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은 한가족 다투고 헐뜯을 일 아닙니다
<약력>
·1934년 보은 生
·53년 해인사로 출가
·백양사, 통도사, 해인사, 봉암사 등 선원서 정진
·서울 영등포와 경기도 송탄의 성관사 주지역임
·現 전북 장수에서 성관사 중창불사 진행
약인욕료지 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 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 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절에 다닌다는 사람치고 이 말을 안들어 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보아 모두가 마음의 지은바임을 알라는 <화엄경>의 요지인데 이 이상 명확한 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마음이 짓고 마음이 허물고 하는 겁니다.
이 마음자리에서 세상이 생기고 멸하는 겁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면 부처가 되고 마음을 잘못 쓰면 악귀가 되는 것이니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수행을 하는 것이 모두 이 마음자리 밝히는 일로 귀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잘못 쓰는 일에 더 약한 것 같습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넘어가지 않는 것 보다 쉽다는 게지요. 청정심을 내야 할 것인데 삼독심이 더 빨리 나와 버리거든요.
그렇거든 얼른 삼독심을 뒤로 제쳐 버리고 청정심을 내야 하는데 그냥 삼독심에 빠져 그걸 제쳐낼 용기를 못내는 겁니다.
수행이 안된 탓이고 근기가 약한 탓이라고 포기할 일이 아닙니다.
근기에 맞는 기도를 하고 염불을 하고 마음을 관하는 수행을 쌓으며 근기를 높히고 스스로 청정법신을 이뤄내야 하는 것입니다.
삼독심은 탐(貪) 진(瞋) 치(癡)를 말하는데 이것을 세가지 악의 불이라는 뜻에서 삼화(三火)라고도 합니다.
또 이 세가지 마음은 중생을 악업의 구렁텅이로 몰고가는 근원이 되므로 삼불선근(三不善根)이라고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탐내는 마음과 성내고 미워하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포악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이 세가지의 불만 꺼 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서로 나눠 갖고 화합하고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니 겠느냐는 겁니다.
이 세상에 내것이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두고 나의 것이라고 큰소리 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주머니에 든 그 몇푼의 돈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그걸 주고 뭘 하나 사버리면 그 돈은 이미 남의 손으로 넘어 갔지 않습니까.
그 돈으로 산 물건 역시 영원히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물건은 그만 두고라도 지금 여러분을 이루고 있는 육신인들 여러분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진정한 내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진정 나의 것인가를 생각하는 그, 바로 그놈이 내것입니다. 나를 나라고 생각하고 청정심과 삼독심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분별하고 사량하며 그래도 본래진면목을 보고 싶어 하는 그 복잡한 마음의 실체가 바로 나의 것입니다. 나의 주인을 찾아 그것 이외의 것은 무엇도 나의 것이 님을 알아 보자고 이렇게 법회도 열고 설법도 하고 스님의 법문을 듣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탐을 내거든요. 탐심이 기승을 부리면 그것을 억누르고 제어 하기 보다는 그냥 그 놈의 탐심이 부려대는 기승에 끄달려 가고 마니까 세상이 혼란해 지는 것 아닙니까. 진심과 치심을 누르지 못한 결과가 이 세상을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 불자들이 이 세상을 어지럽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어지럽다 난장판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우리도 그 속에 깊이 빠져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이야말로 극락세계라고 말하도록 합시다.
이 세상이야말로 극락세계여서 사람이 사람을 믿고 아끼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 않은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 불자들부터 조금씩 조금씩 노력하자는 겁니다.
그렇게 이 세상이 극락이라고 말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참다운 극락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삼독심의 불길을 끄는데 게으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한 평생은 참으로 짧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짧다고 말하는 것은 더 긴 시간에 비해 짧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짧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루살이에 비하면 인간의 평균수명은 얼마나 긴 것입니까. 인생의 길고 짧음을 얘기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일생동안 무척이나 많은 일을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인연을 짓는 일입니다. 미래의 내 모습과 인연을 짓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살아가는 과정은 온전히 후생의 나를 조각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늘을 한번 쳐다보는 사소한 행동도 후생의 어떤 인연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가르침은 불교가 아니면 생각조차 못할 일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하고 무서운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는다면 살아가며 죄를 지을 수가 없겠지요. 죄를 짓기는커녕 죄를 생각지도 못할 것입니다. 인연과 연기법을 믿는 불자들이 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치가 여기 있는 것 아닙니까. 삼독심이 아무리 발광을 하고 기승을 부려도 능히 제압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는 이유 또한 이 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내 마음에서 한번의 죄를 일으키면 하나의 지옥을 지은 것이니 그 업보를 감당키 쉽지 않을 겁니다. 내 마음에서 한번의 청정심을 냈다면 하나의 극락을 이룬 것이니 그 공덕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옥과 극락을 짓고 허물며 살아 가고 있습니다. 모든 행위는 업이되고 후생의 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말하기 좋아하고 진리를 입에 담기를 즐기되 실행이 없는 사람은 죽어서 입만 모여 와글거리는 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곳에 갈 사람이 많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저 수박 겉을 핥아 먹듯 몇줄 공부하고 마치 큰 도를 이룬양 떠들고 다니며 ‘이것이 최상의 진리다’라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 되겠습니다.
수행은 승속을 구별않고 해야할 것이지만 그 무게를 가벼히 여기고 함부로 ‘닦았노라’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진정 깨달음을 이룬자는 입을 다무는 법입니다. 옛 선사님들도 깨달음의 소식을 듣는 순간 그 법열을 몇줄의 오도송으로 간추려 터트리고는 입을 다물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는 보임의 시간을 즐기고 깨달음이 익고 익었을때 비로서 제자들을 모아 진리의 소식을 전했던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쉽게 오르고 너무 쉽게 도를 넘은듯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행이 있을 수 있나요. 실행은 없고 말만 있는 진리였으니 그 과보를 ‘입의 동산’에서 받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좋은 소식, 진리의 법담을 많이 들었으되 그냥 듣는 것에서 멈춰 버린 사람들은 귀만 모여 무엇을 들으려 허둥대는 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듣는 것은 즐겼는데 그 들은 바를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으니 무엇에 쓸 것입니까.
듣는 순간 마음의 문도 활짝 열어버려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며 진리의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겁니다.
이 절 저 암자로 큰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러 열심으로 찾아다니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한 일입니다.
우매한 중생심에 진리의 법등 하나 밝혀 보고자 하는 그 염원이 갸륵하기 그지 없으되 법문 듣는 즐거움만 탐하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귀가 잠시 즐거웠을 뿐 마음자리를 환히 열지는 못한 것이니 업연만 늘려 놓은 셈입니다.
진리의 법문을 듣고 그 가르침에 몸을 맏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몸뚱아리가 번뇌의 주머니를 면해서 청정법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근이 느끼는 모든 것은 마음자리를 열어 젖히고 청정법신을 이루는데로 모아져야 합니다. 그를 위해 삼독심을 물리치는 수행력이 필요한 것이고 마땅히 진리를 실천하는 행업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또 하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완전한 것은 오직 깨달음을 얻은 자만의 것입니다.
부처의 자리에 든 사람 이외에는 완전한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사람의 오감이 느끼는 것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법계의 중생은 모두가 여여히 구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눈이 맑지 못하여 그 구족됨을 알지 못합니다. 불완전 투성이입니다.
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부터 완전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나의 구족함이 덜된 줄은 모르고 완전한것 잘된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사더란 얘기입니다.
앞에서 탐심을 내지 말라는 얘기를 했는데 완벽을 추구하는 마음 역시 탐심입니다.
나를 완벽하게 구족시키는 일에 마음을 쓰도록 합시다.
내가 바로 서지 않았는데 세상이 어떻게 바로 보이겠습니까.
나라에서도 역사를 바로 세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과거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 법대로 말씀드리면 미래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미래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현재의 역사를 바로 지어내는 일이지요.
역사를 운운할 자리가 아니니 이만 줄이기로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스스로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의 눈을 맑히고 나의 입을 깨끗이 하고 나의 귀와 코와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지 않으면 그곳을 통해 들어오는 일체 만물이 흐트러지고 뒤틀리는 겁니다.
우리는 왜 완전한 것을 구하려 합니까. 우리 스스로가 불완전한 탓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임을 알면서 그걸 인정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 있는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는 중생임을 알면서 중생의 탈을 벗어 던지고 대해탈의 춤사위를 놀아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중생으로 머물러 있으며 중생고를 받아 들이며 중생다운 삶을 이어갈 뿐입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문제의식이 필요 합니다.
‘왜 이런가’를 묻고 되묻는 진지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부터 해탈의 길은 닦여지는 것입니다.
나를 완전한 인간으로, 법계에 충만한 진리의 전파를 휘감은 법신으로 만들어 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부처는 깨달은 중생이고 중생은 못깨달은 부처다’라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말이야 하기가 쉬워서 하는 것이겠지만 그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몇천겁의 생을 거듭하여 부처를 이루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중생심을 버리고 보살심으로 살겠다는 서원을 백번 천번 외친들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오늘 돌아가는 길에 만나는 굶주린 이웃을 위해 동전하나 보시하는 행동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삼독심에 끄달려 청정심은 잔뜩 먹구름으로 가리워졌지만 그 먹구름은 영원한 먹구름일 수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흩어져 버리는 겁니다.
그 바람은 자비심이요 보살심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옹기종기 생겨난 중생 모두가 한 가족이니 다투고 탐내고 헐뜯을 일이 아닙니다.
서로를 생각해 주고 아껴주며 이 세상이 극락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삼독심 보다 청정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부처님 법에 귀의해 그 법을 실천하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을때
이미 이 세상은 극락의 문을 반쯤 열어둔 것이라 믿어야 겠습니다.
우리 모두 수행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야 합니다.
내 이웃은 수행의 도반들이고 내 나라는 커다란 절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도량에서 우리는 게으름을 모르는 수행자로 서로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도 어리석음에 빠지지말고 근기와 인연에 맞는 수행을 해야하고 좋은 스승을 찾아 나서 훌륭한 가르침을 받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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