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향기 ♣>/♧ 역사의 향기 ♧

[스크랩] 아름다운 궁궐이야기

화엄행 2010. 1. 1. 01:13

1) 경복궁

경복궁을 찾는 모든 관람객이 최고로 여기는 장소 중 하나인 경회루(왼)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오). 광화문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2010년 복원공사 완료예정.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가장 먼저 축조한 궁궐이 바로 경복궁입니다. '경복(景福)'의 뜻은 임금님의 큰 은혜와 어진 정치로 모든 백성들이 아무 걱정 없이 잘 살아간다.'는 뜻으로 중국의 <시경>에서 따온 말입니다.

1395년 처음 세워진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고종 2년, 흥선대원군은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복궁의 규모와 면모를 창건 당시 그대로 재현시키는 역사를 강행해 1865년경 다시 세웠습니다. 재건공사는 4년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 규모가 워낙 커 국고가 탕진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대원군의 생각은 주변 국가에서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자 조선의 힘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공된 경복궁은 궁성의 길이가 1,762칸으로 큰 규모였으며, 문은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의 사대문이 중건되었습니다. 궁성 내의 전각은 7,225칸이 있고, 궁성 밖의 후원에는 489칸의 전각이 들어섰습니다. 한편 경복궁을 재건한 고종은 이관파천 후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1895년 경복궁에서는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이 경복궁에서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입니다. 이후 1910년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빼앗고 경복궁에 조선총독부를 세웠습니다.

 

 

2) 운현궁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개인 소유의 주택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면서 생부(生父) 이하응(李昰應)은 흥선대원군이 되었고, 생모 민씨는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의 봉작을 받았습니다.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 많은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사실인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3) 경희궁

경희궁에 임금이 거처하기 시작한 것은 인종 때부터입니다. 인종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이 거처하던 창경궁이 불에 탔습니다. 거처를 옮겨야 했던 인종은 1624년 2월부터 경희궁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경희궁은 280여 년 동안 여러 왕들의 거처로 창덕궁과 더불어 사용되었습니다.

임금들이 거처하던 시기에는 약 7만여 평에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경희궁도 일제강점기 수난의 역사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1910년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궁궐 건물이 헐려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서울시에서는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수정전의 섬돌과 축대, 계단 등이 일부 남아있는 터전 위에 정전 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했습니다.

 

 

4) 덕수궁(경운궁)

서울의 궁궐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궁궐이 바로 덕수궁입니다. 다른 궁과는 달리 시내에 위치한 것 같지만 실제는 낮은 산자락에 위치한 궁입니다. 산자락이 너무 낮고 현재는 건물과 길로 눌리고 끊어져 있어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덕수궁에 다른 궁궐과는 달리 서양식 건물이 많은 이유는 지금부터 100년 전 지금 궁궐의 모양으로 다시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1897년 고종 임금이 강대국의 간섭에 시달리고 있을 때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궁궐을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이 궁궐을 다시 짓기 시작한 이유는 조선왕조가 살아있다는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덕수궁을 당시의 조선과 서양의 최고 건축 기술을 합쳐서 새로 짓도록 했습니다.

덕수궁(경운궁)이란 궁 이름은 본래 물러난 왕에게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지어 올리는 이름으로, 현재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부르는 것은 고종이 황제 직위에서 물러나 경운궁에 머물게 되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5) 창덕궁

창덕궁은 태종 5년(1405)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입니다. 조선을 창건한 이래 '왕자의 난' 등 골육상쟁의 비극의 역사를 지닌 경복궁을 법궁으로 사용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입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했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인조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이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일어났습니다. 특히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는 큰 불이 났고,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ㆍ서 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화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기도 합니다.

 

창덕궁 후원
'비원'이라고 불리는 창덕궁의 후원은 아름다운 조경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습니다. 후원에는 100여 종이 넘는 나무가 있으며, 그 중에는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어 원형이 비교적 충실히 보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바 있습니다.

 

 

6) 창경궁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 있었던 곳으로, 성종 14년(1483)에 대왕대비와 대비를 모시기에 부족한 궁궐을 보충하기 위해 수강궁터에 새로이 창경궁을 창건했습니다. 창경궁은 한 때 2000칸이 넘는 대규모의 궁이었는데 서울의 다른 궁궐과 같이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때인 1616년 다시 제 모습을 찾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은 다른 어떤 궁보다 큰 수난을 겪었습니다. 1907년 이후 일본은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면서 많은 건물들을 헐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다시 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동물원은 1909년부터 1984년까지 창경궁 자리에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민족문화의 창달과 전통문화 유산의 발굴, 보존 등을 위한 정부와 국민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많은 유적이 조사ㆍ정비되었습니다. 1981년 정부는 '창경궁 복원 계획'을 정하고 1983년에는 10월 130여 종의 900여 마리의 동물들과 591종 2177분의 식물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1984년 8월까지 동물원 시설 등을 철거했습니다.

 

 

부시
궁궐 건물 위를 보면 그물 같은 것이 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부시’라고 부릅니다. 전통 가옥의 처마는 새들이 둥지를 틀기 좋은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새들의 분비물로 인한 건물의 부식을 막고, 새를 잡아먹기 위해 뱀이 기둥을 타고 올라와 살생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했습니다.



 

차일고리
각 궁궐의 중심이 되는 근정전, 인정전, 명전전 등 법전의 기둥과 조정의 박석에는 둥근 쇠고리가 있습니다.
중요 행사나 의례 시 관료들이 장시간 모여 있을 때에 햇살이나 비를 가려줄 차일(천막)을 쳤는데, 차일고리는 그 차일을 치는 줄을 매던 고리입니다.

 

 

 


법전 어귀에서는 다리가 셋이고 귀가 둘 달린 둥근 청동 솥을 보게 되는데, 이를 정이라 합니다. 처음에는 흙을 구워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주로 고대 종교 의례나 국가의 큰 잔치 때 사용되었던 예식용 그릇 가운데 솥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중국의 옛 기록에 따르면 천자는 9개의 정, 제후는 7개의 정을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구정(九鼎)은 왕권과 중국의 아홉 개의 주를 상징하며 또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왕권의 상징물로 볼 수 있습니다.

 

 

박석
조정은 법전에 들어서면 보이는 조회를 하는 넓은 뜰을 의미합니다. 조정에는 화강암으로 된 큰 돌들이 깔려 있는데, 이렇게 얇고 넓적한 돌을 박석이라고 부릅니다. 크기가 일정치 않으며 표면도 울퉁불퉁한 박석을 궁궐에 깔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왕이 행사에 참가 시 건물 안에서 밝은 뜰 위에 서있는 신하들을 보게 되는데, 땅에 반듯한 돌들이 깔려 있으면 눈이 부시므로 난반사를 일으켜 빛이 분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의 관원들은 가죽신을 신었는데, 돼지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미끄러운 바닥에서는 그런 가죽신이 미끄러지기 마련이니, 5센티미터 정도 되는 얇은 박석을 울퉁불퉁하게 처리하여 임금님 앞에서 행여나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고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정(朝廷)에 있는 박석은 약간 바깥쪽을 향해 경사가 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가 올 경우 박석 옆으로 물이 빠지게 되어 배수시설을 따로 설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드므
법전이 위치하고 있는 월대 위에 각 모서리에는 쇠솥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이것을 드므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물이 가득 담아 두었습니다. 주로 나무로 만들어진 궁궐에 화재가 났을 때 불을 빨리 끌 수 있도록 소방수를 갖다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정도 물을 갖고는 화재를 진압 할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일종의 의식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불귀신은 자기 얼굴이 얼마나 흉측하고 무서운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귀신이 불장난을 치기 위해 법전으로 달려오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데, 평소에 자기 얼굴을 모르고 있던 불귀신이 자기 얼굴에 놀라 도망간다고 합니다.

 

 

일월오악도
법전 안을 들여다보면 임금님의 용상 뒤에 큰 그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 바로 일월오악도, 일월오봉도, 일월오봉병(병풍)이라 부르는 것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림의 양쪽에 해와 달이 있고, 다섯 봉우리가 있으며, 소나무와 폭포, 그리고 푸른 물결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임금을 향한 백성들의 칭송과 나라 융성의 염원, 그리고 우주 질서에 대한 외경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잡상
잡상은 큰 건물의 처마 마루에 줄지어 앉아있는 와제 토우를 말합니다. 잡상들의 모습은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현장스님,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입니다. 삼장법사는 가사장삼 대신 머리에 갓을 쓰고 몸에는 갑옷을 걸쳤으며 눈은 부릅뜨고 다리를 벌리고 위풍당당하게 앉아있어 수행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무사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습니다. 손오공도 삿갓을 쓴 포졸의 모습으로 이들은 주로 천지를 떠도는 잡신이나 귀신을 잡아 궁궐을 지키는 일종의 군사들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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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munsi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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