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 독경 ♣>/성지 * 여행

蔚珍郡 佛影寺 - 대웅전, 성불한 은행나무, 은행나무로 조성된 대웅전의 삼존불 (2014년 음 5/24)

화엄행 2014. 6. 23. 13:15
















    








의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2000년경 벼락을 맞고 부러지게 되었고, 

이에 잘려나간 은행나무로 대웅전에 목조삼존불로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부러진 은행나무본체는 죽지않고 다시 새로운 가지를 뻗어 생장하는 

특이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2003년 방문당시에는 작은 가지들이 막 새롭게 자라는 모습을 보았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제법 커다란 가지로 성장하고 있는 모습에 

다시금 신비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이 은행나무는 암은행으로 가까운 곳에 수은행이 없이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은행은 열린다고 한다.

즉 원래의 은행나무는 벼락으로 인해 대웅전의 삼존불로 모셔진 만큼  

나무도 成佛한 사례를 실증하고 있다.



요사채 마당에 위치한 느티나무


○ 불영사 개요

 

울진읍에서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천축산의 서쪽기슭에 자리잡은 신라의 옛 절로, 이 절을 중심으로 하원리까지 13㎞에 걸쳐서 비경을 이루는 불영사계곡이 펼쳐진다. 진덕여왕 5년(651)에 의상대사가 세웠는데, 연못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친다 하여 불영사라 했다. 조선 태조 5년(1396)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소운대사가 중건하였고 그 후 1500, 1608, 1724, 1899년에 중수가 있었다.

주차장에서 절로 들어서는 길은 산태극수태극으로 감싸있어서 대단히 매력적이다. 비구니 도량인데, 절 마당의 연못과 연못 옆의 채마밭이, 사찰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명승6호로 지정된 불영사계곡은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과 기암괴석, 그리고 울창한 숲으로 어우러져 신비로우며,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오대산의 무릉계곡, 보경사계곡에 비해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밀조밀한 경관이 천축산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 주요문화재
1) 불영사 응진전(보물 제730호) 2) 불영사 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135호) 3) 부도(지방 유형문화재 제112호) 4) 불영사 대웅보전(보물 제1201호) 5) 불영사 영산화상도(보물 제1272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8016&cid=1620&categoryId=1620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651년(진덕여왕 5)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유백유(柳伯儒)가 지은 <천축산불영사기>에 그 기록이 나온다.

의상이 경주로부터 해안을 따라 단하동(丹霞洞)에 들어가서 해운봉(海運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서역의 천축산을 옮겨온 듯한 지세가 있었다. 또 맑은 냇물 위에서 다섯 부처님 영상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내려가서 살펴보니 독룡(毒龍)이 살고 있는 큰 폭포가 있었다.

의상은 독룡에게 법(法)을 설하며 그곳에다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독룡이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 신비로운 주문을 외워 독룡을 쫓은 뒤 용지(龍池)를 메워 절을 지었다. 동쪽에 청련전(靑蓮殿) 3칸과 무영탑(無影塔) 1좌를 세우고 천축산 불영사라 하였다. 676년(문무왕 16)에 의상이 다시 불영사를 향해서 가다가 선사촌(仙 村)에 이르렀는데, 한 노인이 "우리 부처님이 돌아오셨구나." 하면서 기뻐하였다.

그 뒤부터 마을 사람들은 불영사를 부처님이 돌아오신 곳이라 하여 불귀사(佛歸寺)라고 불렀다. 의상은 이 절에서 9년을 살았으며, 뒤에 원효도 이곳에 와서 의상과 함께 수행하였다 한다. 청련전과 무영탑료는 환희료(歡喜寮)와 환생전(還生殿)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408년(태종 8) 이문명(李文命)이 지은 <환생전기>에 의하면 옛날에 백극재(白克齋)가 울진현령으로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급병을 얻어 횡사하니 그 부인이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불영사로 와서 남편의 관을 탑전(塔前)에 옮겨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3일 만에 남편이 되살아나 관을 뚫고 나오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탑료(塔寮)를 환희료, 불전(佛殿)을 환생전이라 하고, ≪법화경≫ 7권을 금자(金字)로 사경하여 불은에 보답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며, 1396년(태조 5)에 화재로 인하여 나한전(羅漢殿)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던 것을 이듬해에 소설(小雪)이 중건하였다. 그 뒤 1500년(연산군 6)에는 양성(養性)이 중건하였고 1568년(선조 1) 무렵에 성원(性元)이 목어·법고·범종·바라 등을 조성하였고, 남쪽 절벽 밑에 남암(南庵)을 지었으며, 의상이 세웠던 청련전을 옛터에 중건한 뒤 동전(東殿)이라 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전에 영산전(靈山殿)과 서전(西殿)을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영산전만이 남고 모두 전소되었다. 성원은 1603년에서 1609년(광해군 1) 사이에 선당(禪堂)을 건립하였고, 불전(佛殿)·승사(僧舍)를 중건하였다. 1701년(숙종 27)에는 진성(眞性)이 중수하였고, 1721년에는 천옥(天玉)이 중건하였다.

그 뒤 혜능(惠能)이 요사채를 신축하였으며, 재헌(在軒)과 유일(有逸)이 원통전(圓通殿)을 중수하고 청련암(靑蓮庵)을 이건하였다. 1899년과 1906년에는 설운(雪雲)이 절을 중수하고 선방(禪房)을 신축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730호인 불영사응진전(佛影寺應眞殿)을 비롯하여 극락전·대웅보전·명부전(冥府殿)·조사전(祖師殿)·칠성각·범종각·산신각·황화당(黃華堂)·설선당(說禪堂)·응향각(凝香閣)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인 불영사삼층석탑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2호인 불영사부도(佛影寺浮屠), 그 밖에도 대웅전 축대 밑에 있는 석귀(石龜)와 배례석(拜禮石)·불영사사적비 등이 있다.

이 절의 동쪽에는 삼각봉(三角峰), 아래에는 좌망대(坐望臺)와 오룡대(五龍臺), 남쪽에는 향로봉(香爐峰)·청라봉(靑螺峰)·종암봉(鐘岩峰), 서쪽에는 부용성(芙蓉城)·학소대(鶴巢臺), 북쪽에는 금탑봉(金塔峰)·의상대(義湘臺)·원효굴(元曉窟)·용혈(龍穴)이 있는데 모두 빼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 『천축산불영사기(天竺山佛影寺記)』
  •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인현왕후와 불영사


 

근래 새로 조성된 인현왕후 초상화

조선 숙종의 왕후인 인현왕후 민씨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따님으로 30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인경왕후의 다음 왕비로서 장희빈에게 밀려 폐출되어 안국동 감고당에 물러나와 죄인을 자처하여 스스로 잡곡밥을 들고, 색옷을 입지 않으며 기거하였다.

1933년에 작성된 〈불영사사적비〉에 따르면 인현왕후께서 이렇게 5년이란 세월을 눈물로 보내다가 마침내 자결을 결심하고, 독약 그릇을 앞에 놓고 하염없이 울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한 백발 노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천축산 불영사에 있는 중이온데 마마께옵서 괴로우시더라도 3일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옵니다."하고 홀연히 사라지자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인지라,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3일을 더 기다렸더니 과연 노승의 말과 같이 왕께서 복위시킨다는 전갈이 왔고, 다시 왕후에 오르게 되었다.

그후 민비는 꿈이 너무도 신기하여 왕께 아뢰어 불영사에 사람을 보내어 꿈에 나타난 백발 노승의 화상을 그려 올리라는 명을 내렸는데 사자가 불영사에 와서 찾아보았으나 노승은 간곳이 없고, 1516년(중종11년)에 돌아가신 양성법사의 화상이 그와 같으므로 복사하여 민비께 드리니 민비께서 보시고, 현몽한 노승이 틀림이 없으므로 임금께 이 사실을 아뢰었더니 숙종께서 감복하시고 부처님의 은공을 갚기 위해 불영사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안에 있는 산과 전답을 불영사에 시주하였다. 현재의 불영사의 재산은 그때의 것이다.


양성법사원남면 금매리에서 태어나 11세에 출가하여 불도를 닦았으며 속성은 남씨요, 이름은 혜능이고, 자는 중열인데 승려생활 64년만에 도를 깨닫고, 75세로 일생을 마치니 불법에 따라 화장을 하였는데 사리가 나와 불영사의 남쪽 산 옆에 부도를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 부도와 비석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부도는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특히 불영사의 당우 중에서 의상전은 인형왕후의 복을 비는 ‘인현왕후 원당’인 것으로 확인됐다. 불영사(주지 일운스님)는 최근 의상전을 수리하던 중 의상전 서쪽 종도리 바닥 사각홈에서 한지에 묵서로 쓰인 상량문 1기를 발견했다. 

이번 상량문 발견으로 그동안 불영사와 관련된 인현왕후의 전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http://minssi.net/htmls/yeoksa/sangdang.htm


                    불영사 의상전은 인현왕후 원당으로 밝혀져

 

  경북 울진에 있는 불영사의 의상전이 실제로는 숙종비인 인현왕후원당인 것으로 

밝혀저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울진문화원 울진역사연구소(소장 김성준)는 지난해 10월 24일 의상전을 수리하던 중 

발견된 상량문을 해독한 결과 그동안 의상전으로 알려져 온 건축물이

 "인현왕후원당"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그동안 불영사에 구전돼 온 인현왕후에 관한 전설에 의하면, 

…숙종대왕이 총애하는 궁희(장희빈을 칭함)로 왕비(인현왕후)가 폐출되어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꿈에 한 스님이 현몽하기를

 

"저는 불영사에서 왔는 바 내일 상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과연 다음날 궁희가 꾸민 사건으로 발각되어 죄를 받고, 인현왕후께서는 환궁하게 된 

까닭에, 불영사에 사방 10리 정도의 산을 하사하고 네 곳에 표지를 하여 부처님의 

은덕에 사례하였다고 한다. (불영사 사적비, 1933). 


 이것이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의상전(실제로는 인현왕후 원당)에 관하여, 1810년(순조 10)에 

중창하였다는 것으로 봐,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막연히 추정했을 뿐, 

정확한 창건시기를 알 수 없었는대, 

이번에 발견된 상량문에서 인현왕후(1667~1701)의 성은에 보답하는 뜻으로 

사후인 1867년(고종 4)에 창건되었다는 정확한 시기까지 밝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창건당시 참여한 주지·승려 및 목수 등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된 점은 

불영사의 내력을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상량문이란 목조건물을 창건하거나 중수할 때 관련된 사항과 함께 상량을 축복하는 

기록을 말하는데, 이번 수리 작업중에 건축물 서쪽 종도리바닥 사각홈에서 

한지에 묵서로 쓰인 상량문 한 장이 발견된 것이다.


 울진역사연구소 김성준 소장은 의상전으로 알려져 온 건물이 

인현왕후 원당으로 알려짐에 따라 의상전의 실체 규명이 과제로 남았다며 

후속연구가 이어 질 것임을 시사했다. 


상량문의 번역문을 여기에 게재하고, 원문을 첨기한다.


 상   량    문

 주지 신하 승려 유찰 삼가 봉한다.

 인현왕후 원당 상량문


 대저 사찰의 사적이란 것은 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져가고 나면 

 물어서 고찰할 데가 없어, 연도를 추측해 따지려고 하면 이러니 저러니 하여 

억측으로 헤아릴 수 없다. 신민(臣民)들의 도리에 있어서는 어찌 이만 저만 

황송하지 않겠는가! 

불교에 대하여 혹자들은 임금의 교화(통치영역)밖에 있다 라고도 하지만 

우리동방에 살면서 꾸물거리는 생명들은 모두 우리 성군의 은혜를 받은 

백성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은을 갚고자 하면 수미산을 다 돌아도 

끝이 없을 것이다. 

다행히 예로부터 전해오던 말들을 모아 전하건데 본사의 산천초목과 스님들이 

두루 성후(聖后)의 은덕을 입어서 지금까지 지탱해 오고 있다고 한다. 

마음속에 그리워한 것이 몇 년이나 되었으며 조바심을 낸 것이 얼마간 이겠는가! 


이에 감히 좋은 해, 좋은 달, 좋은 날을 택하여 절의 서쪽 깨끗한 곳에 

원당을 건축하고, 억만년 동안이나 성덕(聖德)이 무강하고 국가 평안하기를 

봉축한다.


 대청 통치 6년 정묘 4월 26일 주지 신하 승려 유찰은 머리를 조아리고 

죄송한 마음으로 삼가 쓴다.


(번역 장원섭 박사)

 이하 생략(주지 목수 등 이름)

 

http://www.uljin21.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1796

 

 불영사 의상전은 "인현왕후원당"

 

2002년 03월 21일 (목) 00:00:00

 

 

불영사 '의상전'이 실제로는 인현왕후의 복을 비는 '인현왕후원당(仁顯王后願堂)'인 것으로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울진문화원 울진역사연구소(소장 김성준)는 지난해(2001년) 10월24일 의상전을 수리하던 중 발견된 상량문을 해독한 결과, 그동안 '의상전'으로 알려져 온 건축물이 '인현왕후원당'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는 그동안 불영사에 구전돼 온 인현왕후에 관한 "…숙종대왕이 총애하는 궁희(장희빈을 칭함)로 인해 왕비(인형왕후를 칭함)가 폐출되어 이에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꿈에 한 스님이 고하기를 `저는 불영사에서 왔으며, 내일 상서로운 일이 있겠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튿날 궁희가 꾸민 사건이 발각되어 죄를 받고 왕비는 환궁하게 된 까닭에, 불영사에 사방 10리 정도의 산을 하사하고 네곳에 표지를 하여 불은(佛恩)에 사례하였다고 한다…"는 전설(불영사사적비, 1933년)이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된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의상전(실제로는 인현왕후원당)에 관하여, `1810년(조선 순조10년)에 중창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막연히 추정했을 뿐 정확한 창건시기를 알 수 없었는데, 이번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인현왕후(1667-1701)의 성은에 보답하는 뜻으로 사후인 1867년(조선 고종 4년)에 창건되었다는 정확한 시기까지 밝혀지게 되었다. 아울러 창건당시 참여한 주지, 승려, 목수 등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된 점등은 불영사의 계보를 파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상량문(上樑文)이란 목조건축물을 창건하거나 중수할 때 관련된 사항과 함께 상량을 축복하는 기록을 적은 것을 말하는데, 이번 수리작업중에 건축물 서쪽 종도리바닥 사각홈에서 한지에 묵서로 쓰인 상량문 1기가 발견된 것이다.

발견된 상량문의 번역과 고찰은 울진역사연구소 자문위원인 장원섭박사(현 세중옛돌박물관 학예연구실장)와 심현용연구원이 각각 담당했다.

울진역사연구소 김성준 회장은 "의상전으로 알려져 온 건축물이 인현왕후원당으로 확인됨에 따라 의상전의 실체 규명이 과제로 남았다"며 후속 연구가 이어질 것임을 시사했다.

 

 

http://ulji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800616&local=uljin

 

 

 

養性法師
영어의미역 Buddhist Monk Yangseong
이칭/별칭 몽선(夢仙),중열(仲悅),혜능(惠能),양성당대사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전통인물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 금매1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황정숙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승려.

[가계]
속성은 남씨로 본관은 영양(英陽). 아명은 몽선(夢仙)이고, 자는 중열(仲悅), 법명은 혜능(惠能)이다. 어머니는 행주전씨이다. 1442년(세종 24)에 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 금매1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사항]
1453년(단종 1) 12세에 승려 응철(應哲)을 좇아 출가하여 불영사에서 수계(受戒)를 받았다. 8년간 정진하여 모든 불경에 통달한 뒤 천조대사(天照大師)와 호구당(虎丘堂)에게 수행하여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성품은 어질고 후덕하여 보시하기를 기꺼이 하였으며, 계율을 엄히 지켰다. 명산 고찰을 찾아 주유하기를 좋아하여 두류산,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태백산, 소백산 등을 찾아 수행하였다.

어느 날 홀연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탄식하기를 “도를 구하는 데는 다른 방도가 없으니 사람이 근본을 돌이키지 않는 것은 어찌 일찍 떠난 고향에 돌아감을 잊는 것과 다르리오” 하며 마침내 불영사로 돌아와 머물며 수도하는 집에 현판을 달아 양성당(養性堂)이라 했다. 1516년(중종 11) 12월 17일 세수 75세, 법랍 64세로 입적하였다.

양성법사에 관해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인현왕후는 폐출된 뒤 5년이란 세월을 눈물로 보내다가 마침내 자결을 결심하고 독약 그릇을 앞에 놓고 하염없이 울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한 백발 노승이 나타나 천축산 불영사에 있는 중이라면서 3일만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자, 인현왕후가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겨 3일을 더 기다렸더니 과연 왕후의 자리에 다시 오르게 되었다.

그 후 숙종이 이 이야기를 듣고 꿈속의 노승을 찾으니, 1516년(중종 11)에 세상을 떠난 양성법사의 화상과 같으므로, 부처님의 은공을 갚기 위해 불영사를 중심으로 한 사방 10리 안에 있는 토지를 불영사에 시주하였다 한다.

[상훈과 추모]
불영사 남동쪽 동구에는 양성당 부도부도비가 있다. 부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종형 부도로 지대석과 기단석, 탑신의 3석으로 구성되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2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비는 비좌와 비신, 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좌는 장방형으로 너비 101㎝, 높이 38㎝, 두께 69㎝, 재질은 화강암이다. 앞면에 안상 3구, 옆면에 안상 1구를 새겼으며, 뒷면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다. 비좌 윗면에는 각형 2단을 각출하였다.

비신은 장방형으로 너비 58㎝, 높이 120㎝, 두께 17㎝, 재질은 대리석이다. 4면을 모두 편평하게 다듬었다. 개석은 팔작지붕 모양으로 너비 90㎝, 높이 38㎝, 두께 71㎝, 재질은 대리석이다. 낙수 면에 기왓골은 표현하지 않았으며, 하면에 각형 3단을 각출하였다.

명문은 양성법사의 수제자 천옥대사가 최석정에게 청하여 지은 것으로 비신의 앞면과 뒷면에 음각하였고 계선은 긋지 않았으며, 글씨는 해서체로 행서장법이다. 앞면의 글자 크기는 너비 2.5㎝, 폭 2.5㎝로 거의 비슷하나, 뒷면의 글에는 너비 3.5㎝, 폭 3.5㎝의 크기도 있다.

 

[참고문헌]

 

 

 

http://www.uljin21.com/news/articleView.html?idxno=9460

 

養性堂 惠能禪師 浮圖

 

 

울진군 서면 하원리에 위치한 불영사에는 '인현왕후 원당'이 있고 경내 입구, 오른쪽으로 40m지점에는 커다란 부도 1기가 있다.

부도(浮屠)는 본래 승려의 묘탑(墓塔)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한 석물이 불탑(佛塔)이라면, 스님들의 유골이나 사리를 보관한 묘탑이 부도(浮屠)이다.

부도는 그 절에 수도하시던 주지스님들이 입적하면 다비장 (茶毘葬)을 하고, 사리를 채취하여 안치하는 석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도는 국보 제104호인 '염거화상탑'으로 신라 문성왕 9년 (844년)에 제작된 것이며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면 627∼649년경에 원광법사(圓光法師)의 부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부도를 세운 시기가 아닌가 싶다.

신라시대의 부도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양성당 선사 부도는 탑신부, 상륜부가 모두 원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사각의 지대석 위로 납작하고 둥근 기단을 만들고, 종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형태로 기단의 옆면에는 복련무늬로 조각하였고 탑신의 하단부에는 앙련을, 상단부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상륜부에는 앙련 무늬 받침에 꽃봉오리를 장식하여 마무리하였다.

불영사의 이 부도탑은 울진군 문화재자료 제162호로 지정된 문화재로서 종(鐘)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석종형 (石鍾形) 부도'라 하며, 높이 185㎝ 정도의 다소 큰 모양이다.

부도의 주인공은 양성당 선사(養性堂 禪師)로 울진의 금매리 출신이며, 이름은 혜능(惠能), 자는 중열(中悅), 성은 남씨이다. 1621년에 태어나 12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1696년 76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양성당 선사의 부도는 조선 숙종 22년(1696년)에 만들어 진 것으로 불영사 사적비에는 아래와 같은 인현왕후와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숙종 임금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후사가 없이 폐서인이 되어 5년이란 세월을 사가에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은 자결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그때 꿈속에 노승이 나타나 "천축산 불영사에서 왔노라" 하면서 "이틀만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폐비 민씨는 이를 매우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틀 뒤 자신을 모함하던 희빈 장씨의 죄상이 드러나고, 인현왕후은 다시 임금의 성은을 입어 환궁하게 되었다. 이때가 갑술년이라 역사에는 '갑술환국'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숙종은 이 이야기를 듣고 꿈 속의 노승을 찾으니, 불영사의 양성당 선사였다.

숙종임금은 인현왕후를 사지에서 건져준 양성당 선사와 불은에 감사하여 불영사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안에 있는 토지를 불영사에 시주하였다.

그 후 불영사 스님들은 인현왕후의 은덕을 못잊어 '인현왕후 원당'을 짓고 왕후의 명복을 빌었다.

지금도 불영사 경내에는 '인현왕후 원당'이 남아있고 인현왕후의 화상도 게시되어 있다.

 

(출처 : 울진군지.불영사2010/신대현.史香 2호 2004 울진역사연구소. 김성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