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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明 延壽禪師〈904年-975年> (中國淨土宗六祖 )

화엄행 2011. 11. 21. 22:27

 

 

 

 

永明延壽禪師〈904年-975年〉,俗姓王姓,名延壽,字沖元,號抱一子,錢塘[1]五代禪宗高僧,為法眼宗三祖。又被後世淨土宗推崇為淨土宗六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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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编辑] 生平

延壽禪師,原是地方官吏,於吳越世宗時,負責軍需[2],他為人正直,經常讀誦《法華經[3]

三十四歲(937年)時,翠巖令參禪師在四明山龍冊寺弘法,吳越文穆王見延壽禪師求道心切,於是准許他在翠巖禪師處出家受戒[4]。他曾在天台山天柱峰禪坐習定九十天,專心的程度,甚至有鳥類在他身上築巢[5]。後參天台山德韶國師,發明心地,為法眼宗傳人[6]。相傳他曾作偈曰:「撲落非他物,縱橫不是塵。山河並大地,全露法王身」[7]

952年,延壽禪師在奉化雪竇寺潛修苦行,並講授禪法,得到吳越國王的信奉[8]

960年吳越忠懿王錢弘俶請延壽禪師住持杭州靈隱寺

961年,延壽禪師遷慧日山永明寺,授徒兩千餘人,法聲大振,人稱「永明延壽」大師。吳越忠懿王深重大師德行,賜號“智覺禪師”,居永明寺長達十五年。高麗國王見到他所著《宗鏡錄》一書,曾派人送來袈紗,以示尊崇[9]

開寶八年(975年),大師安然圓寂。

宋徽宗諡大師為“宗照禪師”。清世宗雍正帝又加諡為“圓妙正修智覺禪師”。

[编辑] 著作

永明延壽禪師著有《宗鏡錄》,綜合了禪宗天台宗華嚴宗法相宗等四家學說,總合佛學,是一部極為重要的佛學著作。他又曾作《萬善同歸集》。

[编辑] 思想及影響

[编辑] 與淨土宗的關係

後世淨土宗推崇永明延壽大師為其六祖,永明延壽大師與淨土宗的關係,傳統上的說法,可見於清朝彭希涑《淨土聖賢錄》。據說延壽大師在一次禪定中,見觀音菩薩甘露灌入其口,後覺辯才大進[10]。後又見普賢菩薩手持金,於是決意立定修習法門,做「一心禪觀」、「萬善莊嚴淨土」二籤,連抽七次籤,皆是「萬善莊嚴淨土」,故決定修習淨土宗[11]。他並且曾寫作著名的四料簡,宣揚禪淨同修[12]。但是這些事蹟多出於後人偽造。

在最早的記載中,只記載了延壽大師專習《法華經》與精修禪觀。但是至宋神宗元豐六年(西元 1083年)王古撰《新修淨土往生傳》時,開始加入觀音灌頂[13]、誦唸阿彌陀佛[14]、放生授戒[15]等等事蹟。同時期的《東坡志林》也記載了他盜用官錢放生的故事[16]。至此之後,延壽大師在禪宗之外又兼修行淨土宗的故事不徑而走。

至南宋慶元六年(西元1200年),石芝宗曉編著《樂邦文類》時,出現了延壽大師七次抓鬮,決心專修淨土的記載[17],這個故事後又為南宋僧志磬佛祖統記》所引用,延壽大師遂被列為淨土宗六祖。

至元朝天如惟則撰《淨土或問》時,著名的四料簡才第一次出現在文獻上[18],這應該是天如惟則所造的,而偽託於延壽禪師,在名義上雖是宣揚禪淨雙修,禪淨並重,但實質上是主張以淨土宗信仰為依歸主軸的修行方向。

在這些故事的烘託之下,延壽禪師在民間的形象,逐漸由一名禪僧,轉變為專門的淨土宗修持者,於是在清朝時,被認定是淨土宗六祖,他原先在於禪宗方面的修行與佛教思想史上的貢獻反而湮沒不彰。這一方面雖然反映了延壽禪師在佛教信仰中的重要地位,另一方面也反映出淨土宗自宋朝之後逐漸取代禪宗成為漢傳佛教主流的趨勢。

[编辑] 外部連結

[编辑] 注释

  1. ^ 一說丹陽人,《龍舒增廣淨土文》卷5:「名延壽,本丹陽人、後遷餘杭。」
  2. ^ 《宋高僧傳》卷28:「時為吏,督納軍須」。《景德傳燈錄》卷26:「年二十八,為華亭鎮將。」
  3. ^ 《宋高僧傳》卷28:「其性純直,口無二言,誦徹《法華經》,聲不輟響。」《景德傳燈錄》卷26:「總角之歲,歸心佛乘。既冠,不茹葷,日唯一食。持《法華經》,七行俱下。才六旬,悉能誦之,感群羊跪聽。」
  4. ^ 《宋高僧傳》卷28:「屬翠巖參公盛化,壽捨妻孥削染登戒。」《景德傳燈錄》卷26:「屬翠巖永明大師,遷止龍冊寺,大闡玄化。時吳越文穆王,知師慕道,乃從其志,放令出家,禮翠巖為師。」
  5. ^ 《景德傳燈錄》卷26:「尋往天台山天柱峰,九旬習定。有鳥類尺鷃,巢于衣褶中。」
  6. ^ 《景德傳燈錄》卷26:「暨謁韶國師,一見而深器之,密授玄旨。仍謂師曰:汝與元帥有緣,他日大興佛事。密受記。」
  7. ^ 見《虛堂和尚語錄》卷3:「復舉,永明壽禪師,在天台韶國師會中。普請次,聞墮薪有聲,豁然契悟。乃云:撲落非他物,縱橫不是塵。山河并大地,全露法王身。」但依照《天聖廣燈錄》,此詩是洪壽禪師所作,見《天聖廣燈錄》卷27:「杭州與教寺洪壽禪師,俗姓曹氏。......後參天台山韶國師。一日,因普請,般柴墜落。乃成一頌曰:撲落非他物,縱橫不是塵。山河及大地,全露法王身。國師然之。」
  8. ^ 《宋高僧傳》卷28:「遷遁于雪竇山,除誨人外,瀑布前坐諷禪默,衣無繒纊,布襦卒歲。食無重味,野蔬斷中。漢南國王錢氏最所欽尚。」
  9. ^ 《宋高僧傳》卷28:「高麗國王覽其錄,遣使遺金線織成袈裟、紫水精數珠、金澡罐等。」
  10. ^ 《淨土聖賢錄》卷3:「嘗於國清寺行法華懺,禪觀中,見觀音菩薩以甘露灌其口,因是獲大辯才。」彭的說法又可見於南宋《龍舒增廣淨土文》卷5:「於禪觀中見觀音,以甘露灌其口。乃獲觀音辯才,下筆盈卷。」
  11. ^ 《淨土聖賢錄》卷3:「以宿願未決,登智者禪院,作二鬮:一曰一心禪定,一曰萬行莊嚴淨土。冥心精禱,七拈皆得淨土鬮,於是一意修淨業。」
  12. ^ 《淨土聖賢錄》:「又嘗作四料簡云:有禪無淨土,十人九錯路。陰境若現前,瞥爾隨他去。無禪有淨土,萬修萬人去。但得見彌陀,何愁不開悟。有禪有淨土,猶如帶角虎。現世為人師,當來作佛祖。無禪無淨土,鐵床并銅柱。萬劫與千生,沒箇人依怙。」
  13. ^ 《新修淨土往生傳》卷下:「修法華懺經七年。禪觀中,見觀音菩薩,親以甘露灌于口,遂獲觀音辨才。下筆成文,盈卷乃已,志求西方淨土。」
  14. ^ 《新修淨土往生傳》卷下:「住持雪竇山院,朝暮演法,夜則念阿彌陀佛。......總心為宗,以悟為訣。日暮往別峰,行道念佛,自為難繼,不欲強眾。然密相隨者,常及百人。夜靜,四旁行人,聞山中螺唄天樂之聲,伺求之。見師於山腹中平夷處,旋繞行道。忠懿王歎曰:自古求西方者。未有如是。」
  15. ^ 《新修淨土往生傳》卷下:「住永明十五年,度弟子一千七百人。常興七眾,授菩薩戒。夜施鬼神食,晝放生命,不計其數,皆迴向淨土。」
  16. ^ 《東坡志林》卷二:「錢塘壽禪師,本北郭稅務專知官,每見魚蝦,輒買放生,以是破家。後遂盜官錢,為放生之用。事發坐死,領赴市矣。吳越錢王使人視之,若悲懼如常人,即殺之;否,則捨之。禪師淡然無異色,乃捨之。遂出家,得法眼淨。」後此故事被南宋王日休引用,寫入《龍舒增廣淨土文》卷5:「初為縣衙校,多折官錢。勘之止是買放生命,罪當死。引赴市曹,錢王使人探之,若顏色變即斬之,不變來奏。臨斬,顏色不變,乃貸命。」
  17. ^ 《樂邦文類》卷3:「又中夜旋遶,次見普賢前,供養蓮華忽然在手。因思夙有二願,一願終身常誦法華,二願畢生廣利群品。憶此二願,復樂禪寂進退遲疑,莫能自決。遂上智者禪院作二鬮:一曰,一心禪定鬮。二曰,誦經萬善莊嚴淨土鬮。冥心自期曰:儻於此二途,有一功行必成者,須七返拈著為證。遂精禱佛祖,信手拈之,乃至七度,並得誦經萬善生淨土鬮。由此一意,專修淨業。遂振錫金華天柱峰,誦經三載。」
  18. ^ 《淨土或問》:「天如老人,方宴默於臥雲之室,有客排闥而入者,禪上人也。因命坐之,坐久,夕陽在窗,篆煙將滅,客乃整衣起立,從容而問曰:竊聞永明壽和尚,稟單傳之學於天台韶國師,是為法眼的孫,匡徒於杭之淨慈,座下常數千指。其機辯才智,雷厲風飛,海內禪林,推之為大宗匠。柰何說禪之外,自修淨土之業,而且以教人。復撰揀示西方等文,廣傳於世。及作四料揀偈,其略曰:有禪無淨土,十人九蹉路;無禪有淨土,萬修萬人去。看他此等語言,主張淨土,無少寬容。無乃自屈其禪,而過贊淨土耶?此疑非小,師其為我辯之。 」「此名淨土禪,亦名禪淨土也。然則永明所謂:有禪有淨土,猶如帶角虎。現世為人師,來生作佛祖。豈不驗於此哉。勉之勉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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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明延壽禪師(영명연수선사)의 생애와 사상

──萬善同歸集을 중심으로──

金 一 長(스님․양산 금강대)


1 머리말

고금을 막론하고 한 인간의 위대했던 삶의 자취는 언제나 시대적인 차원을 넘어 우리들에게 참된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표준이 되어 왔다. 그것은 비록 그들의 그와 같은 삶이 있기까지 특수한 그 시대나 사회적인 여건 등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하겠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떠한 환경 아래서도 시대상황에 편승치 않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오직 영원히 변치 않을 본질적인 진실성을 현실에다 잘 구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간 옛 선인들의 성실했던 발자취를 다시 한번 돌이켜 귀감을 삼아 보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과 올바른 안목(正知見)에 의한 삶(수행)의 자세가 절실히 요구되는 지금, 황폐한 우리들의 심전(心田)에 생기를 부어 주고 활로를 제시하는 뜻 깊은 계기가 될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송나라의 영명연수선사는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안목과 실천의 자세를 누구보다 잘 나타내 보여주신 분이다.

필자는 많은 기록들 가운데서 우선 몇 부분만을 골라 대략 생애와 사상의 순으로 살펴 본 다음, 몇 회에 걸쳐 이분의 저술인 <만선동귀집>의 내용을 사상과 수행, 실천 등의 면에서 두루 소개해 볼까 한다.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 대대로 수행해 나갈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눈을 갖추게 하고 수행의 방향과 실제 과정을 친절하게 제시해 주는 간곡한 가르침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2 생 애

그의 휘는 연수(延壽)이며, 호(號)를 지각(智覺)이라 하였다. 법안종 문익(文益)의 3세 법손이며 천태 덕소국사의 사법(嗣法) 제자였다. 보통 영명선사라고 함은 이 분이 교화하던 도량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선사는 당(唐)이 멸망해 가던 천우(天祐) 1년(AD 九O四)에 여항(餘杭)에서 단양왕씨(丹陽王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대적으로는 당이 멸망하고 송나라가 성립하기까지 70여 년간이 이 분이 생존하셨던 기간에 해당한다.

어릴 적부터 뜻을 불법에 두어 20여 세 부터는 비린 음식을 멀리하고 하루에 한끼니 만을 먹고 살았다. 언제나 법화경을 즐겨 지송 했는데 일곱 줄을 동시에 보아서 60여 일만에 모두 외웠다하며 한적한 들판에 나아가 독송할 때에는 뭇 염소들이 감동하여 꿇어앉아 들었다고 한다.

그의 천품이 이러하매 세속적인 출세나 영달에 뜻이 있을 리 없었지만 28세 때에 잠시 오월왕(吳越王)의 배려로 화정(華亭)이란 고을의 세무관리직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세금을 징수하러 다니다 혹 만선이 되어 돌아오는 어선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누르지 못해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내어 고기들을 사서 도로 놓아주는가 하면 매양 거두어 드린 공금을 가리지 않고 방생하는 데에 써버리므로 불과 수개월도 못되어 관직을 박탈당함은 물론 하마터면 사형에 처해질 뻔하였다. 그러나 체포하여 목을 베려하여도 담담히 얼굴빛도 변하지 않는지라 왕은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사형을 면하고 드디어 그의 뜻에 따라 출가를 허락하기에 이른다.

그는 당시 사명산 용책사에서 크게 교화를 드날리던 취암참선사(翠巖參禪師)를 스승으로 삼고 출가한 후, 오직 대중 시봉하는 일에 힘쓰되 몸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멀리 가섭의 두타행을 본받아 한결같이 들 채소와 누더기로 날을 보낼 뿐, 결코 비단옷을 몸에 걸치거나 두 음식을 함께 맛보는 일이 없었다.

그 이래 조석으로 천태산의 천주봉에 올라가 선정(禪定)을 익혀 90일 만에 공을 이루니 새들이 그의 품속에다 둥지를 치는 일도 있었다 한다.

또 그는 일찍이 불승(佛乘)에 귀의하던 때부터

『몸이 다하도록 항상 법화를 지송하며 세세생생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리라』는 두 가지의 원을 세운 바 있거니와 과연 어느 날 법화참(法華懺)을 행하던 중, 관세음보살이 감로를 입에다 부어줌을 감득(感得)하고는 그로부터 막힘 없는 관음의 지혜변재를 증득하였다. 그 뒤 천태의 덕소국사를 뵙고 법을 이으니, 국사는 처음 그를 보자 곧 대기(大器)임을 간파하고 현지(玄旨)를 전했다 한다.

처음 설두산(雪竇山)에 머물 때부터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였고 그 후 충의왕 원년에 영은산(靈隱山)에 새로 지은 절의 제1세 주지가 되었다가 오월왕의 권유로 영명의 대 도량에 옮겨 사니 언제나 대중이 모여 무려 2천이 넘었다.

상당(上堂)하신 법문이 수없이 많으나 여기서는 지면관계로 일일이 소개하기 어렵고 다만 선사의 대해와 같은 면목을 잘 드러내 보여 준 게송을 하나 소개한다.

「영명의 뜻을 알고 싶은가
문 앞에 가득한 호수이니라.
햇살 비치니 맑게 빛나고
바람 부니 물결이 이네.」

선사는 스스로 일과를 백팔조목으로 정하여 놓고 한결같고 빈틈없이 나날을 정진하시며 학자들이 참문(參問)하여 오면 바로 마음자리를 가리켜 종지(宗旨)를 삼았고 오직 깨달음으로써 법칙을 삼게 해 주었다. 언제나 밤이면 산봉우리에 올라 뭇 생명들을 위하여 십만성(十萬聲)의 염불을 외는 한편, 귀신에게 밥을 나누어주고 아침에는 뭇 생명의 목숨을 놓아 주니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영명의 도량에 머무신 지 15년에 일천칠백인의 제자를 제도하였고 또 천태산에 들어가서는 만인에게 보살계를 설해 주었다.

나날이 정진의 여가에 법화경 읽기를 만삼천부, 또한 종경록 백권을 위시하여 시(詩), 부(賦), 게(偈), 영(詠) 등 무릇 천만 마디의 저술을 남겼는데 모두 대장(大藏)에 수록되고 해외에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선사의 일백팔조목의 발원정진은 다른 이가 감히 따를 수 없는 대비원력으로서 자행록(自行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는 상당, 설법, 전계, 예배, 발원, 염불, 전경, 저술, 자비섭화 등 대승보살의 일체행원이 남김없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조목조목이 오직 널리 중생의 도탈(度脫)을 위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기지 않은 곳이 없어 그때 사람들이 모두 「미륵보살의 화현」이라 칭송하였다.

송나라 태조 때 개보(開寶) 8년(AD 九七五) 12월에 향을 사루고 대중에게 부촉하신 뒤 앉으신 채로 고요히 입적하시니 수명은 72세, 법랍은 47세였다.

3 사상의 대략

대게 선종(禪宗)의 가풍은 오직 직관체달(直觀體達)함에 있고 그 외 일체 행법은 배격해 온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그에 반해 영명선사는 선사로서 이해하기에는 애매하리만큼 만선행을 권장하는가 하면 수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의 사상이 그만큼 포괄적이고 통불교적인 원융(圓融) 사상에 기인한 것이다. 선사의 모든 사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불교실천의 핵심적 목표를 밝힌 법화경의 회삼귀일승(會三歸一乘)의 사상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법화경이야말로 불법이라는 큰 준령의 최후 목표를 드러낸 고봉정상이기 때문이다. 목표를 분명히 밝힌 것은 법화며 그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인 것은 화엄이다. 회삼귀일(會三歸一)이란 부처님께서 각종 근기를 따라 설했던 일대교설이 오직 하나인 불승(佛乘)으로 귀착시키기 위한 방편 설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인데, 방편이란 애당초 배격되어야 할 불필요한 교설 이 아니라 그것 하나 하나가 완전히 밑거름이 된 결과로서 최후의 불승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임에 주의를 기우리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집을 지을 때 여러 가지 받침목으로 도와서 기둥과 도리를 고정시켜 다 완성되고 나면 받침 목 등은 자연 제거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상을 배경으로 그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선사의 원융사상의 탁월한 위대성이 자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당시 교계는 수당대(隨唐代)의 활발했던 번역사업으로 온갖 측면의 학설들이 죽순처럼 일어나 저마다 자가학설(自家學說)의 뛰어남을 주장하였고, 직관체달을 목표로 하는 선가(禪家)에서도 사유하는 견해의 차이에 따라 간화(看話)니 묵조(默照)니 서로 옳음을 내세웠으며 나아가 각자 가풍의 성격에 따라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나뉘어 서로의 모순을 드러내 놓은 채 자웅을 다투어 왔던 것이다.

이는 오로지 근본의 대의를 미한 때문이라고 간파하신 선사는 이사무애(理事無碍)의 기본적 입장에 서서 부처님의 일대시교로부터 선교(禪敎)의 모든 학설들을 두루 망라하여 모든 교설 이나 학설이 최후로 귀착되는 근본은 오직 일불승(一佛乘)일 뿐임을 체계적으로 설파해 보인 것이 저 방대한 〈종경록〉 1백권의 저술이다. 선사의 모든 사상이나 저술들이 그렇듯이 가장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사상이든 배격함이 없이 온전히 긍정하는 입장에서 모든 사상을 정안(正眼)으로 운용(運用), 정화하여 이(理)와 사(事)의 관계가 실제로 둘이 될 수도 떨어질 수도 없는 원융한 일법(一法)임을 확실히 제시해 준 점이라 하겠다.

총 114개의 문답으로 구성된 〈만선동귀집〉도 방대한 종경록의 축소판과 같은 선사의 대표적인 사상을 표현해 준 것인데 좀더 사상적(事相的)인 면에 나아가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성(性), 상(相), 공(空)의 삼종(三宗)으로 교판(敎判)하고 여기서 오직 성종(性宗)의 공유쌍망(空有雙亡)설에 입각하여 짓되 지음이 없는 제선만행(諸善萬行)의 덕본(德本)을 권수(勸修)하는 필요성과 이유를 간곡히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첫머리에서 만선동귀집의 대의(大意)를 특징짓기를 「온갖 선법(善法 : 물질적, 정신적 현상의 일체만법)이 귀착하는 곳은 다 실상(實相 : 온갖 존재의 진실한 본성)이 그 바탕이 된다(衆善所歸 皆宗實相)」고 하였고 또 「일체만행을 닦음은 오직 반야를 성취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못 박은 것이다. (계속)

 

http://lotusland.twbbs.org/www/master/html/lotus6.htm

 

 

 

永明智覺沖玄延壽大師蓮宗六祖也。錢塘王氏子知稅務多用官錢買放生命罪當死。臨刑錢文穆王使人瞷之色不變命釋之。遂出家參天臺韶國師發明心要。以宿願未決登智者巖一心禪定萬行莊嚴淨土二鬮冥心精禱七拈皆淨土鬮。於是一意修淨業蒙觀音以甘露灌口獲大辯才著宗鏡錄及萬善同歸集指歸淨土。後住永明寺日行一百八件佛事夜往別峰行道念佛人聞天樂鳴空。誦法華經積一萬三千卷弟子一千七百人常與眾授菩薩戒施鬼神食買贖生命皆以回向淨土。忽焚香告眾趺坐而化年七十二。後有僧病入冥見王供像殿左勤致禮拜詢知為師已往生上上品矣王重其德故禮敬耳。(樂邦文類)

按】

 

大師係阿彌陀佛化身猶七拈皆淨土鬮始一意淨業上品上生。為志在禪定而行必捨禪修淨者示範也。

 

 

 

 

 


六祖:永明大師 浙江錢塘人 宋代 太祖

육조:영명대사 절강항주인 송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