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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聖 那畔尊者 - (말세 중생의 福田)

화엄행 2011. 10. 15. 18:30

♣♣♣ 獨聖 那畔尊者 - (말세 중생의 福田) ♣♣♣

 

운문사 사리암 나반존자상

 

 

덕숭산 정혜사 나반존자상

 

至心歸命禮  恒居天台山上  獨修禪定  那畔尊者

귀의하옵니다. 천태산 위에서 홀로 선정을 닦고 계신 나반존자께.


至心歸命禮  三明已證  二利圓成  神通自在  那畔尊者

 귀의하옵니다.

삼명을 이미 증득하셨고 자리이타를 원만히 이루시고 신통이 자재하신 나반존자께.


至心歸命禮  天上人間  應供福田  待俟龍華  那畔尊者

귀의하옵니다. 

천상과 인간에 아라한의 복전이시며 용화세계 기다리시는 나반존자께.



那畔神通世所稀  行藏現化任施爲

나반존자님의 신통 세상에 희귀하여,  비밀행 나타냄에 뜻대로 베푸시네.

松巖隱跡經千劫  生界潛形入四維

솔 바위에 숨긴 자취 천겁토록 지내시며,  세상에 감춘 모습 四方으로 드시네. 

故我一心歸命頂禮

그러므로 저는 일심으로 귀의하며 절을 올리옵니다.

 

 



위는 나반존자를 향해 아침저녁으로 3번 절을 하면서 외우는 독성각의 예불문인데, 이 글에서 보다시피 독성각의 경배 대상은 '나반존자'이고, 이 '나반존자'는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았기 때문에 독성(獨聖), 독수성(獨修聖)의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삼명(三明)이리(二利)의 능력을 갖춘 성인으로 일컬어졌다.

三明은 아라한의 지혜를 갖추고 있는 이에게 자재(自在)하는 오묘한 작용으로 숙명명(宿命明), 천안명(天眼明), 누진명(漏盡明)인데, 숙명명전생을 자신과 남의 전생을 꿰뚫어 아는 것이고, 천안명자기나 다른 이의 미래를 꿰뚫어 아는 것이고, 누진명지금 세상의 고통을 알아 번뇌를 끊는 지혜를 일컬음이었다. 곧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남김없이 통달한 분이 나반존자이므로 아울러 자신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능력을 두루 갖춘바 되었으므로 아라한의 지위에 이르러 복밭[福田]이 되어 미륵불이 출현하는 용화세계가 이를 때까지 이 세상에 머물러 중생을 제도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那般尊者


지(智)를 갖춘 옛날 존자.

천태산에서 혼자 도를 닦아 연각(緣覺)에 이르렀으므로 ‘독성’이라 이른다.

독성각에 모셔져 있다.


那般尊者님은

우리나라 불교에서만 숭상하는 신앙의 대상 중 하나인 성자.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도 한다.


독성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나 5백 나한의 이름 속에 보이지 않고, 불경 속에서도 그 명칭이나 독성이 나반존자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불교에서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다.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형태이다.


우리나라 사찰에 모셔지는 나반존자의 모습은 하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으며,

눈썹은 매우 길게 묘사되어 있고 미소를 띤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 최남선(崔南善)은

“절의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신 나반존자는 불교의 것이 아니라

민족고유신앙의 것이다.

옛적에 단군을 국조로 모셨으며, 단군이 뒤에 산으로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여 단군을 산신으로 모시거나 선황(仙皇)으로 받들었다.

그래서 명산에 신당을 세우고 산신 또는 선황을 신봉하여왔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그 절의 불전 위 조용한 곳에 전각을 세우고 산신과 선황을 같이 모셨으며,

또 중국에서 들어온 칠성도 함께 모셨다.” 라고 하였다.

이는 나반존자상을 단군의 상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 일부에서는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 건립에 대한 기록이 조선 후기에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전래시기에 이를 포섭하여 모신 것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반존자를 말세의 복밭(福田)으로 보고,

복을 줄 수 있는 아라한의 한 사람으로 신앙하고 있으므로,

18나한의 하나인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로도 보고 있다.


특히, 사찰에서는 독성기도(獨聖祈禱)를 많이 올리고 있는데,

이는 나반존자의 영험이 매우 커서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속히 영험을 얻게 된다는 데 기인한다.

이는 독성기도를 올릴 때 외우는 찬송 가운데

“나반존자의 신통이 세상에 희유하여 행하고 감추고 변하기를 마음대로 한다.”

고 한 구절 속에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나반존자는 사찰의 독성각 또는 삼성각에 봉안되며,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이나 탱화를 단독으로 모시고,

삼성각에는 칠성·산신 등과 함께 모신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한국학중앙연구원




♣ 독성(獨聖)이란 ♣


부처님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 자연변화를 보고 스스로 도리를 깨친 성스러운 수행자를 일러 독성(獨聖)이라 한다. 그는 또한 홀로 선정을 닦아 진리를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수성(獨修聖)이라고도 부른다.  


한편 독성을 단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기이하게도 부처의 '10대 제자'나 '16나한, 500나한' 등 그 어디에도 '나반존자'라는 이름은 발견되지 아니하며 불경 속에서도 그 이름과 '독성'이 곧 '나반존자'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나반존자'에 관한 신앙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오직 한국의 불교에서만 독특한 것으로 파악했던 최남선(崔南善)은 예를 들어 민간 신앙의 대상이었던 산신과 칠성을 산신각이나 칠성각에 모시는 것처럼 독성각에 안치된 그 독성은 민간 신앙의 대상이었던 단군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독성이 단군을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불교와 민간 신앙의 결합으로 우리만의 독특한 독성 신앙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독성은 누구를 말함인가. 불교계에서는 그 독성을 나반(那畔) 존자라 부른다. 나반존자는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성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바로 독성이라 하는 것이다.  


나반존자에게 바치는 禮佛文을 보면, 그는 삼명(三明)에 통달하고 자리(自利)와 이타행(利他行)을 완성한 결과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할 복전(福田)이며, 미를불이 다스리는 용화세계가 올 때까지 이 세상에 머물러 중생을 구제하는 구세자(救世者)로 등장한다. 여기서 삼명이란 육신통(六神通) 중 세 가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운명을 아는 숙명명(宿命明),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모든 사태를 낱낱히 보게 되는 천안명(天眼明), 그리고 번뇌를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누진명(漏盡明)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독성인 나반존자는 16나한의 역할과 거의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16나한 역시 말세 때 이 세상에 머물러 중생을 구제하는 성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한 신앙이 달리 형성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독성각이라 하여 따로 전각을 마련하여 나반존자를 신앙하게 된 것은 왜일까. 과연 나반존자는 단군일까, 아니면 나한일까? 그리고 혹시는 도교 관련 신앙 대상이 한국 불교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기도 하나 이 문제는 깊이 있는 탐구를 거쳐야만 결판이 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불교계에서는 그 나반존자란 18나한 중에 빈두로(賓頭盧, Pindola) 존자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 빈두로 존자는 16아라한 중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빈두로파라자(賓頭盧頗羅墮, Pindolabharadvaja)의 오해에서 비롯된 인물이다.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경(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經)』에서 이 빈두로파라자를 묘사하는 모습을 보면 이렇다. 


'빈두로존자'는 주세아라한(住世阿羅漢), 부동이근(不動利根)이라 번역한다.

빈두로파라자 존자는 길다란 흰 눈썹을 지닌 부처님의 제자이다.

원래 인도 발차국(跋蹉國) 구사미성 보상(輔相)의 아들이었는데, 어렷을 적에 불교에 귀의,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으며, 후에 여러 곳으로 다니며 전도하였다. 그는 신통력이 매우 뛰어났는데, 석존께서 성도한 지 6년 뒤에 왕사성에서 외도들에게 신통력을 자랑스럽게 나타냈다가 외도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자,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 부처님께서 ‘나의 제자는 신통을 부리는 것으로 능사를 삼아서는 안 된다. 오로지 바른 법으로 중생을 교화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셨던 것을 어기고 - ). 쓸데없는 신통력을 내보였다고 책망과 꾸지람을 듣고 부처님께서 이 뒤로는 부질없이 신통력을 나타내지 말라 하고, 부처 열반 후에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말세 중생을 제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그는 이러한 부처님의 명을 받들어 석가모니 열반 후 남인도 마리산에서 1천 명의 나한과 더불어 말세 중생을 제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말세 중생의 공양을 받아 대복전(大福田)이 되어 주세아라한(住世阿羅漢), 즉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나한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빈두로파라자의 역할을 볼 것 같으면 그는 불멸후 미륵 부처님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들을 구제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그리고 그 임무는 나반존자의 역할과 잘 일치된다. 거기에다가 그 나반존자의 모습을 볼 것 같으면 길다란 휜 눈썹을 지닌 노인의 형상으로 영락없는 빈두로파라자 존자의 모습이다. 신통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두 인물의 유사성도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나반존자와 빈두로파라자 존자를 동일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 독성 신앙은 왜 일어났는가 ♣


그렇다면 어째서 나한 신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성 신앙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왜 불보살이나 나한처럼 전(殿)에 모시지 않고 산신이나 칠성처럼 각(閣)에 모시게 된 것일까.  


김현준씨는 이 독성각이나 독성 신앙이, 구체적으로 그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이 나한전(羅漢殿)이나 나한 신앙에서 분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을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사실 나한 신앙은 고려 시대에 들어서 우리 민족의 가슴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특히 조선 시대에도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다른 신앙, 예를 들어 불보살 신앙이 쇠퇴하는데 반해, 유달리 성행하게 된다. 나한을 모신 응진전(應眞殿)이나 나한전이 조선 시대에 많이 건립된 것을 보면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왜 그랬을까. 극심하게 억압받던 불교와 민중(특히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시대는 핍박과 고통으로 점철된 말세요 종말의 세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누구나 새 세상이 하루 속이 다가와 고통의 질곡에서 자신의 구원해 줄 미륵불의 도래를 간절히 염원한다. 그래서인지 조선 시대에는 미륵불이 민중들 곁으로 다가서는 마을 미륵이 많이 숭배되었고 미륵을 자칭하여 혁명을 부르짖는 자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 그 미륵이 오지 않는 그 말세의 틈바구니에서 민중들은 말세 중생을 구제하는 나한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나한 중에서 나반존자를 유독 빼어닮은 빈두로파라자 존자는 말세 중생을 구원하는 대표적 인물이요 그 영험력 또한 뛰어났기에 그만을 따로 떼어내어 신앙하는 독성 신앙이 강하게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독성을 모신 집을 독성전이라 하지 않고 왜 독성각이라 했을까. 아마도 여기에는 독성 신앙과 토속 신앙의 결합이 엿보이고 있다. 즉 독성의 그 나반존자는 나한 빈두로파라자의 면목과 토속신의 측면이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최남선을 비롯한 민속학계에서는 그 토속신을 단군일 것이라고 설정하고 있으나, 다만 추측에 불과할 뿐 아직 명확한 근거는 없다.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을 모시기도 하지만 獨聖탱화를 많이 모시고 있는 실정이다. 이 탱화를 수독성탱(修獨聖幀) 또는 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면 희고 긴 눈썹에 오른손에는 석장(錫杖)을,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을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탈속의 자유와 여유로음이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배경으로 천태산과 소나무, 구름 등이 그려져 있는데, 때로는 독성 외에 차를 달이는 동자의 그림을 곁들인 것이 있는가 하면 동자와 문신(文臣)이 양쪽 협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한 탱화는 산신탱화의 영향을 받아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도설 내용은 불교 의식집 獨聖請 由致詞에서

"나반존자는 층층이 이어진 대 위에 올라 고요히 머물러 선정(禪定)을 즐기거나 또 혹은 낙낙장송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눈처럼 흰 눈섭이 온 눈을 덮고 있으면서 공(空)을 관(觀)한다,…… 或於層層臺上 靜居安禪 或於落落長松間 往返任意,……雪眉覆眼而觀空)"라는 내용과 잘 어울린다.


독성탱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운문사 사리암의 독성탱화. 영천 거조암의 독성 탱화를 들 수 있다. 게다가 운문사 독성전에 모셔진 나반존자해인사 희랑대의 희랑조사는 영험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무론 운문사와 거조암은 나한신앙의 성지로도 유명세를 타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독성기도를 많이 드리고 있다. 이는 나반존자의 영험이 매우 커서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속히 영험을 얻게 된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나반존자의 성격이 무섭고 엄하기 때문에 기도할 때 반드시 목욕 재개하고 공양물도 갖추어야 한다고 전한다.  


사찰에는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 외에 삼성각(三聖閣)이라는 건축물도 있는데, 여기에는 산신, 칠성, 독성이 함께 모셔져 있다. 그런데 통도사를 비롯한 다른 절에는 그 삼성이 고려말 삼대 선승인 지공, 나옹, 무학 스님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절 경내의 본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독성각(獨聖閣)이라 일컫는 작은 전각을 두고 있는 절이 흔한데, 청도 운문사 사리암의 예와 같이 그 '독성각'에다 나반존자(那畔尊者)의 신상을 봉안하기도 하나 대부분의 절에서는 탱화로 그려 봉안하고 있다. 

 

이 '독성각'의 '나반존자'는 '16나한' 중 하나인 '빈두로존자'가 따로 이름만 바뀌어 신앙의 대상으로 승격된 것이므로 불교 경전에서 연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주지하는 대로 인도는 물론 중국, 일본 어디에서고 봉안된 예가 없고, 우리 나라에만 있으며, 그것도 '산신, 칠성, 용왕'들과 나란히 신봉되는 것을 보아 우리 토속 신양의 고유신이 불교적인 색깔을 띤 불, 보살로 변형되어 절에서까지 모셔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형상만은 중국의 불교에서 독립 신앙 대상이 된 '빈두로존자'의 모습을 적절히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위에서처럼 인도와 중국에서는 나반존자를 봉안한 사례가 없다는 설과 달리, 빈두루존자후세에 인도 대승불교 사찰에서 문수(文殊)를 상좌로 함에 대하여 소승불교 사찰에서는 '빈두로'를 상좌로 하는 풍습이 생겼다. 중국에서는 동진(東晋)의 도안(道安)이 처음으로 '빈두로'를 신앙하고, 송(宋) 나라 태초(太初) 말기(471)에 법현, 법정 등이 처음으로 그 형상을 그려 공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