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 독경 ♣>/성지 * 여행

洛山寺 - 紅蓮庵, 義湘臺

화엄행 2012. 7. 4. 21:37

 

 

 

 

 

 

 

 

 

 

 

 

 

 

 

 

 홍련암 마루바닥에서 본 파도

 

 홍련암 마루 밑의 파도

 

 

 

 

 홍련암 마루 밑으로 들이치는 파도

 

 

 

 

 

 

 

 

 

 

 

 

 해당화

 

 

 

 

 

  

 의상대 원경

 

 

 

 

 

설화 - 관음보살이 나타난다는 낙산사 홍련암

http://hompy.buddhapia.com/homepy/wonhyo/content/0000000365_2733_0000133666.asp

 

 江原道 襄陽 洛山寺는 신라 義湘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이 절 아래 관음보살 聖地인 紅蓮庵이 있으며, 이 암자는 관음보살이 머문 곳이라하여 옛날부터 신성시하여 불교 성지순례 사찰에 포함되어 왔다. 義湘과 元曉는 동해안 바닷가 어느 곳에 관음보살이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까지 찾아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자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두 스님과 懷正, 梵日대사가 襄陽 洛山 주위에서 인간으로 현신한 관음보살을 뵈었다고 쓰고 있다. 관음보살이 사람, 파랑새, 나비 등으로 세상에 나타나기도 하므로 불심이 없는 사람은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보지 못한다고 한다.

 義湘대사는 唐나라에 유학하여 知儼(지엄)대사로부터 華嚴學을 배우고 귀국한 뒤 洛山寺를 지었다. 그는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관음보살의 명에 따라 洛山寺를 세웠다고 한다. 義湘은 동해 바다에 관음보살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듣고 목욕재개한 뒤 바닷가 절벽 위에 7일간 기도를 했는데 마지막 날 기도를 끝내고 새벽에 앉았던 방석을 바닷물 위에 띄워 보냈다. 그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그를 바위굴 속으로 안내하였다. 義湘은 굴속에서 오랫동안 기도를 하니 하늘에서 수정염주 한 꾸러미가 내려왔는데, 이를 받고 굴 밖으로 나오다가 바다용으로부터 如意珠(구슬)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아직 관음보살을 직접 만나보지 못한데 대하여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다고 믿고 목욕재개한 뒤 다시 바위절벽 위에 앉아 7일간 주야기도를 하였으나, 관음보살은 나타나지 않았다. 義湘은 낙심하여 바다에 투신하였는데, 그 때 바다 쪽에서 흰옷을 입은 관음보살이 달려오면서 바다로 떨어지는 義湘을 받아 안아 바위굴로 데려갔다. 혼절한 義湘이 깨어나 보니 그는 바위굴속에 누워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음보살이 義湘에게 이르기를 "이곳 뒷산 위에 대나무 한쌍이 솟아날 것이다. 그곳에 꼭 절을 지어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義湘은 굴밖으로 나와 관음보살이 이르는대로 산을 찾아가 보니 과연 대나무 두 줄기가 산에 솟아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대나무가 솟아난 자리에 절을 지었고, 절 안에 관음보살상, 용으로부터 받은 염주와 여의주(구슬)를 안치하였다. 대나무는 절을 지을 때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며, 이 대나무는 관음보살상이 잠시 대나무(觀音竹)로 변신한 것으로 보고 있다. 義湘은 文武王 11년(671년)에 관음보살에 바치는 절을 세워 절 이름을 洛山寺라고 하였다.

洛山寺는 관음보살이 계신다는 "普陀洛迦山(보타낙가산)"의 산 이름을 따서 지은 절 이름이다. 義湘이 도를 깨우치고 관음보살을 친견한 바위절벽을 훗날 義湘臺라고 부르며, 풍광이 수려한 洛山寺는 오늘날 關東八景에 속한다.

한편, 훗날 元曉대사가 洛山寺 관음보살을 친견하러 가는 길에 중도에서 관음보살을 만나고도 관음보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스스로 불심이 부족하여 결례했다고 하여 항상 뉘우쳤다고 한다. 이에 관련하여 三國遺事에 전하는 이야기를 보기로 한다. 元曉가 남쪽에서 洛山寺를 향하여 걸어오는 길에 襄陽 땅에 들어섰다. 가을철이 되어 농부들이 추수를 하고 있었는데, 길가의 논에 흰옷을 입은 아낙네가 벼를 베고 있었다. 元曉는 장난 삼아 그 여인에게 벼를 좀 달라고 요구하자 그 여인은 올해에는 흉년이 들어 벼를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여자로부터 무안을 당한 元曉는 가던 길을 계속 걷다가 갈증을 느껴 이번에는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는데, 그 여인은 더러운 빨랫물을 바가지에 떠서 주었다. 원효는 화가 나서 그 물바가지를 쏟아버리고 손수 개울물을 떠 마셨다. 그때 마침 근처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스님, 그만 두십시오."라고 알 듯 말듯하게 지저귀면서 숲 속으로 사라졌다(원문에는 休醍 和尙(휴제호화상)으로 표현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에 차이가 있다. 이 표현을 불성이 부족하고 오묘한 부처세계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을 비유해서 한 말인지, 또는 이곳에 찾아와 더욱 수련하라는 의미인지 확실하지 않다.). 새가 앉았던 그 나무 아래 여자 신발 한 짝이 놓여있었다. 元曉는 궁금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여기면서 길을 재촉하여 洛山寺로 향했다. 元曉는 낙산사에 도착하여 법당 뜰에 있는 여자신발 한 짝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조금 전에 소나무 아래에 있던 신발과 꼭 같은 것이어서 놀랍고도 경외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던 길에 만났던 벼 베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들 여인이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나타나 자신의 불심을 시험한 것으로 보았다. 관음보살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희롱한데 대하여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뉘우쳤다고 한다. 관음보살이 元曉에게 계시를 주기 위하여 새로 변신하였는데 그 새를 훗날 觀音鳥라고 불렀고, 그 새가 앉았던 소나무를 觀音松이라 하였다. 元曉는 시골여인으로 현신한 관음보살과 자기도 모르게 禪問答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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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낙산에 있는 사찰로, 671년 신라 문무왕 1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습니다.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는데 1953년에 다시 지었습니다.
부속건물로 바로 옆에 의상대, 홍련암등이 있고 이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삼척, 강릉, 고성을 휩쓴 큰 산불이 일어나 낙산사 원통보전과 여러채의 전각이 소실되고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이 화마에 녹아버렸는데 2007년 11월 16일 1차 회향에 이어 2009년 10월 12일 2차 복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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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는 어떤 기도를 했을까.

고려 후기 고승 체원의상대사의 ‘백화도량발원문’을 해설한 서문에

“의상대사가 낙산 관음굴에 이르러 예배하고 발원하면서 이 글을 지으셨다”

고 했다. ‘백화도량발원문’은 단어 하나하나에 절절함이 묻어난다.


“관음보살의 대원경지 가운데 있는 제자의 몸으로 귀명정례 하오니 제자의 거울 가운데 계신 관음대성이 소리를 발하사 가피를 입혀 주소서. 바라옵건대 제자는 세세생생에 관세음을 일컬어 본사로 삼되 보살이 아미타여래를 이마에 이고 계신 것 같이 제자 또한 관음대성을 이마 위에 정대하고 십원육향과 천수천안과 대자대비를 모두 균등하게 지니며(…중략…)제자의 이 몸 다할 때 대성께서 광명을 놓으셔서 모든 두려움을 떠나 마음이 편안하게 해주시고 잠깐 사이에 백화도량에 화생하여 여러 보살들과 함께 바른 법을 듣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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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암은 2005년 낙산사를 휩쓸고 간 화마도 피해갔다.

그래서 기도객이 끊이지 않는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2품 관직까지 오른 명관 유자량도 홍련암 관음기도를 성취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유자량은 명종 정사년(1197) 병마사가 돼 10월 관음굴 앞에서 분향 배례했다. 파랑새가 꽃을 물고 날아 와 갓 위에 떨어뜨리고 사라졌다.

유자량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재상들과 ‘기로회’를 만들어 부처님 섬기기를 계속할 만큼 불심이 돈독했다.


경봉 스님도 마찬가지였다. 스님은 1930년 2월25일 이곳에서 관음기도를 했다.

13일째 되던 날 참선 중에 바다 위를 걸어 다가오는 관음보살을 봤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원통보전과 홍련암 편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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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는 관음성지일 뿐 아니라 아름다운 절경으로 많은 화가,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곳이다.

세조, 성종, 숙종과 같은 왕들은 물론 보우, 서산과 같은 승려들에 이르기까지 낙산사를 안 다녀간 사람이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극, 정철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유자량, 이규보, 정추, 안축 등의 여러 유명한 문인들이 많은 시문을 남겼고, 조선시대에는 김시습, 남효온, 정사룡, 최립을 비롯하여 이민구, 윤증, 김창흡, 이해조 등이 낙산사를 탐방하고 빼어난 작품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1592년 임진왜란 피난 중에 부인이 첫 아들을 낳고 전란 통에 아내와 아들이 잇달아 죽는 불행을 당하자 이듬해부터 낙산사에 3년 정도 유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그해 10월 시화집 ‘학산초담’을 집필하고 다음해 과거에 급제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허균은 낙산사에 관한 3편의 시를 남겼다. 

 

 

낙산사를 소재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겸재 정선, 서암 김유성, 단원 김홍도 등이 대표적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낙산사에 들러 동해의 장엄한 일출을 보고 금강산 일대 ‘해악진경’여덟 폭을 병풍에 ‘낙산일출’ 이란 작품을 그려 넣었다.

또한 서암 김유성은 1764년 조선통신사를 수행, 일본을 방문하여 세이켄지에서 그려 준 ‘산수화조도 압회첩병풍’여섯 폭 중 네 번째로 보이는 그림이 ‘낙산사도’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원 김홍도 또한 1778년에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관동팔경 지역을 사생여행하면서 ‘낙산사도’를 그리게 된다.

단원의 ‘낙산사도’는 바다 쪽 하늘에서 낙산사를 내려다보는 조감도 형식으로 그렸기에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를 복원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낙산사의 문화재

 

보물 제499호 낙산사칠층석탑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1467년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입니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합니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원나라의 라마탑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고 있으나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화 되었습니다.

 

보물 제1362호 낙산사건칠관음보살좌상

낙산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건칠불상입니다.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줍니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낙산사홍예문

1467년 왕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입니다.

당시 강원도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낙산사원장

낙산사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입니다.
안쪽의 담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은 이 담벽은 높이 3.7m·길이 220m입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운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였습니다.

돌기와와 흙으로 높고 정연한 담장을 쌓고 넓은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한 이 담장은,

법당을 둘러싸 신성한 지역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함께 나타내고 있습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5호 양양낙산사사리탑

이 사리탑이 서 있는 자리가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며,

모신 사리의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692년에 세운 것으로, 각 부분의 조각이 화려합니다.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6호 낙산사홍연암

낙산사 옆쪽에 있는 이 불전은 676년 의상대사가 세웠고 1619년에 고쳐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1869년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연암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