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義湘)스님(625~702)은 속성이 김씨이고, 신라 진평왕 47년(625)에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불문에 귀의하여 학업을 닦았으며, 26세 되는 해(650)에 원효스님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법을 구하고자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 어려움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난 37세인 해(661)에 다시 원효스님과 같이 구법의 길을 나섰으나 원효스님은 도중에서 가던 길을 그만두고 신라로 돌아오고 의상스님은 혼자 구법의 길을 계속하여 중국의 종남산 지상사로 가서 지엄(智儼)스님(602~668)을 친견하였다.
지엄스님은 전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한반도에서 생겨나더니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온 중국을 덮었다. 나무 위에는 봉황새 보금자리가 있었다. 올라가보니 진기한 보석 하나가 멀리까지 광명을 비추고 있었다. 꿈을 깬 뒤에 놀랍고도 이상해서 도량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의상스님이 왔다. 지엄스님은 특별한 예우로 의상스님을 맞으며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그대가 올 징조였다.” 라고 말하며, 바로『화엄경』을 공부하도록 허락했다. 지엄스님은 뛰어난 자질을 지닌 의상스님을 만난 것을 기뻐하며 새로운 학설을 많이 전수하였다. 의상스님은 스승의 특별한 지도로 화엄종학(華嚴宗學)의 깊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의상스님이 공부하는 지상사 인근에는 도선(道宣)율사(596~667)가 머물고 있었다. 도선율사는 계율을 실행함이 매우 철저해서 매일 점심때가 되면 천상에서 천신이 보내주는 천공(天供)을 받았다. 하루는 도선율사가 의상스님에게 공양하러 오기를 청하였다. 의상스님은 도선율사에게 가서 기다렸으나 때가 지나도 천공이 당도하지 않아 그냥 돌아왔다. 의상스님이 돌아간 뒤에야 천신이 공양을 가지고 이르렀다. 어째서 늦었느냐고 물으니 천신이 대답하기를 의상스님이 있는 주위에 신장들이 호위하고 있어서 들어올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도선율사는 의상스님의 도력에 감복하고 천공을 남겨 두었다가 이튿날 지엄스님과 의상스님에게 드렸다.
스님은 지엄스님이 열반하신 뒤에 3년을 더 지나다가 중국에 간지 10년 만에 신라로 돌아왔다. 의상스님의 나이 47세 되는 해(671)였다. 의상스님의 당나라 유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상스님 이전에도 중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온 신라의 고승은 원광(圓光) ‧ 자장(慈藏)스님을 비롯하여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분들은 시대적 여건에 의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인연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주요 불전을 학습하고 경전과 부처님 사리를 정성스럽게 가지고 돌아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에 비해서 의상스님은 처음부터 중국 화엄종학에 크게 공헌한 지엄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화엄종학의 가르침을 전문적으로 받았다. 이 점은 의상스님이 최초이며, 크게 차별화되는 점이다. 스님은 경전을 학습하는 경학(經學)의 과정을 지나 경전을 더욱 깊게 탐구하는 종학(宗學)의 공부를 한 것이다. 후대에 지엄스님을 중국화엄종 제2조로 존중한다. 화엄종학의 계승으로 보면 의상스님은 중국화엄종의 제3조의 순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의상스님은 중국화엄종의 조사(祖師)가 아니다. 한국 화엄종풍의 수립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후대에 의상스님을 한국 화엄종의 초조로 받들었다.
스님은 귀국하여 열반에 이르기까지(702) 30여 년간을 수행 ‧ 교육 ‧ 저술에 정진하였다. 왕족이면서도 평생을 도성가까이 있지 않고 산중에만 머물렀다. 의상스님에 의해서 문무왕 16년(676)에 창건한 영주의 부석사(浮石寺)는 신라의 도성에서 먼 거리에 위치한 최초의 산중사찰이며,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 부석사의 사격은 한국 화엄종풍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 스님은 오진 ‧ 진정 ‧ 표훈 등의 십대 고승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를 길렀다. 화엄십찰이라 칭하는 전국의 십대사찰에서 화엄교의를 전하였다.
왕실에서는 토지와 노비를 제공했으나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평등법이어서 높고 낮음이 균등하며, 신분의 차별이 없습니다. 법계로써 집을 삼고, 생활은 발우 하나로 흡족하니, 지혜의 생명이 이로부터 자라납니다. 어찌 토지가 필요하며, 무엇을 위해 노비가 있어야하겠습니까?” 라는 말로 사양했다. 문무왕 21년(681)에는 도성의 성곽을 새로 쌓고자하여 스님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스님은 “국왕이 초야의 초가집에 머물더라도 정치를 바르게 실행하면 나라가 오래도록 부강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백성을 동원하여 성을 쌓더라도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문무왕은 성 쌓는 일을 하지 않았다. 스님에 대한 존경심을 이해할 수 있다.
스님은 화엄종의 조사로서 동해변에 낙산사를 창건하여 관음신앙의 도량을 열었고, 부석사에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봉안하여 정토신앙을 선양했다. 화엄신앙이 관음신앙과 정토신앙으로 실천됨을 가르친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의 화엄종풍은 오늘날까지 화엄신앙이 모든 신앙으로 실천되는 전통을 이루었다. 화엄의 교의는 차별상이 평등성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별은 평등과 연결되어 있다. 물과 파도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의상스님은 “다니는 곳마다 본래의 곳이고, 이르는 곳마다 출발한 곳이다.(行行本處 至至發處)” 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법문은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스님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도록 한평생 온몸으로 자비를 실천하였다. 이것이 의상스님이 실행한 자비보시이다.
http://sgwon.or.kr/board/view.php?&bbs_id=pr1&view_list=&page=&doc_num=3773&ss[fc]=0
'<♣ 학술자료 ♣> > 기타 관련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禪修行의 준비 -- 25方便 (0) | 2010.06.10 |
---|---|
49재, 왜 ‘보편적 脫喪의례’ 됐나 (0) | 2010.05.06 |
[스크랩] 사대천왕(四大天王) (0) | 2010.04.14 |
<승가원> -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법인 (0) | 2010.04.07 |
[스크랩] 성철스님---삼천배의유래 (0) | 2010.02.23 |
[스크랩] ★달마의 가르침-열매 9가지★ (0) | 2010.02.23 |
※☆ 재가자가 만든 불교 '살짝꿍' 맛보기 싸이트 ☆※ (0) | 2010.01.22 |
[스크랩] 알아두면 좋은 불자상식 (0) | 2010.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