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술자료 ♣>/기타 관련자료 모음

원통불법의 요체 (09) (10) - 제3장 수증과 공덕

화엄행 2011. 10. 9. 07:40

원통불법의 요체 (09)

제3장 수증과 공덕

제1절 참선 - 1. 선의 정의

제1절 참선 - 2. 선의 종류

제1절 참선 - 3. 선의 방법

 

원통불법의 요체 (10)

제3장 수증과 공덕

 

제1절 3. 선의 방법

제1절 4. 선의 자세

제2절 1. 염불의 의의

제2절 2. 염불의 방법

제2절 3. 염불삼매

제2절 4. 제경론의 염불법문

 

 

원통불법의 요체 (11)

제3장 수증과 공덕

 

제2절 4. 제경론의 염불법문

 

 

청화스님의 마지막 법문 (2003년6월15일)

 

2003년 06월 15일 서울 도봉산 광륜사 보살계 법문

 

 

 

제3장 수증(修證)과 공덕(功德)

제1절 참선(參禪) 

 

 

2. 선()의 종류(種類)


   

外道禪因果不信하고 有漏功德하여 닦음.

凡夫禪因果하고 有爲功德하여 닦음.

小乘禪我空하고 解脫하여 닦음.

大乘禪我空法空하고 解脫하여 닦음.

最上乘禪如來禪本來 부처로서 一切無漏功德이 원만히

                 └ 祖師禪具足함을 信解하고 닦는 .


   

다음은 선()의 종류를 살펴 보겠습니다.

이른바 초월적 명상법(瞑想法)이나 다른 명상법 등 명상법에서도 무슨 재미가 좀 붙으면 그것이 참다운 선()이라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선()을 과소 평가하는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지금 미국에서나 또는 인도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서 많이 나오는 명상법 같은 것 때문에 혼미를 당하지 않습니다.

   

외도선(外道禪)은 인과(因果)를 불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고 파계무참(破戒無慙)한 짓을 하면 분명히 그 과보로 고()가 있는 것이고 지금은 전생의 선근 덕택으로 넘어갈지 모르지만 죽은 다음에는 그 업덩이를 짊어지고 다시 고생을 많이 합니다. 인과를 무시하면 불교의 가르침이 못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선()을 짓는다면 분명히 선의 과보로 안락을 얻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과를 밝히고 인과를 초월하는 것이지 인과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과를 믿지 않고서 우선 재미가 좀 있고 우선 머리가 좋아지고 몸이 좋아지는 유루(有漏) 공덕을 위해서 닦는 것이 외도선입니다. 명상계통은 보통 다 그렇습니다.


다음에는 범부선(凡夫禪)이 있습니다. 외도는 불교를 안 믿는 것이고 범부라 할 때는 벌써 불교는 믿는 분입니다. 인과를 믿는 것입니다. 인과를 믿지만 아직은 무위공덕(無爲功德), 해탈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복이 많아지고 재수도 좋아지고 집안도 좋아지고 자기 병도 낫고 하는 이런 세간적인 유위(有爲)공덕을 위해서 닦는 것이 범부선입니다.

   

그 다음에는 소승선(小乘禪)입니다. 소승이라 하더라도 소승법은 깨달은 분상(分上)입니다. 구경적인 깨달음은 못되어도 역시 견도(見道)해서, 진여불성이 현전해서, 자기 자성을 알긴 알았으나 다만 습기를 못 여의었다는 말입니다. 아공(我空)을 믿습니다. 내 몸뚱이는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이루어지고 내 마음도 역시 수나 상이나 행이나 식이 인연 따라 잠시 합해져서 되었으므로 내가 공()하다는 것을 믿지마는 일체만법이 다 비었다는 법공(法空)을 미처 못 깨달은 것입니다. 소승도 깨달음이 철저하지 못하여 완전한 깨달음은 못되나 역시 깨달음의 분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소승의 해탈을 위해서 닦는 것이 소승선 입니다.

   

그 다음에 대승선(大乘禪)은 나도 원래 비고, 일체 만법도 다 비었다는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믿습니다. 무슨 이데올로기나 무슨 주의나 또는 어떤 학설이나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나온 것이지 본래 이것이 이른바 무가정(無假定)의 원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이런 법공자리를 미처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라하면 사회주의 사상을 원리적으로 믿고서 모두를 거기에 끼워 맞추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경직된 교조주의(敎條主義 dogmatism)인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더라도 법공을 철저히 못 증()한 사람들은 꼭 자기 식으로, 같은 법문도 자기 견해만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합니다. 자기 주장, 자기가 느끼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법공을 미처 모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공, 법공을 믿고서 해탈을 위하여 닦는 것이 대승선입니다.

   

그 다음 최상승선(最上乘禪)은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을 말합니다. 더러는 여래선을 대승선 가운데 넣는 분도 있습니다만 뜻을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최상승선이란 다시 위없는 선이란 말입니다. 여래선, 조사선도 원래 둘이 아니요, 조사선이란 말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구태여 본래성불(本來成佛)의 뜻을 강조한 방면에서 구분할 때 여래선은 주로 부처님 경전을 참고로 많이 하였다고 볼 수가 있고, 조사선은 부처님 가르침을 무시한 것은 아니겠지마는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교 밖의 격외(格外) 도리에 보다 더 철저히 들어간다는 데서 이름지어진 것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최상승선은 본래부처로서 일체 무루공덕(無漏功德)이 원만히 구족함을 신해(信解)하고 닦는 선입니다. 따라서, 최상승선이 될 때는 모든 공덕을 다 원만히 갖추고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공, 법공을 믿고 공덕총림(功德叢林)이나 또는 현법락주(現法樂住) 모두가 다 갖추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쉬지 않으려야 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공덕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자리에 있습니다. 남을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고 분별시비하는 이 마음은 본래 마음이 아니겠지마는 망상하는 이 마음 떠나서 또 다른 마음이 있지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분별시비하는 중생심, 이 마음 가운데에 일체공덕이 다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닦지 못해서 공덕을 발득(發得) 못하는 차이 뿐입니다. 앞으로 닦은 뒤에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이라 할 때에 본래성불(本來成佛), 즉신성불(卽身成佛) 또는 당래성불(當來成佛)의 세 가지로 성불의 뜻을 구분해서 얘기도 합니다. 본래성불은 본래 부처가 되어 있다는 말이요, 즉신성불은 이몸 이대로 금생에 바로 부처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금생에 충분히 부처를 이룰 수가 있어야 하겠지요. 또는 금생에 그렁저렁 했으면 금생에는 못 이룬다 하더라도 당래성불이라, 당위(當爲)적으로 마땅히 미래에는 성불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선하는 분들은 본래성불 자리를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일체의 번뇌와 때묻지 않은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추어 있다’고 믿을 때에 이른바 안심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만 믿어버리면 사실은 구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휴거 헐거(休去歇去)라, 이 마음 쉬고 또 쉬어버리는 것입니다.

앞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근본불교를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마음 공덕을 생각할 때는 모두가 헛것입니다. 다만, 복잡한 현대사회요 고학력 시대라서 학자도 많고 또 수도인도 많은데 그런 분들이 또 불교를 했다는 분들이 여러 가지로 부처님 가르침을 쪼개고 보태고 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체계를 못 세운 사람들은 혼미하고 혼란을 느껴 버립니다. 따라서 그런 혼란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근본불교부터 여러 시간 동안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우리가 윤곽을 취해서 근본적인 줄거리만 잡은 다음에는 누구의 말씀에 대해서나 참고로는 할 망정 거기에 먹혀들 필요까지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최상승선만이 문제입니다. 이 가운데 다 들어 있으므로 그 외에 것은 문제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출가사문(出家沙門)은 최상승선만을 문제로 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 생과 더불어서 묻어있는 근본적인 본능적인 구생기(俱生起)번뇌, 또는 금생에 나와서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지은 분별기(分別起)번뇌, 이런 번뇌 때문에 최상승선을 한다 해도 역시 자꾸만 끄달리고 장애가 되고 합니다. 마땅히 우리는 최상승선 도리를 한발도 헛딛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최상승선은 어떠한 방편이 있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제3장 수증(修證)과 공덕(功德)

제1절 참선(參禪) 

 

3. 선()의 방법(方法)


   

公案禪(話頭禪)

默照禪

念佛禪


   

선()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마는 우리가 보통 아는 바 공안선(公案禪) 즉 화두선(話頭禪)입니다. 우리 한국은 주로 화두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계종은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파에서는 좀 다르겠지요. 그러나 조계종에서는 참선을 한번도 안한 분도 선을 말하면 ‘화두만 선이다’고 얘기를 합니다. 선방에서 한 철도 안 나본 학자들도 참선에 대한 논문을 쓸 때는 으레 공안선 화두선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참선에 대해서 논할 때는 자기 스스로 몇 철이나 참선공부를 해 본 사람이 말해야지 참선을 안 해본 이가 선()을 말하는 것은 마치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이 수영(水泳)법을 말하는 것과 같이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또 묵조선(默照禪)은 화두없이 그냥 잠자코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불심(佛心) 경계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묵조(默照)가 나올 때에 그 연기유서(緣起由緖)를 보면 분명히 불지(佛智)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관조하는 것이며, 묵조란 뜻도 잠잠히 묵묵히 비춘다는 무념무상의 도리로, 일체 무루공덕(無漏功德)을 갖춘 본래면목 경계를 비추는 선인 것인데 뒤에는 덮어놓고서 묵묵하니 앉는 것으로만 압니다. 그러니까 근본 뜻도 잘 모르고 혼침 등 병통이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공안선도 가사, 조주 무자(趙州無字)의 화두의 연원을 보십시다. 어떤 승()이 조주(趙州 778∼897)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법의, 중도(中道)의 도리를 이치로라도 안다면 그런 질문은 할 턱이 없습니다. 진리를 이치로 알아버린 사람이 그런 질문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한 천년(千年) 전이라서 지금 사람들같이 논리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으로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했으니 개도 역시 중생인지라 마땅히 불성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사람 같으면 그래도 선악의 분별이 있기 때문에 불성이 있다고 할런지 모르겠지만 개란 껌껌하게 미혹되어 먹을 것이나 암놈 숫놈 밖에는 모르는 개한테 무슨 불성이 있을 것인가?’ 그렇게 의심이 안 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역시 현실로 눈앞에 보이는 개가, 어두운 업장 많은 그런 짐승이 무슨 불성이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겠지요. 그 물음에 따라서 조주 스님이 “무()라” 없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부처님께서는 있다고 하셨는데 왜 조주 스님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면 참말로 없는 것인가? 우리는 이 공안선(公案禪)의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럴 때는 우리 마음자리를 선행적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마음이 본래 부처인데, 어째서 부처가 나타나지를 못하는 것인가? 이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산란심(散亂心) 때문입니다. 파도가 치면은 중천에 휘영청 밝은 달 그림자가 물 위에 제대로 비칠 수가 없겠지요.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도 역시 산란스러우면 참다운 지혜가 못 나옵니다. 안정이 되어야 바른 지혜가 나올 수 있는 것이고, 특히 진여불성, 우리 본심자리는 정말로 산란심이 딱 정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호흡도 산란심과 정비례합니다.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호흡도 그 마음만치 산란스럽고 호흡이 고요해지면 마음도 고요해지고, 또 역으로 마음이 고요해지면 호흡도 고요해집니다. 그러기에 덮어 놓고 하는 분들이 많지만 호흡법도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 마음도 어느 문제에다가 의심을 골똘히 품게 되면 우리 마음이 모아지고 정화(淨化)가 되겠지요. 그러나 수승한 근기가 된 사람들은 빨리 모아지는데 보통 근기는 그 의심 때문에 굉장히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남을 믿는 것은 기분이 좋지만 남을 못 믿을 때는 괴롭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의심도 제일의제(第一義諦) 본래면목 자리를 안 놓치고 의심하고 불성자리를 분명히 참구(參究)하는 태도로 의심한다면 빨리 모아지지마는 단순히 의심하는 의심으로는 더딘 것입니다.

   

수승한 근기를 갖추면 빨리 하나가 되어서 몸도 마음도 개운하니까 별 문제시가 안되는 것입니다마는 업장이 많은 사람들은 의심한다는 것이 괴로우니까 그 때문에 상기(上氣)가 되고 별별 병이 나오게 됩니다.

앞서, 칠각지(七覺支)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칠각지 법문은 정()과 혜()가 쌍수(雙修)가 되는 법문 아닙니까. 정과 혜가 균등(均等)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진여불성자리는 정과 혜가 본래로 구족원만하게 갖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 마음자리가 정만 있고 혜가 없다면 정만 닦아도 되겠지요. 또 혜만 있고 정이 별로 없다거나 치우치게시리 무엇이 더 많다고 한다면 한 가지만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마는 우리 마음자리 불성은 원래 정과 혜가 균등하게 원만히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부하는 인행적(因行的)인 수행법도 정과 혜가 가지런히 나가야 됩니다. 마치 새가 두 날개가 있어야 하늘에 잘 날을 수 있고, 수레에 양 바퀴가 있어야 바로 가듯이, 공안선의 화두를 든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정혜균등(定慧均等)이 되어 있는 것인가?’ 점검을 하여야 하고 남의 공부도 그렇게 점검을 해 주어야 됩니다.

   

그러면 정혜균등한 것은 좋지만 어떻게 균등할 것인가? 좀 어려운 문제 입니다. 무엇을 혜()라고 할 것인가? 불경이나 조사어록이나 많이 외우는 것을 혜라고 할 것인가? 우리 공부하는 분상의 혜는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보조 국사 어록에 적이상조(寂而常照)라, 적() 곧, 고요한 것은 바로 정()에 해당합니다. 모든 번뇌가 없어져버린 자리입니다. 그러나 번뇌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면 바보 아닙니까? 이른바 무기(無記)인 것입니다. 꼭 반야의 혜가 있어야 합니다. 반야의 혜는 모든 상을 다 떠나버린, 훤히 열린 바로 밝은 마음자리인 것입니다.

   

앞으로 현대 물리학을 말씀드릴 적에 이 마음의 광명자리를 현대물리학적으로 증명한 것을 소개하겠습니다마는 사실 우리 마음은 본래가 바로 지혜 덩어리요, 본래 빛, 광명 덩어리입니다. 후불탱화(後佛幀畵)를 보십시요. 부처님의 광명이 삼천대천 세계를 다 비추고 도로 정수리로 들어가는 모습, 특히 정상에 광명이 들어오고 나가는 상징화가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도 똑같이 광명이 나와서 천지 우주를 다 비추는 것인데 우리가 번뇌에 가리어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예수의 부활(復活)입니다. 꼭 그들은 자기들만 있는 중요한 보배같이 부활설을 내세우나, 예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다 부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지면 죽는 것입니까?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뱀이 허물 벗듯이 몸뚱이 허물만 벗는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는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바로 영생 자체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그네들은 그런 도리를 잘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가 죽은 뒤 삼일(三日)만에 어느 신도한테 모습으로 나타냈겠지만 예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달마 대사 전기를 본 분들은 알지 않습니까?

   

달마(菩提達磨) 대사가 소림굴(少林窟)에서 9년 간 계시고 모든 교()는 배격하여 문자(文宇)를 세우지 말라 하였는데, 그 때에 중국에는 번역 불교가 성행하여 구법승(求法僧)들이 인도에 가서 천신만고 가져온 목숨보다 소중한 경전인지라, 경을 외우고 풀이하는데 세월 다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경을 번역하고 풀이하고 연구하는 것은 좋은데, 정작 마음 닦는 법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중국에 와서 할 일은 무엇인가? 사명은 무엇인가? 마땅히 경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경의 본뜻을 중요시해야 할 것 아닌가? 경의 본뜻은 무엇인가? 결국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오직 우리 마음 가리켜서 마음 깨달으면 본래 마음자리, 본래 자기, 참다운 대아(大我)가 곧 부처다’ 그래서 달마 스님이 중국에 와서 참다운 진리는 문자 밖에 있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그러나 2조 혜가(慧可) 선사한테 능가경(楞伽經) 네 권을 전수했던 것입니다. 잘 모른 사람들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경전은 필요없다’고 말하지만 달마 스님이 전법(傳法)의 표신(表信)으로 가사와 능가경 4권을 혜가 선사한테 전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경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경을 중요시한 것입니다. 경을 중요시하고 숭상한다는 것은 많이 외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의 진의(眞義)인, 마음 닦고 바른 행동 취하고 삼매에 들어 바른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다시 공안선 말씀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화두를 드는 공부에 있어서 도인이나 선지식들이 말씀한 혜()를 어떻게 놓치지 않을 것인가? 오직 마음을 모으는 정()과 더불어 어떻게 혜를 세울 것인가? 혜는 따지는 혜가 아니라 다 버리는 혜인 것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요’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관념도, 좋다 궂다 하는 것도, 이 현상계도 본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없다고만 생각하면 무기(無記)에 빠집니다. 그냥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 훤히 빛나는, 조금도 막힘이 없는, 우주 삼천대천 세계에 무장무애(無障無碍)한 진여연기(眞如緣起)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불성(佛性)이 상주(常住)하는 것입니다.


저는 라즈니쉬에 대해서 그의 방만한 행위 때문에 배격해버렸습니다만 그가 어떻게 공부를 했던 간에 천재이기 때문에 그의 저서 가운데 아주 좋은 대문이 있었습니다. ‘눈을 감을 때나 눈을 뜰 때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모든 것을 빛으로 생각하라’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언제나 누구를 보나 모두를 다 광명의 화신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두가 광명입니다. 금덩어리나 다이아몬드만 빛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투명한 마니보주(摩尼寶珠)같은 빛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안청정(佛限淸淨)한 부처님의 차원에서는 진여불성 자체가 바로 광명이기 때문에 모두를 다 빛으로 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인들이 깨달은 분상에서 ‘심월고원(心月孤圓)하니 광탄만상(光呑萬象)이로다, 마음달이 훤히 우주를 비추는데 광명이 우주를 다 삼키고 있구나!’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달을 때에는 그런 경계가 되어야겠지요. 천지 우주가 그야말로 송곳 끄트머리나 냄새나는 똥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순수한, 심심미묘한 광명으로 빛나있다는 말입니다.

   

운문(雲門 864∼949) 선사도 “여하시불(如何是佛)이니꼬?” 부처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 어느 스님네 대답에 “간시궐(乾屎橛)이니라” 마른 똥막대기라는 말입니다. 하필이면 마른 똥막대기 뿐이겠습니까? 가장 더러운 것도, 가장 좋은 것도 모두가 다 부처가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안선의 ‘이뭣고’ 선이나, ‘무자(無宇)’ 선이나 어떤 선을 하나 제일의제(第一義諦) 자리를 안 놓치는 것이 이른바 혜()가 됩니다. 그러면 정()은 무엇인가? 정은 그 자리를 지속적으로 간단(間斷)없이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시삼마(是甚마)선’의 시초를 보면 혜를 어떻게 드는[]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고, 검기는 칠보다 더 검고’ 이른바 명암을 초월한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분상에서는 검은 것을 생각하면 혼침이 빨리 와버립니다. 참선하면서 눈을 감고 해보십시요. 참선이 익은 분들은 문제가 아니겠지만 초심자는 그냥 혼침이 와버립니다.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도 더 검은 그 무엇이,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고 이미 천지를 감싸고 두루하는 것이, 명암(明暗)을 초월한 밝은 생명이 나와 더불어 있다’고 참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발에 있습니까, 어느 처소에 부분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몸뚱이 전체가 불성 덩어리인 것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천지 만물 두두물물이 불성 덩어리인 것입니다. 진여불성이 연기(緣起)한 현상이기에 현상 그대로 진여불성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뭣고’선 곧 ‘시삼마’선에서도 천지를 하나의 광명 덩어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화두나 ‘시삼마’선이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무엇인가? 는 본래면목 자리가 무엇인가? 라는 말입니다. 달마 스님께서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또는 본분사(本分事)가 무엇인가? 이런 데 따라서 천칠백(千七百) 공안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참구(參究)하는 마음 자세 역시 그 자리를 안놓쳐야 선인 것입니다. 묵조선도 똑같습니다.

   

그 다음에 염불선(念佛禪)이라,

저는 이번에 문제 의식으로 삼은 것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어떤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닙니다. 돈오돈수도 옳고 돈오점수도 옳습니다. 다 말씀을 했습니다. 육조단경을 보더라도 돈오돈수란 대목도 있고 돈오점수라고 문자로 표현은 안했지만 그 의미로는 벌써 돈오점수가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부질없는 갈등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념적인 해석을 잘 해버리면 갈등 될 필요도 없습니다. 돈오돈수를 무슨 뜻으로 말했던가? 뜻으로 생각할 때는 같은 뜻이 되어 버립니다.


또는 여래선과 조사선의 문제입니다. 이것도 괜히 부질없이 싸우는 것입니다. 부처가 말한 것이 옳은가? 조사가 말한 것이 옳은 것인가? 다 옳습니다. 다만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이나 때에 따라, 너무 집착하면 집착하지 말라, 또 너무 집착을 안해서 허무감에 빠져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무기에 떨어지면 곤란스럽기 때문에 이럴 때는 이것저것 점차로 닦아야 한다고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석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 표현된 문제 가지고 괜히 쓸데없는 낭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갈등(閒葛藤)이라, 한가로운 희론(戱論)에 불과합니다.

또는 염불이 옳은가? 참선이 옳은가? 또는 주문이 옳은가? 또는 참선과 염불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저한테 문의하는 젊은 스님네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기회에 미흡하나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면 자기가 내키는 법문이라 좋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므로 마땅히 권위있는 경론을 전거로 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염불선(念佛禪)도 역시 원래 최상승선 도리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가 저 십만억 국토를 넘어서 있다. 또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 우리 마음 밖에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다운 염불도 못되고, 염불선도 못됩니다. 부처님께서 극락세계가 밖에 있다고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우리 마음이나 부처가 내 밖에 있어서 애쓰고 생각하면은 우리를 돕는 가피를 주신다고 생각하셨을 리는 만무합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요, 시방여래시법계신(十方如來是法界身)이라, 부처는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근본 뜻을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극락세계나 나무아미타불이나 정토(淨土) 법문을 말씀하신 경은 주로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인데 그런 경을 착실히 보아도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실히 잘 안보고 말을 합니다. 착실히 본다면 한 경 내에서도 방편과 진실이 아울러 있습니다. ‘극락세계가 저 밖에 있다’고 말씀해 놓고도 같은 경 내에서 ‘그대 마음이 바로 극락세계다. 닦으면 그대로 극락이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근(下根) 중생은 방편설(方便說)만 가지고 따지며 시야비야(是也非也)합니다.

따라서, 참다운 염불도 ‘본래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자리’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고 내 마음이 부처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부처 이름을 자꾸만 외워야 자기 암시가 되어 가까워지겠지만 부처님 이름을 외지 않고서 분별하는 생각만 할 때는 우리 마음이 부처와 가까워지겠습니까? 화두도, 무자나 이뭣고나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毛)나 모두가 다 일체 유루적(有漏的)인 상대 유위법을 떠나서 오직 불심(佛心)만 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공안이나 염불이나 모두 다 같은 것입니다.

묵조(默照)도 청정미묘하고 일미평등한 진여불성을 관조하니까 같은 것이고, 또는 공안도 제일의제(第一義諦)인 한 물건 자리를 참구하는 것이니까 같은 것이고, 염불도 부처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행복스러운 극락이 십만억 밖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 방편이 되는 것이지만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요 만법이 본래 부처일 때는 바로 선()인 것입니다.

   

외도(外道)와 정도(正道)의 차이는 무엇인가? 외도는 마음 밖에 도를 구합니다. 별스런 재주있는 짓을 다해도 마음 밖에 무엇을 생각하면 외도인 것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화합도 모두가 다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행동 바르게 하고 진리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다스리는 방법은 무엇이 좋은가? 산을 생각하고 물을 생각하고 무엇을 생각하더라도 마음의 본래면목을 생각하는 것 같이 빠르고 쉽고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정서(情緖)와 지혜(智慧)와 의지(意志)가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전생의 숙업 따라서 정서가 좀 더 많은 사람 또는 의지가 더 강한 사람 또는 지혜가 더 밝은 사람 등으로 비중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정서나 지혜나 의지가 조화롭게 갖추고 있으면 모르거니와 우리 중생들은 조화롭지가 않습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지혜나 의지나 정서가 다 조화롭고 완벽한 것입니다.

   

우리 불성은 원래 원만무결한 것이지만 중생은 숙업(宿業) 따라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정서나 의지로 참구하는 쪽보다 화두(話頭)를 의단(疑團)으로 참구(參究)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고, 확신을 위주하고 의단을 싫어하는 사람은 화두 없이 묵조(默照)하는 것도 좋겠지요. 어느 쪽으로 가나 다 성불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지요. 자기 근기에 맞으면 더 빠르고 쉬울 것입니다. 또는 정서가 수승한 사람들은 이것저것 별로 따질 필요가 없이 다만 근본 성품인 생명의 실상을 인격적으로 그리워하는 흠모심을 냅니다. 원래 부처인지라 어떤 누구나가 다 부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나 다 한결같이 염불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화두하는 분도 기도를 할 때는 아미타불을 외우고 관세음 보살을 부르고 영가천도 할 때는 또 부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리 마음의 뿌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뿌리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바로 자연의 도리며 몇 만생을 윤회해도 필경에는 부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이 몸뚱이를 비롯한 모든 집착 때문에 공부를 잘못하는 것이지, 일체 분별망상이 없을 때는 바로 선정(禪定)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인들 말씀에 무슨 공부 방법이든 ‘득정(得正)하면 가야(可也)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행법에 있어서 주문을 외우든 화두를 참구하든 묵조하든 염불하든 득정하면 가야라, 바른 도리 바른 원리를 얻으면 좋다는 말입니다. 꼭 염불해야만 좋고 꼭 묵조해야만 좋은 것이 아니라 어느 행법을 취하든지 간에 그 본분사, 본래면목 자리, 진여불성자리를 안 놓치는 것을 득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바른 도리를 얻지 못하면 꼭 화두만 든다고 선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꼭 묵조만 한다고 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는 본체를 안 여읜, 본체에 걸맞는 공부가 참다운 공부요 참다운 선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인간들이 합리적으로 잘 생각을 못하니까 맨 처음에 화두공안을 내세운 도인들이 필요에 의해서 시설한 것이지만 뒤에 사람들은 부질없는 분별시비를 합니다. 묵조도 ‘고인들의 어구(語句)나 기연(機緣)에 대해서 이것저것 희론(戱論) 곧, 부질없는 분별시비를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본래 부처인지라 적연이응(寂然而應)해서 가만히 잠자코 있으면은 저절로 맑아져서 부처가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그 당시에는 필요하니까 나왔던 것입니다.

   

대혜(大慧宗고 1089∼1163) 스님도 위대한 도인인데, 그냥 묵묵하니 고목(枯木)처럼 앉아서 꾸벅꾸벅 혼침에 떨어지니까 마땅히 무엇인가 참구를 해야 하겠기에 그래서, 화두선을 역설했고 그리고 선사들의 어구에 치우쳐서 따지고 부질없는 의심을 하니까 천동정각(天童正覺 ?∼1157) 스님이 묵조선을 창도했던 것입니다.

염불은 부처님 당시부터서 염불(念佛)ㆍ염법(念法)ㆍ염승(念僧)이라고 무슨 경전에나 다 나와 있고 원래,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또, 부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염불은 따지고 보면 내가 참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래부처가 부처를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선()이 됩니다.

   

그런데 깊은 고려 없이 염불은 하근기(下根機) 중생이 하는 것이라고 하면 문제가 큽니다.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천념(千念)을 헤아리면서 애쓰고 몇 십년 동안 염불한 분도 어느 스님네가 “염불은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화두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해버리면 염불을 그만두고서 억지로 화두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시간 낭비인 동시에 병통이 생기기 쉽습니다. 근세에 수월(水月音觀 1855∼1928) 스님은 일자 무식인데도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로 깨달은 분 아닙니까? 모두가 다 부처라 생각하고서 노력하면 되는 것이지 섣부른 졸도(拙度)법문은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공안선, 묵조선, 염불선 이런 수행법에 부질없이 시야비야 하는 것이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는 데서 저는 이와 같이 새삼스럽게 역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3장 수증(修證)과 공덕(功德)  

제1절 참선(參禪) 

 

4. 선()의 자세(姿勢)



一相三昧 ―― (如猫捕鼠)┐

                                          │ 眞如三昧

一行三昧 ―― (如鷄抱卵)┘


   

정과 혜를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선()이나 삼매(三昧)나 같은 뜻으로 삼매를 총괄해서 백팔삼매(百八三昧)라고도 하고 또 포괄적으로 말할 때는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제도 대체로 살펴본 바와 같이 달마 대사의 리입사행(理入四行)도 따지고 보면 일상삼매 일행삼매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달마의 리입(理入)즉, 본래 일체만유와 불성(佛性)이 둘이 아니라는 원리에 들어가는 것은 지혜(智慧)고 일상삼매입니다. 천지 우주 모두를 하나의 부처로 보는 것이 이른바 일상삼매입니다.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천차만별로 두두물물 구분하면 일상(一相)이 못되겠지요. 오직 부처라는 불성 일상(一相)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상()은 우리가 상을 내는 상이 아니라 우주를 하나의 성품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지혜적이고 이른바 관() 이 됩니다.

   

어느 행법에 치우친 사람들은 관법(觀法)이 외도라고 합니다. 저는 관법만 좋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만 어느 분은 저더러 애는 퍽 쓰는데 관법 외도한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관은 바로 부처님 반야를 관조(觀照)한다는 말입니다. 또는 관심론 허두에 이른바 ‘관심일법이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찰하는 법이 모든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화두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원리적으로는 관()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는 잘 알고 해야 하는 것이지 잘 모르면서 피상적으로 비판해서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런 것은 하나의 구업(口業)이 되겠지요.

   

따라서 일상삼매(一相三昧)는 혜적(慧的)이고 관적(觀的)이란 말입니다. 관도 그냥 땅을 보고 하늘을 보는 그런 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성(自性)을 보는 관이요 혜도 보통 분별지혜가 아니라 반야지혜(般若智慧)입니다.

육조단경 부촉품에 일상삼매 일행삼매가 있고 4조 도신(道信) 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가 나와 있습니다. 또는 5조 말씀에도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불경이나 조사어록이나 공부하는 방법이 다 정()과 혜()로 포괄이 됩니다.

   

혜()를 삼매분상에서 말할 때에 일상삼매인 것이고 정()은 일행삼매입니다. 일행삼매는 일상삼매라는 혜경계를 놓치지 않고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지속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정과 혜가 쌍수(雙修) 곧, 아울러 닦아야만이 정혜균등(定慧均等)으로서 가지런히 조화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거니, 부처 가운데는 정과 혜가 구족원만(具足圓滿)이거니, 우리 공부도 그렇게 상응(相應) 조화해 나가야 계합(契合)이 빠른 것입니다.


삼매가 발득(發得)이 못되는 것이 정혜불균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칠각지(七覺支) 법문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공부가 지금 정과 혜가 균등히 조화가 되는 것인가? 조화가 된다면 혼침(<心昏>沈)도 도거(掉擧)도 점차로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이러한 자세를 여묘포서(如描捕鼠)라,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찰나도 한눈 팔지 않고, 눈도 깜짝 않고서 쥐만 노려보는 것처럼 화두를 참구할 때나 염불할 때나 눈도 깜짝 않고서, 마음이 한눈 팔지 않고 그 자리만 생각하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튼 마음이 없이 그 자리만 관조(觀照)하고 참구하는 것을 여묘포서라고 조사어록에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계포란(如鷄抱卵)이라,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한다는 뜻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어서 부화시킬 때는 21일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21이나 7이나 굉장히 심심미묘한 수치(數値)인 것입니다. 21일 동안에 계란이 부화되는데 닭이 경망해서 계란을 품고 있다가 며칠 안되어서 풀떡 일어나 버리면 되겠습니까? 따스한 온기로 훈습을 시켜서 적당한 온도가 되면 계란의 생명이 차츰 무르익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줄탁동시(줄啄同時)라, 그 안에서 생명이 발육이 되어 곧 나가야겠다고 미묘한 신호를 보내면 동시에 어미닭이 껍질을 쪼읍니다. 시기가 딱 맞아서 병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어미 닭이 쉬임없이 계속 품고 있었기에 되는 것입니다.

   

참선 좀 하다가는 한 해나 했다고 해서 ‘내가 무던히 했는데’ 그리고서 기분이 좀 좋으면 그만 둔다든가 또는 마음이 약간 열려서 몸도 마음도 공중에 뜨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이것이 깨달음인가보다고 훌쩍 자리를 떠나고 ‘그대 공부가 아직 멀었다’고 충고해도 선방을 떠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행삼매가 못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남전보원(甫泉普願 748∼834) 선사도 30년 동안 산에서 안 나온 선지식입니다. 달마 대사도, 물론 교화를 위해서지만 소림굴에서 9년간 있었습니다. 일행삼매를 진득하니 못하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 삼명육통(三明六通)하는 분들이 거의 안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출가사문은 한사코 정해탈(定解脫) 곧, 선정해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야 재주가 있고 구변 좋고 경 많이 외우고 위풍이 늠름하면 충분히 도인으로 대접 받을 수도 있겠지만, 선정해탈(禪定解脫)은 오랫동안 삼매에 들어앉아야 되는 것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듯이 진득하니 오랫동안 앉아야 합니다. 우리 참선 수행자들 정말로 명심을 하여야 합니다. 선방에서 공부하다가 방선(放禪)죽비 치면 나와서 잔소리나 하고, 그러면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공부가 익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방선 해서 일어날 때도 안상(安詳)이라, 우리 수좌나 부처님 거동은 안상이라, 조용하고 점잖하고 사뿐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본체에다 머무르고 있는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도 하마 그 마음이 흩어질새라 소중하니 가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보임(保任)입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익어져서 병아리가 나오듯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자성(自性)을 깨닫는 이른바 생사 대사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우리 번뇌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지금 닦아나가는 우리 진지한 수행자들은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번뇌가 얼마나 지겹고 무거운가 말입니다.

 

 제3장 수증(修證)과 공덕(功德)  

제2절 염불(念佛)

1. 염불(念佛)의 의의(意義)



念者人人現前一念也 佛者人人本覺之眞性也 現前一念 覺悟本覺眞性 卽是可謂 上根人念佛也 是與佛不二 與佛不離之行也

-智度論



다음에는 염불(念佛)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공부가 익어져서 한 고비를 넘어서면 염불이고 화두고 다 초월해버립니다. 그러나 화두나 염불이나 묵조나 모두가 다 한 고비를 넘어서기 전에 습인(習忍)을 익혀서 마음이 딱 자성(自性) 곧, 불성(佛性) 한자리에 머물기 전에 하는 것이지 익은 사람들한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부질없는 시비논쟁은 말아야 합니다.

   

염불이라 할 때의 염()이란, 사람 사람마다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을 염이라 하고 불()은 사람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깨달은 근본 성품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 아는 소식 아닙니까, 염불 공부란 우리 눈앞에 좋다 궂다 시비분별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우리 본각(本覺)의 참 성품을 각오(覺悟)하는 것이요 이것이 곧 참다운 염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재확인하는 공부입니다. 생각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부처도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본각진성(本覺眞性)인데 생각생각에 부처를 여의지 않고서 염()하는 것이 참다운 상근인(上根人)의 염불인 것입니다.

이러한 염불은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부처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를 떠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업장 때문에 자꾸만 떠나버리니까 우리가 떠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부처임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또는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다 부처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도 부처요 좋아하는 사람도 부처라고 깨달으면 미워도 미운 사람에 집착하지 않고 좋아도 좋아하는 사람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한테나 남한테나 이런 도리를 역설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제3장 수증(修證)과 공덕(功德) 

제2절 염불(念佛)

2. 염불(念佛)의 방법(方法)



1. 稱名念佛

2. 觀像念佛

3. 觀想念佛

4. 實相念佛法身非有非空中道實相妙心임을 觀照하는 念佛


   

염불에도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 염불이라고 하면 부처의 이름, 명호를 외우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고 또는 부처의 상호 곧 32상(三十二相)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원만덕상을 관찰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그림을 보면 기분이 좋듯이 부처님의 상호만 보아도 우리 마음에 우러러 숭앙이 되고 한결 안심이 되고 아늑한 평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또 관상염불(觀想念佛)이 있습니다. 음은 똑같습니다만 앞의 것은 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상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공덕(慈悲功德)이라든가 훤히 빛나는 지혜광명(智慧光明) 등 부처님의 공덕을 상상하는 염불입니다.

   

그 다음은 실상염불(實相念佛)입니다. 이것은 현상적인 가유(假有)나 허무에 집착하는 무()를 다 떠나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이른바 법신(法身)자리를 생각하는 염불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자리를 생각하는 실상염불이 참다운 본질적인 염불입니다. 이른바 법의 실상, 내 인간 생명의 실상, 우주 생명의 실상, 이것을 우리가 관찰하는 것입니다. 관찰은 분명히 뚫어지게 안 보이니까 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생각만 해도 관()이라는 뜻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부처의 법신(法身)은 있지도 않고 또는 공()하지도 않은 중도실상의 생명의 광명을 관조하는 염불이 곧 실상염불입니다.

   

이런 데서 우리가 의심을 품는 문제는 부처님의 명호에 대해서입니다. 우리 스님네나 재가 불자들 가운데 ‘어떤 부처를 염해야 할 것인가?’ 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분이 있습니다. 지장경(地藏經)을 보면 지장 보살을 염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되어 있고 아미타경(阿彌陀經)을 보면 아미타불을 한번만 잘 염해도 극락세계에 간다고 되어 있고 또 관음경(觀音經)을 보면 욕심 많을 때나 마음이 괴로울 때나 또는 무엇이 안될 때나 좋은 사람 만나고 싶을 때나 모두가 관세음보살을 염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佛子)들은 ‘뭘 염해야 좋을 것인가?’ 또는 ‘다 한꺼번에 염해야 할 것인가?’ 하고 마음에 갈등을 갖습니다.

그런데 가령, 지장 보살님을 위주해서 염하면 관세음 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보다도 지장 보살을 염하는 것이 훨씬 공덕이 많다는 생각을 하고 염할 때는 사실은 공덕을 크게 감하는 것입니다. 참답게 지장 보살을 염하는 것이 못됩니다. 또는 관세음보살님을 염한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 염불은 별로 공덕이 없고 관세음 보살을 염하는 것이 가장 수승하다고 생각할 때도 참다운 공덕이 못되고 부처님 법에 여법한 염불도 못됩니다. 아미타불을 염할 때도 같은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법은 무장무애(無障無碍)하고 평등일미(平等一味)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라는 평등일미 자리에는 높고 낮은 우열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명호(名號)나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 주여!’ 하고 기독교식으로 한 명호만 했으면 될 것인데 무슨 필요로 복잡하니 많은 부처님의 명호가 필요 있을 것인가? 하고 의단을 품기가 쉽습니다. 이런 때는 부처님의 불성공덕(佛性功德)을 생각해야 됩니다. 불성공덕은 무한 공덕입니다. 불가설(不可說)이라, 어떻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쪽으로도 무한하고 또는 지혜로운 쪽으로도 무한하고 또는 지구 덩어리가 베풀어주는 은혜 공덕으로 보더라도 무한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처와 보살 명호는 이른바 생신(生身) 보살이 아니라 법신(法身) 보살 명호로, 모두가 다 부처 공덕을 상징한 것입니다. 무장무애한 무량공덕을 자비로운 쪽으로는 관세음(觀世音) 보살이고 지혜로운 쪽으로는 문수(文殊) 보살, 대세지(大勢至) 보살이고 또는 원력(願力)쪽으로는 보현(普賢)보살이고 또는 죽어서 가는 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쪽에서는 지장(地藏) 보살, 인로왕(引路王) 보살이고 또는 병고를 다스리고 구제하는 쪽에서는 약사여래(藥師如來), 약왕(藥王)보살입니다. 또는 법신 부처님이 하늘에 있는 달이나 별이나 그런 광명체로 화현(化現)하는 쪽에서는 이른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요, 일광(日光) 보살, 월광(月光) 보살이고 또 북두칠성 등 28수(宿) 그런 쪽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칠성(七星)입니다. 예경할 때에 보십시오. 산신(山神)을 외울 때도 처음에 만덕고승(萬德高僧) 성개한적(性皆閑寂)이라는 말을 합니다. 역시 부처님 가르침 따라 성중(聖衆)을 먼저 내놓고서 나중에 산신이 나와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청정무비한 무량공덕이 산에 들어가 있으면 산신인 것이고 물에 들어가 있으면 용왕(龍王)인 것이고 우리 지구에 들어있으면 지장 보살이요 또 별에 들어 있으면 치성광 여래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올바른 해석이 되겠지요. 따라서 어떠한 때에 중생의 근기 따라서 산신 불공을 하더라도 우리 중생이 볼 때에 산인 것이지 바로 본다면 부처님 화신(化身) 인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할 때도 산은 그냥 산이 아니요, 물도 그냥 마시는 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바로 불성(佛性)의 산으로, 불성의 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해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경을 보면 다 그런 도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본다면 지장 보살을 부르나 또는 무엇을 외우나 간에 ‘부처님의 화신으로, 부처님의 공덕으로 우리 중생을 다스리는, 자비로 구제하는 공덕 명호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우리 마음이 부처님한테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지장 보살이나 무엇을 염해도 공부에 조금도 손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사 아미타불이라, 모두를 포괄적으로 법보화(法報化) 삼신(三身)을 말할 때는 아미타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사 아미타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통 염불할 때는 아미타불을 많이 하는 셈입니다만 어떤 명호를 부른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을 하는 것이나 다 똑같은 공덕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3장 수증(修證)과 공덕(功德)  

제2절 염불(念佛)

 

3. 염불삼매(念佛三昧)



念佛三昧因果二種

   ① 一念으로 相好하거나 또는 一心으로 法身實相

      거나 혹은 一心으로 佛名하는 行法因行念佛三昧라 한다,

   ② 因行念佛三昧成熱되면 마음이 禪定에 들어가고 혹은 十方佛

      이 現前하며 혹은 法身實相契合되는데 이를 果成念佛三昧

      라 한다.


   

이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염불삼매에는 인() 과()의 두 경계가 있습니다.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는 관상(觀像)염불을 하거나 또는 일심으로 법신의 실상을 관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을 하거나 혹은 일심으로 부처의 명호를 외우는 행법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명(佛名)을 외운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법신자리를 믿어야 참다운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닦아갈 때 염불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견성하기 전에, 인행의 염불삼매가 성숙되면 마음이 선정에 들어가서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의 실상 이른바 진여불성에 계합되는데 이것을 과성(果成)의 염불삼매라 합니다. 따라서 염불로도 견성(見性)하고 천수경으로도 견성하고 마음에서 업장만 녹아지면 다 견성합니다.

   

그러나, ‘시방불이 현전(現前)한다, 부처가 앞에 나온다’는 말이 표현될 때는 또 의단을 품습니다. 부처란 상()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나올 것인가? 부처가 상이 있으면 참다운 부처가 못되겠지요. 우리는 이런 때도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상이 없지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아무 것도 없는 허무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이 허무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의 화신으로 6도중생(六道衆生)이 나오지 않습니까? 본래 실상은 색즉공(色卽空)이라, 본래의 몸뚱이 이대로 바로 공이지만 이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따라서 부처님도 역시 필요한 때는 바로 부처님 상호를 우주에 가득 차게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보면 부처님의 몸은 크기가 육십만억 나유타신(那由陀身)이라 합니다. 나유타는 헤아릴 수 없는 무량수입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는 큰 몸이 부처님 몸이라는 말입니다. 그 뜻은 바로 시방여래 시법계신(十方如來 是法界身)이라, 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경을 볼 때도 경의 말에 너무나 집착을 말고서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는 작게는 바늘구멍 가운데에도 부처님은 들어가신다고 말합니다. 바늘구멍 가운데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세계란 것은 그냥 공간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무량의 공덕을 갖춘, 상이 없는 세계가 바로 허공입니다. 보통으로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허공이라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허공은 그것이 아닙니다. 무량공덕을 갖춘, 상을 떠난 무량무변의 경계를 바로 허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모공중에 무량불찰이 광연안립(一毛空中 無量佛刹 曠然安立)이라, 조그마한 터럭 가운데도 한없는 부처님 세계를 다 원만히 갖추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작고 적은 것으로 부처님 법은 비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장무애란 것은 작고 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자리, 무량공덕을 갖춘 그 생명자리가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에 가득 차있는 그것은 작다 크다를 초월해 있습니다. 따라서 티끌 가운데나 삼천대천 세계 어디에나,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품(性品)으로는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성품으로는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 무진 애를 쓰고 공부는 하는데 그럴만한 인연이 성숙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앞이 확 열려서 부처님이 분명히 앞에 나오십니다. 더러는 부처님 상호가 방안에 가득 찰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영상(影像)에 집착하고 맙니다. 그러면 공부가 그냥 악화가 됩니다.

실상무상(實相無相)이라, 실상은 상이 없습니다. 또한 일정한 고유한 상이 없다고 해서 허무가 아니라 만상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모신다거나 그런 분들은 경험을 더러 하실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금색으로 훤히 빛나는 부처님도 보이는 것이고 어떤 때는 밤인데도 훤히 밝아서 방안이 다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때에도 집착하면 안됩니다. 부처가 그뿐만 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우선 닦아나가는 수행법인 인행(因行) 공부를 하다가 좀 하기 싫거나 빨리 성취하고 싶고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오래 못 닦습니다. 오랫동안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독지옥(孤獨地獄)이라, 우리가 외로운 것도 지옥같이 괴로운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니이체(Nietzsche) 말대로 ‘고독은 그대 고향이다. 고독한 가운데 그대의 고향을 가라’ 이런 말은 우리한테 감동을 줍니다. 고독을 못 참으면 삼매에 어떻게 들겠습니까? 고독을 못 참으면 무슨 필요로 승려가 되겠습니까? 도반(道伴)이 좋기는 좋으나 너무나 밀착하면 공부에 방해가 됩니다. 그 사람 때문에 관심을 두어야 되겠지요. 대중이 좋으나 공부가 익은 다음에는 또 방해가 됩니다. 달마의 9년 면벽을 생각해 보십시요. 석존의 6년 고행상을 상기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독했을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는 짐짓코 우리가 선택해서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인간이니까 습기 때문에 고독한 때는 친한 사람도 만나고 싶겠지요. 그러나 냉철하게 자기를 추스려야 합니다.

 

 제3장 수증(修證)과 공덕(功德)  

제2절 염불(念佛)

4. 제경론(諸經論)의 염불법문(念佛法門)



여러 경론(經論)에 있는 염불법문을 추려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念佛三昧 能除種種 煩惱 及 先世罪

- 智度論七 ­


용수보살 대지도론(智度論)에는 ‘염불삼매는 능히 종종의 번뇌나 또 숙세 죄까지도 다 제거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만 그러겠습니까? 화두나 다른 공부도 다 그렇습니다.


我本因地 以念佛心 入無生忍

- 楞嚴經五-


또 능엄경(楞嚴經)에는 ‘부처님께서 인행시(因行時)에, 부처를 생각하는 염불심으로 무생법문에 들어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전에 부처가 없을 것인데 어떻게 부처를 염할 것인가? 부처란 것이 무엇입니까? 부처란 것은 자기 본심, 본각(本覺)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모양으로 상이 있는 부처를 생각하면은 의미가 안 통합니다.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가 바로 부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본래면목 자리를 생각함으로 해서 우리가 무생법인(無生法忍) 곧, 불생불멸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말씀입니다.


念佛三昧 則爲總攝 一切諸法 是故非聲聞緣覺二乘境界

- 念佛三昧經七-


염불삼매경(念佛三昧經)에서는 ‘염불삼매는 곧 모든 수행법을 갖추고 있다’ 고 합니다. 부처의 모양만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못되겠습니다만 부처를 본래면목이라고 생각할 때는 다른 묵조선이나 또는 화두선이나 또는 간경(看經)이나 모든 수행법이 다 염불삼매에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간경자 혜안통투(看經者慧眼通透)라, 딴은 우리가 마음만 순수하면 경을 보면서도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고로 성문이나 연각이나 이승(二乘)경계가 아니다’ 우리가 염불을 성문이라든가 낮은 근기만 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以專意 念佛因緣 隨順得生 他方佛土

- 起信論 -


기신론(起信論)에는 ‘우리 마음을 오롯이 해서 염불하는 것으로 인연이 되어 부처의 세계에 태어난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꼭 무슨 부처 이름이 아니더라도, 부처를 생각하는, 자성을 생각하는 염불을 오랫동안 할 때에 이것이 인()이 되고 연()이 되어서 극락세계, 이른바 깨닫는 세계, 모든 것이 다 광명으로 보이는 광명의 세계에 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如是罪人 以罪業故 應墮地獄 命終之時 地獄猛火 一時俱至 遇善知識 以大慈悲 爲說 阿彌陀佛 十力威德 不可思譏 聞法歡喜 此人已除八十億劫 生死之罪 地獄猛火 化爲淸凉風 吹諸天華 華上皆有 化佛菩薩 迎接此人

-觀無量壽經 -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업장을 많이 지은 죄인들은 과거세나 금생에 지은 업장에 대한 과보로써 지옥에 응당 떨어질 것인데, 수명이 다할 적에 지옥의 맹렬한 불이 일시에 그 사람에게 달려 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장선화라는 분은 염불로 인해서 왕생한 처사입니다만 이분은 도한(屠漢)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도살장에서 도살하는 사람입니다. 하여튼 멋도 모르고 그저 돈벌기 좋아하고 고기 잘 먹고 그러니까 그런 짓을 했겠지요. 개 한 마리 죽이면 한 마리 죽인 대로 개미 한 마리 죽이면 한 마리 죽인 대로 그것이 업장으로 남는 것입니다. 부처와 둘이 아니고 생명이 같기 때문에 말입니다. 개미란 놈이 자꾸만 방에 와서 성가시게 한다고 차별을 두고 죽인다면 그것이 업으로 남는 것입니다.

돼지나 소나 유정물(有情物)인지라 죽을 때 꼭 원망을 품습니다. 소나 돼지가 죽을 때의 비창(悲愴)한 소리를 들어 보십시요. 저는 인공(人共人民共和國) 때 사람이 죽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몽둥이로 때려서 산 사람이 그대로 죽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 때에 원망스런 마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생명이 원래 둘이 아닌 것인데 가사, 죽는 사람들이나 죽임을 당하는 돼지나 소나 ‘당신을 원망한다. 기어코 보복한다’ 고 말은 안 할지라도 원한이 죽이는 그 사람한테 다 배이는 것입니다. 또는 그런 원혼들이 틀림없이 보복하겠다는 뜻을 갖는 것입니다. 원망에 사무치는데 보복을 안 하겠습니까?


따라서, 임명종시(臨命終時)에 그런 많은 업장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간지옥(無間地獄)의 맹화불입니다. 그런 불들이 일시에 달려들어서 괴롭히는 것입니다. 일반 병상에서 돌아가시는 분들 모습도 보십시오. 저같이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은 다른 이의 임종도 많이 봤습니다만, 공부를 많이 하고 음식도 함부로 안 먹고 그런 분들은 깨끗이 돌아가십니다. 그렇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도 보약 많이 먹고 자기 몸만 생각하고 업장을 많이 지은 분들은 굉장히 괴로워합니다. 이른바 단말마(斷末魔)의 고통이라, 그냥 손으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은 어떻게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업장 때문에 그럽니다.


그런데 하물며 도한인 장선화 그 분은 그렇게 많은 소나 돼지를 죽였으니 그 업장으로 얼마나 괴로워했겠습니까? 저승사자가 분명히 와서 묶어갈려고 합니다. 원한들의 상징으로 그와 같이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옥맹화(地獄猛火)가 일시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행히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대자비로 그를 위해서 아미타불의 무량공덕에 대한 설법을 듣습니다. ‘아미타불은 우주에 가득차 있는 생명 자체이고 그대의 본래면목 자체다. 또 아미타불은 모든 공덕을 다 갖추고 있어서 다만 지성으로 한번만 생각하고 한번만 이름을 외운다 하더라도 그대가 평소에 지은 바 죄업장이 다 없어진다. 지옥도 원래가 없는 것이고 바로만 보고 바로 생각하면 모두가 다 극락세계다’ 선지식인지라 이렇게 설법을 하셨겠지요. 그를 위해서 설한 아미타불 십력위덕(十力威德) 부사의(不思議) 법문을 듣고 환희심을 냅니다.


불량한 사람 나쁜 사람이라도 죽을 때는 보통은 다 선량해 집니다. 저는 업장으로 유치장에 가서 3개월 동안 살았습니다마는 그때 사형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승려니까 저한테 위로를 받으려고 말을 많이 걸어옵니다. 

사형수들 같이 순진한 사람들을 저는 별로 못 보았습니다. 저런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을 죽였을까? 원래 부처니까 순진할 수밖에는 없겠지요.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았으니까 자기에 대한 체념을 해버리기에 죽을 때는 어떠한 사람이나 다 선량해집니다. 그러기에 고인들이 ‘새도 죽을 때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지저귀고 악한 사람도 선량한 말을 한다’ 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 장선화도 그렇게 고통을 받겠지마는 선지식을 만나 법문을 듣고는 환희심으로 그냥 선량한 마음이 발로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심으로 염불을 하는데 나무아미타불 열 마디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지옥불이 꺼짐과 동시에 맑고 시원하고 환희 충만한 청량미(淸凉味)를 느끼고 극락에 왕생하였습니다.

   

극락 가운데 상품상생(上品上生)은 공부를 많이 해서 번뇌의 습기가 녹은 사람들만 갑니다. 그러나 금생에 성자(聖者)가 아니더라도 부처님 공부도 다소 하고 참선도 하고 염불하고 그런 분이 죽는 순간에 부처님 가르침을 100% 의심없이 믿고 죽는다면 죽는 순간의 그 마음으로 상품극락을 갈 수가 있습니다. 상품극락은 바로 화장세계(華藏世界)입니다.

살아서는 불량한 사람들이나 일반 사람들이나 잘못 믿기도 하겠지마는 죽을 때는 만사가 허무해서 선량한 마음이 발동이 되니까 잘 믿게 되는 것입니다. 또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부사의 법문을 듣고서 환희심을 내는 사람들은 이미 팔십억겁(八十億劫) 생사죄를 멸하는 것입니다. 과거 숙세 무량세를 상징적으로 팔십억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량세부터 지어 내려온 죄를 죽을 때에 선량한 마음을 내어 부처님을 생각하고 염불을 함으로써 제거하는 것입니다. 본래 마음이 자취가 없는 것인지라 죄도 또한 본래 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맹화가 바뀌어 맑고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하늘에선 꽃비가 내립니다. 꽃비 내린다는 말씀을 어제도 드렸습니다만 분명히 꽃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때묻은 눈으로는 안 보이더라도 천안(天眼)만 통하면 틀림없이 꽃비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금바라화(金波羅華-utpala) 꽃을 들고서 대중 앞에 보였습니다. 영축염화시상기(靈鷲拈花示上機)라, 영축산에서 부처님께서 금바라화 꽃을 척 들으시고 대중들 앞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대중들은 금바라화 꽃이 보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볼 수 있는 상대적인 금색광명이나 또는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중생의 때묻은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緣起)를 말한 경은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현재는 위경(僞經)이라 함)으로서 대범천왕이 부처님께 금색바라화를 바치고 법문을 청하자 부처님께서 그 꽃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꽃은 사람이 드린 것이 아니라 범천왕이 드린 천상의 꽃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때에는 우리 인간의 눈에는 안 보여도 범천왕이나 또는 제석천왕이나 천인(天人)들이 와서 법을 청하여 듣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화엄경 설할 때에는 말로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 중생들은 듣지 못했어도 제석천왕이나 범천왕이나 또는 법신 보살은 다 듣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천상의 꽃, 바로 진리의 꽃인 금바라화를 들었지만 대중들은 부처님의 손만 보이기에 아무런 영문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삼명육통을 한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훤히 알아보고 방긋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한테 있는 열반묘심(涅槃妙心)을 그대에게 전한다’ 고 했다는 게송이 있지 않습니까 마는 아무튼 천상꽃이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적습니까? 우리는 구경지(究竟地)까지 깨닫지 못하는 한에는 절대로 안다는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믿어야 참다운 믿음입니다.

보조어록(普照語錄)은 그것을 굉장히 역설했습니다. 과불공덕이 분호불수(果佛功德 分豪不殊)라, 부처가 성취한 공덕이 우리 본래 공덕과 더불어 눈꼽만치도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믿어야 비로소 참다운 신앙입니다.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하늘 꽃이 흩날리는데 그 꽃 위에는 부처님과 보살들이 계시면서 저승에 들어가는 사람을 마중한다’고 하셨습니다. 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이런 상징적인 것을 사실로 느껴야 합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미신이겠지, 우리에게 방편으로 말씀하셨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나이 많은 불자님들은 특히 돌아갈 길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질 것입니다마는 정말로 바르게 죽으면 꼭 불보살님이 마중을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중래영(聖衆來迎)이라 합니다. 성중이 우리를 마중한다는 말입니다.

욕계의 하늘도 있고 색계천상도 있고 삼계 28천(三界二十八天)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다 마음 가운데 있겠지’ 합니다만 물론 마음의 화현이기는 하나 3계 28천이 가상(假相)으로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心懷戀慕 渴仰於佛 卽種善根

- 法華經壽量品 -


‘심회연모 갈앙어불하면 즉종선근(心懷戀慕 渴仰於佛 卽種善根)이라’ 저는 말씀드리다가 자주 이 법문을 되풀이 많이 합니다. 마음으로 부처님에 대해서 연모(戀慕)하고 갈앙(渴仰)을 하면 바로 선근을 심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우리 자성(自性)을 그리워하게 하기 위해서 극락세계, 화장세계의 찬란한 장엄도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을 하는데 있어서 결정신심(決定信心)이 없으면 갈앙심(渴仰心)이 안 나옵니다. 따라서 결정신심을 두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결정신심을 내는데 있어서 경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심불상속고로 부득결정신(心不相續故 不得決定信)이라’ 가사, 화두나 염불이나 공부가 상속되지 않기 때문에 결정적인, 꼭 옳다는 확신을 못 갖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공부나 신()만 있고 해()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지만 설사 해가 있더라도 신이 없으면 그냥 퇴타(退墮)하고 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나 특히 온 생명을 바치는 신앙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 상속되어야 결정신심이 나오고 참선을 하든 또는 염불을 하든 기도를 하든 간에 결정신심을 얻어야 갈앙심이 생깁니다.


종교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순명(順命)이라, 신앙 대상에 대해서 순수하니 환희심으로 따르는 마음이 없으면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순명이 있을 때는 필연적으로 정결(淨潔)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명에 순수히 따라야 하겠지요. 따르면 응당 정결 신심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삼세제불이 모두 다 검소한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 생활이 청빈(淸貧)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빈은 우리 수행자의 자랑이요 무기입니다. 우리가 신앙 대상에 대한 순명이 없고 또는 정결하지 못하고 청빈한 생활을 안한다면 출가사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순명과 정결과 청빈에서 우리의 사명감과 자랑과 긍지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 있는 심회연모(心懷戀慕)라, 우리 마음으로 부처에 대해서 연모하고 갈앙하는 그 마음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팔상록(八相錄)에 나오는 법문입니다만, 부처님 당시 파사익왕(波斯匿王 prasenajit)의 딸이 추녀개용(醜女改容)이라, 아주 못 생겼는데 얼굴이 바꿔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세존에 대한 사무친 갈앙심 때문에 부처님의 광명을 스스로 감견(感見)했던 것입니다.

신앙에 사무치면 불성광명을 우리가 느끼고 현전에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 광명은 무량광명이기 때문에 또 천지 우주가 바로 순수의 적광(寂光), 청정한 광명[淨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만 청정해지면 꼭 광명을 보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 마음이 일념(一念)이 되는 공부가 쉽지 않지만, 간절히 그리워하고 연모하는 그 마음은 우리 마음을 한결 빨리 통일이 되게 하고 비약시킵니다. 따라서 마땅히 부처님께 대해서 연모하고 갈앙하는 마음은 우리 인간 존재가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것이지만 번뇌에 가리어 버리면 참 어렵습니다. 마음이 맑아질수록 점점 더 갈앙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매에 들어갈 때는 몸도 마음도 정화가 되면 된만치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마음도 훨씬 더 부드러워지고 또는 점차로 더 선심(善心)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사람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하며 풀 포기 하나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비스런 마음이 됩니다. 이른바 동체대비(同體大悲)에 차츰 가까워지는 셈이지요.

마땅히 우리 마음으로 부처님한테 대해서, 우리 자성한테 대해서 연모 갈앙한다면 바로 우리 선근을 더 증장시키고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갈앙하는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불경(佛經)에서 비유담 하나를 더 들겠습니다. 과거 저사(底沙 Tisya)부처님 회상에서 석가(釋迦)행자와 미륵(彌勒)행자가 도반이 되어 수행정진할 때였습니다. 그때 저사부처님이 두 수행자를 관찰하니 석가행자보다 미륵행자가 근기는 더 수승하나 장차 제도할 인연있는 국토 중생들은 석가가 제도할 국토 중생들이 훨씬 수승하므로 기왕이면 석가를 빨리 성취시켜서 인연이 성숙한 국토 중생을 제도하고자 작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상대각(無上大覺)을 성취한 부처님이 과거세에 점수(漸修)한 수행과정을 헤아려보면 3아승지겁(三阿僧祗劫)의 무량 세월 동안 닦으신 다음 마지막에 32상(三十二相)을 얻기 위해서 또다시 백겁(百劫) 동안 닦았다고 합니다.

원만덕상(圓滿德相)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과거 전생의 무량한 선근(善根) 과보인 것입니다. 온 몸이 금색으로 생긴 것이나 머리카락이 나계상(螺계相)인 야청색으로 되어서 빛나는 것이나 또는 미간에 백호상(白毫相)이 오른쪽으로 돌면서 삼천대천 세계를 비추게 된다는 것이나 원만상인 32상의 공덕은 무량한 세월인 백겁 동안 수없이 자기 몸뚱이를 희생하는 이른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무아행(無我行)을 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행을 할수록 얼굴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저사부처님이 석가행자에게 산에 올라갈 테니 따라오라고 하시고 신족통(神足通)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석가행자는 그런 신통이 없는지라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산에 올라가서 보니 저사불(底沙佛)이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부터서 6조 혜능 스님까지 삽삼(삽三)조사 가운데서 한 6할 정도는 열반 드실 때 화광삼매에 들어서 가셨습니다. 스스로 자기 가슴에서 삼매의 불을 내서 자기 몸을 다비(茶毘)를 했습니다.

저사불이 화광삼매에 들어 계시는데 그 광명이 너무나 장엄 찬란하여 석가행자는 황홀한 동경과 환희용약하는 마음이 사무쳐 넋을 잃고 저사부처님을 우러러 뵈올 뿐이었습니다.

   

경을 보면 ‘첨앙존안(瞻仰尊顔)에 목불잠사(目不暫捨)라’ 저사불의 존안을 우러러 뵈오면서 잠깐 동안도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발을 옮기려다 한 발을 든 채로 7주야(七晝夜) 동안 밤낮으로 찬탄을 했습니다.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은 아시는 바와 같이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天上天下無如佛 十方世界亦無比 世間所有我盡見 一切無有如佛者)라 하는 게송입니다. 이 게송은 그때 나온 것이라 합니다.

교족칠일(翹足七日)이라, 이레 동안 한 발을 들고서 부처님을 찬탄한 공덕으로 석가행자는 미륵행자 보다도 9겁(九劫)을 초월해서 성불했습니다.


저는 맨 처음에는 참 기이하기도 하다고 생각한 것인데 나중에 깊이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사무치게 찬탄한 공덕으로 9겁을 초월했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심심미묘한 뜻이 포함되었음을 통감하였습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님 무량공덕을 100% 믿을 때는 우리 마음이 비약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점을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위법망구의 무아사신(無我捨身)의 공덕은 다생(多生)의 업장을 순식간에 소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법화경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본지수적(本地垂迹)이라, 석가모니 부처님은 금세에 화신불(化身佛)로 잠시간 모습을 나투신 것이지 본지불(本地佛), 본래불은 바로 무량수불이라 합니다. 무량수(無量壽)는 문자 그대로 생명이 한도 끝도 없는 영생불(永生佛)이라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을 지혜 쪽으로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하고 시간적으로는 영생하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명호는 이와 같이 공덕 따라서 이름이 다르게 됩니다.

법화경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에 부처님께서 ‘어느 중생이 부처님의 수명이 한정이 없고 공덕이 무량 무변하다는 말씀을 듣고서 능히 신해(信解)하는 생각을 내면 그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십니다. 우리 신앙은 꼭 신해가 필요합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믿기만 하고 해석이 없으면 맹목적인 맹신(盲信)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고인들 말씀에도 ‘신이무해(信而無解)하면 단조무명(但助無明)이요, 믿고서 해가 없으면 무명만 더 조장할 뿐이요, 해이무신(解而無信)하면 즉타사견(卽墮邪見)이라, 해만 있고서 믿음이 없으면 사견에 떨어지기 쉽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其有衆生 聞佛壽命長遠 如是能生一念信解 所得功德 無有限量 善男子 善女人 爲阿뇩多羅三먁三菩提 故於八十萬億那由他劫 行五波羅蜜 除般若波羅蜜 以是功德 比前功德 萬分千分 萬千億分 不及其一.

-法華經 分別功德品-


‘이와 같이 부처님의 수명이 무량하고 공덕도 한량없다는 것을 신해하는 공덕은 한량이 없느니라. 선남자 선여인아, 보리 즉 무상대도를 위해서 무량세월인 8십만억 나유타겁을 두고서 반야 바라밀을 제외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 5바라밀을 닦는 공덕은 앞의 공덕에 비교한다면 만분 천분 만천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따라서,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따르고 의지하는 공덕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若人疾欲至 不退轉者 應以恭敬心 執持佛名號 以信方便 念佛易行 疾至阿惟越地(不退轉地)

- 十住毘婆沙論 -


그 다음에는 용수 보살(龍樹菩薩) 십주비파사론(十住毘婆沙論)에 있는 법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빨리 불퇴전에 이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불퇴위까지 올라가야 안심하고 공부를 할 수가 있겠지요. 불성을 못 깨닫고 미처 증명을 못하면 즉 견성을 못한 분상에서는 항시 퇴전될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퇴가 안될려면 현전(現前)에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갖춘 불성과 계합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사람이 빨리 이러한 불퇴전지(不退轉地)에 오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공경심으로써 부처님의 명호를 굳게 지녀야 한다’ 불명호(佛名號)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그런 명호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성불(自性佛)을 믿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이 믿는 방편으로써 하기 쉬운 염불행을 하라.’ 사실 염불이 하기는 가장 쉽습니다. 나도 부처요, 너도 부처요, 원래 우리가 가고자 하는 것도 부처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쉽기는 쉽지요. 쉬우니까 이행문(易行門)이라, 염불의 쉬운 행의 그 믿는 방편으로써 할 때, 아유월지(阿惟越地阿毘跋致 avinivartaniya) 곧 불퇴전지에 빨리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명심하고 또 그리워하고 흠모하고 이런 믿음의 염불하는 방편으로 간다고 할 때는 빨리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自性彌陀何處在 時時念念不須忘 一朝忽得情塵落 倒用橫拈常不離

- 懶翁大師 -


나옹(懶翁慧勤) 스님 어록에 ‘자성미타하처재요, 우리 자성의 미타가 어느 곳에 있는고? 시시염념불수망이니, 시시때때로 잊지 말고서 간절히 생각할지니, 일조홀득정진락이면, 하루 아침에 문득 번뇌망상이 다 떨어지며는, 도용횡념상불리 거꾸로 쓰나 또는 누워 잡으나 떠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번뇌망상이 미처 안 떨어질 때는 그냥 애쓰고 화두를 들려하고 염불하려 하겠지만 한번 망념만 떨어져버리면 거꾸로 쓰나 옆으로 누웠으나 언제 어느 경우에나 조금도 자성경계 본래면목자리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옹화상 염불 게송 가운데 끝에 있는 구절입니다.


阿彌陀佛淨妙法身 遍在一切衆生心地 故云心佛衆生 是三無差別 亦云心卽佛 佛卽心 心外無佛 佛外無心 如是眞實念佛 十二時中四威儀內 以阿彌陀佛名字 帖在心頭眼前 心眼佛名 打成一片 心心相續 念念不昧 久久成功則 忽爾之間 心念斷絶 阿彌陀眞體 卓爾現前 方信舊來不動名爲佛

- 太古大師 -


그 다음은 태고 보우(太古普愚) 선사 게송입니다. ‘아미타불의 청정미묘한 법신이 두루 일체중생의 마음자리에 본래 갖추어 있기 때문에 심불중생이 시삼무차별(心佛衆生 是三無差別)이라, 마음이나 부처나 중생이나 세 가지가 차별이 본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바로 마음이라. 마음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밖에 마음이 없도다. 이와 같이 진실한 염불을 할 때는 밤낮으로 행주좌와에 아미타불의 명호를 심두(心頭)에나 안전(眼前)에 붙여 두어라.’


맨 처음에는 관상적으로나 실상염불(實相念佛)을 하기가 쉽지 않은 셈 아닙니까? 역시 이름을 부르면 부르기가 쉽고 또 우리가 가장 공경하고 그리워하는 이름이니까 계속 불러도 별로 싫증이 안 나겠지요. 아미타불 명호를 우리 마음에나 눈앞에 여의지 않고 딱 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안불명(心眼佛名)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고 눈으로 실지로 광명무량한 세계를 볼려고 계속 공부해 나갈 때 마음이나 눈이나 부처의 명호가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따로따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공부가 익어지면 이것이고 저것이고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을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고 합니다. 어떤 공부를 하든지 우리 마음이 타성일편이 되어서 나와 우주가 하나로 되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그 자리를 애써 놓지 않고 상속적으로 생각 생각에 조금도 어두워지지 않게 오래오래 공을 이루면 문득 찰나 동안에 우리 범부심이 끊어진다. 그래서 아미타불 진체(眞體)인 우주에 변만한 진여불성이 활연히 앞에 나투나니 이것이 바로 불생불멸한 생명의 실상인 부처임을 믿을지니라’ 이런 뜻입니다.


眞如念佛 念佛功極 日日時時 於一切處 阿彌陀佛 淨妙眞體 冥現其前 臨命終時 迎接九品蓮臺 上品往生

- 普照著 念佛要門 -


또 보조(普照知納) 국사의 염불요문(念佛要門)에는 ‘진여염불(眞如念佛)’이라, 진여염불은 앞에서도 든 바와 같이 대상적으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바로 미타이고 우주가 바로 부처라는 염불이 진여염불입니다.

‘진여염불의 공이 사무치면 나날이 때때로 어디에나 아미타불의 청정미묘한 진체(眞體)가 불현듯 그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임종할 때는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성중(聖衆)들이 마중하여 구품연대(九品蓮臺)의 상품상생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하였습니다.

극락세계는 깨달은 경계에서 본다면 한점 티끌도 없고 오염이 없고 만공덕을 갖춘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 아니겠습니까? 바로 보면 사바세계가 곧 적광토(寂光土)라, 이 세계가 이대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리워서 미처 수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若念佛者 當知此人是人中 分陀利華 觀音勢至 爲其勝友

- 觀無量壽經 -


‘만약 부처를 생각하는 자는 즉, 본래면목을 안 떠나는 자는 마땅히 알지니 이런 사람은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인 분다리화(分陀利華 Pundarika)라 따라서,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그를 가장 좋은 벗으로 삼는다.’

관음 대세지도 인간적인 때묻은 안목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습이 필요하면 언제나 나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청정하고 정말로 순수할 때는 수시수처(隨時隨處)에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에 갖추어 있는 본래 자비의 정기(精氣), 그 생명 성령(聖靈)이 관음이요 지혜의 정기 곧 그 생명 성령이 문수요, 또는 대세지 입니다.


염불은 지혜와 자비를 온전히 다 갖추어 있는 부처, 곧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니까 마땅히 관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비록 염불행자가 범부라 하더라도 가장 좋은 벗으로 삼는 것입니다. 관음은 자비를 의미하고 대세지는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에 일체 보살을 다 대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염불행자는 일체 천만 보살이 그를 좋은 벗으로 생각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諸佛如來 是法界身 遍入一切 衆生心想中 是故 汝等 心想佛時 是心卽是 三十二相 八十隨形好 是心作佛 是心是佛

- 觀無量壽經 -


제불여래는 바로 법계(法界)가 몸입니다. 법계란 삼천대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불여래는 바로 법계가 몸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두루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대승적인 차원에서는 사람만이 중생이 아니라, 유정 무정 모두가 다 중생입니다. 사바세계의 두두물물이 다 중생이니까 또는 그런 중생으로 모든 법계가 구성되었으므로 부처님이 모든 중생의 마음 가운데 원래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우리 속에 들어 계신다는 의미는 모든 존재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어디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입니다.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불성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이 중생한테 들어 계신다는 것은 바로 온전히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개한테 불성이 있다고 할 때도 개의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머리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온전히 전체가 바로 부처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삼십이상 필십종호라’ 이것도 꼭 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의미로 생각하면 무량공덕을 말한 것입니다.

부처님을 한번 생각하면 바로 그 생각이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생각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공덕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마음으로 부처를 짓고 또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달마(達磨 Bodhidharma ?∼528) 스님께서 중국 광주에 오실 때에 이미 150살(또는 130세)이 되어서 오셨다고 기록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던히 오랫동안 살으셨겠지요. 그리고 9년 면벽 했으니까 몇 년이겠습니까? 지금이나 옛날이나 범부들은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도 하고 또 자기 아는 것보다도 조금 다르게 얘기하면 그것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굉장히 거부반응을 느낍니다.

그때에도 달마 스님께서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문자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겠지마는 문자의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오직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마음만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사실 마음만 깨달으면 거기에 모두가 다 들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 스님들이 아주 시기심을 많이 냈습니다. 그것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논장(論藏)들을 보면 그 당시 가장 훌륭하다는 광통율사(光統律師) 또는 인도에서 들어오신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aci 508년 中國에 옴) 그분들이 법집(法執)하여 시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야 그랬으리요마는 그 밑에 있는 분들이 독살을 할려고 여섯 번이나 했습니다. 얼마나 박해가 많았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 어른께서 중국에 들어오신 딴 뜻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직 자기 생명을 모조리 바친다 하더라도 중생제도 외에는 다른 뜻이 없는 분인데, 그런 분을 독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섯번째까지도 독이 안 받는 것입니다. 벌써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통달한 분들은 ‘인연이 다 됐으니까 내가 가야겠다’ 해서 가는 것이지 독살하려고 해서 갈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섯 번째까지는 독을 먹고 바위 위에다 대변을 누면 어떻게 독하든지 바위가 다 빠개져 버립니다. 이렇게 독을 다 안 받았지만 여섯번째는 ‘중국에 와서 내가 할 일은 다 하고 이제 인연이 다 됐다’ 하시고는 독을 그대로 받고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웅이산(熊耳山)에다 입관을 해서 묻었습니다.

그 뒤에 위()나라의 송운(松雲)이란 사람이 사신으로 인도까지 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총령(蔥嶺), 지금의 파미르고원을 넘어오는데 그때 수염이 털털하고 늙수그레한 한 스님이 주장자를 어깨에다 척 걸쳤는데 집세기 한 짝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없고 반갑기도 해서 수인사를 하고 물으니까 달마라고 합니다.

송운이 위나라로 돌아와서 말을 들어 보니까 달마 스님이 이미 돌아가셔서 관속에 넣어 매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도 사신이라는 위신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해서 달마 스님 묘소를 파 내놓고 보니까 관속에 시체는 어디로 간 곳이 없고 집세기 한짝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달마 스님은 부활하여서 갔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또 달마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도 원래는 죽음이 없는 것이니까 사실은 다 부활입니다. 그네들이 저승세계를 잘 모르니까 예수의 부활설만 말씀을 했겠지요.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는 정각(淨覺) 스님이 저술한 책입니다. 5조 스님의 제자 가운데 십대 제자가 있었는데 혜능(慧能) 대사, 신수(神秀) 대사, 현색(玄賾) 대사, 지선(智詵) 대사 등 십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인 현색 대사의 제자가 정각 스님입니다.

정각 스님이 저술한 능가사자기가 전에는 미처 발견 안되었다가 돈황(敦煌)에서 발굴된 것은 1907년 경입니다. 돈황에서 발굴되어 나온 문서 가운데는 과거에 재래적으로 불교에서 모르는 것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가사, 육조 혜능 스님하고 신수 대사가 마치 경쟁하는 것같이 단경에도 기록이 되어 있고 그렇게 전수가 되어온 것인데 돈황에서 나온 여러가지 문서를 본다면 신수 스님도 위대한 도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실은 응당 도인이 되겠지요. 5조 홍인(弘忍) 대사 칠백(七百) 제자의 상수(上首) 제자인데 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종전에는 신수는 점수(漸修)나 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육조 혜능 스님만 돈오돈수니까 위대하다고 칭송해 왔습니다만 돈황문서가 발굴된 다음에는 모두가 공평스럽게 바로잡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4조 도신(道信) 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도 그 전에는 몰랐습니다. 그 전에는 아무런 문헌이 없었는데 돈황에서 발굴한 능가사자기 가운데 이 법문이 들어 있습니다. 그 뒤에사 지극히 귀중하다고 훤전(喧傳)해서 여러 가지로 참고하고 주석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4조 도신대사의 법문 말씀입니다.


念佛卽是念心 求心卽是求佛 所以者何 識無形 佛無相貌 若也知此道理 卽是安心 常憶念佛 攀緣不起則 泯然無相 平等不二 入此位中 憶佛心謝 更不須徵 卽看此等 卽是如來 眞實法性身 亦名正法 亦名佛性 亦名諸法實相 實際 亦名淨土 亦名菩提 金剛三昧 本覺等 亦名涅槃界 般若等 名雖無量 皆同一體也


‘염불이란 바로 자기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며 마음을 구하는 것은 바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식()이란 형체가 없고 부처란 무슨 모양이나 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도리를 안다면 바로 안심이라’


부처나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있다고 할 때는 마음이 걸리겠지마는 마음이란 원래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도리를 안다고 할 때는 마음이 편안스럽다는 말입니다.

가사, 나한테 죄가 많이 있다고 생각할 때도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겠지요. 승찬(僧璨 ?∼606) 스님이 2조 혜가 스님한테 올 때 풍병에 찌들어서 ‘저한테는 죄가 많아서 이렇습니다’ 하고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니까 혜가 대사가 ‘죄가 그대 마음의 어디에 있는가?’ 하였습니다. 마음이 원래 없거니 무슨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죄를 어디서 끌어낼 터무니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원래 없고 죄상도 본래 없으나 자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단계에서는 죄를 범해 놓으면 인과를 받습니다. 가사, 우리가 금생에 남의 것을 훔치기도 하고 남을 죽이기도 하고 또는 다른 동물도 함부로 하면서, 범부 분상에서 이치로만 ‘상()이란 본래 없지가 않는가?’ 하는 정도로는 과보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견성을 해서 자성불(自性佛)을 본 다음에야 죄상의 상을 여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마음도 원래 자취가 없고 마음이나 부처나 원래 형상이 없다는 도리를 알 때는 벌써 이것이 바로 안심이라는 말입니다.


달마 때부터 6조까지 주로 안심법문(安心法門)으로 모두가 다 마음을 안심케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서도 먼저 안심이 되어야 하고 재가 불자님들한테 법문을 할 때도 안심을 시켜야 합니다. 안심을 시켜놓고서 철저히 도덕적인 계율을 지키라고 해야지, 안심도 없이 억지로 지키라고 하면 재미도 없고 또 구속감을 느낍니다.

또다시 도신 대사 말씀에 ‘항시 부처를 깊이 사무치게 생각하고 반연(攀緣)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상()이 소멸되어 상이 없고 평등하여 둘이 아니다. 이런 자리에 들어간다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모든 상을 다 버리게 되는데 새삼스럽게 애쓰고 구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본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진실한 법성신(法性身)이요 또한 정법(正法)이고, 불성(佛性), 제법실상(諸法實相), 실제(實際), 보리(菩提), 금강삼매(金剛三昧), 본각(本覺), 열반계(涅槃界), 또는 반야(般若)라고 한다. 이름은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모두가 다 하나의 몸이니라’ 하였습니다.

4조 도신 대사 말씀은 권위있는 말씀인 것이고 귀중한 말씀이기 때문에 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我此法要 依楞伽經 諸佛心 第一 又依 文殊說般若經 一行三昧 卽念佛心是佛 妄心是凡夫 若善男子 善女人 欲入一行三昧 當先聞般若波羅蜜 如說修學 然後 能入一行三昧 不退不壞 無碍無相 善男子 善女人 欲入一行三昧 應處空閑 捨諸亂意 不取相貌 繫心一佛 專稱名號 隨佛方所 端身正向 能於一佛 念念相續 卽是念中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 何以故 念一佛功德 無量無邊 亦與無量諸佛功德 無二不思議

- 道信 付法藏 四祖 入道安心要方便法門(楞伽師資記) -


‘나의 이러한 법요는 능가경에 제불심(諸佛心) 제일(第一)에 의지하고 또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지했다.’

저는 육조단경의 부촉품에 있는 ‘그대들이 만약 부처님의 일체종지를 얻으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지니라’ 는 경구를 보고 또 4조가 말씀한 입도안심요방편 법문을 볼 때에 다 비슷한 법문이라서 ‘역시 위대한 분들은 생각이 비슷한 것이 당연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습니다.

‘즉 염불심시불(卽念佛心是佛)이요. 망념시범부(妄念是凡夫)라’ 원래 부처인지라 부처를 염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요 반대로 상을 내는 망념일 때는 범부라는 말입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일행삼매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을 들어야 한다.’ 누누히 말씀 드렸습니다만 반야가 있으면 불자이고 반야가 없으면 불자가 못됩니다. 반야가 없으면 결국은 속물입니다. 반야가 있어야 참선이 되는 것이고 반야가 없으면 참선이 못됩니다. 반야는 무엇인가? 반야는 바로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또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지혜입니다.


‘그 반야바라밀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배운 연후에야 능히 일행삼매에 들 수가 있다. 그래야 후퇴도 물러남도 없고 또는 파괴함도 없고 거리낌도 없고 또는 상이 없다. 선남자 선여인들이 일행삼매를 정작 공부하려고 할 때는 잡요한 시끄러운 인연이 없는 한가한 곳에서 모든 산란스러운 생각을 다 버리고 상을 취하지 않고 마음을 부처의 경계에 매어 두어야 한다.’


부처의 경계는 무슨 경계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이 부처의 경계를 잡기가 좀 곤란스럽습니다. 부처란 것은 ‘본래면목 자리가 아닌가’ 이렇게는 알지만 우리 마음을 부처의 경계에다 맨다고 할 때에는 어떻게 맬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부처란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일체 존재의 생명인 동시에 상이 아니지만 인연이 닿으면 또 현상계에 상을 나투는 것입니다. 즉 유()도 아니고 가()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를 감견(感見)을 했으면 좋은데, 미처 감득(感得)을 못한 사람들은 부처에다 마음을 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때라도 ‘나라는 이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 우주에 있는 모든 두두물물이 다 비어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비어 있는 무량무변한 자리에 무량공덕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매는 것이 실상관(實相觀)입니다.


이리하여 ‘전칭명호(專稱名號)라.’ 우리가 초심일 때는 역시 뭐라 해도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이름을 자꾸만 외우고 하나만 생각해야 마음이 모아집니다. 공부가 익어져서 한 고비를 넘은 사람들은 외울 것도 없지만 처음에는 하나로만 외워야 마음이 계속되어 통일이 잘 되는 것이지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는 잡수(雜修)라, 잡스럽게 할 때에는 마음이 통일이 안됩니다.

한 부처한테 마음을 내고 오로지 명호를 외우고 또 기왕이면 부처의 상호를 상상하면 좋겠지요. 상호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무량공덕을 갖춘 상호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러를 때마다 그만치 흐트러진 마음이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계신 방소(方所)에 따라서 단정히 바로 향해서 앉고 한 부처님에 대해서 생각생각에 생각이 끊어지지 않을 때에는 즉시 그 생각 가운데 능히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제불을 다 본다. 한 부처의 무량무변한 공덕을 생각하면 바로 무량한 부처님 공덕을 다 감견(感見)하여 제불공덕과 둘이 아닌 부사의한 공덕을 성취한다’는 도신 선사 입도안심요방편법문에 있는 염불찬탄의 법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