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 독경 ♣>/성지 * 여행

고성 禾巖寺

화엄행 2012. 12. 23. 22:47

2008년 7월 속초 고성

禾巖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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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화암사 부도

 

http://www.koreatemple.net/korea_temple/traditional_temple/history/view.asp?temple_seq=389&category_id=7&content_id=2904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2리

역사

 

화암사는 769년(신라 혜공왕 5) 우리나라에 참회 불교를 정착시킨 법상종의 개조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진표율사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를, 서쪽에는 장안사를, 그리고 남쪽에 화암사를 창건해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자 했으며, '금강산 화암사' 라는 명칭도 이 창건기록에서부터 출발한다.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수많은 대중에게 '화엄경'을 설했는데, 이를 배운 제자 1백 명 중 31명이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 69명도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얻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사찰은 진표율사가 '화엄경'을 설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하였기 때문에 화엄사(華嚴寺)라 불리었다. 또한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지장보살의 현신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을 창건, 화엄사의 부속암자로 삼았다. 이후 화암사는 지장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도 지장보살의 가피를 원하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화엄사(華嚴寺)라는 절 이름이 공식적으로 화암사(禾巖寺)로 바뀐 때는 1912년 31 본산 체제로 접어들면서이다. 건봉사의 말사가 되면서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화암사란 명칭을 공식으로 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http://www.budgate.net/scripts/bud114/114view.asp?id=12582&sw=1&_update=on

화암사(禾巖寺)

[이명] 한 때 화엄사(華嚴寺)라고 불렀다.
[위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476번지 설악산에 있다.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역사] 769년(신라 혜공왕 5) 진표(眞表)가 창건하고 이름을 금강산 화엄사라 했다.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는 금강산의 동쪽에는 발연사(鉢淵寺)를, 서쪽에는 장안사(長安寺)를, 남쪽에는 이 화엄사를 창건했는데, 화엄사
라 한 까닭은 이 곳에서 <화엄경>을 강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화엄경>을 배운 제자 1백 명 가운데 31명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69인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았다고한다. 또 진표는 이 곳에
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 한다. 그 뒤 941년(고려 태조 24) 월영암(月影庵)을 창건했으며, 1401년(조선 태종 1) 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彌陀庵)으로 이름을 바꿨다.

1623년(인조 1) 불에 타서 1625년 중건했다. 1628년에는 광명(廣明)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안양암(安養庵)을 창건했다. 그러나 1635년 산불이 일어나 다시 불 탔다. 이에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년(인조 22)에야 옛터에 중건했다.

1662년(현종 3)에도 화재가 있어 중건했고, 1716년(숙종 42)에는 산적들이 불 태워 버렸다. 이듬해 승려들은 동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무릉도(武陵島)에 초옥을 짓고 거주하다가, 1721년(경종 1) 옛 절터로 돌아와 중건했으며, 해성(海城)은 안양암을 중수했다.

1760년(영조 36) 화재로 대웅전과 향각(香閣), 승당이 불 타자 승려들이 협력하여 이듬해 승당을 세우고, 1762년 대웅전과 향각을 중건했다. 1794년(정
조 18)에는 화성 도한(華城 道閑)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放光)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提調尙宮) 최(崔)씨를 이 절에 파견하여 도한을 궁궐로 데려오도록 했다. 도한으로부터 경위를 들은 정조는 크게 감격하여 이 절을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고 요사채 2동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미타암의 화응전(華應殿)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 병 6폭, 연(輦)을 하사하고, 절의 사방금표(四方禁標)를 정해 주었다.

이로써 이 절은 창건 이래 가장 큰 사역(寺域)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0년(철종 11) 산불로 암자까지 모조리 소실되었으며, 승려들은 춘담(春潭)을 중심으로 중건에 착수했다.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시주를 모으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화엄사와 안양암을 중건했으며, 수봉(穗峰)은 탱화를 조성했다. 1864년(고종 1) 다시 산불로 소실되어 불 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내다가 1864년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했다. 그리고 화재를 면하고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남쪽의 화기를 지닌 수암(秀巖)과 북쪽의 코끼리 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100m 아래에 절을 짓기로 했다.

1872년 수봉이 새 터에 법당, 영각(影閣), 누각, 요사채를 중건했으며, 1882
년(고종 19) 자허(자虛)와 선월(船月)이 철원 장구사(長久寺)로부터 아미타여래좌상과 약사여래좌상을 모셔 봉안했다.

1893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안양암이 붕괴되었고, 1894년축성(竺星)이 중수했으며, 1909년 영운(影雲)이 안양암에 칠성각을 건립했다.

1912년에는 사찰령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된 뒤부터 화암사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다. 1915년 9월 다시 불 타서 1917년 중건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때 크게 파손되어 외채 1동만 남
게 되었다. 1953년 휴전 뒤에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한 비구니가 정착하여 머물렀다.

1986년에는 주지로 부임한 양설(良說)이 세계 잼버리대회와 때를 맞추어 절을 중창함으로써 다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유물.유적] 건물로는 대웅전, 명부전, 삼성각, 인법당(因法堂), 금강루(金剛樓), 일주문, 미타암(彌陀庵), 요사채 등이 있다. 그러나 문화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설화] 수암에는 구멍이 하나 있는데,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왔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욕심 많은 한 객승이 이를 보고 '세 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면, 3백 번 흔들면 2백 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팡이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
나 구멍에서는 피가 나왔고, 이후 쌀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한다.


[참고문헌] 전통사찰총서 1; 강원도 2(사찰문화연구원,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