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신비와 예언 ♧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 & 이태리 움브리아 주의 중세마을 아시시의 성당

화엄행 2011. 9. 25. 13:59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

 

 

  

 

 

St Francis in Ecstasy-BELLINI, Giovanni

1480-85.Oil on panel, 120 x 137 cm.Frick Collection, New York

 

10월 4일

 성 프란치스코,부제, 세 수도회의 창설자, 대축일

 

1181(l182?)년 아씨시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청년 시절의 가벼운 생활에서 마음을 돌이켜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민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뜻을 같이 하는 형제들이 모여와 작은형제회가 시작되었다.

클라라 관상 수녀회와 재속회를 세우고 이교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했다. 성인으로부터 새로이 발견된 복음적 생활양식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수도 공동체로 발전되었다.

성인이 시작한 수도생활의 이 새로운 형태는 신앙적 기초 위에서 세상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교회에 가져왔고,

당시 교회의 교계제도를 거부하면서가지 성행하던 청빈운동에 바른길을 제시하였다.

1224년 라베르나 산에서 관상하던 중 주님의 거룩한 오상을 받아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그리스도 처럼되었다.

1226년 10월 3일 아씨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2 년 후인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유해는 성 프란치스코.대성전에 있다.

 

 

 

 

St. Francis in Ecstasy-CARAVAGGIO.

c.1595. Oil on canvas,92,5 x 128,4 cm.Wadsworth Atheneum, Hartford, Connecticut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를 놀라게 하고 교회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작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을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모든 것을 기쁘게,아무런 제한이나 한 조각의 자존심 따위도 없이 실천함으로써 모든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시시의 부요했던 포목상 베드로 벨라도네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1182-1226년)는

그의 어머니 비카 부인이 요한으로 세례(9월 26일 성루피노성당에서 세례자요한)를 받게 했으나,

프랑스를 사랑하던 부친이 프랑스인이란 뜻으로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시대는 화폐 경제체제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에 귀족과 시민자치단체가 대립하고 전쟁과 사회 변혁의 시대적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운, 가치 혼란의 시대였다.

프란치스코는 명랑한 성격으로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던 중,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투옥되기도 했고, 석방된 후로는 오랜동안 중병에 시달리다가 회복한 이후로 점차 딴 사람으로 변하였다.

 

젊은 프란치스코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자신의 경박한 생활이 허무함을 깨달았다.

기도는 힘든일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우도록 프란치스코를 이끌어 갔고

결국 길에서 만난 나병 환자를 말에서 뛰어내려 끌어안을 정도로 그를 변화시켰다.

가난한 이들 중에 그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대상은 나병환자들이었고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결국 하느님께 대한 경외가 마음속에서 일어나 예전에는 쓰다고 느껴졌던 것이 영혼과 몸의 단맛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기도 중에 들은 것에 완전히 복종한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프란치스코야,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네가 육신 안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시작했을 때 지금 너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씁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피하던 것들 그 자체가 크나큰 감미로움과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는 스폴레토에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고 성다미아노에서 "내 교회를 고치라"는 말씀을 들었으며, 또한 나병환자와의 극적인 입맞춤을 통하여 지난날의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후 그는 성 다미아노에서 복음을 글자 그대로 살기로 결심했으며, 부친의 유산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보속 생활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1205년말, 나병환자를 만나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해지던 해에, 황폐한 성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나의 집은 거의 다 무너져 가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하게 가난뱅이가 되었고 비천한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나의 집을 지어라."는 말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허물어져 가는 성 다미아 노성당과 천사들의 성마리아성당(포르치운쿨라)의 벽돌을 한 장씩 쌓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가난뱅이로 있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1206년 4월, 그는 자기 아버지(그의 아버지는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물건을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앞에서 옷까지 벗어 버림으로써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였으며 마침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아주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1208년 2월 24일, 포르치운쿨라성당에서 성 마티아 축일 미사에 참례하던 중

복음말씀(마태오 10,9-10)을 가난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고 그 말씀을 생활양식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 너희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도 가지지 말며

여행 가방도 신도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극도의 청빈생활을 시작함으로써 프란치스코회가 첫 발을 내딛게 했으며, 그는 수도원을 세울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자 이 수도원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적 절차를 받아들였다.

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회칙’생활양식’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며 엄격하다하여 인가를 거절하였으나, 그날 밤 꿈에 쓰러져가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작은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것을 보고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교회를 쇄신 시킬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회칙과 회를 구두로 승인하였다.

그들의 본부는 아씨시 교외 산따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에 있는 뽀르찌웅꼴라 성당이었고,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 부터 이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면서 형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하였고, 극도의 가난을 살았고,움막에서 살았으며,

일을 하고 애긍을 청했으며,나병환자들을 간호하는데 헌신하였고,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며, 교계의 진출을 사양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의 교회에 대한 헌신과 충성은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여러 가지 개혁 운동이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고 있던 당시에는 특히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는 기도에 완전히 헌신하는 생활과 복음을 설교하는 활동적인 생활 모두를 병행하다가 결국 복음 설교에 더 중점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언제든지 할 수 있을 때에는 고독한 기도 생활로 되돌아갔다.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인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제자들을 훌륭한 생활 양식으로 교육시켰고, 이 생활 양식을 사도좌가 인준해 주었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관구가 형성되고, 잉글랜드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1212년에 그는 성녀 글라라와 함께 2회 "가난한 부인회" 일명 ’글라라회’를 창설하였으며

글라라는 가난을 잘 이해하였고 프란치스칸활동의 특별한 의미와 풍부한 통찰력을 가졌다.

그녀의 성소는 하느님과의 신비적이니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 생활을 만들었다.

1213년 모로코 선교를 시도하였고, 시리아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지만

파선과 질병으로 모두 좌절되었으며, 모슬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그들을 찾아갈 적이 있을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에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렉크 알 카멜을 만나 십자군 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대화를 시도 했으나,포로가 된 사실이 있으며 술탄을 회개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 뒤 1220년 초에 예루살렘 순례를 하고 시리아까지 선교활동을 벌였는데 이로써 예루살렘 성지에 작은형제회가 살기 시작하였다.

 

 

1215년 11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도미니코성인을 만났을 것으로 본다.

이때 호노리오3세로 부터 ’포르치운쿨라 전대사’를 허락받았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오직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가난했던 것이다.

그는 자연을 사랑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완전히 따르기 위해서 철저한 고행을 했다.

그는 말년에 ’형제인 육신’에게 사과했다.

 

  

 

그의 가난은 겸손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 겸손은 그가 선하신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의 마음의 길잡이이며 예수의 애덕에서 요약되고 성체 성사에서 완전히 표현되는 복음적 생활을 사는 것이었다.

 

1220년 총회에서 프란치스꼬는 장상직을 스스로 사임한다.

이것 또한 역사에 길이 남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부재 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

우고리노 추기경의 도움으로 규칙을 확정짓고, 1223년11월 29일 승인을 받았다

회칙을 인준받은 뒤, 그레치오에서 구유를 꾸며 성탄절 밤을 성대하게 지냈고,

이를 계기로 성탄절에 구유를 꾸미는 관습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입었으니,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五傷이다.

오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었고,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2년 후에는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성인은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울 정도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셨기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십자가의 고통까지도 원하셨다.

 

성프란치스꼬의 오상은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닮도록 자신을 완전히 변화 시키는 의미를 지니며 그리스도의 비하(Kenosis),

즉 가난의 구체적 표지이며,성인의 일생을 그적으로 요약하는 사건인것이다.

성인께서는 오상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해방 체험을 하게 되었다.

 

 

 

말년에 성인의 원의에 따라 형제들이 프란치스꼬를 형제회의 요람이라 할 뽀르찌운꿀라로 모셔갔다.

바로 여기에서 프란치스꼬는 그가 내용을 보충한 마지막 유언을 받아쓰게 했고,

그 본문은 타인의 문학적 수정 없이 프란치스꼬의 언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 유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회개와 복음적 소명에 대해 주님께 드리는 뜨거운 감사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 친히 홀로 형제회를 창설하셨다는 확인이었다.

그는 초창기의 완전한 가난, 단순, 겸손을 회상하며 특히 육체 노동에 대한 기쁨을 회상하였고,

모든 형제들이 어떤 일에든 종사하고 일할 줄 모르는 형제는 일을 배우기를 원하였다.

애긍은 일이 충분한 보수를 받지 못할 때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죽음에 임박하여 간곡하고 전에 없이 엄하게 당부들을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또 하나의 회칙을 추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끝맺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치고 그는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읽어 달라 하여 들은 뒤, 천사들의 인도로 형제들을 떠나 주님께로 옮겨갔다.

프란치스꼬는 1226년 10월 3일 저녁에 뽀르찌운꿀라에서 임종했다. 2년 뒤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프란치스꼬의 유해는 성 지오르지오(Giorgio)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30년에 지금의 프란치스꼬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성인이 세운 재속 프란치스꼬회원도 다른 재속회원에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어, 그분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한다.

 

 

 

1224년 라 베르나에서 오상을 받으신후 고통 중에도

성 다미아노 성당의 움막에 거처하면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임종’자매인 죽음’을 맞을때에 그는 태양의 노래 마지막 부분을 계속 반복해서 말했다.

 

"오! 주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누이인 죽음이 다가왔나이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아시고,  1226년 10월 2일 최후의 만찬을 재현했다.

10월 3일 해질 무렵에, 맨바닥에 누워 시편 142편을 불러주기를 형제들에게 청했다.

죽음의 순간에 복음의 수난기를 읽어주도록 청하였다.

 

성인께서는 죽음의 순간까지 복음서를 곁에 두고자 했고,우리에게 "나의 아들인 여러분, 하느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당신들께 작별을 고하니 항상 그분 안에 머무르시오.

나는 이제 하느님께로 가며 당신들 모두를 그분의 사랑에 맡깁니다."라고 축복하여 주었다.

 

10월 4일 장례행렬이 아시시로 향하였고 다미아노성당에 잠시들러 글라라와 다른 자매들이 마지막으로 볼수있게 하였으며,그의 유해는 처음 그가 다녔고 글라라가 처음 성인의 설교를 들었던 성 지오르지오성당 (현재 성글라라성당)에 안치되었다가,1230년 5월 25일 성 프란치스코대성당 제단아래로 옮겨졌다.


 

성인은 우리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연민의 정이 불타올랐기에

그분에게는 오직 주님의 고통에 함께 하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이같은 열정이 오상을 받게 하었고,이로써 그리스도의 고통에 완전히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주적 형제애의 실현을 위해 형제적 순종,가난,작음의 덕성등, 성인께서 삶으로 증거해 주신 영성을 자신의 성화를 통하여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

이 영성을 구현 시키기 위해 각자의 삶의 처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성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노력해야한다.

 

1939년 성 프란치스코는 이태리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되었고,1980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임종 - 포르치운쿨라 성당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한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첼라노 제 2생애 196항).

 

첼라노는 또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 그리스도와 수난을 큰 소리로 외치고 슬퍼하며 울음을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기억하느라 길거리를 한 숨으로 채웠고, 어떤 위로도 마다하였다.

절친한 친구 하나를 만나 그에게 자기가 슬퍼하는 이유를 알리자, 이내 그의 친구도 비참한 마음이 들어 눈을 글썽였다.”(첼라노 2생애 11항).

1224년 9월 프란치스꼬는 라 베르나 산에서 오상(五傷)을 받았다.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상(像)이 된 그는, 몸이 몹시 불편했지만 여전히 이탈리아 중부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가는 곳마다 공경과 성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1226년 봄 그가 시에나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마지막 바람의 간곡한 당부를 받아쓰게 했다.

 

그는 모든 형제들이 그들 가운데서는 사랑을, 가난 부인에게는 충실을,

교회의 고위 장상들과 성직자들에게는 존경과 순종을 실천하라고 역설하며 그들을 축복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사건은  육화와 수난을 통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성 프란치스코에게 정확히 알려준 사건이며 동시에 성 프란치스코의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극치를 이룬 사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그리스도화를 가능케 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부님의 오상 사건에 대해서는 성 보나벤뚜라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세라핌의 모습을 띠고 그토록 은혜 가운데 자기를 배려해 준 방법에 대해서 대단히 기뻤으나,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그의 영혼을 동정심으로 가득찬 비애의 칼로 찔렀던 것이다.

그는 이 기적적인 환시를 보고는 놀라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고통은 세라핌의 영원 불멸하고도 영성적인 본성과는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환시가 사라지자 그것은 그의 마음을 열심히 불타오르게 하였으며 그의 몸에 기적적으로 그와 꼭 같은 것을 박아 놓았다.

그 때 거기서 그의 손과 발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환시에서 본 것과 똑같이 못 자국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손과 발은 중앙이 못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못의 머리부분은 손바닥과 발등에 나 있었고, 반면 못 끝 쪽은 반대편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못 머리 부분은 검고 둥글었으나 그 끝은 마치 망치로 박힌 듯이 길게 뒤로 휘어 있었다.

그 부분은 주위의 살보다 튀어나와 있었다.

그의 오른쪽 옆구리는 마치 창으로 꿰뚫린 것 같았으며 검푸른 상처가 찍혀 있었는데,

자주 피가 흘러나와 그의 수도복과 바지가 피에 물들었다.”

 

 

 

Legend of St Francis: 19. Stigmatization of St Francis.

1297-1300.Fresco, 270 x 230 cm.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십자가에 못박힌 세라핌을 닮은 모습의 환시(토마스 첼라노 전기 제1생애,제2부 3장)

 

 프란치스코가 자기의 영혼을 하늘에 되돌리기 2년 전, 그러니까 그가 알베르나 은둔소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환시 안에서, 여섯 날개를 가진 세라핌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 하나를 자기 위에서 보았다.

그 사람은 두 손을 뻗고 있었으며, 두 발은 모아진 채 십자가에 고착되어 있었다.

날개 둘은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고, 두 날개는 날으려는 듯이 펼쳐져 있었으며,

나머지 두 날개는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지존하신분의 복된 종은 이것을 보자 그만 감탄하였지만, 이 환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너그럽고 인자한 세라핌의 모습에 그는 무척이나 즐거웠고 기뻤다.

그 천사의 아름다움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천사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는 사실과, 그 찌르는 듯한 아픔이 차츰 프란치스코를 두려움으로 몰아갔다. 그러자 그는 일어섰다.

그는 이를테면 슬프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으며, 즐거움과 괴로움이 그 안에서 서로 교차하였다.

도대체 이 환시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의 영혼은 그 뜻을 알아내려고 노심초사하여 괴로와하기에까기 이르렀다.  

 

이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그 뜻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게 되었고,

그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환시가 성인의 가슴을 곤혹스럽게 만드는가 했더니,

그 못자국들이 성인의 손과 발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가 방금 전에 그의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에게서 본 그대로의 자국이었다.    

 

 그의 손과 발 한가운데가 못으로 뚫린 것 같았고, 못대가리가 손바닥과 발등에 나타났으며,

뾰족한 못끝은 반대편에 있었다.손의 자국들은 손바닥 쪽에서는 둥글었고, 손등 쪽에서는 길어져 있었다. 손등 위로 밀려 솟은 작은 살점들은 못의 끝모양을 하고 있었다.

발에도 마찬가지로 못자국이 찍혀 있었고, 그렇게 비슷하게 딴 살보다 솟아 있었다.

또한 오른쪽 옆구리는 마치 창에 찔린 듯하였고, 그 상처로 피가 자주 쏟아져 나와 그의 투니카와 바지를 여러 번 물들였다.  

프란치스코는 수도원 밖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상처를 숨기기에 온갖 노력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측근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그것을 매우 세심하게 숨겼기 때문에, 항상 곁에서 헌신적으로 따르는 대부분의 형제들조차도 오랫동안 이 상처에 대해서 알지 못했었다.  

 

지극히 높으신 종이자 친구인 그는 자신이 마치 가장 값진 보석으로 꾸며지듯 많고 큰 진주로써 치장이 되어 있고,

신묘한 방법으로 딴 모든 사람의 영광과 영예 위에 안배되어 있음을 보았지만,

그는 마음이 우쭐해지지 않았으며, 또한 헛된 영광을 찾아서 남을 기쁘게 해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호감이 그에게 주어진 은총을 조금이라도 앗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

 

 

Scenes from the Life of Saint Francis: 1. Stigmatization of Saint Francis - GIOTTO di Bondone

1325.Fresco, 390 x 370 cm. Bardi Chapel, Santa Croce, Florence

 

오상 축일은 성프란치스꼬가 천상 세계로 옮겨가기 2년전 라베르나에서 미카엘 축일(9월29일)을 준비하는 40일 기도를 하던 중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세라핌 환시를 보게 되었다. 

 

이 때 세라핌의 6 날개 가운데 십자가를 보았으며 환시가 사라진 뒤성인께서는 뜨거운 열정으로 불타는 마음과 더불어 주님의 다섯 군데의 수난 상처가 각인 되어 고통을 느꼈다.

 

성프란치스꼬의 오상은 수난 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닮도록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의미를 지니며 그리스도의 케노시스 즉 가난의 구체적 표지이며 성인의 일생을 극적으로 요약하는 사건인 것이다. 성프란치스꼬는 오상을 받음으로 완전한 해방 체험을 하게된다.

 

성인이 돌아가신 후 면밀한 조사를 거쳐 교회 법적으로 진실임이 선언되었고 1304년 베네딕도 11세가 축일로 제정하였으며14세기말부터 프란치스칸들은 특별한 전례로서 이 날을 기념하고 있다.

 

Stigmatization of St Francis - GIOTTO di Bondone

1300.Tempera on wood, 314 x 162 cm.Musee du Louvre, Paris

 

성 보나벤뚜라가 쓴 성프란치스꼬의 소전에서

 

거룩한 오상을 통하여 프란치스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녔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무렵의 어느 날 아침 그 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불같이 빛나는 여섯 날개를 가진 세라핌이 하늘 높은 데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천사는 빠른 날개 짓으로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꼬에게 가까이 와 공중에 떠 있었다.

이때 프란치스꼬는 그 천사가 날개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을 본 프란치스꼬는 매우 놀랐다. 그의 마음은 곧 환희와 비탄으로 가득 찼다.

그리스도의 이 은혜로운 출현이 그렇게 다정하고 경이로운 모습일 수가 없어서 말할 수 없이 강한 환희를 느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소름 끼치는 광경을 바라보고는 그만 영혼이 저미는 듯이 한없는 비탄과 연민을 느꼈다.

 

내밀하고도 다정한 대화 후 발현이 사라지자 그의 마음은 내적으로 세라핌과도 같이 활활 불타 올랐고,

그의 몸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각인 되었다.

즉시 그의 손과 발에 못 자국이 드러났다. 손등과 발등에는 못 머리가, 그리고 손바닥과 발바닥에는 못 끝을 볼 수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는 창에 찔린 것 같았고 그 주위의 살은 벌겋게 충혈 되었고 그 상처로부터는 거룩한 피가 흘러내렸다.

 

프란치스꼬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새겨진 그리스도의 상흔에 대한 이 새롭고 탄복할 기적은 전 세기에는 결코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렇게 그는 새사람으로 산을 내려왔다.

이제 그의 몸에는 예술가의 손으로 돌이나 나무에 새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손으로 새겨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이태리 움브리아 주의 중세마을 아시시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petraveler&logNo=116927670

 

.

이태리 아시시는 한 마디로, 성 프란체스코의 중세 마을이었다.

그가 태어났고, 그가 활동을 하였고, 그의 모든 것으로

지금 아시시는 전세계 수많은 순례자와 여행자들을 맞고 있었다.

 

우리는 사진 속처럼 어둑어둑해지려는 시간에,

아시시에 도착해서는 로카 마조레를 거쳐,

성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달려 갔다.

 

.

아시시 마을에서 성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올라오는 길~!

넓고 길게 늘어서 있는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로지아~!

로지아 뒤로 발 아래 토스카나의 전원 풍경이 아름다웠다.

 

.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상부 교회와 하부 교회로 나누어져 있었다.

여기는 상부 교회~!

 

.

13세기의 고딕 양식으로 천장을 높게 만들어 더욱 위엄을 살리고 있었다.

고색창연한 듯 보이는 성당 내부가 오히려 경건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상부 교회 앞 마당은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잔디밭 너머로 아름다운 아시시 마을이 펼쳐졌다.

왼쪽 산꼭대기에는 로카 마조레가 살짝 보였다.

 

.

성 프란체스코 사후, 그의 유해가 모셔진 이 성당은

13세기에 백 년에 걸쳐서 서서히 지어졌다.

성당의 장식은 당대 이태리 최고의 화가들로 채워졌다고 한다.

 

 

.

프란체스코 성당 로지아로 내려와 보니, 결혼사진 촬영을 나온 연인이 보였다.

 

 

 

.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도 서서히 불이 켜지고 있었다.

 

 

.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아시시의 대표 성당이면서,

중세 이후 지금까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기독교의 성지였다.

사진 아래 중앙이 하부교회의 입구~!

 

 

.

우리가 아시시에 도착한 시간이 늦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오전을 기약할 수 밖에~!

하부 교회 입구에 있는 장미 문양(?)의 창은

프란체스코 성당의 위용을 닮아 있었다..

 

 

.

이제  그 시간, 시간이 많이 저물어 여행자들은 대부분 성당을 떠났다.

상부 교회 앞에서 조용히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연인의 모습이 사뭇 경건해  보였다..

 

 

상부 교회 벽에 걸려 있는 조각

 

 

 

출처 ▶ http://cafe.daum.net/ggreen/EcT/1940?docid=nft|EcT|1940|20100728180726&q=%BC%BA%C7%C1%B6%F5%C3%BC%BD%BA%C4%DA%20%BE%C6%BD%C3%BD%C3

아시시, 성프란치스코의 숨결이 흐르는 평화의 땅

-San Francesco d'Assisi, La Terra di Pace-

 


1. 탄생과 청년기
2. 하느님의 부르심
3. 부르심에 대한 응답

4. 첫 동료들
5. 뽀르지운꿀라
6. 회칙의 인준

7. 프란치스코의 후계자와
    그의 마지막 생애


    프란치스꼬는 1181년 혹은1182년에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소도시 아씨시(Assisi)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을 하는 부유한 상인이었던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rdone)였고, 그의 어머니는 삐까였다. 후에 그는 프란치스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프랑스와 무역을 하였던 것과 프랑스를 좋아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그는 값비싼 옷을 즐겨 입었고 친구들과 함께 연회를 자주 갖기도 했으나 프란치스꼬는 "선천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고 성 보나벤뚜라는 전하고 있다.

      프란치스꼬는 당시의 보통 젊은이들과 같은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그에 따라 다른 젊은이들처럼 부유한 상인이나 기사가 되는 포부를 지녔다. 그러나 일단 그가 회개한 후부터, 그는 오직 자신의 완덕을 성취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을 완덕으로 이끄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1202년 뻬루지아와 아씨시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프란치스꼬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1년간 포로 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다른 포로들은 비통에 젖어 있었지만 프란치스꼬는 매우 평화로운 상태에 있었으므로 다른 이들을 놀라게 하였고 이들 중 여럿은 프란치스꼬와 대화를 나눈 후에 화해를 하고 평화를 되찾곤 하였다.
     


    포로에서 풀려나 아씨시로 돌아온 프란치스꼬는 다시 그전처럼 일상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병을 얻었다. 병중에서도 그는 가끔 산책을 하곤 했는데 그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자연 경관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이런 환상을 보게 된다. "그의 아버지의 가게 안에 수많은 전쟁 장비들이 있었고 한 여인이 그 곳에서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장비들은 너의 병사를 위한 것이고 약혼녀는 바로 너에게 예정되어 있다." 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또한 기사가 될 꿈을 꾸고 1205년에 뿔리아(Puglia) 원정군에 입대하는 길에서 스뽈레또를 지나가고 있을 때 또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주인과 종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 "물론 주인입니다"라고 그가 대답하자 다시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전에 없이 기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때 그의 나이 24세쯤이었다.

      그에게는 친구들이 권하는 세상의 축제들이 무의미해져 갔다. 점점 강해지는 다른 갈망으로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 기도와 탐구를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 그의 이런 갈망에 대답을 주시리라 생각한 그는 아씨시의 동굴을 산책하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과거의 죄를 통회하며 기도하였다. 아씨시로 말을 타고 돌아오던 중 우연히 나병 환자들을 만났는데, 본능적으로 나병 환자 곁을 피해가고 싶었지만 그는 곧바로 말에서 내려와 나병 환자를 포옹하고 자선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그들을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어느 날 프란치스꼬는 다미아노 성당 앞을 지나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 나무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프란치스꼬야,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여라." 그 말씀은 그리스도 교회를 말하는 것인데 프란치스꼬는 글자 그대로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곧바로 그는 그의 말과 장비들을 팔아 성당 수리 비용을 마련하여 주임 사제에게 봉헌했으나 그가 거부하였으므로 성당 창문 옆에다 돈을 놓고 떠나갔다.

      얼마 후 주임 사제와 성당 수리를 함께 하기로 협의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란치스꼬의 아버지는 매우 화가 나서 프란치스꼬의 행동의 부당성과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시 법원과 교회에 의뢰하는 바람에, 프란치스꼬는 만인들 앞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의 정당성과 앞으로의 활동을 천명해야 했다. 프란치스꼬는 아씨시 주교와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시오. 지금까지 나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그에게서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가족들과 이별을 하였고 주교는 그에게 망토를 건네주며 십자가를 걸어 주었다.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축일에 사도들의 파견에 관한 복음 말씀, 즉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마태 10,9∼12)를 듣다가 자신의 결정적인 성소, 즉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살아야")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유언 참조. 한다는 성소를 발견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이 말씀의 해석을 한 사제에게 부탁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금이나 은, 돈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 길을 떠날 때 식량자루도 돈지갑도 빵도 지팡이도 가져가서는 안 되며, 신발도 두 벌의 옷도 가져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고 하자, 이 설명을 들은 그는 하느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1첼라노 22). 프란치스꼬는 이 말씀을 가난과 복음 전파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 때부터 복음은 프란치스꼬의 생활 규칙이 되었으며 거룩한 복음에 따라 살기 시작했다.
     


     프란치스꼬는 이제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물질적인 성당 수리가 아닌 영적 차원의 교회의 쇄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활기차게 설교를 시작했다.

      바로 이 무렵에 프란치스꼬와 같은 생활을 하고자 하는 "첫 동료들"이 그에게 합세했으니, 이들은 뀐따발레의 베르나르도, 까따니아의 베드로, 아씨시의 에지디오 등이다. 곧이어 그와 동료들은 12명이나 되어 리보또르또(Rivotorto)에서 거친 움막 생활을 하였다. 성 프란치스꼬는 그의 동료 두 명과 함께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서 성 니꼴라오 성당의 미사에 갔다. 영성체 후 그들은 성서를 3번 펼쳤는데 그 내용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주신 말씀이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마태 19,21),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루가 9,3),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러한 말씀을 듣고 그는 "우리가 해야 될 일과 미래의 우리 형제들이 해야 될 일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여!" 하고 외쳤다
     


     프란치스꼬는 몸집이 작고 마음은 겸손한 작은 형제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작은 몫"(Portiuncula)을 차지하였으니, 세상에서 가진 것 없이는 그리스도께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떨어진 땅이 예로부터 뽀르찌운꿀라로 불리었으니, 이는 하느님의 예언적인 섭리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님 다음으로 모든 성인들의 화관이 될 만한 공로를 탁월한 겸덕으로 세우신 동정녀를 기리는 성당이 이 곳에 세워졌다. 이 성당에서 작은 형제회가 태동하였다. 견고한 기초 위에서 형제들의 수가 늘어갔고 형제회의 고귀한 건물이 솟아올랐다. 성인은 이 곳을 어디보다도 사랑하였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 곳을 특별한 경의(敬意)를 가지고 받들도록 명하였다. 그는 그 소유권을 다른 이에게 주고, 자기는 자기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그 사용권만을 가짐으로써, 이 곳이 형제회의 겸손과 극도의 가난의 표본으로 언제나 보존되기를 원하였다(2첼라노 18 참조).


      동료들의 수효가 증가함에 따라 프란치스꼬는 자기 자신이 더 이상 그들의 유일한 생활 규범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형제들의 생활 양식이 더 자세히 규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따라서 형제들이 실행해야 하는 "회칙"과 "생활"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회칙과 생활은 그다지 상세한 것이 아니었다. 프란치스꼬는 주님의 가르침과 삶을 보여주는 거룩한 복음에서 자신이 원하고 갈구하던 것을 찾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이 기본 원리를 자기 회칙의 핵심으로 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자신을 따르는 회개자들의 수효가 11명에 이르자, "생활 양식"(Forma Vitae)을 썼다. "원회칙"(Regula Primitiva)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이 회칙은 매우 짧고 단순하다. 1209년 교황으로부터 구두 인가를 받은 회칙을 첼라노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복되신 프란치스꼬는 주 하느님께서 매일 형제들의 수를 늘려 주시는 것을 보고 자신과 형제들을 위하여,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단순하게 몇 마디 말로 거룩한 복음의 말씀을 주로 인용하여 오로지 그가 갈망했던 완덕을 위해서 생활 양식과 회칙을 썼다. 그리고 다른 사항들은 거룩한 생활에 필요한 것들만 조금 삽입하였다"(1첼라노 32).
      그는 유언에서 "나는 주님 친히 계시해 주신 생활 양식을 몇 마디 말로 간단히 기록케 했고 교황 성하께서 나에게 확인해 주셨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 자신도 유언에서 말하고 있고, 다른 증언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생활은 자신이 받아들인 일련의 복음서 구절들로 요약되었다. 그 후 프란치스꼬는 자신들의 생활 양식에 대해 로마 교회의 인준을 받아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성청의 인준을 받고자 그들과 함께 그리스도 교회의 수도인 로마로 떠났다.
      프란치스꼬로부터 회칙에 관한 내용을 설명들은 추기경은 순수하게 복음을 따라 살겠다는 프란치스꼬의 계획을 불가능하게 여겼지만 반대할 수는 없어서 교황 알현을 주선해 주었다. 교황은 프란치스꼬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 날 저녁에 교황은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교회의 머리이자 어머니인 교회 건물이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고 갑자기 가난한 수도자 한 명이 달려와서는 그의 어깨로 교회를 떠받쳐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교황은 그가 바로 프란치스꼬임을 알아보았다. 결국 교황은 구두로 회칙을 인가했고 이로써 아직까지 삭발례를 받지 않았던 형제들이 설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인가를 받은 후 몇 년 동안 작은 형제회는 급속히 증가했는데, "돗자리 총회"(1219년)에는 수천 명의 회원이 참석하기에 이르렀다. 프란치스꼬는 1209년의 생활 규범을 개정하여 23장으로 증보하였으나(1221년), 이 회칙(제1회칙)은 많은 봉사자들의 반대 때문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회칙을 "인준 받지 않은 회칙"(Regula non Bullata)이라고 부른다. 이 회칙에서는 다른 어느 글보다도 프란치스꼬의 이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 후 1223년 프란치스꼬는 레오 형제와 보니쪼 형제와 함께 리에띠 계곡의 "폰떼 꼴롬보" 은둔소로 가서 마지막 회칙인 제2회칙을 작성하여, 마침내 1223년 11월 29일, "Solet Annuere"라는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칙서를 통해서 인준을 받았다(Regula Bullata). 이 최종 회칙은 문장이 훨씬 간결하고 덜 감동적이나, 첫 번째 회칙의 본질적 요소들을 모두 잘 보존하고 있어, 전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수도회의 복음적 소명을 강조하고 있다.
     

      몇 가지 갈등들과 프란치스꼬 자신의 병약함 때문에 프란치스꼬는 1220년 총회에서 총장직을 사임하고 까따니아의 베드로를 총장으로 임명했으며 그에게 순종을 서약하였다. 그는 유능한 법률가로서 창립자의 이상을 충실히 지지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곧 사망했고, 엘리아 봄바로네가 그를 계승하였다.
      1224년 9월 프란치스꼬는 라 베르나 산에서 오상(五傷)을 받았다.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상(像)이 된 그는, 몸이 몹시 불편했지만 여전히 이탈리아 중부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가는 곳마다 공경과 성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1226년 봄 그가 시에나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마지막 바람의 간곡한 당부를 받아쓰게 했다. 그는 모든 형제들이 그들 가운데서는 사랑을, 가난 부인에게는 충실을, 교회의 고위 장상들과 성직자들에게는 존경과 순종을 실천하라고 역설하며 그들을 축복했다.

      성인의 원의에 따라 형제들이 프란치스꼬를 형제회의 요람이라 할 뽀르찌운꿀라로 모셔갔다. 바로 여기에서 프란치스꼬는 그가 내용을 보충한 마지막 유언을 받아쓰게 했고, 그 본문은 타인의 문학적 수정 없이 프란치스꼬의 언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 유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회개와 복음적 소명에 대해 주님께 드리는 뜨거운 감사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 친히 홀로 형제회를 창설하셨다는 확인이었다. 그는 초창기의 완전한 가난, 단순, 겸손을 회상하며 특히 육체 노동에 대한 기쁨을 회상하였고, 모든 형제들이 어떤 일에든 종사하고 일할 줄 모르는 형제는 일을 배우기를 원하였다. 애긍은 일이 충분한 보수를 받지 못할 때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죽음에 임박하여 간곡하고 전에 없이 엄하게 당부들을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또 하나의 회칙을 추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끝맺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치고 그는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읽어 달라 하여 들은 뒤, 천사들의 인도로 형제들을 떠나 주님께로 옮겨갔다. 프란치스꼬는 1226년 10월 3일 저녁에 뽀르찌운꿀라에서 임종했다. 2년 뒤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프란치스꼬의 유해는 성 지오르지오(Giorgio)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30년에 지금의 프란치스꼬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 성프란치스코의 생애에 대한 글은 작은형제회 한국 관구 홈페이지 www.ofm.or.kr/stfrancis.html에서 가져왔습니다.

     

 

성프란치스코와 그의 12명의 동료들이 처음으로 공동체를 일구어 생활했던 곳리보또르또(Rivotorto) 움막입니다,

성프란치스코를 향한 순례의 첫 출발지로 선택했다.

 

 

비가 오는 아시시,

촉촉히 비로 젖은 대지 위에 성프란치스코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오늘도 꿋꿋이 당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저 멀리 아스라한 뒷배경으로 평화의 땅 아시시 또한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함께 봉헌하고 있다.

 

 

천사들의 모후 성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은 뽀르지운꿀라(Portiuncula)를 품에 안고 있다.

아시시 성 아래 들판에 위치하고 있다.

 

 

 

 

성프란치스코의 성상 곁에는 항상 흰비둘기가 머물고 있다.

 

 

 성프란치스코의 가난한 거처, 작은 경당 아래 숨어있었다.

 

 

 

 

 

 

 

 

 

 

 

 

성프란치스코 대성당, 3층 구조로 되어있다.

 

 

 

 

 

 

 

 

 

 

 

 

 성프란치스코의 생가 앞의 작은 공간

 

 

 아버지가 성프란치스코를 감금했던 곳

 

 

이야기가 녹아있는 성프란치스코의 탄생지, 마굿간.

지금은 예쁜 경당으로 순례자의 무릎을 꿇게 한다.

 

 

 

 

 골목길에서 만난 그 유명한 fiat사의 cinque cento

 

 

 아시시의 가로등은 잘 살펴보시면 모두 동일합니다.

 

 

성녀글라라 대성당 광장에서 바라본 풍경

 

 

 글라라대성당의 전면부

 

 

글라라대성당 좌편 경당에서는 성체현시와 함께 성체조배가...

발소리마저 숨소리마저 멈추게 합니다.

 

 중앙 제대

 

 

 

 

 주교좌 성당입니다.

 

 

 

 

 

 

 골목길, 그 모퉁이 마다 눈길이 멈춥니다.

그냥 휙 지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순례자의 집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때마침 수녀님께서 밝은 미소로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순례자들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마련된 경당의 입구 성수대

 

 

 경당의 오른쪽은 성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의 무덤이 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

 

 

 마냥 머물고 싶은 곳, 몇번을 순례해도 다시 가고 싶은 곳,

제2의 그리스도, 가난과 평화의 사도 성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