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역사의 향기 ♧

★ 漢城府 설치 ★

화엄행 2009. 4. 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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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양정도(定都)

 

 

> 천도론의 배경


  고려 후기 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은 몽고와의 전쟁과 元 간섭기를 통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사전(私田)이 가산화(家産化)되는 대토지소유의 확대현상으로 농장(農莊)이 발달하고, 정치적으로는 외세의존적인 권문귀족의 독점적 정권과 신흥 사대부 세력의 갈등이 깊어져 갔다. 그 과정 속에서 우왕 14년(1388)의 위화도회군은 신흥사대부의 정치적 승리와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공양왕으로부터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는 1개월도 못된 8월13일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하교하여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으며, 15일에는 삼군우복사(三司右僕射) 이괄(李括)을 한양으로 보내어 궁궐을 수리하게 하는 실제적인 천도준비를 하였다. 태조가 한양천도를 서둘렀던 배경은
ⓛ 신왕조의 개창과 함께 군신상하의 심기일전을 위해서였다. 즉, 건국과 동시에 새 시설ㆍ정치를 갖기 위해서는 도읍지를 새로 정하여 새 정부의 면모를 새롭게할 필요가 있었다.
② 조선왕조가 개경을 떠나려 한 것은 풍수지리설의 작용에 의한 면을 볼 수 있다. 고려말 개경의 지력이 쇠하였다 하여 두 차례에 걸친 한양천도가 있었던 것은 개경을 빨리 떠나려는 태조로 하여금 한양을 주목케 하였다고 할 수 있다.
③ 조선왕조 개창과정에 있었던 우왕, 창왕의 폐출, 최영, 정몽주 같은 중신들의 살해, 그리고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동조하지 않은 우현보, 이숭인, 이색, 김진양 등 중진인물들의 존재는 불안요인이 되었다.

 

 

 

 

> 신도읍지의 선정


  처음 태조는 개국과 함께 곧 한양천도계획을 진행하다가 시중 배극렴 등의 계청(啓請)에 의하여 그 해 안으로 실시하려던 천도계획을 일시 중지하였는데, 그 후 천도 후보지로 등장한 곳이 충청도 계룡산하였다. 태조 일행이 계룡산하의 신후보지(지금 論山郡 豆磨面)에 도착하여 여러 신하들과 친히 산수형세를 살펴 보고 조운의 편리, 도로의 험이(險易) 관계를 조사하게 하며, 태조 일행의 귀경과 함께 관원을 남겨 두어 신도영건(營建)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또 그해 3월에는 신도 기내에 속할 주현ㆍ부곡ㆍ향ㆍ소 등 81개소를 정하고, 8월에는 경기내의 전지를 고쳐 측량하여 민정에게 나누어 주는 등 건설공사와 함께 행정관계의 여러 조치도 진행하였다. 그런데 1393년 12월에 당시 풍수지리의 권위자였던 경기 좌우도관찰사 하륜이 계룡산 도읍지 불가를 말하였기 때문에 신도건설공사는 중지되고 말았다. 이후 신도 후보지로 등장한 곳이 무악이었다. 그러나 태조 3년 2월 조준ㆍ권중화 등으로 서운관의 관리들과 함께 현지를 답사케 하였는데 그 결과 그곳은 지역이 좁아 새로운 도읍지로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그 3년 7월 권중화ㆍ정도전ㆍ성석린ㆍ하륜 등 중신으로 하여금 신도읍지를 고르게 하여 태조 일행이 한양을 구경하고 송경으로 돌아온 후 8월 24일에는 정식으로 한양정도가 결정되고, 뒤이어 한양정도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니, 이것은 당초 한양천도를 진행하던 때부터 2년 후의 일이었다.

 

 

 

 

> 한양정도의 실현


  태조 3년 9월 9일에는 권중화ㆍ정도전ㆍ심덕부ㆍ김주ㆍ이직 등을 한양으로 보내 오늘날 종로구 지역을 중심으로 종묘ㆍ사직ㆍ궁궐ㆍ관아ㆍ시진ㆍ도로의 기지를 선정ㆍ구획하여 새 수도 한양의 영건사업은 본격적인 진행을 본 것이었다. 그후 한달을 지난 10월 25일에는 각 관청 관원을 두 사람씩 남기고 문하시랑찬성사 최영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 등으로 송경에 남아 있는 분도평의사사의 일을 맡아보게 한 다음 신도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공사건설이 진행중인 1395년 9월 종묘와 경복궁이 이루어 지고 12월에 왕이 新宮에 입어하게 되니 신도의 면모는 차츰 갖추어 지게 되었다. 또한, 관아ㆍ시가ㆍ도성ㆍ궁성 등의 건설이 차례로 이루어지고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치어 1395년 6월에 판사ㆍ부판사ㆍ윤ㆍ소윤ㆍ판관ㆍ참군 등의 관직을 두었다. 다음해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ㆍ서ㆍ남ㆍ북ㆍ중의 5부 52방으로 구획하고,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니 한성부는 일국의 수도로서 내용과 외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오늘날 중구지역은 한성부 5부 가운데 남부전역과 서부의 일부지역을 포함하였다.

 

 

 

 

 

2) 한성부 설치와 남부

 

 

  > 한성부 설치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함으로써 도읍지가 옮겨졌으며, 다음해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하니, 이후 한성부는 1910년 10월 1일 경성부로 개칭될 때까지 518년간 조선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 한성부 직제와 관장업무


  조선왕조 건국초기 개성부의 직제는 고려왕조의 직제에 따라 개성부에 판사2명, 윤 2명, 소윤 2명, 판관 2명, 참군 2명 등의 관원을 두었고, 한양으로 천도한 후에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하고 판사를 판부사로 개칭하였다. 예종때에 다시 판부사를 판윤으로 개칭하고 윤을 좌윤ㆍ우윤으로 하였으며 소윤을 서윤으로

 



< 한성부직제변천도 >


 

      시대
구분
태조원년
(1392)
태조4년
(1395)
예종원년
(1469)
숙종12년
(1686)
영조1년
(1725)
영조40년
(1764)
고종24년
(1887)
고종31년
(1894)
고종32년
(1895)
고종33년
(1896)
正2品 判事(2) 副判事(1) 判尹(1) 判尹(1) 判府事(1) 判尹(1) 判尹(1) 府尹(1) 觀察使(1) 判尹(1)
從2品 尹(2) 尹(2) 左尹(1)
右尹(1)
左尹(1)
右尹(1)
左尹(1)
右尹(1)
左尹(1)
右尹(1)
左尹(1)
右尹(1)
主事
(인원수
미상)
參事官(1)

主事
(약간명)

少尹(1)
主事(5)
正4品 少尹(2) 少尹(2)          
從4品     庶尹(1) 庶尹(1) 庶尹(1) 庶尹(1) 判官(2)
從5品 判官(2) 判官(2) 判官(2) 判官(2) 判官(2) 判官(2) 主簿(2)
從6品         主簿(1) 主簿(2)  
正7品 參軍(2) 參軍(2) 參軍(3) 參軍(2) 參軍(1)    

하여 판윤 1명, 좌윤 1명, 우윤 1명, 서윤 1명, 판관 2명, 참군 3명을 두었다.

< 漢城府職制變遷圖 >
※ ( )내 숫자는 인원수

 

 

 

 

> 한성부 행정구역 설정과 남부


  조선초기의 한성부 관할행정구역은 도성으로부터 사방10里까지로 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원(松溪院)과 대현(大峴), 서쪽으로는 楊花渡(양화도) 德水院(덕수원), 남쪽으로는 한강과 露渡(노도)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하였다. 1396년에는 백악산ㆍ낙산ㆍ목멱산ㆍ인왕산을 연결하는 약 18㎞의 도성을 쌓았으며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5부 52방으로 하고 각 방에는 방명표를 세우게 하였다.

 



ㆍ 東部 12坊

------ 燕喜坊, 崇敎坊, 泉達坊, 彰善坊, 建德坊, 德成坊, 瑞雲坊, 蓮花坊, 崇信坊,
........................... 仁昌坊, 觀德坊, 興盛坊


ㆍ南部 11방

------ 廣通坊, 好賢坊, 明禮坊, 太平坊, 薰陶坊, 誠明坊, 樂善坊, 貞心坊, 明哲坊,
.......................... 誠身坊, 禮成坊


ㆍ西部 11방

 ------ 永堅坊, 仁達坊, 積善坊, 餘慶坊, 仁智坊, 皇華坊, 聚賢坊, 養生坊, 盤石坊,
.......................... 神化坊, 盤松坊


ㆍ北部 10방

------ 廣化坊, 陽德坊, 嘉會坊, 安國坊, 觀光坊, 鎭定坊, 順化坊, 明通坊, 俊秀坊, 義通坊


ㆍ中部 8방

------ 貞善坊, 廣幸坊, 寬仁坊, 壽進坊, ㆍ靑坊, 長通坊, 瑞麟坊, 堅平坊

 

 

 

 

3) 도성건조와 崇禮門(숭례문) 건립

 

 

> 도성건조


  봉건전제국가를 상징하는 궁실과 종묘ㆍ사직이 축조되면서 국가권위의 상징이자 수도방어의 필수조건인 도성의 영건이 요망되었다. 정도전이 백악ㆍ인왕산ㆍ남산ㆍ낙산에 올라 실측한 결과 四山을 연결한 총길이 59,500尺이었다. 여기서 중구지역과 관련해 보면 四山가운데 남산을 중심으로 좌우능선으로 이어진 성곽이 중구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도성길이의 45% 이상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의 도성과 궁성도 태조 5년에 1월부터 7년 3월까지 약 2년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 숭례문(남대문) 건립


  규모가 큰 興仁門(흥인문, 동대문)은 태조 6년에, 숭례문은 태조 7년에 각각 완공되었으며 南小門은 후에 별도로 세워졌다. 숭례문은 서울지방을 도성 도성 안과 밖, 그리고 도성안을 흐르는 청계천 수계와 용산방향으로 흐르는 蔓草川(만초천, 샛강) 수계를 나누는 언덕 위에 건립되었으며, 국보 제1호로 보존되고 있다.
  도성 성곽과 더불어 중구지역에는 도성 8門 가운데 4大門의 하나인 숭례문과 광희문ㆍ남소문ㆍ소덕문 등의 소문이 완성되었다. 이들 성문은 태조 5년(1396) 제1차 축성때부터 도성과 더불어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성문은 특별한 기술을 요하는 공사였고 또한,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1차 축성때는 완성되지 못하고 같은해 실시한 제2차 공사 때에 대체로 완성하고 성문의 명칭도 명명하였다. 숭례문은 도성 8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인데 그것은 문화재적 가치에 의한 것 이외에도 수도의 위치상으로 경복궁의 앞쪽이 되는 남쪽에 있어 수도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교통상으로도 가장 중요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숭례라는 편액은 예절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 도성 8大門의 명칭 >


 

방 향 명 칭 속 칭
正北
肅淸門(숙청문)
-
東北
弘化門(홍화문)
東小門
正東
興仁門(흥인문)
東大門
東南
光熙門(광희문)
水口門
正南
崇禮門(숭례문)
南大門
西南
昭德門(소덕문)
西小門
正西
敦義門(돈의문)
西大門
西北
彰義門(창의문)
-
 

4) 수도방위체제와 軍營(군영)

 

 

> 수도방위체제


  조선전기 수도 한성에는 왕실보호를 직접 담당하는 禁軍(금군)이 있고 또한, 수도방위를 위한 5衛가 있었으나,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왕권의 보호와 직결되며, 이 왕권의 보호는 상대적으로 수도방위와 직결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왕조는 그 이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제도면에 있어서의 각종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재정비ㆍ재편성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즉 임진왜란 중 三手兵(삼수병)을 중심으로 하는 浙江兵法(절강병법)을 도입하여 중앙에는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지방에는 束伍軍(속오군)이 설치되는 새로운 군사제도로 개편하여 외난을 타개하는데 일단 성공하였다. 그 후 중앙에 인조초 이괄의 난을 계기로 하여 御營廳(어영청)ㆍ摠戎廳(총융청)ㆍ守禦廳(수어청)ㆍ禁衛營(금위영) 등의 五軍營(5군영) 체제가 숙종 때까지 갖추어 졌다.

 

 



< 한성부 도성 수비구역 >


◎ 금위영 前停(전정)에 배치된 部(부)ㆍ坊(방)ㆍ契(계)


- 남부 낙선방 금위영창계(장충동)
......... 성명방 석교상계(장충동ㆍ예장동)ㆍ석교하계(예장동)
..........훈도방 주자동계(예장동ㆍ남산동)
....................정승계(충무로2ㆍ3가, 주자동ㆍ남학동)
....................박정계(충무로2ㆍ3가, 주자동ㆍ남학동)



◎ 금위영 左停(좌정)에 배치된 部(부)ㆍ坊(방)ㆍ契(계)


- 남부 훈도방 죽진동계(을지로3가ㆍ초동ㆍ명동), 혜민서계(을지로2가), 하돌지방계(을지로2가ㆍ3가), ...................묵정동계(수표동), 이현계(수표동), 저진동계(남산동)
..........태평방 한수견계(수하동ㆍ장교동), 보십내계(수하동ㆍ장교동), 외계(수하동ㆍ장교동),
...................구리현계(을지로2가), 선선계(을지로2가), 하홍문계(수하동ㆍ장교동),
...................수하동계(수하동ㆍ을지로2가), 허병문계(을지로2가)
..........광통방 동행랑계(을지로2가)
..........명례방 장낙내계(을지로2가)
- 서부 반석방 사거리계(동자동ㆍ갈월동), 도저동계(도동ㆍ후암동), 석교계(동자동ㆍ갈월동),
...................조진계(만리동ㆍ청파동)



◎ 금위영 中停(중정)에 배치된 部(부)ㆍ坊(방)ㆍ契(계)


- 남부 호현방 호현방계(회현동ㆍ남산동), 장흥동계(회현동ㆍ남산동), 송현계(회현동ㆍ남산동),
...................의산위계(남대문로3,4가ㆍ북창동), 본관내계(북창동), 소공동계(소공동),
...................부월변계(소공동ㆍ남대문로)
.........명례방 명례동계(남산동ㆍ회현동), 부계(남산동ㆍ회현동)
- 서부 양생방 창동계(남창동), 송현계(남창동)
.........반석방 연지계(연래동), 약전계(만리동)

 



◎ 금위영 右停(우정)에 배치된 部(부)ㆍ坊(방)ㆍ契(계)


- 남부 호현방 남소문월변계(태평로1가)
.........광통방 군기사월변계(명동)
- 서부 양생방 태평관계(남대문로4가)
.........황화방 남소문내계(서소문동), 취현동계(남소문동), 소정동계(정동)
.........반석방 고순청계(의주로ㆍ합동ㆍ충정로)

◎ 금위영 後停(후정)에 배치된 部(부)ㆍ坊(방)ㆍ契(계)


- 남부 광통방 모진계(을지로1가ㆍ다동), 손복동계(을지로1ㆍ2가), 대다방북변계(을지로1ㆍ2가),
...................소다방남변계(을지로1ㆍ2가), 서행랑상계(을지로1ㆍ2가), 옹대리문계(을지로1ㆍ2가),
...................성천계(을지로1ㆍ2가), 서행랑상계(을지로1ㆍ2가), 소천변계(을지로1ㆍ2가)
..........호현방 이간병문계(을지로2가ㆍ명동)
- 서부 여경방 장생동계(신문로2가ㆍ정동), 두석계(신문로2가ㆍ정동), 홍선내계(정동),
.................. 해풍군계(정동),
...................동령동계(정동), 서학동계(태평로ㆍ정동), 내계(정동ㆍ태평로), 모진계(을지로1가),
...................내자동계(을지로1가)

 

 

◎ 어영청 右停(우정)에 배치된 部(부)ㆍ坊(방)ㆍ契(계)


- 남부 성명방 연성위계(을지로3가)
.........낙선방 와유두아계(을지로3가ㆍ초동ㆍ저동)
.........명철방 수구문내계(광희동), 어영청창계(장충동)

 

 

◎ 어영청 後停(후정)에 배치된 部(부)ㆍ坊(방)ㆍ契(계)


- 남부 명철방 남소문계(장충동), 쌍리문동계(필동ㆍ장충동), 청령위계(을지로4ㆍ5가)
.........낙선방 정유리계(을지로3ㆍ4가), 왜관동계(충무로3ㆍ4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