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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野貞의 1902년의 궁궐 // 조선의 도성 <漢陽>

화엄행 2013. 12. 10. 00:50


1902년의 궁궐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번역 - 姜奉辰, <韓國의 建築과 藝術>, 산업도서출판공사, 1990년

 

 

* 關野貞(Sekino, Tadashi)는 일본의 동양건축가ㆍ미술사학자로 1902년 한국에 와서 미술·건축 등을 연구하였으며, 후에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간행으로 프랑스 학사원상을 수상하였다. 1918년 6월 중국에서 당나라 때의 불교유적인 천룡산 석굴(天龍山石窟)을 발견하여 동양미술사에 크게 공헌하였다. 주요저서로 《낙랑군시대의 유적》이 있고, 논문집 《일본의 건축과 예술》이 있다. 1902년 7월, 일본동경제국대학 공과대학 조교수 관야정(關野貞, 당시 35세)은 "한국인은 취미가 부족하여 미술애호심이 없으므로, 귀중한 문화재가 소멸하는 것을 막기위하여 적극적으로 건축조사에 나선다"는 명분과 일본정부의 명령으로 불과 두 달 남짓동안 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고조선부터 당시까지의 각종 문화재들을 조사했다. <韓國建築調査報告>에 있는 사진들을 찍을 때는 고종이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궁을 비운 지 6년이 지난 무렵이다. 1867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했을 때의 모습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어서 "황괴(荒壞)하고, 기둥이 기울고, 잡초가 기단을 덮고, 창서(蒼鼠)가 고와(古瓦)에 숨어 있어도 수축(修築)할 여유가 없을 것 같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경복궁>

 경복궁 전경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다. 조선의 태조는 1392년 7월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3년(1394)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왕궁을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경복궁 내에서 바라본 광화문

 

흥례문

흥례문은 광화문을 지나 실질적으로 경복궁 전각의 입구역할을 하는 문이다. 광화문과 근정문의 남북중심축선상에 위치하며 2층 건물로 상하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어칸이 좌우 변칸보다 2척이 더 넓은 18척으로 근정문과 비슷하다. 건물은 중층에 겹처마, 우진각지붕으로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였다.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를 두고, 상하층의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용두아래로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고 사래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동측면의 내부쪽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설치되었다. 중앙기둥열에는 두짝 씩의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계로 하층은 내3출목7포작 외2출목5포작이고, 상층은 내외 모두 2출목5포작이다. 흥례문 일곽은 1910년 경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일제가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기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상당부분 철거 변형되었으며, 1916년조선총독부 청사건립으로 완전 철거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물산공진회 개최 시에는 경복궁의 전반부를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상당수의 전각이 변형 철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흥례문 일곽과 담장도 훼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에 흥례문과 주변행각, 유화문, 영제교 등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1998년 9월 23일 상량하여 2000년에 준공하였다

 

영제교

영제교는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다리로 근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되는 다리이다. 상상의 동물인 석수가 조각되어 있으며 다리 위의 길은 3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운데 길은 임금님만이 다닐 수 있는 어도로 임금님은 어가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가셨다고 한다. 서수는 천록 또는 산예라고 부르는 상상의 동물인데 본래는 16마리로 겨드랑이와 뒷다리 부근에 갈기가 선명하고 정수리에는 뿔이 달려 있다. 옛날에는 영제교 아래에 명당수가 흘렀다. 경복궁을 만들면서 명당수가 모자라 이를 보완하기 위해 궁궐 서북쪽의 물을 끌어다 금천을 만들었다. 경복궁의 명당수는 북악산록에서 발원하여 서쪽 담장을 따라 흐르다 영추문 근처에서 직각으로 꺾어져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지나 동남쪽 담을 통과해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간다. 풍수지리상 길하다고 하는 서류동입 (西流東入)의 명당수인 셈이다. 일제는 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이 다리를 해체한 뒤 명당수를 메웠다. 그 뒤 수정전 뒤뜰로 잠시 옮겼다가 해방 후 다시 해체하여 근정전 동쪽에 옮겨졌다가 현재 복원과정을 거쳐 제자리를 찾고 있다. 

 

 

 근정문

근정문은 근정전의 정문으로 근정전과 함께 고종 4년(1867)에 건립된 보물 제 812호 건축물이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중층누문(重層樓門)으로 아래층엔 문얼굴을 내고 큼직한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였고, 위층은 사방에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 시설을 두었다. 평소엔 문을 닫아 두고 대소의 신료들은 문무반에 따라 동쪽의 일화문과 서편의 월화문을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 있다. 공포 (慊包)는 외2출목, 내3출목의 다포 (多包)로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단을 쌓았으며, 세 칸에 걸친 계단을 마련하였는데 중앙칸 계단은 좌우에 소맷돌을 놓고 노도(路道)에는 봉황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세부수법은 근정전과 비슷하다

 

 근정전

이 건물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고 국왕의 즉위식이나공식적인 대례(大禮)를 거행하던 곳이다. 국보 제223호 태조3년(1394)에 창건하고,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에 재건하였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여러국왕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근정전은 상·하 월대 위에 이층으로 지은 거대한 건물이다.

 

 조정

1904년 근정전에서 근정문을 바라보는 사진으로 근정전 계단 위의 서수상이 보인다. 고종이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궁을 비운 지 6년이 지난 무렵이다. 1867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했을 때의 모습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되어 박석 사이로 수풀이 나있는 쇠락한 상태이다.

 

 강녕전

1904년 강녕전은 왕이 일상 거처하던 전각(殿閣)으로 사정전 뒤 향오문을 지나 침전구역의 중심을 이룬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는데,

이 때 Sekino의 <韓國建築調査報告>의 사진들이 많이 참고되었다.

 

 고종, 순종, 대원군, 민비

교태전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을 지나 양의문을 지나면 교태전이 보인다. 경복궁 내에서 가장 여성스럽고 예쁘게 지어졌으며, 정면9칸, 측면 4칸 규모로 좌우로 익랑이 연결되어 있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 뒤에 위치해 경복궁의 남북 중심축의 끝부분을 이루고 있다. 태조 초년 경복궁이 처음 세워질 때는 없었다가 세종 22년(1440)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의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 졌었으나 고종 초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일제 시대에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답시고 헐어 지금은 창덕궁의 대조전으로 되어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중심 3칸에는 앞 퇴칸을 두었으며 그 안으로 6칸의 커다란 대청 마루가 있으며, 그 양 옆으로 정면 3칸 짜리 온돌방이 하나씩 있다. 그리고 이 좌우의 온돌 방은 다시 우물 정자 모양으로 칸막이를 두어 장지문을 닫으면 9개로 나누어지게 했는데, 한 가운데 큰 방을 두어 이곳에서 왕과 왕비가 주무셨으며 그 둘레의 방에 상궁이 하나씩 있어 밤새 지키도록 했다고 한다. 다마 왕과 왕비의 머리를 두고 자는 동쪽 작은 방은 비워두는데, 감히 임금과 왕비 머리 위에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아미산을 볼수 있도록 동쪽 후면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역시 강녕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순종과 민비추정의 사진 

경회루 

1904년 고종 4년(1867)에 건립한 회연(會宴)을 위한 건물로 물 속에 기단을 축조하고 세웠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로 궁내에서는 정전(正殿)인 근정전 다음으로 대규모이다.

태조는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경회루라는 다락집정도의 루를 세웠다. 태종은 12년(1412)에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연못을 넓히고 건물의 규모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연못 속에 큰 집을 짓는 일에 반대하였으나 박자청이 마침내 이룩하니, 네모 반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두르고 경회루를 세웠으며,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물과 연결시켰다. 48개의 돌기둥에 용을 새기고 못 속에 또 섬 두 개를 더 만들어 당주(當洲)를 삼았다. 상· 하층의 바닥은 위계를 표시한 듯 외측보다 내측의 바닥높이를 높였고 상층에는 들어 열 수 있는 분합문을 외진 · 내진 · 내내진 기둥 사이에 두어 공간 구분을 분명하게 하였다. 천장은 하층에서 우물천장으로 상부구조가 보이지 않도록 하였고 동남과 서남측에는 계단을 두어 상층으로 오르게 하였다. 기둥과 보, 그리고 구조재 부재들은 뜬창방과 대공(臺工)들로 간결하게 처리하여 결구되었고, 공포는 이익공(二翼工)으로 기둥 사이에 수많은 화반을 얹어 하중의 분포를 원활히 하도록 노력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처리하고 지붕은 팔작지붕인데 전체적인 축부(軸部)와의 비례가 조금도 손색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조선 말기 누각건축으로 대표적인 수작 건축물이다.

 

 경복궁 동측길에서 바라본 광화문

광화문의 위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진이다. 광화문 양옆에 위치한 경비초소의 측면이 잘보여 정면사진과 함께 경비초소 복원의 기초자료가 된다.

한편, 어도 너머로 삼군부의 끝과 북측면이 보이는 것도 이 사진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 중의 하나다.

 

 영추문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문(西門)으로서, 이 문은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통용문이다. 동문인 건춘문(建春門)과 같은 규모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門樓)로 된 이익공(二翼工)집 우진각지붕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각 지붕마루에는 양성이 되고 취두(鷲頭) · 용두(龍頭) · 잡상(雜像)이 얹혀 있다. 또 홍예문(虹霓門)을 하나 내어 출입하게 한 축대 위에 단층의 누(樓)를 지었다.

 

 광화문 전경사진


광화문 전경 사진중 동측에 위치한 의정부의 행랑이 가장 잘 보이는 사진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전체 구성으로 보면 남문에 속한다. 1395년 태조 4년에 처음 지어진 광화문(光化門)은 대원군에 의해 중건된 후 103년 6·25전쟁에 소실된 후 현재의 모습은 18년 만인 1968년에 철근 콘크리트구조로 복원된 것이다. 원래의 광화문, 즉 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 정문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궁내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철거하려 하였으나 당시의 민족감정과 양심있는 일본인들의 반대 여론에 못 이겨 경복궁 동쪽 건춘문(建春門) 이북에 이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궐문 석축은 탄흔 투성이가 되고 문루는 소실되어 버렸다. 광화문 원래의 건축 양식을 보면 석축은 숭례문과 같은 수법이지만 숭례문에서와 같이 홍예문이 중앙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좌우에 각각 한개 씩이 더 있다. 이는 중앙 홍예문은 군왕이 출입하도록 하고 좌우로는 여러 신하들이 출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루의 짜임은 하층의 기둥 사이가 모두 개방되었고 상층은 판문을 달아 개폐하도록 하였다. 다포계 건물로 외2출목, 내3출목이나 내부쪽 처리는 말기적 수법인 운궁(雲宮)을 사용하였고 내목도리 아래에는 장화반(長花盤)을 놓고 공포간에는 포벽을 두었다. 가구수법도 그 골격은 숭례문과 비슷하나 하층 대들보가 고주(高柱)에서 합보 형식을 하고 대들보와 2층마루와의 사이에 공간을 두고 있는 것은 숭례문과 다르다. 상·하층 처마는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각 마루에는 취두(鷲頭) · 용두(龍頭) · 잡상(雜像)들이 배치되고 용마루 끝에는 용두를 달았다. 광화문을 건춘문 이북으로 일제시 이건할 때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다. (서울육백년사 참고)

 

일제 강점기 때 홰손된 경복궁 전경

 

 경복궁 장기 복원도

 

 

 경복궁 단기 복원도

 

 

<창덕궁>

 

 

돈화문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우진각기와지붕의 다포(多包) 건물이다. 처음 창건된 것은 태종 12년 5월이었으며,《태종실록》에 의하면 이 문의 2층 문루(門樓)에는 15,000근의 대종(大鐘)을 걸었다고 한다. 문종 즉위년(1450)에 개구(改構)한 바 있으며연산군 12년에는 돈화문을 개조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실제 실시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진(燒盡)되고 광해군 원년에 재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궁궐에 현존하는 중문으로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그런데 원래는 화강석조의 하얀색 댓돌이있었고 그 위에 2층으로 세운 중문이었다고 한다. 이런 양식은 옛날삼국시대로부터 궁궐의 정문으로 채택되어 왔으며, 대표적인 예가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대문은 광화문이다. 광화문은 홍예문을 화강석조로 쌓은 뒤 그위에 올려 2층문루를 세운 구조로 돈화문과는 그모습이 완연히 다르다. 창덕궁의 모든 구성은 이궁(離宮)으로서의 조촐한 맛을 지니고 있는데 돈화문은 그런 구조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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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

금천교는 창덕궁의 정문과 궁 사이에 있는 다리로 1411년(태종 11년)에조성되었다. 조선의 궁궐건축에는 북(玄武)에서 발원하여 외당을 회유하면 극히 길하다는 명당수를 중요하게 여겨 궁의 정문에서 궁전으로들어가려면 이 명당수 위에 놓여진 돌다리를 통과하여야 한다. 경복궁의 영제교며 창경궁의 옥천교와 덕수궁과 경희궁에도 있었던 그런 다리가 창덕궁에서는 금천교이다. 다리의 구조를 보면 하천 바닥에 깔린기반석 위로 홍예 2틀을 만들고 멍엣돌위에 돌난간을 세우고 다리 윗부분은 장대석으로 깔았다. 중앙부의 홍예 기반석 남쪽 면에는 해태상을, 북쪽에는 거북상을 설치하였다. 이들 상 뒤로 홍예틀이 만나는 기석에 귀면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위 양쪽에는 돌로 난간을 돌렸는데, 주석이 서고 그 사이에 동자석이 설치되고 한판 돌로 만든 풍혈이 끼어 있다. 이 다리는 평면이 아니라 중앙이 들린 구릉형이다. 이 다리 앞에 명당수와 관련되는 궁의 외당문인 진선문이 있다.돈화문내원에 회화나무의 수림이 울창한데, 이는 고대부터 궁문내정에정승나무를 심는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궁의 별칭을 괴신(槐宸)이라고도 한다. 금천교는 길이가 12.9미터, 폭이 12.5미터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임금 행차 때 의장 행렬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데 길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길은 어도(御道)라 하여 왕만이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진선문

 

인정문

인정전의 정문으로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팔작기와지붕의 다포(多包)집이다. 건물의 천장은 서까래가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소박하게 꾸몄다. 인정문 좌우로는행각이 뻗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일부가 개조되어 건축 구조에 일본식이 섞여 있다. 정전과 같이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에 손실되었으며광해군 때에 복구되었다가 영조 20년에 다시 화재를 입고 이듬해에 중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일단 영조 21년의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후에 많은 부분적인 수개(修改)가 있었다. 실상은 인정전이 소실되어다시 지어지는 순조 4년(1804)에 동시에 지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있다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였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세종 즉위년에 개건(改建)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것을 광해조(光海朝)에중건하였으나 순조 3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이듬해 순조 4년에 중건되었다. 당시 철종 7년에 와서 건물을 뜯어내고 다시 짓는 공사가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순조 4년의 중건하는 예를 그대로 따랐으므로 건축 양식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5칸·옆면 4칸의 2층 건물이며, 팔작지붕으로 2층의 높은 기단 위에세웠다. 다포 양식으로, 밖으로 뻗친 부재 끝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오얏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던 무늬이다. 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답도

 

평원루

 

승화루

 

주합루

 

어수문

 

부용정

영화당에서 과거를 보고 급제를 하면 주합루에 올라가 왕실도서관의 수만 권의 서책을 읽으면서 능력을 함양하게 된다. 그때 그 일을 축수해주는 자리가 부용정이다. 정면 3칸, 측면 5칸의 단층 다각기와지붕의익공(翼工)집이다. 《궁궐지(宮闕誌):1908》에 정조 때에 개건(改建)되었다고 하며, 건물의 일부는 연못 위에 돌출되었으며 팔각의 석주(石柱) 2기가 물 속에 세워져 이 부분을 받치고 있다. 원형의 가는 기둥 위에 육각형의 주두(柱頭)가 놓이고 공포(慊包)는이익공(二翼工)으로 간소하여 주간에는 장화반(長花盤)을 놓았다. 처마는 겹처마이며지붕은 평면과 같은 형상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부용정의 평면은亞자형이면서 변화가 많아 보이는데 연꽃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한송이꽃과 같은 정자를 꾸민 것이다.동쪽에 열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불발기창이 달린 창과 외짝의 문이 있다. 그 안의 단문을 열어젖히면 부용지를 비롯한 선경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존덕정

 

 

 

<창경궁>

 홍화문

 

 명정문

창경궁 외전(外殿)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팔작지붕으로다포식(多包式) 공포를 갖추었다. 명정문은 정문인 홍화문에서 옥천교를 지나 명정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좌우에 행각이 가로 놓여 있다. 이들 행각은 장대석의 기단 위에 있으며 이와 같은 높이에 문의초석이 있다. 이 문은 명정전을 둘러싼 월랑 중 명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동월랑의 중앙부에 있으며, 창경궁의 외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월랑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기둥열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다. 이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명정전

창경궁의 정전(正殿)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이 조성되고,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다. 이때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었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그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8년(1616)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60.4척,측면 3칸 32.28척에 단층 팔작지붕에 다포(多包)형식을 취하고 있다.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후면에 따로 지은 퇴칸이 부속되어 있다. 다른 궁의 정전과 같이 이중의 월대를 두어 그 위에 건물 기단을마련하고, 큰 사각 주초 위에 원형의 운두 높은 주좌(柱座)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다. 월대의 형식은 다른 궁의 것과 달리 지형에 맞추어 전면 동쪽과 북쪽 일부만을 이중단으로 하고, 건물 좌우와 뒷편에서는 1단으로 하였다. 이 기단은 지세에 따라 3면에 적석(積石)을한 것으로 전면의 중앙과 북쪽 중앙에 화강석의 계단이 시설되어 있다. 계단 중앙에는 쌍봉(雙鳳)을 부각하였으며 기단은 장대석을 쌓았고난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평주 위에는 모서리를 많이 굴린 창방이 놓이고 운두가 낮은 평방 위에 다포계 양식의 외삼출목, 내사출목의 공포를 짜았다. 건물 사면은 모두 꽃살창으로 돌려져 있는데, 그 위로는교살창이 있다. 내부 바닥에는 전(塼)을 깔았고, 뒤편 중앙부에는 왕좌인 용상이 있는데 그 뒤로 일월도의 병풍이 놓였다. 그 위로는 닫집으로 짜은 보개(寶蓋)가 있고 천정의 중앙부에는 한층을 접어올린 쌍봉문(雙鳳紋)이 있는 보개천정을 장식했으며, 그 주위는 우물반자를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을 하고, 특히 천정판에는 화려한 연화문의반자초 단청(丹靑)을 시문했다.

 

통명전

통명전은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로 명정전 서북쪽에있다. 이 건물은 창경궁 내전의 여러 전각 중 규모가 가장 크고 기단이 이중으로 형성되었으며 단청의 수법 등이 가장 화려하여 내전을 대표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조(光海朝) 때 재건되었다가,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14년에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 정면은 7칸이고측면이 4칸인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였다. 지붕 위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전후퇴칸을 두었다. 북서쪽 일부의 방을 제외하고는 건물 내부 바닥에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원래는 정면으로 보아 양측에 2칸씩 방을 꾸몄음이, 1984년의발굴조사에서 연도지(煙道址)가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궁궐이 보이는 한양 전경

 

 한양의 전경

 

 조선의 도성 <漢陽>

 

산과 강이 어우러진 도시 한양 
서울은 북쪽으로 북한산 등의 높은 산들이 이어져 있고, 그 산들의 줄기가 남쪽 아래로 내려오면서 평지를 이루어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남산이 솟아 있으며, 그 산줄기가 북쪽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또한 평지를 이루고 있다.
동·서쪽으로도 산 능선이 연결되어 있어, 어느 곳을 보아도 산과 산줄기들이 이어져 분지를 이루고 있다. 남산 아래 남쪽으로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면서 천연의 요새를 만들어내고 있다. 서울은 방위를 위한 성(城)으로 둘러싸여 있는 성벽도시였으며, 성벽의 사이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성문들이 서 있었다.
이 도시의 가운데는 종로 거리가 동서로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종로 바로 아래로는 청계천이 길게 뻗어 있었다. 다음의 사진과 그림들은 산과 강이 어우러진 모습과 그 안에 있는 궁궐과 성곽, 주택 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울은 조선의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로서, 시골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에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제주로 보내라’ 는 속담이 생겼다. 또한 서울을 지체 높은 곳으로, 무서운 곳으로 여겨 ‘서울이 낭떠러지라니까 과천서부터 기어간다’ 는 속담도 생겨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서울은 인심이 야박하다 하여 서울사람들을 ‘서울깍쟁이’ ‘서울내기’ 라고 하였다. 서울은 시골에 대비되어 도시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곳이었으며, 출세할 수 있는 목표지로 여기는 곳이다.
 


무릇 제왕이 거처하는 도성이란 
제왕이 거처하는 도성은 몇 가지가 꼭 갖추어져야 했다. 제왕이 거처하는 궁궐은 정식 궁궐인 정궁(正宮), 즉 법궁(法宮)과 임시로 거처하는 이궁(離宮)이 있었다.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이 정궁이었고, 창덕궁이 이궁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버려 조선후기에는 창덕궁이 정궁이 되었으며, 경희궁이 이궁이 되었다. 고종 즉위 후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1867년 복원되었으며, 1868년에 고종은 그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겼다. 1897년에 이르러 고종은 그 거처를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겼다. 
정궁을 기준으로 그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두었다. 이른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종묘는 왕실의 조상과 역대왕의 신위를 모셔 그 덕을 기리고 조상의 음덕과 도우심으로 왕조의 번창함을 기원하는 곳이다. 사직은 토지를 지키는 신과 곡식을 관장하는 신을 모시고 제사 드리는 곳이니, 곧 영토를 잘 보존하고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곳이다.
한편 정궁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큰길을 내었으니, 곧 광화문에서 세종로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 좌우에 육조(六曹) 관아가 있어 광화문 거리를 육조 거리라 불렀다. 유식한 이들은 남쪽의 수호신인 주작(朱雀)을 향해 내뻗은 길이라고 해 주작대로라 일컬었다. 이 길을 따라 임금의 교화와 정령(政令)이 사방팔방으로 뻗어가길 바랬다. 그래서 길도 시원스레 넓혔으니, 훗날 일본인들은 ‘도쿄의 1등도로도 미치지 못할 넓은 길’이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도심에는 각종 관아와 민간 주택과 저자가 법도에 맞게 배치되고, 그 바깥으로 한양의 산줄기를 따라 자연스레 구불구불 성벽을 두르고, 사면 팔방으로 사람이 출입하는 성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청계천과 중랑천 등 물길이 자연스레 한양의 행정 구획을 갈랐다. 다시 말해 한양은 계획된 도시였다.

 

 

광화문 앞에 해태를 둔 까닭은? 
풍수이야기에 따르면, 경복궁은 조선 초 공사할 당시부터 화재가 자주 일어나 여간 근심이 아니었다고 한다. 목조에 단청을 칠한 건물인데다 당시로서는 제일 높은 건물이니 벼락이나 실화로 자주 화재가 났다. 게다가 목멱산(木覓山, 남산)은 글자에 나무 목(木)이 들어가 있듯이 불기운을 돋우는 형상이었다. 다행히 남산 앞에는 청계천이, 뒤로는 한강수가 있어 목멱산의 나무기운을 억누르기는 했다. 
그런데 아뿔싸! 한강 너머 엄청난 불의 산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관악산이다. 관악산의 봉우리 모양은 지금 우리 눈으로 보아도 완전히 가스레인지 불길 모양이니, 마치 남산을 불쏘시개로 삼아 도성을 불지르려는 태세 아닌가· 이에 불을 먹고 산다는 해태[··] 두 마리를 광화문에 두어 관악산의 화기를 제어하고자 했다는 것이 풍수가들 이야기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유교적 정치원리에 입각해 설명하기도 한다. 해태란 원래 해치에서 나온 말로, 해치는 중국 순임금 때 고요라는 명재판관이 데리고 있던 짐승이라 한다. 해치는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지녀 죄인이 거짓말을 하면 가차없이 뿔로 들이받았다고 한다. 광화문 앞에 해치를 둔 것도 실은 경복궁은 임금과 조정의 신하들이 정사를 논하는 중요한 곳이니 광화문을 출입하는 모든 관리는 엄숙하고 바른 태도로 이 문을 드나들기를 바라는 뜻에서 세웠다고 한다.

 

 

사대문의 마음이란·?
한양을 둘러싼 것은 산이요, 그 산을 이어 쌓은 것이 도성이다. 한양의 도성에는 4개의 큰 문과 4개의 작은 문이 있었다. 4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흥인문(興仁門, 동대문)·돈의문(敦義門, 대문) 숙정문(肅靖門, 북대문)이요, 4소문은 혜화문(惠化門, 동북) 창의문(彰義門, 서북) 소의문(昭義門, 서남) 광희문(光熙門, 동남)이다. 
흥인문은 만물의 싹을 틔우는 봄의 방향이니 그 마음이 어찌 어질지 않으랴· 어진 마음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동대문의 마음이다. 숭례문은 남쪽이니 여름에 해당하며 만물은 여름내 윤택하게 자라난다. 만물은 응당 예의 법도에 맞게 자라야 마땅하며, 예의를 숭상하는 것은 인륜의 근본이니 곧 남대문의 마음이다. 돈의문은 서쪽이니 가을의 방향이다. 가을에는 잊지 않고 추수하니 의리가 있음이라, 의는 마땅히 돈독해야 하니 곧 서대문의 마음이다. 숙정문은 북의 방향에 있으니 겨울이다. 가을에 추수한 것을 겨울을 대비해 저장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마음이되, 북방은 외적의 침입로이기도 하니 엄숙해야 할 것이다. 엄숙하게 바로잡는 마음이 곧 북대문의 마음이다.
이렇게 춘하추동-인의예지로 이어지는 우주의 섭리와 이를 이어받은 인간의 윤리가 어우러진 것이 한양의 사대문이었다. 그리고 도성 가운데 위치한 종루의 종을 침으로써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고, 이에 맞춰 사대문을 일제히 열고 닫았다. 동서남북과 춘하추동, 그리고 인의예지를 움직이는 중앙의 주재자인 파워핸들(power handle), 그것이 곧 종루이다. 이는 사시 운행의 때를 잊지 않으니 신뢰가 그 바탕이 된다. 종루는 고종 32년(1895)에 보신각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종각은 도성의 문을 열고 닫기 위해 치는 종을 달아두는 곳이다. 원래의 종루는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종각은 고종이 1895년에 ‘보신각(普信閣)’ 이라는 현판을 사액하여 이 때부터 보신각으로 불려졌다.

 

 

도성과 그 출입문들 
서울 60리 둘레를 현무도의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호위하고 있는 한양의 도성은 애초 남산과 북악산을 제외하고는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 이것을 세종이 모두 돌로 쌓았으니, 연 인원 32만 2,400명이 동원되어 98일만에 완성을 보았다. 대규모 인력 동원을 통한 단기간의 공사였다. 옛 법도대로 따르자면 성곽은 사각형 모양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양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짓다보니 굽이굽이 산성이 되어 물결쳤다. 성곽의 기본 출입문은 동·서·남 ·북의 4대문이었으나, 이외에도 4소문과 그 밖의 여러 문이 있었다. 4소문은 혜화문·창의문·소의문·광희문이다.

 
그 가운데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 시체가 나가는 문)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는 반드시 서쪽은 서소문으로, 동쪽은 광희문으로 나가게 하고, 다른 문으로는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시구문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수구문이라는 명칭은 청계천이 수문 근처를 통해 성 밖으로 흘러나가고, 남산의 물이 광희문 부근을 통과하여 나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에서는 콜레라 등의 전염병이 유행하면 환자들을 광희문 밖에 내다 버리곤 하였다. 이에 시골 사람들은 “한양에 가거든 수구문 돌담의 돌가루를 긁어 오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광희문 밖 돌가루가 병마를 물리치는데 효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광희문이란 이름보다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 불렀다. 그리고 ‘못된 바람은 시구문으로 분다’는 말도 있었다. 또 다 죽게 된 사람을 ‘시구문 차례’라고 했으니, 양반은 물론 보통 사람도 이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광희문은 도성 동남쪽에 위치한 4소문의 하나이다. 문의 좌우 성벽은 일제 때 헐렸다가 1975년 남쪽으로 15m 옮겨져 복원되었다.


 혜화문은 동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종로구 혜화동과 삼선동 사이에 위치해 있는 4소문 중 하나이다. 1928년 도로확장 과정에서 헐렸다가 1994년 원래의 위치 바로 옆에 복원되었다

소의문은 서소문으로 불렸다. 소의문은 일제 때 도로 공사로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홍지문은 한북문이라고도 하는데, 인왕산 뒷 편 끝자락에 있는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홍지문 문루와 오른쪽의 오간수문은 1921년 허물어져 있었는데, 1976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과거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멀고도 험했던 한양 가는 길
100여년 전 한양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일단 한양을 가야 할 터이다. 함경도 산골치들은 험한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도 되겠지만, 일단 원산까지 뱃길로 오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다. 살기 좋은 원산의 앞바다를 둘러보고, 금강산을 거쳐 다락원이나 망우리로 들어오면 절반은 산천유람을 한 셈이다. 황해도·평안도 상인들이 뭍으로 한양을 가려면 사리원~개성~장단을 거쳐 홍제원~서대문으로 들어올 것이다.
홍제원에서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험한 고갯길은 1920년 경 근대식 도로로 탈바꿈하는데, 중국 북경 내왕길이라 하여 서양인들은 ‘페이킹 패스(Peking pass)' 라 불렀다. 비단장사 왕서방과 외교사절이 오가는 한국의 실크로드라 하겠다. 영남의 선비들이야 추풍령 또는 새재를 넘어 충주~용인을 거치며 될 것이로되, 곳곳의 험한 도적을 조심해야 할 터이다. 부산 가서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거쳐 인천으로 들어오는 게 아무래도 났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했으니 어느 길이든 관계없지만, 개항 후 서울로 오는 발길은 아무래도 인천 쪽이 붐볐다. 일본인 장사꾼이나 서양 선교사들은 인천에서 가마나 조랑말을 타고 부지런히 경인가도(京仁街道) 100리 길을 갔다. 그래도 그 때의 경인가도는 한산했다. 하루 왕래객이 평균 3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가마꾼이 이끄는 대로 나그네는 서울로 향한다. 사람에 따라 한강~아현동~서대문을 거쳐 들어오거나, 한강~만리재~남대문을 통해 한양 땅을 밟는다. 어떤 이들은 용산~마포~청파동을 거쳐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8시간 걸리는 경인가도라지만 중간에 가마꾼들이 막걸리 추렴이라도 벌일 양이면 서울에 도착하는 건 하세월이었고, 술 취한 가마꾼이 흔들어 대는 가마 속에서 나그네도 덩달아 한양 백리길을 출렁거리며 가야했다.


 
‘서울깍쟁이’가 들끓은 오강 나루터 
강원도에서 발원한 한강은 서해로 빠져 나가기까지 기나긴 여정을 흐른다. 한강은 광나루에서부터는 경강(京江)이라 불렀는데, 이들 나루가 모두 서울로 출입하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경강 중에서도 특히 광나루·한강·양화·마포(삼개)·용산을 5강이라 하여 중요시 하였다. 
배를 타고 서울에 올라오려면 강화~용산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거슬러 오면 된다. 강화~용산 사이의 뱃길은 중국 또는 황해도 지방의 상인들이 애용했다. 손돌목 험한 여울을 지나 강화로 돌아 밀물을 타고 들어오면 용산 · 삼개까지 여섯 시간에 갈 수 있었다. 육로 보다 2~3시간 빠르다. 이렇게 뱃길로 오다보면 양화나루~서강나루~삼개나루 등 한강의 나루들이 연이어지면서 정겹게 나그네를 맞아준다. 그러나 조심해라! 그곳에는 ‘서울깍쟁이’가 기다리고 있다.
삼개나루는 한강의 교통과 화물 유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객주방과 보부상들·거간꾼·왈패들이 있었으며, 오늘날 조직폭력배의 원조 격인 ‘깍쟁이’ 같은 무리들이 시골에서 올라오는 어리숙한 장사꾼들 내지는 지방사람들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휘들러 쳐 거의 헐값으로 사기도 하였다. ‘서울깍쟁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으니, 이 정도는 나랏님이 사는 한양의 텃세라 참아두자. 나루를 내려 마침내 한양 땅을 밟는다.


 
한양의 자연보호, 사산금표 
풍수와 도교 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우주를 지키는 방위신들은 하늘에 있다. 이들 수호신들은 밤이 되면 하늘을 찬연히 수놓는 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옛 사람들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자리들이 동서남북의 하늘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심지어 그 별들은 인간의 수명과 운명마저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이들 수호신들이 동서남북에 별로 무리지어 있다가, 지상에 내려올 때는 각기 다른 모습을 취했다. 북쪽의 수호신은 거북의 모양에 뱀을 휘감은 모양으로 내려왔으니 그 이름이 현무(玄武)이다. 동쪽에는 푸른 빛을 띤 청룡(靑龍)의 모습으로 내려왔다. 서쪽에는 흰빛을 띤 백호(白虎)의 형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남쪽에는 공작과 봉황을 닮은 붉은 빛의 주작(朱雀)이 춤추듯 내려와 앉았다.
한양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양을 지키는 신들은 지상으로 내려와 산의 모습이 되었다. 경복궁 뒤 북악산은 곧 현무요, 동쪽의 낙산은 청룡, 서쪽의 인왕산은 백호, 남쪽의 남산은 주작이 되어 조선왕조 500년 도읍을 지켜온 것이다. 한양 주변의 산들은 신령한 존재였고, 이곳은 함부로 사람이 범해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이 대문에 조선 초부터 한성부는 도성 밖 5리 내지 10리 이내의 지역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했고, 이 성저십리의 산들 즉 동서남북의 사산(四山)에서 나무를 베거나 무덤을 쓰는 것을 금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일종의 그린벨트라 할 수 있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있나·? 
우리의 건국신화에도 호랑이가 나온다. 우리 옛 이야기에서 호랑이는 떡장수 할머니가 되기도 하고, 산신령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을 부모로 모시고 평생을 애절하게 효성을 다하기도 했다. 심지어 인간과 연애하는 엽기적 얘기도 적지 않으니, 가히 우리 나라는 ‘호랑이 얘기(虎談)의 나라’라 하겠다. 호랑이 얘기가 많은 까닭은 이 땅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호랑이 하면 백두산 호랑이와 인왕산 호랑이를 으뜸으로 쳤다. 옛날 종로 배오개를 넘으려면 짐승과 도적이 많아 적어도 백 명은 모여야 그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백 명은 되어야 넘는다고 해서 만들어진 ‘백고개’가 변해서 된 말이 배오개라고 한다. 특히 배오개를 넘을 때 가장 두려운 존재가 바로 인왕산 호랑이였다. 서울의 험한 산과 고개를 누비고 다닌 호랑이, 그래서 나온 말이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있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왕산 호랑이도 체면이 손상된 적이 있었다. 바로 고려 때 강감찬이 한양판관으로 부임해 왔을 때, 호랑이들이 사람들을 마구 해쳐 여간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강감찬은 부하를 시켜 남산 잠두봉 밑에 사는 늙은 승려(실은 호랑이의 신이었다고 한다)를 잡아온 후 크게 야단을 치니, 호랑이 신은 부하 호랑이들을 이끌고 한양을 떠났다고 한다. 어쩌면 이 때 서울을 떠난 호랑이들이 시골 호랑이에게 으스대며 한 말이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있나·” 아닐까·
 


무악재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유인막 호랑이 
한양은 고개의 도시이다. 배오개·솔재·붉은재·황토마루·무악재·만리재·아리랑고개 등 230여 개가 넘는 고개들이 있었다. 그리고 고개 턱에 자리잡은 성황당 나무마다 숱한 이야기가 걸려 있다. 
경기도 고양군의 나무꾼들이 넘어 다녔던 무악재는 서울에서 가장 험악한 고개의 하나였다. 숲이 깊고 고개가 험해 대낮에도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지금의 서대문독립공원 자리에 유인막(留人幕)을 설치해 군사들을 주둔시켰다. 군사들은 행인들을 모아 10여명이 되면 고개 너머까지 호송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군사들이 행인을 상대로 호송료를 갈취했다. ‘월치전(越峙錢)’이라 불리운 호송료 수입이 얼마나 쏠쏠했던지, 병졸들 사이에 “군사면 유인막 군사냐·”라는 말이 돌 정도로 유인막 군사는 이른바 ‘물이 좋은 보직’ 이었다. 그러나 도성 주민들에게는 원성의 대상이어서, ‘무악재 호랑이 보다 유인막 호랑이가 더 무섭다’는 말이 생겨났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 는 공자의 말이 무색한 고개 아닌가. 개항 후 도로가 확장되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이곳에는 주막도 생겼고, 사람들은 여기서 한번 쉬고 곧바로 성안으로 들어왔다. 
 


연꽃에도 당색이 있다· 
한양의 연못을 꼽으려면 남대문 밖의 남지(南池)와 서대문 밖의 서지(西池), 동대문 밖의 동지(東池)라는 연못을 들 수 있다. 남지를 비롯한 이들 연못 모두에는 연꽃을 심었는데, 여기서 생성된 연뿌리는 왕실의 식용으로 사용하였다. 
서지는 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었다. 서지는《한경지략(漢京識略)》에 “연꽃이 무성하여 여름철에 성안의 사람들이 연꽃 구경하는 곳으로 여기가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연못가에는 천연정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원래 이곳은 이해중(李海重)이라는 사람의 별장이었다가 경기감영의 중영(中營)으로 사용되었다. 천연정 옆에는 고려시대 어느 임금이 비를 피했다는 멋진 반송정(盤松亭)이 있었다고 한다. 이 멋들어진 천연정 옆에 일본의 첫 공사관이 들어섰으니 바로 청수관이다.
한편, 남대문 부근의 남지는 1900년 7월 남대문 북쪽 성벽의 철거작업이 시작되면서 이 해 10월 매몰되었고 그 위로 새 도로가 생겼다. 일찍이 남지의 연꽃이 활짝 피면 남인이, 서지의 연꽃이 활짝 피면 서인이, 동지의 연꽃이 활짝 피면 동인이 득세한다는 설이 있었다한다. 연꽃에도 당색(黨色)이 있었나 보다. 
 
 
남산골 딸각발이 
한양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촌과 북촌으로 크게 나뉜다. 조산 후기에 들어오면서 북촌은 서인에서 갈려나와 권력을 쥔 노론들이 어울려 살았고, 남산 기슭에는 몰락한 소론·남인 등이 섞어 살았다. 가난한 남산골 선비들은 가죽신 대신 나막신을 신고 다녀 ‘남산골 딸각발이’ 라는 별명이 생겼다. 과거를 보아 소과(小科)는 요행히 붙어 생원이라는 칭호는 얻었어도 대과(大科)는 실력 말고 정치적 연줄도 필요했으니 제대로 등과하기 어려웠다.
이래서 불우한 남산골 생원을 일컫는 말이 ‘남산골 샌님’ 이었다. 벼슬을 못하면 권력의 비리를 규탄하는 기개라도 가져야 하는 법, 노론 정치권이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남산골 샌님들은 분연히 붓을 들어 규탄하고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따졌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남산골 샌님 제 벼슬은 못해도 남의 벼슬 뗄 재주는 있다”라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러한 삶의 구조는 개항이 되면서 크게 바뀌었다. ‘되놈’ ‘왜놈’ ‘양이’라 불렀던 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한양은 본의 아니게 국제도시로 변해갔다. 


 청수관은 서울에 처음으로 건설된 일본공사관으로 1880년부터 1882년 임오군란 때까지 사용되다가 군란 때 불타 없어졌다.


여인들의 빨래터 하천 
서울은 지형적으로 북쪽에 산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하천들은 도심을 흘러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성 안을 흐르는 하천들은 청계천을 비롯하여 중학천 등이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이들 하천에서 빨래하고, 물장구 치고, 물고기를 잡기도 하였다. 도심을 흐르는 하천은 서울 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중학천은 북악산에서 시작하여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으로, 사부학당 가운데 중학(中學)이 옆에 있어 불려진 이름이다. 1957년에 복개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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