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예자료 |
현존하는 규장각 소장 왕실의 서예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宗親府와 편자미상의 어필첩은 1) 宗親府 : 列聖御筆[1], 列聖御筆[2], 列聖御筆[3], 列聖御筆[4], 2) 編者未詳 : 御製御筆[1], 御製御筆[2], 御製御筆[3], 御前親幕題名帖, 列聖御筆[5]-1, 列聖御筆[5]-2, 列聖御筆[6] 등이 있고, 둘째 국왕 및 왕비·종친의 개별 어필첩은 1) 宣祖 : 宣廟御筆[1], 宣廟御筆[2], 宣廟御筆[3], 宣廟御筆[4], 『仁穆王后御筆』(⇒宣祖御筆), 2) 孝宗 : 寧考御筆, 孝宗大王御筆, 3) 肅宗 : 唐詩, 肅宗大王御筆, 肅宗御筆, 御製御筆[2], 4) 景宗 : 肅宗大王御筆, 列聖御筆刊進及景宗大王御筆屛風謄錄, 5) 英祖 : 敦寧府揭板, 御製御筆北苑帖, 英祖御筆, 宗簿寺揭版, 6) 高宗 : 御製懸板帖, 7) 大院君 : 大院君筆帖, 8) 純元王后 : 純元王后御筆, 純元王后御筆封書, 9) 翼宗 : 翼宗簡帖 등이 있다. |
1) 열성어필 |
오늘날 현존하는 열성어필의 수는 적지 않다. 그 대부분은 규장각에 전하며, 奉謨堂과 赤裳山史庫가 그 바탕을 이룬 장서각 등에 전한다. 이밖에도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전하지만 대략 규장각과 장서각 소장본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여기서 장서각 소장 열성어제어필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표 1). |
[표 1] 장서각 소장 열성어제어필 |
表題 |
刊行年代 |
祖代 |
서지사항 |
소장번호 |
비고 |
열성어필 |
1723년(경종 3) |
문종-숙종 |
42.5×28.932절 석각 |
장서각 3-498 |
적상산사고장 |
열성어필 |
1723년(경종 3) |
문종-숙종 |
41.9×29.232절 석각 |
장서각 3-755 |
내사기 |
열성어필 |
1725년(영조 1) |
태조-경종 |
42.3×29.552절 석각 |
정문연도서관大 C10c 170 |
내사기 |
열성어필첩 |
1723년(경종 3) |
태조-경종 |
30.8×22.351장 영인본 |
정문연도서관C10c 170 |
열성어필(1725) 영인본 |
열성어필 |
1723년(경종 3) |
선조-숙종 |
49×34.7100장 목각 |
장서각 3-499 |
· | |
表題 |
刊行年代 |
祖代 |
서지사항 |
소장번호 |
비고 |
열성어필 |
1723년(경종 3) |
선조-숙종 |
100장 목각 |
장서각 3-754 |
· |
열성어필어제 |
1785년(정조 90 |
숙종-정조 |
· |
장서각 3-497 |
· | |
조선시대 최초로 1662년(현종 3)에 간행된 열성어필은 『列聖御筆』[1]이다. 그 말미에는 당시 간행 主幹者의 하나였던 朗善君 李俁가 自筆 刊記에서 열성어필첩의 간행목적이 열성의 어필이 세대가 멀어지고 난을 겪으면서 다수가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
이 첩은 1663년 봄 史庫 奉藏用으로 특별히 粧帖한 것으로서, 한말에 규장각 도서로 편입된 태백산 또는 오대산사고에 봉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간행된 석각본 열성어필에는 적상산·태백산·오대산 사고에 봉장되었다는 藏書記나 왕명으로 아무개에게 賜與한다는 內賜記가 적힌 예가 있어 각각의 전래과정을 엿볼 수가 있다. |
한편 열성어필의 刊本은 대략 석각본과 목각본으로 대별할 수 있다. 석각의 경우는 어필을 石版에 음각한 뒤 祖代順으로 頁數를 매기어 이를 壯紙에 墨榻하여 첩으로 장황하는데, 이를 이른바 旋風葉이라 한다. 각 시기마다 석각본 열성어필첩을 성첩하게 되는데 어필의 선택에 따라 혈수가 달라질 경우, 이전의 석판에 세긴 혈수를 메꾸고 다른 부분에 새로운 혈수를 새기었으므로 성첩의 전후를 알 수가 있다. 목각의 겨우는 일반 목각본의 경우처럼 어필을 목판에 양각으로 鋟梓한 후 楮紙에 묵탁하여 이를 성책하는데, 이는 이른바 線裝의 형태로 되어 있어 기록에서는 冊이나 卷으로 나타나 있다. 혈수는 양각된 자획의 우측상단에 음각하여 표시하였음이 부분적으로 보인다. 이밖에 열성어필로서 진적을 장첩한 경우와 기존의 어필을 새긴 비문 등을 탁본하여 장첩한 예도 있다. |
그런데 열성어필첩은 印刊되기까지의 전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혀줄 『列聖御筆刊進及景宗大王御筆屛風謄錄』이 있어 도움이 된다. 『列聖御筆刊進及景宗大王御筆屛風謄錄』은 1725년(영조 1) 종친부에서 『열성어필』을 간행할 때의 관련 기록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1725년 4월 13일부터 11월 13일까지 관청에서 주고받은 甘結·牒呈, 국왕의 傳敎·備忘記, 물품의 조달 과정과 내역, 工役에 참여한 사람들의 숫자와 기간, 지급 내역 등이 기록되어 있다. 열성어필과 숙종·경종어필병풍 印刊 과정을 도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표 2). |
[표 2] 열성어필 印刊 과정 |
4월 13일 |
종친부가 영조에게 어필인간 시작을 보고하다. |
14일 |
종친부로 移安한 板本 조사를 위해 해당 관청에 물품조달을 요청하다. |
18일 |
승정원에서 인출할 어필 件數를 정한 교서관 단자를 종친부에 통보하다. 승정원과 도화서에서 御寶·御筆을 모사할 사자관과 화원을 定送하다. |
22일 |
선조어필 목판활자에 쓸 판석과 못을 요청하다. 印出匠·木匠·木手를 정송하다. 승정원에 있는 선조어필 목판 2樻를 출급하다. |
23~30일 |
어필 모사와 인출에 필요한 각종 묵·아교·刻刀 등 잡물조달 요청하다. |
5월 1일 |
상의원에서 彫刻匠을 정송하다. |
16일 |
영조가 경종어필 御覽하다. |
17일 |
태조·경종어필을 인출하여 頒賜받고자 하는 전국의 監營 조사하다. 감영에 物力을 요구하다. |
18일 |
종친부에서 태조어필을 출급하다. |
19일 |
어필석판 중 改刊·첨부할 어필 먼저 작업 착수하다. 석판 중 훼손된 것 改刻하다. 磨造匠 2명을 정송하다. |
20일 |
태조·선조·효종어필 개각하다. |
20~26일 |
어필인출에 필요한 각종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
26일 |
李箕鎭이 바친 경종 手札을 인출하다. 경종 어필 2度을 석판에 모사하다. |
6월 2일 |
경종이 金載海에게 내린 유서를 添刊하기로 결정하다. |
6일 |
영조가 선조·원종·효종의 어필 인출을 명하다. 臨昌君家의 어필은 石刻하고 경종어필병풍은 木板으로 할 것을 명하다. 경종어필8자병풍 인출을 위한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
7~14일 |
열성어필 석판 중 缺傷된 부분을 먼저 새기다. 선조·원종·효종어필을 석각하다. 경종어필 2度·諭書를 석각하다. 각수가 사용할 물력을 조달하다. |
18일 |
모각할 어필중 손상된 본을 먼저 각숙할 것을 명하다. 목수 조달을 요청하다. 종어찰 모사를 시작하다. 열성어필 목판의 役을 마치고 粧䌙을 시작하다. 열성어필 석판본 마무리할 刻手·磨墨軍 등 송달을 요청하다. 경종어필병풍서 장황을 시작하다. |
28일 |
茶母 정송을 요청하다. 각종 물력을 요청하다. |
7월 5일 |
경종어필병풍서 인출 진상건을 마련하다. |
14일 |
열성어필 목판본은 인출하였으나, 석판본은 늦어지고 있으니 물자를 더 투입해 신속히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하다. |
18일 |
경종조 반사본에 ‘命除謝恩’을 添書한 예에 따라 을사년 열성어필에도 넣을 것을 결정하다. |
19~25일 |
열성어필 인출시 冊匠하에 사용할 잡물, 숙종어필찬문 인출할 재료, 어필 석판본 作帖, 병풍제작·진상건 표장할 직물을 요청하다. |
8월 2일 |
첨간할 어필과 신간한 어필을 인출하는데 들어갈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선조·원종·효종어필 13장, 영조 御諱 改張 3장, 金昌集 이름 지워진 곳 개장 1장, 인출과 粧帖에 필요한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
12일 |
인출한 어필의 작첩을 신속히 해 줄 것을 요청하다. |
8.12~9.19일 |
열성어필첩의 작첩과 搗砧작업을 진행하다. 병풍을 정황하다. |
18일 |
영조가 1721년에 간행한 숙종어필 ‘春眠不覺曉’를 다시 간인할 것을 명하다. |
21일 |
영조가 열성어필에 경종어필 ‘懲忿窒欲改過遷善己卯暮春’의 첨간을 명하다. |
23~28일 |
경종어필을 목판첨간하는 작업을 실행하다. 경종어필8자병풍틀을 제작하다. |
25일 |
열성어필 석판본 도침을 완료하다. |
10월 3일 |
열성어필첩 및 경종어필병풍 제작을 완료하다. 진상일자를 10월 7일로 확정하다. |
3~6일 |
진상 준비를 위한 각종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
7일 |
各殿에 進上儀를 거행하다. |
17일 |
숙종어필 인출 작업을 계속하다. 병풍장병에 필요한 물자 조달을 요청하다. |
21~22일 |
열성어필, 경종어필병풍, 숙종어필병풍 참여자 負役日字에 따른 급료지급을 명하다. |
26일 |
숙종어필병풍의 도침일자를 27일로 확정했음을 통고하다. |
29일 |
영조에게 숙종어필병풍 진상일자를 11월 3일자로 정했음을 보고하다. |
30일 |
진상 준비를 위한 각종 물력 조달을 요청하다. 병조에서 진상할 날 차비군을 제공하지 못하므로 坊民을 調用할 것을 요청하다. 영조가 진상일자 변경을 명하다. |
11월 3일 |
진상일자를 11월 6일로 결정하였음을 보고하다. |
7일 |
어필주관당상이 영조에게 어필인간, 사후처리, 奉安處의 결과 보고를 하다. |
13일 |
14일 造紙署 遮日岩에서 御諱를 세초할 것을 결정하다. 모든 작업이 완료되어 撤局하다. | |
열성어필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규장각에는 宗親府에서 편찬한 어필첩으로 『列聖御筆』[1], 『列聖御筆』[2], 『列聖御筆』[3], 『列聖御筆』[4] 등이 있다. 『列聖御筆』[1](奎 10310, 10311)은 1帖(21折 42面)으로,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이다. 권말의 발문에 ‘皇明崇禎紀元後癸卯仲春’이란 기록으로 보아 1663년(현종 4)에 만들어진 것이다. 발문에는 기존의 열성어필이 간행된 지 오래되었고 또 여러 전란을 거치면서 없어진 것이 많으므로 이제 九朝의 유묵을 수집하여 다시 책을 엮는다고 하였다. 위의 두 본은 동일한 판본이지만 편차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즉 〈奎 10311〉본에는 문종·세조·성종·명종·선조·원종[인조의 父]·인조·효종 등 아홉 왕의 친필이 수록된 반면에 〈奎 10310〉본에는 명종 어필 1면이 누락되어 있다. 또 여덟 왕의 어필들도 순서가 약간 다르다. 이러한 차이는 묶는 과정에서 발생한 착오인 듯하다. |
『列聖御筆』[2](奎 9833)은 1冊[拓], 2冊[木]으로,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이다. 제1책은 어필의 탁본을 모아놓은 것으로 〈奎 10322〉, 〈奎 10324〉, 〈奎 10326〉본과 동일한 판본이며 1725년(영조 1)에 제작되었다. 제2책은 어필을 목판에 새겨서 찍은 것으로 〈奎 9828〉, 〈奎 9829〉, 〈奎 9832〉본과 동일한 판본이며, 숙종어필까지 수록된 것으로 보아 경종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列聖御筆』[3](奎 10323, 10327)은 1帖(32折 64面)으로,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이다. 내용은 문종·세조·성종·인종·명종·선조·원종[인조의 父]·인조·효종·현종·숙종 등 11왕의 어필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에 숙종어필 부분에 “賜戶曹判書金昌集”이란 글씨가 삭제되어 있는데, 이는 김창집이 1722년(경종 2) 壬寅獄事 때 죽었기 때문이다. 이때 삭제된 김창집의 이름은 1725년(영조 1)에 열성어필을 새로 간행할 때 복구하였다. |
『列聖御筆刊進及景宗大王御筆屛風謄錄』(奎 12997)은 1冊(56張)으로, 종친부에서 1725년(영조 1)에 列聖御筆을 새로 간행할 때의 기록들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표지에는 ‘乙巳三月十三日’이라고 쓰여 있는데, 처음 기록한 날짜인 1725년 3월 13일부터 11월 21일까지의 기록들이 실려 있다. 열성어필 재간행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1725년 3월 13일의 경연 논의를 비롯하여 列聖御筆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각 관청들간에 주고받은 甘結·牒呈 등의 공문서, 국왕의 傳敎와 備忘記 등 다양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
『列聖御筆』[4](奎 10322, 10324, 10326)은 1冊(52折 102面)으로, 조선시대 太祖∼景宗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이다. 『列聖御筆刊進及景宗大王御筆屛風謄錄』(奎 12997)에는 1725년 3월 13일의 경연에서 숙종의 贊文이 붙은 태조어필과 선왕 경종의 어필을 이미 간행된 열성어필에 추가하여 간행할 것과 1723년(경종 3)에 간행된 열성어필에는 金昌集의 이름이 삭제되어 있는데 김창집이 이미 복관되었으니 삭제된 이름을 복구할 것 등이 제기되어 영조의 윤허를 받아 그 해(1725) 10월 열성어필이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책의 체제나 구성은 〈奎 10323〉과 동일하다. 내용은 太祖·文宗·世祖·成宗·仁宗·明宗·宣祖·元宗(仁祖의 父)·仁祖·孝宗·顯宗·肅宗·景宗 등 13왕의 친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태조어필과 경종어필, 효종어필의 일부, 그리고 숙종어필 중 〈太祖大王御筆贊幷小序〉 외 2편 등이 1725년 간행시 새로 추가된 것이다. |
2) 규장각에는 編者未詳의 어필첩으로 『御製御筆』[1], 『御前親幕題名帖』, 『列聖御筆』[5]-1, 『列聖御筆』[5]-2, 『列聖御筆』[6] 등이 있다. 『御製御筆』[1](奎 11926)은 23枚로, 『度支定例』의 서문만을 판각하여 간행한 필첩이다. 우측 상단에 ‘御製御筆’이란 제목이 있고, 판심제는 ‘度支定例’이다. 매면 4행 8자씩 쓰여져 있고, 版次가 찍혀 있다. 『度支定例』는 1749년(영조 25) 영조의 명령을 받고 朴文秀 등이 간행한 책이다. 필첩의 내용은 이제 정성스러운 뜻이 매우 깊은데 만약 이것이 없으면 맹랑하여 근거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제 정서하여 내리니 훗날 다시 보는 사람이 有違之律에 근거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나라를 위한 깊은 계책이니 嗣君이 될 사람은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
『列聖御筆』[5]-1(奎 9828, 9829, 9832)은 1冊(100張)으로, 편자 미상으로 景宗年間 以後에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으로, 어필을 목판에 새겨서 찍은 것이다. 본서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奎 9828, 9829, 9832〉본과 (2)〈奎 9826, 9827, 9830, 9831〉본이 肅宗御筆까지는 동일한 판본이고 (2)에만 끝에 경종어필 2장이 추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이 경종대에 만들어졌고, 영조대 이후 (1)에 경종어필을 추가하여 (2)를 다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의 내용은 宣祖, 仁祖, 孝宗, 顯宗, 肅宗 등 다섯 왕의 어필이 수록되어 있다. 宣祖御筆 중에는 난 그림이 하나 포함되어 있다. |
『列聖御筆』[5]-2(9826, 9827, 9830, 9831)은 1冊(102張)으로, 英祖年間 以後에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으로, 어필을 목판에 새겨서 찍은 것이다. 본서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奎 9828, 9829, 9832〉본과 (2)〈奎 9826, 9827, 9830, 9831〉본이 肅宗御筆까지는 동일한 판본이고 (2)에만 끝에 경종어필 2장이 추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이 경종대에 만들어졌고 영조대 이후 (1)에 경종어필을 추가하여 (2)를 다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의 내용은 宣祖, 仁祖, 孝宗, 顯宗, 肅宗, 景宗 등 여섯 왕의 어필이 수록되어 있다. 宣祖御筆 중에는 난 그림이 하나 포함되어 있다. |
『列聖御筆』[6](奎 9824, 9825)에는 1冊(78張)으로, 顯宗年間 以後에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의 친필을 모아놓은 책으로, 어필을 목판에 새겨서 찍은 것이다. 본서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宣祖御筆에서 顯宗御筆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顯宗 이후로 추정된다. 본서의 내용은 宣祖, 仁祖, 孝宗, 顯宗, 등 네 왕의 어필이 수록되어 있다. 각 왕의 어필 첫 장에는 ‘宣廟御筆’, ‘仁廟御筆’ 등의 도장을 찍어서 어느 왕의 글씨인지를 표시해 놓았다. |
『御前親幕題名帖』(古大 9920-2)에는 1帖(17折)으로, 1831년(순조 31) 이후에 別軍職과 관련된 正祖(1776~1800)의 〈題御前親幕題名帖〉, 〈新除傳令式〉, 〈例用傳令式〉, 정조의 어필인 ‘御前親幕’과 ‘御前親裨直廬’, 1776년(영조 52)부터 1831년(순조 31)까지의 〈題名〉을 합철하여 간행한 題名帖이다. 정조의 〈題御前親幕題名帖〉부터 정조의 어필인 ‘御前親裨直廬’까지는 목판본이고, 마지막의 〈題名〉은 필사본이다. 〈題御前親幕題名帖〉은 정조가 1787(정조 11)에 지은 것으로 별군직의 유래와 임무에 대하여 적었다. 〈新除傳令式〉과 〈例用傳令式〉은 전령을 내릴 때의 공문 양식으로 “職銜姓名別軍職差下爾其來現察任者 年月日”을 적고 마지막에 御花押을 찍는다. ‘御前親幕’과 ‘御前親裨直廬’는 정조의 어필로 1면에 1자씩 큰 글씨로 쓰여 있다. 〈題名〉에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부터 1831년까지 별군직에 임명된 무신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
2) 국왕개인어필 |
역대 왕들의 개별 어필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규장각에는 太祖부터 明宗까지의 개별 어필로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열성어필』에 그 유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
(1) 宣祖의 어필 : 선조의 글씨는 이전의 문종·성종·인종·명종이 따랐던 송설체와는 달리 단정한 짜임과 근엄한 획이 있다. 이런 특징은 선조를 이은 元宗·義昌君(1589~1645)·貞明公主 및 석봉 한호의 글씨에도 잘 나타나 있다. 선조의 글씨는 이후 원종·인조·효종으로 계승되었다. |
규장각에는 선조의 어필첩으로 『宣廟御筆』[1], 『宣廟御筆』[2], 『宣廟御筆』[3], 『宣廟御筆』[4], 『仁穆王后御筆』(⇒宣祖御筆) 등이 있다. 이들은 의창군이 1630년(인조 8)에 宣祖가 중국 문인들의 漢詩를 써서 자신에게 내린 것과 선조의 〈墨竹圖〉, 〈墨蘭圖〉 2점을 모아 목판으로 간행한 御筆帖이다. |
『宣廟御筆』[1](古大 2410-11)은 1冊(54張)으로, 수록된 시문이 일부가 결락되거나 중복된 부분이 있고, 심지어 편차가 잘못된 곳도 있다. 동일 판본으로 찍은 『宣廟御筆』[4](奎 10126, 10171)은 1帖(6折 12面), 『宣廟御筆』[2](經古 754.1-Se64s)은 1冊(23張), 『宣廟御筆』[3](經古 754.1- Se64s)은 1冊(23張) 등도 주목된다. 그 중에서 『宣廟御筆』[1]은 수록된 시문이 가장 많은 20여 편의 글이 있다. 어필첩에는 原詩의 작자와 제목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앞부분에 韓愈의 〈符讀書城南〉(五言古詩) 중의 일부, 작자 미상의 4言詩 2수, 승려 靈徹의 〈答韋丹〉(七言絶句), 작자 미상의 칠언절구 2수, 李群玉의 〈雨夜呈長官〉(五言古詩) 중의 일부, 의창군이 쓴 발문이 있다. 이어서 ‘孝悌忠信正直’, ‘改過遷善 懲忿窒慾’이 큰 글씨로 쓰여 있고, 작자 미상의 오언시 2구, 張祜의 〈四歸樂二首〉(五言絶句), 작자 미상의 칠언 절구 3수, 劉長卿의 〈過鄭山人所居〉(七言絶句), 작자 미상의 칠언절구 2수, 李白의 〈望廬山瀑布〉(七言絶句), 작자 미상의 오언시 2구, 칠언시 일부, 오언시 2수, 칠언절구 1수 등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孝悌忠信正直’부터 劉長卿의 〈過鄭山人所居〉까지에는 1부터 16까지의 板次가, 李白의 〈望廬山瀑布〉 뒤에 실린 오언시 2구부터 마지막 한시까지에는 19에서 25까지의 판차가 차례대로 찍혀져 있다. 대부분의 글씨는 해서인데, 끝에 실린 칠언절구 1수는 초서로 쓰여 있다. 마지막에 대나무와 난초를 그린 그림을 판각한 〈墨竹圖〉, 〈墨蘭圖〉 2종이 있다. |
『仁穆王后御筆』(⇒宣祖御筆)은 그동안 宣祖의 繼妃인 仁穆大妃의 필적을 엮은 필첩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宣祖의 御筆帖이다. 선조가 1603년(선조 36) 11월에 한글로 쓴 병문안 편지, 王勃의 〈滕王閣序〉 일부, 陶潛의 〈四時〉, 작자 미상의 칠언율시 등 4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
(2) 孝宗 : 효종의 글씨는 선조의 글씨를 따라 조선식 송설체를 썼다. 그 뒤에 顯宗에 이르면 효종의 어필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다시 가미하였다. |
규장각에는 효종의 어필로 『寧考御筆』, 『孝宗大王御筆』 등이 있다. 『寧考御筆』(古貴 4251-2)은 1帖(9折)으로, 閔維重(1630∼1687)이 효종의 어필과 거기에 붙인 송시열의 발문 등을 모아 엮은 필첩이다. 寧考는 효종을 가리키는데, 효종의 능호가 영릉이기 때문이다. 권수에 효종의 어필 37자가 실려 있고, 뒤에 송시열의 〈孝廟御筆帖跋〉, 〈廉問條目〉이 수록되어 있다. 효종의 어필은 “副司直 閔維重 慶尙道 聞慶 昆陽 尙州 熊川 開寧 金海 星州 鎭海 高寧 河東 陜川 昌原 晉州 固城” 등 37자로 이루어져 있다. 송시열의 〈孝廟御筆帖跋〉은 『宋子大全』 권146에 수록되어 있다. 1659년 효종을 뵙고 나눈 이야기와 민유중 등을 천거하여 염문의 임무를 맡도록 하고 〈廉問條目〉을 올렸다. 1655년에 민유중이 효종이 내린 御筆封書를 帖子로 만들고자 하면서 발문을 청하기에 저간의 사정을 적는다고 하였다. 부록된 〈廉問條目〉은 지방에 가서 염문할 사항을 적은 글로, “偸竊國穀, 濫率衙眷” 등 18조목이 실려 있다. |
『孝宗大王御筆』(奎 10265)은 1帖(9折 16面)로, 孝宗의 편지를 엮은 御筆帖이다. 편지 4통에 紅線傳과 御物下賜物目記가 수록되어 있다. 편지 중의 3통은 각각 1641년(인조 19년), 1642년(인조 20)에 쓴 편지이다. 물목기는 白唐扇, 白檀扇, 越隣香, 小帽子, 砂糖, 眞梳를 하사한 것이며 하사받은 신하는 밝혀져 있지 않다. 紅線傳은 唐의 紅線金合의 故事를 적은 것으로 암암리에 남의 욕심을 타이르는 내용인데,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기 위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편지는 鳳琳大君 때 쓴 것이기 때문에 ‘淏’를 썼다. 효종은 글씨에 능하였으며 편지 글씨는 松雪體이다. 특히 “連日來見而未卽出接 心甚未安云云”의 편지는 逸品의 草書이다. |
(3) 肅宗 : 숙종의 글씨는 획이 유연하고 가지런하다. 이는 획이 꺾이는 부분이 婉曲하게 돌아가면서 삐침이나 파임도 길고 부드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숙종의 글씨는 경종과 영조에게 이어졌다. |
규장각에는 숙종의 어필첩으로 『唐詩』, 『肅宗大王御筆』, 『肅宗御筆』, 『御製御筆』[2] 등이 있다. 『肅宗大王御筆』(奎 10090, 10091)은 1帖(8折 16面, 零本)으로, 肅宗이 여러 사람에게 준 親筆 詩文을 陰刻하여 찍은 16幅 1帖의 木版本이다. 권수에 ‘四十九’, 권말에 ‘六十四’라는 版次가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1폭부터 48폭까지 3첩이 빠진 落帙로 추정된다. 간년은 미상이지만 각각의 시문 우측 상단에 ‘肅宗大王御筆’, ‘肅宗大王御製’라 刻字되어 있어 숙종 사후 판목에 새겨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49면에는 1699년(숙종 25) 種德齋에서 써서 淑明公主에게 준 五言律詩 1수가 실려 있다. 50면부터 52면에는 延礽君에게 준 칠언절구 등 시문 3편이 실려 있다. 51면에는 연잉군의 질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고 있다. 53면과 54면은 1715년(숙종 41)에 延齡君에게 준 칠언절구 2수가 실려 있다. 55면과 56면에는 영의정 金壽恒(1629∼1689)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왜구를 막는 방책과 병조판서 임명을 상의하는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57면과 58면에는 領府使 南九萬(1629∼1711)에게 준 칠언율시 1수, 59면과 60면에는 칠언절구 2수가 있다. 61면에는 臨昌君에게 준 칠언절구 1수가 실려 있다. 62면에는 ‘孝廟御筆’, 63면과 64면에는 큰 글씨로 ‘飛’와 ‘龍’이 각각 쓰여 있다. |
『肅宗御筆』(奎 11963)은 16幅으로, 숙종이 七言絶句 漢陽八景詩 8수와 중국의 五言詩 8수를 쓴 御筆詩 16폭을 목판에 새겨 찍은 목판본 御筆帖이다. 간년은 미상이다. 그러나 각각의 御筆詩 제1수 우측 상단에 ‘肅宗大王御筆’이라 刻字하고 있어 숙종 사후 판목에 새겨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두꺼운 上品壯紙에 찍었는데 刻劃이 매우 힘차고 굳세면서도 楷正하다. 漢陽八景詩는 서울의 팔경을 읊은 칠언절구로 楷書로 쓰여 있으며, 중국 六朝와 唐宋 문인의 五言詩는 草書로 쓰여 있다. 중국 문인들의 오언시 8수는 작자와 시 제목 없이 原詩만 적혀 있는데, 현재 규장각에는 御筆詩 목판 8장이 소장되어 있다. 漢陽八景詩는 서울의 여러 관청과 동서남북의 좋은 경치 8곳을 읊은 작품인데, 작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鄭道傳의 〈進新都八景詩〉에 나오는 각수의 시작품을 취하여 지은 七言絶句이다. 각각의 시제목은 〈畿甸山河〉, 〈都城宮苑〉, 〈列署星拱〉, 〈諸坊碁布〉, 〈東門敎場〉, 〈西江漕泊〉, 〈南渡行人〉, 〈北郊牧馬〉 등이다. 서울 도성과 여러 관청, 산천과 한강의 풍경 등을 회화적으로 묘사하고, 이를 바라본 흥취를 읊었다. 중국 五言詩 중에서 名篇을 선발하여 쓴 御筆詩 8폭에는 六朝와 唐宋의 시인 7명이 지은 작품 8수가 실려 있다. 선발된 시는 宋나라 邵雍의 〈淸夜吟〉, 唐나라 賈島의 〈尋隱者不遇〉, 六朝 晉나라 吳隱之의 〈酌貪泉賦詩〉, 당나라 王維의 〈鳥鳴磵〉, 당나라 宋之問의 〈途中寒食〉, 당나라 儲光羲의 〈江南曲〉과 〈長安道〉, 당나라 失名氏의 〈伊州歌〉 등이다. 〈古 26260〉에는 숙종의 御筆詩 8폭 중 賈島의 〈尋隱者不遇〉, 王維의 〈鳥鳴磵〉, 儲光羲의 〈江南曲〉과 〈長安道〉, 失名氏의 〈伊州歌〉 등 6폭이 남아 있다. 그러나 王維의 〈鳥鳴磵〉 시가 2폭 들어 있어 실제로는 8폭 중 5폭만이 남아 있다. |
이처럼 숙종은 중국 5언시를 즐겨 썼던 듯하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숙종의 〈오언절구〉를 보면, 제1수는 邵雍의 〈淸夜吟〉이고, 제2수는 儲光羲의 〈長安道〉 둘째 수이고, 제3수는 宋之問의 〈途中寒食〉 첫째 수로 부제는 ‘題黃梅臨江驛寄崔融’이고, 제4수는 沈全期의 〈雜詩〉의 앞 부분이다. 原詩에 ‘黃花’는 ‘黃龍’으로, ‘偏照’는 ‘長在’로 되어 있다. |
『御製御筆』[2](古 3428-357)은 1帖(7折)으로, 숙종이 延齡君(1699~1719)에게 준 七言絶句 4수를 모아 엮은 御筆帖이다. 연령군은 숙종의 여섯째 아들로 5세에 어머니 명빈 박씨를 여의었는데, 孝友가 극진하여 숙종의 사랑을 받았다. 숙종은 연령군이 죽자 祭文과 墓誌文을 직접 지었고, 영조도 즉위한 후에 연령군의 묘에 자주 治祭하였다. |
경기도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肅廟御筆』에는 숙종이 1708년에 延礽君(뒤의 정조)에게 써준 오언절구 2수가 수록되어 있다. 숙종은 사저에 나가 있던 연잉군에게 별궁을 마련해 주고 이름을 彰義宮이라 하였는데, 이에 ‘養性軒‘이란 헌명을 짓고 오언절구 2수를 내리어 이를 나무판에 새겨 처마 안쪽에 걸게 하였다. “연잉군에게 집을 사주었는데 바로 寅平都尉(鄭齊賢)의 옛집이다. 특별히 헌명을 지어 養性이라 하고, 마침내 절구 2수를 나무판에 새겨 처마에 달게 하였다. ‘두 채 처마에 새로 편액을 내리니, 명명한 뜻이 어찌 없으리요. 존양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맹자 진심장을 깊이 음미하라(兩軒新賜額, 命意豈徒然. 欲知存養義, 深玩盡心篇.) 높은 누각 어찌 그리 드넓은가, 예전에 임금 가마도 찾은 적 있다네. 광명전과 아주 가까우니, 때로 올라와 내 마음 달래주거라(高閣何寬敞, 鑾輿昔己臨. 密邇光明殿, 時登慰我心.)’” |
『唐詩』(奎 26260)는 6枚로, 肅宗이 중국의 六朝와 唐宋 시대 문인들의 五言詩를 뽑아 草書로 쓴 목판본 御筆帖이다. 숙종이 글씨를 쓴 시기와 이를 목판에 새긴 시기는 미상이나 동일본인 『肅宗大王御筆』(奎 11963) 御筆詩 제1수 宋나라 邵雍의 〈淸夜吟〉 우측 상단에 ‘肅宗大王御筆’이라 刻字되어 있어 숙종 사후에 판목에 새겨 제작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
『肅宗大王御筆』에는 위의 시 이외에 六朝 晋 吳隱之의 〈酌貪泉賦詩〉, 唐 宋之問의 〈途中寒食〉 등 총 8수가 실려 있다. 현재 규장각에는 숙종대왕어필시 목판 8장이 모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唐 賈島의 〈尋隱者不遇〉, 唐 王維의 〈鳥鳴磵〉(2매), 唐 儲光羲의 〈江南曲〉과 〈長安道〉, 唐 실명씨의 〈伊州歌〉 등 5수 6매이다. |
(4) 景宗 : 경종의 글씨는 숙종의 글씨를 따랐다. |
규장각에는 경종의 어필로 『景宗手筆』이 있다. 『景宗手筆』(奎軸 11961)은 10幅으로, 경종이 東宮으로 있던 9세 때의 글씨를 엮어 만든 필첩이다. 모두 10폭인데, 그중 8폭은 “敬以直內 義以方外”를 壯紙에 한 글자씩 큰 글자로 썼는데, 글씨는 해서이다. 나머지 2폭은 당시의 藝文館奉敎 兼春秋館記事官 世子侍講院說書인 閔鎭遠이 쓴 〈春宮手筆後跋〉이다. |
(5) 英祖 : 영조의 글씨는 해서는 대부분은 蜀體이고 일부 晉體와 蜀體를 합친 것도 있지만, 晉體 풍이 강한 예는 小楷뿐이다. 또 行書에서는 글자의 짜임과 운필이 좀더 부드럽고 자유스럽다. |
규장각에는 영조의 어필로 『敦寧府揭板』, 『御製御筆北苑帖』, 『英祖御筆』, 『宗簿寺揭版』 등이 있다. 그 중에서 『英祖御筆』(古 2410-38)은 1冊(13張)으로, 정조가 1776년 7월에 영조의 어필을 찍어 李最中에게 하사한 어필첩이다. 영조의 어필은 4언과 5언 등의 시구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行草 큰 글자로 쓰여 있다. 내용은 “瑞雪驗豊, 明農登熟. 仍此有祝, 近入親書.”, “朝來心有喜, 尺雪驗豊徵” 등이 큰 글자로 쓰여져 있다. 이어서 “七十六三柳枝”. “江海上一, 洗白紟巾” 등이 초서로 쓰여 있다. 『宗簿寺揭版』(奎 10314)은 1帖(2折 4面)으로, 英祖가 延仍君 때인 1714년(숙종 40)에 20세로 宗簿寺正으로 있었다가 王位에 올라 46년만인 1759년(영조 35)에 왕으로서 璿源寶閣에 다시 들러 世譜를 봉심하게 되자 깊은 감회에 젖어 쓴 글씨이다. 큰 글씨로 “昔年宗正本寺 今日袞衣拜閣”이라 쓰고 계속하여 해서 작은 글씨로 “皇朝崇禎紀元後三己卯 追憶昔年欲爲奉審 聖后世譜 四十六年後 復拜寶閣 是亦料外 涕潛自然”이라고 썼는데 이것을 목판으로 양각하였다. 『御製御筆北苑帖』(奎 9916, 9817)은 1冊(9張)으로, 英祖가 1770년(영조 46)에 창덕궁의 大報壇에 대하여 읊은 詩句를 써서 신하들에게 보여주고, 그에 대한 감상을 쓰게 하고서 詩句에 함께 엮어서 만든 책이다. 영조의 시구는 “北苑尺檀日月明, 西崗小閣風泉銘”인데, 큰 글씨로 한 면에 두 글짜씩 썼다. 여기서 ‘北苑尺檀’은 창덕궁 北苑의 大報壇을 말하며, ‘日月明’은 명나라를 상징한다. ‘西崗小閣’은 大報壇의 敬奉閣을 말하며, ‘風泉’은 『시경』의 편명으로 15國風 중에서 檜風의 〈匪風〉과 曹風의 〈下泉〉을 말하는데, 모두 나라가 쇠미함을 노래한 시이다. 시구 다음에는 徐命膺(1716~1787)의 발문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영조가 자신과 洪啓禧(1703~1771)에게 시구를 보여 주었다고 하였다. 集慶堂에서 영조의 글씨를 보고 느낀 감흥과 영조가 팔순으로 아직도 周道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말하고, 여러 사람들이 이 글을 두고두고 보도록 만들자고 하여 이 책을 짓게 된 과정을 서술하였다. 徐命膺의 문집인 『保晩齋集』에도 이 글이 실려 있는데, ‘臣命膺與臣啓禧’ 중에서 ‘臣啓禧’가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洪啓禧가 정조 즉위 후 삭탈관직된 것과 관계된 듯하다. 글의 말미에 써 있는 ‘崇禎三庚寅 閏五月下澣 資憲大夫行龍驤衛副司直 臣徐命膺 拜手稽首 謹書’도 『保晩齋集』에는 삭제되어 있다. 〈奎 9816〉본은 8장과 9장이 뒤바뀌어 있다. 『敦寧府揭版』(奎 10313)은 1帖(2折 3面)으로, 영조가 1759년(영조 35)에 역대 왕의 御眞을 봉안한 璿源殿에 酌獻禮를 올리고 왕실의 족보를 간직한 譜閣을 살핀 뒤에, 이에 대한 내용을 친필로 쓰고 이를 목판에 새겨 敦寧府에 걸어 놓았던 것을 탁본한 탁본첩이다. 이 첩은 모두 삼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번 접어 제본한 것이다. 표지에 ‘御製御筆敦寧府揭板摹本’이라고 되어 있고, 첩 끝에 ‘皇朝崇禎紀元後三己卯(1759)季夏上旬 書揭南楣’라 되어 있다. 첩의 내용은 “진전에 작헌례를 올리고, 보각을 살피니, 오십 년 동안의 작은 정성을 이제 조금이나마 펴게 된다(酌獻眞殿 奉審譜閣 五十年微忱 今日少伸矣)”의 18자이다. |
(6) 高宗 : 고종의 글씨는 추사체의 영향이 보인다. |
규장각에는 고종의 어필로 『御製懸板帖』이 있다. 『御筆懸板帖』(奎 10293)은 1帖(20折 29面)으로, 高宗이 1885年(高宗 22)에 궁궐 안에 있는 여러 건물의 현판의 글씨를 쓴 것을 모아 놓은 책이다. 한 面에 한 글자씩 大字로 썼는데, 한 面마다 테두리에는 비단을 둘러 장식하였다. 본서에 쓰인 건물은 漱芳齋, 華岳亭, 攬淸軒, 延春軒, 坤寧閣, 長安堂, 觀文閣, 香遠亭, 藕芳齋, 寶蘇堂 등이다. |
(7) 大院君 : 대원군의 글씨는 추사의 제자로 추사체에 가장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 |
규장각에는 대원군의 글씨로 『大院君筆帖』이 있다. 『大院君筆帖』(古貴 3438-13)은 2帖으로, 흥선대원군 李昰應이 쓴 일기와 편지를 모아서 간행한 필첩이다. 필첩에는 1872년과 1873년 무렵에 자신의 생활과 당시의 정세 등에 대하여 적은 일기와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
3) 왕비·종친 |
이외에도 규장각에는 왕실의 서간문이 몇 편이 있다. 예컨대, 대원군 이하응의 편지 『純元王后御筆』, 『純元王后御筆封書』, 『翼宗簡帖』 등이다. 『純元王后御筆』은 純祖妃 순원왕후(1789~1857)가 김흥근·김좌근 등 친정일가에게 보낸 한글 편지 25편을 모아 놓은 書簡帖으로, 宮體筆寫本이다. 내용은 주로 일상적인 문안, 헌종의 승하를 애도하고 철종을 잘 인도하려는 마음 등이 실려 있다. 『純元王后御筆封書』은 純祖妃 순원왕후(1789~1857)가 김흥근 일가 등에 보낸 한글 편지 33통을 모아 놓은 서간첩으로, 宮體筆寫本이다. 내용은 병문안, 먼 길을 갔다온 데에 대한 위로, 김흥근이 유배에서 풀려난 것에 대한 축하 편지 등이 실려 있다. 『翼宗簡帖』은 翼宗이 누이 明溫公主 등에게 보낸 시문과 그 번역문을 모아 엮은 2첩의 필사본이다. 乾卷에는 明溫·福溫·德溫公主 등에게 보낸 시문이 대부분이고, 坤卷에는 〈織錦圖〉와 〈龜文圖〉 등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 앞에 한시 원문과 한글음을 적고 뒤에 번역문을 실었다. | |