扶餘 無量寺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무량로 203(만수리 116)
부여의 무량사는 백제의 고도인 부여에 자리하고 있지만 통일신라 시대에 지어진 사찰로 알려져 있다. 부여, 서천, 보령 등 인근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다.
무량사는 만수산 자락에 자리잡아 등산객들이 많이 들러가는 곳이다. 하지만 일주문을 지나서 금강문까지 이어지는 길이 아주 아름답다. 만수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을 끼고 있는데, 고목들이 많아 운치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찰로 들어서면 이층 목조 건물인 극락전이 나온다. 이 극락전은 보물 제185호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로 바깥에서 보면 이층으로 보이지만 안에는 단층이다. 극락전 안의 불상이 워낙 규모가 커서 이런 구조가 되었다. 이런 형태는 금산사 미륵전이나 법주사 팔상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극락전은 아주 멋지게 생긴 건물이지만 건물 내부에는 별 치장이 없다. 큰 불상 외에는 닫집도 없고 불단의 치장도 거의 없다. 극락전 외에도 무량사에는 보물 제185호인 무량사 오층석탑과 보물 제233호인 무량사 석등이 있다.
그리고 무량사 감로수의 물맛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철분 성분이 약간 함유되어 있는 것 같아, 마실 때는 아주 시원하고 마신 후에 철분 성분을 느낄 수 있다.
무량사 : (041)836-5182
신라시대에 창건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重修)하였으나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주위의 산림(山林)이 울창하여 거찰(巨刹)의 면목을 유지하고 있는데,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드물게 보는 2층 불전(佛殿)으로 내부는 상 ·하층의 구분이 없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서, 당시의 목조 건축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극락전 내에는 거대한 좌불(坐佛)이 안치되었는데 중앙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좌고(坐高)가 16자, 가슴둘레 24자이며 좌우의 관세음(觀世音)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각 좌고가 16자에 가슴둘레가 18자이다. 또한 여기에는 석가불화(釋迦佛畵)가 있는데 길이 45자 8치, 폭이 25자 2치나 되는 조선 인조 때의 불화로 기구(機構)가 장대(壯大)하며 묘법(描法)도 뛰어나고 채색도 선명하다.
이 밖에도 경내에는 보물 제185호로 지정된 5층석탑, 보물 제233호인 석등, 지방문화재인 당간지주(幢竿支柱), 김시습 부도(金時習浮屠) 등이 있다. 이 절은 또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있다가 죽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량사 [無量寺] (두산백과)
보물 제233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3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법당 앞뜰의 무량사5층석탑(보물 185) 바로 앞에 있으며 이것은 원래의 위치로 추정된다. 하대석(下臺石)은 측면부분까지 파묻혀 있어 지대석(地臺石)의 형태는 물론 그 유무도 알 수 없으나, 하대석 측면이 8각이었음이 시굴(試掘)에서 밝혀졌다. 하대 상부는 원형 연화대(蓮華臺)로 8잎의 겹꽃잎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맨 위에는 1단의 각형(角形) 받침을 새겨 8각 간주(竿柱)를 받치게 하였다.
상대석 역시 8각이며 밑면에 1단의 각형 받침을 새겨내고, 8잎의 홑꽃잎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을 둘렀으며, 상면에는 받침도 새기지 않아 평평한 위에 8각 화사석(火舍石)을 얹었다. 화사석은 8각이나 부등변 8각으로 4면은 넓은 반면에 다른 면은 좁아 한편의 4모를 죽인 것이다. 옥개석(屋蓋石)은 하면에 넓은 굄이 얕게 새겨졌고, 8각 추녀마다 반전(反轉)이 현저하여 전각(轉角)의 반전과 어울려 경쾌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옥개석이 약간 큰 편이나 엷은 옥개에 추녀마다 반전이 경쾌하여 둔중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조성 연대는 나말여초(羅末麗初)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량사 석등 [無量寺石燈] (두산백과)
보물 제185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8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7.5m. 하기단(下基壇) 너비 5.2m. 2중의 기단 위에 세워진 5층의 사각 석탑으로, 기품은 웅대·장중하며 결구(結構)에 특색 있는 수법을 보였다.
하층기단은 파묻혀 있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갑석(甲石)은 규칙성도 없이 다수의 석재로 짰고 상면은 완만하게 경사져 있다. 이에 비하여 상층기단의 짜임새는 규칙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중석(中石)은 4우주(隅柱)와 각 면 탱주(撑柱)는 모두 다른 돌이고, 각 면 면석(面石) 2장씩을 세워서 구성하였다. 갑석은 8장으로 탱주와 우주 위에 갑석이 얹히게 되어 있고, 밑의 부연(附椽)은 각호형(角弧形)의 몰딩형식을 취하여 일반형을 벗어났다. 탑신부(塔身部)는 초층 탑신이 낮으나 옥개석이 넓고 체감비율도 우아하여 매우 장중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은 얇고 추녀는 우각(隅角)에 이르러 약간의 반곡(反曲)이 나타나있다. 상륜부는 일부만 남았다.
옥개가 넓다거나 상층기단 갑석의 받침을 만든 수법, 각부 부재를 다른 돌로 한 점 등은 부여정림사지5층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서, 지역적인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석탑은 많은 양식을 절충하였으나 잘 조화된 것으로, 만든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량사 오층석탑 [無量寺五層石塔] (두산백과)
무량사 당간지주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16. 충남유형문화재 제57호. 고려시대.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무량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당간지주는 기도(祈禱)나 불교의식 때 부처와 보살의 성덕을 표시하는 기[幢]의 깃대[幢竿]를 고정시켜 주는 받침대[支柱]로, 보통 돌이나 쇠·나무 등으로 만든다.
무량사의 당간지주는 기단(基壇)을 2개의 판석(板石)으로 짜고 그 사이에 간대(竿臺)를 끼워 넣었다. 간대 양쪽에는 45cm쯤 사이를 띄우고 화강암으로 높이 270cm의 지주를 세웠다. 그리고 간대 중앙에는 당간을 받치는 기둥 자리를 파고 그 주위에 원좌(圓座)를 도드라지게 나타냈다.
지주는 직사각형으로 위쪽 모서리를 둥글게 마감하였다. 앞뒷면의 가장자리에는 양각(陽刻)의 띠[帶]를 돌렸고, 옆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돌대(突帶)를 새겼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구멍은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상하 2개가 뚫려 있다. 지주나 기단부에는 아무런 수식(修飾)이 없는 소박·단아한 당간으로, 고려시대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량사 당간지주 [無量寺幢竿支柱] (두산백과)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56호로 지정되었다. 하층은 정면 5칸에 17.14m, 측면 4칸에 12.23m이며, 상층은 정면 3칸에 12.23m, 측면 2칸에 7.34m의 중층 팔작지붕이다.
외관상으로 보면 중층이나 내부는 상하층의 구분 없이 하나로 통해 있다.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사방 주위에 1칸의 외둘레칸을 통하게 하였고, 그 안쪽에 3칸×4칸의 평면을 지어 고주(高柱)를 돌려 세웠다. 상층은 하층에 세운 고주가 그대로 연장되어 사면의 벽기둥[壁柱]을 이루게 되어 있다. 공포(栱包)는 하층이 내외가 3출목(三出目)이며, 상층은 내외 4출목이어서 하나의 출목 수가 많은 셈이다. 공포의 세부적 특징은 제일 위에 위치한 쇠서[牛舌] 받침을 초화형(草花形)으로 바꾸어 조각한 점인데, 이러한 장식적 수법은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해진다. 내부에도 역시 장식적 변형이 진행되어, 살미첨차는 모두 하나의 장식판처럼 연결되어 운궁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 무량사 극락전 [夫餘 無量寺 極樂殿] (두산백과)
[ 無量寺極樂殿塑造阿彌陀三尊佛 ] 보물 제1565호
2002년 1월 10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6월 27일 보물 제1565호로 승격되었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萬壽山) 남쪽 기슭에 있는 무량사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이다.
무량사 극락전(보물 356)에 있는 아미타삼존불은 조선시대인 1633년(인조 11) 무렵에 제작되었으며, 주존불인 아미타불이 높이 5.5m 정도에 이르는 대형으로 현존하는 조선 중기 불상 가운데 충청도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장중함이 돋보이는 불상이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 오른쪽에는 세지보살상이 있는데 모두 전체적으로 당당한 체구와 넓은 무릎이 균형잡힌 불상이다.
특히 불상 내부에서 나온 발원문은 불상의 조성 시기와 지역 제작자 등의 이름이 적혀 있어 조선 후기 불교조각 연구의 유파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무량사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無量寺極樂殿塑造阿彌陀三尊佛] (두산백과)
김시습영정 (金時習影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4호
조선 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김시습 영정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에 위치한 무량사(無量寺)에 소장되어 있다.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6년 12월 29일에 보물 제1497호로 승격되었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이며, 복부(腹部)까지 그려진 반신상(半身像)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비단에 채색하여 그려 놓은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사대부상 중의 하나로,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야인의 옷차림에 패랭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색으로 맑게 처리하였고, 윤곽선과 눈·코·입 등은 옅은 갈색으로 그렸다. 의복은 옅은 홍색인데 필요한 부분만 약간 짙은 갈색으로 묘사했다. 이로써 얼굴과 의복을 옅은 살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갈색을 대비시켜 조화있는 화면을 만들었다. 수염은 회색 바탕에 검은 선으로 섬세하게 그려, 당시 초상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전기의 초상화는 현재 몇 점 밖에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도 원본을 본 떠 그린 것이거나 덧칠을 한 것이 많은데 이 초상화는 원본 그대로 남아있어 귀중한 작품이다. 그의 저서인『매월당집』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그 자화상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눈에서 느껴지는 총명한 기운은 그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하는 듯하여 초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일생은 동가숙서가식하는 떠돌이의 삶이었지만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는 지식인의 의무에는 누구보다 엄격하였으며, 그 결과 율곡 이이로부터 백세의 스승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하였는데, 조선 전기의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금오신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의 저작은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교·불교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를 남겼다.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김시습은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하던 공부를 접고 책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법명은 설잠(雪岑)이었다.
이로서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로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 중에 한명이 되었는데 이들을 생육신이라고 한다. 이들은 김시습을 비롯하여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여섯 사람이었다. 사육신(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은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지만 이들 생육신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하며 벼슬길을 권하는 세조의 부름을 거역하면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이에 더하여 김시습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 의해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을 당한 사육신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노량진에 매장한 사람으로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권력욕에 취해 서슬이 퍼런 세조가 두려워 아무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는데, 김시습이 거열형으로 찢어진 이들의 시신을 하나하나 바랑에 담아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묻었다는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묘에 기초하여 숙종 때 사육신이 다시 복권되면서 사육신의 묘가 크게 조성되었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이다.
승려가 된 후 김시습은 9년간 전국 방방 곡곡을 방황하였다. 그 방황의 결과로 그는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한편, 김시습은 생육신으로, 선비된 자로서 세조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승려로서는 잠시 세조의 일을 도운 적이 있다. 세조 9년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불경을 한글로 풀이하는 일)을 도와 내불당에서 10일간 교정을 보기도 하였고, 역시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잠시 머물렀을 뿐 김시습은 서울을 등지고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烏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충남유형문화재 제25호
무량사 김시습 승탑 [無量寺 金時習 僧塔]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무량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사리가 안치된 승탑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가 2.84m인데 서로 크기가 다른 8각의 이중 지대석(地帶石) 위에 놓여 있다.
대석(臺石)은 8개 잎이 달린 복련(覆蓮)의 하대석(下臺石)과 여의보주(如意寶珠)를 희롱하는 2마리의 용상(龍像)이 양각(陽刻)된 중대석(中臺石), 8개 잎의 앙련(仰蓮)이 새겨진 상대석(上臺石)을 갖추고 있다. 또한 그 위에는 아무런 문양도 장식도 되어 있지 않은 8각 탑신(塔身)이 올려져 있다.
탑신 위에는 연화관(蓮華冠)이 조각된 옥개석(屋蓋石)이 얹혀 있는데, 낙수면(落水面)의 합각(合角)이 뚜렷하며 반전(反轉)이 현저한 8귀에는 귀꽃이 새겨져 있다. 연화관 위에는 연주문(聯珠紋)을 돌린 복발(覆鉢)과 8각 보개(寶蓋), 3단의 보륜(寶輪), 그리고 연꽃으로 받쳐진 여의보주가 올려져 있다.
이 승탑은 조선시대 양식으로는 조각 기법이 매우 화려하고 우수하다. 승탑의 면은 전체적으로 풍화작용의 영향이 있고, 지의류(地衣類) 때문에 암적색으로 변색되어 조직이 박리되는 부분도 있다.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되자 21세 때에 불가(佛家)에 귀의, 만년을 이 무량사에서 보내고 입적(入寂)했다. 절에는 그의 자화상이 보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승탑이 넘어지는 바람에 그 밑에서 사리 한 점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량사 김시습 승탑 [無量寺 金時習 僧塔]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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