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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文殊菩薩)의 성지

화엄행 2010. 10. 11. 22:40

[제1부-오대산(五臺山)에 잠든 '천축의 꿈']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성지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는 어디에?

‘허공 속의 금각(金閣)’

찬란한 낙조

 

 

 

[제1부-오대산(五臺山)에 잠든 '천축의 꿈']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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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도반이며 또한 같은 스승을 모셨던 사형사제 지간이며 그러면서도 훌륭한 스승이던 불공삼장(不空三藏)이 병마로 쓰러져 입적하게 되자 문득 무상(無常)을 느낀 혜초는 문득 허망해졌다. 3대에 걸친 역대 황제들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으며 제사(帝師)라는, 승려로써는 최고의 신분과 높은 관직에 오르는 온갖 영광을 누렸음에도 불고하고, 결국 ‘생사의 길’은 이러하다는 것을 후인들에게 몸소 보이시려는 듯 그렇게 불공삼장이 떠난 것이었다.
오대산 전경
문득 혜초는 자신의 육신을 돌이켜보았다. 이미 그도 5만 리를 걸어서 천축을 순례했던 철인 같았던 젊은이가 아니었다. 이제는 자기도 긴 나그네 길의 회향을 할 때가 되었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리하여 반백년 동안의 장안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는 마침내 780년, 오대산으로 향했다.

장안에서 오대산은 가까운 길이 아니었다. 이미 고희(古稀)를 훨씬 넘긴 노구인 그에게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그 길은 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해가 뜨는 동쪽 하늘 아래에는 닭울음소리 들리는 그의 고향 계림(鷄林)이 있겠지만 그곳은 노구의 혜초에게는 너무 멀고 아득하였다. 미물도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중생들의 본성이라지만 했지만, 아니 이미 세계정신을 초월한 밀교의 고승 혜초사문에게는 육신이 태어난 고향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해동의 고향으로 간들 그 누가 있어 반겨줄 것인가?

오대산으로 향하는 멀고 힘든 길 위에서 혜초는 문득 장안에서 보낸, 반세기나 되는 긴, 세월 중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바로 그 때가 내도량에서 지송승(持誦僧)이란 직책을 맡아볼 때였는데, 스승 불공삼장을 모시고 황제가 사는 대명궁(大明宮)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만백성의 존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기도 했었다. 아니 그 때 보다도 더 찬란했던 때가 있었다면, 자신이 대종(代宗)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선유사(仙遊寺) 거북바위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였다. 해동출신이란 외국인의 신분으로 대당황제와 중원의 중생들을 위해 철야기도를 하기 시작하여 7일 후에 마침내 명주실 같은 감로수가 매 마른 하늘에서 내려왔을 때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오대산(五臺山, 3058m)-중국어 발음의 ‘우타이샨’은- 대륙의 북동쪽에 있는 명산으로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적에는 도교(道敎)에 의하여 개산(開山)되었으나 5세기 후반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에 의하여 불광사(佛光寺)와 청량사(淸凉寺) 등이 세워짐으로써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거처하는 청량산과 동일하게 인식되어 불교의 성산이 되었다. 수, 당 때에는 법화(法華)· 화엄(華嚴)·천태(天台)·정토(淨土) 등의 종파와 밀교(密敎)의 고승들이 앞 다투어 사원을 개창하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후 오대산의 이름은 중원뿐만 아니라 한국·일본·중앙아시아·티베트·인도에까지 전해져서 지금도 중국의 ‘4대 성산’의 하나로 꼽혀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돈황석굴에 그려진 당대 오대산 전경도

당나라 중기에 오대산은 절정을 이루었다. 특히 대종(代宗) 때에는 인도의 유명한 밀교승인 불공삼장(不空三藏)이 황실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767년 금각사(金閣寺)와 옥화사(玉華寺)를 건립하여 문수신앙의 본산으로 자리 잡게 했다. 오대산의 번영은 845년 무종(武宗) 때의 법난인 회창폐불(會昌廢佛)로 된 서리를 맞았으나 그 후에 다시 역대 왕조의 지원을 받고 기사회생하였다. 그러다가 그 후 몽골이 중원에 자리 잡고 원(元)나라를 열고 티베트불교를 국교로 받아드리면서 다시 한 번 크게 번창하게 되었고 그 바통을 청(淸)나라가 이어받았다. 특히 청 태조 누르하치는 ‘만주사리황제(曼殊師利皇帝)’라고 불려지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막 점령한 중원대륙 중생들에게 선포하는 의미를 갖는 호칭이었다. 문수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는 화엄이나 밀교 양쪽에서 모두 비중이 무거운 보살이다. 화엄(華嚴)사상에 의하면 청량산(淸凉山)은 문수보살의 거처인데, 이 산이 바로 오대산과 동일시 한데서부터 문수도량화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원과 청나라에 의한, 오대산의 문수성지화는 물론 종교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이민족의 나라를 통치하고자 함이었다. 이 통치술은 역대 황제에게 대대로 답습되어 오대산은 청 왕조의 보호아래 이른바 라마교 또는 황교(黃敎)라고 부르는 티베트불교의 색채가 농후해졌다.

이 상황은 지금까지 별 변함이 없는데, 종교를 부정하는 유물논자들인 중국공산당의 치하에 있는 현실에서도, 현재 오대산에 있는 47여개의 사원 중에서 그 중 절반 가까이가 황교-티베트불교의 영향권 아래의 사원들이다. 그 중 56m높이의 웅장한 하얀 라마탑이 솟아있는 탑원사(塔院寺)가 오대산의 무게중심을 이루고 있다.

대체로 오대산 순례는 타이화이쪈(台懷鎭)이라는 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먼저 샨시성(山西省)의 중심지 타이웬(太原)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가야한다. 이곳이 오대산의 베이스캠프에 해당되기에 교통편과 숙소잡기가 편리할뿐더러 대표적 유명 사찰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어느 곳에서나 어둠이 몰려들기 전에 하루 밤 지낼 숙소를 정해야하는 것이 ‘수칙 제1조’ 임은 들먹일 필요가 없지만, 중국 같이 아직도 사회주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에서는, 더욱이 한 겨울에는 더더욱 잠자리의 해결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버스기사가 추천하는 초대소에 대충 냉기를 면할만한 방을 하나 정해놓고는 한 끼 식사를 때우고 밖으로 나오니 이미 어둠이 짙어져오고 있었는데, 때마침 온통 천지사방에서 들리는 요란한 저녁예불 소리가 불국토 같이 장중한 하머니를 이루며 울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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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에 도착한 혜초는 780년 4월5일에 ‘건원보리사’ 라는 절에다 짐을 풀었다. 이 것은 자신이 직접 쓴 기록 -『至唐建中元年四月十五日 到 ‘五臺山 乾元菩提寺’ 至五月五日 ‘沙門慧超’ 首再錄 』-에 의해 분명한 사실이다. 위 원문처럼 ‘오대산 건원보리사’와 ‘사문혜초’이란 글자는 뚜렷하다. 만약 국내 일부 학자나 사전적 지식처럼- 혜초가 704년 출생이라면 - 만약 그렇다면 이 때 혜초의 육신의 세수는 이미 77세 라는 고령이 되는 셈이다.
건원보리사로 추정되는 금각사의 관음전
혜초사문에게 오대산은 스승인 불공삼장을 비롯한 많은 도반들과의 인연으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왜냐하면 불공삼장은 황제의 후원으로 금각사(金閣寺)를 건립하고 함광(含光)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보내 나라와 황실의 평안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772년에는 대흥선사에 거대한 ‘문수각(文殊閣)’을 지었는데, 이 때 대종황제가 직접 각주(閣主)가 되고 귀비, 한왕, 공주 등이 시주를 하였다는 것을 보면 금각사는 문수신앙을 고취하기 위한 대흥선사의 오대산 분원 역할을 하였다. 두 사찰이 이렇게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불공의 직계 제자들의 오대산행이 빈번했으리라는 추정을 한결 설득력이 있게 만든다. 그런 때 아마도, 혜초는 스승을 수행하여 도반들과 함께 오대산을 들락거렸을 것이기에, 그렇기에, 인생의 회향을 앞둔 노쇠한 혜초사문의 발길은 누가 잡아끄는 것이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오대산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평생을 밀교경전의 번역에 헌신했던 혜초 자신에게도 문수보살은 ‘주존(主尊)’이다. 밀교경전은 대개 등장하는 불, 보살, 존상(佛尊)이 너무 많아 선 듯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또한 긴 제목만을 보아서는 이것이 본문인지 제목인지가 헷갈릴 정도로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요령을 가지고 가지치기를 하면 쉽게 실체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혜초가 오랫동안 천착했던 밀교 경전의 이름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라는 것인데, 이 길고 난해해 보이는 제목을 유심히 뜯어보면 ‘만주실리(曼珠實利)’란 이름이 들어난다. 바로 만주슈리(Majushri)이다. 그러니까 이 경전은 문수보살과 관계가 있다는 정도까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기서 문수보살-금강지-불공삼장-금각사-함광-혜초를 연결하면 혜초가 오대산으로 들어온 정황이 쉽게 그려진다. 혜초사문은 자기의 생을 회향하기 위해서, 자기 영혼을 주존인 문수에게 의탁하기 위해서 동문 사형제들이 머물고 있는 오대산에 들어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혜초가 적어도 20일 간 머물며 약칭「대교왕경」을 번역하고 그 과정을 기록한 서문까지 직접 쓴 장소인 건원보리사에 대하여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혜초사문이 육신을 벗고 입적에 들었을 개연성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는 거의 80(?)을 바라보는 노쇠한 혜초사문이 교파가 다른 사원으로 주석처를 옮겼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정황에다 근거를 둔 가설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불공삼장의 문중서열로 볼 때 ‘ 6대제자’란 높은 배분으로 당연히 그 뒷산 어디쯤에서 다비식까지 치러졌을 것이며 또한 근처 어디에 소박한 부도탑 하나 세워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우리나라 불교사상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의 하나임이 분명한 곳이다.

건원보리사로 추정되는 오대산 금각사의 비석들

그러나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이렇게 의미 있는 역사적인 장소를 우리는 아직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그 동안 불교계나 관계 학자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고하고 이 건원보리사에 대한 위치는 의문사항이었다. 사원이 있었던 유지뿐만 아니라 위의「대교왕경서」에 기록되어 있는 다섯 자 이외에는 다른 문헌에서 아직까지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은 혜초사문이 머물렀을, 8세기의 오대산의 정황이 상세히 그려진 <오대산도>에도 산내 67개의 사원 이름에서도 또한「청량산지」를 비롯한 풍부한 문헌적 기록 어디에도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에서 기인되어 그저 천여 년이란 유구한 시간에다만 맡겨버린 셈이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확정적인 자료를 찾을 수 없으니 너나 나나 그냥 이 문제에 대한 핵심을 피한 채 거론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할까? 필자 자신도, 지난 20여 년 동안, 마치 화두처럼 변해버린 이 난제를 풀기위해 “짜이나리(在?里)?”를 외치며 오대산 골짜기를 두 번이나 뒤졌고 관계되는 국내외 도서관을 수 없이 뒤졌으나, 결과는 “메이여우![沒有]”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머리 속을 스쳐가는 강한 의문에서 내 사유방법에 어떤 전환점을 맞게 되었는데, 그것은 티베트불교에서 수백 년 동안 동굴 속에서 잠자고 있는 매장경전을 찾아내는 신비스런 능력을 가진 라마승 ‘뙤르텐’과 같은 그런 종류의 영감(靈感)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것이 기점으로 그 뒤 근거자료도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나는 이제 한 가설(假說)을 제기하기에 되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어느 정도의 전문 근거자료의 제시가 필요한 만큼 일반 독자들의 지루함과 난해함을 해소하기 위해 우선 결론- 즉 "혜초사문이 입적한 것으로 알려진 건원보리사는 실은 금각사의 별칭이다" - 라는 필자의 주장을 먼저 내세우고 이에 따른 최소한의 근거자료를 제시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구한 다음 후에 정식으로 논문적인 방법-구체적인 자료와 함께 학술적 논증에 따른 결론도출-을 따로 할 계획임을 밝히고 우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한다.

이 ‘가설’은 바로 ‘건원(乾元)’이란 단어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다섯 자로 된 사원명이 드문 사실에서 증폭되어 불공삼장과 금각사에 관한 주변 자료들에서 보완되었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건원’이란 바로 당나라 8대 황제인 숙종(肅宗)의 연호(年號)이기에 건원보리사는 고유명사라기보다 건원황제- 즉 숙종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라는 상징적 보통명사라고 볼 수도 있다는데서 이 가설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사례로 쓰인 다른 경우가 이를 뒷받침한다. 불공삼장의 행장을 묶은「불공…표제집(不空…表制集)」에는 “오마자사(吳摩子寺)라는 사원의 이름을 ‘대력법화지사(大歷法花之寺)’로 바꾸게 했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여기서 ‘대력’은 ‘건원’과 마찬가지로, 숙종의 뒤를 이은 대종황제의 연호이다. 그러니까 <대력+법화+지+사>로 풀이되는데, 여기서 대력은 황제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니 “대종(代宗)의 법화가 날리는 절” 이라는 뜻이 된다.

이런 실례는 더 있다. 역시 같은 자료에 ‘대성금각보응진국사(大聖金閣寶應鎭國寺)’이란 긴 이름의 사원명이 보이는데, 여기서 ‘보응’은 역시 ‘대력’과 같이 대종황제의 연호이다. 그리고 ‘진국사’ 는 국찰(國刹)을 의미하니 <대성+금각+보응+진국+사>가 되어 바로 “성상(聖上) 대종황제의 나라를 평안케 하고자하는 기원의 사원”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보응진국사’라는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황제가 원력을 세워 지은 절인 ‘금각사’의 별칭이 되는 셈이다.

봉건왕조 시대에서는 임금의 호칭을 직접 사용하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그렇기에 편년체적 기술이나 황제를 지칭하는 경우에는 주로 연호를 사용하였다. 예를 몇 개 들면 현종은-’ 개원성상황제(開元聖上皇帝)‘로, 숙종은-‘건원광천문무효감황제(乾元光天文武孝感皇帝)’로, 대종은-‘보응원성문무황제(寶應元聖文武皇帝)’로 불리는 식이다.
그러니까 이런 용례에 의해 황제와 직접 인연이 있는 사원의 경우 정식의 사원이름 대신에 이처럼 연호로 대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혜초가 한 달간 머물며 경전을 번역했다는‘건원보리사’도 위의 용례와 같이 <건원+보리+지(之)+사>로 풀이하여 숙종황제의 원찰을 가리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더구나 숙종황제는 대종에 의한 금각사의 확장중건 이전에 이미 현판을 하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현종 때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금각사와 인연이 깊었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숙종의 호칭에 ‘효감(孝感)’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으로 현종에서 대종으로 이어지는 황제들의 ‘ 효(孝)’를 강조한 미덕이 묻어난다. 그러니까 황제들은 국태민안을 위해 지은 ‘나라 절’에서 그들 자신들의 선대에 대한 효도까지 행했을 것이리라는 개연성도 성립된다.

이렇게 근거들을 종합하면 ‘건원’의 의미는 대종황제의 효심과 호국불교의 의지와 연결되었다고 보여 지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건원보리사를 - <건원+보리+지+사> - 로 나누어 해석하여도 ‘보리’란 단어가 문맥상 발목을 잡는다. 일반적으로 범어(Bodhi)의 한역으로 ‘보제(菩提)’라고 적지만 흔히 ‘보뎨’ 또는 ‘보리’라 읽는 이 말은 사전적으로는 도,지,각(道,智,覺)으로 번역되어 “깨달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나 과정”을 뜻한다. 그리고 그밖에도 지명, 인명 등으로 폭넓게 쓰이는, 가장 보편화된 인도불교적인 단어이다.

혜초가 말년에 오대산에서 번역을 탈고하고 서문까지 쓴 약칭「대교왕경」은 이전에 학계에서는 금강지의 번역으로 분류되었으나 근간의「신대흥선사지」에는 어엿하게 ‘석혜초찬(釋慧超撰)’이라고 바뀌었을 만큼 비중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길지 않은 이 서문에 혜초는 무려 9번이나 ‘보리’라는 단어를 다양한 뜻으로 사용했다. 물론 지나친 아전인수식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혜초가 이 단어를 특별히 즐겨 사용했다 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보리’가 다양한 용례로 쓰였다면, 건원보리사는 넓게 해석해서 “당나라의 무궁함과 건원황제의 명복을 기원하는 기원도량”이라는, 숙종황제에 대한 번역가 혜초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대종황제의 효성이 담긴 비공식 단어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필자는 혜초와 숙종과의 특별한 인연관계- 숙종의 특별한 유지를 받았다던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은혜를 입었다던가 하는 등-까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숙종이 ‘안록산의 난’ 와중에 촉(蜀)나라로 몽진중인 현종(玄宗)의 자리를 양위 받아 757년, 전쟁터에서 제위에 올랐을 때의 주변상황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었다. 이 때 황제에 오른 숙종은 반란군에게서 장안을 수복할 계획을 세울 때, 피난을 가지 않고 장안 대흥선사에 남아있는 금강지(金剛智)와 몇 년 동안 반란군의 동태를 적은 밀지(密旨)를 비밀리에 주고받았다. 그래서 반란이 평정된 후 금강지는 그 공으로 후한 상을 받고 또한 숙종은 금강지에게서 관정수계(灌頂受戒)까지 받고 불교에 귀의했다. 이렇게 건원, 즉 숙종황제는 혜초의 문중과는 인연이 깊은 처지였기에, 그 와중에 혜초가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여 황제의 특별한 은총을 받지나 않았을까하는 좀 무리한 추론을 해보기도 하였다.


위와 같이 만약 ‘건원보리사’란 단어가 한 사원의 정식명칭이외에도 황제를 높이고 혜초사문 자신을 낮추는 존칭과 겸양의 의미로 쓰인 별칭이라면, 그럼 건원보리사는 어느 절을 가리키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마지막으로 남게 된다.

그 질문에 대답은 이미 여러 번 되풀이 되었듯이 바로 금각사이다. 이어지는 결론은 이렇다. 건원보리사는 바로 오대산 남대봉 아래 현재까지 건재한, 혜초의 문중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던, ‘금각사’란 절의 다른 이름이거나 또는 금각사에 속해 있던 ‘12개 보살원락(院落)’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금각사란 큰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곳일 것이다. 원래 큰 절에는 인근에 몇몇 암자가 붙어 있기 마련이니까… 물론 이런 개연성적인 ‘가설’은 건원보리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실존했다고 증명되는 순간에 수명이 다하는 한시적인 것이겠지만…

 

 

 

‘허공 속의 금각(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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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스승 불공삼장

설레임 속에 새우잠을 자고 아침이 되자마자 택시를 하루 종일 대절하는 조건으로 금각사로 향했다. 버스로 올라왔던 길을 도로 내려오다가 삼거리에서 서대봉(西臺峯)을 이정표로 삼아 계곡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가 다시 갈림길에서 오대마을과 남대봉(南臺峯)으로 방향을 잡아 가다보면 청량경구(淸凉景區)란 구역으로 들어서는데, 바로 거기서부터 금각사와 그리고 문수보살이 설법을 했다는 문수석 (文殊石)으로 유명한 청량사(淸凉寺)는 지척거리였다.

지도상으로는 금각사는 오대산 순례의 중심지 타이화이쩐(台懷鎭)에서 12km 거리지만 큰 고개를 넘어야했기에 눈발 날리는 날씨에는 택시기사들이 가기를 꺼렸지만, 일정이 바쁜 나그네로서는 어쩔 수없이 웃돈을 주고라도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일단 가는 데까지라도 가보자고 기사를 달래어 출발을 하였지만 다행히 눈발이 잦아들어 겨우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금각사는 천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역시 허공에 솟아 있었다. 정말 일주문에는 창건주 도의(道義)와 문수의 일화가 어린 ‘금각부공(金閣浮空)’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었는데, 간간히 퍼붓는 눈발 탓인지 아니면 108 돌계단위에 솟아 있는 웅장한 건물 탓인지 정말 허공에 솟아 있는 듯 신비스럽게 나그네에게 다가왔다.

금각사 천왕문

혜초스님이 열반한지 한 세기 뒤에 오대산을 참배한 한 순례객의 기록에는 창건당시의 웅자가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 금각(金閣)은 우뚝하고 외롭게, 삼나무 숲 위에 솟아있는데, 흰 구름은 그 발아래 떠돌고 있으며 푸른 지붕은 초연히 걸려 있다. 금각은 3층인데, 넓이는 9칸으로 높이는 100자가 넘어 보였다. 벽, 처마, 대들보, 기둥에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안팎의 장엄물이 진기함의 극을 다하였다. 2층으로 올라가 금강정유가(金剛頂瑜伽) 다섯 불상에게 참배하였다. 이 불상은 불공삼장(不空三藏)이 당 나라를 위해 만든 것인데, 천축의 나란다 사원의 불상을 본 뜬 것으로 각 불상은 두 명의 협사를 거느리고 단위에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다시 3층으로 올라가니 안쪽의 벽에는 만다라(曼達羅)가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불공삼장이 나라를 위해 만들었다.』

금각사는 역시 고풍스런 맛은 없었지만 한눈에도 건물자체는 웅장하였고 그리고 화려하였다. 현재의 금각사는 명대에 중축된 것으로 관음전을 주축으로 한 배치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앞으로는 사천왕전이 뒤로는 대웅전이 그리고 좌우로는 종루와 고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거대한 다면다비의 철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는 3층의 관음전은 가람의 무게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오히려 대웅전이 초라하게 보였다. 현재의 금각사는 중국불교의 분류법으로는 이른바 청묘(靑廟)에 속한다. 물론 창건당시는 문수사상의 중심으로 중국 최대의 밀교도량이었지만 명대의 중건이후 관음성지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관음상 앞에는 관음의 부모라는 묘장왕(妙庄王)부부의 소상이 자리 잡고 있는 점이었다.

안내를 자청한 사미승에게 불공삼장, 함광, 혜초 등의 계보자료를 보여주며 당나라 때의 유물이나 인근의 부도탑 같은 흔적에 대해 문의를 해보았으나 돌아온 대답은 역시였다. 그래서 스스로 준비한 사진자료를 토대로 확인해본 결과 절 안에 남아 있는 당대의 흔적은 연화문이 새겨진 주춧돌뿐이었고 그리고 연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왼쪽 모퉁이에는 초라한 대종황제와 목이 없는 도의화상의 소상이 어둠 속에 묻혀있었다. 또한 조사전에도 도의, 불공, 함광 등의 창건공덕주 5명의 소상이 모셔져 있기는 했지만 한 눈에도 치졸해보이기 그지없는 근대의 것이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답답함에 밖으로 나오니 다시 눈발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멀리 건너편에 솟아있는 남대봉이 아스라이 바라보였다.

아, 정말 이곳 어디에선가 님이 말년을 보내시면 「천발대교왕경」을 번역하고 서문을 쓰면서 소일하셨고 여기 어디선가 열반에 드셨단 말인가?

금각사 일주문

각설하고 다시 금각사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현종과 숙종을 이어 황제에 오른 대종이 문수보살의 성지인 오대산에 금각사(金閣寺)를 세웠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는 한바 있다. 이 절의 초창유래는 다음과 같은 설화로 시작된다. 남방의 유명한 선승 도의(道義)가 북방순례를 하다가 남대봉 근처를 지나다가 홀연히 금각이 허공에 솟아오르는 모양을 보게 되었다. 문수보살의 계시임을 깨달은 도의는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현종에게 달려가 그 자리에 절을 지을 것을 주청했다. 그리하여 현종 개원(開元) 24년(736년)부터 불사는 시작되었지만 그 뒤 지지부진하다가 뒤에 혜초의 사형제인 도환(道環)이 같은 원력을 세워 공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이즈음 관정수계를 주어 황제의 불심에 불을 지핀 불공삼장은 국태민안을 위해 막 세워진 장안 대흥선사의 문수각과 쌍을 이루는 문수도량을 오대산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대종황제를 설득해 허락을 받아내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불공은 6년 동안이나 천축 순례길을 함께 다닌 심복제자 함광(含光)을 주지로 임명하고 다시 인도 나란다에서 온 순타(純陀)와 서역승 도선(道仙)의 공동 설계에 의해 국제적인 감각의 거대한 사원을 건립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3년 뒤인 770년에는 불공과 제자일행은 그 회향식을 겸한 대규모 공덕제(功德祭)를 올리려고 오대산으로 향했다. 이 때 산 아래의 태원부(太原府)의 관원들에게 행사에 소요되는 재물의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는 황제의 칙명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오대산이란 산속에다 거창한 불사를 벌린 이유는, 물론 당시가 변란이 끊이지 않은 시기였음으로 민심을 결집시킬 호국도량이 필요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불공 개인적으로는 이제 막 뿌리를 내린 신흥세력인 밀교의 포교에 부차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역할은 전통적인 선,교(禪,敎) 양종적 종파보다는 실질불교를 지향하고, 또한 기우제나 같은 초과학적 신통력을 중시하는, 금강계밀교의 성격과 부합되기에 현종-숙종-대종을 잇는 3대에 걸친 황제들이 모두 기존불교를 도외시하고 밀교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게 된 배경도 있었다.

이렇게 주지로 임명된 함광(含光)은 스승의 유지대로 한 평생 나라와 황실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금각사를 지겼다. 그러니까 세수 80에 가까운 혜초사문에게는 스승의 유지가 어린 금각사 근처에서, 더구나 이 절에는 불공의 큰 상자이며 자신의 사형(師兄)이 주지로 있는 절이기에 노후를 기탁하기에 편했을 것이라는 상식적 상황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혜초가 780년 오대산에 입산하기 전에 여러 번 오대산을 들락거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불공삼장과 그의 제자들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금각사나 옥화사의 건립을 위해 공식적으로 오대산을 들락거렸고 또한 태원에서 열린 만인제(萬人祭) 같은 대규모 법회를 여는 마당에, 서열순위로 불공삼장의 세 번째 제자로 꼽히는 혜초가 참여했을 것은 당연한 순리에 속한다. 바꿔 말하자면 혜초사문이 오대산불사에 한 몫을 했었으리라는 가설은 그리 무리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입적지에 관해서 다시 한번 사족을 부친다면, 만약 혜초가 금각사가 아닌 주위 12개 암자중에 머물고 있었더라도 임종에 즈음에서는 큰절의 간병실로 옮겨왔을 개연성 또한 불가에서의 상식에 속한다는 것이다.

 

 

찬란한 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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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의 108계단
780년 4월 15일 건원보리사에 도착한 혜초는 다시 역경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마침 그곳에 오래전에 번역했던 약칭「천발대교왕경」의 당나라 말과 한자 음으로 된 책이 있었기에 그 것을 다시 필사(筆寫)하고는, 5문9품으로 구성된 그 경전의 의미를 간략히 설명한 다음 마지막으로 7언(言) 20구절로 된 게송(偈訟)을 지어서 서문(序文)을 붙이는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친히 완성한 것이 「천발대교왕경서」로 일종의 서문을 겸한 해설서였다.

아마도 혜초는 그 일이 자기의 마지막 일대사라는 것을 알고 심혈을 기울였다. 약칭 그「천발대교왕경」은 스승 금강지로부터 전수받은 이래 50년의 세월 동안 참구하였던 경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5월5일에 탈고를 하고 그 서문까지 손수 지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 경은 밀교승 혜초의 사상적 원천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혜초는 그 긴 이름의 경전에서, 이렇게 문수사상을 집약해서 설명하고 있다.


『문수보살의 덕을 말하자면 신령스러운 자취는 갠지스 강과 같고 성스러운 깨달음은 무한한 신통력을 일으켜서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을 대비한 원력을 세워 깨달음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으니 더할 수 없이 존귀한 보살님이시다. 스스로 황금빛 정토에서 이 사바세계의 청량산에 오셔서 뭇 중생들을 이끌어 깨우치게 하시고자 밝은 등불과 자비의 구름으로 나투시기도, 때론 일만 보살로 나투시기도 한다.…』

금각사에서 바라본 남대봉
대승불교에서는 지혜의 상징인 문수는 실천을 강조하는 보현(普賢)보살과 항상 대비되는 역할로 설정되고 있다. 법당에서도 가운데에서 우주를 상징하는 권인(拳印)을 쥔 비로자나불의 좌우에서 보현과 문수는 나란히 서 있는 형상으로 배치된다. 이는 ‘앎과 행동’이 둘이 아닌 대승의 이상적 덕목을 상징하는 것으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 것을 경계하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밀교 아사리(阿?梨) 로써의 한 평생을 문수보살에게 회향한 혜초사문의 마지막 유촉은 게송에서도 계속된다.

『여래께서 문수보살에게 부촉하시니 비밀법이 널리 퍼짐에 걸림이 없네.
만다라(曼茶羅)와 관정(灌頂)으로 모든 여래께서 이마에다 대신 수기(授記)를 주시네.
천개의 팔과 천개의 발우(鉢盂)를 가진 문수보살의 연꽃 법회에서는
금강삼매(金剛三昧)의 굳은 경지를 일체 중생에게 나누어 주시는구나.』

마지막 불사를 마감하고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어느 하루, 혜초사문은 목욕재계를 하고 깨끗한 승복으로 갈아입고서 가사장삼(袈裟長衫)을 수하고는 백옥으로 만든 사자(獅子)를 타고 남대까지 친히 마중 나오신 문수보살의 손을 잡고서 니르바나로 떠나가셨다.
‘명왕진언(明王眞言)’-“옴 마니 빠드마 훔”을 염하면서…

중국 오대산의 주 보살인 문수보살상
가릉빈가(Kalavinka)의 미묘한 노래 소리가 들리는, 항상 연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다는 그곳, 적멸의 세계로 떠나가셨다. 그날도 오대산 수천 봉우리에는 찬란한 노을이 붉게 타올랐다. 낮에는 꽃비가 내렸고 밤이면 며칠 동안 마치 오로라 같은 방광(放光)이 온 산을 환하게 비추었다.

님이 육신을 벗든 말든, 오대산이 주인을 잃든 말든,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한 세기가 지났을 때였다. 어느 하루, 바다 건너에서 온 순례승이 오대산에 들어와 불공삼장의 체취를 찾아 금각사를 방문하여 문수보살에게 경배하고 나서 불공의 영전에도 삼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 금각(金閣)은 우뚝하고 외롭게, 삼나무 숲 위에 서 있는데, 흰 구름은 그 발아래 떠돌고 있으며 푸른 지붕은 초연히 걸려 있다. 이층으로 올라가 다섯 불상에 예배했다. 이 불상은 불공삼장(不空三藏)이 당 나라를 위해 만든 것이다. (중략) 또한 불공의 제자 함광(含光)이 나라를 위해 칙명을 받들어 수도하던 곳이다.』

그러니까 그 때만해도 이렇게 혜초의 스승인 불공삼장과 그의 ‘6명의 도반’ 중의 하나였던 함광의 흔적은 확인되고 있었다.

당대의 오대산도
혜초사문의 희미한 체취라도 찾을 생각으로 하루 종일을 쏘다니다보니 피곤함이 밀려와 잠시 바람이 없는 곳에서 앉아 상념에 젖어 들어갔다. 그러다 한 줄기 바람에 한기를 느끼고 정신을 차려보니 눈발은 벌써 그치고 날은 반짝 개었지만 어느덧 남대봉 너머로 벌써 붉은 해가 기울고 있었다. 높은 산에는 저녁 해가 유난히 빠른 탓인지 이윽고 찬란한 노을이 물들기 시작되면서 음영이 짙은 땅거미가 빠르게 기어오고 있었다.
그 때 벌써 저녁 예불을 시작하였는지 장중한 화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산 아래의 사원들이 서로 화답하듯 온 산중이 동시에 은은하게 염불삼매에 빠져들고 있었는데, 그 때 멀리 남대봉에서 전음술(轉音術)에 의한 어떤 메시지가 나그네의 귓가로 전해졌다.

해동에서 온 외로운 나그네여!
이제 그만 이 빈승(貧僧)을 놓고 고향으로 돌아가시게. ‘샴발라’는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니 돌아가서 가까운 곳부터 찾아보시게. 참, 빈승과 그대가 인연이 깊은 듯하니 그대에게 한수 읊을 테니, 돌아갈 때 신발삼아 들고 가시게…

그리고는 잠시 뒤, 정말로 게송(偈頌) 한 수가 날아오는 것이었다.


『어느 맑은 날 아침, 문득 푸른 파도 건너서 온 해동의 나그네가 있다면
그대에게 말해주리라. 짚신 벗고 맨발로 돌아가라고.』


- 오대산(五臺山)에 잠든 '천축의 꿈'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