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샘(金井)에'하늘 나라의 고기(梵魚)'살았다는 梵魚寺(범어사).
梵魚寺(범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禪刹大本山 金井山 梵魚寺)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대사찰이다.
부산의 진산으로 불리는 金井山(금정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대가람.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梵魚寺(범어사)는 海印寺(해인사), 通度寺(통도사)와 더불어 嶺南의 3대 寺刹로 불린다. 단일 寺刹의 규모면에서는 국내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梵魚寺(범어사)는 新羅 文武王때 의상(義湘) 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삼층석탑(보물 제250호), 대웅전(보물 제434호), 일주문(지방유형문화재 제2호), 당간지주(지방유형문화재 제15호), 석등(지방유형문화재 제16호)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일주문은 네 개의 돌기둥 위에 다시 나무기둥을 잇대고 섯가래와 지붕을 입힌 모습으로 어디서도 보기 힘든 양식이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끈다.
梵魚寺 (범어사 ) 이름의 유래
梵魚寺(범어사)'라는 절 이름의 由來(유래)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金井山(금정산)은 東萊縣(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黃金色(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하늘 나라의 고기(梵魚)'라고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 고한다.
創建 說話
梵魚寺(범어사)의 創建(창건) 연대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가장 합리적이고 정확한 것은 新羅 文武王 18년(서기 678년) 의상(義湘)대사에 의해서다. 文武王 10년(670년) 義湘大師(이상대사)가 당나라로부터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국민들을 화엄사상(華嚴思想)으로 교화하기 위하여 전국에 세운 華嚴十代(화엄십대) 사찰중의 하나로서 文武王 18년에 창건된 것이다. 옛 기록에 의한 창건의 연기(緣起)는 이러하다:
일찍이 바다 동쪽 왜인(矮人)들이 10만의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동쪽에 이르러 新羅를 침략하고자 했다. 대왕이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문득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외쳐 부르는 것이었다. 신인이 말하기를, "정성스러운 대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태백산 산중에 의상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시는데 진실로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의 제7후신(第七後身)입니다. 항상 성스러운 대중 1천명, 범부 대중 1천명과 신중(神衆) 1천명, 모두 3천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리(華嚴義理) 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과 사십법체(四十法體) 그리고 여러 신과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수행합니다. 또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빛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서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 구름을 타고 온 금빛 고기가 헤엄치며 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이하여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칠일 칠야 동안 화엄 신중을 독송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金色身)으로 화현(化現)하고 사방의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몸을 나타내어 보현보살, 문수보살, 향화동자, 40법체(四十法體)등 여러 신과 천왕들을 거느리고 동해에 가서 제압하여 왜병들이 자연히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에 한 법사가 계속해서 이어가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병사가 바위에서 또한 울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화엄 정진을 한다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전쟁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라 하고 신인은 곧 사라졌다.
왕은 놀라 깨어났고, 아침이 되자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꿈 이야기를 했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義湘스님을 맞아오게 하였다. 왕은 義湘스님과 함께 친히 金井山으로 가서 七日七夜를 일심으로 독경했다. 이에 땅이 크게 진동하면서 홀연히 여러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각각 현신(現身)하여 모두 병기를 가지고서 동해에 가서 왜적들을 토벌하니 혹은 활을 쏘고 혹은 창을 휘두르며 혹은 모래와 돌이 비 오듯이 휘날렸다. 또한 바람을 주관하는 신은 부채로 흑풍(黑風)을 일으키니 병화(兵火)가 하늘에 넘치고 파도가 땅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왜적들의 배는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왕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義湘스님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봉하고 金井山 아래에 큰절을 세웠으니 이것이 梵魚寺를 創建한 由來이다.
이와 같이 신인의 현몽(現夢)에 의하여 창건된 신라 당시의 梵魚寺(범어사) 규모는 대단히 컸던 것으로서, 미륵전(彌勒殿), 대장전(大藏殿), 비로전(毘盧殿), 천왕신전(天王神殿), 유성전(流星殿), 종루(鐘樓), 식당(食堂), 강전(講殿), 목욕원(沐浴院), 철당(鐵幢) 등이 별처럼 늘어지고 요사(寮舍) 360방이 양쪽 계곡에 늘어섰으며, 사원의 토지가 360결이고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로서 명실상부한 국가의 대 명찰이 되었다.
사적기(事蹟記)에서는 당시의 규모를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금정산 아래에 이중전을 창건하였고 그곳에 미륵석상과 좌우보처와 사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 모셨으니 그것이 곧 미륵전이다. 또 미륵전 서쪽에 3간의 비로전을 세우고 그 곳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병기를 든 향화동자상을 모셨다. 미륵전 동쪽에는 3간의 대장전을 세우고 팔만대장경과 3본(三本)의 화엄경과 3장(三丈)의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도량의 상층과 중간층에 별처럼 늘어섰으니 그 밖의 전각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당시의 지관(地官)은 의상스님이고, 공사를 총감독한 이는 당시의 대왕이며, 기와일을 감독한 사람은 평장사(平章事) 유춘우(柳春雨)였고, 터를 닦고 재목을 운반한 사람은 담순귀(曇順鬼)등이었다.
상층의 길이는 220척이고 높이는 10척이었다. 그리고 다리의 층계는 19층이었다. 미륵전(彌勒殿)은 석휘(釋暉) 화상과 정오(正悟) 화상이 화주가 되어 세운 바이고 천왕신전(天王神殿)과 주불전(主佛殿)은 지연(智衍) 화상과 연철(然鐵) 화상이 화주가 되어 창건하였다. 불상에 금을 입히고 대장전(大藏殿)을 조성하였으며 대목의 일을 관장한 사람은 광숭(廣崇) 화상이었다. 그리고 혜등(蕙燈) 화상은 대장전의 시주자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강전(講殿) 3간을 세우고 주불 석상에 금을 입힌 것은 동국(東國) 왜인(倭人)이었다. 남협당과 좌우의 향화방 5간과 시간을 알리는 계명방 5간을 동쪽 언덕에 세웠다. 절의 계단은 길이가 310척이고 높이가 13척이었다. 다리의 층계는 23층이었다. 그리고 절 아래층에 5간과 위층의 3간에다 40법체제신과 사천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진압하는 모습의 소상을 만들어 세웠다.
좌우에 종루가 각각 2층이며 그 주위 좌우에 행랑이 세워졌는데 서쪽으로 9간, 북쪽으로 9간, 식당 9간 등은 범능(梵能) 스님이 창건한 것이다. 삼당은 석존(釋存) 스님 혼자 힘으로 창건한 것이고, 불상과 대당(大堂), 이협당(二俠堂)의 그림은 참연(參連) 화상이 이룩한 것이다.
3간 계단의 돌을 다듬은 사람은 혜초(惠超) 화상이다. 삼당(三堂)의 유성(流星), 천성탑(天星塔) 등은 억생(億生) 화상이 주무를 맡았다. 목욕원 3간과 석조(石槽) 절 밖의 철당(鐵幢) 33층과 그 표면의 33천을 조성하고 절 이름을 梵魚寺라고 하였다. 또 전답에 관한 문서는 김생(金生(711∼791))이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전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또한 문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사원의 전답은 총 360결이고 노비는 100호가 늘 360방에 거처했었다. 항상 화엄의 의리(義理)를 공부하고 또 華嚴神衆(화엄신중)을 염송하여 倭人(왜인)들을 진압하였다."
지금으로서는 사적의 기록을 일일이 증거할 길이 없으나 아무튼 창건 당시의 사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대강 짐작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범어사가 화엄십찰의 하나로서 화엄의 의리(義理)를 공부하고 華嚴神衆(화엄신중)을 염송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찰의 구도와 건물 배치 등은 반드시 화엄의 사상을 기저(基底)로 하여 화엄경의 이상향인 화장세계(華藏世界)를 지상에 실현해 본 것이다.
梵魚寺는 金井山 북동쪽 기슭에 있다. 新羅 때 개창된 古刹이다 壬辰倭亂 때 전소되어 重建되고 그 후 다시 火災를 입고 再建되는 곡절을 겪었다. 李安訥(이안눌)이 梵魚寺란 시를 남겼는데
步入石門逢晩晴, 松林五月風冷冷.
보입석문봉만청, 송림오월풍랭랭.
老僧相對坐溪上, 日暮雲生山更靑.
노승상대좌계상, 일모운생산갱청.
석문을 걸어 들어가니 저녁 하늘이 개었는데
오월의 솔숲은 바람이 맑구나.
늙은 스님 마주하여 시냇가에 앉았는데
저녁 구름 일어나며 산 푸르네.
이안눌청룡암시목판(李安訥靑龍巖詩木版)소장 : 범어사
1999년 9월 3일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 동래부사를 역임한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 지은 靑龍巖詩(청용암시)와 범어사증도원산인(梵魚寺贈道元山人) 시를 자필로 쓴 것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이안눌은 동래부사로 재임하는 동안 범어사를 자주 찾았다. 당시 범어사의 혜정장로가 李安訥(이안눌)에게 시를 한 수 지어 바위에 새길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훗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에 시를 지어 바위에 새긴 것이 靑龍巖詩(청룡암시)인데, 현재 범어사 지장전(地藏殿) 옆에 있는 靑龍庵(청용암) 전면에 새겨져 있다.
목판은 임진왜란 이전에 판각된 것으로 연대가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李安訥(이안눌)의 친필 판각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靑龍巖詩(청룡암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德水李居士 萊山晶上人
덕수이거사 래산정상인
烟霞一古寺 丘壑兩閑身
연하일고사 구학양한신
掃石苔粘 觀松露塾巾
소석태점 관송로숙건
蒼崖千劫 新什是傳神
창애천겁 신집시전신
덕수 땅 이거사
동래 산 혜정상인
강호의 한 오래된 절에
산수 즐기는 한가한 두 사람
바위를 밟으니 신발에 이끼 파랗고
소나무를 보느라 두건에 이슬 젖는다
수만 겁 내려온 푸른 바위에
이제 새로이 문장을 새기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李安訥(이안눌)의 다른 시들
강상문가(江上聞歌) - 이안눌(李安訥)
江頭誰唱美人辭 正是孤舟月落時
강두수창미인사 정시고주월락시
?璥戀君無限意 世間唯有女郞知
추창연군무한의 세간유유여낭지
강가에서 그 누가 미인사를 부르네
바로 지금 외로운 배에 달이 질 무렵에
슬프도다 연군의 무한한 정을
세상에서 아는 것은 오직 기생뿐이어라.
朝鮮(조선) 중기의 몇몇 개인문집 속에서는 端午扇(단오선)을 하사받은 신하들이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적어 나누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조선 중기의 文臣(문신)이었던 李植(이식·1584~1647)이 귀양가있는 자신의 숙부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1637)에게 보낸 시에서는 조정의 관원으로서 받았던 端午扇(단오선)과 그것을 받은 신하로써의 마음가짐에 대한 소회(素懷)을 엿볼 수 있다.
단옷날 동악(東岳)숙부 생각에 궁중에서 하사한 부채에 시를 지어 부치며 화답을 청하다.
新賜端陽扇 題封問楚
신사단양선 제봉문초
炎凉頻節物 夷險夙心期
염량빈절물 이험숙심기
內熱應全歇 西塵且莫麾
내열응전헐 서진차막휘
須看竹上淚 點點是相思
수간죽상누 점점시상사
단옷날에 새로이 하사받은 이 부채
시 지어 부치면서 초루의 안부 묻습니다.
덥고 추운 계절마다 자주 내리는 선물
평탄하든 험난하든 속생각 변할 리 있으리까.
내열도 이제는 완전히 사그라졌을 테니
서쪽 먼지 불어온다 부채로 부치지 마옵시고
대나무의 눈물 자국 보실 때마다
알알이 맺힌 사모의 정 생각해 주옵소서.
- 이식의 『택당선생집(澤堂先生集)』 중에서
범어사(梵魚寺), 새벽에 가는 길 - 안희선
새벽길 뚫고 달려온 걸음,
꿈길처럼 아스라한 피안(彼岸)은
금정산(金井山) 산자락
사바세계 타오르는 아침의 시린 태양,
그 눈부심...
하늘로 솟구친 외길 한 줄기,
이마에 송글 맺힌 힘겨운 땀방울
산 위에 걸터앉은 천년의 침묵,
백팔번뇌 잠재우는 금.강.계.단.(金.剛.戒.壇.)
그 단단한 촉감은 불변의 금강지(金剛智)
호출되는 산문(山門)의 아지못할 암부호,
눈 부라리는 사천왕(四天王)
숨죽이는 빛바랜 얼
도망치듯 뜨락 지나 가로 지르면,
영원의 미소 앞에 탄식하는 염원들
다가서는 미지의 음성,
실존으로 웅변하는 업장(業藏)의 두께
아득히 울리는 오성(悟性)의 목탁음
그것은 생명줄 가냘픈 맥박의 고동
불타오른 갈증에 던져진 물 한 모금
그래, 이 한 모금의 물은 정화(淨化)의 의식,
지친 영혼 달래주는 금빛의 천수(千手)
스쳐가는 장삼가사(長衫袈裟)
흩날리는 향(香) 내음
길 위에 떨구었던 살점 같은 욕망들,
어느덧 점점이 잡초되어 피어 올랐다
증거하는 아픔의 흔적이 되어
관찰사로 환생하여 범어사를 지킨 낭백(郎白) 스님의 설화
朝鮮時代 후기 범어사(梵魚寺)에 낙안 낭백(樂安 郎白) 스님이 있었다. 1719년 무렵에 사중에서 활동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으니, 역사적으로 실제 활동했던 분이다.
일찍이 東萊 범어사에 출가하여, 보시행(布施行)을 발원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재물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모두 보시했다. 또 동래의 기찰(機察) 도로변에 반송(盤松)을 심고 우물을 파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고, 동래 기장(機張)에 있는 도어령(刀魚嶺; 칼치재)에 오두막을 짓고 짚신을 삼아 행인들에게 보시했으며, 지금의 동래 온천으로 가는 대낫 다리 동편 산기슭에 오이 밭을 가꾸어 내왕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일생을 보시로써 일관하다가 마지막으로 늙은 육신까지 보시하고자, 범어사의 성지낙천(聖智樂泉) 밀림 속에서 3일 동안을 헤매다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보시했다고 전한다. 생전에 관리들의 사원에 대한 여러 가지 횡포가 가중되어 감을 마음 아프게 생각한 스님은, 죽기 전 그가 머물던 방 앞에 '開門者是閉門人(개문자시폐문인:문을 여는 사람이 바로 이 문을 닫은 사람)'이라는 유필을 남기고 타계했다.
불가(佛家)의 설화에 의하면 낭백수좌는 죽어서 서울의 조제상(趙帝相) 가문에 태어나서 일찍이 과거에 등과하여 동래부사가 되고, 또 경상감사가 되었는데 범어사로 와서 전생에 낭백수좌(郎白首座)가 살던 방문을 스스로 열고 사중의 폐단을 제거하여 주었다고 한다. 즉 낭백수좌(郎白首座)가 전생에 맹세한 다짐을 실현하였다는 인과응보담(因果應報譚)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과설화의 증좌(證左)가 되는 것이 지금 범어사경내에 있는 순상국조공 엄혁거사폐 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 ?革祛寺幣 永世不忘壇)라 한다.(해돋을 엄 日+嚴)
이 단비(壇碑)는 경상감사 조엄공(趙?公) 이 절의 폐단을 제거하여 준데 대한 은공을 길이 잊지 못한다는 단비이다. 이 단비는 1908년(순조 8년) 8월에 조중려(趙重呂)가 범어사의 요청에 의하여 써준 비문으로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공은 건륭(乾隆) 정축(丁丑)=영종 三十三年(1757년) 가을(七月)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경내에 있는 절들이 모두 산성방위(山城防衛)를 위하여 조잔(彫殘) 하였으므로 먼저 부중(府中)의 여러 폐단을 제거하고 三年 後 기묘년(己卯年)에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동래부내에 있는 각 사찰의 의승번채(義僧番債)와 범어사에서 납부하는 좌수 영지창전 보주사(左手營紙倉錢報鑄司)를 혁파한 뒤 무릇 수영의 책역(責役)을 영구히 일체감제 하도록 하였다. 이미 쇠잔한 사찰을 구하고 백성을 구휼한 여택이 가난한 승려들에게도 미쳤다. 그 성한 덕을 날이 갈수록 잊지 못하여 따로 단을 설하고 길이 송축하는 뜻을 표 한다."
라고 하였다. 단비문(壇碑文)에서 말하듯이 조엄공(趙?公)은 사찰의 폐산을 혁거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거니와 또한 민생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부사요 관찰사로 또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는 도중에 고구마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오늘날까지도 민간식량으로 널리 재배되고 있다. 趙監司(조감사)의 사적은 ≪東萊邑誌(동래읍지)≫에 의하면, "丁丑 七月到 己酉 正月 移防監司"라고 하였다. 정축년은 1757년(영조 30년)이고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승진한 것은 己卯年(기묘년 1759) 1月이니, 만 2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감사로 승진한 셈이니, 이는 조공의 선정(善政)이 만 백성의 민심을 안정시켰기 때문이리라. 공은 자비와 인덕(人德)을 몸을 통해 실천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