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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에서 由來한 낱말들

화엄행 2010. 11. 15. 16:15

佛敎에서 由來한 낱말들



漢字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글자 하나 하나의 意味는 그 글자가 生成된 뒤로 크게 변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持續的인 生命을 누리며 쓰이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낱글자를 모아 漢字語가 된 낱말들은 한 번 만들어졌다가 社會가 변하고 文物이 달라지면 死語가 되어 歷史的 遺物로 사라져 버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死語가 된 漢字語 가운데에는 時代를 달리하여 새로운 槪念으로 再照明이 되는 경우가 있다. 또 死語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自然스럽게 새時代 새社會에 適應하여 새로운 뜻의 낱말로 再生 또는 變身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에는 일찍이 佛敎用語로 세상에 선을 보였던 낱말이었으나 歲月이 흐르면서 佛敎用語라는 印象을 벗어버리고 日常生活에서 一般的인 뜻으로 쓰이는 낱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單語가 本來 佛敎에서 그런 뜻이었구나!"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럴만한 意味上의 聯繫性 내지는 妥當性을 깨달으며 고개를 끄덕거릴 그런 낱말들이다.




1. 密語(밀어)



오늘날 '密語'라는 낱말은 사랑하는 사이의 戀人들이 사랑의 속삭임 같은 말이거나 특정한 사람에게 秘密스럽게 건네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일찍이 佛敎에서는 부처님이 진실을 속에 감추고 方便으로 설명한 眞理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었다. '다라니'를 密語라고도 하는데 그 속에 眞理가 들어있다는 믿음을 반영하는 말이다.




2. 脫落(탈락)



오늘날 '脫落'은 어떤 集團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一定한 目標에 到達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게 된 경우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落伍'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그러나 佛敎에서는 이 낱말이 人間事의 모든 拘束으로부터 解放되고 一切의 執着으로부터 벗어나 自由롭게 되는 것, 곧 解脫의 境地를 가리키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던 말이다.


世俗에서 脫落하여 落伍者가 되는 것이 어쩌면 佛敎에서 가르치는 自由人의 참모습일 것이니 같은 낱말을 世俗과 佛敎에서 正反對의 뜻으로 쓰는 것이 조금도 異常할 것이 없을 듯도 하다.




3. 無事(무사)



일상의 뜻으로는 事故가 생기지 않아 安堵의 숨을 내쉬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無事하다니 참 多幸이구나."같은 표현에 자주 나온다.


그러나 佛敎에서는 매우 積極的인 槪念의 낱말이다.


寂靜無爲의 境地, 그러니까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原初的 本性의 境地, 그것을 "無事"라 하였다.


世俗의 衆生들은 煩惱妄想의 有事에서 寂靜無爲의 無事에 들어가기 위해 佛心에 가까이 하는 것이다.




4. 面目(면목)



국어사전을 들추면 "面目"은 얼굴 생김새, 또는 '낯'의 다른 말쯤으로 풀이되어 있다. "面目이 없습니다."같은 표현에서는 '떳떳한 얼굴을 하고 남을 대하는 일'정도의 뜻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이 "떳떳한 얼굴을 지님"이라는 槪念을 좀더 積極的으로 擴大시키면 어떤 의미에 이를까? 그것은 "人爲를 加하지 않은 本來 人間(참사람)이 具備한 心性"에 도달하지 않을까? 그렇다. 일찍이 佛敎에서는 이 面目을 絶對無差別의 自己, 참사람의 참 모습․참 얼굴을 가리키는 낱말로 사용하였다.




5. 投機(투기)



오늘날 이 낱말은 一攫千金을 노리는 사람들이 돈을 던져 기회를 잡는다는 經濟用語로만 쓰인다.


그러나 원래 불교에서는 師弟사이에 마음이 感應하고 道가 交通하여 마음이 열려서 서로 一致의 境地에 이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意氣投合이란 말이 있는데, 그것은 法悅에 이른 佛心이 아닌 世俗的 意見의 一致를 가리킬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온 몸을 던져 解脫의 기쁨을 맛보는 일이 一生一大의 投機行爲인지도 모르겠다. 超越的 宗敎的 投機가 世俗的․經濟的 投機와 脈이 닿아 있는 셈이다.




6. 玄關(현관)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入口를 흔히 玄關이라 이른다.


그런데 만일에 큰 건물이 추상적인 개념의 깊고 오묘한 이치 또는 크고 큰 道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 入口, 그 端緖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때에 불교에서 그것은 곧 우리가 말(言)을 하는 입(口)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비록 方便이기는 하지만 말(言語)을 통하여 진리에 이르는 것이라면 우리 인간의 입(口)이 玄關이요, 우리 몸(身)이 道의 몸체가 아닐 것인가!




7. 蒲團(포단)



'포대기'라는 낱말도 요즈음은 듣기 어렵게 되었다.


"어린이 育兒用의 얄팍한 천"을 가리키는 이 낱말은 '蒲團'이라는 불교용어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蒲團'은 문자 그대로 "부들"이라는 여러 해 살이 풀을 엮어서 만든 일종의 깔자리, 즉 방석(方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모두 修行者들이 參禪을 할 때나 念佛을 할 때에 坐具로 사용하였다. 세월이 흘러 그 깔자리의 재료가 솜방석, 솜이불 등의 형태로 변모하면서 급기야 育兒用의 덮개로도 쓰이게 되었는데 그때에 '포단'이 포대기'라는 말로 變身한 것이다.




8. 知事(지사)



오늘날 道知事, 州知事는 그 氣勢가 세상을 쩌렁쩌렁 울린다.


道의 모든 일을 도맡아 알고 처리하는 사람이 道知事요 州의 모든 行政을 책임지고 있으면서 그 權力을 휘두르는 사람이 주지사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知事'란 어떤 분야에 일을 책임진다는 뜻이 있다.


불교에서는 절의 事務를 맡아보는 것을 知事라 하였다. 그러니까 절간의 事務長인 셈이다. 이 낱말이 세상으로 나오면서 權力型 용어로 바뀌니 그것이 곧 道知事요 州知事이다.




9. 奈落(나락)



naraka의 音譯인데 ������那落迦(나락가)������로 쓰이다가 奈落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意譯(음역)한 낱말이 곧 ������地獄(지옥)������이다. niraya라는 同義語(동의어)를 音譯한 ������泥梨耶(이이야)������������泥梨(이리)������가 쓰이기도 한다. 흔히 罪業(죄업)을 지은 사람이 태어나는 곳으로 極苦(극고)를 견뎌야 하는 有情[衆生]의 세계, 또는 그러한 삶을 묘사하는 데 쓰인다. 여기에는 여덟 개의 큰 地獄(지옥)이 있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等活(등활), 黑繩(흑승), 衆合(중합), 叫喚(규환), 大叫喚(대규환), 焦熱(초열), 大焦熱(대초열), 阿鼻(아비).


������阿鼻叫喚(아비규환)������이란 낱말은 두 가지 종류의 地獄이 합쳐진 것이다.




10. 相好(상호)



부처님의 훌륭한 容貌(용모)와 形相(형상)을 가리키는 낱말로서 ������三十二相 八十種好������에서 由來한 말이다. 부처님은 현저하게 보기 좋은 것 32가지와 미세하여 쉽게 알아보기 어려우나 아주 잘 생긴 80가지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것을 통틀어 相好라 부른다. 梵語(범어)로는 laksana-vyanjana라 한다.




11. 眷屬(권속)



Parivara의 音譯이다. 眷은 親愛(친애)의 뜻이요, 屬은 隸屬(예속)의 뜻으로 親密(친밀)과 順應(순응)의 人間關係(인간관계)를 나타내는 一種의 家族槪念(가족개념)의 낱말이다. 여기에는 內眷屬(내권속)과 外眷屬(외권속)이 있는데 內眷屬은 부처님 出家以前의 車匿(차닉) 등 苦行時의 道伴(도반) 5인과 得道時의 阿難(아난)을 가리키며, 大眷屬에는 舍利佛(사리불) 등의 모든 聖人(성인)과 彌勒(미륵) 등이 포함된다. 오늘날 宗敎的 家族의 뜻으로 眷屬이 쓰이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12. 阿修羅(아수라)



asura의 音譯으로 ������阿修羅, 阿素羅(아소라), 阿素洛(아소락)������등 여러 가지로 쓰인다. ������修羅������라 줄여 쓰기도 하고, ������非天, 不端正������이라 意譯되기도 하는 낱말인데, 六道 八部衆 十界의 하나, 곧 混亂(혼란)과 싸움의 領域(영역)이다.



古代 印度(인도)에서는 戰鬪(전투)를 일삼는 一種의 鬼神(귀신)으로 看做(간주)되었고, 항상 帝釋天(제석천, 인드라 神)과 싸우는 好戰的인 惡神(악신)으로 여겼다. 수라장(修羅場) 또는 아수라장(阿修羅場)이라는 말은 修羅의 싸움판이란 뜻으로 쓰이는 낱말이다.




13. 解脫(해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평화롭고 자유로운 경지를 흔히 ������解脫������이라고 한다. Vimoksa, Vimukti를 音譯하여 毘木叉(비목차), 毘木底(비목저) 등으로도 쓰는데, 煩惱(번뇌)의 사슬에서 풀려 迷惑(미혹)의 苦痛(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迷惑의 세계를 벗어났다 하여 度脫(도탈)이라고도 한다.



본래는 涅槃(열반)과 같이 實踐道(실천도)의 窮極(궁극)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 해탈에도 有爲解脫(유위해탈), 性淨解脫(성정해탈), 障盡解脫(장진해탈) 등 자세한 구별이 있다.




14. 外道(외도)



세상에서 흔히 쓰이는 뜻은 男女間의 性的 逸脫行爲(일탈행위)이지만 이 낱말이 처음 쓰인 것은 불교를 ������內道������라 하고, 불교 이외의 敎를 ������內道������의 對稱(대칭)으로 ������外道������라 한 것에서 비롯한다. 外敎, 外法, 外學이라고도 하였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邪法(사법), 邪義의 의미를 나타내는 貶稱(폄칭)으로 변하였다. 梵語로는 tirtaka라 한다.




15. 出世(출세)



참으로 크게 意味(의미)가 변한 낱말이다. 보통 세상에 잘 알려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가리키지만 이 낱말은 불교에서는 아주 다른 뜻으로 쓰인다.


첫째, 불․보살이 중생의 세계에 출현하여 중생을 敎化(교화)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出世하여 만 사람이 幸福(행복)을 얻는다는 뜻을 감추고 있다.


둘째, 세상의 俗緣(속연)을 벗어나 佛道修行(불도수행)에 專念(전념)하는 것을 뜻한다. 出家와 같은 뜻이다.


셋째, 禪宗(선종)에서 學行을 마친 뒤에 隱退長養(은퇴장양)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Buddha-utpada, loka-uttara를 意譯한 말이다.




16. 方便(방편)



흔히 ������단순한 方法������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는 보통의 낱말로 알기 쉽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일찍이 범어 upaya의 音譯으로 ������接近(접근), 到達(도달)������의 뜻을 담아 ������方便������이란 낱말을 사용해 왔다. 좋은 方法으로 衆生(중생)을 引導(인도)한다는 뜻에서 ������方法������이라는 뜻이 들어 있지만, 진실한 가르침으로 인도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마련한 法門이라는 뜻이어서 眞實(진실)과는 맞서는 槪念(개념)이 된다. 衆生을 濟度(제도)하기 위해 衆生의 根機(근기)에 따라 精巧9정교)하고도 알맞은 手段(수단)을 동원하는 ������슬기������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17. 奇特(기특)



이 낱말은 현대국어에서 名詞(명사)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기특하다'라는 형용사의 語根(어근)으로만 쓰일 뿐이다. 그 '기특하다'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신통하여 귀염성이 있다.>



이 풀이에 따르면 '기특하다'는 말하는 이나, 글쓰는 이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귀엽게 보고 칭찬할 때 쓰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할아버지가 손주놈을 일컬어 '기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낱말이 애초에 佛家(불가)에서 사용될 때에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일> 곧 衆生濟渡의 惻隱之心(측은지심)을 지니고 無色界의 天上에서 人間으로 내려오신 人類救援(인류구원)의 事件(사건)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敎에서 말하는 예수의 肉化降生(육화강생)에 비견되는 事件을 불가에서 "奇特"이라 하였다. <참으로 神秘(신비)하고 特別(특별)한 事件>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나이 어린 사람에게 "奇特한 놈, 奇特한 일, 奇特한 녀석"이라고 말하는 것을 二千年前 高僧大德이 들으면 우리를 부처님께 不敬罪(불경죄)를 짓는 못된 놈들이라고 꾸중이 秋霜(추상)같을 것이다.




18. 無心(무심)



표준국어대사전을 들추면 이 낱말 '無心'의 뜻 두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① 감정이나 생각하는 마음이 없음


② (불) 속세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경지



낱글자가 나타내는 일상적인 뜻만 생각한다면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는 상태, 곧 無思考(무사고), 無感情(무감정)을 無心이라 일컬을 법하다.


그러나 있음도 없음도 초월하는 경지, 곧 無我(무아)를 森羅萬象(삼라만상)의 常住實在(상주실재)라고 가르치는 불교에서는 생각도 없고, 느낌도 없는 경지란 말로, 진정으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참된 마음'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無心이야말로 부처님의 마음이요 解脫(해탈)의 마음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眞心(진심)과 無心은 同義語(동의어)가 된다.




19. 主人公(주인공)



事件이 있고 그 事件으로 이야기가 構成(구성)되는 한 편의 드라마에서 主人公은 언제나 그 事件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등장인물이다.


主人公이 있음으로써 그 이야기는 興味津津(흥미진진)하고 스릴 넘치는 파노라마를 演出(연출)한다.


그러나 主人公이란 낱말이 俗世(속세)를 벗어나 불교에 오면 아주 재미가 없어진다. 無色․無味․無臭(무취)의 眞空(진공)으로 사라져 버린다.


왜냐하면 원래 불교에서 '主人公'이란 낱말을 처음 사용하였을 때에는 得道(득도)한 人物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主人公은 外部環境(외부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煩惱妄想(번뇌망상)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自我(자아), 즉 無我를 누리는 自我를 일컫는 말이었다.


우리는 잠시 생각해 보자. 俗世의 主人公이 될 것인가? 불교의 主人公이 될 것인가?




20. 知識(지식)



"아는 것이 힘"이라는 西洋의 格言(격언)도 있고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부지런히 옛 것을 갈고 닦으며 알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라는 孔子님의 말씀도 있거니와 인간세상은 태어나면서부터 알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힘겨운 知的旅行(지적여행)을 죽을 때까지 계속한다.


'知識'이란 이렇게 '앎'을 뜻하는 抽象名詞(추상명사)라고 세상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런데 佛敎에 오면 이것은 具象名詞(구상명사)로서 實體(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사람' 우리들 自身이다.


다시말하여 '知識'은 아는 사람이니, 우리가 사랑하는 이웃이요, 친구요 벗이다.


불교에서 '善知識(선지식)'은 '佛法을 갈구하는 착하디 착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善知識이다.




21. 動鈴(동령)



이 낱말은 참으로 崎嶇(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動은 움직이다. 이동한다는 뜻이요, 鈴은 방울이라는 뜻이니 動鈴은 방울을 흔든다. 방울소리를 낸다의 뜻을 갖는다.


불교에서는 托鉢僧(탁발승)이 經文(경문)을 외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乞食(걸식)을 할 때에, 방울 달린 장대를 흔들며 다녔다.


이것을 搖鈴(요령)이라 하기도 하였고, 動鈴이라 하기도 하였다.


搖鈴도 방울을 흔드는 것이요, 動鈴도 방울을 흔드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搖鈴은 방울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제한되었다. 動鈴만 '방울을 흔든다'의 뜻을 지니더니 세월이 흐르면서 '동령'은 조만간 '동냥'이란 俗音으로 변하여 말하게 되었고 그것은 스님들의 乞食行爲(걸식행위)뿐 아니라, 乞人들의 乞食行爲에도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동냥아치, 동냥질 같은 낱말이 모두 動鈴을 기원으로 생긴 낱말이다.




22. 聚(구취)



요즈음 學識(학식)도 없고 德望(덕망)도 없는 스님들을 얕잡아 일컫는 말에 '땡초'라는 낱말이 있다. 이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땡추'의 잘못이라 하였고 '땡추'를 찾아가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破戒(파계)하여 중답지 못한 중을 낮잡아 이르는 말>


그렇다면 '땡추'는 결코 중이라 할 수 없는 중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땡추'의 語源(어원)은 '?聚'에 있으니 이 낱말은 '무리를 지어 사는 사람' '불법을 닦기 위해 모여사는 사람들'이라는 평범한 낱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낱말이 不名譽(불명예)의 受難(수난)을 입어 별 볼일 없는 가짜 스님을 가리키게 되었을까? 이것은 言語學의 常識(상식)을 새삼 일깨운다.


어떤 事物(사물)을 가리키는 낱말이 있을 때, 그 事物에 本性的(본성적)인 ?化가 발생하면 그 낱말의 意味가 그 ?化를 反映(반영)하게 된다는 것.


따라서 가짜스님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 가짜 스님을 지칭할 낱말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것이 ?聚에 달라붙으니, 여기에서 '땡초'가 나오게 된 것이다.




23. 散華(산화)



사전을 펼치면 '散華/散花'란에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뜻이 나란히 적혀 있다.


① 어떤 대상이나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


② (불) 꽃을 뿌리며 부처님을 공양하는 일


③ (식) 꽃은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散華는 祖國(조국)을 위하여 殉國(순국)한 분을 칭송할 때의 첫 번째 뜻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두 번째의 뜻이 一般化하면서 隱喩(은유)的으로 意味(의미)가 擴大(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는 부처님을 찬양하고 공경하는 뜻에서 꽃을 뿌려 공양하는 행위, 곧 꽃을 뿌린다는 단순한 의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이 확대되어 첫 번째 뜻으로 발전했고, 또 특수화하여 세 번째 뜻도 생겼다.




24. 阿寐利(아매리)



요즈음 政治(정치)도 아사리판이요 經濟(경제)도 아사리판이라고 한탄하는 소리가 높다.


'아사리판'이라는 말은 意見(의견)의 一致(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일컫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사리"는 원래 佛家에서는 매우 恭敬(공경)스럽고 尊敬(존경)할 만한 분을 일컫는 말이었다.


僧伽(승가)조직을 이끄는 지도적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싼스크리트語 '아사랴(?carya)'를 音譯하여 阿寐梨, 阿遮利夜, 阿遮梨耶 등으로 썼으며 뜻풀이하여 '敎授(교수), 軌範(궤범), 正行'이라고 번역되었던 낱말이다.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이끌며 제자들의 師範(사범)이 되어 지도하는 큰 스님을 가리켰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사리판'은 不正과 不義의 代名詞로 轉落(전락)하고 말았을까? 佛敎의 衰退(쇠퇴)가 이러한 낱말뜻의 汚染(오염)과 無關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잘 나가는 낱말들. 예컨대 벤쳐니 企業(기업)이니 하는 낱말이 엉뚱하게 변질되지 않기를 비는 심정으로 '阿寐利'를 다시 한 번 측은지심으로 생각해 보자.



출처/한글 + 漢字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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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blog.naver.com/junhanja/130035508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