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풍을 중흥시킨 서산대사를 받드는 대흥사는 억불시대인 조선조에 뛰어난 스님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두 서산대사의 문도와 법손인 이들 스님들은 조선 후기의 대흥사가 불교계의 중심 사찰의 하나였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문도들은 크게 4파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송운 유정계와 편양 언기계, 소요 태능계, 정관 일선계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대흥사에 있었던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는 법손이 가장 번성했던 편양 언기계와 소요 태능계 스님들이었다.
이들 13대강사는 아래와 같다.
나암 승제(懶庵勝濟)1629~1707
1.스님의 법명은 승제(勝濟),법호는 나암 으로 전남 화순군 능주면의 쌍봉사 사람이다. 대흥사 13대 강사중의 한 분이다. 설담자우(雪潭自優)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로서 모은지훈(暮隱智薰)스님의 손자뻘 제자이고 화월현옥(華月玄玉)스님의 종손뻘 제자이며 그리고 청허휴정대사의 법을 이은 제자 소요태능선사 에게는 6세 법손이 된다.
나암 스님은 우연히 대둔사에 들렀다가 설담자우스님의 회하에서 입실제자가 되어 법맥을 이었다. 나암스님은 만년에 자신에게 <화엄경>을 가르쳐준 설파스님 이 주석 하고있는 지리산 영원사로 찾아갔다 병을얻어 서녘 땅 으로가 쓸쓸히 입적했다.
운담 정일(雲潭鼎馹)1678~1738
2.운담 정일 대강사는 제1대 대강사였던 나암 승제 스님의 사제가 된다 .
늘 대흥사(대둔사)의 정진당에서 강의를 열었다고 하며 저술로서 『운담시문집(雲潭詩文集)』 1권이 현존한다.
연해 광열(燕海廣悅)
3.연해 스님은 대흥사 13대 강사의 한 분이다. 13대 강사로 꼽히는 스님들은 대부분 제9대 대종사 였던 호암체정(虎岩體淨,1687∼1748) 스님의 문도 들이다.
연해 스님은 호암 스님의 법을 전해받은 법제라고만 알려졌을 뿐,출생 또는 입적연대나 행적이 분명치 않다. 다만 대흥사 고기(古記)에는 스님이 늘 대흥사의 약사전에서 강회를 개설했다고 적고 있을 뿐이다.
성격이 호탕하고 이야기를 잘하였으며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소탈 하면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영곡 영우(靈谷永愚)
4.스님의 법명은 영우(永愚)이고 법호는 영곡 으로 , 전북 고창군 선운산 사람이다.
호암체정선사(1687∼1748)의 법을 이은 제자로서 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스님의 법형이다. 영곡스님에 관해서는 생몰 연대를 비롯,상세한 행장이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다행이 법제인 연담 스님의 자술연보의 기록을 통해 생의 편린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
영곡스님은 대흥사에서 크게 강회를 열었으며 그 성대함과 장엄함이 부처님의 영산법회를 방불케 하였다고 전한다. 영곡 스님의 문인은 11명인데 모두 북쪽 지역에 있으며 현해모윤(懸解慕潤)스님의 일파는 두륜산, 또 다른 일파는 월출산 에서 이름을 떨쳤다. 스님의 입적 연대는 분명치 않다.
벽담 행인(碧潭幸仁) 1687~1748
5.벽담 행인 대강사는 서산의 법제인 부휴의 후예로서 『고기(古記)』 에 따르면 영해(影海)스님의 법손이며, 풍암스님의 직계 손자이다. 스님이 법회를 주관하던 곳은 대흥사(대둔사) 승당이었다.
퇴암 태관(退庵泰瓘) 1687~1767
6.퇴암 태관 대강사는 설파 상언 화상의 법사이며 호암 화상이 법손이 되는 셈이다.
청운당에서 강의를 열었다고 전한다. 특히 화엄사상의 대가였으며 성품이 엄준하여 고요한 곳을 찾아 참선을 즐기고 번잡한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오래 은거하다 대중의 간청으로 대흥사(대둔사)에서 법회를 열었으나 만년에는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갔다.
부도와 탑은 담양(潭陽)의 용흥사(龍興寺)에 세웠다.
낭암 시연(朗巖示演)
7.스님의 법명은 시연(示演),법호는 낭암 으로 전남 영암 사람이다. 스님은 조선조 후기 불교사에 찬연한 학문의 꽃을 피운 대둔사 13대 강백의 한 분이다.
스님의 출생 및 출가 ,입적 연대 등은 전해오지 않고 다만 그가 영암에서 태어나 인근 달마산에 가서 출가 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낭암 스님은 설봉, 벽하 스님 문하에서 불교 전적 등을 공부했으며 송암 스님의 조실에 들어가 전법계를 받아 법을이은 제자가 되었다. 낭암 스님의 비석은 달마산에 세워져 있다.
금주 복혜(錦洲福慧) 1691~1770
8.스님의 법명은 복혜(福慧),법호는 금주이며 성은 권씨이고 전남 나주 사람이다. 조선조 중후기 사상계를 빛냈던 대흥사 13대 강사명단에 8번째로 이름이 오른 스님이다.
성격이 호탕하고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권장군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주 스님에 대한 기록은 출생,입적연대를 비롯, 출가한 연대등 자세하지 않다. 다만 그가 월파태율(月波兌律)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라는 점과 아암혜장(兒庵惠藏)스님으로 부터 "종풍을 드날린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만화 원오(萬化圓悟)1694~1758
9.스님의 법명은 원오(圓悟),법호는 만화 이며 성씨는 이씨로 전라남도 해남의 우수영 사람이다.
조선조 숙종 20년(1694) 9월에 태어나 영조 34년(1758) 8월 7일 열반에 들었으니 나이 예순다섯이었다. 스님은 어려서 수군영의 공생이되어 관아를 출입 하였으나 성품이 본디 과묵하고 세속적 명리에 관심이 없어 대흥사(대둔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만화 스님은 당시 전국에서 이름을 떨치던 당대의 선지식 환성지안스님 과 호암제정스님 을 모시고 경론을 배워 나이 30에 이르러 마침내 여러 경전의 깊은 뜻에 두루 통달하게 된다. 스님은 순천 송광사에서 입적 했으며 영각은 만일동국선원에 있다.
영파 성규(影波聖奎) 1728~1812
10.스님의 법명은 성규(聖奎),법호는 영파 로서 함월스님의 법을 이어 받은 제자이고 환성스님의 손자뻘 제자이다.경남 합천군 해인사 인근 마을 출신이다.
영파 스님의 자는 회은(晦隱)이고 성씨는 전(全)씨로서 고려 옥산군(玉山君)영령의 16대손이며 만기(萬紀)의 아들이다. 어머니 박씨는 꿈에 큰 별 하나가 품안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 잉태,조선조 영조 4년(1728) 기이한 골격을 갖춘 아이를 낳는다.
어려서 부터 슬기로움이 뛰어나 학문에 통달하고 글씨도 뛰어났다. 15세 무렵 출가를 결심 , 4년이 지난뒤 용천사로 찾아가 환응(喚應)장로에게 간청, 머리를 깎고 계율을 받아 수행의 길로 나선다. 이후부터 스님은 <화엄경>에대한 공부를 본격화, 30년 세월을 하루같이 공부에만 전념한다.
영파 스님은 설파와 함월 두 스님으로부터 <화엄경>의 종지와 선교의요령을 모두 터득한뒤 함월 스님의 의발을 전해 받고나서 영조 30년(1754)이래 등단설법 하다가 순조 12년(1812) 생애를 마쳤다.나이 85세, 승랍 66세였다.
완호 윤우(玩虎淪瑀)1758~1826
11.조선 후기의 스님, 해남 대흥사(대둔사)의 강사. 호는 완호(玩虎, 玩湖), 자는 삼여(三如). 전남 해남군 별진(別津) 사람이다. 아버지는 김시택(金時澤)이다.
1767년(영조 43) 10세에 두륜산 서일(瑞日)스님에게 출가하여 1774년(영조 50) 구족계를 받았다. 백련도연(白蓮 禱演)스님에게 교학을 익히고, 연담 유일(蓮潭 有一)스님에게 선학을 배운 뒤, 도연스님의 법을 이었다.
1798년(정조 22) 가을 대흥사(대둔사) 청풍요(淸風寮)에서 강경(講經) 대법회를 주재하자, 1백여 학인들이 참석했다. 1808년(순조 8) 겨울 일봉암에서 머물다가 대둔사 낭암 시연(朗巖 示演)스님의 청으로 다시 강경 법회에 참석했다. 1811년(순조 11) 2월 4일 가리포 첨사가 늦은 밤에 절에 왔는데, 이때 세 사람의 보좌관들이 횃불을 들고 창고에 들어갔다가 불씨가 떨어져 대흥사(대둔사)를 불태운 큰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그는 권선문을 짓고 법당 중건에 참여했다. 인봉 덕준(仁峰 德俊), 풍계 현정(楓溪 賢正), 호의 시오(縞衣 始悟)스님과 함께 11월 16일 천불을 배에 싣고 대둔사로 향하다가 동래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11일 동안 표류하다가 일본 장기도(長崎島) 축전주(筑前州)에 표착했다.
이 배는 이듬해 6월 17일에야 일본을 떠나 7월 15일 절로 돌아왔다. 천불 중 일본에 표류되었던 석불은 모두 어깨 위에 '일(日)'자를 표시했다.
1826년(순조 26) 월 23일 대둔사 한산전(寒山殿)에서 나이 69세, 법랍 59년으로 입적했다. 조정에서 '선교양종화엄강주...' 운운하는 승직을 추증했다.
두륜산에 부도탑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상국(相國) 권돈인(權敦仁)이 지었다.
아함 혜장(兒庵惠藏) 1782~1811
12.아암 혜장 대강사는 속성이 김씨요, 자는 무진(無盡)이었다. 어렸을 때 출가하여 대둔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법명은 혜장, 호는 연파(蓮坡)이며 출가 전에 이미 외전(外典)을 통달하였던 스님은 입산 후에는 연담 화상과 운담스님께 내전(內典)을 배웠다.
27세 때 정암 낭원 화상을 뵙고 법을 구하였다.
30세 때 이미 박학과 달변으로 명성을 떨쳐 대흥사(대둔사)의 청풍당에서 법회를 열고 주관하였다. 평소 『논어 』『주역』등을 잘 인용하였고 불교 경전 가운데 『능엄경』과 『기신론』을 특히 좋아하였다고 전한다.
순조 11년 30세로 요절하였다.
학문이 깊어 자주 연담 유일스님과 대비되기도 하는데 『고기』에서는 연담 유일스님을 대련(大蓮), 연파(蓮坡)스님을 소련(小蓮)이라 부르기도 한다.
범해 각안(梵海覺岸) 1820~1896
13.호는 범해, 이름은 환여(幻如)이고, 속성은 최씨로 완도군 군외면 범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철(崔徹), 어머니는 성산 배(裵)씨이다. 14세에 해남 대흥사에서 호의 시오(縞衣 始悟)스님를 은사로 득도하였다. 하의 정지(荷衣 定智)스님과 초의 의순(草衣 意恂)스님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27세에 호의 시오스님의 법을 이어 진불암(眞佛庵)에서 개당했는데 선교학에 밝았으며, 22년 동안 경전을 강의하였고(講經), 1896(고종 33)년 12월 26일에 77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동사열전(東師列傳)> 6편 1책을 비롯하여, <범해선사유고(梵海禪師遺稿)> 2편 1책, <경훈기(警訓記)> 1권, <유교경기> 1권, <사십이장경기> 1권, <시략기> 1권, <통감기> 1권, <진보기> 1권, <박의기(博儀記)> 1권, <사비기(四碑記)> 1권, <명수집(名數集)> 1권, <동시선(東詩選)> 1권, <은적사 사적기> 등 20여편이 있으나 모두 간행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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