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스님(1575~1660)의 속성은 김씨, 충북 보은 출신으로, 법명은 각성이다.
인조때 남한산성축성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되어, 승군을 거느리고 축성사업을 마친후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칭호를 받았다.
8원 81암자의 화엄사가 임진란에 소실된 것을 대웅전등 몇몇 건물을 중건하였고, 병자호란때 남도 의승 3천명으로 항마군을 조직하여 호남의 관군과 호응하여 북으로 올라가던중 화의가 이루어 졌다는 소식을 듣고 도반인 고한(孤閑)스님과 더불어 화엄사에 돌아왔으며, 후학을 지도하시던중 이곳에서 입적하시니 세수는 86세요, 법랍은 72세이다. |
처능스님(1617~1680)의 속성은 김씨로, 자는 신수(愼守), 호는 백곡이다. 12세에 의현(義賢)에게 글을 배우다가 승려가 되었으며, 신익성(申翊聖)에게 외전(外典)을 배워 글씨가 능하였다.
벽암스님께 나아가 23년 동안 도를 강하다가 법을 전해받았으며, 김좌명(金左明)의 주청(奏請)으로 남한도총섭(南漢都摠攝)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한참 위축되고 있던 조선조의 승단(僧團)을 대변하여 호불간쟁(護佛諫諍)의 선구자로 앞장섰으며, 유교의 탄압을 받던 불교계를 위해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지어 불교를 옹호했고, 중국의 대유학자들인 정자(程子), 주자(朱子), 구양수(歐梁脩)같은 분들도 폐불(廢佛)의 부당성을 항변하고 불교 이론에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유교의 성명설(性命說), 인의설(仁義說)을 그대로 불법을 설명하는 방편으로 삼았던 처능스님의 사상은 원융회통(圓融會通)으로 포괄적인 자세는 화엄사상(華嚴思想)에서 엿볼 수 있다.
인조 25년(1647년)에 화엄사에서 강설(講說)을 하니 그 법석(法席)이 장관이었다.
취미스님는 선조 23년(1590)에 명신(名臣)이던 성삼문(成三問)의 후손으로, 경성 성균관 북쪽 명류(名流)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태혼(太昏)이고 법명은 수초이다.
어려서 제월경헌(霽月敬軒)에게 출가 했으며, 선조 39년(1606)에 두류산에 들어가 부휴스님을 뵙고 수계를 했다. 부휴스님은 벽암각성스님에게 “ 어느 날에 우리 도를 크게 할 사미(沙彌)이니 잘 보호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고 부탁하였다고한다.
인조 7년(1629)에 옥천 영추사(靈鷲寺)에서 개당(開堂)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으며, 영외(嶺外)의 선학(禪學)이 취미스님 의해서 비롯되었다.
백암스님(1631~1700)은 법명은 성총. 속성은 이씨이며, 남원출신으로 13세 순창추암(淳昌鷲庵)에게 출가하여 법계(法戒)를 받고, 18세에 방장산의 취미스님에게 9년 동안 법을 전해 받았다. 숙종 7년(1681) 큰배가 임자도에 와 닿았는데 사람은 없고 서적만 실려 있었다. 명나라 평림(平林) 섭거사가 교간(校刊)한 화엄경소초, 긍강경간정기, 기신론필삭기,대명법수, 회현기와 4대사(大師), 소록(所錄)과 정토보서(淨土寶書)등 190권을 발견하고 15년간 5천판을 새겨 징광사, 쌍계사에 진장(珍藏)하였다. 교종 가운데에서 화엄경을 중요시 하였다는 사실은 화엄사에서 강의한 것 이외에 그 이전에 숙종 18년(1692)에 대화엄회(大華嚴會)를 설치한 일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화엄사사적을 중관해안스님이 필사본으로 기록후 60여년 후인 숙종 22년(1696) 중춘일(仲春日)에 백암성총께서 발문(跋文)을 썼으며 숙종 23년(1697)에 목판본을 간행하였다. 숙종 26년(1700)에 쌍게사 신흥암에서 70세 일기로 입적하셨다.
화엄사사적을 중관해안스님이 필사본으로 기록후 60여년 후인 숙종 22년(1696) 중춘일(仲春日)에 백암성총께서 발문(跋文)을 썼으며 숙종 23년(1697)에 목판본을 간행하였다. 숙종 26년(1700)에 쌍게사 신흥암에서 70세 일기로 입적하셨다.
명안스님(1646~1710) 은 화엄사 보적암(寶積菴)에서 백암성총에게서 교(敎)를 배우고, 또 청매(靑梅)의 법손인 무영(無影)스님에게 선(禪)을 배웠다. 수선(修禪)을 하고 홍법(弘法)을 하면서 화엄사 의 경영을 더하였다. 그는 만년에는 오로지 염불에만 정성을 쏟았는데, 이것은 조선불교가 교(敎)·선(禪)·주(呪)·염불(念佛)을 겸하여 닦는 특징을 가진 사실을 예증(例證)하는 좋은 실례(實例)라 할 것이며, 그가 남긴 염불가를 보면 보조국사가 지눌이 제창하던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입장도 계승한 것을 보아 화엄의 원융무애한 사상을 선양한 사실을 엿 볼수 있다.
선조 26년(1648)에 화엄사에서 백곡처능법사의 법석(法席)을 이어 받아 교장(敎藏)을 하니 수 많은 승려와 불자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현종(顯宗)9년 6월에 오봉(五峯)의 삼장사(三藏寺)에서 아미타불을 염불하다가 서쪽을 향해 입적하였으니 세수 79세 였다.
계파스님의 법명은 성능(性能) 혹은 성능(聖能)이라고 썼다. 스님은 경북 학가산 스님으로 백암성총선사의 도덕((道德)을 사모하여 3년간 수업을 하여 크게 깨우쳤으며 백암선사는 계파스님의 사람됨을 알고 벽암노화상께서 중건하지 못한 장육전 중창불사를 위촉하였다.
계파선사는 이 엄청난 대작불사를 성취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세웠는데 설암추붕기(雪巖秋鵬記)에 보면 “모기가 산을 짊어지는 것은 가히 어려운 일이지만 바닷물을 퍼내어 구슬을 취하는 것은 뜻만 있으면 가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니 큰 불사를 이룸에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먼저 부처님에게 가호가 있기를 빌자.” 하고, 숙종 25년(1699)에 시작하여 숙종 28년(1702)에 완공을 보았고, 1703년에는 삼존불(三尊佛)·사보살상(四菩薩像)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를 열었으며 숙종은 각황전(覺皇殿)이라 친히 사액(賜額)하고, 화엄사를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이라 하였다.
계파선사는 이 엄청난 대작불사를 성취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세웠는데 설암추붕기(雪巖秋鵬記)에 보면 “모기가 산을 짊어지는 것은 가히 어려운 일이지만 바닷물을 퍼내어 구슬을 취하는 것은 뜻만 있으면 가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니 큰 불사를 이룸에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먼저 부처님에게 가호가 있기를 빌자.” 하고, 숙종 25년(1699)에 시작하여 숙종 28년(1702)에 완공을 보았고, 1703년에는 삼존불(三尊佛)·사보살상(四菩薩像)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를 열었으며 숙종은 각황전(覺皇殿)이라 친히 사액(賜額)하고, 화엄사를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이라 하였다.
팔도도총섭이 되어 북한산성을 쌓았고, 영조 21년(1745)에 새총섭 서봉(瑞鳳)에게 인계할 때 산성에서 행하는 일 14항목을 기록한 「북한지 : 北漢誌」를 판각했다.
명곡현안대선사께서 숙종 32년(1706)에 선교(禪敎)를 강설(講說)하니 그 법석(法席)의 계기로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이 더욱 빛나는 화엄연화장세계(華嚴蓮華藏世界)가 되었다.
화엄종주(華嚴宗主)이신 설암당 추붕스님께서 숙종 34년(1708)에 대장경(大藏經)을 강설하셨다.
상월스님 (1687~1766)의 법명은 새붕이며, 자는 혼원(混遠), 편양언기(鞭羊彦機)선사의 법손(法孫), 속성은 손씨로서 전라도 순천에서 태어났으며 11세에 조계산 선암사 극준(極峻)에게 가서 15세에 출가하여 세진문신(洗塵文信)에게 구족계를 받고 18세에 화엄사에서 설암추봉에게 참학(參學)하여 도를 통하고 법을 잇고, 선지식을 찾아 다니며 공부하고 숙종 39년(1713)에 고향에 돌아오니 사방에서 학자가 모었다.,
스님께서 항상 말하기를 “ 학자가 반관(返觀)하는 공부가 없다면 날마다 1천말을 외운다 하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 또 말씀하기를 “ 하루라도 착실히 공부하지 않으면 밥이 부끄러우니라” 하였다.
상월스님은 화엄사와 선암사와 대둔사를 왕래하며 수행했는데, 문자보다는 계율(戒律)과 진해(眞解)를 더욱 존중하며 화엄의 정신을 생활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은 유가(儒家)와 불교 학설을 비교하면서 “ 유가에서 말하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기상(氣像)은 즉, 불교의 여여(如如)한 이(理)이요. 태극(太極)은 불교의 한 가지 물건이다. 리일분수(理一分殊)는 일심만법(一心萬法)이다. 이로 말미암아 상하(上下)를 인증(引證)하면, 어찌 일찍이 유불(儒佛)의 차별이 있으리오.” 이러한 대담한 견해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화엄의 넓은 도리(道理)에 입각(立脚)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하겠다. 영조 24년(1748) 선교양종도총섭국일도대선사(禪敎兩宗都摠攝國一都大禪師)가 되었으며, 매일 일불(一佛)과 오보살(五菩薩)의 명호를 5천번, 염불을 천번하였고, 영조 43년(1967)년 세수 81세, 법랍 70세로 입적하셨다.
스님께서 항상 말하기를 “ 학자가 반관(返觀)하는 공부가 없다면 날마다 1천말을 외운다 하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 또 말씀하기를 “ 하루라도 착실히 공부하지 않으면 밥이 부끄러우니라” 하였다.
상월스님은 화엄사와 선암사와 대둔사를 왕래하며 수행했는데, 문자보다는 계율(戒律)과 진해(眞解)를 더욱 존중하며 화엄의 정신을 생활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은 유가(儒家)와 불교 학설을 비교하면서 “ 유가에서 말하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기상(氣像)은 즉, 불교의 여여(如如)한 이(理)이요. 태극(太極)은 불교의 한 가지 물건이다. 리일분수(理一分殊)는 일심만법(一心萬法)이다. 이로 말미암아 상하(上下)를 인증(引證)하면, 어찌 일찍이 유불(儒佛)의 차별이 있으리오.” 이러한 대담한 견해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화엄의 넓은 도리(道理)에 입각(立脚)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하겠다. 영조 24년(1748) 선교양종도총섭국일도대선사(禪敎兩宗都摠攝國一都大禪師)가 되었으며, 매일 일불(一佛)과 오보살(五菩薩)의 명호를 5천번, 염불을 천번하였고, 영조 43년(1967)년 세수 81세, 법랍 70세로 입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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