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 독경 ♣>/성지 * 여행

月尾山 공원

화엄행 2009. 4. 20. 18:01

 

 

 

 

 

 

 웜미돈대의 정상과 대포

 

 

 

인천대교 원경 (송도신도시 ~ 영종도)

 

월미산 정상에서 바라본 작약도 등등의 섬

 

전통문화 체험지구 내의 부용정 

 

 

월미공원의 역사 

월미도는 백제이후 영종도와 함께 중요한 교통로였고,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지키는 군사기지 였으며, 개항기에는 외국선박이 조선에 들어오기위해 머무는 첫 기착지였습니다.

 

'월미도'  섬이 육지와 연결된 것은 1906년이었으며, 해방이후에는 미군의 "해양경찰대" 기지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시 인천 상륙작전의 첫 상륙지점이 되었고, 이후 군부대가 주둔하여 개방되기까지 50여년동안 시민의 출입이 제한되었으나, 2001년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부지를 인수하고 도시자영공원으로 개방하게 되었다.

 

현재 월미공원조성 1단계공사가 2007년 7월 준공되었으며, 월미산 정상에는 유리전망대가 2005년 10월 설치되어 영종도 등의 섬과 인천항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있다

 

월미행궁지(月尾行宮址)
유적지명 월미행궁지(月尾行宮址)
시대구분  조선시대 종류  관청
지정구분   지정종류  
소재지  중구 북성동 90번지(월미공원내)
유적개요

월미도 행궁지는 월미도 동쪽해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월미도 행궁이 임해사지(臨海寺址)에 자좌우오향(子坐午向)으로 건립되었는데

인천부사 윤부(尹)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월미도 행궁은 병자호란 후 새로 개척한 인천, 월미도, 영종도를 거쳐 강화에 이르는

입수로(入守路)에 설치한 것으로 임금의 임시 거처로 마련된 공간이다.

월미행궁은 효종 7년(1656)에 처음으로 창건되고, 숙종 21년 개축되었다.

월미행궁은 18세기 중엽이후 대청관계의 변화로 퇴락한 것으로 파악된다.

행궁은 지금의 월미공원 입구에서 50m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월미행궁지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그린비치로 불리기도 하였다.
▶인천남부종합학술조사,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3.
간추린 인천사, 인천학연구소, 1999.

 

 

○ 소개

한국전쟁 때 함포사격으로 훼손되었다 세월이라는 처방전으로 치료되어 제 모습을 찾은 월미산이 반세기만에 시민의 품에 안겼다. 자유공원 9배 크기에 달하는 월미산의 숲 속에는 방울꽃, 금강초롱, 자주달개비꽃 등 259종에 이르는 식물이 분포돼 있다. 월미산 등반로는 2곳이 있는데 하나는 전통공원, 다른 하나는 월미도 만남의 광장으로 이어진다. 해발 108m의 정상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정도로 바닷바람과 숲의 향긋함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산책하기 좋다. 산 주위를 빙 도는 순환로와 정상을 향하는 오르막길로 이루어진 월미산에 오르면 드넓게 펼쳐진 인천항과 영종․용유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 포인트는 예포광장과 23m 높이의 월미전망대. 특히 유리로 만든 월미전망대는 야간에 조명을 비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 산행안내

월미산을 오르는 길은 꼭 남산을 오르는 길처럼 다소곳한 오솔길이다. 잘 닦여진 그 길은 경사도 그리 급하지 않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정상을 향해 올라갈수록 월미도 문화의 거리와 놀이동산, 회집들은 작아진다.

이윽고 정상.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가깝게는 인천항으로 들고나는 여객선과 화물을 가득 실은 화물선들이 보이고 멀리는 2001년 3월에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한 영종도가 보인다. 만약 날씨가 좋은 날이라면 북녘 땅도 보일 듯하다.

월미산의 크기는 자유공원의 아홉 배. 그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탓에 때묻지 않은 처녀림을 간직하고 있다. 정상까지 걸어서 15분이면 족하다. 그곳에 인천의 진면목이 있다.

 

월미도(月尾島)는 인천광역시 중구에 속해 있는 섬이었다. 현재는 섬과 육지 사이가 메꾸어졌다. 섬의 생김새가 반달의 꼬리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대한제국 때에는 일본 해군 기지와 러시아 석탄창고 등이 잇따라 이곳에 들어서면서 열강들이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다. 1886년 병인양요 때 인천 앞바다에 정박했던 프랑스 함대의 대장 이름을 따서 외국 지도에 로즈 섬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1923년 1킬로미터의 제방을 쌓으면서 육지와 연결되고 이 때부터 유원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주로 일본인들이 사용하기 위하여 바닷물을 데워서 목욕을 즐기는 조탕, 별장, 요정, 해수풀장 등이 들어섰다. [1] 

 

  1. 유연태 [2005년 5월 20일]. 《서울근교여행》, 초판, 서울: 넥서스BOOKS, 88.

 

침략·전쟁의 섬 월미도를 '평화 공원'으로
온갖 기념물 난립과 개발계획에 신음

인천시민의 염원과 시 당국의 노력에 의해 2001년 10월에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어렵사리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월미공원이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 개항 이전의 한적한 어부들의 섬이었던 월미도

 

일찌기 한적했던 어부들의 섬이었던 월미도는 근대에 들어 그 운명이 전변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을 일으킨 프랑스 함대는 그들의 사령관의 이름을 따 해도에다 월미도를 'Roze Island'라 표기하였다. 그들의 뒤를 이어 조선을 침탈한 서구 제국주의국가들은 월미도를 조선 침탈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하였다.

그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한국을 침탈하려는 외세에 인천이 개항장으로 열리고, 다시 인천에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열강 일본, 러시아, 미국 등에 의해 월미도는 침략의 전초기지로 조차되었던 것이다.

개항장 부산의 절영도, 목포의 고하도와 비슷한 시련을 겪었던 월미도는 결국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조선이 식민지로 떨어지면서 재차 식민자본에 의해 대규모 유원지로 개발되었다. 억압에 의해 강제된 평화 속에서 위락지로 각광받았던 월미도는 그러나 해방 이후 곧 미점령군의 군사지대로 화하더니 한국전쟁을 맞아 인천상륙작전의 첫 상륙지점으로 집중포화를 맞음으로써 초토화되고 말았다.

제국주의 외세의 침략과 동서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어렵게 전개된 한국 근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월미도의 역사이다. 이러한 월미도의 역사를 교훈삼아 우리는 침략과 전쟁의 20세기를 넘어 상생과 평화의 21세기를 설계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어렵사리 귀환한 월미공원을 인천시민을 비롯하여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슬기를 모아 전쟁이 없는 평화의 땅으로, 자연과 인간과 세계가 교류하는 평화의 공원으로 가꾸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월미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움직임들을 보면서, 자칫하면 월미공원이 갖가지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난개발되고 말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해군제독의 이름을 딴 월미도 지도

▲ 외세에 의해 침범당한 개항기의 월미도와 인천 앞바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서는 러일전쟁시에 침몰한 '바리아크호'의 추모비를 월미도에 건립해줄 것을, 그것도 인천시민이 낸 세금으로 건립해줄 것을 인천광역시에 요구했다고 한다. 참으로 후안무치한 발상이다. 러시아와 일본이 왜 월미도 앞에서 해전을 벌였는가, 만약 러일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돌아갔다면 우리 역사는 또 어찌 됐을 것인가를 러시아 대사관에서는 되새겨보기 바란다. 러시아 대사관측의 요구에 별다른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인천시에서는 분명한 거부의사를 표시해야 할 것이다.

 

 ▲ 월미도 앞바다를 피로 물들인 러일전쟁

 

한편, 해양수산부 산하 인천해양수산청에서는 월미도에 국내 최대의 조류정보 전광판 설치를 위해 부지를 내어줄 것을 인천시에 요구했다고 한다. 가로 20m, 세로 10m의 이 초대형 전광판 설치를 위해서는 월미공원 중턱의 200㎡가 파헤쳐져야 한다. 빈번한 선박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지만 부처이기주의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이곳이 새로 개발된 항로도 아닐뿐더러 오늘날 같이 정보통신이 발달한 상황에 비추어본다면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왜 꼭 이 촌스러운 흉물 전광판을 월미도에 세워 월미공원을 망쳐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이 또한 인천시에서 분명한 거부의사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전국 지자체 중에서 처음으로 도시경관조례를 제정했다고 자랑하는 인천시에서 월미공원의 경관을 크게 훼손하는 조류전광판을 용인한다면, 스스로를 비웃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 일제시대 유원지로 개발된 월미도

해군은 해군대로 년전에 있었던 북한 해군과의 '연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기념비를 세우겠다고 예산을 수립해 놓았다고 한다.

2001년에 월미도를 인천시에 팔고 철수하면서도 월미산에 오르는 길목에 위치했던 해역사 사령부 관사터 부지를 유독 팔지 않았던 이유가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 부시정부의 일방적인 강경노선에 더하여 북한 핵문제가 불거진 상황에서 남북간의 호전적 대결의식을 조장하는 이런 기념비가 평화의 땅이 되어야 할 월미도에 다시 세워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려운 국내외적 여건 속에서 노무현 새정부가 햇볕정책을 계승하여 평화번영정책을 추진하려 하는데 해군의 이러한 처사는 새정부의 평화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인천 상륙작전의 첫 상륙지점이었던 월미도

 

이외에도 월미공원에는 여러 주체들에 의해 갖가지 차원의 조성계획들이 난무하고 있다. 해양수산부에서는 '오션피아'(해양과학관)라는 대규모 시설을 세울 거창한 계획을 입안하여 부산과 여수, 그리고 월미도를 두고 저울질하고 있다고 한다. 인천시에서는 군부대 철수 이후 월미공원 조성계획을 세우면서 애초에는 고려하지 않았던 미주이민박물관을 월미도에 세우겠다고 갑작스럽게 발표하였다. 안상수 시장이 미국에 가서 이민 백주년기념사업에 참가한 이후의 일이다.

또 한편에서는 철거와 이전 여론이 높은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장군 동상을 이곳에 옮기자는 논의가 일고 잇다고 한다. 연안부두 입구에 세워져 있다가 지난해에 철거한 흉물스런 개항100주년 기념탑을 월미도에 옮기자는 뜬금 없는 이야기도 들린다. 월미공원을 담당하고 있는 인천서부공원사업소에서는 월미도의 역사적 정체성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무려 160여억원을 들여 오밀조밀한 전통정원을 중심테마로 하는 공원조성계획을 진행중이다.

이 모든 계획들이 그 나름의 근거와 필요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온갖 계획들이 인천시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각 주체들의 이해와 욕망에 따라 중구난방으로 제시되고 있고 대부분 밀실에서 추진된다는 데 있다.

50여년간 군사지대로 묶이면서 역설적이게도 인천의 친수녹지공간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월미도, 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의 축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 교육의 산 증거인 월미도를 온갖 분열된 이미지와 시설들로 성급히 개발할 일이 아니다. 인천시와 유관기관에서는 이제라도 월미도의의 정체성을 인천시민사회와 함께 깊이 토론해나가면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러한 고민과 장기적 안목 없이 지금처럼 무질서한 힘의 논리에 따라 공원개발이 추진된다면 월미공원은 또 하나의 조잡한 공원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언론과 시민사회의 관심 또한 절실한 사안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