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 독경 ♣>/성지 * 여행

公州 公山城

화엄행 2009. 7. 26. 20:46

 公山城   사적 제12호

 

해발 110m의 공산성은 강건너 북쪽에서 보면 마치 한자의 귀인공<公>자와 같다하여 公山이라 이름하였으며,

백제시대 토성 400m, 조선시대 석성 2260m, 총둘레 2660m의 포곡형 산성이다.

성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지와 연못 2개소가 발굴조사 되었으며,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인조대왕이 머물렀던 쌍수정, 임진난시 승병들을 훈련시켰던 영은사,

찬란했던 백제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임류각,

그 밖에 만하루, 진남루, 공북루, 명국삼장비 등 많은 역사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으며,

비단결 같이 흐르는 금강과 함께 바라모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위치 : 충청남도 공주시

특징 :서기 475년 고구려에 밀려 내려간 백제가 금강을 방어 벽으로 삼아 세운 백제의 옛성곽.
부여로 수도를 옮기기전 60여년간 백제를 지켰다.
백제의 토성을 조선시대 석성으로 개축했으며 70년대 보수 작업으로 2.6km의 석성 일주가 가능하다.

개요 : 공주 시가지와 금강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한 공산성은 공주 땅 여행에서 꼭 들러봐야 하는 곳으로 꼽힌다.
서기475년 한강 유역의 한산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후 새로 정한 도읍이 공주였다. 이후 부여로 천도 할 때까지 불과 60 여 년 간의 백제 도읍이었지만 공산성이 있기에 공주는 백 제의 도시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북으로는 금강을 띠처럼 두르고,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한 천연의 요새인 이 성은 동서 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총 길이 2660m인 성곽은 능 선과 계곡을 따라 이어져 있는데, 원래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초기에 석성으로 개축된 것이다.

곳곳에 역사적 사연 깊은 누각이 서있는 성을 한 바퀴 돌다보면(1시간30분쯤 소요) 성 안팎 을 감싸고 흐르는 백제의 옛 향기뿐 아니라 수려한 자연에 흠뻑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강과 공주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한가롭게 산책할 성벽이 있고, 우거진 숲 사이의 산책로, 그리고 계룡산과 차령산맥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 등이 공산성을 더욱 사랑 받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산성은 백제시대는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일시 거쳐가기도 하였으며 나·당 연합군에 대항 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또 이곳을 거점으로 또한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 되었으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하였던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성벽은 높이 약 2.5m, 너비 약 3m로 보수되었고 성안에는 17가구가 사는 마을이 있 다. 봄가을에는 매주 토, 일요일 오후2시부터 50-60명이 참여하는 수문병 교대식이 열린다. 성내 유적으로는 진남루, 공북루, 쌍수정, 명국삼장비, 쌍수정사적비, 영은사, 연지, 임류각, 군창지, 동문루, 금서루 등이 있다.

 

공산성(관리사무소 041-856-0333)

http://www.sanyaro.com/tour/etour/e-data/gongju/gongsansung.html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공산성(백제), 사적 제12호, 충남 공주시 산성동
공산성(사적제12호)안에 있는 연지와 만하루지
사적 제12호. 둘레 2,200m. 웅진성(熊津城)·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강에 접한 표고 110m의 구릉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형(包谷型) 산성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여 538년(성왕 16) 사비(泗沘:지금의 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축성시기는 국력이 안정된 동성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의 개축을 거쳐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성의 구조는 석축 약 1,810m, 토축 약 390m이다. 석축산성은 안팎으로 돌을 쌓는 협축방식(夾築方式)을 이용했으며,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부분도 있다. 상단의 너비는 약 70cm 정도이고, 안쪽에는 백회를 발라서 성벽의 석재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토축산성은 돌을 혼합하여 쌓았는데 대개 높이 1m, 바닥너비 8.5m, 윗면너비 3m 정도이다. 성내에는 깊이 2m 정도의 호(壕)가 형성되어 있다. 서쪽 성벽은 토축된 위에 돌을 쌓아 축조했다. 성에는 진남루(鎭南樓:南門)·공북루(拱北樓:北門)와 암문(暗門)·치성(雉城)·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이 있으며, 동문과 서문의 터가 남아 있다. 성내에는 영은사(靈隱寺)·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쌍수산정주필사적비(雙樹山亭駐驆事蹟碑)와 주초석·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고, 만하루지(挽河樓址)·임류각지(臨流閣址)·장대지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동쪽과 서쪽에는 보조산성이 있어 공산성을 보호하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멸망 뒤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했던 일화도 있다.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14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