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이자 전국중점문물보호물로 베이징(北京, 북경) 시내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 명, 청나라 시절의 황궁이었다.
1914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손제(逊帝 푸이(溥仪, 부의)가
자신이 거처하던 “궁진(宫禁, 궁금)”에서 추방된 후,
구우천례쒀(古物陈列所, 고물진렬소)가 쯔진청(紫禁城, 자금성) 남부에 설립되었다.
1925년 10월에 구궁(故宮, 고궁)박물관이 설립되었고,
1947년에는 구우천례쒀(古物陈列所, 고물진렬소)와 구궁박물관이 합병되었지만
명칭은 여전히 구궁박물관이라고 불렀다.
1933년 항일 전쟁으로 인해 구궁의 중요한 문물들이
상하이(上海, 상해), 난징(南京, 남경), 쓰촨(四川, 사천) 등지로 운반되었다가
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다시 베이징으로 반환되어 왔지만
나중에 일부 유물은 타이완(台湾, 대만)으로 운반되었다.
구궁박물관은 자금성 건축물과 고대 예술품 및 궁정역사 유적 위주의 내용물을 주로 전시하는
대형 종합 박물관이다.
명나라부터 청나라 시대까지 총 24명의 황제가 거주하며 국정을 맡아 보았던 구궁의 건축은
명 영락(永乐) 4년(1406년)에 착수해 영악 18년(1420년)에 완공되었다.
중국 고대 점성학 학설에 따르면 자미원(紫微垣)[동아시아의 별자리인 삼원 중 하나]이
하늘의 한복판에 위치하면 천제(天帝)가 바로 그 곳에 거주하고 천인(天人)이 대응한다 하여
황제의 거소가 쯔진청으로 불리는 것이라 한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 청 왕조가 무너지면서 청나라 황제가 퇴위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500여 년 동안 무려 24명의 황제가 이 곳에 거주하면서 국가를 다스리게 된다.
신해혁명 후 이 궁전은 국가에 회수되었지만
당시 작성된 《칭스유다이탸오젠(清室优待条件, 청실우대조건)》에 따라
푸이가 잠시 궁진에 머무르는 것이 허가되었다.
총면적 72만 평방미터에 건축물의 면적만 약 15만 평방미터를 자랑하는 구궁은
궁전만 해도 9000여 칸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목제 구조물이며, 황색 유리 기와지붕,
청백색의 평평한 석좌, 으리으리한 채색화는 구궁 내부 경관의 다채로움을 더해준다.
이는 세계에서 현존하는 황가 건축물 중 가장 큰 규모와 완벽한 보존 상태를 자랑한다.
구궁 주위로는 10미터 높이의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데, 남북으로 961미터,
동서로 753미터 길이의 규모를 자랑한다.
성 바깥으로는 너비 52미터, 길이 3800미터의 해자가 둘러쌈으로
완벽한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구궁의 전체적인 구조는 중심 대칭형으로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져 있다.
한 장의 벽돌과 한 장의 기와마저 봉건 계급사회의 예식을 따라 만들어진 것을 보면
황제의 권위가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만큼 높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구궁은 구조와 기능에 따라 와이자오(外朝, 외조)와 네이팅(内廷, 내정)으로 나뉜다.
와이자오는 황제가 대전에서 신하들과 조회를 거행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곳으로
주요 건물로는 타이허뎬(太和殿, 태화전), 중허뎬(中和殿, 중화전), 바오허뎬(保和殿, 보화전)이 있다. 네이팅은 황제가 일상적인 정무를 처리하고 왕후와 첩 및 그의 자녀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주요 건축물로는 간칭궁(乾清宫, 건청궁), 자오타이뎬(交泰殿, 교태전),
쿤닝궁(坤宁宫, 곤녕궁)이 있다.
와이자오와 네이팅은 중심축상의 간칭먼(乾清门, 건청문)을 경계로
전방(남쪽)을 와이자오, 후방(북쪽)을 네이팅으로 나누고 있다.
자금성의 구조와 설계는 중국 고대 전통문화의 특색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으며,
중국 고대 건축 예술의 집대성이자 궁전 건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구궁박물관은 현재 대외적으로 개방된 면적이 43만 평방미터인데,
이는 싼다뎬(三大殿, 삼대전), 허우싼궁(后三宫, 후삼궁)이 주가 되는 중루(中路, 중로),
우잉뎬(武英殿, 무영전)이 주가 되는 와이시루(外西路, 외서로),
양신뎬(养心殿, 양심전), 시류궁(西六宫, 서육궁)이 주가 되는 네이시루(内西路, 내서로),
둥류궁(东六宫, 동륙궁)이 주가 되는 네이둥루(内东路, 내동로),
원화뎬(文华殿, 문화전), 펑셴뎬(奉先殿, 봉선전), 닝서우궁(宁寿宫, 녕수궁)이 주가 되는 와이둥루(外东路, 외동로) 등 5개의 관광노선이 있다.
太和門
太和殿
자금성 내부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등급이 높은 건축물이다.
명 영악 18년(1420년)에 지어졌으며 명, 청 시절 24명의 황제가 제위를 물려받을 때
모두 타이허뎬에서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다.
中和殿
고궁 外朝 3대 대전 중 하나로 자금성의 태화전, 보화전 사이에 위치해 있다.
명 영락 18년(1420년)에 지어졌다.
保和殿
고궁 外朝 3대 대전 중 하나로 중화전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명 영락 18년(1420년)에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진선뎬(谨身殿, 근신전)으로 불렸으나
가경(嘉庆) 때 불에 타 소멸되어버려 수복된 후에는 젠지뎬(建极殿, 건극전)으로 개명되었다.
청 순치(顺治) 2년에 보화전으로 개명되었다.
西六宮지역
乾淸門
東六宮지역 중간출입문
乾淸宮
내정 후삼궁 중의 하나로 명 영락 18년(1420년)에 짓기 시작했다.
명, 청 양대에 걸쳐 소각되었다가 다시 수복하기 시작해 1798년에 지금의 건물이 지어졌다.
交泰殿
坤寧宮
御花園
神武門
景山公園
국가 4A급 관광지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물이다. 베이징(北京, 북경) 시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구궁(故宮, 고궁)박물관과 인접해 있고,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징산(景山, 경산)은 중국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보존 상태가 가장 완벽한 황궁 정원 중의 하나이다.
징산이 시내 지면보다 45.7미터가 높기 때문에 징산에 올라서서 베이징 시내를 내려다보면
고도(古都)의 풍격과 면모를 바로 눈 아래에서 느낄 수 있다.
징산은 역사가 유구한 황가 정원 관광지로 유명하다.
전체 면적은 33만 평방미터로 그 중 고대 건축물만 5만 평방미터를 차지하고 있는 징산은 근 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징산 정원의 발전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추진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요나라 시절 유저우(幽州, 유주)가 난징(南京, 남경)으로 정해지면서 요 태종(太宗) 예뤼더광(耶律德光, 야률덕광)은 베이하이(北海, 북해)에 야오위(瑶屿, 요서) 행궁(行宫, 왕이 출궁하거나 도읍을 떠나 나들이할 때 머물던 별궁)을 지었다. 그리고는 베이하이(北海, 북해)에서 파낸 진흙을 징산과 츙화다오(琼华岛, 경화도)의 비교적 큰 토산 위에 각각 쌓아 올리면서 지금의 징산이 있게 되었다. 고대 사람들은 이를 두고“요나라 시절에 토산을 짓기 시작했네……” 라고 말하곤 했다.
당시 정원은 “허우위안(后苑, 후원)”, 산은 “칭산(青山, 청산)”으로 불렸는데 원나라 황제 후비례(忽必烈, 홀필렬)는 징산의 정원을 황성(皇城)의 중요 구성 요소로 삼기로 계획했다. 따라서 지샹거(集祥阁, 집상각), 싱칭거(兴庆阁, 흥경각)를 수리하고, 산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으며, 녹색 정자를 지었다. 명(明)대에 이르러서는 징산정원은 이미 삼림이 울창해지고, 주변에는 다양한 식물들과 신기한 과일들이 많아 바이궈위안(百果园, 백과원)으로 불렸으며, 산은 “완쑤이산(万岁山, 만세산)”으로 불렸다.
황제는 산 후방의 펑셴뎬(奉先殿, 봉선전)을 수리해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이용했으며, 관더뎬(观德殿, 관덕전)을 지어 연무(演武)를 관람할 때와 황손 및 대신들의 도덕과 품행을 관찰할 때 이용했다. 뿐만 아니라 봄 나들이 시 달구경을 하기 위해 융쓰덴(永思殿, 영사전), 후궈중이먀오(护国忠义庙, 호국충의묘)를 지었으며, 온갖 과일과 목란을 재배하고, 관화뎬(观花殿, 관화전)을 수리했다.
1644년 리쯔청(李自成, 이자성)이 베이징 도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숭정(崇祯) 황제는 징산에서 자해를 했다.
청 순치(顺治) 8년에는 완쑤이산을 징산으로 개명했다.
건륭(乾隆) 연간에는 산 전방에 치왕러우(绮望楼, 기망루)를 지었으며,
산 위에는 지세를 따라 우팡포팅(五方佛亭, 오방불정)을 지었다.
산 중심에는 완춘팅(万春亭, 만춘정)을 짓고, 동쪽에는 관먀오팅(观妙亭, 관묘정)과
저우상팅(周赏亭, 주상정)을, 서쪽에는 지팡팅(辑芳亭, 집방정)과 푸란팅(富览亭, 부람정)을 차례대로 지었다. 산 후방에 있는 서우황뎬(寿皇殿, 수황전) 건축물들을 수리했을 뿐만 아니라
산 동쪽에 충전황디쯔이추(崇祯皇帝自缢处, 숭정황제자액처)를 지정해
샤마베이(下马碑, 하마비)를 세웠다.
징산의 건축물들은 건륭(乾隆) 연간에 비로소 번영기에 접어들어 그 찬란함을 발휘한다.
이는 원나라 시절부터 징산의 정원을 황궁의 중요 구성 요소로 삼는다는 계획 덕분에
가능했던 것으로, 모든 건축물들은 황궁의 규제에 따라 지어졌다.
따라서 이처럼 높은 등급과 다양한 형태를 자랑하며,
원형 보존상태마저 완벽한 건물들을 보긴 쉽지 않다. 1928년에 공원으로 개관했다.
현재 공원 내부에는 오래된 소나무와 잣나무가 1천여 그루 있으며,
모란꽃과 작약꽃 등의 화훼들이 몇 만 송이나 있다.
꽃들은 겨울을 제외하고는 활짝 피어 있으며,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파릇함을 보여준다.
여기에 꽃, 분경(盆景), 분(盆)에 화초나 조화를 심어 돌이나 모래 등을 이용해서 자연의 경치처럼 꾸민 것) 전시회를 비롯해 각종 문화 활동을 지속적으로 개최해
고대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원에 새로운 시대가 약동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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