 좌방과 우방을 두었는데, 좌방은 아악(雅樂)을, 우방은 속악을 맡게 하였다.
또한 교방은 지방 관아에 부속된 건물로 대개는 관문 밖 객사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역시 이곳에서 지방의 기녀들이 악기 노래 춤 등 각종 예기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 불려 다녔다.
진주 교방은 어디 있었을까. 진주의 인문지리지인 진양지 ‘관우(館宇)’조에 “중대청(中大廳) 동쪽과 서쪽에 낭청방(郞廳房)이 있고 서쪽 낭청방 앞에 교방(敎房)이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중대청은 객사 건물로 안에 왕을 의미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고을 수령이 한 달에 두 번 배례(拜禮)를 올리던 곳으로 진주 비봉산 아래 고경리(古京里)에 있었던 건물이다.
지금 진주 MBC 건물 근처에 진주 교방이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진주 교방’을 중심으로 진주 교방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것이다.
진주 교방문화는 진주사람들의 풍류와 멋에서 찾을 수 있지만, 우리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방춤 뿐이다. 대부분의 진주 교방문화가 천하디 천한 기녀들의 생산물로 치부해 버려 그들의 문화적 산물은 거의 소멸되고 단지 교방춤 만이 전승돼 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교방춤은 오히려 교방청이 폐지된 이후, 지방으로 흩어졌던 관기들이 권번(券番)이나 기생조합을 만들어 기방을 중심으로 추었던 춤으로부터 본격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방춤은 기방춤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과거 교방청의 궁중정재(宮中呈才)나 향악정재(鄕樂呈才)의 춤을 이어받기도 했지만, 지방의 무악(巫樂)과 같은 민속악(民俗樂)에 맞추어 추는 민속춤을 가미하기도 했다.
오늘날 교방춤은 전문 예능의 무용으로서 춤의 예능을 전수 받은 예능인들에 의해 공연되고 있으며, 이들 춤의 대부분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나 지방의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다. 진주 검무, 진주 한량무, 진주 교방굿거리, 진주 포구락무 등 진주 교방무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시서예화에 뛰어난 진주 기녀들이 추었던 교방춤은 이제는 볼 수 없다. 다만 이들의 기예를 전승하고자 하는 예능인들에 의해 전해지고 또 볼 수 밖에 없다. 기예가 뛰어나 궁중 연회에까지 차출되었던 진주 기생 산홍이 추었던 진주 교방굿거리는 지금은 상상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 말기에 오면 기생이 일패(一牌)·이패·삼패 등으로 구분되는데, 일패는 관기의 총칭으로서 한국 전통가무의 보존·전승자로 뛰어난 예술인들이었으며, 이패는 밀매음 (密賣淫), 삼패는 공창(公娼)의 기능을 했다.
‘진양삼절’의 하나인 진주 기녀는 한국 전통가무의 보존·전승자로 뛰어난 예술인들을 말한다. 우리들이 세속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기녀들이 아닌 것이다.
전통 문화 예술의 계승자인 진주기녀들의 문화는 곧 진주 문화의 한 맥이다. 진주교방 문화의 흔적을 찾는 일은 진주 문화의 또 다른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